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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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조선의 北界  

 

[펌]조선의 北界

 

잘 정리 된 자료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때는 淸나라가 생기기전 고려말 신흥국 明나라와 고려간에 밀고 땡기는 상황입니다.

 

철령을 기준으로 高麗와 明과의 국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고려말 우왕은 최영과 함께 이곳에 와서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때 이성계가 반대를 하고 쿠데타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후 청나라가 들어설 때 까지 조선의 강역은 아래지도와 같이 1만리 강역으로 되었습니다.

 

淸나라는 자기들 시조가 나라를 일으킨 옛터(장백산  -장백산 조금 북쪽에 백두산이 있는 것으로 지도에 나온다-) 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목책을 놓고 봉금령을 내리게 됩니다.

 

 

 

 

지도출처 :  역사수첩 

 

 

 

明史 조선 만주강역 직접사료 발굴: 만주 철령시의 명明 철령위가 곧 조선과의 국경


 
 


그림 1. 요녕성 철령시 현재 지도


위키피디아의 철령시 지세地勢로 보면 대체로 동고중저東高中低、북고남저北高南低、서부초고西部稍高이고 동서양측은 산지와 구릉이 있다.


대체로 봉집현奉集縣추정지 일대인 범하泛河(=汎河)상류일대가 하천이 흘러내려오는 산기슭이 됩니다.


<초고稍高 : 완만히 높아지는 지세>

 


그림 2.  요계관방도 상의 청나라 당대의 현 철령시 일대 고지도


당 요계관방도는 숙종년간인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이이명의 <요계관방도>를 모본으로 후대에 이를
그린 사본으로 광여도에 포함된  지도입니다. (18세기후반~19세기 사이 제작추정)
[ 의로성懿路城, 범하성范河城, 철령鐵嶺, 요하遼河, 범하泛河등이 명기되어 있다. ]


명사明史 를 찾다보니 드디어 조선왕조가 남만주를 아우른 대국이었음을 직접 명시한 사료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결정적인 사료를 그동안 모르고 지나쳐 이제야 보게 되었는지 안타깝습니다.
늦었지만 이제 조선의 만주지역강역을 밝힌 명나라때의 조선의 북계의 명확한 지명과 위치 하나가 완전히
드러난 것으로 이를 기준으로 고려말과 조선전기의 모든 지명들을 추적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명明 철령위鐵嶺衛에 대한 소개내용입니다.

 

옛 은주古嚚州인 명明 철령위鐵嶺衛치소와 철령위 산하의 의로성懿路城과 범하성范河城,봉집현奉集縣등이 언급되면서 그중에 치소 동남의 봉집현奉集縣에 명明이 초기 철령위鐵嶺衛 치소를 설치하였고  이곳이 바로 조선과 국계를 이루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무순撫順 북쪽의 '봉집현奉集縣' 이 위치하는 범하范河(=범하汎河)일대가 조선朝鮮으로 들어가는 국경 관문임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첨언: 명-청때는 범하范河 혹은 범하泛河라 하였고 지금은 범하汎河라 한다>


>> 본문인용

 

