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ㅠㅊ8937
2017/7/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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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은 천부경 위작  
보충자료2010-09-04 15:21:54
玉川趙氏 탐구 - ‘고려말 충신 5은’중 農隱(농은)은 어느 분이 진짜인가 
[칼럼기고] 
[조한규의 알기 쉬운 족보 이야기] 玉川趙氏 탐구 - ‘고려말 충신 5은’중 農隱(농은)은 어느 분이 진짜인가 
2009-04-23 오후 3:58:20 >> 순천신문의 다른기사보기 






▲ 전북 순창군 유등면 건곡리 소재, 고려말 충신 '農隱(농은) 조원길의 묘'



인터넷에서 ‘農隱(농은)선생’을 검색하면 ‘농은 선생의 천부경’ 또는 ‘농은 민안부’ 등이 뜬다. 

6隱(은)이 소개되면서 그 중 한 분으로 농은 민안부의 이름이 나와 필자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옥천조씨 중시조 농은 조원길 선생이 고려말 충신 5은이 아니란 말인가.

경남 산청군에선 ‘농은 민안부’가 고려말 충신으로 기려지고 있고, 각종 블로그나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농은 민안부’로 소개되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과연 고려말 충신 농은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무엇인가.

사료(史料)를 추적해보았다. 조원길 선생과 민안부 선생 중 누가 진짜 농은인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려말 충신 농은’에 대한 혼선이 빚어진 것은 민안부의 후손 민홍규씨 때문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민씨는 2000년 1월 17일 자 '뉴스피플'의 '민홍규의 우리문화일기 - 나무에 뿌리가 없다' 는 글에서 “필자의 가문에는 목은, 범세동 등과 함께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농은 민안부 어른이 남긴 천부경이 전해진다. 

그간 천부경은 고본(古本)이 존재하지 않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그 난해성 때문에 강단 사학계에 의해 위.개작(僞.改作)되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고 밝힌 데서 비롯되었다. 

즉 상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었던 이른바 ‘농은유집 천부경’이 이처럼 민씨에 의해 소개되면서 ‘농은=민안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농은유집 천부경’의 고본(古本)은 아직까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이 ‘농은유집 천부경’이 고려말 진본이라면 국보급 보물에 해당한다. 

민씨로부터 처음 이 자료를 접한 상고사학자 송호수 박사는 그만 감격해서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농은유집 천부경’이라고 세상에 발표하고 말았다.

물론 당시 송 박사는 이 자료를 완전히 해석하지 못했다. 언어학자 박대종씨가 비로소 이 ‘농은유집’을 해석했다. 

박씨는 이 ‘농은유집 천부경’을 ‘은문천부경(또는 갑골문 천부경)’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최근 박대종씨는 이 ‘농은유집’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주장을 들어보면 이 ‘은문천부경’은 ‘위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박씨는 그동안 수차례 걸쳐 민씨와의 면담을 추진했으나 민씨가 피하고 있다고 한다. 

또 민씨가 소장해온 고본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일본의 한 기관으로 감정을 받았다는 ‘전문감정서’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농은유집 천부경’이 고대 전서의 어법에도 맞지 않고 5곳에 서 틀린 글자가 나온다고 한다.

이처럼 위작일 가능성이 높은 ‘농은유집 천부경’으로 인해 마치 고려말 충신 농은 선생이 민안부 선생인 것처럼 세상에 알려진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물론 민안부 선생도 ‘농은’이란 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호는 조선시대 사용한 것이고 고려시대에는 ‘소암(素岩)’이란 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여흥 민씨 족보에도 실제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박씨는 필자의 문제제기에 따라 ‘농은’에 대한 자료조사를 했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홈페이지(hanja.co.kr, hanja.com)를 통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고려조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낸 민안부(閔安富) 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서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그 뒤 산음현 대포동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하면서 '農隱'이라 자호하였습니다. 

스스로 '농은'이라 호를 짓기 전의 호는 '소암(素菴)'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농은'이란 호는 고려말이 아닌 조선조 이후에 지어진 것이므로 '고려말 5은'이라 할 때는 민안부 선생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중략...포은 정몽주 등과 함께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玉川부원군에 봉하여진 조원길(趙元吉) 선생은 나라의 인심이 이성계에게로 돌아감을 보고 장차 고려가 망할 것을 알고 불사이군이라 하며 모든 관직을 버리고 귀향, 청절(淸節)을 지키다가 조선이 건국되기 2년 전에 별세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려말 5은"이란 말을 쓸 때, 그 안에 '농은'이 들어갈 경우 그 때의 농은 선생은 바로 조원길 선생을 지칭하는 것이니 혼란이 없어야 합니다. 

출처 하나를 언급하면, 性潭先生集 권16의 축문입니다. 그 글에는 고려말 5은과 관련하여 농은 조원길 선생을 지칭하는 대목["五隱其稱"]이 나오는데, 성담선생이 지은 축문의 제목은 "淳昌武夷書院奉安薛文良文肅趙農隱文"입니다. 

정리하면 '고려말 5은'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야은 길재(冶隱 吉再), 도은 이숭인 (陶隱 李崇仁), 목은 이색(牧隱 李穡), 농은 조원길(農隱 趙元吉) 선생을 말합니다.”



민안부 선생도 훌륭한 분이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제대로 소개되어야 한다. 

왜곡이 돼서는 안 되지 않는가. 민안부 선생이 산청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소암’이란 호대신 ‘농은’이란 호를 사용한 것은 평소 농은 조원길 선생의 순창 은거를 흠모했기 때문이 아닌가.

사실 민안부 선생은 농은 조원길 선생보다는 어리다. 그가 조원길 선생의 둘째아들 조유 선생과 함께 두문동 72현에 속해 있었던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조원길 선생의 학식과 인격을 흠모한 민안부 선생이 산청에 은거하면서 ‘농은 조원길’의 ‘농은’이란 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이 돌아가신 뒤 그분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그분의 호를 사용한 사례가 적지 않다. 아무튼 옥천 조씨 중시조 조원길 선생이 ‘고려말 충신 5은’ 중 한 분인 것만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 옥천 조씨의 가훈



농은 조원길 선생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옥천 조씨 가훈(家訓)을 보아도 농은 선생의 학식과 인격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를 보면 농은 선생은 ‘생사진퇴 무괴의자(生死進退 無愧義字)’라는 가훈을 후손들에게 남겨줬다. 

‘생사진퇴 무괴의자’는 ‘죽고 살고 나아가고 물러가는 하나하나의 동작에는 의리라는 글자의 뜻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농은 선생 이후로 수많은 조씨 후손들은 이 ‘의(義)’를 삶의 핵심 키워드로 삼았음은 물론이다. 옥천조씨가 충신-열사를 많이 배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단종복위운동■임진왜란 의병활동■구한말 의병운동■항일독립운동■ 민주화투쟁에서 수많은 옥천조씨들은 오직 義에 살고 義에 죽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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