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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2)  

 

     
우리민족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2)
국토를 잃으면 역사도 잃어
2009년 10월 29일 (목) 00:01:04 새마갈노 webmaster@eswn.kr
 

  고려말의 역사인식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오천년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고려 말과 근세조선초의 지배계급의 인식이었다. 그들은 우리민족의 역사의 기원을 임검단제壬儉旦帝(단군檀君이라고 부르고 있다)께서 아사달阿斯達에서 단旦(단檀 또는 고조선古朝鮮이라고 부르고 있다)이라는 나라를 건국한 기원전 2,333년을 기년紀年으로 했던 것이다. 서기 2,006년은 단기 4,309년이다.


  그런데 근세조선 초에서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민중들의 역사인식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600년 전의 인식보다 훨씬 줄여서 삼천년 정도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서구의 문화가 동양으로 전파되면서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가치 인식과 사고 체계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체계가 객관성과 실증에 바탕을 두게 되었기 때문에 대대로 이어져온 역사기록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사실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반화되어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도 고고학의 비중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중국의 제도권사학자들도 그들의 역사를 3,000년 정도로 추정하다가 하상주단대공정을 거친 후 서기 2,000년대에 이르러 4,000년 정도로 수정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이후 아무런 의심없이 사용했던 단기(檀紀)를 근거가 없다고 사용하지 않았고, 역사학계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오늘날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우리민족의 고대사와 상고사가 한반도와 만주(중국의 동북삼성)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신하고 있는데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기원전 2,300년대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기원전 1세기의 특징적인 유적 또는 유물을 발견할 수 없어 신라 ․ 고구려 ․ 백제의 건국시기가 기원전 1세기였다고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그 진위가 의심된다고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고려 왕조가 국책사업으로 공들여 편찬한 삼국사기의 내용이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은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유적과 유물이 고대사와 상고사를 기술하고 있는 역사서의 내용을 사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지 못하는 사정은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없고, 중국 또한 기원전 2,000년대부터 기원전 1,000년대의 이른바 하 ․ 상 ․ 주(夏商周)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


  고대의 유적과 유물이 한 ․ 중 ․ 일의 역사서의 기록을 사실로 입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정립할 수 있다.


  우선 고대사와 상고사를 기술한 역사서에 심각한 오류가 있거나 아니면 거짓 기록이 실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가설 1>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만일 역사서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대 및 상고시대의 한 ․ 중 ․ 일의 각 나라들의 강역이 지금 우리가 추정하고 있는 지역과 다를 수 있다는 가설<가설 2>이다. 우리는 <가설 2>에 주목해야 한다.


  일제와 청의 역사왜곡 


  우리나라 역사가 왜곡되어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민중의 의식은 최근의 사안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한제국을 침략하기 위해 우리민족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고 조작했고, 청淸도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단군과 고조선의 실체를 부정했고, 고대에 왜倭가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했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조작 유포했고, 우리민족의 고대사와 상고사의 역사서를 강제 수거해 없애버렸다. 고구려 광개토경호태왕廣開土境好太王의 비문碑文을 변조했고 평양의 유물출토와 관련된 유물을 날조했다.


  근세조선을 속국화하려던 청도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漢四郡이 있었다는 이른바 한사군설을 조작 유포했는데 한사군이 존재 했었다는 한대漢代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제도권 사학자들은 일제가 날조한 역사관과 청이 조작한 허무니 없는 역사의 가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민족이 정치적으로는 외세로부터 광복되었지만 문화와 역사는 아직도 광복되지 못한 상황이다.


  일제와 청의 역사 조작과 왜곡은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러한 역사관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일제가 철저히 계획된 공작에 의해 우리민족을 파탄시킬 뻔했던 식민사관이라는 독충을 번식시켰던 온상은 다름 아닌 반도사관이었다.

  그런데 이 반도사관이야말로 대륙의 영토를 상실한 근세조선과 고려와 근세조선의 강역을 강점한 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결국 반도사관도 조작된 역사관이며 그 공동정범은 근세조선과 명이었던 것이다. 반도사관은 근세조선 중기이후 우리민족의 고대 역사가 한반도와 만주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타성적 집단무의식에 철저하게 기생해왔다.