" (철령위鐵嶺衛) 동남으로는 봉집현奉集縣이 있으니 바로 옛 철령성鐵嶺城-철령위鐵嶺衛사건의 무대-으로 고려高麗와 국경을 접한다. 홍무洪武<1368~1398년> 초엽에 현縣을 두었다가 폐지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고려高麗는 조선전기에 쓰이던 조선왕조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대하던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명을  명으로부터 인가받았지만 주변의 나라들은 고려高麗라는 명칭을 애용하여 조선왕조실록등의 다양한 사서에서 보듯이 임진왜란때까지도 왜국이나 명나라측은 물론 조선에 복속되어있던 려진부족들까지 고려高麗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철령위鐵嶺衛의 옛 치소와 현 치소의 고려말엽에 불리우던 원래 지명들이 언급되어 나오는데 이는 더 충격적인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봉집현奉集縣은 바로 옛 철령위鐵嶺衛치소로  고려말의 우왕의 요동정벌의 요인이 되었던 고려말기의 철령위鐵嶺衛 사건의 무대가 되는 것이고 이는 바로 1388년(우왕 14)-홍무 21년- 3월 당시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장군께서 상소하여 왕명으로 명의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고려땅 철령-옛 철령인 봉집현奉集縣-을 비롯한 고려의 양계(兩界)에 침입해 위소를 설치하여 주둔하려던 자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그 수장인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은 강계에  구류하도록 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또한, 명明나라때 주원장에 의해 당대에 철령위鐵嶺衛치소로 새로이 지정되어진 후 계속 유지되었던 곳은 원래 고려말의 은주嚚州땅임을 명사明史는 명기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은주嚚州는 어느 사서에서도 더 이상 기록이 나오지 않지만 철령鐵嶺위쪽의 고려지명을 고려해 고려사를 참조하면 바로 은주嚚州의 원래 지명은 고려의 반역도  최탄(崔坦)등에 의해 대원 울루스에 함몰된 서경외 60주중 하나인 은주殷州로 보아야 함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 동사강목 제10하    병신년 고종 23년(송 이종 단평 3, 몽고 태종 8, 1236)

 

○ 6월 몽골이 다시 변경(邊境)을 대거 침입하였다.

 

○ 5일(경인)에 몽골 군사가 의주강(義州江)을 건너서 8일(계사)에 유병(遊兵)이 가주(嘉州)에 이르렀고, 10일(을미)에는 안북부(安北府) 운암역(雲巖驛)-지금은 미상-에 둔쳤는데,  가주(嘉州)와 박주(博州) 사이에는 화기(火氣)가 하늘에 닿았었다. 또 선주(宣州) 형제산(兄弟山)-지금은 미상-의 들에 나누어서 둔친 것이 대개 17군데였다. 11일(병신)에는 드디어 자주(慈州)ㆍ삭주(朔州)ㆍ귀주(龜州)ㆍ곽주(郭州) 등 여러 고을에 둔쳤으며, 13일(무술)에는 선봉이 황주(黃州)에 들어왔으며, 15일(경자)에는 신주(信州)ㆍ안주(安州)에 이르렀다. 모든 도(道)의 산성에 방호별감(防護別監)을 나누어 보냈다.

 

○ 추7월 몽골 군사가 개주(价州)에 이르니, 중랑장 명준(明俊) 등이 복병하였다가 쳐서 패배시켰다.

 

○ 8월 몽골이 자주(慈州)를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남경(南京)에 주둔하였다.

자주 부사(慈州副使) 최경후(崔景侯), 판관 김지저(金之佇), 은주 부사(殷州副使) 김경희(金景禧) 등이 모두 피살되고, 몽골 군사의 유기(遊騎)가 사방에서 나와 노략질하여도 막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진군하여 남경(南京)ㆍ평택ㆍ아주(牙州) 등처에 둔(屯)쳤으며, 온수군(溫水郡) 에서 남하하여 차현(車峴)으로 향하였다.   //

 

조선은 만주 철령시일대의 옛 철령위 치소인 봉집현奉集縣과 인접하여 개국초부터 바로 명의 철령위鐵嶺衛와 범하泛河(=汎河)상류일대에서 서로 국계를 마주하고 있었으며 또한 당금의 혼하를 조선의 압록강으로 하여 현 혼하를 따라 국계를 나누어 명나라와 국경을 마주하였던 것입니다.


[사료원문]

 

명사明史 / 지志 / 第十七  지리地理 二 /  철령위鐵嶺衛

 

철령위鐵嶺衛는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홍무洪武 21년(1388년) 3월, 옛 철령성鐵嶺城에 치소를 세웠다.


홍무洪武 26년(1393년) 4월, 옛 은주古嚚州 땅으로 치소를 옮기었다. 바로 현재의 치소治所이다.
서쪽으로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으로는 범하泛河가 있으며 다시 남으로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다 요하
遼河로 유입되어 들어간다. 


