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7
2016/9/11(일)
조선 건국 / 하늘이 열리다  

고대사 2014.07.15 07:51
 
 
- 하늘이 열리다
 
  무진(戊辰)원년(BC2333) 上月(10월) 三日
  帝는 天符 3개의 印을 거머쥐고 雲師, 雨師, 風伯, 雷公(뢰공)을 거느리고
  太白山 檀木(단목) 아래 神壇에 이르러
  3000 부락의 무리와 더불어 三神 上帝에게 받들어 제사하고
  天符經을 강연하였으며 三一神誥를 낭송하였다.
 
  순순히 가르침이 神德에 이르렀고.
  드넓고 높음이 魚聖의 仁에 이르렀으며,
  맹렬함이 모든 것을 능하게 하니 하늘을 계승하였다.
 
  九桓(구환)의 무리는 다같이 기뻐하고 진실되이 감복하여
  하느님이 변화한 육신이라고 천거하여 太一上帝라고 하였다.
 
  이날 帝로 즉위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帝號를 배달임검이라고 했으며,
  帝의 도읍을 太白山 아래 天坪으로 하였으니 서울(徐菀)이라고 하였고,
  帝의 城을 壬儉城(임검성)이라고 하였다.
 
  皇祖考를 추존하여 天一泰帝라고 하고,
  皇考를 추존하여 地一洪帝라 하였으며,
  묘를 건설할 것을 명하고 제사를 받들었다.
 
  納妃 비서갑(菲西岬) 河伯의 딸로 부인으로 맞이하여 皇后로 삼고
  큰아들 부루(夫婁)를 皇太子로 세웠다.
  팽우(彭虞)를 명하여 원보(元輔)가 되게 하였다.
  <心堂全書>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대통을 이으니 고대 조선의 중시조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大東方의 거족(巨族)인 웅씨의 딸이며,
  BC 2370년 5월 2일 왕검 단군이 탄생하셨다.
 
  왕검은 성장함에 천성이 고매하고 지모가 비범하여 세상에서 신인으로 추앙하니
  웅씨 왕국{檀熊國}의 비왕(婢王)으로 있었다.
 
  배달국에서 5가의 우두머리가 되어 8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단목하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할 때
  사제(司祭)들의 축복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천제의 명을 받들어 천왕 지위에 오르니
   백성들이 신인이 하강하였다고 해서 우러러보았다.
 
  천왕은 구규(九規)를 부활하고 아사달에 천도하고 국명을 朝鮮이라 하였다.
 
  기원전 위서(魏書)에 기록하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이
  아사달에 건국해서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乃往二千載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國號朝鮮)
 
이에 九桓의 왕후, 추장이 배석하여 東夷 九種의 만백성에게
훈련 조서를 내리면서 말하기를
 
 "天範은 오직 하나이니 너희가 마음을 精齊하면 그것이 곧 조천(朝天)이다.
 
민심은 오직 한 가지니 모름지기 성심을 다잡아 인심에 미치면 감화하여
하느님의 뜻에 합치고 온 누리에 작용한다.
 
너희가 세상에 사는 것은 어버이가 있기 때문이요.

어버이는 곧 하늘의 뜻에 따라 세상에서 너희를 낳으니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이 충효인 것이다.
 
너희가 도를 체득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벗어날 것이다.

짐승도 짝이 있고 헌 신짝도 짝이 있다.

너희 남녀는 화목하고 원망하지 말며 질투하지 말며 음란하지 말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헐뜯지 말며 다투지 말고 싸우지 말라.

그리하면 집안과 나라가 흥성할 것이다.
 
소와 말을 보아라. 오히려 물을 나눠 먹는다.

서로 빼앗지 않고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면 나라는 융성할 것이다.
 
호랑이를 보아라. 강하지만 공손하지 못하여 천한 것이 되었다.

너희는 서로를 찔러 죽이지 말고 사람을 상하지 말며 제휼 하라.
 
너희가 규칙을 흩으리면 신의 도움을 영원히 얻지 못하여 몸과 집이 망할 것이다.
 
너희가 논에 불을 놓으면 벼는 남김없이 말라죽을 것이며 신은 노할 것이다.

너희가 그 향기를 두껍게 쌓더라도 반드시 셀 것이다.

떳떳한 성품을 가져서 사악함을 품지 말며 악을 숨기지 말며 화를 감추지 말며
마음은 하늘을 길이 공경하며 백성들을 친히 하라.

너희는 복이 무궁할 것이다.

오가의 무리는 흥복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帝는 신료들을 모아 각자 소임을 맡기니
대신 <팽우(彭虞)>에게는 토지를 개간하여 백성의 양식을 늘리고
궁궐을 짓게 하였다.

대신 <거지(巨智)>는 문자를 정돈 정제하고,
대신 <기성(箕省)>은 의약을 개발하여 질병을 다스리게 하고,
대신 <나을(那乙)>은 판적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병사 희전(羲典)은 화복 운기를 점치고 병마를 관장하며 군량을 비축시키고,
   구환(九桓) 열국(列國)의 안보를 충실히 하였다.
 

帝는 5家 64제후를 통괄하는 통치 기구를 삼분하여 三汗을 설치하니
(後書에 이르기를 番汗 辰汗 馬汗 或은 신한 말한 불한이라 하고
後에 다시 番朝鮮 莫朝鮮 眞朝鮮 等으로 쓴 것이다.)
 
번한의 왕검성은 험독(險瀆){今 산해관 유역}에 정하고
우순(虞舜)과 국경을 감정하고 유주와 영주에 방위군을 주둔케하고
기주를 12분하여  舜으로 하여금 관장케하고 그 동쪽은 조선국 번한에 속하였다.


후세 한인(漢人)이 말하는 흉노와 서로 접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한 것은
역사 기록의 오착이다.
  (漢人所謂斷匈奴右臂者以其不與西成相接也史書有錯)


무이웅씨(武夷熊氏) 말하기를

"서주 기사 諸州는 기주 동편 영주 예주(山東 河北) 지방과 모두 한 울타리 안이고
 동방의 좋은 땅을 형성하여 서주는 곧 노나라와 경계하여 회해와 연하였고
 동이(조선)에 속한 두 고을인 즉 곡부,기(沂)의 예의와 문학을 숭상하는 나라이다"
 라고 하였다.


진한은 왕검성을 아사달에 정하고 서북은 몽고와 접하고 북은 환천리하고
동은 연해주에 이르고 남은 마한과 송화강을 경계하고
마한은 서는 요하를 경계로 번한과 접하고 남은 대마도에 이른다.
 
마한은 왕검성을 정하니
대단군의 조선국 영토는 동은 연해주에서 서는 황하
북은 몽고 시베리아에 닿는 당시 아세아 유일의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구환의 64제후국을 3,9,18,36으로 분활 통치하였다.
 
 
진한의 왕검성은 지금의 적봉지역이고, 번한의 왕검성은 지금의 산해관 지역이고
마한의 왕검성은 지금의 북한 평양 지역이다.
 
 
 

  단군조선의 뿌리는 배달국(桓國)과 단웅국(檀熊國)이다.
 
  배달국은 단군왕검(檀君王儉)에게 천부삼인(天符三印)으로써
  정통성을 부여한 나라이며,
  단웅국은 단군왕검으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기 이전에
  백성들에게 덕치(德治)를 실현할 수 있게 한 나라이다.
 
  BC 2370년 신묘년 5월 2일에 단군왕검은
  배달국 19대 거불단 한웅의 아들로 탄생하여 BC 2357년 갑진년에
  14세의 나이로 외가(外家)의 나라인 단웅국의 섭정으로
  홍익인간 정치를 실체적으로 실현하였던 것이다
 
  단웅국(檀熊國)은 유인씨족(有因氏族)과 연계된 웅씨족국(熊氏族國)인데,
  BC 2697년 갑자년에 배달국 15대 치우천왕이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을 평정하고 다시 천자국(天子國)으로 봉한 나라이다.
 
  제괴(帝魁)로부터 5대를 거쳐 홍제(洪帝){거불단 환웅}에 이르러
  홍제의 아들들인 단군왕검이 섭정을 맡게 되었다.
 
  BC 2357년 갑진년에 단군왕검은 단웅국의 비왕(裨王)이 되어
  BC 2333년까지 24년간 덕치(德治)를 펼쳤으며,
  BC 2357년에 유웅국(有熊國){唐}의 천자가 된 요(堯)임금과 병립(竝立)하였다.
 
  그런데, 이후에도 요임금은 욕심을 통제하지 못하고 BC 2334년까지
  3차례나 단웅국을 침범하였으며 결국 BC 2334년에는 단웅국을 기습침략하여
  왕성(王城)을 점령해 버렸다.
 
  이에, 단웅국의 왕성을 떠나 동북의 아사달로 가서 나라를 정비하였던 것이며,
  BC 2333년 10월 3일 조선을 개국한 후 10년 사이에 국력을 키워
  요(堯)를 토벌하게 된다.


 
BC 2333년 10월 3일 검(儉)이 조선을 건국하니
우리는 이날을 기념하여 처음으로 하늘이 열린 날,
개천절이라 하여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 성인의 자취따라 하늘이 텄다 - 개천절 노래)
일제는 조선 건국을 한낱 신화로 만들었지만,
지금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 지구상의 어느 나라가
하늘을 받드는 제천행사를 하고 있는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천손의 후예임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朝鮮河
 
 
연경(燕京)의 州軍은 12이다.
 
중원의 옛 땅 유주(幽州)는 옛 冀北의 지역으로 舜 임금이 유주(幽州)를 설치했다.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었고 북쪽에는 누번(樓煩). 백단(白檀)이 있었고
서쪽에는 운중(雲中). 구원(九原)이있었고 남쪽에는 호타하. 역주(易州)가 있었다. 
 
唐나라 때는 范陽節度를 설치하여
해(奚), 거란을 감독 견제하고 유주(幽州)를 치소로 하였다.
 
石晉시대{936-946}에 戎主에게 분할하여 뇌물을 주어 南京을 건립했고
또 燕京으로 고쳤다.
 
동쪽으로 부가구(符家口)까지는 390리이고
正東의 약간 북쪽에서 송정관(松亭關)까지는 450리이고
서쪽으로 중산구(中山口)까지는 100리이고
正西의 약간 북쪽에서 거용관(居庸關)까지는 110리이다.
 
동북쪽으로는 中京{今 赤峰市 寧城縣}에 당도한다.
 
북문을 나가서 古長城을 지나 望京까지가 40리이고
또 溫餘河. 대하피(大廈陂)를 지나서 50리를 가면 순주(順州)에 도달한다.
 
동북쪽으로 백여하(白璵河)를 지나 70리를 가면 단주(檀州)에 도달하는데
여기서부터는 점차 산길로 접어든다.
 
50리를 가면 金溝淀에 도착하는데 산길로 접어들어 길이 구불구불하고
다시 이후(里堠)는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하(朝鮮河)를 지나 90리를 가면 북쪽으로 고하구(古河口)에 도달한다.
 
양쪽 곁으로 고산준령이 언덕처럼 높이 치솟아
그 사이로 수레 한 대 겨우 지나다닐 만한 좁은 길이 나 있다.
 
이 길을 따라서 80리를 가면 新館에 당도한다.
 
조과령(鵰窠嶺)을 지나서 40리를 가면 臥如來館에 당도하고
여기서 또 70리를 가면 柳河館에 도달한다.
 
松亭嶺을 지나서 70리를 가면 打造부락에 도달하고
또 동남쪽으로 50리를 가다 보면 牛山館에 당도한다.
 
80리를 더 가면 녹아협관(鹿兒峽館)에 당도하고
다시 90리를 더 가다 보면 철장관(鐵漿館)에 도착한다.
 
북참산(北塹山)으로부터 70리를 가면 富谷館에 당도하고
또 80리를 더 가면 通天館에 도착하며 여기서 다시 20리를 더 가면 中京에 도착한다.
 
 
남쪽으로는 웅주(雄州)에 당도하는데
남문을 나가서 盧孤河를 건너 60리를 가면 良鄕縣에 도달한다.
 
또 유리하(琉璃河). 范水. 涿水를 지나서 탁주(涿州)에 도달하는데 모두 10리이다.
 
또 70리를 가면 新城縣에 도달하고 또 40리를 더 가면 白溝河에 도달하며
백구하를 건너면 웅주(雄州)에 당도한다.
<武經總要 前集 券16 下 北番地理>
 
 
武經總要는 역사를 전문으로 다룬 역사서가 아니라
북송 때(1044년) 군사제도와 군사이론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官撰兵書이다.
 
武經總要는 그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曾公亮(999-1078)>은 북송 왕조에서 同中書 門下平章事와
集賢殿太學士를 역임한 重臣이다.
 
뿐만아니라 일찍이 이 책 외에도 新唐書와 英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한 바 있는
대표적인 역사학자였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의 저자인 <丁度(990-1053)>는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와 端明殿學士에 이른 당시의 군사가로서
이 책 이외에 備邊要覽. 慶曆兵錄. 섬변록(贍邊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 책은 바로 북송왕조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와 군사가가 황제의 명을 받아
4년여의 정력을 기울인 끝에 완성하여 펴낸 역작으로서
어느 正史에 뒤지지 않는 참으로 권위있는 사료이다.
 
오늘의 북경은 당시에는 요나라의 영토에 소속되어 있어
처음에는 南京이라 했다가 다시 燕京으로 고쳐 불렀다.
 
燕京의 지리를 설명하는 가운데 朝鮮河라는 이름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朝鮮河의 기사가 허위일 수 없고 조작일 수 없다.
 
宋나라 군사서를 편찬하면서 북경시 고북구 부근에
있지도 않은 朝鮮河 기록을 끼워 넣었을 리는 만무한 것이다.
 
<王曾>의 王沂公行程錄에는
朝鮮河의 별칭을 七度河라고 한다는 내용까지 소개하고 있다.
 
<王曾(978-1038)>은 송나라 泉州 사람으로
鄕試. 會試. 廷試에 모두 장원을 한 천재성을 지닌 인물이다.
 
<王曾>은 송나라에서 直史館. 史館修撰 같은 벼슬을 역임하면서
역사 편찬에 직접 관여하기도 하였다.
 
벼슬은 나중에 최고 군사기구의 장관격인 樞密使에 올랐고
재상을 두 차례나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沂國公에 봉해졌다.
 
王沂公行程錄은 그가 송나라의 특사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송나라 변경에서 요나라 수도 중경,
즉 오늘의 내몽고 寧城縣까지의 중간 경유지들을 일정표 형식으로 적은 것인데
그가 沂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인들이 이를 王沂公行程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王曾>과 같은 비중 있는 인물이 朝鮮河의 별칭이 칠도하(七度河)이며
이를 건너서 고북구(古北口)에 당도했다라고 그의 행정록에 기록했다면
우리는 그 기록을 사실로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元나라 말엽의 학자 <웅몽상熊夢翔>의 석진지집일(析津志輯佚)에도
朝鮮河와 습수(濕水)가 등장한다.
 
武經總要에는 북경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다고 말한다.
 
이 朝鮮河가 바로 遙水인 것이다.
 
潮河는 역사상에서 浿水. 飽邱水. 大楡水. 朝鮮河. 七度河 등으로 불리며
유장한 세월동안 동북방민족과 함께 해온
157km의 하북성 동북쪽을 흐르는 강이다.
 
潮河는 지금 말이 없다.
 
침묵 속에 하북성 동북쪽을 흐를 뿐이다.
 
그러나 천 년 전의 중국인에 의해 쓰여진 武經總要와 王沂公行程錄은
그 강의 본래 이름이 潮河가 아니라 朝鮮河였다고 말해 주고 있다.
 
潮河는 천 년 만에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고
고조선은 천 년 만에 잃어버린 역사의 주요한 한 토막을 되 찾았았다.
 
그리고 동아시아 전쟁사에 기록된 여수전쟁과 여당전쟁의 격전지 遙水는
바로 이 朝鮮河인 것이다.
 
 

<조선하(朝鮮河)>
 
 

-  고조선과 고구려의 패수(浿水)는 어디인가?
 
 
‘청천강 패수설’ 은 ‘대동강 낙랑설’ 과 함께 반도사관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 왔다.
 
하북성의 조하 즉 조선하가 바로 패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요서고조선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패수는 상흠의 <수경水經>에서

“낙랑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 간다” 라고 하였다.
 
그러면 패수의 발원지라는 이 누방현의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
 
[요사] <지리지>에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나라의 누방현” 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십육국강역지]<전연록前燕錄>에 의하면
 
“晉나라 원강 4년(338년)에 대극성(大棘城)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곳이 이른바 자몽지읍(紫蒙之邑)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서]<재기>‘모용외’ 에 의하면
 
 “모용외의 자는 혁락괴로 창려 극성 선비인이다.
그들의 선조는 유웅씨의 후손이다.
 
대대로 북이(北夷) 지역에 거주하면서 자몽의 벌판에 도읍을 정했으며
호칭을 동호(東胡)라고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증조 막호발이 魏나라 초기에 그들의 여러 부족들을 인솔하고
요서에 들어가 거주했다.
 
선제(宣帝){司馬懿(179-251)}를 따라 공손씨를 정벌함에 공로가 있어
솔의왕에 임명되었으며 극성의 북쪽에서 건국하였다.” 고 말하고 있다.
 

 
이 기록은 자몽은 극성(棘城)의 북쪽에 있던 북이(北夷)의 땅으로서
본래 동호(東胡)가 살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동호(東胡)는 바로 연나라 북쪽에 있던 동북방 민족으로서
연나라 장수 진개에 의해서 각지천리(却地千里), 즉 땅을 잃어버리기 이전까지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오늘의 하북성 동북방 일대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요나라의 자몽지야(紫蒙之野)란
바로 오늘날 북경시 고북구진 북쪽 조하의 상류
풍녕만족자치현  북쪽  일대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지금까지 중국 사료에 패수의 기록은
왜곡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리무중에 쌓여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패수의 발원지 누방현을 북이 동호의 터전인 극성의 북쪽 자몽지야로 본다면
의문의 실마리는 풀린다.
 
 
 
 
 <潮河와 白河 및 燕京과 中京>
 

<수경>에 나오는 패수의 발원지인 낙랑 누방현은 요나라 때는 자몽현이고,
현재의 풍녕현(豊寧縣)이다. 따라서 패수는 지금의 조하이다.
 

오늘의 조하가 패수인 다섯 가지 이유
 
① <무경총요>에 “연경에서 중경(中京)을 가는 도중에 조선하를 지나서
고북구(古北口)에 도달한다” 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조선하는 고북구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조하는 고북구 서쪽에 있고 난하는 고북구 동쪽에 있다.
이는 조하가 조선하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패수는 [사기]<조선열전>에서 살펴보면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이었고
또한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이기도 하였다.
 
위만은 서쪽에서 패수를 건너서 조선에 왔고
섭하는 패수를 건너 조선에서 중국으로 도망쳤다.
 
이는 패수가 중국과 조선의 양국의 국경선이긴 하지만
조선에 속하는 조선하였음을 말해준다.
 
 
② [한서]<지리지>에
“혁수(洫水)는 다른 이름으로 포구수(鮑丘水)이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혁수는 패수(浿水)의 오기이고
패수, 포구수는 원래는 중원의 강 이름이 아니라
만이(蠻夷) 지역 북쪽 변방의 강 이름을 한자로 번역한 명칭일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패와 포구는 만이의 어떤 발음을 그렇게 번역한 것일까.

포(鮑)는 현재의 중국어로는 ‘빠오’ 로 발음하고 패(浿)는‘페이’ 로 발음한다.

‘빠오’ 나 ‘페이’는  우리 말 ‘밝’ 을 된 발음했을 때 나는 음과 유사하다.

포구의 구(丘)는 ‘터’이다.

패수와 포구수는 우리 말 ‘밝달강’ ‘배달강’

즉 조선하의 고대 중국식 번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③ 패수가 있는 백단현(白檀縣)은
그곳에 백단산白檀山)이 있어 거기서 현의 명칭이 유래했다.

백단은 역시 우리 말 ‘밝달’ 의 한자식 표현이라고 본다.

‘밝달산’ 밑에 ‘밝달현’ 이 있다면
밝달현 지역에 흐르는 강물이 ‘밝달강’ 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중국인이 한자로 번역한 것이 포구수, 패수이고
그것의 다른 이름이 조선하였다고 하겠다.
 
 
④ 만이와 북방 변경에서 발원한다는 혁수(洫水)의 발원지를
<흠정열하지>는 하북성 풍녕현 (豊寧縣) 북쪽으로 보았다.

패수의 발원지 北夷 자몽지야(紫蒙之野)는 혁수, 조하의 발원지인
지금의 풍녕만족자치현 일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⑤ 패수는 상흠의 <수경>에서
“낙랑 누방현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조하는 하북성 풍녕만족자치현 조하원촌에서 발원하여
풍녕만족자치현 중부와 난평현 서부를 경유하고 장성관, 고북구진을 지나
지금의 밀운 저수지에 유입된다.

이 이후로는 백하와 합쳐지면 조백하潮白河로 불린다.
 
이 조백하潮白河가 요하遙河이다.
 
조백하는 북경시, 낭방시, 천진시를 경유하여
계운하 입구에서 동쪽으로 발해에 주입된다.
 
동쪽으로 바다에 유입되는 조하는 바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에 유입된다” 는 패수와 바다로 유입되는 방향이 일치한다.
 
 
 
* 참고
 
1. 유주(幽州)
 

중국의 고대지명으로
지금의 하북성 북경시와 천진시의 북부 일대가 여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우(虞)에서는 유주(幽州)라 하였는데, 공공(共工)을 내쫓은 곳이다.
 
대개 옛날에 9주(九州)가 있었는데,
순 임금 때에 기주(冀州)와 청주(靑 州)가 지역이 넓다고 하여
청주를 나누어 영주(營 州)를 만들고,
기주를 나누어 유주(幽州)와 병주(幷州) 두 주(州)를 더 만들었다.
 
 
 
 
 
 
남쪽에는 기주(冀州)가 있었고 서쪽에는 병주(幷州)가 있었다.
 
북쪽과 동쪽은 장성 바깥지역으로 조선과 요동이 있었다.
 
상고시대에는 계국(蓟國)이 있던 곳이고
춘추시대{BC 414년경}에 燕나라가 계국을 멸망시키고 이곳으로 천도했다.
 
漢唐시대를 거치면서 명칭, 치소, 범위는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다.
 
뒤에 宋 태종 조광의(趙光義)가 북벌할 때는 그 곳의 명칭이 유주로 불렸다.
 
조광의(趙光義)의 북벌이 실패한 뒤에 遼나라 會同 원년에
북경지역에 배도(陪都)를 세워 남경유도부(南京幽都府)라 하였고
開泰 원년{1012년}에 석진부(析津府)로 고쳤으며 뒤에 연경(燕京)으로 바꾸었다.
 
유주(幽州)라는 명칭은 이 뒤로는 다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유주(幽州)는 한 이전에는 지금의 오대산 지역인 대군에 위치하다가
한나라 때 산서성 중부와 하북성 중.북부 지역에 11개군을 설치하였다.
 
진 함녕2년(276년)에 유주를 분할하여 평주를 설치하였다.
 
 

2. 호타하(滹沱河)
 
호타하는 역사상에서 호타(滹沱), 아타(亞駝), 악지(惡池), 곽지(瀖池), 후지(厚池)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속명은 사하(沙河)이다.
 
산서성 번기현 태희산 아래 고산촌 일대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대현(代縣) 곽현(崞縣)을 경과하고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정양현(定襄縣), 오대현(五臺縣), 우현(盂縣)을 지나 하북성 경계로 진입한다.
 
하북성 남쪽을 가로 질러 흐르다가 천진시에 이르러
북운하와 합쳐져 바다로 들어간다.
 
 
 

- 朝鮮記
 
 
海內經
 
海內經과 大荒經은 본래는 유실되어 山海經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었다.
 
羅씨의 「路史」 注에는 이를 인용하여 통틀어 朝鮮記로 삼았다.
 
東海의 안쪽 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朝鮮이라고 한다.
 
<곽박郭璞>은 말하기를 "朝鮮은 지금의 樂浪이다."라고 하였다.
 
<임신任臣>은 살피건대 수역주자록(殊域周咨錄)에는 말하기를
"동쪽에 있어 朝日이 선명하기 때문에 朝鮮이라 한다" 라고 하였다.
 
<주국정朱國貞>의 「大事記」에 말하기를
"朝鮮은 朝日이 선명하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며 高麗도 역시 그와 같다.
前史에 '丸都란 것은 이른바 해와 달이 모두 둥글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전부錢溥>의 「朝鮮國志」에는 朝鮮이 세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단군조선이고 하나는 기자조선이며 하나는 위만조선이다"라고 하였다.
 
고증에 의하면 "箕子를 조선에 봉한 후 41대를 전하여 王 <준準>에 이르렀으며
무릇 928년이었는데 위만에게 나라를 잃어버렸다.


BC 1122년 殷이 周 武王(姬發)에게 멸망하자
殷의 마지막 왕인 주(紂)의 숙부인 箕子(子胥餘)가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솔나(率那)단제는 箕子를 西華지역{산서성 태원과 대동 사이}에 봉하였다.

이 때가 번조선(奇子조선)의 4대 임나(任那)왕 16년이다.

10년 후인 BC 1112년에 箕子가 西華지역에 번조선의 제후국인 수유국을 세운다.

중국인이 말하는 箕子조선이 BC 194에 위만에게 망하였으니
수유국으로서는 제 38대 箕準 28년이고 928년간 존속하였다.

수유국의 33대 기후(箕珝)가 번조선(奇子조선)의 40대 水韓을 이어
41대 번조선왕으로 즉위하여 46대 箕準 28년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니
번조선(奇子조선)으로서는 奇子(桓西余)가 BC 1285년에 번조선 왕으로 즉위 한이래
1091년간 존속 한것이 된다.

번조선의 제후국인 은 왕족인 수유국의 箕子(子胥餘)와
번조선의 왕족인 奇子(桓西余)는 왕족의 姓이 다른 전혀 별개의 인물이며,
중국인들은 BC 1285년에 奇子(桓西余)가 번조선왕으로 즉위한 것과
BC 322년에 번조선의 제후국인  箕子(子胥餘)의 후손인 수유국의 기후(箕珝)가
제 41대 번조선의 왕으로 즉위한 것을 알지 못하고
BC 1112에 箕子가 망명하여 세운 번조선의 제후국인 수유국을
箕子조선으로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箕準은 漢나라 땅 金馬郡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韓王이라고 하였다.
 
또 200년을 전하다가 고구려를 병합하고 신라. 백제를 겸하여 소유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 「學海」에는 말하기를
"朝鮮은 뒤에 바다로 들어간 자들이 神國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山海經廣注 券18 海內經>
 
 
山海經廣注는 청나라 때 학자 <오임신吳任臣>이 지은 山海經에 대한 주석서이다.
 
