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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 여기는 팔공산 가는길
  2005/11/15(화)
  조회: 4
 

팔공산 가는길에 단풍이 너무 아름다워...

아이 ! 가시나들, 사진 좀 잘찍지, 얼굴 시커멓게 찍어가지고 이뿐얼굴 다 조짓네!




       
  Title : 가을은 단풍이 아름답다지만
  2005/11/15(화)
  조회: 2
 

폭포앞에 서있는 나도 이뿌지^^  요~

 

 




       
  Title : 2005년 11월 어느날 여기는 주왕산
  2005/11/15(화)
  조회: 2
 

아침 일찍 나서서 실컷 돌아다니다 집에 왔다.




       
  Title : 동해안 유적답사
  2005/8/23(화)
  조회: 3
 

광~

에미~ㄹ 레

'성덕대왕신종'

지금은 이것이 경주박물관 앞마당에 서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경주읍내 어딘가에 있었는데 매일 종을치면서 시각을 알려 주었다고...

그런데 지금 경주 박물관에 옮겨 오면서 종의 무게를 지탱하던 걸쇠를 무심코 버렸다가 새로만든 걸쇠가 물리학적으로 강도가 더 약하단 것을 알게되어 부랴부랴 다시 원래의 걸쇠를 찾아서 걸었다고 한다.

몇 년 후 포항제철에서 새 걸쇠를 만들 때 까지 예전의 것으로 계속 걸어 두었는데 고대의 제철기술이 1970년대 우리나라 보다 뛰어났다는 얘기다.

문제의 신라시대 그 걸쇠는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철판을 얇게 펴고 그것을 똘똘말아서 환봉으로 만든 것 이라고 하는데 몇 백만근의 무게를 메달고도 천년을 견디어 냈으니 오늘날 과학자들이 과연 본 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에밀레종 옮길 때의 이야기

경주 법원 뒤쪽에 있는 구경주박물관에 있던 에밀레종을, 1975년 이른 봄부터 6월까지 새로 지은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때의 숨은 얘기는 소불선생(당시 경주박물관장 정양모씨)이 "이제야 털어놓는 에밀레종 옮길 때의 이야기"(한국인 1985년 11월호)에 그 일부를 써놓은 바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당시 경주박물관장을 지내고 있던 소불선생은 이 위대한 종을 무사히 옮겨 거는 일, 거기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일로 무척 고심했다고 한다. 다시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이 신종에 어떤 손상이 간다는 것은 영원한 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에밀레종을 새 박물관으로 옮기는 일은 대한통운이 맡았다. 에밀레종은 높이가 3.7m, 무게가 22톤이다. 이것을 운반하기 위해 포장을 하니 높이가 5m, 무게가 30톤이 되었다. 이것을 트레일러에 올려놓으니 또 6m가 넘게 되고 트레일러 무게와 합치면 50톤이 넘게 되었다.

28톤 강괴를 빌려주시오

소불선생은 이렇게 에밀레종을 신관 새 종각에 옮겨다 놓았지만 이제는 이것을 안전하게 거는 일이 태산 같은 걱정이었다. 종각이 부실공사가 아닐까 걱정도 되고 공사자들이 신식기술을 너무 과신하거나 옛 유물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종고리가 휘어 부러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불선생은 고심 끝에 포항제철에 강괴 28톤을 빌려 시험적으로 달아보고자 공문으로 요청했다. 그것은 만용에 가까운 것이었다. 포철은 강괴를 외부로 내준 일도 없고, 강괴를 운반하는 비용만도 상당한 액수였다. 그러나 소불선생은 그저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다시는 못 만드는 문화유산이라는 말로만 몇날 며칠을 설득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안될 일도 되게 하는 길은 실무자를 잘 알면 되는 것인데, 일이 되려고 했는지 포철의 한 실무간부가 소불선생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포철은 강괴 28톤을 빌려주고 대한통운에서는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중기계장 이용일씨, 작업반장 김창배씨 등 여러분이 작업비도 받지 않고 거기에 옮겨 걸어 주었다.

소불선생은 에밀레종 무게보다 6톤의 여분으로 28톤을 빌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22톤의 하중을 견디는지 시험하려면 44톤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람에 움직이기 때문에 정지된 물체보다 두 배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불선생은 아침 저녁으로 강괴를 흔들어보았다. 시공자 공영토건 공사장은 6톤을 더 얹었다고 불평하면서 이 시험 자체를 불쾌해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소불선생은 아랑곳없이 틈만 나면 종을 치듯 흔들어보았다.