또한, 남쪽으로 의로성懿路城이 있으며 홍무洪武 29년(1396년)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또한,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철령위鐵嶺衛-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범하성泛河城이라고도 말한다. 명明 영종英 주기진宗朱祁鎭 정통正統 4년(1439년)에 범하천호소泛河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으로는 봉집현奉集縣이 있으니 바로 옛 철령성鐵嶺城-철령위鐵嶺衛사건의 무대-으로 고려高麗와 국경을 접한다. 홍무洪武<1368~1398년> 초엽에 현縣을 두었다가 폐지하기에 이른다.

또한, 함평부鹹平府가 있으니 다이온 울루스<大元國, Dai Ön Ulus>때의 직례요동행성直隸遼東行省이다.

 

다이온 울루스<大元國> 혜종惠宗<이칭 순제順帝> 지정至正 2년(1342년) 정월에 항복하여 현縣이 되었으며 홍무洪武 초엽에 폐지되었고 남南으로 도사都司-치소治所 요양현遼陽縣-와의 거리는  240리 떨어져있다.

 

鐵嶺衛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
西有遼河,南有泛河,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
懿路千戶所於此。又范河城在衛南,亦曰泛河城,正統四年置泛河千戶所於此。東南有
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尋廢。又有鹹平府,元直隸遼東行省。
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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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자료 :  고려高麗-명明 의 철령위 공방 상세일지


1. 철령위공방 - 요동정벌결정까지 고려조정의 대응


○1368년(공민왕 17년) 명明 홍무洪武 초初년 원元 심양로瀋陽路를 폐지廢함(후에 심양중위瀋陽中衛 설치)


○1371년(공민왕 20년) 명明 홍무洪武 4년 정료도호부定遼都護府 설치


○1375년(우왕 1년) 명明 홍무洪武 8년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로 고침.
                        주현州縣은 폐지되고 25개의 위衛를 설치함.


○1387년(우왕 13) 12월에 명조정은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요동(遼東)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결정함.


○1388년(우왕 14) 홍무 21년

 

1)  1월 :  고려의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의 수장 강계만호(江界萬戶) 김완가(金完哥)의 명明 투항 <관련문헌 : 고려사>

 

-  1월 고려의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의 수장 강계만호(江界萬戶) 김완가(金完哥)가 고려조정을 배신하고 만호부萬戶府 치소 봉집현奉集縣을 들어 명明에 바치고 투항함.


-  강계만호(江界萬戶)의 투항으로 고무된 주원장이 당대의 요하인 현 난하로부터 고려 강계만호부(江界萬
戶府)치소인 봉집현奉集縣-현 철령시 동남일대-까지  현재의 난하鸞河 ~ 현재의 혼하渾河에 이르는 지역을 명明의 강역으로 빼앗고자 봉집현奉集縣일대에 철령위鐵嶺衛설치를 결정.  


2)  2월 :  명의 철령위鐵嶺衛설치 통보

 

-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요동도사가 이사경(李思敬)을 보내 철령일대와 해당 군민(軍民)를 개원(開原)관할로 한다는 명 황제의 방을 붙임.


“호부가 황제의 명을 받드노라.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의 관할이니 여기에 속해
있던 군민(軍民)ㆍ한인(漢人)ㆍ여진ㆍ달달ㆍ고려는 종전과 같이 요동에 속한다."

 

- 고려조정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과 수문하시중 이성계와 판삼사사 이색(李穡)등 여러 재상등이 모여 철령위가 설치되는 강계일대를 내놓으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측의 일방적인 통보에 대해 명明 정료위(定遼衛)를 정벌할 것인지 명과 화친할 것인지를 의논함.

 

- 명明의 수도 남경에서 돌아온 고려사신 설장수(偰長壽)가 황제의 요구사항을 받아옴
  그 요지는 고려가 보낸 종마(種馬)가 형편없다고 질책하고 무역하는 상인등을 이용해 대창(大倉)을 염탐하
는 것을 경고하면서 철령(鐵嶺) 이북을 원나라때처럼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뜻이었다.


