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19
이름: bc8937
2015/2/1(일)
한民族史 5분 강의 / 마의산(麻衣山)과 산유화(山有花) . 도라지가(倒羅地歌)의 유래  


 

  
 
 의자왕 20년(660 BC.) 백제가 망하자 많은 유민들이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 서해 쪽으로 피난 오게 되었다. 지금의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지역이다. 현재 이들 지역에 남아 있는 성터나 절터 묘지 등은 거의 대부분 대륙 백제의 유민들이 세운 것인데 임진년(1592)에 왜적들에게 침탈당한 후 폐허가 된 것이다. 

 상고사학회 율곤 이중재 회장은 대륙을 버리고 한반도로 건너온 백제의 유민들이 산유화가(山有花歌)를 지어 불렀고, 신라의 유민들은 도라지가(倒羅地歌)를 불렀다고 하였다.
 
 도라지가(倒羅地歌)는 신라가 쓰러져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백성들이 지어 부른 것이며, 산염불조(山念佛調)로 무척 느리고 슬프게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민요에 속해 흥겨웁게 부르고 있다.
 
 산유화(山有花)는 산에 꽃이 피어 있다는 뜻인데 산유화(山有花)는 환민족(桓民族) 역사상 최초로 언급되는 나라 꽃 이름으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그 기록이 있다.
 
 단군세기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檀君世紀  十六世 檀君 尉那 在位 五十八年)
 
 "山有花 山有花 去年種萬樹 今年種萬樹 春來 不咸花 萬紅有 事天神 樂太平"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있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금년에도 만 그루 심었다오, 봄이 오면 생명의 꽃 붉게 가득하니, 하늘의 神을 잘 섬기므로 즐겁고 태평하다."

 
 산유화(山有花)가 무슨 꽃인지 알 수는 없다. 진달래인 듯하지만 꼭 찍어서 그렇다 할 증거는 없다. 그러나 단군시대부터 전해져온 우리 환민족(桓民族)의 나라 꽃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열매와 꽃 모두가 붉게 변하는 꾸지뽕(산뽕)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우리의 나라꽃을 백제 사람들은 노래로 지어 불렀던 것이다.
 
 " 궁야평 너른 들에/ 논두 많구 밭두 많다/ 씨뿌리고 모 욍겨서/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 보세/
 
산유화야 산유화야/ 오초(吳楚) 동남(東南) 가는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북얼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저어가지/ 원포귀범(遠浦歸帆)이 이 아니냐/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런 말이 웬말이냐/ 용머리를 생각허면/ 구룡포(九龍浦)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와 벗님/ 구국충성 다 못했네/
 
산유화야 산유화야/ 입포에 남당산은/ 어이그리 유정턴고/ 매년 팔월 십륙일은/ 왼 아낙네 다 모인다/ 무슨 모의 있다던고/
 
산유화야 산유화야/ 사비강 맑은 물에 / 고기 잡는 어옹덜아/ 온갖 고기 다 잡어두/ 경치 일랑은 낚지 마소/ 강산 풍경 좋을시고/
 
에-헤-에헤야-헤헤/에-헤-에여루 사-사-뒤-요-  "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오초(吳楚) 동남(東南)'이란 중국 동남부에 있는 대륙백제의 지명이며 양자강의 지류를 따라 吳나라, 楚나라를 지나 계속 동남쪽으로 배가 진행하는 장면을 노래로 읇은 것이다. 그리고 원포귀범(遠浦歸帆)이란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나오는 여덟가지 풍경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백제의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을 노래한 것이다.  

 * 소상팔경(瀟湘八景):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 영릉(零陵)부근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곳의 여덟 가지 경치를 말함. 
 
 


 백제 왕릉은 한반도 땅에 한 곳도 없다. 고구려도 또한 마찬가지다. 신라는 망한 시기가 늦으므로 당나라 말기에 신라 유민들이 왕릉을 살짝 몇 구 파서 한국 땅 경주(慶州)에 비석도 없이 몰래 이장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서안의 서쪽인 함안(咸安)과 본시 경주였던 순화(淳化) 지방에는 묘지가 모두 폐묘(廢墓)가 되었다고 한다. 과거 상고사학회 회원이던  김종윤선생이 현장을 직접 답사하였고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옛날 당나라 말기에 누군가 묘를 몽땅 파서 가져갔다고 했다. 때문에 지금은 쓸모없는 폐묘(廢墓)들 뿐이라고하였다.
 