晉나라 <곽박郭璞>의 山海經注를 바탕으로 그것을 보완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山海經廣注라고 이름을 붙였다
 
山海經廣注는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山海經에 나오는 海內經과 大荒經을 朝鮮記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吳任臣>은 山海經廣注에서 海內經에 대해 설명하면서
大荒經과 海內經을 모두 朝鮮記로 보았던 「路史」의 注를 인용하였다.
 
이것은 <吳任臣>도 역시 「路史」의 이 견해에 동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海內經을 고대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기로 간주한 것은
비단 「路史」 注에 국한된 견해가 아니고
다른 여러 저작들에서도 그와 같은 관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說略. 廣博物志. 山西通志. 識遺. 山帶閣註楚辭. 名疑. 江漢叢談 등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海內經을 海內朝鮮記 또는 朝鮮記라고 표현하고 있다.
 
고조선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약점이 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山海經 안에 들어 있는 大荒經과 海內經이
바로 고대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朝鮮記라고 한다면
우리는 고조선사와 관련된 중요한 직접 사료를 확보하는 셈이다.
 
海內經은 朝鮮國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그 서두를 열고 있다.
 
또한 君子國. 白民國 등을 다루고 있는 그 전체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朝鮮人이 고대 朝鮮의 역사를 직접 기록한 朝鮮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두번 째 이 사료에서 특기할 점은 <전부錢溥>의 朝鮮國志를 인용하여
위만조선. 기자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을 실제 역사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 朝鮮縣
 

<漢書><後漢書><晉書>에 樂浪郡의 首縣으로 기록
 
朝鮮縣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 徙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
<魏書>


延和元年{432년} 北魏 太武帝 拓跋燾 시기에 朝鮮縣은 부활했으나
원래의 자리가 아닌 비여현(肥如縣)이라는 곳으로 옮겨갔다.

비여현(肥如縣)은 <漢書><後漢書><晉書>모두 遼西郡 소속으로
즉 위나라 연화시기에 조선현의 백성을 요서군 비여현으로 옮겼다.
 

盧龍 舊置北平郡 領新昌朝鮮二縣 後齊省朝鮮入新昌 又省遼西郡 竝所領海陽縣 入肥如
開皇六年 又省肥如入新昌 十八年改名盧龍
<隋書 北平郡 盧龍縣 條>
 
後齊는 北齊로 高洋이 東魏를 대체하고 國號를 齊라 함.
후제때 요서군 비여현(조선현)을 요동군 양평현(신창현)으로 이동.
 

宋代 樂史의 <太平환宇記 河北道 平州 盧龍縣 조항>에
朝鮮城 卽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
 
위 기록의 朝鮮城은 바로 漢나라의 낙랑군 조선현의 폐성임이 분명하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낙랑군 조선현(漢){今 保定市 인근}
→ 요서군 비여현(조선현)(北魏 432년){今 천진시 북쪽의 薊縣 인근}
→ 요동군 양평현(신창현)(後齊 550-559년) {今 천진시 북쪽의 薊縣 인근}
→ 북평군 신창현(隋 586년){今 천진시 북쪽의 薊縣 인근}
→ 북평군 노룡현(隋 598년){今 천진시 북쪽의 薊縣 인근}
→ 平州 노룡현(宋){今 창려현 인근} 으로 移置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경 남쪽 보정시 인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은
장수대제(巨璉)(394-492)建興 14년(427년)에
平陽(노룡){今 창려현 인근}으로 천도할 때까지도 보정시 인근에 존속하다가
北魏 太武帝 托跋燾 延和元年(432년)에 천진시 북쪽의 薊縣 인근으로 이동하여
요서군 비여현(조선현)이 되었다가
北齊 文宣帝 高洋(재위 550-559년)때 요동군 양평현(신창현)으로 이동되고
隋 開皇 6년(586년)에 요동군 양평현을 북평군 신창현(조선현)으로 개명되고
隋 開皇  18년(598년)에 조선현을 신창현에 통페합하여 북평군 노룡현으로 개명하고
宋때 지금의 창려현 인근으로 이동하여 평주 노룡현으로 바뀌었다.
 
 
 
- 朝鮮城
 
 
평주(平州)
 
북평군(北平郡)이다.
지금의 노룡현(盧龍縣)을 치소(治所)로 하고 있다.
 
우공(禹貢)에는 기주(冀州)의 지역이다.
 
우순(虞舜)의 12州로는 영주(營州)의 지역이 된다.
 
<주관(周官) 직방(職方)>에는 또 유주(幽州)의 땅으로 되어있다.
 
춘추시대에는 산융(山戎)의 고죽(孤竹), 백적(白狄)의 비자(肥子) 두 나라 땅이 되었다.
 
사기(史記)에는 "제환공(齊桓公)이 북쪽으로 산융을 정벌하여 고죽에 이르렀다"
고 하였다.(BC 660년경)
 
이아(爾雅)에는 "고죽(觚竹), 북호(北戶), 서왕모(西王母), 일하(日下)를
사황(四荒)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전국시대에는 燕나라에 소속되었고 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우북평 및 요서 두 군의 지역이 되었다.
 
漢나라 시대에는 그대로 따랐으며 요서군의 비여현(肥如縣)이 되었다.
 
後漢 말에는 공손도가 평주목을 자칭하고 제멋대로 차지하여
아들 康과 康의 아들 淵에까지 이르렀는데
모두 요동의 땅을 얻어 그 밖의 여러 東夷도 다 복종하였다.
 
晉나라 때는 요서군에 소속되었고 後魏시대에도 그러하였다.
 
隋나라 開皇 초기에 우북평군(右北平郡)이 되었고 10년에 州로 개정하였다.

양제가 즉위한 후 또 州를 폐지하고 郡으로 삼았다.
 
唐나라 武德 2년(619년)에 郡을 폐지하고 평주로 삼아
임유(臨渝), 비여 두 현을 관할하였다.

그 해에 임유로부터 비여로 치소를 옮겼고
이어서 비여를 개정하여 노룡현으로 삼았으며 다시 무녕현(撫寧縣)을 치소로 했다.

7년에 임유, 무녕 두 현을 감축시켰다.

天寶 원년(742년)에 북평군으로 고쳤다가 乾元 원년(756년)에 다시 평주로 삼았다.

본래 관할하던 현이 세 개인데 지금도 세 개 현이다.
노룡(盧龍), 석성(石城), 마성(馬城)
 
 
노룡현(盧龍縣)
 
본래는 漢나라의 비여현으로 요서군에 소속되었다.
 
응소(應劭)는 말하기를
 
"비자(肥子)가 燕나라로 도망치니 燕나라가 이곳에 봉하였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무덕 3년에 임유를 감축시키고 평주를 이동시켜 이곳에 설치하고
이어서 비여현을 개정하여 노룡현으로 삼아 수나라 개황시기의 옛 명칭을 회복하였다.
 
 
남산(藍山)
 
後魏의 <輿地圖 풍토기>에는 말하기를
 
" 노룡의 서쪽 49리에 남산(藍山)이 있는데 남취(藍翠) 색상이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갈석산(碣石山)
 
<산해경>에 말하기를
 
" 갈석산에서 승수(繩水)가 나온다"라고 하였다.
 
현의 남쪽 23리에 있는데 갈연(碣然)히 바다 곁에 서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晉나라의 <태강지지(太康地志)>에는
 
" 秦나라에서 장성을 축조했는데 갈석으로부터 시작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고구려의 옛 국경선에 있는 갈석은 이 갈석이 아니다.
 
 
임여산(臨餘山)
 
본래의 명칭은 임유산(臨渝山)인데 발음이 와전되어 餘가 되었다.
 
관(關)이 있는데 胡와 통하는 길이다.
 
지금 현의 동쪽 180리에 있다.
 
 
신부산(新婦山)
 
<구주요기(九州要記)>에 말하기를
 
" 노룡, 유성(柳城) 남쪽에 신부산(新婦山)이 있다"라고 하였다.
 
 
노수(盧水)
 
일명은 대저수(大沮水)이다.
 
지금은 소유수(小濡水)라고 한다.
 
북쪽 영주 유성현 지역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
 
<수경주>에는 말하기를
 
"현수(玄水)가 비여현 북쪽에서 흘러나오는데 일명 현계(玄溪)라 한다"라고 하였다.
 
 

황락수(黃洛水)
 
<수경주>에는 말하기를
 
"낙수(洛水)가 북쪽 노룡산에서 나와 유수(濡水)로 유입된다"라고 하였다.
 
 

비이계(卑耳溪)
 
<수도경(隋圖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살피건대 <管子>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제환공이 북쪽으로 고죽국을 정벌하기 위해 떠나 아직 비이계에 당도하지 못 했을 때
키가 크고 인물이 갖추어진 어떤 사람을 발견했는데,
머리에는 冠을 쓰고 오른쪽은 옷을 걷어 올렸으며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앞을 지나갔다.
 
관중(管仲)이 말하기를
 
'등산(登山)의 神에 유아(兪兒)가 있는데
패왕의 군주가 일어나면 등산(登山)의 神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또 말을 달린 것은 앞에서 인도를 한것이고
옷을 걷어 올린 것은 앞에 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며
오른쪽 옷을 걷어 올린 것은 오른쪽을 향하여 건너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비이계에 당도하였는데 물 건너는 것을 도와준 사람이 말하기를
 
'왼쪽을 통해서 건너면 그 깊이가 머리까지 미치고
오른쪽으로 건너면 그 깊이가 무릎까지 미친다'라고 하였다.
 
다 건너고 나서 환공이 배례를 올리며 말하기를
 
'중부(仲父)의 성스러움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소하수(素河水)
 
<수경주>에 말하기를
 
"소하수(素河水)는 영지현(令支縣)의 南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신하(新河)와 합쳐진다"
라고 하였다.
 
 

황락성(黃洛城)
 
殷나라 제후의 나라이다.
 
 

영지성(令支城)
 
漢나라의 현으로 요서군에 소속되었다.
 
폐성(廢城)이 오늘의 현 경계에 있다.
 
 

고죽성(孤竹城)
 
오늘의 현 동쪽에 있다.
 
殷나라의 제후인 백이.숙제의 나라였다.
 
또 살피건대 <현도기(縣道記)>에는 "고죽성이 비여성 남쪽 2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史記>에는 "제환공이 산융을 정벌하여 북쪽으로 고죽국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또 <隋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죽성 : 漢 靈帝 때 요서태수 <염번廉翻>이 꿈을 꾸니
어떤 사람이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孤竹君의 아들이고 백이의 아우이다.
요해(遙海)에 나의 관곽(棺槨)이 표류하고 있는데
듣기에 우리 태수가 어질고 선량하다 하니 잘 묻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살펴보니 관이 나루 위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에 관을 수습하여 改葬을 하였는데
夷人 가운데 이를 비웃은 사람은 모두 아무 질병도 없이 죽었다."
 
지금 改葬한 장소가 현존하고 있고 산 아래에 있는데 매우 근엄하다.
 
 
 
조선성(朝鮮城)
 
바로 箕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 폐성(廢城)이 있다.
 
 
요서성(遙西城)
 
漢나라 때 여기에 郡을 설치했다.
 
지금 폐성(廢城)이 있다.
 
 
진장성(秦長城)
 
秦나라가 <몽염>으로 하여금 <부소扶蘇>를 보좌하여 축조하게 한 것이다.
 
동서의 길이가 만리에 달한다.
 
<기량杞梁>의 아내가 슬피 곡을 하니 城이 무너져
남편의 유골을 찾았다는 곳이 바로 이 城이다.
 
 

노룡도(盧龍道)
 
<魏志>에 말하기를
 
"曺公이 북쪽으로 烏桓, 전주(田疇)를 정벌할 때 노룡도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노룡새를 나가 산을 절단하고 골짜기를 메우기를 500여 리를 하였고
白檀을 경유하고 平罡을 지나고 白狼에 올라서 유성을 바라보았다"
라고 한 곳이 바로 이 노룡도이다.
 
어떤 사람은 노룡새라 말하기도 한다.
 
지금은 군의 성 서북쪽 200리에 있다.
 
 
망해대(望海臺)
 
漢나라 무제가 세운 것이다.
 
여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태평환우기 권70 平州>
 
 
태평환우기에는 고죽성, 조선성, 요서성이 하북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명은 역사가 흐르면서 여러가지 원인에 의해 변경된다.
 
그러나 오랜 역사가 흐르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그 흔적은 남는 것이
지명이 지닌 특징이다.
 
그런데 중국에 남아있는 한국사와 관련된 지명들은
중국인들의 의도적인 은폐와 말살로 인해 문헌상에는 지명이 나오지만
현재 중국의 지도상에서는 확인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노룡현은 천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의 지도상에 그 이름이 남아있다.
 
물론 가짜 갈석산과 함께 이치되었지만 노룡현이
지금의 난하하류에 있는 하북성 진황도시의 관할 현으로 남아있다.
 
 
 
-  周隴右總管長史 贈太子少保 豆盧公神道碑
 
君의 諱는 永恩이고 子는 某이며 「周書」에는 말하기를
"豆盧寧의 아우이다"라고 하였다.
 
창려(昌黎) 도하(徒河) 사람이다.
 
본성은 慕容으로 燕나라 文明帝 皝의 후예이다.
 
「周書」에는 말하기를
"그 선조의 본래 성은 慕容씨이고 南燕의 支庶이다"라고 하였다.
 
十六國春秋 「前燕錄」에는 말하기를
 
" <모용황>의 자는 元眞이고 <모용외>의 둘째 아들이다.
어렸을 적에 子는 萬年인데 키가 7척 8촌이나 되었다.
 
남자답고 씩씩하여 權略에 능했고 박학하여 材藝가 많았다.
 
晉나라 建武 원년(317)에 진무장군이 되었고
永昌(322-323) 초기에 좌현왕에 임명되었으며,
太寧(323-326) 말기에 평북장군. 조선공에 임명되었다.
咸和 (326-334) 8년에 요동공의 位에 나아갔고 9년에 晉나라에서 謁者를 파견하여
<모용황>을 진동대장군 평주자사 대선우에 임명하였다.
 
외람되게 燕王의 지위에 나아가자 晉나라에서 홍로(鴻矑) <곽침郭忱>을 사신으로 보내
節을 가지고 <모용황>을 시중. 대도독. 하북제군사. 대장군 연왕에 임명하였다.
 
도읍을 龍城으로 옮겼다.
 
그가 서거하자 시호를 文明이라고 하니 왕자 儁이 올린 존칭이다.
 
文明황제를 추존하였다"라고 하였다.
 
朝鮮은 微 마땅히 箕 자로 써야 한다.
 
子를 봉한 땅이고 孤竹은 伯夷의 나라이다.
 
「前燕錄」에 말하기를
 
" <모용황>이 조선공에 임명되었다"라고 말하고 또 말하기를
" 요동공의 지위에 나아갔다"라고 하였다.
 
孤竹은 遙의 땅이다.
 
「漢書지리지」에는 말하기를
" 낙랑군 조선"이라고 하였는데 <응소應劭>는 말하기를
"옛 조선국이다. 武王이 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지리지에는 말하기를
 
"요서 영지에 고죽국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응소>는 말하기를
"옛 백이의 나라이다. 지금 고죽성이 있다."라고 하였다.
 
漢나라 때는 四城이 있었고 秦나라 때는 一侯가 되었다.
 
燕을 말한다
 
「漢書지리지」에는 말하기를
" 昭帝 元鳳 원년(BC80)에 燕國을 고쳐서 廣陽郡이라 하였고
宣帝 本始 원년(BC73)에 다시 國으로 되어
계현(蓟縣).방성현(方城縣). 광양현(廣陽縣). 음향현(陰鄕縣)이 있었다."
라고 하였으니 무릇 四城이다.
 
<揚雄>의 「해조解嘲」에는 말하기를 '西北一侯'라고 하였는데
<銑>은 말하기를
"侯는 遠國에서 내조하는 賓을 사후(伺侯)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官이다.
 
그 선조가 성을 보존하고 씨를 받았으나 처음 유성(柳城)을 보존한 공로이고
나라를 열고 가업을 게승하였으니 비로소 遼陽의 난을 조용하게 만든 것이었다.
 
「前燕錄」에 말하기를
"옛적에 高辛씨가 해빈에서 노닐다가 少子 <염월厭越>을 남겨두어
北夷에서 임금노릇하게 하니 遙左에 살았다.
秦漢시대에는 흉노에게 패배한 바 되어 선비산에 나뉘어 살았다.
 
그래서 다시 이름을 선비라 하게 되었다.
 
<막호발>이 魏나라 때는 여러 부족들을 인솔하고 요서에 들어와 살았는데
사마선왕을 따라 <공손연>을 토벌하는데 공로가 있어 솔의왕에 임명되었으며
비로소 극성(棘城)의 북쪽에서 건국하였다.
 
燕. 代의 소년들이 보요관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몹시 좋아하여 드디어 머리칼을 걷어 올려 그 위에 관을 덮어 쓰니
여러 부족들이 그로 인해서 보요라고 불렀다.
 
그 뒤에 와전되어 慕容으로 되게 되었다.
 
<木延>을 낳았는데 좌현왕이 되었다.
 
관구검을 따라서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공로가 있어 대도독의 호칭을 추가하였다.
 
또 <섭귀>가 柳城을 온전히 한 공훈으로써 선우에 승진 임명되었고
요동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에 점차 호풍을 바꾸어 스스로 말하기를
"二儀의 덕을 사모하고 三光의 容을 계승하여 드디어 慕容으로써 성을 삼았다'
라고 하였다.
 
「漢書지리지」에는 말하기를
"柳城은 요서에 속하고 遙陽은 요동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保姓受氏는 「左傳」에서 나오는 <穆叔>의 말이고
"開國承家"는 「周易」「師卦」 上九의 爻辭이다.
 
....이에 銘을 붙인다.
 
朝鮮이 건국을 하고 孤竹이 임금이 되었다.
 
땅은 고유(高柳)라 호칭하고 산은 밀운(密雲)이라 이름하였다.
 
遼陽은 趙나라가 분열했고 武遂는 秦나라가 분할했다.
 
朝鮮. 孤竹은 注가 本序에 나와 있다.
 
「漢書지리지」에 말하기를
" 代郡 高柳는 서부도위의 치소이다"라고 하였다.
 
「隋書지리지」에 말하기를
" 安樂郡 密雲縣은 後魏 시대에 密雲郡을 설치했으며
백단(白檀).요양(遙陽). 밀운(密雲) 三縣을 관할했다"라고 한다.
 
遼陽은 아마도 漁陽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史記」 趙世家에 따르면
" 悼襄王 9년에 趙나라가 燕나라를 공격하여 이양성(貍陽城)을 취했다."라고 했는데
「正義」에 말하기를
" 燕나라에는 貍陽이 없다.
아마도 貍자는 오류인 듯 하며 마땅히 漁陽으로 보아야 한다.
 
故城이 檀州 密雲縣 남쪽 18리에 있는데 燕나라 漁陽郡城이다.
 
趙나라가 동쪽으로 경계가 영주(瀛州)에 이르니 단주(檀州)는 북쪽에 있었다.
 
趙나라가 燕나라를 공격하여 漁陽城을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地理志」에는 말하기를 "遼陽은 요동군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데 武遂는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漢나라에 있었고 하나는 燕나라에 있었다.
 
「史記」 韓世家에
"襄王 6년 秦나라가 다시 우리에게 武遂를 주었고
9년에 秦나라가 다시 우리 武遂를 취했으며
이왕(釐王) 6년에 武遂 200리를 秦나라에 주었다."라고 하였다.
 
「正義」에는 말하기를
" 위의 武遂와 이 武遂는 다 의양(宜陽)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또 趙世家에는
"悼陽王 2년에 <李牧>을 장수로하여 燕나라를 공격하여 武遂와 方城을 함락시켰다."
라고 하였는데 <徐廣>은 말하기를 "武遂는 안평(安平)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正義」에는 말하기를
"괄지지에 易州의 遂城이 전국시대에는 武遂城이었다'고 했다"라고 하였다.
 
「隋志」에는 말하기를 "上谷郡 遂城을 엣날에는 武遂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이제 모용씨가 본래 燕國에 도읍했다고 했으니 아마도 燕나라의 武遂城을 말한 것이며
 
漢나라 武遂와는 다른 것이다.
 
전국시대에 燕나라는 秦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므로 "무수(武遂)는 秦나라에 의해 분할되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庾子山集 券14 周隴右總管長史 贈太子少保 豆盧公神道碑>
 
유자산집(庾子山集)은 중국 남북조시대 말기 北朝 北周의 저명한 문인이었던
<유신庾信(513-581>의 시문집이다.
 
그는 당시 북조의 대표적인 문학가로서 군공들의 비문을 맡아서 지었으며
두로공신도비(豆盧公神道碑)도 그 중의 하나이다.
 
<豆盧永恩>의 비문은 한국의 고조선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용황>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옮기면서 주요하게 활동한 무대는
요서. 요동 지역이었고 이 지역에는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춘추전국시대까지는
기자조선과 고죽국이 秦나라 때는 一侯가, 漢나라 때는 漢四郡이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선비족이었던 <모용황>의 조상이 처음에 모용으로 성을 정하고
요서에서 개국을 하고 요동으로 도읍을 옮기기까지의 전 과정을 밝히고 있다.
 
高柳는 옛 현의 명칭으로 지금 산서성의 최북단 陽固에 있었고
密雲은 산 이름으로 지금 하북성 북부에 있었다.
 
遼陽은 요동에 속했고 武遂는 지금의 하북성 徐水縣에 있었다.
 
遼陽이 모용 燕의 동쪽 영토였다면 高柳는 모용 燕의 서쪽 경계였을 것이고
武遂는 그 남방 국경선이었을 것이다.
 
이 지역은 바로 기자 조선이 건국을 하고 고죽국이 통치를 하고
한나라가 기자조선 이후 위만조선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한사군을 설치했던지역이며
고구려가 건국하여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킨 곳이다.
 
이제 금석문으로서 566년에 새긴 그 비문이
가감 없이 그대로 현재까지 전해 지고 있으니 우리의 고대사는 다시 써야 한다.
 
고조선의 발상지를 북한의 평양으로 보고 한사군의 낙랑군을 대동강으로 간주하는
그와 같은 치졸한 견해는 아예 학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豆盧公碑文은 이제야 베일을 벗고 우리들 앞에 나타나
요서에 있었던 고조선과 한사군의 역사를 실증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두로영은비문 중의 조선국 기록>
 
현재 유자산집(庾子山集)에 실려 있는 이 비문의 원 비석이
중국 함양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단군조선 略史
 

前檀君(BC 2333-BC 1113) (1세 儉 - 25세 率那)
 
 
BC 2320 <요중(遼中) 12성(城) 축조와 가한성(可汗城) 개축>
 
 
BC 2324년에 요(堯)의 굴복(屈服)을 받은 천사(天使) 유호씨(有戶氏)는
단군왕검 천왕(天王)께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면서,
요(堯)를 믿지 못하니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上疏)도 함께 올렸다.
 
이에 따라,
단군왕검 천왕은 번한(番韓) 땅의 요중(遼中)에 12성(城)를 축조하도록 조치하였다.
 
당시 요수(遼水)가 되는 지금의 조백하(潮白河)를 기준으로
동서 지역에 12성을 축성케 하였던 것이다.
당시 요동지역은 지금의 조백하에서 난하(灤河)에 걸치는 지역이다.
 
이후 BC 2314년에 순(舜)이 요(堯)에게 등용되어 요임금의 사람이 되자,
유호씨는 또다시 단군왕검 천왕(天王)께 이 사실을 보고하고
대책이 시급하다고 고(告)하였으며,
이에 단군왕검 천왕은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한 낭야성(琅耶城)을 개축하도록 하고
가한성(可汗城)이라 부르도록 하였다.
 
BC 2311년 경인년(庚寅年)에 번한 치두남(蚩頭男)이 훙(薨)하고
낭야(琅耶)가 2대 번한(番韓)이 되었다.
 
이해에 가한성(可汗城)의 개축(改築)이 완료되었다.
 
가한성을 일명 '낭(랑)야성'이라 한다.
 
낭야성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낭야'가 개축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BC 2320년경 치두남(蚩頭男) 번한(番韓) 시절부터 시작된
요중(遼中) 12성(城) 축조가
2대 낭야 번한 11년인 BC 2301년 경자년(庚子年)에 모두 완료되었다.
 
이로써 당요(唐堯)의 정세(政勢)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요중 12성은, 험독(險瀆), 영지(永支), 탕지(湯池), 통도(桶道), 거용(渠鄘),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다.
 
 
 
BC 2284 <舜이 천자(天子) 자리를 찬탈하다>
 
 
丙辰(병진, BC2285) 49년.
唐堯(당요)는 舜(순)을 불러 娥媓(아황)과 女英(녀영)을 부인으로 주고
舜(순)에게 섭정시켰고
幽州(유주) 幷州(병주) 營州(영주)를 遼地(료지)에 설치하려 하였다.
檀朝(단조)는 書(서)를 보내 타일러 불가하다고 하니 설치하지 않았다
 
丁巳(정 사, BC2284) 50년.
舜이 堯 임금을 유폐시키고 天子에 올라
병주(幷州), 유주(幽州),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다.
 
 
 
BC 2283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다>
 
무오 51년(BC 2283) 7월 5일에 셋째 아들 <부우扶虞>를 강화(江華)에 보내
전등산(傳燈山)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게 하시며,
제천단(祭天壇)을 마니산(摩尼山)에 쌓고 하느님께 제사하시니,
동방 민족이 하느님께 제사하는 풍속은 시조 단제(檀帝)때부터 시작되었다.
{천단제도(天壇制度)는 천일지이(天一地二)를 따라 돌을 두 개 세우고
그 위에 돌 하나를 덮었다.}
 
단군왕검은 삼한(三韓)으로 관경(管境)을 나누었으며,
마한(馬韓)에 웅백다(熊伯多)를 봉하여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게 하고
마한산(馬韓山)에 올라 하늘에 제(祭)를 올리게 하였다.
 
웅백다(熊伯多)는 다(多)라는 이름을 가진 웅백(熊伯)이라는 말이며
웅씨(熊氏)인 백작(伯爵)으로서 이름이 다(多)가 되어,
단군왕검에 의하여 백작이 비왕(裨王)인 마한(馬韓)으로 승격된 것이다.
 
달지국(達支國)은 백아강(白牙岡)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금의 한반도 평양(平壤) 자리이다.
 
마한산(馬韓山)은 백아강에 있던 산으로서 BC 2283년에
혈구(穴口, 강화도)의 마리산(摩離山) 참성단(塹城壇)이 축성되기 이전에
하늘에 제(祭)를 올리던 제천단(祭天壇)이 있던 곳이다.
단군왕검이 웅백다로 하여금 마한산에 올라 제천(祭天)하게 하고 조서(詔書)를 내려
 
“사람이 거울을 보면 곱고 더러운 것이 저절로 나타나고,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다스림과 어지러움이 정치에 나타나느니,
거울을 보면 모름지기 먼저 모습을 보고, 임금을 보면 모름지기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하셨다.
 