  우리에게 지금 전해지고 있는 어떠한 고사서에서도 반도사관이라는 허구와 억지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구절구절에서 대륙사관의 뼈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기록으로 뒷받침되는 우리민족의 역사는 오천년이 아니라 만년이다. 서기 2,006년은 환기 9,205년이다. 화하족華夏族의 전통이 이어진 중국의 역사는 청구국의 제후였던 헌원을 시조로 하면 5,900년이고, 대륙에 있던 고조선의 제후국 삼도三島의 전통을 계승한 일본의 역사는 4,100년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민족의 역사는 환亙(전7,199-전3,989), 배달倍達(전3,898-전2,707), 청구靑丘(전2,707-전2,333)를 거쳐 고조선(전2,333-전232)을 거치고 북부여(전238-전58), 고려(고구려)(전58-668), 발해(668-926), 신라(전57-935)로 계승되다가 고려(918-1,392)로 이어왔다.

  역사가 왜곡되고 조작될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하는 시기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는 시기이다.


  고려는 짧지 않은 세월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몽골은 당시 화하족의 국가인 송宋을 멸망시켰고, 서역제국을 정벌했다.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통치했던 몽골은 그들보다 오래고 우수했던 고려의 전통과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고려를 그들에게 복속시키려 했으므로 찬란한 고려의 역사전통이 훼손되었음은 물론이다.


  고려 말에 이르러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지배계급은 고조선의 역사를 재조명하면서 국민의 의식속에 자긍심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당시 8,500년의 역사는 애석하게도 환, 배달, 청구의 역사가 배제된 채 고조선의 역사에서 민족의 단합의 단초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국토를 잃으면 역사도 잃어


  대륙에서 건국한 근세조선은 왜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당시 새로운 패권국가로 등장한 명明에 사대事大를 맹세하고 세종대에 이르러서는 왜와 명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도읍지를 대륙(중심국)에서 반도(동쪽국가)로 옮긴다. 대륙 산동성에서 한반도 한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근세조선은 대륙(중국)의 강역을 명에게 완전히 빼앗긴다. 근세조선은 강역이 한반도로 축소되자 정권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반도사관을 만들어냈고, 우리민족의 역사가 마치 한반도와 만주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위장했다.


  국토의 상실은 역사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역사를 잃어버리게 되면 국혼도 따라서 잃게 되는 것이다. 반도사관으로 대륙의 강토를 포기한 어리석음으로 야기된 근세조선의 의식의 혼란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우리민족의 역사는 만년의 역사이며 그 강역은 근세조선 초까지 대륙이었음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


  단제旦帝와 고조선은 실재했었고, 그 이전에 청구, 배달, 환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사군은 존재하지 않았고 한이 고구려의 강역을 침략하고 설치했던 군은 낙랑樂浪과 현토玄菟였는데 그 위치는 대륙의 감숙성이었다.


  임나일본부는 대륙에 있던 왜가 4-5세기 때 강국으로 성장했던 대륙에 왜와 인접해 있던 임나의 강역에 설치했던 행정구역이었고, 당시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강역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던 전혀 다른 곳이었다. 


                         




<우리민족사의 전개과정>

국호

년대(환기)

년대(서기)

중심 강역

비고

亙(桓)

원년~3,302

전7199~전3898

청해성

十二國

(韓)

倍達

3,302~4,493

전3898~전2707

청해성

九黎

靑丘

4,493~4,867

전2707~전2333

사천성

(朝鮮)

旦(檀)

4,867~4,889

전2333~전2311

감숙성

九封侯國

晁僊

4,889~5,018

전2311~전2182

감숙성

夫余晁僊

5,018~6,775

전2182~전425

감숙성

大夫余

6,775~6,968

전425~전232

감숙성

北夫余

6,962~7,142

전238~전58

섬서성→감숙성

 

莫旱(馬韓)

6,877~7,209

전323~10

사천성

高麗(高句麗)

7,142~7,867

전58~668

섬서성

 

新羅

7,143~7,867

전57~668

사천성→호북성→안휘성

百濟

7,181~7,859

전18~660

사천성→호북성→산동성

加洛(加耶)

7,241~7,731

42~532

운남성→광동성→강서성

渤海

7,867~8,125

668~926

섬서성→산서성→하북성

→ 내몽고자치구

 

新羅

7,867~8,134

668~935

안휘성

(後)百濟

8,091~8,135

892~936

호북성

 

(後)高麗

8,117~8,592

918-~1393

하남성→산동성

 

朝鮮

8,117~8,625

~9,095

1393~1426

~1896

산동성→경기도

1426년 대륙에서 반도로 이전

大韓帝國

9,095~9,109

1896~1910

경기도

 

외세강점기

9,109~9,147

1910~1948

경기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1945

大韓民國

9,147~ 

    1948~

경기도

 

朝鮮國

9,147~

    1948~

평안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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