3)  3월 :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옛古 철령성鐵嶺城에 철령위鐵嶺衛설치

-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의 급보 : 강계내에 범월한 명군이 철령위 설치중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의 요동 도사(都司)가 파견한 지휘(指揮) 두명이 군사 1천을 대동하고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며 요동(遼東)에서 철령위(鐵嶺衛)까지 역참(驛站) 70개소를 설치하고 있다.

 

- 우왕은 명明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정벌을 결심하고 신하들이 요동을 치려는 그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리 되었음을 책망하고 팔도의 군사를 징집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은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사열함.

 

- 명明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가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어 철령위 설치를 최종 통보하고 전쟁을 결심한 우왕은 병을 칭탁하고 백관에게 명해 교외에서 맞이하도록 함.

 

- 판삼사사 이색(李穡)이 백관을 거느리고 사신 왕득명(王得明)을 맞이해 마지막으로 고려 조정의 입장을 말하고 황제를 설유하기를 사신 득명에게 요청하지만 사신 득명은 불가하다고 함.


“천자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요."

 

- 고려 북방의 양계(兩界)에 침범한 명군을 몰아내고 수장등 5인을 제외한 사로잡은 포로들을 척살하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이 사신의 말을 우왕에게 아뢰고, 명의 요동 군사로서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
(兩界)에 이른 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하고 그 수장인 이사경(李思敬) 등 5명만은 살려서 강계지방에 구류함. (죽은 명군이 모두 21명)

 

- 우왕이 사냥한다 일컫고 요동정벌을 수행하고자  서해도-현 요령성 혼하이남지역 -로 행차.
경자일에 우왕이 경내의 죄인을 용서하고, 드디어 서해도로 가는데 영비(寧妃)와 최영이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찬성사 우현보에게 명하여 경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서쪽으로 해주 백사정(百沙亭)에서 사냥한다고 일컬었는데, 실상은 요동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4)  4월  :  사냥을 명분으로 국경인 봉주(鳳州)-고려의 강계만호부-를 살펴보고 문하시중 최영, 수문하시중 이성계에 요동정벌을 명함.

 

- 여름 4월 1일 을사일에 우왕이 봉주(鳳州)-현 요녕성 개원,철녕등 일대-에 머물면서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과 수문하시중 이성계를 불러 “요양(遼陽)을 치려 하니 경 등은 힘을 다하여야 한다." 하며 요동정벌을 명함.

 

 

 

 


 

추가로 요령성 지도를 덧붙입니다. 


고려의 강계만호부치소였던 현 철령시의 만주지역내에서의 위치를 보면 조선총독부와 해방후에도 조선사
36권만을 떡주무르는 식민사학자들이 얼마나 역사강역을 터무니없게 축소 왜곡하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이 지도상의 거의 대부분이 몽골제국의 침탈전 고려왕조의 강역이었습니다.


실제 분계선은 혼하남쪽으로 동북에서 남서쪽으로 기울어 비스듬하지만 단순히 넓이로만 본다면 지도상의
요령성의 서쪽절반은 충숙왕이 다이원울루스의 대칸의 신임을 받아 봉지로 돌려받았던 빼앗긴 고려땅의 일부입니다.


즉,  대략 혼하를 따라 지도상의 요령성의 서쪽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해산海山(武宗)을 대칸으로 등극시킨
공로로 1308년 심양왕(瀋陽王)으로 처음 봉해진 충숙왕의 통치강역이고 요령성의 동쪽절반은 고려의 북계 입니다.

이로서, 충숙왕때는 잃어버린 고려땅을 상당부분 되찾았고 충숙왕은  심양왕(瀋陽王)과 고려대왕의 이중의 지위를 누리며 다이원울루스의 조정에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관련지도

 

 

 

 

 

 

 

 

 

 

 

 

 

 

 

 

 

 

 

 

 

 

 

 

 

 

 

 

 

지도출처 :  구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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