이에 마한 웅백다는
“거룩하신 말씀이시어!
성스런 임금은 능히 무리들의 뜻을 따르는 까닭으로 도(道)가 크며,
어리석은 임금은 독선(獨善)을 잘 쓰는 까닭으로 도(道)가 작사오니,
반드시 안으로 살펴서 게으르지 않겠나이다” 하였다.
 
 
 
BC 2267 <태자 부루가 순에게 오행치수법을 전하다>
 
갑술 67년(BC 2267)에 단군(帝)은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였다
태자는 도산(塗山)에서 우(虞) 사공(司空)을 만났다
태자는 오행치수지법을 전해주고 여러 가지를 따져 국경을 정하였다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두 주의 땅이 우리에게 속하게 되었고
회대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를 두어 다스렸다
이 일은 우순<虞舜>에게 감독하도록 하였다. 
 
 
<舜>의 선조는 원래 神巿 天皇 때에 우부(于部){지금의 연해주 지역} 사람이다.
<舜>은 諸馮(제풍){속설에는 西豊(서풍)이라 하였다.}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처음으로 12주를 두었는데,
병주(幷州)를 기주(冀州) 동북쪽 항산(恒山)의 땅에 설치하였고,
유주(幽州)를 병주의 동북쪽 의무려(醫巫閭)의 땅{遼西지역}에 설치하였으며,
영주(營州)를 청주(靑州){藍國}의 서쪽 땅에 설치하였다.
 
帝는 태자 <夫婁>를 <舜>의 수규(首揆) <禹>에게 보내
도산(塗山)에서 모여   국경을 논하여 정하고
영주(營州)와 유주(幽州)를 다시 회복하여 檀朝에 소속시켰다.
 
帝(제)가 말하길
 
“일찍이 천하 산천을 내려보고 제후국들의 토지를 살펴보았는데,
청구(靑丘)는 곧 밭과 들을 열고 농업을 발전시켰는데 풍토와 날씨가 따뜻하여
오곡이 풍요하니 백성들이 모두 옷을 가볍고 따뜻하게 입었으며
자못 옷에 갓과 띠를 두르기도 하였지만 劒의 문화와 武威가 역시 함께 발전하였다.
 
亻數侲(속진){숙신}은 곧 땅의 기운이 강하고 차가워서 오곡에 마땅치 아니하였고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서 목축하기에 자못 적당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활과 검을 차고 유렵(遊獵)하게 하였으니
후세에 그 백성들이 점차로 黑水의 땅으로 들어가 어렵(漁獵)이 일이 되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검소하고 거친 가운데서도 굳건하였으니
무리들이 弓馬를 익히었다.
 
藍國은 곧 먼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병기를 익혀 항시 서남쪽을 보호하였다.
 
또한 그 백성은 여러 번 해대(海岱)의 땅으로 옮겨가서
후세에 中土의 여러 나라와 항시 서로 싸워 각축하였다.
 
經에 이르기를
“비록 음식이 풍족하고 재화가 유통된 후에야 국가가 틈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곁눈질하여 곡식을 염려하게 만들면
곧 다시 어떻게 한가롭게 예의에 대하여 말하겠는가?
 
비록 그러할지라도, 하늘이 땅을 덮고 땅은 하늘을 이고 있으니
구역이 각자 다르며 따라서 기후도 차고 따뜻하며 토지도 비옥하거나 척박하니,
그것이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못한 것과 같다.
 
어찌 이와 같은가?
세 곳이 나라를 지키는 것과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각각 다른 것이다."
 
 
 
※  참고 <요순시대 9년 대홍수와 오행치수법>
 
BC 2314년에 요임금에게 등용된 순(舜)은
20년이 지난 BC 2294년 50세이던 해에 섭정(攝政)이 되었다.
 
그런데, BC 2288년에 대홍수가 발생하였다.
이 대홍수는 소위 요순시대 9년 대홍수라 불린다.
 
황하 이남으로 양자강에 걸치는 대홍수였다.
섭정을 하던 순(舜)은 곤(鯤)에게 치수를 맡겼다.
 
치수를 맡은 곤(鯤)은 여러모로 궁리를 하며 치수에 힘썼으나
물에 잠긴 땅은 여전하여 백성들의 삶은 궁핍하기 그지 없었다.
곤은 결국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치수에 성공치 못하고 9년이나 끌게 되었다.
 
BC 2284년 정사년(丁巳年)에
단군조선의 우수주(牛首州){한반도 강원도} 지역에도 대홍수가 발생하였다.
 
이때 단군왕검 천왕은 풍백(風伯) 팽우(彭虞)에게 치수를 맡겼으며,
이에 팽우는 큰 피해 없이 치수에 성공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고,
우수주에 치수기념비를 세웠다.
 
단군조선에는 치수의 비결을 알고 있었으며 유효적절하게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 치수법(治水法)이란 신시(神市) 황부(黃部)의 중경(中經)에 실린 비결(秘訣)로서,
BC 2700년경 배달국의 자부선인(紫府仙人)이
해와 달과 오행(五行)의 수리(數理)를 따져서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인 칠성력(七星曆)을 만들었고,
뒤에 창기소(蒼其蘇)라는 사람이 오행(五行)의 법(法)을 부연하여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밝혔던 그 치수법이다.
 
소위 오행(五行)은 수목화토금(水木火土金)이며,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의 이치로 물을 다스리는 법칙을 만드니
곧 오행치수법인 것이다.
 
요순시대 9년 대홍수와 단군조선의 대홍수에 관한 역사가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화악산 설화에 전한다.
 
이 설화에는 고대중국의 천자(天子)인 순(舜)임금과 단군(檀君)의 사자(使者)로서
단군(檀君)으로 상징화되어 묘사되는 순의 동생 유상(有象)과의 대적(對敵) 관계 및
치수기념비가 돌로 된 배(舟)로 변형묘사되어 전해지고 있다.
 
BC 2280년 순(舜)은 우산(羽山)에서
곤(鯤)에게 치수에 실패한 죄를 물어 처형하였다.
 
이에 순임금은 곤(鯤)의 아들 우(禹)에게 치수를 맡겼다.
 
이 우(禹)가 사공(司空)의 벼슬을 맡아 치수를 담당한 것이다.
 
사공(司空)은 당시 건설담당으로서 치수를 겸하였던 것이 된다.
 
그래서 우(禹)를 우(虞) 사공(司空) 우(禹)라 한다.
 
우(虞)는 순임금의 나라이름이다.
 
이리하여 이후 사공(司空) 우(禹)의 13년간의 치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BC 2280년에 아버지 곤(鯤)의 뒤를 이어
요순시대 9년 대홍수의 치수를 맡게 된 우(禹)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온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우(禹)의 치수에 대한 노력이 사기(史記) 등
중국기록에 구구절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치수의 성공에 관한 역사는 신화식으로 비밀스럽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며,
심지어는 실제의 역사를 숨기고
전적으로 우(禹)의 공로(功勞)로 만들어 놓고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虞) 사공(司空) 우(禹)의 치수(治水)의 역사는
실제로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치수(治水)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舜)의 요청으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이 주관(主管)하여
BC 2267년에 치수법(治水法)을 우(禹)에게 전수(傳授)함으로써,
치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BC 2280년부터 치수에 전념하던 우(禹)는 BC 2267년까지
13년이나 지나도록 치수를 완성치 못하였는데,
BC 2288년 대홍수가 발생한 때부터 벌써 22년이나 되었다.
 
BC 2267년 연초에 천자(天子) 순(舜)의 구구절절한 상소문이
상국(上國)인 단군조선 조정(朝廷)에 도착하였다.
 
천자(天子) 순(舜)이 올린 상소문을 읽으신 단군왕검 천제께서는,
물에 빠진 천제폐하의 백성들을 하루빨리 구해 달라 간청하는 글들로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으므로,
망설임없이 조정(朝廷)의 신하였다가 도(道)를 어기고
허락이나 윤허없이 스스로 천하(天下)의 천자(天子)가 된
불충(不忠)하였던 순(舜)의 죄과(罪過)를 한꺼번에 모두 용서하셨다.
 
그리고 곧바로 진한(眞韓)으로서 섭정(攝政)을 맡고 있던
태자부루(太子扶婁)에게 명하여,
순(舜)의 구원요청에서 나아가 직접 가서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관(主管)하여
치수법(治水法)을 전수(傳授)하여 주고,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라 하였다.
 
이에, 태자부루는 400여년전인 BC 2700년경
배달국 시대 자부선인(紫符仙人)이 정리한 역(易)에 따라
창기소(蒼其蘇)라는 분이 오행(五行)의 원리를 적용하여 정리한 치수법(治水法)을
황부중경(黃部中經)이라는 책에서 발췌하여 준비하였다.
 
또, 치세(治世)의 법(法)을 정리하여 모두 9개 항목으로 나누어 책을 만들었다.
이것이 소위 홍범구주(洪範九疇)라 불리는 책이다.
 
태자부루는 천부왕인(天符王印)이라는 왕권(王權)을 증명하는 증표와
신침(神針)이라 불리는 자(尺)와 황구종(皇矩倧)이라는 보물을 준비하였다.
 
천부왕인은 천부왕(天符王) 즉 하늘의 뜻에 따르는 임금으로서의 증표인 바,
단군조선 천제(天帝)가 천하의 왕에게 부여하는 왕권의 증거물인 것이다.
 
신침(神針)은 자(尺)의 일종으로서 높이와 넓이 등을 재는 도구이다.
둑을 쌓고 물길을 트는 데 중요한 측정기구인 것이다.
 
황구종(皇矩倧)은 임금이 가르치는 홍범(洪範)으로서,
천지자연의 원리인 오행의 원리와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나 철학 등을 담은 가르침인 것이다.
즉 소위 홍범구주(洪範九疇)인 것이다.
 
BC 2267년 갑술년(甲戌年)에
단군왕검의 명을 받아 준비를 끝낸 천사(天使) 태자부루는
번한의 수도 험독(險瀆){今 산해관 유역}에 들러 번한 낭야(琅耶)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번한 낭야의 보좌를 받으며
산동지역의 가한성(可汗城)에 도착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야성(琅耶城)으로서 BC 2311년에 개축되었으며,
번한(番韓)의 5덕지(德地) 중의 하나로서 남경(南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태자부루는 이곳에서 반달간을 머물면서 민정(民情)을 청문(聽聞)하였다.
 
이때 순임금은 천국(天國)의 진한(眞韓) 태자부루가 사자(使者)로서
파견되어 오셨다는 보고를 접하자마자 곧바로 태자부루를 알현(謁見)하였다.
 
이리하여 태자부루는
순(舜)임금의 예방(禮訪)을 받고서 홍수에 관한 상황을 보고 받았으며,
시월(時月)을 협의(協議)하여 정하고 율도량형(律度量衡)을 맞추었다.
 
태자부루는 단군왕검 천제(天帝)의 아들인 천제자(天帝子)이며
진한(眞韓)으로서 섭정(攝政)인 바,
천국(天國)의 본 임금인 천제(天帝) 아래의 비왕(裨王)인 천왕격(天王格)이다.
 
한편, 순(舜)임금은 천하의 나라 즉 지방의 왕인 천자(天子)로서
천국(天國)의 자작(子爵)인 제후격이다.
 
순임금이 단군조선의 사자인 태자부루를 찾아 뵈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을
중국기록에서는 사근동후(肆覲東后)라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 동후(東后)는 진한(眞韓) 태자부루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지방의 제후인 천자(天子)가, 천제(天帝)의 사자(使者)로 오신
중앙조정의 비왕(裨王)인 천제자(天帝子) 즉 천왕(天王)을 알현하였다는 것이 된다.
 
진한 태자부루는 낭야성(琅耶城)에 반달간 머무는 사이에
번한(番韓) 낭야(琅耶)에게 명하여 경당(扃堂)을 크게 일으키게 하고,
산동(山東)이라 불리는 지역의 기준이 되는 태산(泰山)에서
삼신천제(三神天祭)를 올리도록 하였으며,
이에 번한 낭야는 태자부루의 명을 받들어 사람을 시켜
태산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게 하니,
이때부터 회대지역(淮岱地域) 즉 산동지역과 회수(淮水)에 걸치는 지역에서
제천행사가 유행하게 되었다.
 
경당(扃堂)은 미혼의 자제(子弟)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자 심신수련기관이다.
경당은 소도(蘇塗) 옆에 설치하여 육예(六藝)를 닦던 곳으로서,
독서(讀書), 습사(習射), 치마(馳馬), 예절(禮節), 가악(歌樂),
권박일술(拳搏釰術)을 닦게 하였다.
 
즉 학문을 닦고, 활을 쏘고,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고,
격투기와 일술(釰術)을 익혔던 것이다.
 
특히 일술(釰術)은 실제 검을 쓰는 검술이 아니라
수련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무딘 칼을 사용하는 검술(劍術)이다.
 
단군조선의 경당제도가 후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고구려 때에도 경당(扃堂)이 있어 미혼의 자제들이 심신수련을 하였는 바,
곧 선인도랑(仙人徒郞)이 그들이며, 신라에도 있었으니 곧 화랑도(花郞徒)이다.
 
신라의 화랑제도가 산동지역에 있었던 주(周)나라의 제후국이던
노(魯)나라 등지의 제도에서 연유하였다 하는 등의 기록은
모두 그 근거가 있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 초기에 행해졌던 경당제도가 주나라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의 무대이던 산동지역에서 제천행사(祭天行事)와 함께
대대로 이어져 시행되었던 것이다.
 
태자부루는 산동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가한성(可汗城, 낭야성)에서의 일을 마치고
번한 낭야를 대동하고서 도산(塗山)을 향하여 남쪽으로 행차하였다.
 
도산(塗山)은 회수(淮水) 하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회수 남쪽은 양자강의 하류에 해당한다.
 
홍수의 범람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사악에 걸쳐 있었다.
우(禹)가 치수기념비(治水記念碑)를 세운 곳이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남악(南岳) 형산(衡山) 구루봉인 것을 보면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남쪽지역이 홍수가 가장 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BC 2280년부터 BC2267년 갑술년까지 13년이 지나도록 치수(治水)에 성공치 못하여,
모산(茅山, 회계산)에 올라 중원 땅을 개화(開化)하신
천군(天君) 태호복희씨를 참배하였다가,
자허선인(紫虛仙人)의 가르침을 받아 순임금에게 간(諫)하여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의 조정에 치수(治水)의 구원(救援)을 요청하게 하였던
사공(司空) 우(禹)는, 그 이후로 택일을 하여 목욕재계하면서
천사(天使)를 영접(迎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허선인(紫虛仙人)의 가르침을 받기 이전에,
치수에 진척이 없던 우(禹)는 동서남북의 사악(四嶽)에 올라
아무리 궁리를 하여도 방책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던 차에 자허선인으로부터 태자부루를 반드시 뵙게 되어
치수법(治水법)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던 말씀을 들었던 것이며,
이때 우(禹)는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에 찼고,
이후 매일매일 목욕재계로써 정성(精誠)을 다하면서 기다렸던 것이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단군조선 조정에서 파견할 천사(天使)로서 진한(眞韓) 태자부루가
단군왕검 천제(天帝)의 명을 받아 친히 행차하실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우(禹)는
그날로부터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우(禹)는 택일하여 회계산에 올라 백마(白馬)를 잡아 하늘에 제(祭)를 올리고
백일동안 목욕재계하였다.
매일매일 삼신(三神)께 제사를 지냈다.
 
그러던 중 우(禹)는 천사(天使)의 임무를 띠고 오시는
태자부루를 꿈에서 수차례 뵙기도 하였다.
 
오월춘추(吳越春秋) 무여외전(無餘外傳)에는
우(禹)가 꿈에 붉게 수(繡)를 놓은 옷을 입은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를 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수사자(蒼水使者)가 곧 태자부루인 것이다.
 
현이(玄夷)는 방향으로 보면 북쪽에 위치한 이(夷)인데,
순임금의 나라에서 보면 단군조선은  동북쪽에 위치한다.
 
한편, 한배달조선의 구족 중에 현족(玄族)이 있어
지금의 흑룡강 유역에 걸쳐 살고 있었다.
 
이로써 현이(玄夷)는 북쪽에 위치하였던
단군조선 본국 조정(朝廷)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창수(蒼水)는 그냥 푸른 물로서 동쪽의 물이 아니라 동북쪽에 있는 검푸른 물이다.
다른 말로 북극수(北極水)인 것이다.
 
그리하여 창수사자는 북극수의 사자이며,
북극수는 곧 천제(天帝)가 머무는 곳인 바,
고로 창수사자(使者)는 천제의 사자인 천사(天使)인 것이다.
태자부루가 곧 천사(天使)이다.
 
태자부루는 순임금과 시월(時月)과 율도량형(率度量衡)을 맞추었다.
그리고 태자부루는 순임금에게 도산회의 때
사공(司空) 우(禹)에게 치수법(治水法)을 직접 전수할 것이며,
그때 천제(天帝)께서 명(命)한 바를 함께 전달할 것이라 일러 주었다.
 
BC 2357년 이복형인 제지(帝摯)를 쳐서
유웅국(有熊國)의 천자(天子) 자리를 차지하였던 요(堯)가 당(唐)을 세우고,
마음대로 구주(九州)를 나누며 제왕(帝王)을 참칭(僭稱)하면서,
배달나라의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을 폐하고
명협(蓂莢)이라는 풀에 의지하여 태음력(太陰曆)을 전용하였다가,
순(舜)이 천자(天子)로 윤허(允許)되는 과정에서 이때에 이르러
단군조선과 역법(曆法)을 협의하여 맞추고, 측정단위를 맞추었던 것이다.
 
홍범구주(洪範九疇)에 협용오기(協用五紀)라 하여
세(歲), 월(月), 일(日), 성신(星辰), 역수(曆數)를 협의하여 사용하라 적고 있는 바,
역법(曆法)은 경도(經度)와 위도(緯度)에 따라 다르므로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이어서, 협의하여 조정해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歲)는 연단위로서 60갑자(甲子)를 사용하여 태세(太歲)로 셈하며,
월(月)은 달의 주기를 기준으로 하여 60갑자(甲子)로 셈하며,
일(日)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60갑자(甲子)로 셈한다.
 
성신(星辰)은 북극성, 북두칠성,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오행성(五行星)과
28수(宿) 등을 가리키며, 해와 달과 함께 역법(曆法)의 기초가 된다.
 
우리 한배달조선의 역법은 그냥 해를 기준으로 한 태양력(太陽曆)만도 아니며,
달을 기준으로 한 태음력(太陰曆)만도 아니며,
별의 운행을 관측하여 적극 활용한 성력(星曆)을 곁들인
태양태음성력(太陽太陰星曆)인 것이다.
 
태자부루께서 천사로서 치수(治水)를 위하여 행차하신다는 소식을 들은 순(舜)임금은
제후격인 사방(四方)의 신하인 사악(四嶽)을 모두 거느리고,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청도(靑島) 지역인 가한성(可汗城)으로 와서
천국(天國)의 사자(使者)인 천제자(天帝子) 진한(眞韓) 태자부루를 알현하였던 것이다.
 
이때 순임금은 76세였고, 태자부루는 순임금보다 몇 살 아래였다.
 
그러나, 태자부루는 천제자로서 천왕격의 임금이며,
순임금은 천왕 아래 지방의 제후격인 천자(天子)였다.
 
천왕은 하늘나라의 임금이며,
천자는 땅나라의 임금으로서 그 격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천제(天帝), 천왕(天王), 천군(天君)은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낼 권한을 가지나,
천자(天子)는 천상의 임금이 아니라
인간세상인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천하왕(天下王)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권한이 없으며,
단지 천제, 천왕의 명을 받아 지낼 수 있을 뿐이고,
천자가 하늘에 고(告)하는 의식은 천제(天祭)가 아니라 봉선(封禪)인 것이다.
 
즉 봉선은 스스로 천자가 되었음을 천제, 천왕에게 보고하는 의식인 것이다.
 
도산(塗山)에서 태자부루는 번한(番韓) 낭야(琅耶)를 통하여
회의준비를 완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번한이 감독하여 모든 사항을 끝냈다.
 
즉 도산회의는 단군조선이 주관한 회의로서,
천사인 태자부루가 우순(虞舜)이 파견한 사공 우(禹)에게
단군왕검 천제(天帝)의 명(命)을 전하고
치수법(治水法)을 전수(傳授)하는 회의였던 것이다.
 
드디어 치수담당 사공(司空) 우(禹)가 백마제(白馬祭)를 지내면서
석달열흘 즉 백일기도(百日祈禱)를 하며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우(禹)는 정성을 다하여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단정히 하여 회의석상에 미리 와 앉아서 기다렸다.
 
천사 태자부루가 번한을 대동하고 회의석상에 나타나 자리를 잡자,
미리 와서 기다리던 치수관계자들이 일제히 기립하여
삼육대례(三六大禮)를 올리고 착석하였으며, 곧이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에 번한(番韓) 낭야(琅耶)가 사회(司會)를 보면서
진한(眞韓) 태자부루께서 친히 왕림(往臨)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태자부루께 자리를 내어 드렸다.
 
태자부루께서 자리에 나서자 우순(虞舜)이 보낸 사공(司空) 우(禹)는
천사(天使) 태자부루께 삼육대례(三六大禮)를 올린 후
무릎을 꿇고 경청할 자세를 취하였다.
 
번한(番韓) 낭야(琅耶)가 천사(天使) 태자부루를 받들어
사공(司空) 우(禹)에게 대신 이르기를,
 
“나는 북극수(北極水) 정자(精子)이니라.
너의 임금(后) 순(舜)이 나에게 청하여
물을 다스리고 흙을 건짐으로써 백성을 구제(救濟)하기를 바라므로,
삼신상제(三神上帝)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기꺼이 나를 보내어 돕게 하시니 이렇게 내가 왔느니라.” 하였다.
 
곧이어, 단군조선의 글자인 전문(篆文)으로 된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내어 보이며,
“이를 패용하면, 능히 위험이 닥쳐도 위태롭지 아니하며,
흉한 것을 만나도 해(害)를 입지 아니하느니라.” 하고,
이어서,
“또, 여기에 신침(神針) 하나가 있어 능히 물이 깊은지 얕은지 측정할 수 있으며
그 쓰임이 무궁하니라.” 하였다.
계속하여,
“또 여기에 황구종(皇矩倧)이라는 보물이 있으니,
무릇 위험한 물을 진압시켜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느니라.
내가 이 세가지 보물을 너에게 주노니,
나 천제자의 큰 가르침을 거스르지 아니하면 가히 큰 공을 이룰 것이니라” 하였다.
 
태자부루는 천부왕인, 신침, 황구종의 세가지 보물을
무릎을 꿇고 경청하고 있던 우에게 건네주게 하시었다.
 
이에 사공(司空) 우(禹)는 다시 삼육대례(三六大禮) 즉 삼육구배(三六九拜)를 행한 후,
일어서서 나아가 아뢰며,
“부지런히 천제자의 명(命)을 받들어 행하여,
우리 순임금의 크게 여는 정치를 도움으로써,
삼신(三神)께서 지극히 기뻐하시도록 보답하겠나이다” 한 후,
천사 태자부루로부터 세가지 보물을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받았다.
 
이어서, 태자부루께서 사공(司空) 우(禹)에게 황구종(皇矩倧)에 담긴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며 치수법(治水法)을 비롯한 치세(治世)의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황구종이 소위 금간옥첩(金簡玉牒)이며,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이 기록되어 있는 신서(神書)로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인 것이다.
 
이 치수법을 중국기록인 서경(書經)의 주서(周書) 홍범(洪範)편과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의 홍범구주(洪範九疇) 서문에서는
하늘(天)이 우(禹)에게 내려 주셨다(天乃錫禹洪範九疇)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금간옥첩이라는 글자에서,
금판(金版)에 옥(玉)으로 글자를 새겨 넣은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글자는 곧 단군조선 초기의 신전(神篆)문자로서 상형문자인 진서(眞書)인 것이다.
 
단군조선의 상형문자는 곧 배달나라 상형문자로서
지금의 한자(漢字)의 원류가 되는 글자이다.
 
신서(神書)라 함은 보통의 책이 아니라
신령스런 책이란 말이며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홍범구주는 그 내용이 모두 9가지를 담고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홍범구주(洪範九疇)의 9가지 내용은,
오행(五行), 경용오사(敬用五事), 농용팔정(農用八政), 협용오기(協用五紀),
건용황극(建用皇極), 예용삼덕(乂用三德), 명용계의(明用稽疑), 염용서징(念用庶徵),
향용오복(嚮用五福) 위용육극(威用六極)이다.
 
천부왕인(天符王印)은 천부(天符)가 새겨진 왕인(王印)이며,
왕인(王印)은 왕권(王權)을 증거하는 징표이다.
 
즉 천부왕인은 단군조선 천제께서 왕권을 부여하는 증거물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천부왕인을 받은 사공(司空) 우(禹)는 왕권(王權)을 발동하여
인력(人力)을 동원하고 부역(負役)을 시킬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산동지역과 회수에 걸치는 지역은,
단군조선의 번한관경 내 제후국인
남국(藍國)과 청구국(靑邱國)이 위치하는 지역으로서,
단군조선의 허락이 없이 제후국 천자인 순(舜)이
임의로 인력을 동원하거나 산천토지를 개척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는,
영토 침탈행위로서 제후국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침(神針)은 자(尺)이다. 자는 길이와 폭을 재는 도구이다.
둑을 쌓고 물길을 파는 데 수치를 재는 것은 필수이다.
 
당장의 치수만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대홍수가 발생하더라도
물이 넘치지 않도록 둑을 만들고 물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황구종은 임금의 큰 가르침으로서 홍범(洪範)이며,
9가지 범주로 되어 있어 구주(九疇)라 하여, 홍범구주라고 하는 것이다.
 
BC 2267년 도산회의에서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진한(眞韓) 태자부루께서
우순(虞舜)의 신하 사공(司空) 우(禹)에게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중심으로
전수(傳授)하여 준 홍범구주에 대하여 알아본다.
 
홍범구주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담고 있다.
 
자연의 이치를 정치제도로 응용한 것이 된다.
 
여기서는 서경의 주서에 나오는 홍범구주와
사기의 송미자세가에 나오는 홍범구주를 내용으로 하여
그 서문과 본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기고 수(受)를 죽여 무경(武庚)을 세우니,
기자(箕子)가 돌아가 홍범(洪範)을 만들었다.
 