이레째 되던 날 아침, 경비원이 소불선생을 찾아 뛰어왔다. 종고리가 휘어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열흘이 되니 곧 떨어질 것 같아 강괴를 내려놓았다. 소불선생은 휘어지고 벌어져 추한 모습이 된 종고리를 떼어들고는 부르르 떨었다고 한다. 소불선생은 그것을 상자에 담아 고속버스에 싣고 서울로 올라와 국립중앙박물관장실에 풀어놓고는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어이없는 일로 지체높은 분들이 모였다. 문화재관리국장, 공영토건 사장, 원자력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를 조직하여 실수없이 하기로 했다.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는 원자력연구소의 김유선박사, 금속실장 황창규선생 등 과학자와 소불선생 등 박물관 관계자로 구성되었다. 종고리위원회는 먼저 일그러진 고리를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업회사에 가서 시험해보니 연구관 하는 말이 "이 쇠는 똥쇠(똥철)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종고리만이 아니었다. 종을 걸 쇠막대기도 22톤 하중을 잘 지탱해야 한다. 황실장은 이 쇠막대기는 특수한 강철을 사용하여, 황실장이 지정하는 실력있는 공장에서, 황실장의 지시에 따라 최소한 직경 15cm가 되는 철봉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휘지도 구부러지지도 않는 것을 만들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생겼다. 에밀레종 머리에 쇠막대를 끼우는 부분은 용틀임을 하는 형상으로 그 용허리에 가로지르게 되어 있는데 이 구멍은 지름이 9cm도 안되는 것이었다. 최상의 질로 15cm 밖에 안된다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황실장은 고민 끝에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오직 한 방법, 와이어(철사)로 계속 말면 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허나 그래서야 종을 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황실장은 "관장님, 그전에 매단 쇠막대기 있습니까?"하고 물어왔다. 소불선생이 창고에서 그것을 꺼내 보여주었더니 황실장은 득의만면하여 " 이것이라면 안전합니다"라는 것이었다. 현대공학의 기술로는 15cm 쇠막대기 이하로는 안되지만 이것은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옛날 쇠막대기는-그것을 신라시대에 만들었는지 조선시대에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여러 금속을 합금해서 넓고 기다란 판을 만들어 두드리면서(鍛造) 말아서 만들었으니 와이어가 분산된 힘을 결합하듯 만든 형태라는 것이다. 강하면 부러지기 쉽고 연하면 휘기 쉬운데 이렇게 만들면 강하면서 부드러워 휘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종고리위원회는 에밀레종 종고리에 끼울 쇠막대기를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공학박사들이 말하는 신비한 얘기들

그러고 보면 20세기에 에밀레종 복제가 불가능한 것은 정성의 부족뿐만이 아니라 기술부족이라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컴퓨터를 만들고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은 발달했지만 청동주물 솜씨는 그 옛날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쩌면 경험과 필요에 의한 기술의 축적과 과학적 사고란 발전이 아니라 변화일 따름인지도 모른다.

에밀레종 몸체에는 종고리인 용머리의 방향과 같은 축으로 둥그런 연꽃무늬 당좌(撞座)가 양쪽에 새겨져 있다. 종을 칠 때는 반드시 여기를 쳐야 제 소리가 난다. 조금만 어그러지거나 비껴가도 안된다. 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모든 문양, 비천상, 명문의 서(序)와 사(詞), 어깨에 새긴 종젖꼭지(鍾乳), 입부분의 보상당초문 등이 이 두 당좌를 축으로 하여 좌우대칭을 취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1963년 2월, 원자력연구소 고종건, 함인영 두 박사팀이 삼국시대 불상과 범종을 특수촬영(감마선 투과촬영)하여 과학적으로 규명한 것이 '미술자료' 제8호, 9호에 실려 있는데 이 두 박사는 당시 어떻게 그렇게 얇은 주물이 가능했고, 깨끗한 용접이 가능했고, 주물에 기포(氣泡)가 없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에밀레종에도 물론 기포가 없다. 남천우 박사의 '유물의 재발견'이라는 명저에는 우리나라 범종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장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그의 견해에 의하면 에밀레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되었다. 중국종, 일본종이 만형법(挽型法) 또는 회전형법으로 제작된 것과는 큰 차이이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조선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기법의 차이에서부터 유래한다.

이 기법의 차이는 곧 형태와 소리 모두에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종 몸체에 그와 같은 아름다운 문양을 새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긴 여운을 내지 못한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에 의하면 몇 해 전 일본 NHK에서 세계의 종소리를 특집으로 꾸민 적이 있는데 에밀레종이 단연 으뜸이었다는 것이다. 장중하고 맑은 소리 뿐만 아니라 긴 여운을 갖는 것은 에밀레종 뿐이라고 한다. 남천우 박사가 주장한 바, 에밀레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되려면 22톤의 쇳물, 감량 20-30%을 계산하면 약 25~30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명문에 12만 근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당시 225g을 한 근으로 계산해보면 약 27톤이 되니 맞는 얘기가 된다.




       
  Title : 동해안 유적답사
  2005/8/23(화)
  조회: 1
 

2005년 7월 더운데...

경주에 갔다.

일본 여고딩들 하고 기념으로 한컷...




       
  Title : 영남제일문
  2005/7/15(금)
  조회: 7
 

LG 폰카 130만 화소

노는날 심심해서 망우당 공원에 갔는데 ...

이게 원래는 대구읍성(지금의 서성로)에 있었던 건데, 일본놈쌔끼들이 읍성과 함께 철거해 버렸다.

지금은 1960년대 이후 다시 복원한 것 인데 사진 한장보고 만든것 이라 한다.  

분통이 터진다.




       
  Title : 셋이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
  2005/7/9(토)
  조회:
 

 

 

2001년 만추, 후배 재선과 함께 팔공산에 올랐다.

거기서 팔공산 산신령을 만났는데 때깔도 좋다고 하면서 한방 박으라길래...

좌할배산신령 우할매산신령 두분께서 포즈를 취해 주셨당 ^^

 



       
  Title : 박엄지
  2005/7/8(금)
  조회: 45
 

 

 

2001년 운문사에서, 우리깡세이...

 

아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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