 그렇다, 신라는 대륙에서 망하여 그 유민들이 조상들의 묘를 통째로 파서 한국 땅 경주(慶州)로 안전하게 옮겼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의 위치가 한반도의 북쪽에 있어서 육로로 모든 물자의 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주(慶州)는 원래 신라 당대에는 없었던 지명(地名)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의 항복을 받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 경순왕을 혼인 시키면서 이제 더 이상 국사를 돌보지 말고 평생 동안 편안하게 살라고 제후에게 내리는 식읍으로 주었던 땅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주편에 의하면,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이 곳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을 가리킨다.
 
 지금 경상도에 있는 경주는 고려초에 대륙의 순화(淳化)에서 살던 귀족들이 한반도로 대거 이주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나라가 망하자 곳곳으로 뿔뿔히 사람들이 흩어졌지만 신라의 유민들은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큰 고난은 없었을 것이므로 경상도 땅으로 이주해온 신라의 귀족들은 무난히 본토 사람들과 화해하였거나 아니면 선진화 된 무력으로 제압하였을 것이다. 그런 후에 지금 남아 있는 경주의 유적들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본다.
 
 경주와 대구, 가야 등의 유적들에서 흉노식 특징이 많이 보이는 것은 대륙신라의 유민들과 고구려, 흉노 등 북방 민족의 후손들이 함께 썪여 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신라 56대 경순왕의 아들 태자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안고 지금 대륙의 호남성 강화에 있었던 개골산(皆骨山)으로 떠난다.(금강산 아님) 태자는 기암(奇巖이란 기이한 바위가 있는 곳)이 있는 곳에서 절벽과 바위를 지붕 삼아 풀잎으로 밥을 먹고 삼베옷을 입으며 평생 동안 살았다고 한다.
 
 삼베 옷 이란 마의(麻衣)다. 마의(麻衣)란 삼베 옷이지만 나라가 망하여 죄인이란 뜻도 있으며 한이 서린 죄인이기에 좋은 옷도 아닌 삼베 옷을 입었다하여 마의태자(麻衣太子)란 별칭이 붙은 것이다. 그러기에 나라가 망하여 한 서린 옷이 마의(麻衣)이다. 그래서 생긴 것이 마의산(麻衣山)이다.
 
 현재는 마의산(麻衣山)을 마니산(摩尼山). 마리산(摩利山)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마의태자(麻衣太子)의 한 많은 슬픔이 긴 세월 속에서 잊혀졌던 탓일 것이다.
 
 강화도는 대륙을 바라보는 곳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대륙에 있던 고토와 선조 그리고 천지신명께 나라를 잃은 설음을 달래주는 한이 서린 곳이기에 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의산(麻衣山)을 찾았고 백제의 유민들이 대륙에서 건너와 그 한을 달래기 위해 마의산(麻衣山)에 제단을 쌓고 선조들의 넋을 달래는 한 서린 통곡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판문점의 임진각처럼 대륙을 바라보고 선조들의 고향을 향해 절하고 한을 달래는 곳이 마의산(麻衣山) 임을 알아야 한다.
 
  
 
애환지가(愛桓之歌)
부제 : 산유화
출 처 : 檀君世紀  十六世檀君 尉那 在位五十八年
        단군세기   16세
단군 위나 재위 58년

 
山有花
山有花若
宗山春來,

去年種萬樹
今年種萬樹

不咸花
萬紅有,

事天神
樂太平
.
 
생명 꽃
산유화는
붉은 빛가득
천상에 비친다.

 
* 산유화 풀어 쓴 민조시 
   1.
   산에는
  
꽃 피누나
   아! 산유화여,
   봄이 온 꽃동산, 
   생명꽃 심으리. 



   2.
   해마다
   가득 심은
  
   하늘나라
   생명 꽃불,

   붉고 밝으니

   태
평세 참 둏타.     
  
** 원문중 일부(山有花若 宗山春來) 필자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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