13년인 BC 1122년에 왕이 기자를 찾아갔다.
왕이 말하여 이르기를,
“오호, 기자여! 천하가 길잡히고 백성들이 서로 돕고 살게 되었으나,
나는 그 이륜(彛倫)이 어떠한 것인지 모르노라!”하니,
기자가 말하여 가로되,
“옛날에 곤(鯤)이 홍수를 막다가 오행(五行)을 잘못 펼치니 임금(帝)께서 진노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마련하여 주지 아니하시니 이륜이 막혔으며,
곤이 사형에 처해지고 우(禹)가 이어서 일으키니,
하늘(天)이 우(禹)에게 홍범구주를 내리시어 이륜이 펼쳐지는 바 되었습니다!”하였다.
<상서(尙書)의 주서(周書) 홍범편 서문>
 
 
주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쳐서 은(殷)나라를 이겼다.
미자(微子)는 이에 은나라의 제기(祭器)를 지니고 군문(軍門)으로 나아갔다.
옷은 헤지고 이마는 묶었으며, 왼손에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에는 띠풀을 쥐었다.
무릎을 끌며 앞으로 가서 고하였다.
 
이에 무왕이 미자를 풀어 주고 옛 자리로 복귀시켜 주었다.
 
무왕은 주(紂)의 아들 무경(武庚)을 녹보(祿父)로 봉하였으며,
관숙과 채숙으로 하여금 사부(師傅)가 되게 하고 보좌하도록 하였다.
 
무왕이 이미 은나라를 이기고서 기자(箕子)를 방문하였다.
 
무왕이 이르기를,
“오! 하늘과 땅이 평정되고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여 살고 있으나,
나는 그 상륜(常倫)이 펼치는 바를 모르노라!” 하였다.
 
기자(箕子)가 대답하여 가로되,
“옛날에 곤(鯤)이 홍수(鴻水)를 막으매, 오행(五行)을 잘못 펼쳤고,
임금께서 홍범구등(鴻範九等)의 상륜이 펼치는 바를 따르지 아니하는 것에
진노하였습니다. 곤은 사형에 처해졌고, 우(禹)가 이에 이어서 일어나니,
하늘(天)이 우(禹)에게
홍범구등(鴻範九等)의 상륜(常倫)이 펼치는 바를 내리셨습니다” 하였다.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홍범구등(洪範九等) 서문>
 
 
홍범구주(洪範九疇)
 
첫번째는 오행(五行)이라(初一 曰 五行).
오행은 자연, 특히 땅의 세상인 지구와 관련된 다섯가지 성질을 가리킨다.
 
두번째는 오사(五事)를 받들어 사용함이라(次二 曰 敬用五事).
오사는 사람과 관련된 다섯가지 즉,
얼굴(용모), 입(말), 눈(봄), 귀(들음), 머리속(생각)의 일이다.
 
세번째는 팔정(八政)을 농사짓 듯 운용함이라(次三 曰 農用八政).
팔정은 나라의 정치와 관련된 여덟가지 일이다.
한배달조선의 삼사오가(三師五加)의 정사(政事)와 관련된다.
 
네번째는 오기(五紀)를 협의하여 사용함이라(次四 曰 協用五紀).
오기는 하늘과 관련된 다섯가지 근본이다.
 
다섯번째는 황극(皇極)을 세워 사용함이라(次五 曰 建用皇極).
황극은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과 관련된 일이다.
 
여섯번째는 낫으로 베듯 삼덕을 절도있게 사용함이라(次六 曰 乂用三德)
 
일곱번째는 계의(의심나는 것을 숙고함)를 명확히 밝혀 사용함이라
(次七 曰 明用稽疑).
 
여덟번째는 여러 징조를 유념하여 사용함이라(次八 曰 念用庶徵).
 
아홉번째는 오복을 펼쳐 사용함이요,
육극을 위엄있게 사용함이라(次九 曰 嚮用五福 威用六極).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
 
오행치수법이 과연 무엇일까?
 
오행의 상관관계로 인하여 치수법을 설명한 것이 틀림없을 것인데,
삼신오제설의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에 관한 내용에는
각각의 사명(司命)과 주관(主管)을 적고 있다.
 
오행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원리를 설명하여 치수법에 적용시킨 것이다.
 
물을 진압한다 즉 다스린다는 것은 우선 급한 홍수는 물을 막아 진입을 막고,
물의 흐름을 파악하여 물길을 열어주고,
물이 다른 곳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필요한 곳에 물이 모이도록하며,
차후에라도 물이 범람하지 않도록 조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우선 물이 더이상 침입하지 못하도록 둑을 만들어 막는 것이 필요하며,
다음에 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물길을 트고 물길따라 둑을 만들어 넘치지 않게 하며,
둑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고,
다음에 큰물이 나도 홍수가 나지 않도록 미리 물길과 둑을 완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물을 막으려면 둑을 쌓아야 하는데, 둑을 쌓으려면 흙이 필요하다.
즉 일반적으로 토(흙)가 수(물)를 막을 수 있으므로
토극수(土克水)의 원리를 이용하여 둑을 만든다.
 
다음, 만든 둑을 지키려면 튼튼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물이 부딪쳐도 깎이지 않고 유지될 수 있어야 하므로
밑부분을 돌로 쌓으면 안전하게 할 수 있으니 금생수(金生水)의 원리를 이용한다.
즉 돌구멍사이로 물이 들락날락 하면서
벽을 깎아내지 않고 조화롭게 흐름의 속도를 줄이는 효과도 있으면서 안전하다.
 
둑도 물길의 반대편과 윗부분은 물이 새지 않아야 하고
큰비가 와도 무너지지 않아야 하므로 흙을 견고하게 하여야 한다.
즉 둑에 나무막대를 박거나 흙을 다지고 그위에 나무를 심어서
나무뿌리로 하여금 흙을 유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목극토(木克土)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 된다.
 
산사태가 나지 않도록 산에도 나무를 많이 심으면 홍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나무막대를 만들려면 연장을 이용하여야 하는데 연장은 금(金)으로 만든 것을 쓴다.
이것이 금극목(金克木)의 원리이다.
 
연장을 만들려면 금을 녹여서 만들어야 하므로 불이 필요하다.
이것이 화극금(火克金)의 원리이다.
 
둑에 나무를 심어 놓으면 큰비가 와도 나무가 자라면서 뿌리로 물을 머금어
천천히 내어 놓으므로 흙이 무너지지 않고 둑을 유지하게 된다.
이것이 수생목(水生木)의 원리이다.
 
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베어서 태워서 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목생화(木生火)의 원리이다.
 
불이 타고 남은 것이 재인데, 이 재는 바로 흙이다.
이것이 화생토(火生土)의 원리이다.
 
흙은 다져서 단단하게 만들거나 불로 구우면 돌과 같이 만들 수 있다.
이것이 토생금(土生金)의 원리이다.
 
돌은 흙이 변한 현상이며, 금(金)의 성질을 가진다.
 
단군조선의 태자부루가 우(虞) 사공(司空) 우(禹)에게 위와 같은
오행의 상생상극의 원리를 이용하여 치수법을 전수하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배달나라 시대에 창기소라는 사람이 자부선인의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에 나타난
오행성(五行星)의 오행(五行)을 적용시켜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부연(敷衍)하였다
는 기록에서 더더욱 그렇다.

 
※ 참고 <우순(虞舜)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순舜>은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중국의 신화 속 군주의 이름으로,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가운데 오제의 마지막 군주이다. 일명 순(舜)임금이다.
<순舜>은 전욱 '고양'의 후손으로 성은 우(虞), 이름은 순(舜), 중화(重華)이다.
간혹 <순舜>을 제순유우(帝舜有虞)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우(虞)나라을 다스리던(有虞) 순임금(帝舜)'이라는 말이다.
고대에는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성씨(姓氏)를 정할 때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였다.
 
<순舜>이 '고양'의 후손이라면 고(高)씨여야 하는데, 왜 우(虞)씨가 된 것일까?
고양의 후손인 <순舜>의 집안은 아버지 대에 몰락하였고
<순舜>의 어머니는 화병으로 죽었다.
 
그 후 <순舜>의 아버지는 재혼을 하였고, <순舜>은 계모 밑에서 자랐다.
 
후에 계모가 <상象>을 낳자, <순舜>은 계모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여
우(虞, 중국동북부)지역으로 숨어 버렸다.
 
이 우(虞) 지역이 바로 하북성과 산동성 경계지역이다.
 
이곳은 물이 많은 곳으로 늘 홍수를 걱정해야 하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자수성가한 <순舜>은 전대의 <요堯>{五帝의 4번째 임금)에게 발탁되어
<요堯>의 사위가 된다.
 
그 후 <요堯>는 <순舜>을 후계자로 삼았다.
 
그때 붙여진 성이 우(虞)씨이다.
 
그래서 그는 고순(高舜)이 아닌 우순(虞舜)이 된 것이다.
 
이후 <순舜>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 치산치수에 성공한 <우禹>를 후계자로 삼고
우(虞)지역 순방 중에 병사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는 이 <순舜>임금을 실존의 인물인지,
신화 속의 인물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중국의 최초 왕조라 할 수 있는 하(夏)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에 있었던
미확인 성군이라고 설명할 뿐이다.
그 이유는 뭘까?
중국의 하(夏)나라가 세워진 연대는 BC 2205년경이다.
 
단군조선보다 무려 130여 년 후다.
이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순虞舜>은
갑술 BC 2267년에 단군조선의 분조를 감독했던 사람이다.
 
이 단군조선의 분조가 있던 곳이 바로 하북성과 산동성의 경계지역인
우(虞,중국동북부)지역이다. 
즉 <순舜>은 중국인이기 이전에 단군조선인이었으며,
단군조선의 분조를 다스리던 제후였다.
그래서 중국은 <순舜>임금을 미확인 성군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하(夏)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에 중국은 9桓族의 일부였던 것이다.
 
 
 
BC 2241 <단군왕검이 崩하다>
 
庚子(경자, BC2241) 93년.
帝는 태자 <부루夫婁>에게 섭정하도록 명하고 조칙를 내려 말하기를
 
“하늘의 도리는 밝아 네 마음에 내려와 있으니 오직 마음을 바로잡아
만민을 사랑하고 오직 순결한 마음과 정성된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해 3월 15일 帝가 檀宮에서 죽어 성 밖 10리의 땅에 장사지냈다.
 
백성들이 자기 어미 죽은 것 처럼 슬퍼하며 四海가 모두 음악을 폐하였으며
집집마다 檀旂를 받들었고 神位를 아침 저녁으로 설치하여
같이 앉아 경배하고 마음을 살폈다.
 
다음 해 辛丑년(BC 2240)에 태자 <부루夫婁>가 즉위하니 이가 곧 元帝이다.
 
大金國 章宗皇帝 明昌(1190~1196) 4년 癸丑년에 높여 시호(諡號)를 더하여
개천홍성황제(開天弘聖皇帝)라고 하였다.
 
BC 2241년 음력 3월 15일에 단군왕검께서 130세로 승천하시니
후대에 음력으로 3월 15일을 어천절(御天節)이라 하였다.
 
 
 
BC 2240 <부루의 등극과 幽州, 營州 정벌>
 
신축년 원년이다.
上月 3일에 帝는 諸加와 諸侯를 이끌고 天祖와 三神과 上帝에게 크게 제사지내고
평양{今 적봉 지역}에서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帝는 어질고 복이 많아 재물과 큰 부와 함께 사니 백성들과 함께 산업을 다스렸다.
 
한 백성도 추위와 굶주림에 떨지 않았고 한 사람도 근심과 괴로움이 없었다.
 
존호를 받들어 칭하여 제전(帝佺)이라하고 즉위하였고
先帝의 遺志를 이어 천하를 다스렸다.
 
매년 봄가을에 순찰하고 國中祭天을 예를 다해 올렸으며, 도랑을 파고 도로를 열었다.
 
農桑을 흥하게 하고 목축을 권장하였으며
모든 汗(한)들의 선악을 감찰하며 상과 벌 주기를 매우 신중하였고
敎를 세워 학문을 권장하니, 문화는 크게 떨쳤고 명성이 날로 번창하였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마다 어아가(於阿歌)를 함께 불렀으며 德을 찬양하고,
또한 朝天舞를 지어 모두 화합했는데,
대개 감사의 의미와 희열의 말을 노래하고 춤추어서, 神人의 교화에 도달함이다.
 
9월에 첫째 동생 <부여扶餘>를 遼西{번한 관경의 易水(隸水)지역}에 봉하고
망구왕(茫球王)이라 하였고,
둘째 동생 <부우扶虞>를 東海가에 봉하고
동평왕(東平王){혹은 東海王이라 하는데, 三韓은 즉 그의 후손이다.}이라 하였고,
셋째 동생 <부소夫蘇>를 수분하(綏芬河)에 봉하여 구려왕(句麗王)이라 하였다.
<심당전서>
 
BC 2240년 신축년에 부루천왕은,
BC 2247년 이후에 우순(虞舜)이 허락없이 임의로 재설치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정벌하여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봉하여 그 공(功)을 표창하였다.
 
우순(虞舜)의 나라는 부루천왕에 의하여 유주와 영주가 철폐되고
원래 요임금이 설치하였던 9주(州)에다 병주를 포함한 10주(州)가 된다.
즉 기주(冀州), 병주(幷州),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양주(梁州), 옹주(雍州), 예주(豫州)이다.
 
 

 <虞舜의 강역>
 
병주(幷州)는 태행산(太行山) 서쪽이자 태원(太原)의 북쪽으로서
BC1122년경 은(殷)나라 왕족 기자(箕子) 서여(胥餘)가 망명한 곳으로서,
우순(虞舜) 이후 BC 2224년 이후 하(夏)나라 때부터는 단군조선의 영역이 된다.
 
연주와 청주 사이에 위치한 태산(泰山) 지역은 엄독홀(奄瀆忽)이라 불리며,
BC 1236년(아홀 단제2년)에 단군조선이 엄국(淹國)을 봉한 곳이다.
 
서주(徐州)는 BC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서국(徐國)이 봉해진 곳이다.
서국(徐國)은 BC 680년경 주(周)나라 춘추시대 바로 직전 시기에
서언왕(徐偃王)의 나라로 유명하며 중국기록에서는 서이(徐夷)라 적힌다.
 
또, BC 1236년에 서국의 남쪽이 되는 회수(淮水)에 걸치는 지역에
회국(淮國)을 봉하였다.
회국(淮國)은 중국기록에서 회이(淮夷)라 적힌다.
 
엄(淹), 서(徐), 회(淮)라는 나라는 모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천군국(天君國)의 아래인 일반 천자국(天子國)에 해당한다.
 
 
BC 2239 <소련과 대련이 3년상을 치르다>
 
단군 부루 임인 2년(BC 2239)
단제가 <소련少連>, <대련大連>을 불러 치도(治道)에 대하여 물었다.

이보다 앞서 <소련少連>, <대련大連>은 상을 치르는 동안 모범을 보였다
 
3일 동안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3개월 동안 정신입조(正身立朝)하였으며
1년 동안 슬퍼 애도하였고, 3년 동안 걱정에 젖어 근신하였다.
 
이때부터 5개월 간 상을 치르던 풍속이
그 기간을 길게 갖는 풍속으로 바뀌어 성행하였다.
 
이것은 천하의 큰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덕으로 다스리는 덕치를 유행시켰고,
이는 마치 우편물을 전달하는 속도처럼 빠른 속도로 전파되지 않았겠는가?
 
이련(소련, 대련)은 효행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들을 공자라 칭했던 것이 그 증거이다
 
{공자(孔子)는 중국의 사상가 공자(孔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적 사상가라는 보통명사를 뜻하는 것임.}
 
무릇 효(孝)란 사람을 사랑하는 세상 모든 이치의 근본이다.
 
이 효(孝) 사상은 온누리에 퍼졌고, 삶의 표준이 되었다.
 
 
2년 봄 1월에 <대련大連>으로써 섭사직(攝司職)을 삼고,
<소련小連>으로써 사도(司徒)를 삼았다.
(震檀紀에> <대련大連의 地方은 半島라 했다.)
 
 
<대련大連>과 <소련小連>은 檀朝의 중신(重臣)이다.
충효(忠孝)를 갖춘 사람으로 친상(親喪)을 당하니 3개월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3년동안 서러워하니, 이것은 동양윤리(東洋倫理)의 원조(元祖)이다.
[이러한 사실은 孔子의 글에도 나온다.]
 
<대련大連>은 일명 묘전랑(妙佺郞)이라고도 불리는데,
형제간인 <소련少連>과 더불어 효도에 밝았으며,
하은주(夏殷周)의 3년상의 전통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고대중국의 요순(堯舜)에서 시작되는 3년상 기록은 진실이 아니며,
후대에 가필한 것이 되는데,
순(舜)임금이 요(堯)임금을 유폐(幽閉)시키고
천자(天子) 자리를 찬탈(簒奪)하였는데 어찌 3년상이 있을 것이며,
하우(夏禹)가 또한 순(舜)임금을 죽였는데 어찌 3년상이 있을 것인가?
 
고대중국의 초기에 기록된 3년상은
후대 주(周) 나라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이후에
중화주의(中華主義) 역사가들에 의하여 미화(美化)된 것임이 분명하다.
 
소련과 대련의 효를 공자(孔子)도 칭송하였는 바,
예기(禮記) 잡기하(雜記下) 편에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렀다"(少連大連善居喪)라고 적고 있으며,
그 주해(註解)에서는 "사흘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석달 동안 느슨하지 않았으며,
1년 동안 슬퍼하였고, 3년 동안 근심에 젖어 있었으며,
동이(東夷)의 아들이다고" 하였다.
(三日不怠 三月不懈 朞年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대련(大連)은 지금의 백두산이 되는 태백산(太白山)에 세워진
사선각(四仙閣)에 모셔졌던 사선(四仙) 중의 한 분이다.
 
태백산 사선각의 사선(四仙)은,
배달국과 단군조선 시대에 명성이 자자하던 선인(仙人)으로
BC 3500년경의 발귀리(發貴理) 선인과 BC 2700년경의 자부선인(紫府仙人)과,
BC 2240년경의 대련(大連) 선인과 BC 2180년경의 을보륵(乙普勒) 선인이다.
 
발귀리 선인은 하도(河圖)와 8괘역(卦易)의 주인공인
태호복희(太皞伏羲)와 동문수학(同門受學)한 분으로서,
BC 3897년 갑자년에 배달국을 개천(開天)하신
한웅천왕(桓雄天王)의 원각(圓覺)을 찬양하면서,
일체삼용(一體三用)인 원(圓), 방(方), 각(角)의
무극(無極), 반극(反極), 태극(太極)의 원리를 시(詩)로 읊었다.
 
자부선인은 천하(天下)의 도(道)를 어지럽히며
치우천왕에게 70여회의 전쟁으로 도전하였던 황제헌원(黃帝軒轅)에게
삼황내문경(三皇內門經)의 가르침을 전수(傳授)하여,
황제헌원으로 하여금 도(道)를 깨닫게 함으로써,
황제헌원은 치우천왕에게 진정한 신하로서 굴복하여
오방(五方) 천자(天子)의 하나인 황제(黃帝)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자부선인은 발귀리 선인의 후손이라 전하며,
광성자(光成子), 광명왕(光明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을보륵 선인은 삼랑(三郞)의 직책을 수행하였는데,
삼랑은 삼신시종랑(三神侍從郞)의 준말로서
삼신(三神)을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벼슬이다.
을보륵 선인은 BC 2182년에 단군조선 제3대 가륵(嘉勒) 천왕(天王)에게
신왕종전(神王倧佺)의 도(道)를 설파하였으며,
BC 2181년에는 가림토(加臨土)라 불리는
바른소리 글자인 정음(正音) 38자를 정리하였다.
 
 
 
BC 2238 <백성들에게 편발과 청의를 입게 하다>
 
부루 3년 계묘년에 부루 천왕이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는 편발(編髮)을 하도록 하고,
푸른 옷(靑衣)를 입도록 하였으며,
곡식의 양을 재는 말(斗)과 저울(衡)과 측량기구를 표준에 맞추게 하였다.
이로써 시장에서의 가격이 다르지 않게 되었고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아 두루 편하게 되었다
 
 
 
BC 2231 <정전법을 시행하다>
 
경술 부루10년(BC 2231) 4월에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니,
백성은 사전(私田)이 없었다.
 
구정(丘井)을 나누어 전결(田結)로 삼았으며
백성들이 자유로이 사사로운 이익을 얻지 못하게 하였다.
 
 
 
BC 2229 <신지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들다>
 
임자 부루 12년(BC 2229)에 신지(神誌)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신지(神誌)는 배달국과 단군조선 시대에 문서담당 벼슬 명칭으로
신라나 고려시대의 한림(翰林)에 해당한다.
 
배달국 초기에 신지 혁덕(赫德)은 상형문자가 되는 녹서(鹿書)를 만들었고,
단군조선 시대인 BC 2049년에 신지 발리(發理)는 서효사(誓效詞)를 짓기도 하였다.
 
칠회력은 배달국의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과 같은 것으로서,
일(日), 월(月),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의
칠성(七星)을 기본으로 한 달력이다.
 
칠회력은 기본 7요일(燿日)의 1주일(週日) 달력인 것이며,
다시 28수(宿)의 별자리와 조합하여 1기(期)의 달력(月曆)이 되고,
13기(期) 52주(週) 365일, 366일의 1년 달력이 된다.
 
구정도(邱井圖)는 밭을 나눈 밭문서로서
구(區), 정(井), 무(畝), 보(步) 등으로 정한 것이 된다.
 
6척사방(六尺四方)을 보(步)라 하는데,
즉 1보(步)는 6자(尺) 곱하기 6자(尺)로서 넓이 1평(坪)에 해당하며,
지금의 단위로는 약 3.3평방미터가 된다.
 
1무(畝)는 100보(步) 즉 100평(坪)이며,
1정은 900무(畝)가 되고 1구(區)는 16정(井)이다.
 
4가(家) 1구(區)이니 동서남북의 4개의 마을이 16정(井)의 밭을 맡은 것이 되어
1개의 마을이 각 4정(井)의 밭을 경작한 것이 된다.

BC 2229년 가을 10월에는 마한(馬韓) 불여래(弗如來)가
부루 천왕의 명을 받아 마한 땅의 백성들에게 칠회력을 나누어 주었다.
 
 
BC 2228 <불여래(弗如來)가 도정(都亭)을 짓다>
 
부루 13년 계축년 봄 3월에 마한 불여래가 마한 땅의 수도인 백아강(白阿岡)에
버들나무(柳)를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도정(都亭)은 수도(首都) 관할 내에 지은 큰 정자를 말한다.
 
 
BC 2225 <불여래(弗如來)가 남산(南山)에
삼일신고(三一神誥)의 비(碑)를 세우다>
 
부루 16년 병진년에
마한 불여래가 남산(南山)에 삼일신고(三一神誥)의 비(碑)를세웠다.
 
 
여기서 남산은 마한 땅의 수도인 백아강의 남쪽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백아강은 지금의 평양 대동강이다.
 
삼일신고는 천부경(天符經)과 참전계경(參佺戒經)과 더불어
환국(桓國) 시대에 이미 정립되었던
천부(天符)의 가르침인 천웅도(天雄道)의 종교(宗敎) 경전이다.
 
천웅도는 환국(桓國)에서 배달국에 전수된 신선도(神仙道)로서,
한웅천왕이 환국(桓國)에서 가져와 수립한 심신수련(心身修練)의 도(道)가 된다.
 
 
 
BC 2224 <재차 반역한 순(舜)을 제거하다>
 
BC 2343년생으로서 20세이던 BC 2324년에 환부(鰥夫)의 직을 수행하며,
단군조선의 사자(使者)였던 아버지 유호씨(有戶氏)를 따라
반역자였던 요(堯)를 토벌하러 갔다가,
야망 때문에 불효(不孝)와 불충(不忠)을 저질렀던 순(舜)은,
BC 2294년에 당(唐)나라 천자(天子) 요임금의 섭정(攝政)이 되었고,
BC 2284년에 요임금을 유폐(幽閉)시키고 천자 자리를 찬탈(簒奪)하였다.
 
환부(鰥夫)는 세상의 일을 근심하여 잠을 자지 않고 보살피는 직책으로서,
배달국 시대에 무여율법(無餘律法) 4조를 조절(調節)하던 직책이다.
 
BC 2288년에 발생한 요순시대의 9년 대홍수를 당하여,
곤(鯤)이 치수를 맡았다가 성공하지 못하여
BC 2280년에 순(舜) 임금이 곤을 우산(羽山)에서 처형하고,
곤의 아들 우(禹)에게 치수를 맡겼고,
BC 2267년에 사공(司空) 우(禹)의 간청으로 단군조선에 치수를 요청하여
이에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使者)였던 진한(眞韓) 태자부루에게서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치수법을 전수받아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BC 2267년부터 서기전2247년까지 20년간 단군조선의 진정한 천자(天子)로서
충성을 다하던 순(舜)이 반역하여,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남국(藍國)의 인근에
다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함부로 설치하였던 것이고,
이에 따라 BC 2240년에 제2대 천왕(天王)이 된 태자부루(太子扶婁)는 즉위하자마자
순(舜)이 임의로 설치한 유주와 영주를 정벌하여 폐하고
단군조선 영역에 편입시키고서 순(舜)을 제거하도록 명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따라 단군조선의 사자(使者)로서 중원(中原) 땅을 감시(監視)하던
유호씨(有戶氏)가 부루 천왕의 명을 받아 친자식이지만
반역(反逆)의 길을 가던 순(舜)을 제거하도록 작은아들 유상(有象)과
치수(治水)에 공을 세워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단군조선의 후원을 얻고 있던 우(禹)에게 순(舜)을 협공(協攻)하도록 하였으며,
이에 순(舜)은 남쪽의 창오(蒼梧)의 들로 피하던 중
우(禹)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며,
이때 순(舜)의 두 아내도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우(禹)는 아버지 곤(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였다라고 기록되기도 한다.
 
중원(中原) 땅에서 황제헌원(黃帝軒轅), 요(堯), 순(舜)의 3차례에 걸친
반역(反逆)과 굴복(屈服)의 역사는 지나가고,
BC 2224년 순(舜)이 제거 된 이후에 중원 땅은 또다시 반역(反逆)이 시도되어
소위 중국역사상 첫 왕조(王朝)가 되는 하(夏)라는 나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BC 2223 <九夷를 다스리다>
 
무오 부루 18년 6월에 조서를 내리시어
충의열사(忠義烈士)와 효자열부(孝子烈婦)와 현자(賢者)의 행실을 포상하였다.
 
아들이 16명이 있었는데, 맏아들 <가륵嘉勒>으로 태자를 삼고,
그 밖에 15명 중 봉건국(封建國)을 얻은 자가 8명이며
나머지는 다 친왕(親王)이 되었다.
 
이 때에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그 수가 많았다.
국경은 동쪽이 창해(滄海), 서쪽은 요서(遼西), 남쪽은 남해, 북쪽은 서비로(西非路)
{西非路-서백리아(西伯利亞), 곧 시베리아를 말함.}에 이르러,
 
큰 민족이 9부(九部){九部-구이(九夷), 곧 우리의 아홉족속을 말함}
작은 민족이 14부였다.
모두 단군의 덕화(德化)를 입어 위로는 인륜(人倫)이 밝고
아래는 교화(敎化)가 행하여져, 풍속의 선하고 아름다움이 천하에서 제일이었다.
 
 
 
BC 2215 <삼신전을 세우다>
 
병인 부루 26년에 <석자장石子丈>이 아뢰기를
 
“시조의 천부경(天符經)을 참고하여 보면,
하늘이 만물을 지어 그 모양과 색깔이 가지가지이나 각각 그 시작이 있는 것은,
그 중에 한 가지의 영(靈)을 포함했기 때문이니, 이것이 일시무시(一始無始)인데,
일(一)이 무시(無始)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태초에 무시(無始)로부터 먼저 이수(理數)가 있어,
일양(一陽)과 이음(二陰)이 도(道)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물질(物質)의 도(道)입니다.
 
태극(太極) 이상(以上)의 것을 말하면,
이 도(道)는 이(理)와 기(氣)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 신(神)의 오묘함을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다 도(道)에서 나왔고 또 도에 들어가니,
도의 근원은 하늘(天)에서 나왔고, 사람의 근원은 신조(神祖)에서 나왔으니,
하늘과 신조(神祖)는 그 사이가 밀접하여 하늘이 곧 신조입니다.
 
바라옵기는, 신사신전(神社神殿)을 세워,
백성으로 하여금 경건하고 사모하게 하므로 신앙(信仰)하게 하여
만고(萬古)의 기본을 잊지 않는 도(道)를 삼으소서.”하니
 
임금께서 그렇게 하겠다 하시고 천하에 조서를 내려 삼신전(三神殿)을 세우고,
환인,환웅,단군의 삼신위(三神位)를 봉안(奉安)하여 백성들에게 경배하게 하였다.
 
 
 
BC 2205 <夏왕조 건국>
 
기원전 2205년, 부루 36년 병자년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사문명(姒文命) 을 중원 지역의 원수로 추대해
하(夏)나라 왕조를 세운 후, 이름을 높여 ‘하우제(夏禹帝)’라 했다.
 
도읍을 안읍(安邑)에 건설했다.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도산(塗山)에서 크게 회동했다.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의 명을 받아
천자(天子) 순(舜)을 죽인 우(禹)는,
명령을 수행한 결과에 대하여 유호씨의 명(命)을 받아 공(功)을 정리하지 아니하고서
군사들만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 우(禹)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에 우(禹)는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干)와 창(戈)을 보수하여
유호씨에게 항거하고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며 반역(反逆)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결국 BC 2224년 우(禹)가 단군조선을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壇)을 설치하여
서남(西南) 제족(諸族)을 쳐서 제후(諸侯)라 하여 도산에 모으고 조공을 받았다.
 
이러한 행위는 BC 2357년에 배달국의 질서를 반역하여 당(唐)을 세운
요(堯)의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은 것이었다.
 
도산(塗山)은 요순(堯舜)의 9년 대홍수를 위한 치수문제(治水問題)로
단군조선의 태자부루가 회의(會議)를 주관(主管)하여
우(禹)에게 치수법(治水法)을 전수(傳授)하여 준 곳이다.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마음대로 제후(諸侯)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는 것은
단군조선의 제도(制度)를 본 받은 것이나 폭돌(暴突)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천하(天下)가 시끄러워졌으며,
단군조선 직할영역으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이에 우(禹)는 물길과 육지의 길을 차단하여 내왕하지 못하게 하였다.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는 묘예(苗裔)를 수습하고,
소부(巢夫)와 허유(許由)가 사는 곳과 통하면서,
서남(西南) 제족(諸族)과 연락하여 세력을 모으니 읍(邑)을 이루었다.
 
곧 유호씨는 권사(權士)를 선발하여 참칭(僭稱) 하왕(夏王) 우(禹)에게 보내어,
제왕참칭(帝王僭稱), 오행망설(五行妄說), 역제반란(曆制反亂) 등
요(堯)의 세가지 죄(罪)를 들어 유시(諭示)하였다.
 
1. 제왕(帝王) 참칭(僭稱)의 죄(罪)
 
“요(堯)는 천수(天數)를 잘못 알았다.
땅을 나누어 함부로 천지(天地)를 제 멋대로 하고, 기회를 틈타 독단(獨壇)을 차려,
사람을 몰아내고서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고,
자칭 제왕(帝王)이라 하며 혼자서 처리하니,
이에 인간세상은 침묵하여 흙과 돌과 풀과 나무처럼 말이 없고,
하늘의 도리는 거꾸로 거슬러 허망(虛妄)에 빠져 버렸다.
 
이는 거짓으로 하늘의 권세(權勢)를 도둑질하여 사욕(私慾)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帝王)이 만약 천권(天權)을 대행(代行)하는 것이라면,
역시 능히 일월(日月)을 개폐(開閉)할 수 있어야 하며,
만물(萬物)을 조작(造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제왕(帝王)이란 수(數)의 요체(要諦)이며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한낱 사기와 허망의 사악한 꾸민 놀이일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이치를 증거하는 것이며,
인간세상의 일은 그 이치를 증거하는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도(符都)의 법(法)은 천수(天數)의 이치를 명확히 증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래의 업무를 수행하게 하고,
그 본래의 복(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말하는 자와 듣는 자는
비록 먼저와 뒤 즉 선후(先後)가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함과 생소함이 있을지나
끌어 들이거나 몰아내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해(四海)가 평등(平等)하며 제족(諸族)이 자행(自行)하는 것이다.
 
오직 오미(五味)의 죄책을 보속(補贖)하는 것과
마고대성(麻姑大城)의 업(業)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한 사람의 희생(犧牲)으로 주관(主管)하는 것이며,
여러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일은 예로부터 인간세상의 일과 섞이지 아니하였으니,
황궁씨(黃穹氏)와 유인씨(有因氏)의 역사가 바로 이것이다.”
 
2. 오행망설(五行妄說)의 죄(罪)
 
“또, 그 소위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수(天數)의 이치에 아직 그러한 법이 없다.
방위의 5중(中)이라는 것은 교차의 뜻이며, 변행(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1부터 9까지이므로, 5라는 것은 언제나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윤회(輪回)하여 율려(律呂)가 서로 조화(調和)된 연후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기수(基數)를 말하는 것이며, 그 5와 7의 크게 이루는 고리(環)에 이르면,
그 자리가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4와 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순행 및 역행과 생성과 소멸의 윤멱(輪冪)은 4이지 5가 아니다.
 
즉 원래의 수인 9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윤멱이 한번 끝나는 간격은 2와 8 사이의 7이며 5가 아니다.
 
또, 그 수(數)의 성질에 짝지운 물질로서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라는
5가지 중에 금(金)과 토(土)를 어찌 따로 구별하는가?
 
그 작은 차이로 구별한다면,
기(氣), 풍(風), 초(草), 석(石) 따위는 어찌 같이 거론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모두 들자면 무수히 많은 것이며,
엄격히 들자면 금(金), 목(木), 수(水), 화(火),
또는 토(土), 목(木), 수(水), 화(火)의 4이며, 결코 5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그 물성(物性)을 어떤 연유로 수성(數性)에 짝지우는가?
 
수성(數性)의 물질은 그 근원이 9이며 5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행(五行)의 설(說)은 참으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말인 것이며,
이로써, 이치를 증명하는 인간세상을 무혹(誣惑)하여,
하늘의 화(禍)를 만드니 어찌 두렵지 않은가!”
 
3. 역제반란(曆制反亂)의 죄(罪)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아니하고,
거북이나 명협(蓂莢)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堯)는 또 무슨 속셈인 것인가!
 
천지 만물이 모두 수(數)에서 나와 각 수(數)의 상징함이 있는데,
하필이면 거북과 명협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물(物)과 일(事)에 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曆)이라는 것은 역사(歷史)이다.
 
그러므로 요(堯)의 역제는 곧 거북과 명협의 역이며 인간세계의 역이 아니니,
인간세계에 합치(合致)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가닭으로 삼정(三正)을 번복(飜覆)하여 구차하게 맞추려고 하나 되지 아니하여
마침내 천화(天禍)에 이르게 되었다.
 
역(曆)이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인 까닭으로
그 수(數)는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러하므로, 역(曆)이 바르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事)이 증명(證明)되고 합치(合致)하여 복(福)이 되고,
역(曆)이 바르지 아니하면 천수(天數)에 어긋남이 있어 화(禍)가 되니,
이는 복(福)은 이치가 존재하는 데 있고, 이치는 바른 증명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曆)의 바름과 바르지 아니함은 인생화복(人生禍福)의 실마리이니,
가히 삼가지 아니할 것인가!
 
옛 시대 오미(五味)의 재앙이 한 사람의 미혹됨에서 나와
만대의 살아있는 혼령들에게 미치고 있는데,
이제 또 역(曆)의 재앙이 장차 천세(千世)의 진리(眞理)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도다!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저절로 끝(終)과 처음(始)이 있고,
종시(終始)가 또 돌아 4단(段)씩 겹쳐 나아가 다시 종시(終始)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는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고 사에는 13기(期)가 있으며,
1기(期)에는 28일(日)이 있고 다시 나누어 4요(曜)가 된다.
 
1요(曜)에는 7일(日)이 있으며, 요(曜)의 끝(終)을 복(服)이라 하는 까닭으로,
1사(祀)에는 52요복(曜服)이 있으니, 364일(日)이다.
이는 1, 4, 7의 성수(性數)이다.
 
매번 사(祀)의 처음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는데,
이 단(旦)이라는 것은 1일(日)과 같은 까닭으로 합하여 365일이 되며,
3사(祀)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昄)이 있는데,
이 판(昄)이라는 것은 사(祀)의 절반이다. 이는 2, 5, 8의 법수(法數)이다.
 
판(昄)의 긴 것이 1일(日)과 같은 까닭으로 제 4의 사(祀)는 366일이 된다.
 
10사(祀)의 반(半)에 대회(大晦)의 구(咎)가 있고,
구(咎)라는 것은 시간(時間)의 뿌리이다.
 
300구(咎)가 1묘(眇)가 되는데, 묘(眇)라는 것은 구(咎)가 눈에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의 묘(眇), 각(刻), 분(分), 시(時)를 지나 1일이 되니,
이는 3, 6 ,9의 체수이다.
 
이와 같이, 끝(終)나고 시작(始)하여
다시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치어 이수(理數)가 이루어진다.
 
대저 이러한 요(堯)의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爲)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符都)의 실위(實爲)의 도(道)에 비할 수 있겠는가!“
 
 
유호씨(有戶氏)는 이와 같이 반역자 우(禹)에게 단단히 타이르며,
모든 법(法)을 폐지하고 부도(符都)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위협이며 모욕이라 하고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가,
수차례 이기지 못하고 결국 BC 2199년 모산(茅山)의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이에, 하(夏)나라 무리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죽고자 하는 자 수만이었다.
이들은 모두 우(禹)가 치수할 때의 무리였다.
 
우(禹)의 아들 계(啓)가 BC2198년에 왕이 된 후
이들 대군(大軍)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을 진격하니,
유호씨의 군사는 불과 수천이었다.
 
그러나, 하나라 군사는 전쟁마다 반드시 패하니 한번도 승리를 하지 못하였으니,
계가 드디어 두려워 하여 퇴진하고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아니하니,
그 무리들이 격앙되었다.
 
이에 BC 2195년경 유호씨는
하나라 무리들이 눈이 멀어 조속히 고쳐지기는 불가능함을 보고서,
장차 서남(西南)의 제족(諸族)들을 가르치고자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이상으로, 유호씨는 반역자 우(禹)에게,
BC 2357년경 당요(唐堯)가 저질렀던 3가지 잘못을 일러주며,
요의 전철을 밟지 말고 반역을 포기함으로써,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받기를 권유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우(禹)는 거부하고 항거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역사상 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것이다.
 
우의 아들 계(啓)도 또한 우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항거함으로써,
단군조선으로부터 내버려진 참칭왕국(僭稱王國)으로서
고대중국의 역사상 최초의 왕조(王朝)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BC 1813년경 하나라 말기에
걸왕(桀王)이 군사를 일으킨 은탕(殷湯)을 토벌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에 군사적 구원을 요청하여 구원을 받기도 하였으나,
BC 1767년 결국 하나라가 조약을 위반함으로써
단군조선의 후원을 얻은 은탕의 군사가 하나라를 멸하여
소위 동이족의 은왕조(殷王朝)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BC 2203 <부루, 道의 진리를 說하다>
 
부루 38년에 나함연(邏閻蓮)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남함지(南閻地)에 건너가서 <범경빈梵經賓>을 만나 말을 들으니
이 쪽은 고해(苦海) 저 쪽은 극락(極樂)인데,
고해에서 극락에 가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업혹계(業惑界)를 해탈(解脫)한 후에야
거기에 이를 수 있다 하고,
이런 도(道)를 알지 못하면 공연히 어지러운 생각과 망상이 일어난다 합니다.
 
대개 모든 형상이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어,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없고 탐하는 것과 눈을 부릅뜸과 어리석음도 없으며,
색(色)과 소리(聲)와 향기(香)와 맛(味)과 찔림(觸)과 느낌(感)의 육욕(六慾)도 없고,
태어나고 늙고 병에 걸려 죽는 사고(四苦)를 해탈하면,
이것이 더없는 올바른 깨달음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가만히 거듭 생각해 보니 이것은 진실한 공부인데,
마음이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치에 가까운 것이 많습니다.
 
남합지(南閻地)의 성인(聖人)이 있는데 이 말을 지은 듯 하오니,
원하옵기는, 전하께서 사자를 남함지에 보내시어 그 도덕과 정치를 시찰하고 와서,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은 본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데 시행한다면,
나라가 문명하고 진보하는 데 좋은 길이 될까 합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사람의 도(道)에 있어서의 진리는 하나이며, 두 점 간의 직선도 하나이다.
 
그 나라와 민족은 설사 달라도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바른 도리는 하나이다.
 
내가 일찍이 선제(先帝)에게 지켜야 될 바를 물으니,
생각이 맑고(惟精) 오직 하나 (唯一)가 되어 그 중추(中樞)를 잡아야 하는 것은
바른 것(正)을 잃(矢)지 않는 것이라 하셨는데,
하필이면 다른 나라의 도덕과 정치를 빌리겠는가.
 
새와 짐승은 땅에 살고 고기는 물에서 사는 것이니,
물고기를 육지로 옮겨 놓으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본받고자 하면 반드시 나라가 오래가지 못하리라.” 하시니,
 
모든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BC 2198 <우임금 사문명의 죽음과 사계의 등극>
 
기원전 2198년, 부루 43년 계미년에 우 임금이 회계(會稽)에서 세상을 떠나자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임익(任益)을 추천하여 임금[帝]으로 삼았으나
사문명의 아들 사계(姒啓)가 복종하지 않았다.
 
기원전 2195년, 사계가 임익을 살해하고,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유호씨(有扈氏) 부족이 군대를 일으켜 저항했다.
 
사계가 그들을 공격하여 감읍(甘邑)에서 싸웠다.
 
유호씨 부족이 패하여 궤멸되었다.
 
이로써 부족장들이 추천하여 임금을 뽑는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한 집안이 자리를 대물림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BC 2183 <부루의 죽음. 부루단지와 업주가리>
 
帝가 죽었다.
 
이날에 일식이 있었으므로 누런 안개가 사방을 막고 해를 가리었다.
 
짐승들이 떼지어 어지럽게 울어댔으며 신하들이 슬퍼하여 가슴을 치고 뛰었고
백성들은 통곡하고 슬퍼하며 울었다.
 
나라사람들이 집안에 제단을 설치하여 볍씨가 꽉찬 토기를 제단위에 놓고
볏짚으로 뚜껑을 만들어 얹었는데 그 위를 부루단지(夫婁壇地)라고 하며
이것은 업신(業神)이 되며 또한 칭하기를 佺戒(전계)라 하였는데
이는 완전한 사람이 받는 戒(계)라는 뜻이며 업주가리(業主嘉利)가 되었다.
 
대개 사람이 일을 가짐으로 인하여 완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仁帝이다.
 
 
 
단지(壇地)는 원래 부루 천왕의 덕(德)을 기리는 제단(祭壇)에 설치하였던
곡식을 담은 흙그릇(土器)에서 기원한 것이며,
후대에 일반적으로 독이나 항아리 등의 토기(土器)를 단지라 부르는 것이다.
 
전계(佺戒)는 참전계경(參佺戒經)의 계율을 가리키는데,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닦는 계율이다.
 
BC 3897년경 한웅천황이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에게 주었던 가르침이
바로 “완전한 인간(佺)”이 되게 하는 참전계경의 계율인 것이다.
 
참전계경은 모두 366조목으로 되어 있어 1년 366일을 상징하며,
삼국유사에서는 360여사(餘事)라 적고 있다.
 
업주가리(業主嘉利)의 업주(業主)는
업(業)을 주관(主管)하는 신(神)으로서 업신(業神)이며,
가리(嘉利)는 길(吉)함이 더하고 이로운 것을 의미한다.
 
치우천왕(治尤天王)은 배달나라 14대 한웅(桓雄)으로서
하늘로 승천하여 균화천(鈞和天)에 계시며 이를 대가리(大嘉利)라 하는데,
살아 생전에 천하(天下)를 다시 평정(平定)하여 평화(平和) 시대를 열었던 바,
대가리는 크게 길(吉)함이 더하고 이롭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업주가리(業主嘉利)는 돌아가신 부루 천왕이 업신(業神)으로서
그 덕(德)으로써 크게 길하고 이로움을 주신다는 뜻이 된다.
 
 
BC 2182 <을보륵(乙普勒)에게 신왕종전(神王倧佺)의 도(道)를 묻다>
 
기해년(己亥年)에 단군조선 제3대 가륵 천왕이 즉위하였으며,
삼랑 을보륵에게 신왕종전의 도를 물으시니,
이에 을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되 오른손을 올려 놓아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후 나아가 말씀을 올렸다
 
“신(神)은 능히 만물을 끌어내어 각 그 성품을 완전하게 하시매
신(神)의 현묘한 뜻에 백성들이 모두 의지하여 모시는 것입니다.
왕(王)은 능히 덕(德)과 의(義)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각 그 목숨을 안전하게 하시매
왕이 펴는 바를 백성들이 모두 받들어 따르는 것입니다.
 
종(倧)은 나라에서 뽑는 것이고, 전(佺)은 백성들이 추천하는 것이며,
모두 7일을 주기로 하여 삼신께 나아가 맹세를 하고,
삼홀(三忽)을 전(佺)으로 삼고 구한을 종(倧)으로 삼습니다.
대개 도(道)가 이러한 것입니다.
 
아버지(父)가 되고자 하면 아버지다워야 하고,
임금(君)이 되고자 하면 임금다워야 하며,
스승(師)이 되고자 하면 스승다워야 합니다.
아들이 되고 신하가 되고 제자가 되고자 하면
역시 아들다워야 하고 신하다워야 하며 제자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시(神市) 개천(開天)의 도(道)는 역시 신(神)으로써 가르침을 베풀되,
나를 알고 홀로됨을 구하고 나를 비우고 만물을 존재하게 하여
능히 인간세상에 복(福)이 되었을 따름이며,
스스로 천신(天神)을 대신하여 천하에 왕(王)이 되고,
도를 넓히고 무리에게 이익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본성을 잃지 않게 하고 만왕(萬王)을 대신하여 인간을 다스리며
질병을 없애고 원한을 풀며,
한 가지 물건이라도 목숨을 해하지 않고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치면 참(眞)임을 알게 하여,
삼칠일로 하여 모여서 모든 사람이 계율을 지키니
이로부터 중앙 조정에는 종훈(倧訓)이 있고 재야에는 전계(佺戒)가 있었던 것이며,
우주정기(宇宙精氣)가 해의 땅에 아름답게 울리고
삼광오정(三光五精)이 사람의 머릿골 바다에 뭉쳐 모여,
현묘함을 저절로 얻고 광명(光明)이 함께 도우니,
이것이 거발한(居發桓)이며,
구한(九桓)에 베푸니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이끌려
하나로 돌아와 교화되었던 것입니다.”
 
 
왼손 위에 오른손을 올려 놓으며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면
태극(太極) 모양이 이루어지는데,
오른손이 위이므로 양(陽)의 기운을 나타낸 것이며,
이는 마치 양기(陽氣)의 원천인 태양(太陽)이
왼쪽(동쪽)에서 오른쪽(서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 된다.
 
삼육대례(三六大禮)는 삼육구배(三六九拜)라고도 하는데,
첫 번째 절에서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서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서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예법이다.
 
신(神)은 만물을 주관하고, 왕(王)은 백성을 돌보며,
종(倧)은 나라에서 뽑는 스승이고, 전(佺)은 백성들이 올려 받드는 스승이다.
 
세 고을(忽)을 한 단위로 하여 전(佺)을 뽑고,
구한(九桓)의 각 나라에서는 종(倧)을 뽑는다.
 
즉 종(倧)은 중앙 조정(朝廷)의 스승이고, 전(佺)은 지방 백성의 스승이 된다.
 
선(仙)은 산중(山中)에서 도(道)를 닦는 사람으로서 종(倧)과 전(佺)이 되기도 한다.
 
신(神)은 만물의 생장소병몰(生長消病歿)을 주관하며 만물의 본성을 온전하게 하니
천하의 사람들이 의지하고 받들어 모시는 것이며,
왕은 백성들의 목숨(命)을 안전하게 지키니 백성들이 받들어 모시고 복종하는 것이다.
 
스승은 무리들을 가르치니 무리들이 따르는 것이다.
 
아버지(父)는 자식을 낳는 신(神)의 역할을 하며,
임금(君)은 백성을 다스리는 천하의 왕(王)이며,
종(倧)과 전(佺)은 스승(師)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신시개천(神市開天)을 하신 한웅천왕(桓雄天王)께서는
신왕종전(神王倧佺) 즉 신왕사(神王師)로서 군사부(君師父)의 역할을 다 하셨으니,
신(神)을 대신하여 만물을 베풀고 세상을 다스리는 왕(王)이 되어
또한 스승(師)으로서 무리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이롭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홍익제물(弘益濟物) 즉 개물(開物)이며,
홍도익중(弘道益衆) 즉 이화세계(理化世界)이며, 홍익인간(弘益人間)인 것이다.
 
군사부(君師父)의 도(道)가 배달나라 시대의 삼륜(三倫)이 된다.
 
즉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임금은 임금다우며 스승은 스승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웅천왕은 대웅(大雄)으로서 깨달음을 무리들에게 가르친 큰 스승(師)이며,
한인(桓因) 천제(天帝)의 명(命)을 받아 하늘의 도(道)인 천웅도(天雄道)를
밝은 땅에 수립(樹立)하여 실현한 천왕(天王)으로서 임금이며,
자식을 둔 인간만물 세상의 아버지이셨다.
 
삼광오정(三光五精)은 세가지 빛과 다섯가지 정기(精氣)를 의미하는데,
삼광은 일월성(日月星) 즉 해, 달, 별의 빛이며,
오정은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정기이다.
 
수목화토금은 수성, 목성, 화성, 토성, 금성의 기운(氣運)을 말한다.
 
해, 달, 수, 화, 목, 금, 토로써 배달나라 초기에 1주일을 주기로 한
칠회력(七回曆)이 이루어져 지금까지 달력의 기본이 되고 있다.
 
거발한(居發桓)이라는 말은 크게 밝고 환하다는 의미로서,
한자말로는 대광명(大光明)이다.
 
배달국의 시조이신 한웅천왕(桓雄天王)을 거발한(크밝한)이라고도 한다.
 
위와 같이 삼랑 을보륵 선인(仙人)은
가륵(嘉勒) 천왕(天王)께 신왕종전(神王倧佺)의 도(道)를 아뢰어,
아버지(父)는 아버지(父)다워야 하고 임금(王)은 임금(王)다워야 하며
스승(師)은 스승(師)다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아들(子)은 아들답고 신하(臣)는 신하답고
제자(徒)는 제자답게 되어지는 것이다.
 
즉 삼륜(三倫)이 바로 서야함을 강조한 것이다.
 
 
 
<불여래(弗如來)가 소도(蘇塗)를 세우고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펴다>
 
기해년(己亥年) 가륵 원년에 마한(馬韓) 불여래(弗如來)가 소도(蘇塗)를 세우고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펴니 치화(治化)가 크게 행해졌다.
 
 
소도(蘇塗)는 제천행사(祭天行事)를 벌이는 신성(神聖) 지역이다.
 
소도임을 나타내는 표식(標式)을 솟대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솟대는 높은 나뭇기둥 위에 새 모양을 다듬어 올려 놓고 있다.
 
솟대에 올려진 새는 보통 기러기 종류이다.
 
솟대라는 말이 소도(蘇塗) 대(臺)라는 말의 준말일 수 있으며,
소(巢)의 대(臺)라는 말일 수도 있는데,
솟대라는 의미가 소도의 대라는 뜻과 완전 일치하고 있어 큰 문제가 없다.
 
한편, 소(巢)의 대(臺)를 나타낸 말이 솟대라면,
소(巢)는 마고(麻姑) 시대에 새집(巢) 모양의 높은 탑(塔)처럼 생긴 망루(望樓)로서
지키고 감시하는 수찰(守察)을 하던 곳인 바, 또한 의미가 상통하여 문제가 없게 된다.
 
솟대 위에 얹혀진 새는 하늘과 인간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며,
주로 기러기 종류를 사용하는 것은
기러기가 북쪽으로 다시 날아가는 귀소본능에 착안한 것으로서,
동서남북 중에서 북쪽이 가장 높은 신(神)의 자리인 것과도 상통한다.
 
원래 오방(五方) 중에서 중앙(中央)이 황극(皇極)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이며,
하늘과도 통하는 자리인데,
우리의 전통 역(易) 철학에서는 중앙을 신(神)의 자리로 보고
그 다음 북쪽을 중앙을 대리하는 자리로 보고 있다.
 
이는 BC 7197년 이전의 마고(麻姑) 시대에도 적용되던 원리이며,
특히 BC 2333년에 세워진 단군조선의 종교, 정치, 행정 체제와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즉, 단군조선의 정치행정의 지역체제가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의 오방(五方)으로 나뉘어져,
중앙(中央)인 태백산(太白山)은 최고의 자리인 신(神)의 자리로서
천부단(天符壇) 즉 최고 중심의 제천단(祭天壇)을 축조하여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리는 곳으로 삼았다.
 
또, 북쪽은 진한(眞韓)이라 하여
중앙의 삼신(三神)을 대리하는 단군(檀君) 천왕(天王)이 자리하는 곳이며,
동쪽은 상대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된 곳이어서 한(韓)을 두지 않고,
남쪽은 마한(馬韓)이라 하여 섭정비왕(攝政裨王)을 두고,
서쪽은 번한(番韓)이라 하여 특히 서쪽 중원의 고대중국을 감시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하도록 섭정비왕(攝政裨王)의 기능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단군조선의 정치행정 체제는
곧 마고대성의 정치행정 체제를 그대로 본딴 것이 된다.
 
즉, 파미르고원의 마고성(麻姑城)은 당시 인간세계의 수도(首都)로서
동서남북의 사방을 보(堡)라 하여
동보(東堡), 서보(西堡), 남보(南堡), 북보(北堡)를 두었으며,
중앙에는 제천단인 천부단(天符壇)을 두었던 것이다.
 
북보와 동보의 책임자인 황궁씨(黃穹氏)와 청궁씨(靑穹氏)는 궁(穹)을 담당하였고,
서보와 남보의 책임자인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는 소(巢)를 담당하여
각각 궁(穹)과 소(巢)를 많이 축조하였다.
 
궁(穹)은 피라미드 모양의 제천단(祭天壇)이며,
소(巢)는 탑 모양의 망루(望樓)로서 제천단의 역할을 한 것이 된다.
 
솟대가 신성지역임을 나타내는 표식인 바,
솟대는 탑 모양으로 된 망루가 되는 소(巢)의 기능을 지닌 것이다.
 
삼륜구서(三倫九誓)는 배달나라 시대부터 내려온 윤리도덕인데,
삼륜(三倫)은 아버지(父)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임금(王)은 임금다워야 하며
스승(師)은 스승다워야 한다는 가르침으로서
소위 군사부(君師父)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윤리(倫理)이다.
 
이에 따라 아들(子)은 아들다워야 하며
신하(臣)는 신하다워야 하고 제자(徒)는 제자다워야 하는 것이다.
 
배달조선 시대의 종(倧)과 선(仙)과 전(佺)은
국가와 지방 고을의 일반 백성들이나 무리들을 가르치던 스승의 역할을 하였다.
 
종(倧)은 국가에서 뽑은 스승이며, 전(佺)은 지방에서 뽑힌 스승이고,
선(仙)은 종(倧)이 되기도 하고 전(佺)이 되기도 한다.
 
참전계경(參佺戒經)의 계율(戒律)을 지키며
신(神)을 모시는 직책(職)이나 무리가 전(佺)이며,
전(佺)을 이끄는 스승이나 중앙조정에서 뽑힌 스승이 종(倧)이다.
종(倧)과 전(佺)을 통틀어 선(仙)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산중에서 도를 닦는 무리나 그 스승을 선(仙)이라 하는 것이 된다.
 
소위 천지화랑(天指花郞), 국자랑(國子郞)의 무리가 전(佺)이며
이들을 가르치는 국자사부(國子師傅)가 종(倧)이 되는 것이다.
 
선인(仙人)이라 불리는 삼랑(三郞),
국자사부(國子師傅) 등의 직을 수행하는 중앙조정의 스승(師)이 종(倧)인 것이다.
 
구서(九誓)는 구덕(九德)이라고도 하며,
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孝于家), 형제간에 우애있으며(友于兄弟),
스승과 벗과는 믿음이 있고(信于師友), 나라에는 충성하며(忠于國),
무리에게는 겸손하고(遜于群), 나랏일에는 밝으며(知于政事),
전쟁터에서는 용감하고(勇于戰陣), 언행에는 청렴하며(廉于身行),
직업에는 의로워야 한다(義于職業)는
9가지 지켜야 하는 맹서(盟誓)이면서 덕목(德目)이다.
 
한편, 오상(五常)의 도(道)라 불리는 오계(五戒)는
효(孝), 충(忠), 신(信), 용(勇), 인(仁)의 덕목을 가르치고 있다.
 
또, 대진육덕(大震六德)이라 불리는
대진국(大震國) 발해(渤海)의 6가지 윤리덕목(倫理德目)이 있었으니,
충(忠), 인(仁), 의(義), 지(智), 예(禮), 신(信)이다.
 
이중 인, 의, 지, 예, 신을 오행(五行)의 오방(五方)에 대입하기도 하는데,
인(仁)은 동쪽, 의(義)는 서쪽, 지(智)는 북쪽, 예(禮)는 남쪽, 신(信)은 중앙이 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세워진 서울의 4대문(大門)과
보신각(普信閣)이 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된다.
 
 
BC 2181 <가림토를 제정하다>
 
庚子(BC2181) 가륵 2년.
때에 풍속은 오히려 같지 않고 사투리는 서로 각축을 벌였었다.
 
비록 진서(眞書)라는 상형문자가 있었으나 10집마다 많은 말들이 통하지 아니하였고
100리를 지나면 글자를 해독하기 어려웠다.
 
이 해 봄에 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
(白岳馬韓村에 古碑文이 있다.)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子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
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 蓋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文字
以通其用 是猶鑿之也. 豈能達而無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五東方禮樂文章 擬華夏 但方言之語 不與之同...
<훈민정음 해례본 鄭麟趾 序>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니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자가 있다.
 
그래서 옛 사람이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삼재(三才)의 도(道)를 실었으므로 후세에도 능히 바뀌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나뉘어져 다르게 되니 소리의 기운도 역시 따라 달라졌다.
 
대개 외국의 말은 소리는 있으나 그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어
중국의 문자를 빌어 통용케 한 것은 오히려 그 소리에서 벌어지게 하는 것이 되었다.
 
어찌 능히 통달한다 하여도 착(鑿)이 없으리오?
 
대개 그 처한 바에 따라 편안하게 할 필요가 있으나
가히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예악과 문장은 화하(중화)에 견주나
방언의 말이 그(중화)와 같지 아니하다.
 
 
천지자연의 글자는 곧 표음문자인 소리글자를 가리킨다.
 
즉 앞에서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고 이에 천지자연의 글자가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인지선생이 훈민정음 이전에
이미 표음문자가 있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글이다.
 
옛 사람이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고
삼재(三才)의 도(道)를 실었다 하여, 표음문자임을 다시 나타내고 있다.
 
소리글자로 뜻을 통하게 하였다 하므로 소리글자인 동시에 뜻글자가 되는 것이다.
 
후세에 능히 바뀌지 않았다 하므로(而後世不能易),
옛 사람이 만든 소리글자가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사용되어 왔음을 나타낸다.
 
이는 BC 924년 왕문(王文)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두법(吏讀法)을 고려하면,
BC 924년 이전에 오랜 기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BC 2333년에 개국된 단군조선이 약150년이 지난 시점인
BC 2181년에 삼랑 을보륵이 정음(바른소리)을 만드니 가림토38자이다.
 
이때 가림토 글자를 만든 이유가 진서(眞書:상형문자=神篆)가 있었으나
나라마다 소리가 달라지니 이를 통일시키기 위하여 만들었다 한다.
 
약 1,000년이 지난 BC 1285년에 색불루단군에 의하여 후기조선이 시작되었으나
이때까지도 계속 사용된 것이 되고,
특히 침수도, 첨수도, 명도전이 주조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주나라 전국시대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
 
주나라 전국시대는 BC 403년부터 BC249년까지이다.
 
단군조선은 BC 238년에 사실상 망하고
BC 239년에 시작된 해모수의 북부여에 의하여
BC232년에 오가공화정(五加共和政)이 철폐되면서 흡수되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이 망하자 특히 진한(眞韓)과 번한(番韓)의 유민들이
동으로 남으로 이동하여 한반도 남쪽으로 가서 각각 나라를 열었는데,
변한12국이 서기 50년경에 가야연맹에 의하여 대체될 때 아라가야가 있었으며,
이 아라가야는 지금의 함안지역에 있었고
유물로 나온 토기 위에 가림토글자가 새겨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계속 사용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정(朝廷)에서는 한자를 사용하거나 이두를 사용하여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창제하시니,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이라 하여
모양을 나타내며 글자는 옛 전자를 본 땄다 함으로써,
훈민정음이 상형문자이자 글자의 모양이 옛 글자를 본딴 것이라 한 것이다.
 
즉 BC 2181년에 만들어진 가림토38자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의 기본글자가 되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BC 2181년에 만들어진 소리글자 가림토38자를 본딴 것이며,
이 가림토글자는 천지자연의 소리를 나타낸 부호로서
원래 천지자연의 소리와 일치하는 것이며,
천지자연의 소리는 곧 천지자연의 형상이 된다.
 
 
- 단군조선 가림토가 존재하였다는 증거
 
1. 한단고기 신시본기에 배달국(BC 3897년~BC2333년) 시대에
    이미 ㄱ과 같은 문자가 있었다고 단서를 적고 있다.
 
2. 한단고기 단군세기와 소도경전본훈, 단기고사에 가림토38자가
    BC 2181년에 삼랑 을보륵이 찬(撰)하거나 정선(整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중국 산동 환태시에서 BC 1850년경의 것으로 측정되는,
    가림토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출토되었다.
 
4. 은나라(BC1766년~BC1122년)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의 유물에
    가림토 글자가 새겨진 것이 출토되었는데,
    은나라는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지원으로 건국된 나라이다.
 
5. 단기고사에 BC1620년 자모전(子母錢)을 주조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여기서 子母는 자음과 모음을 의미하게 된다.
 
6. 중국인들도 침수도, 첨수도는 춘추시대 이전에 주조된
    흉노, 산융의 화폐로 인정하고 있으며,
    명도전을 침수도, 첨수도의 후신으로 인정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선우중산국(禪于中山國)에도
    첨수도, 침수도가 무더기로 출토되었으며,
    명도전의 출토지가 단군조선의 영역과 거의 일치하며
    명도전에 새겨진 문자가 상형에 가까운 문자이면서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가 가능하여 표음-상형문자로 된다.
 
7. BC 5년경에 세워졌다는 일본의 이세신궁에 소장된 문헌 등에
    가림토 글자로 된 축문이 있으며, 여기에는 단군조선의 역사가 담겨져 있다.
 
8. 경남 함안은 옛 아라가야 땅으로서
    출토된 토기 등에 가림토가 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9. 신라시대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에 임검씨가
    천부(天符)의 음(音)에 준(準)하여 그 어문(語文)을 정리하였다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초기 김시습은 징심록추기에서,
    박제상이 지은 징심록(澄心錄)에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28자를 취하였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10. 결정적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에서,
      천지자연의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뜻을 통하게 하였고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도(道)를 실었으므로,
      후세에도 능히 바뀌지 아니하여 오랜기간 사용되었으며,
      이후 사방의 풍토가 나뉘어져 다르게 되자 소리의 기운이 달라지게 되었고,
      이후 중국문자를 빌어 쓰게 되었는 바,
      세종대왕이 만든 삼재의 원리와 음양의 이치로 만들어진 훈밍정음 28자는
      상형이며 글자모양은 고전(古篆)을 본땄다 함으로써,
      이전의 소리글자였던 단군조선의 가림토 글자의 모양을
      그대로 본땄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세종대왕의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표음문자만이 아니라 모두 상형표의문자이며,
      이는 단군조선의 가림토 글자가 명도전에 새겨진 글자에서 나타나듯이
      상형문자와 관련이 있는 데서 당연한 결과가 된다.
      실제로 가림토38자와 훈민정음28자는 모음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고,
      자음에서는 기본자형은 ㅂ, X 외는 모두 일치하며 그외 겹자음이나 복자음은
      일부 변형시키거나 자음조합으로 만들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 되므로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이 된다.
 
지금 한자의 글자모양이 진시황 이후로 통일화 되었으나,
그 이전에는 그림글자로서 다양한 측면이 있었으며,
그림글자의 원류는 배달국이고,
은 갑골문 문화는 단군조선 중기의 문화에 해당하는 것인 바,
글자의 모양이 바뀐 한자도 당연히 우리 글자인 것이다.
 
 
BC 2180 <산수가림다를 편찬하다>
 
가륵 3년 가을에 신지(神誌) <고글高契>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고,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라 하니 이것이 동양사학(東洋史學)의 원조(元祖)로서,
신계성훈(神誡聖訓)과 칙교유서(勅敎諭書)와 도덕,정치,법률,풍속 등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다. (野勃이 滿文으로도 간행하였다.)
 
 
신지(神誌)는 문자(文字) 및 명령(命令) 관련 담당 벼슬(官職)이다.
 
후대에 문서(文書)를 담당하던 한림원(翰林院)
또는 조선시대의 도승지(都承旨)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고글(高契)은 고씨(高氏)인 글(契)이라는 사람이다.
 
글(契)은 문자(文字)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람 이름일 경우에는 “설(偰)“이라고도 읽힌다.
 
특히 순(舜) 임금 시절에는
교육담당인 사도(司徒)에 봉해졌던 인물로서 ”契“이라고 기록되기도 한다.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는 배달유기라는 史書를  말하며,
단군조선 초기에 엮어진 것이므로
그 이전의 배달국 시대의 역사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 된다.
 
 
BC 2177 <흉노 선우의 조상 색정(索靖)>
 
甲辰(BC2177) 가륵 6년.
太學에 있는 太士인 高辛 {혹은 高信이라고도 한다.}이
부모의 상에는 3년 服制할 것을 청하니 帝가 좋다고 하였다.
 
애묘(愛苗)씨가 무도하여 帝가 병사를 보내 실단(悉段)에서 토벌하였다.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의 치적이 덕스럽지 못해 帝가 진노하였으며
약수(弱水)로 귀양보내 종신토록 갇혀 지내게 하였으나
후에 그를 용서하여 또한 그 땅을 봉국으로 삼았으니 흉노 선우의 조상이 되었다.
 
이르기를 당리고도선우(摚犁孤塗單于)라 하는데 즉
하늘{摚犁}의 아들{孤塗} 대황제{單于}라는 뜻이다.
 
 
BC 2176 <가륵, 中正의 道를 說하다>
 
가륵 7년 초에 임금께서 조서를 내리기를
 
“천하에서 가장 으뜸가는 근본은 마음이 중정(中正)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중정(中正)을 잃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고,
물건이 중정(中正)을 잃으면 형태가 흐트러진다.
 
인심(人心)은 위험하고 도심(道心)은 미묘하니,
마음을 정하게 가져 진실로 그 중추(中樞)를 잡아 중정(正中)을 잃지 말라.
 
중정(中正)이 된 후에야 만사를 바르게 하느니라.
중정의 도(道)는,
아버지는 마땅히 자비하며 자식은 마땅히 효도하며,
임금은 마땅히 사랑하며 신하는 마땅히 충성하며,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며, 아이들은 마땅히 어른을 공경하며,
친구는 마땅히 신의가 있어야 하며,
몸가짐은 공손하고 검소하여야 하며, 사랑으로 무리를 맞으며,
학문을 닦으며 업(業)을 단련하여 재능을 계발하며,
덕행과 기량을 키워 공익(公益)을 넓히며, 세무(世務)를 풀어나가며,
항상 나라의 방침(國是)을 존중하여 국법을 준수하고,
각각 맡은 일을 지켜 증산(增産)에 힘쓰다가
만약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사사로운 일을 버리고 공(公)을 생각하며,
위험한데라도 용감히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붙들어 세워야 할 것이니,
이것을 나와 모든 신민(臣民)들이 함께 마음에 두고 정성스럽게 지켜,
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일체(一體)가 되어 지극히 높은 뜻을 실천하리라.”하셨다.
 
 
 
BC 2175 <강거의 반란>
 
丙午(BC2175) 가륵 8년.
<강거康居> 지백특(支伯特){西藏, 티베트}에 의지하여 반역하니,
帝는 <부우夫宇>를 보내 그들을 토벌하고 평정하게 하였다.
 
4월에 帝는 太白山에 올라 민가에서 불때서 나오는 연기가 적음을 보고
조세에 차등을 두라고 명령하였다.
 
 
 
BC 2173 <후예의 반란>
 
BC 2173년 가륵 10년, 서하(西河)를 정벌했다.
 
하나라의 임금 사태강(姒太康)이 흉포하고 잔학하자
유궁씨(有窮氏) 부족의 우두머리 후예(后羿)가 그를 내쫒았다.
 
사태강이 짐심(斟鄩){今 낙양}으로 달아나자,
BC 2160년 그 동생 사중강(姒仲康)이 임금 자리를 이었다.
 
 
우(禹)임금은 현자인 고요(皐陶, 구요咎繇)에게 다음 제위(帝位)를 선양하려고 하였는데
고요(皐陶)가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고요(皐陶)는 요·순 시대에 형정(刑政)을 주관하는 사(士, 사법부의 수장)에 임명됐으며,
순(舜)임금을 계승한 우(禹)임금을 보좌하면서 큰 치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우(禹)임금은 동방을 순시하다 회계(會稽)에서 세상을 떠나자
여러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임익(任益)을 임금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3년 후 우(禹)임금의 아들 사계(姒啓)가 임익(任益)을 몰아내고 제위에 오른다.
 
《상서(尙書) 우하서(虞夏書) 오자지가편(五子之歌篇)》에 의하면,
하(夏)나라의 제2대 왕 계(啓)가 병들어 죽은 뒤 그의 아들 태강(太康)이
하(夏)나라의 제3대 왕으로 즉위했다.
 
태강(太康)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계(啓)를 따라 향락에 빠지다보니
왕이 되어서는 아버지 계(啓)보다 더 부패한 생활을 했다.
 
술과 사냥으로만 세월을 보내면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더하였다.
 
어느 날 태강(太康, BC 2189~BC 2161, 실제 재위 2년, 명목상 재위29년) 왕이
낙수(洛水) 너머로 사냥하러 나갔는데, 100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유궁씨(有窮氏, 산동성 덕주시 북쪽) 부락의 수장 제후 예(羿)가
이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켜 하(夏)의 도성 안읍(安邑)을 탈취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낙수(洛水)에 진을 치고 강가를 지켰다.
 
태강(太康)왕이 사냥을 마치고 낙수(洛水)에 이르렀을 때
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황급히 사람을 시켜 상황을 알아보니,
예(羿)가 반란을 일으켜 이미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자신의 회궁을 막고 있음을 알았다.
 
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태강(太康)은
낙수(洛水) 남쪽을 떠돌며 여러 제후들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각 부락의 수령들은 진작부터 태강(太康)의 방탕한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예(羿)의 막강한 실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태강(太康)은 후회막급이었지만 어쩌지 못하고
양하(阳夏, 하남성 태강현 서쪽)에다 토성을 쌓고 거주했다.
 
그는 병으로 죽어 양하(阳夏,陽夏)에 묻혔다.
 
태강(太康)의 다섯 동생들은 큰형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어머니를 모시고 낙수 북쪽 기슭으로 가서 기다렸지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태강(太康)을 기다리며 역사상 최초의 왕에 대한 탄핵이자
무력 쿠데타인 이 사건을 당하여 그의 형제들은 원망의 감정을 담아 시를 지었다.
 
다섯 왕자들이 한 줄씩 지어 부른 ‘오자지가(五子之歌)’라 하는
이 시가(詩歌) 형식의 노래는 후일 서경<書經>에 채록되었다.
 
 
 
‘첫째가 말했다.
할아버님 가르침이 있었네.
民可近 不可下
백성을 가까이 하되 얕잡아보지 마라.
백성은 나라의 근본,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하니라.
천하를 돌아보니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반드시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
사람이 한두 번 실수할 수는 있지만 원망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해선 안 되지.
백성을 이끌기란 썩은 고삐로 여섯 마리 말을 끌듯 어려운 일인데,
남의 위에 앉은 사람이 어찌 조심하지 않는단 말인가.

둘째가 말했다.
훈계에 이런 말도 있었지.
內作色荒 外作禽荒 甘酒嗜音 峻宇彫牆 有一於此 未或不亡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놀이에 빠지거나 달콤한 술과 음악에 빠지거나
담장을 높여 치장을 하는 일 이중 한 가지만 있어도 반드시 망하리라.

셋째가 말했다.
요임금 이래 나라를 잘 이어왔지만 이제 도를 잃었네.
기강이 흐트러져 멸망하게 되었구나.

넷째가 말했다.
밝고 밝으신 우리 조상은 만방의 임금이시라.
법을 세우고 규율을 세워 자손에게 물려주셨네.
공평한 기준을 세워 왕의 권위가 바로 섰는데,
이제 그 유업을 잃어 종사가 끊어지게 되었도다.

다섯째가 말했다.
오호라 갈 곳이 없구나,
슬픈 마음이여. 만백성이 우리를 원수로 대하니 장차 어디 의지하리오.
답답하고 서럽다. 낯 뜨겁고 부끄럽도다.

​사마천의 <사기(史記)>하본기(夏本紀)에는
태강(太康) 왕의 이야기가 매우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子帝太康立, 帝太康失國.
계(啓) 임금이 죽고 아들 태강(太康)이 즉위했는데,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열 글자가 고작이다.
 
태강(太康)이 쫓겨난 뒤 혼란은 거듭됐다.
 
이 내용이 <사기(史記)>하본기(夏本紀)에는 상세하게 전해주지 않으나
<좌씨춘추(左氏春秋)>, <죽서기년(竹書紀年)> 등 다른 사서에서는
그 뒷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이렇게 하여 정권을 장악한 예(羿)는
태강(太康)의 동생 중강(中康)을 천자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실권자는 예(羿)였다.
 
예(羿)는 무라(武羅)와 백인(伯因) 등 어진사람을 몰아내고
간사한 가신(家臣) 한착(寒浞)을 등용하였다.
 
10년의 세월이 지나자 중강(中康)은 또 다른 제후 백봉(伯封)을 끌어들여
예(羿)를 견제하며 왕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예(羿)를 격동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
결국 중강(中康)이 죽자 예(羿)는 스스로 하(夏)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러자 하(夏)나라 유신들은 달아나 중강(中康)의 아들 상(相)을 왕으로 옹립했다.
 
그런데 역부족이었다.
 
왕을 자처한 예(羿)가 토벌군을 이끌고 와서 성을 포위했다.
 
성은 함락되었고 상(相)임금은 자결했다.
 
그로부터 7년간 하(夏)는 예(羿)의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안에서 예(羿)의 권력을 위협하는 불씨가 자라고 있었다.
 
예(羿)는 중강(中康)에게 협력한 백봉(伯封)을 제거하면서
백봉(伯封)의 어머니가 천하절색 미인인 것을 보고 끌어다 왕비로 삼았다.
 
그녀의 이름은 현처(玄妻)였다.
 
자기 손으로 제거한 사람의 혈육을 내실로 삼은 것은 오만한 자충수였다.

​현처(玄妻)는 자식의 복수를 꿈꿨다.
 
그녀는 예(羿)의 심복인 한착(寒浞)과 가까이 하다가 정을 통하여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기회는 곧 찾아왔다.
 
예(羿) 역시 향락과 사냥에만 몰두하며 정사는 자신의 심복인 한착(寒浞)에게 맡겼다.
 
민심이 그를 외면하게 되었을 때
한착(寒浞)은 자기 아들 요(澆)와 함께 예(羿)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예(羿)의 신하 한착(寒浞)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예(羿)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논어>에 힘센 사람으로 거론된 요(澆)가 바로 한착(寒浞)의 아들이다.
 
예(羿)가 한착(寒浞)을 시켜 하(夏)나라 제5대 왕 상(相)을 공격할 때,
한착(寒浞)은 하(夏)나라의 중신인 짐관씨(斟灌氏)와 짐심씨(斟鄩氏)도 멸하여
자기의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자신의 통치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그런데 하(夏)나라 제5대 왕 상(相)은 성이 함락될 때
임신중인 왕비(王妃)를 은밀히 피신시켰다.
 
부왕 상(相)이 자결했을 때 소강(少康)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당시 어머니 후민씨(后緡氏)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왕후로서의 존엄성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궁녀를 따라 뒷담장 개구멍으로 기어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친정 유잉씨(有仍氏) 부락(산동성 제남시 동남)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이듬해 소강(少康)을 낳았다.

​소강(少康)은 상(相)의 유복자(遺腹子)였다.
 
거기서 숨어 기른 아들이 자라나 어른이 되자
하(夏)나라의 옛 신하였던 미(靡)를 장수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한착(寒浞)을 토벌했는데,
그가 바로 하(夏)나라 제6대 왕 소강(少康, BC 2079~BC 2059)이다.
 
태강(太康) 때부터 소강(少康)이 나라를 되찾기까지
60여 년이나 큰 혼란기를 겪고 난 하(夏)나라는
소강(少康) 이후 1백여 년간 중흥하였다.
 
소강(少康)은 하(夏)왕조를 부흥시켰다.
 
소강(少康)은 어릴 때부터 아주 총명했다.
 
세상일을 알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조상이 나라를 잃은 비참한 과정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그 치욕을 씻고 하(夏)왕조를 부흥시키라고 당부했다.
 
이로부터 소강(少康)은 분발하여 힘을 길렀다.
 
천하를 되찾겠다는 굳센 의지도 세웠다.
 
그는 먼저 외조부 밑에서 목축을 책임지는 관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군사작전을 배우는 한편
늘 한착(寒浞)이 자신을 죽이지 않나 경각심을 늦추지 않았다.

​얼마 뒤 예상대로 한착(寒浞)의 아들 요(澆)가 군대를 보내
소강(少康)을 체포하려 했다.
 
소강(少康)은 유우씨(有虞氏) 부락(하남성 우성 동쪽)으로 도망쳤다.
 
유우씨(有虞氏)의 수령 우사(虞思)는
음식을 책임지는 관직을 맡겨 재정을 배우도록 했다.
 
또 자기의 딸을 소강(少康)에게 시집보내고
륜(綸)이라는 사방 10리의 기름진 땅과 병사 500을 주었다.
 
이로써 소강(少康)은 근거지와 군사를 가지게 되었다.
 
소강(少康)은 백성들의 고통을 잘 살피고 조상 우(禹)의 공덕을 선전하면서
백성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부흥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아울러 하(夏)왕조의 옛 신하를 불러 만남을 가졌다.
 
당시 미(靡)라는 인물이 있었다.
 
원래 그는 소강(少康)의 아버지 상(相)의 신하였으나 한착(寒浞)이 왕위를 탈취하자
유격씨(有鬲氏) 부락(산동성 구 덕평현)으로 도망쳐
유민들을 끌어 모아 힘을 기르면서 하(夏)왕조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강(少康)의 부름이 있자 그는 유격씨(有鬲氏) 병사들을 동원하여
짐심(斟鄩) · 짐관(斟灌) 두 곳의 복수를 기다리는 군사들과 회합한 다음
다시 소강(少康)을 만나 그를 하(夏)나라의 왕으로 추대했다.
 
소강(少康)은 먼저 아들 계저(季杼)를 보내
한착(寒浞)의 둘째 아들 과희(戈豷)를 공격하여 죽임으로써 적의 힘을 약화시켰다.
 
또 장군 여애(女艾)를 보내 요(澆)의 허실을 정탐하게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소강(少康)은 륜(綸)을 떠나
파죽지세로 옛 도읍을 회복하고 한착(寒浞)을 죽였다.
 
왕위를 되찾고 양하(陽夏,阳夏, 하남성 태강현 서쪽)에 도읍을 세웠다.

​소강(少康)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라를 되찾은 다음에도 정사에 부지런하고 신용을 얻는데 힘을 쏟았다.
 
이로써 천하는 안정을 찾고 문화는 부흥했다.
 
각 부락들도 그를 추대하니 하(夏)왕조는 다시 흥성기를 맞이했다.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소강중흥(少康中興)’이라 부른다.

​만년에 소강(少康)은 서자 무여(无余)를 월(越, 절강성 소흥)에 봉하여
선조 대우(大禹)의 무덤에 제사 드리게 하니 이것이 월국(越國)의 시작이 되었다.

​소강(少康)은 21년간 재위하였고 병으로 죽어 양하(陽夏,阳夏)에 묻혔다.
 
 

<夏나라 도읍지(安邑,陽夏)>
 
 
 
BC 2168 <가록이 아사달국을 세우다>
 
계축(癸丑, BC2168) 嘉勒15년.
아우 <가록嘉祿>을 아도왕(阿闍王)으로 봉하고 국가를 주고
국가이름을 아사달(阿斯達)이라 하고 당장경(唐莊京)에 도읍하였다.
성을 쌓고 마을을 건설하니 인민들이 많이 모였으니 10,000호가 되었다.
 
 
 
BC 2145 <후예의 등극>
 
BC 2145년, 후예가 다시 하나라의 5대 임금 사상(姒相)을 쫓아냈다.
 
사상(姒相)이 짐관(斟灌)으로 달아났다. 후예가 자리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BC 2138 <한착의 등극>
 
BC 2138년, 한착(寒浞)이 하나라의 6대 임금 후예를 살해하고,
자리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BC 2079년에 상(相)의 아들인 소강(小康)이 재기하기 전까지
66년을 예(羿)와 한착(寒浞)이 하나라 땅을 다스렸다.
 
중국측 기록에서는 BC 2145년부터 BC 2080년까지
66년의 예(羿)와 한착(寒浞)의 역사를 소강(小康)의 역사로 윤색(潤色)하여,
소강의 재위를 늘여서 61년(BC 2119 -BC 2018)이라 기록하기도 하는데,
이는 역사의 진실을 숨긴 명백한 역사날조(歷史捏造)인 것이다.
소강(小康)은 재위 (BC 2079 - BC 2059) 21년이다.
 
식달(息達)이 단군조선에서 차출된 3부의 군사를 이끌고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의 정세가 뒤 바뀐 것이며,
하나라 왕이던 상(相)이 죽고 단군조선의 후원을 받던 예(羿)가 왕이 된 것이다.
예(羿)의 신하였던 한착이 또한 권력욕 때문에
예(羿)가 한 상극(相剋)의 역사를 본받아 예(羿)를 죽이고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하나라는 우(禹)가 하왕을 참칭한 이후
계(啓), 태강(太康), 중강(仲康)을 거친 후, 예(羿)에 이르러
단군조선의 실질적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들어온 것이 된다.
 
한편, 하나라 제5대왕 상(相)은 하나라의 왕통을 새로이 세운 왕이 되는데,
상(相)의 선대 왕인 태강(太康)과 중강(仲康)은 형제간이 되며,
중강의 아들인 상(相)이 왕이 되고 상(相)의 아들 소강(小康)이 하나라를 재기하면서
중강(仲康), 상(相)의 후손으로 왕통이 이어지게 된다.
 
 
 
BC 2137 <몽고의 조상 오사달>
 
甲申(BC2137) 오사구(烏斯丘) 원년.
 
큰아들 <구을丘乙>을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皇의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책봉하여 蒙古里의 汗(한)으로 삼았다.
 
그 후손은 크게 번성하여 내외 몽골족이 되었는데 즉 元帝國의 황제의 조상이다.
 
가을에 夏國의 主相{寒浞}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좋은 이웃나라가 되기를 청하였다.
 
10월에 帝는 북쪽으로 순행하여 太白山에서 三神에 제사를 지내고
不老草를 얻었는데 이것을 인삼이라고 하며 또한 仙藥이라고도 한다.
 
이때부터 신선은 죽지 않는 다는 설과
인삼을 채집하는 일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지만 괴이하다.
 
 
인삼(人蔘)은 단군조선의 3대 특산물(特産物)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단군조선의 3대 특산물은 인삼, 잣(柏子), 옥(玉)이다.
 
인삼(人蔘)을 영주해삼(瀛州海蔘)이라고도 하며 삼영근(三靈根), 영초(靈草),
삼근영초(三根靈草), 방삭초(方朔草), 불사약(不死藥)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잣나무(柏)는 봉래해송(蓬萊海松)이라고도 하는데,
그 열매인 잣을 오엽서실(五葉瑞實)이라고 한다.
 
특히 잣나무는 학명(學名)으로도 한국의 소나무(Korean Pine Tree)라 하여,
한국이 원산지이다.
 
잣나무나 잣방울의 특유의 강한 방향성(芳香性)으로 인하여
잣나무 밑에는 다른 나무들이 자라지 아니하게 된다.
 
또, 단군조선의 특산물인 옥(玉)을 칠색보옥(七色寶玉)이라 하는데,
방장산(方丈山)의 방호굴(方壺堀)에서 칠색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天符)를 새겨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였다.
 
이 방장해인은 부인(符印)으로서 칠란(七難)을 없앤다고 기록되고 있다.
천부(天符)는 천지인(天地人)의 이치와 관련된 도형(圖形)이나 글이 될 것이다.
 
 
 
 
BC 2133 <원공패전을 주조하다>
 
戊子(BC2133) 오사구 5년. 원공패전(圓孔貝錢)을 주조하였다.
 
8월에 夏國 사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10월에 朝野에 관한 일을 돌에 글로 새겨넣도록 명령하고 민간에 널리 알렸다.
 
 
 
원공패전은 자연산 조개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이 아니라, 주조(鑄造)된 화폐이다.
 
즉 주물(鑄物)로 제작한 화폐로서 청동으로 만든 동전(銅錢)이다.
 
이 원공패전은 BC 1680년경에 주조된 자모전(子母錢) 이전에 출현한 것이다.
 
배달국 시대에 이미 물물교환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며,
원공패전으로써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화폐로 교역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C 3897년경 배달국 건국시에 이미 청동거울, 청동방울, 청동칼,
각종 무기 등을 주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
약1,700년 후가 되는 단군조선 초기에 청동화페를 만들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주조된 화폐로는 BC 2133년의 원공패전(圓孔貝錢),
BC 1620년의 자모전(子母錢), BC 1426년의 패엽전(貝葉錢),
BC 643년의 방공전(方孔錢)이 있다.
 
여기서 특히 자모전은 작은 돈, 큰 돈이 아니라
소리글자의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을 새긴 화폐인 것이며,
곧 BC 2181년에 정립된 가림토 글자와 같은 체계로 된 글자를 새긴 것이 된다.
 
소위 첨수도(尖首刀), 명도전(明刀錢)은 단군조선의 화폐로서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첨수도에 새겨진 문자는 상형문자와 동일한 서체이며,
명도전에 새겨진 문자는 앞면에 명(明)의 고체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모두 가림토 글자나 상형문자로 볼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모전은 청동으로 주조된 화폐이다.
 
패엽전은 소위 후대의 엽전(葉錢)이라는 말의 시원이 되고
청동으로 주조된 화폐이며,
방공전은 네모난 구멍을 가진 철(鐵)로 주조된 철전(鐵錢)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夏)나라에 신서(神書)를 주다>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하(夏) 나라 사람이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다.
 
 
하(夏)나라 영역은 요순(堯舜) 시대의 땅이 될 것이며,
서쪽으로는 지금의 서안(西安) 부근에서,
북쪽으로는 태원(太原)의 남쪽,
동쪽으로는 태산(泰山)의 서쪽,
남쪽으로는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양자강(楊子江) 중류 지역 정도가 될 것이다.
 
 
<조야(朝野)의 구별을 돌에 새기다>
 
무자년(戊子年) 겨울 10월에
조정(朝廷)과 백성(野)의 구별을 돌에 새겨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돌에 글을 새긴 역사는 이해에 가깝게는,
BC 2267년경부터 BC 2247년경에 사공(司空) 우(禹)가
요순시대 대홍수의 치수를 마치고 남악(南岳) 형산(衡山)의 구루봉에 세운
소위 치수기념부루공덕비(治水記念扶婁功德碑)가 있다.
 
또, BC 2333년경 조선(朝鮮) 개국시조 단군왕검께서
삼사오가(三師五加)의 무리들에게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가르치실 때,
고시(高矢)가 동해(東海) 바닷가에서 캐어온 청석(靑石)에 새긴
삼일신고 청석본(靑石本)이 있다.
 
이후 BC 1833년 가을 8월에 제12대 아한(阿漢) 천왕이 순수(巡狩) 중에
요하(遼河)의 동쪽에 돌에 새겨 세운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있으며,
 
BC 1122년경 은(殷)나라 왕족 기자(箕子) 서여(胥餘)가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망명하면서 사사(師士)이던 왕수긍(王受兢)에게 명하여
단군조선의 삼일신고를 단목판(檀木板)에 새기게 하여 읽었다고 하는
삼일신고 단목본(檀木本)이 있다.
 
그리고 909년 제30대 내휴(奈休) 천왕이 청구를 둘러보고 돌에 새겨 세운
치우천왕 공덕비(治尤天王功德碑)가 있다.
 
 
BC 2131 <살수에 조선소를 세우다>
 
庚寅(BC2131) 오사구 7년.
조선공장을 살수(薩水){今 白河} 상류에 건설하였다.
이때 마한(馬韓) 근우지(近于支)가 장정(壯丁) 30인을 파견하여
살수에서 선박(船舶)을 건조(建造)하게 하였다.
 
 
배를 만드는 기술은 이미 배달국(桓國) 시대에 있었다.
즉, 한웅천왕(桓雄天王)이 배(舟)와 차(車,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사해(四海)를 방문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살수는 지금의 북경 북쪽을 흐르는 백하이다.
마한의 조선 기술자 30인을  파견하여 상선을 건조한 것이다.
 
 
 

<浿水와  薩水>
 
 

<패수>
 
조백하가 곧 조선하이고, 요하이며, 조하가 패수이고 백하가 살수이다.

난하는 강의 길이가 2,100여리이니,'압자하' 곧 고대의 압록수다.

황하의 이북 온현 부근에 춘추시대의 패수(浿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좌전에는 격수(湨水), 두주는 취수(溴水), 산해경에는 취수(溴水)로 나온다.
(같은 강을 두고 자형이 조금씩 다르니, 전사 과정에의 오기일 것이다.)
 
 
 
BC 2128 <건청궁을 세우다>
 
癸巳(BC2128) 오사구 10년. 봄에 건청궁(乾淸宮)을 25년만에 완성하였다.
동서로 600간이고 남북으로 100간이며 윗층은 좌석이 10,000이며
아래층은 높이가 4길인 솟대가 있다.
 
 
 
 
BC 2118 <소나벌의 上奏文>
 
<소나벌蘇奈伐>이 진언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풍속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를 얻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나라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병력을 강하게 하는 것이 요긴한 일이니,
문무(文武)를 함께 쓰는 일은 나라를 장구하게 보전하는 방법입니다.
 
나라가 비록 커도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고,
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위태롭게 됩니다.
 
옛날 성제명왕(聖帝明王)께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길(道)은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푸는데 있다 하셨으니,
사람을 죽여 평안하게 할 수 있다면 죽일 수도 있고,
나라를 쳐서 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다면 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문(文)만으로 다스려 은혜만 베풀면,
이것은 냄새나는 고기에 파리가 모여드는 것과 같아서 끝내는 정치가 부패하게 되고,
무(武)로써 위엄만으로 다스리면 찬서리가 땅을 덮는 것과 같아서
정치기능에 활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봄에 나고 가을에는 죽는 계절의 변화 과정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또 낮과 밤이 바뀌는 이치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바라옵기는, 전하께서 구정(舊政)을 혁신하시어 군기(軍紀)를 숙청하시며,
백성의 뜻을 독려하시어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어
만대(萬代)를 이어 쇠약하지 않는 신성국(神聖國)을 만드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받아들이고 <소나벌蘇奈伐>을 상장(上將)으로 삼고
<방민백方民伯>을 태재(太宰)로 삼았다.
 
기원전 2118년, 한착이 짐관을 멸하고 사상을 살해했다.
사상의 아내 민(緡)이 유잉(有仍)으로 달아나 유복자 사소강(姒少康)을 낳았다.
 
 
 
BC 2109 <마한의 상춘 구월산 삼신제 봉조(奉助)>
 
임자년(壬子年)에 마한(馬韓) 근우지(近于支)가 오사구(烏斯丘) 천왕의 명(命)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三神)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
 
 
상춘(常春)은 지금의 장춘(長春, 창춘)이며
소위 눌현(訥見)으로서 “늘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상춘에 구월산(九月山)이 있으며,
구월산에 삼신(三神)께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祭天壇)이 있었다.
 
 
 
<모란봉(牧丹峰)의 마한(馬韓) 이궁(離宮)>
 
임자년 겨울 10월에 마한(馬韓) 근우지(近于支)가 모란봉(牧丹峰)의 중턱에
이궁(離宮)을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다.
 
 
매년 3월에 천왕이 마한에게 명하여, 열병과 사냥을 하고,
3월 16일에는 기린굴(麒麟窟)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며, 조의(皁衣)를 하사하고,
관례(冠禮)를 행하며, 가무백희(歌舞百戱)하고 파(罷)하였다.
 
 
모란봉은 마한 땅이 되는 한반도의 평양 부근에 있는 산이다.
 
이곳의 중간 기슭에 마한의 이궁(離宮)을 설치하여
단군조선의 천왕이 각 지역을 순수하다 머무는 별궁의 하나로 삼은 것이다.
 
이궁(離宮)은 본궁(本宮) 외에 피난(避難),
순행(巡行) 등을 위하여 특별한 의도로 설치한 궁(宮)이다.
 
당시 마한의 본궁(本宮)은 지금의 평양이 되는 백아강(白牙岡)에 있었으며,
천왕이 순수하다 머무는 곳으로서 이궁(離宮)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모란봉 이궁은 마한(馬韓)의 이궁(離宮)이기도 하며
진한(眞韓)의 이궁(離宮)의 역할도 한 것이 된다.
 
역대로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이궁(離宮)으로서,
BC 2324년경에 세운 장당경(藏唐京),
BC 2049년에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 제천행사 때 불렸던 신경(新京),
BC 1984년에 상춘(常春)의 구월산 남쪽 기슭에 세운 신궁(新宮),
BC 1345년에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면서 세운 이궁(離宮),
BC 425년에 세운 해성(海城) 평양(平壤)의 이궁(離宮)을 들 수 있다.
 
단군조선 시대에 음력 3월은 음력 10월과 더불어 특별한 달이다.
 
음력 3월 15일은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께서
승천(昇天)하신 어천절(御天節)이 되는 날이며,
3월 16일은 대영절(大迎節)이라고도 하는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의 날이다.
 
삼신영고제는 “삼신 맞이굿 제사”라는 말을 나타낸다.
 
영고(迎鼓)라는 글자가 “맞이굿”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즉 대영절(大迎節)은 시월 국중대회(國中大會)처럼
삼신(三神)께 지내는 천제(天祭)를 올리며 제전(祭典)를 벌이는 날인 것이다.

매년 음력 3월에 마한(馬韓)이 단군조선 천왕(天王)의 명령을 받아 준비하여
열병의식과 사냥의식을 치렀던 것이며,
음력 3월 16일에는 마한(馬韓)이 자체적으로
기린굴(麒麟窟)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이에 천왕은 조의(皁衣)를 하사하고 관례(冠禮)를 행하게 하였으며,
가무백희(歌舞百戱)한 후에 파(罷)하게 하였던 것이다.
 
단군조선 천왕은 음력 3월 16일에 진한 땅에서 친히 삼신께 제를 올렸던 것이 되고,
마한과 번한이 자체적으로 삼신영고제를 지낸 것이 되며,
이에 천왕은 마한과 번한에게 조의(皁衣) 등의 선물을 각 하사(下賜)하여
제천행사(祭天行事)를 치르게 한 것이 된다.
 
가무백희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백가지 유희(遊戱)를 즐기는 것이다.
즉 가무백희는 제천행사 뒤에 벌어지는 축제로서 종합예술 행사가 된다.
 
 
 
BC 2099 <양가(羊加) 구을(丘乙)이 천왕으로 즉위하다>
 
BC 2100년 신유년(辛酉年) 6월에 오사구 천왕이 붕하시니
양가(羊加) 구을(丘乙)이 즉위하였다
 
양가(羊加)는 환국(桓國) 후기부터 전해온 오가(五加)의 하나로서
선악(善惡)을 담당하던 관직이며, 지금의 교육부와 법무부에 해당한다.
 
특히 순임금 시절에 있었다는 사도(司徒)가
양가에 해당하는 직책을 수행한 관직이 되며,
선악(善惡)을 구분하였다는 외뿔양(一角羊)이라 불리는 해치(獬豸)는
법(法)의 원래 글자(法+廌)를 구성하던 치(廌)이고,
후대에 해태(海駘)로 변하여 물로써 불을 진압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섬겨지게 되었다.
 
외뿔양인 해치(獬豸)가 선악(善惡)을 구분하는 방법으로서
죄인(罪人)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해치로 하여금 가려내게 하였는데,
이때 해치는 외뿔로써 죄인을 가리켜 찾아내었던 것이라 한다.
 
죄와 벌을 담당하였던 조선시대의 사헌부(司憲府) 등은
관복(官服)이나 관(冠) 등에 이 해치의 문양을 넣었다고 기록된다.
 
 
<태백산(太白山)에 제천단(祭天壇)을 축조하다>
 
임술년(壬戌年)에 천왕께서 명(命)을 내려 태백산(太白山)에
제천단(祭天壇)을 축조하게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제(祭)를 올리게 하였다.
 
 
 
 
BC 2096 <갑자력을 만들다>
 
乙丑(BC2096) 구을 4년.
처음으로 甲子를 사용하여 력(曆)을 만들었다.
 
삼칠일을 택하도록 명하고 五加의 무리를 거느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과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옛날 神巿의 세대에 七回祭神의 曆法이 있었다.
 
一回는 祭日神이라 하고 二回는 祭月神이라 하고 三回는 祭水神이라 하고
四回는 祭火神이라 하고 五回는 祭木神이라 하고 六回는 祭金神이라 하고
七回는 祭土神이라고 한다.
 
그때에 紫府先生은 해와 달의 궤도를 측정하고
다음으로 오행의 수리를 미루어 고찰하였으며,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지었고 칠성력(七星曆)을 완성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甲子曆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옛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즉, 子月을 上月로 하여 한 해의 처음으로 삼았고 六甲을 10 榦 12枝로 하였다.
 
甲을 청차이(淸且伊), 乙을 적강(赤剛), 丙을 중림(仲林), 丁을 해과(海戈),
戊를 중황(中黃), 己를 렬호수(烈好遂), 庚을 림수(林樹), 辛을 강진(强振),
壬을 류불지(流不池), 癸를 소라(蘇羅)라고 하는데 이것이 天榦이다.
 
子를 효양(曉陽), 丑을 가다(加多), 寅을 만량(萬良), 卯를 신특백(新特白),
辰을 밀다(密多), 巳를 비돈(飛頓), 午를 륭비(隆飛), 未를 순방(順方),
申을 명조(鳴條), 酉를 운두(雲頭), 戌을 개복(皆福), 亥를 지우난(支于難)
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地枝이다.
 
天榦과 地枝는 서로 짝지어 합하여 주기를 이루어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것이 60갑자이다.
 
按(안): 古記에 10월 3일이 上月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十朔이 있은 후 3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子月(11월)로서 한 해의 처음이며 亥月(10월)이 上月이 되는 것이 아니다.
 
有熊氏가 무도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帝가 <소나벌蘇奈伐>을 보내어 그들을 토평하였다.
 
 
 
BC 2092 <신독인(身毒人){인도인}이 동해(東海)에 표착(漂着)하다>
 
기사년(己巳年)에 신독(身毒)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東海)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BC 2087 <혼천의를 만들다>
 
甲戌(BC2087) 13년. 帝는 監星官 <팽우彭宇>에게 명하여
혼천의(渾天儀)를 주조하여 만들고 천도(天度)를 종합하게 하였다.
 
 
 
BC 2085 <조선력서를 만들다>
 
15년에 감성관 <황포덕皇甫德>이 임금께 아뢰기를
 
“제가 천문(天文)을 관측한 지 50년이 되므로 천체의 대강을 추측하였습니다.
 
천체 중에 제일 큰 것은 북극성같은 항성(恒星)입니다.
 
그 다음은 태양의 종류이며, 다음은 수성,금성,지구성(地球星),화성,목성,토성,
천명성(天明星),해명은성(海明隱星),명성(明星)같은 행성이있어
태양을 중추(中樞)로 삼아 회전하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역시 태양계의 하나인 행성입니다.
 
해는 땅의 온도를 조화(調和)하여 만물의 생장(生長)을 돕는 것이며,
지구의 외각에는 붉은 막이 포위하고 있어,
지면의 각종 기체를 보전함으로써 기체가 발산하지 못하고,
그 범위 안에 있어 태양의 뜨거운 빛을 받아 바람과 구름도 되고,
우박도 되고 번개도 되고, 서리나 눈도 되어, 사계절이 서로 달라집니다.
 
그래서 지면에 사는 사람은 만물과 더불어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으니,
사람이 자연의 이치를 헤아리지 못하면
음양(陰陽)을 따라 사시(四時)를 좇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음양을 따라 사시를 좇지 못하면,
백성이 농사절기를 맞추지 못하여 수확이 없어 농민이 굶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역법(曆法)을 정하시어
우리나라 기후에 맞도록 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인 줄로 압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그렇다 하시고 국역(國曆)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조선역서(朝鮮曆書)의 시작이다.
 
 
 
BC 2084 <구을단제의 죽음>
 
丁丑(BC2084) 16년. 帝는 高麗山(고려산){혹은 고력산(古曆山)이라 한다}에
親幸하여 江東의 12봉우리에 이르러 三神壇을 封築하고 하늘에 제사들 드렸다.
 
주변에 槿花樹를 많이 심었다.
 
7월에 帝는 남쪽으로 순행하여 風流江{沸流江이다}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렀는데
병을 얻은 후 얼마 있지 않아 죽었으므로
江東의 浿江에 있는 대박산(大博山)에 장사지냈다.
 
태자 牛加인 達門 {혹은 太慕漱라고 한다}이 제위에 오르니 이가 文帝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태자가 아니면서 천왕에 오른 예가 가끔 있다.
 
제5대 구을(丘乙) 천왕과 제7대 한율(翰栗) 천왕이
태자가 아닌 양가(羊加) 출신이었다. 양가 출신으로 명기된 경우가 두분이다.
 
한편, 제6대 달문(達門) 천왕, 제10대 노을(魯乙) 천왕, 제12대 아한(阿漢) 천왕,
제13대 흘달(屹達) 천왕(대음달(代音達)이라고도 불리움), 제14대 고불(古弗) 천왕, 제16대 위나(尉那) 천왕, 제20대 고홀(固忽) 천왕이
태자가 아닌 우가(牛加) 출신이었다.
즉 태자가 아닌 우가 출신으로 명기된 분이 모두 일곱분이다.
 
그 외 태자라고 명기되지 아니한 분으로는
제8대 우서한(于西翰) 천왕, 제15대 대음(代音) 천왕, 제28대 해모(奚牟) 천왕,
제29대 마휴(摩休) 천왕이 있는데,
태자나 삼사오가(三師五加) 등의 관직(官職)에 있지 아니하던
차자(次子)나 삼자(三子) 등 다른 아들이 될 것이다.
 
한편, 태자도 아니고 천왕의 아들이 아니면서 천왕이 된 경우로는,
BC 1286년에 우현왕(右賢王)으로서 군사력을 기반으로
제21대 소태(蘇台) 천왕부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BC 1285년에 즉위한 제22대 색불루(索弗婁) 천왕,
 
BC 426년 우화충(于和冲)의 반란으로 피난하다
붕하신 제43대 물리(勿理) 천왕의 명(命)을 받아 난을 진압한 공로로 추대받아
BC 425년에 천왕이 된 제44대 구물(丘勿) 천왕,
 
BC 296년 한개(韓介)의 반란을 의병을 일으켜 진압한 공로로 추대받아
후사가 없던 제46대 보을(普乙) 천왕의 대를 이어 BC 295년에 즉위한
제47대 고열가(古列加) 천왕이 있다.
 
제22대 색불루 천왕은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의 손자로서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으며,
BC 1286년에 소위 군사혁명으로서 제21대 소태 천왕으로부터 선양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색불루 천왕은 고씨(高氏) 단군천왕(檀君天王)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제44대 구물 천왕은 백민성(白民城) 욕살(褥薩)로서 제43대 물리 천왕의 명을 받아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추대되어 천왕으로 즉위하였는 바,
욕살은 지방장관으로서 성주(城主)가 되며,
일반 제후에 버금가는 직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물리 천왕의 가까운 친족(親族)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제47대 고열가 천왕은 제44대 물리 천왕의 현손(玄孫)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제22대 색불루 천왕을 제외하면
모두 천왕족(天王族)으로 대통(大統)이 계승된 것이 된다.
 
이로써 보면, 단군조선 시대의 황통(皇統) 계승은
확고한 제도(制度)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은 정치제도(政治制度)가 확고히 정립(定立)된 제국(帝國)이었던 것이다.
 
 
 
<장당경(藏唐京)에 삼신(三神) 제천단(祭天壇)을 축조(築造)하다>
 
정축년(丁丑年)에 천왕께서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봉축(封築)하고 한화(桓花)를 많이 심었다
 
 
 
BC 2079 <소강의 중흥>
 
기원전 2079년, 사소강이 한착을 습격해 살해하고, 자리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일컬어 ‘소강(少康)의 중흥(中興)’이라 한다.
 
 
 
BC 2078 <마서자가 진상한 술을 끊다>
 
달문 6년에 맏아들 <한속翰粟>을 태자로 삼고, <을지선乙支仙>을 수재(首宰)로 삼고
<연석천淵石泉>을 상장(上將)으로 삼았으며, <진무경陳無競>을 섭사직(攝司職)으로 삼고
<관기을關基乙>은 숙정사(肅政使)로 삼았다.
 
임금께서 남쪽 황산곡(黃山谷)에 행차하시어,
두 손을 묶인 죄인을 보시고 차에서 내려 울며 묻기를
 
“네가 무슨 일로 범죄 하였느냐. 죄를 지었구나. 천하에 죄인이 많구나.
나라가 시작될 때의 삼성시대(三聖時代) 백성들은
삼성(三聖)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더니,
내가 임금이 되어서는 백성들이 각자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으니, 내가 슬퍼하노라.
대개 백성은 사리가 부족하면 거짓을 하게 되고,
힘이 부족하면 속이고, 재물이 부족하면 도적을 하게 되니,
백성의 주인된 자가 백성을 이런 불안한 처지에 있게 하고
어찌 하루인들 마음을 놓고 편안히 누울 수 있겠느냐.”하셨다.
 
<마서자麻西子>는 음탕한 사람이다.
하루는 맛이 좋은 술을 구하여 진상하니, 임금께서 마시고 달다 하시며
 
“이것은 성품을 상하게 하여 미치게 만드는 약이니,
후세에는 반드시 술로써 나라를 망치며 패가(敗家)하는 자 많으리라.”
하시고 드디어 <마서자麻西子>를 끊으셨다.
 
 
 
BC 2077 <진상한 천리마를 받지 않다>
 
甲申(BC2077) 달문 7년.
 
봄에 蒙古里 사람이 있어 천리마를 바쳤다.
 
帝는
 
“천자가 가는 것은 일정한 길이 있어 吉行은 1일에 40리요 私行은 1일에 50리이다.
앞에서는 國旗를 날리며 뒤에서는 수레가 따르니 홀로 다닐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천리마를 타고 홀로 어디를 앞서가리오.”
 
마침내 받지 않으시고
 
“내가 지금 말을 받지 않는 것은 사방에서 와서 바치는 자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하(夏)나라 왕 소강(小康)이 새해 인사를 올리다>
 
갑신년(甲申年)에 하주(夏主) 소강(小康)이
달문(達門) 천왕(天王)께 사신(使臣)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렸다.
 
 
하(夏)나라 제7대 왕이 되는 소강(小康)은
BC 2079년에 즉위하여 BC 2059년까지 21년을 재위하였으며,
BC 2077년에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사신을 파견하여 새해인사를 올린 것이다.
이로써 하나라는 단군조선의 진정한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인정받은 것이 된다.
 
소강(小康)은 아버지가 하나라 제5대 왕인 상(相)인데,
BC 2145년에 예(羿)가 덕을 잃은 상(相)을 죽이고 왕이 되었던 것이며,
이후 한착(寒浞)이 반란으로 예(羿)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가,
다시 BC 2079년에 상(相)의 아들 소강(小康)이 한착을 죽이고
왕 자리를 되찾은 것이다.
 
하나라 제3대 왕인 태강(太康)은 제2대 왕인 계(啓)의 아들이었으나
왕이 되어서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람하는 데 세월을 보내므로,
유궁국(有窮國)의 왕(王)이던 예(羿)가
태강의 아우인 중강(仲康)을 왕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후 중강이 죽고 중강의 아들인 상(相)이 즉위하였으나,
이 상(相)이 정치를 잘하지 못하므로,
BC 2145년에 단군조선의 군사가 하나라를 정벌하였던 것이고,
이에 예(羿)가 상(相)을 죽이고 천자(天子)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 예의 신하 한착이 예를 죽이고 천자자리를 찬탈하였던 것이 된다.
 
그런데, 왕 상(相)의 비(妃)가 친정인 유잉국(有仍國)으로 피하였다가
유복자(遺腹子) 소강(小康)을 낳았으며,
이후 소강이 하나라의 옛 신하였던 미(靡)를 장수로 삼아 군사를 일으켜
BC 2079년에 결국 한착(寒浞)을 멸망시키고 왕위를 도로 찾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BC 2145년부터 BC 2079년까지 66년간은
소강(小康)이 왕으로 있던 시기가 아니며, 예(羿)와 한착(寒浞)의 시대이고
소강은 BC 2079년에 왕이 되었던 것으로 소강의 재위기간은
21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중국역사 기록에서 소강(小康)의 재위기간을 61년이라 적고 있다면
이는 명백한 역사날조(歷史捏造)가 되는 것이다.
 
하(夏)나라 제7대왕 소강(小康)이 나라를 다시 찾은 뒤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나라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예(禮)를 갖추어
단군조선을 잘 섬기게 되었던 것이고,
BC 2077년에 소강(小康)이 사신을 보내어
단군조선의 천왕(天王)께 새해인사를 올렸다는 것은,
하나라가 상국(上國)을 예(禮)로써 잘 섬기는 등
정신을 차렸다는 단적인 실례(實例)가 되는 것이다.
 
BC 2224년에 우(禹)가 단군조선의 질서를 벗어나서 스스로 하왕(夏王)이라 칭하면서
시작된 하나라는 내적으로 불안한 정세를 겪고 있었던 것인데,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였던 유호씨(有戶氏)와 전쟁 중에
모산(茅山, 회계산)의 진중(陣中)에서 죽고 우(禹)와 함께 치수(治水)를 하였던
백익(伯益)이 섭정을 하였으며,
우의 아들 계(啓)가  BC 2197년에 백익을 죽이고 왕 자리를 찾았으며,
이후 계(啓)도 유호씨가 하(夏)나라에게 가르침을 주기를 포기하기까지
전쟁을 함으로써 BC 2224년부터 BC 2195년경까지 합 30여년간 전쟁 속에 있었다.
 
태강(太康)이 정치를 잘 못하자 예(羿)가 중강(仲康)을 왕으로 세웠고,
중강의 아들 상(相)이 또한 정치를 잘 못하자
이때는 단군조선이 직접 하나라를 정벌하였으며
이틈에 예(羿)가 상(相)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것이고,
예(羿)의 신하였던 한착(寒浞)이
또한 하극상(下剋上)으로 예(羿)를 죽이고 왕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라 초기는 정세가 불안하였던 것이 된다.
 
중국측의 기록에서 고대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사이(四夷)에서 그 예(禮)를 배웠다고 적는 것은,
하(夏)나라의 경우 그 주변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나
하나라의 제후국이라 하더라도
단군조선의 정치적 영향하에 있었던 소국(小國)들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으면서
하나라가 생존해 왔음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BC 2073 <팔부루의 상주문>
 
달문 11년에 <팔부루八夫婁>가 임금께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길은,
먼저 자기의 명덕(明德)을 밝게 하는데 있고, 다음은 백성을 몸소 사랑하여야 하고,
마지막은 지극한 선(善)에 이르게 하는 데 있습니다.
대개 사람의 지능은 먼저 그 물정(物情)과 물리(物理)를 알아야
점점 발달하게 되는 것이며,
만물의 사정과 이치를 안다는 것은 백성의 일상 생활에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갈포(葛布)를 입고, 겨울에는 털옷을 입는 것은
기후의 춥고 더움을 좇아 입는 것이며,
생선과 고기를 먹는 것은 먹는 것을 가장 중하게 여겨, 몸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수신(修身)하는 것은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이며,
집안을 다스리는 일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길입니다.
 
또 언제든지 전쟁에 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며,
지키는 자기를 높고 견고한 성과 같이 하여야 하고,
공격하는 태세를 갖춘 자기를 용맹스러운 장수와 병사같이 하여야 합니다.
유혹이 들어올 때는 반드시 물리쳐야 하며, 게으름이 들어올 때는 분발(奮發)시키며,
일생(一生)을 위해서는 많고 위험한 고비를 무릅쓰며,
공을 세우기 위하여 험한 고비도 넘으며,
승패의 갈림길에서는 잠시라도 힘을 늦춰서는 안되며,
허실(虛實)의 원인과 결과는 티끌만한 태만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니,
어찌 일초일각인들 방심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지식과 행함은 견고한 병기로 무장된 병사처럼 되지 않으면 안되며,
의(意)와 지(志)가 강한 활과 살처럼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력(實力)과 군량(軍糧)은 늘 풍족하게 하고, 병사들은 항상 용맹스럽게 하며,
지능있는 모사(謀士)는 본거지 안에서 꾀를 내며,
자격 있는 주장(主將)은 진문(陳門)안에서 지휘하여 의용(義勇)을 떨치면
무력의 위엄이 적에게 미칠 것입니다.
전쟁에서 모실 자는 모시고 징벌할 자는 징벌하는 것은,
그 목적이 개선(凱旋)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 대의 힘을 과시하여 기운을 토해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최후의 승리는 오직 하나의 방법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저 덧없는 승패는 도외시하고
마지막까지 승전하고야 마는 칠전팔기(七顚八起)며,
구사일생(九死一生)할 각오로써 홀로 자아(自我)의 신념을 확신(確信)하는 것이니,
이것은 곧 인내(忍耐)입니다.
이 인내력이 있으면 어떤 위험이 있어도 근심할 것이 없으니
무슨 곤란(困難)이 있겠습니까.
 
넘어져도 희망은 항상 있으며, 맹렬한 폭발 속에서도 뜻은 매우 높으며,
마음이 만고청산(萬古靑山)과 같고, 움직임은 만리장강(萬里長江)과 같아서,
반드시 계획한 것은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수신(修身)의 도(道)를 제대로 알고 실행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께서
 
“옳다. <팔부루八夫婁>여,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부리는 도(道)를 수신(修身)하는 데서 얻었다.”하시고,
 
그를 상장(上將)으로 삼고 삼군(三軍)을 독려하게 하였다.
 
 
 
BC 2049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서효사(誓效詞)를 짓다>
 
임자년(壬子年)에 모든 한(汗)들을 상춘(常春)에 모이도록 하여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렸는데,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서효사는 아래와 같다.
 
“아침 해가 먼저 비치는 땅에, 삼신(三神)께서 밝게 세상에 내리시고,
한인(桓因)께서 모습을 나타내어 먼저 덕을 심으시니 크고 깊어라.
 
모든 신께서 의논하여 한웅을 보내시니
한웅(桓雄)께서 조칙을 받들어 개천(開天)을 시작하셨도다.
 
치우(蚩尤)께서 청구(靑邱)를 일으키고 만고(萬古)에 무(武)의 위엄을 떨치시니
회대(淮岱) 지역이 모두 왕께 돌아왔으며 천하가 능히 침범치 못하였도다.
 
왕검(王儉)께서 대명(大命)을 받으시니, 기쁜 소리가 구한(九桓)에 울려 퍼지고,
고기잡이 백성과 물가의 백성들이 깨어나고,
풀이 자라고 바람이 부는 육지에도 덕화(德化)가 새롭도다.
 
원한 있는 자는 먼저 원한을 풀고, 병이 있는 자는 먼저 병을 없애며,
한마음으로 인(仁)과 효(孝)가 있을 따름이며, 사해(四海)가 모두 광명(光明)이로다.
 
진한(眞韓)은 나라 안을 맡으니 다스림의 도(道)는 모두 새로우며,
마한은 그 왼쪽을 보좌하고 번한은 그 남쪽을 보좌하여,
험준한 바위가 사방의 벽을 쌓음이라.
 
성스런 임금께서 상춘의 신경(新京)에 행차하심은
저울대와 저울추와 저울그릇과 같도다.
 
저울그릇은 백아강이요, 저울대는 소밀랑이며, 저울추는 안덕향이라.
 
머리와 꼬리가 수평을 이루어 고르며,
신뢰와 덕(德)이 신(神)의 정기(精氣)를 보호하고,
나라를 흥하게 하여 태평을 보장하니,
조공하는 나라가 70국이며, 영원토록 삼한(三韓)의 뜻을 보장하도다.
 
왕업(王業)에 흥함과 융성함이 있을지니, 흥함과 폐함을 말하지 말지로다.
 
정성은 하늘님(天神)을 섬김에 있도다!
 
 
이에, 달문 천왕께서 모든 한(汗)들과 약속을 세워 이르기를,
 
“무릇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환국(桓國)의 오훈(五訓),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로써 영구토록 준수하는 일로 삼느니라.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위하는 길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하느니,
농사는 사람 사는 모든 일의 근본이며, 제사는 다섯 가르침의 근원이니라.
마땅히 백성과 더불어 함께 다스리는 것을 산업으로 삼을 것이니라.” 하셨다.
 
천왕께서는 먼저 겨레(族)가 소중함을 가르치고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며 아울러 사형을 없애고,
책화(責禍)와 국경을 지키는 것과 화백(和白)을 공개하였다.
 
전적으로 함께 화합하는 마음으로 하나로 베풀고,
겸손하고 낮추어 스스로 기름으로써, 어진 정치의 시작이 되었다.
 
때에 동맹을 맺어 조공을 바친 곳이
큰나라가 둘(2)이며, 작은나라가 스물(20)이며, 마을부락이 3,624곳이나 되었다.
 
 
서효사(誓效詞)는 신지가 지은 비밀스런 글이라 하여 신지비사(神誌祕詞)라고도 한다.
 
실제로 신지비사인 서효사는 BC 2049년에 달문(達門) 천왕(天王)이
상춘(常春)의 신경(新京)에 행차하여 구월산(九月山) 제천단(祭天壇)에서
모든 한(汗)들과 함께 삼신(三神)께 제사를 올릴 때,
신지(神誌)의 직에 있던 발리(發理)라는 사람이 글을 지어 바친 것이다.
 
위 서효사는 단군조선 이전의 역사로서,
우리나라가 삼신께서 화신(化身)하여 내려오신 나라이며,
한인(桓因) 천제의 역사와 한웅(桓雄) 천왕의 개천(開天)의 역사와
치우(蚩尤) 천왕의 위세(威勢)의 역사를 적고 있다.
 
또 단군조선의 시조이신 단군왕검께서 대명(大命)을 이었음을 적고 있으며,
진한과 마한과 번한의 역할을 적으면서 만대에 삼한(三韓)의 역사가 무궁할 것인 바,
오로지 나라에 흥함이 있을 뿐이지 나라의 폐함은 말조차 꺼내지 말 것이며,
다만 하늘을 섬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汗)이라는 직위는 단군조선의 제도로 볼 때
지방장관격인 욕살(褥薩) 위의 자리가 되는 일반적인 제후(諸侯)에 해당하는데,
경우에 따라 넓은 의미로 진한, 마한, 번한의 한(韓)을 포함하기도 하고,
때로는 군(君)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으며,
좁은 의미로는 한(韓)이나 군(君)의 아래인
지방의 왕(王)이 되는 일반적인 제후가 된다.
즉 통상적으로 일반제후인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이 한(汗)에 해당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한(汗)은 지방 제후국의 왕이 되며 군사권은 제한된다.
 
일반적으로 왕(王)은 군사권을 가지는데,
한(汗)은 명을 받아서 군사권을 행사하게 된다.
 
즉 한(韓)과 한(汗)은 보위(補衛), 보좌(補佐)의 뜻을 가진다.
군사권을 행사할 때는 왕(王)이라 칭하게 된다.
 
성(城)의 책임자인 성주(城主)는 일반적으로 지방장관격인 욕살(褥薩)이 맡으나
경우에 따라 욕살(褥薩)을 승진시켜 한(汗)으로 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 한(汗)으로 봉해진 성(城)은 제후국(諸侯國)이 된다.
 
단군조선의 제후국은 자세히 구분하면,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의 삼한(三韓)과
이들 삼한의 관경에 속한 군후국(君侯國)이 있어
한국(韓國), 군국(君國), 후국(侯國)이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은 처음 배달국의 천군(天君)에서
조선개국 시조로서 천왕(天王)이 되셨고
이후 태자부루를 천왕격인 진한(眞韓)에 봉함으로써 천제(天帝)로 받들어진 것이며,
제2대 부루 천왕부터는 천왕(天王)이 되어
마한과 번한은 천왕격(天王格)의 비왕(裨王)이 되고,
진한과 마한과 번한의 관경에 속한 군국(君國)의 왕은 천군(天君)이 되며,
그 외 일반 제후국의 왕은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 천자(天子), 천남(天男)에 해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위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하은주(夏殷周) 등 고대중국의 왕들은
모두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의 지방 제후국의 왕이 되는 천자(天子)인 것이며,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도 스스로 천자(天子)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서효사에 의하면 BC 2049년의 상춘은 신경(新京)이라고 적어
이미 단군조선의 이궁(離宮) 이상으로 간주되고 있던 있던 상태가 된다.
 
실제로 상춘에 신궁(新宮)을 축조한 때는 BC1984년인데,
이때는 청해(靑海)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반란을 일으켜
아사달궁을 침범하여 제9대 아술 천왕이 피난한 때이며,
여기에 3년을 머물렀다 아사달로 되돌아 왔다.
 
한인(桓因) 시대 이전에 이미 9족이 형성되었는데,
황족(黃族), 백족(白族), 남족(藍族), 적족(赤族),
현족(玄族), 양족(陽族), 우족(于族), 방족(方族), 견족(畎族)이다.
 
이중 양족, 우족, 방족, 견족은 모두 황족의 파생족이다.
황족은 황인종, 백족은 백인종, 남족은 청인종,
적족은 적인종, 현족은 흑인종 계통이 된다.
 
그리하여 백족(白族)에 해당하는 호족(虎族)과 황족(黃族)에 속하는 웅족(熊族)이,
호족이 텃세를 부리는 틈에 웅족이 이주(移住)를 하면서, 전쟁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홍익인간 세상을 펴칠 뜻을 품고 있던 한웅천왕이
한인천제(桓因天帝)의 명을 받아,
밝은 하늘나라인 북쪽의 한국(桓國)에서 지방이 되는
남쪽의 밝은 땅 나라인 박달로 내려와,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는
하늘나라의 가르침을 주어 짐승같은 짓을 그치게 하여
인간(人間)이 되게 함으로써 배달국 백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호족(虎族)은 한웅천왕의 가르침을 끝내 따르지 않아
백성으로 받아들여 지지않고 사방으로 추방을 당하였다.
 
뿔뿔이 흩어진 호족(虎族)의 일부는
후대에 황제헌원(黃帝軒轅)의 백성이 되기도 하였고,
서안(西安) 서쪽에 살던 백족(白族)은 후대에 서이(西夷)로 불리면서
주(周)나라 세력의 주축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서이(西夷) 출신이라 부른 것이 된다.
 
고려사절요에 소위 신지비사(神誌祕詞)에 관한 글이 전하는데,
원래의 서효사의 문장이 변형되어 있다.
 
여기서는 신지비사의 글을 빌어
지금의 서울인 한양(漢陽)을 오덕지(五德地)라 여겼던 것이며,
고려시대 남경(南京)으로 삼았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의 오덕지가 되는 번한(番韓)의 오덕지는 곧 번한의 5경(京)이 되는데,
동경(東京)이 되는 험독(險瀆), 서경(西京)이 되는 한성(汗城),
남경(南京)이 되는 가한성(可汗城)인 낭야성(琅耶城),
북경(北京)이 되는 탕지(湯池) 그리고 중경(中京)이 되는 개평(蓋平)이다.
 
개평은 안덕향(安德鄕)이라고 부르며
탕지는 그 이전의 수도로서 구안덕향(舊安德鄕)이라 부른다.
 
또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는
배달국 시대에 오가(五加)가 담당하였던 직무를 가리키는데,
저가 주병(猪加主病), 구가 주형(狗加主刑),
양가 주선악(羊加主善惡), 우가 주곡(牛加主穀), 마가 주명(馬加主命)이다.
 
즉, 저가는 질병을 담당하고, 구가(개)는 형벌을 담당하며, 양가는 선악을 담당하고,
우가는 농사를 담당하고, 마가는 명령과 목숨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오가(五加)를 오방(五方)의 오부(五部)로 보면
저가(豬加)는 중부(中部), 구가(狗加)는 서부(西部), 양가(羊加)는 북부(北部),
우가(牛加)는 동부(東部), 마가(馬加)는 남부(南部)에 각 해당한다.
 
저가(豬加)는 돝 즉 돼지를 상징으로 하는 부서(部署)로서
청결(淸潔)을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질병(疾病)을 담당한 것이 되고,
구가(狗加)는 개를 상징으로 하는 부서로서 안녕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치안(治安)과 형벌(刑罰)을 담당한 것이 되고,
양가(羊加)는 양이나 염소를 상징으로 하는 부서로서 착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선악(善惡)을 담당한 것이 되고,
우가(牛加)는 소를 상징으로 하는 부서로서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에서
농사를 담당한 것이 되고,
마가(馬加)는 말을 상징으로 하는 부서로서 명령(命令)을 전달하고
전쟁과 국방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 목숨(命)을 담당한 것이 된다.

이들 오가(五加)를 통할(統轄)하는 삼사(三師)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인데,
풍백은 입법담당이며, 우사는 행정담당이고, 운사는 사법담당이다.
지금으로 보면 풍백은 입법부인 국회, 우사는 행정부, 운사는 사법부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양가(羊加)의 직무는 선악(善惡) 담당인데,
교육(敎育)과 사법(司法)의 직무를 수행하는 바,
행정담당인 우사(雨師)와 사법담당인 운사(雲師)에 겸하여 속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오가(五加)는 삼사(三師) 아래에 있으면서 업무적으로 소속된 것이 된다.
 
이는 근세조선 시대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아래에
행정부인 6조가 소속된 것과 유사한 체제가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도 기본적으로
배달국의 삼사오가(三師五加) 제도가 실시되었던 것이며,
추가로 호가(虎加), 용가(龍加), 웅가(熊加), 응가(鷹加), 노가(鷺加) 등을 설치하여
각각 업무를 담당하였다고도 기록되며 단군 8가(加), 9가라고도 불리운다.
 
이와 같이 오가와 별도로 가(加)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본 행정부서가 되는 6부(部)나 6조(曹) 외에
별도의 업무를 관할하는 관청(官廳)을 둔 것과 같은 이치(理致)가 된다.
 
달문(達門) 천왕은 화합정치를 펼쳐 사형제도를 없애고,
책화(責禍)와 국경경비와 화백회의(和白會議) 등을 공개하였으며,
화합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겸손하고 낮춤으로써 어진 정치를 실행하였던 것이다.
 
때에 동맹을 맺어 조공을 바친 곳이 큰나라가 둘(2)이며, 작은나라가 스물(20)이며,
마을부락이 3,624곳이나 되었다 하는 바,
큰 나라는 천왕격인 비왕(裨王)의 나라인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이며,
작은나라는 그 외의 군후국을 가리키는데,
군후국 중에서 크게는 청구, 남국(藍國), 구려, 진번, 부여, 숙신, 예, 개마, 옥저,
졸본, 비류, 고죽, 몽골, 선비, 흉노, 낙랑 등이 있으며,
천자국(天子國)이 되는 하(夏)나라도 여기에 포함되고,
그 외 제후(諸侯)가 다스리는 소국(小國)들이 있어, 모두 20여개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단군조선은 16개국을 거느린 천축국(天竺國)처럼 대제국이라 풀이되기도 한다.
 
조공(朝貢)을 한 마을부락이 3,624곳이라 한 것은,
큰나라와 작은나라에 속한 마을의 총 숫자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명하나,
상국(上國)인 진한(眞韓)과 대국(大國)인 마한(馬韓) 및 번한(番韓)과
소국(小國)으로서
삼한(三韓) 관경에 속한 제후국 안에 있는 마을부락의 숫자라고도 보인다.
 
다만, 마을부락을 삼한(三韓)과 제후국(諸侯國)들로부터 독립된 마을단위로 보면,
각 추장(酋長)들이 맡고 있던 곳으로서 별도로 조공을 바친 것이 된다.
 
BC 1666년의 호구(戶口) 조사에서 1억8,000만명이라는 기록을 보면,
삼한 관경내 제후국과 별개인 마을부락으로 보이며,
이 인구는 파미르고원에 있던 9족(族) 전체의 수가 될 것이다.
 
 
 
BC 2023 <온백이 夏의 정벌을 상주하다>
 
한율 25년에 주부(主父) <온백溫伯>이 임금을 달래며 말하기를
“지금 하(夏) 나라 정법(政法)이 어두워 국세는 위축되고 백성은 가난하며,
군사는 약하여 외적의 침입이 쉬지 않는 이때에,
천제(天帝)의 나라는 부하고 군사가 강하니,
한번 군사를 움직여 공격하면 하나라를 손아귀에 넣기란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입니다.
이 좋은 기회를 잃지 마시옵소서.” 하니
 
임금께서
 
“공연히 남의 나라를 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며,
또 영토를 얻기 위하여 생명을 해치는 것은 어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니,
나는 받아들일 수 없노라.”하셨다.
夏 나라 왕이 이 일을 전해듣고 사자를 보내와 사례하였다.
 
 
 
BC 1994 <마한(馬韓)에 막연(莫延)을 봉(封)하다>
 
BC 1994년 한율 54년 이전에 마한(馬韓) 궁호(弓戶)가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선대에 마한(馬韓)이었던 두라문(杜羅門)의 아우가 되는
두라시(杜羅時)의 증손 막연(莫延)이
제7대 한율(翰栗) 천왕의 명(命)을 받아 마한(馬韓)을 계승하였다.
 
 
 
BC 1993 <20분의 1의 세율(稅率)을  시행하다>
 
무신년 우서한(于西翰) 원년 큰아들 아술(阿述)을 태자로 삼았다.
 
2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제정하고 널리 통용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아사달국의 위정왕(威靖王)이 죽었다 재위기간은 49년이다.
세자 구을(求乙)이 즉위하니 이가 화정왕(和定王)이다.
 
 
원칙적으로 정전법(井田法)의 세율은 1/9의 세법이 되는데,
제3대 가륵 천왕 때인 BC 2175년에
이미 사정에 따라 조세를 조절하도록 조치하였다.
 
단군조선의 세법은 백성들을 위주로 한 법으로서
단군천왕이 솔선수범으로 근검절약하며 검소하게 생활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정전법에 의한 세율이 되는 1/9을  두배 이상 적게하여
1/20의 세율로 한 것은 파격적인 것이라 하겠다.
 
단군조선은 더욱더 파격적으로 세율(稅率)을 인하하게 되는데,
BC 1661년에 1/80 세율의 법을 시행하였던 것이며,
세계역사에서 그 유래가 없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말기에 이르러 재정이 달려 명령이 듣지 않게 되고
장수들이 용맹만을 믿고서 난을 일으켜 천왕의 존재가 유명무실하게 됨으로써
결국 BC 238년에 나라를 오가(五加)들에게 맡기게 되었는 바,
단군조선의 정치는 천왕의 황실을 우선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가혹한 정치를 없애어 백성의 삶을 위주로 하였던 것이며,
이로써 단군조선 역사상에 폭군(暴君)이 없는 이유를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즉, 단군조선은 개국초부터 단군 천왕(天王)은 모든 백성의 부모가 되어
자식처럼 돌보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는 임금으로서,
스스로가 성인(聖人)으로서 모든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인 진정한 정치가였던 것이다.
 
단군조선의 역사가 안타깝게도 천왕의 명령이 듣지 않게 됨으로써
2,102년으로 마감한 것이 되는데,
이 2,000년을 넘는 역사를 가진 나라도 세계역사상 유래가 없으며,
명실상부 단군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들의 원망이 없던 지상낙원이었던 것이다.
 
 
<사가 일구 일승(四家一區一乘)의 분수향위법(分守鄕衛法)을 시행하다>
 
무신년(戊申年)에 우서한(于西翰) 천왕이 백아강(白牙岡)에 머물면서
마한 막연(莫延)에게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사가일구(四家一區), 일구일승(一區一乘)으로써
향토를 지키게 하였다.
 
 
1가(家)는 과거의 통념상 4대(代)가 함께 사는 것을 기준으로 하게 되면,
인구수로는 최소한 200명 이상이 사는 크기가 될 것이며,
최소한 10호(戶)에 3대(代)가 함께 사는 것이 되어 작은 마을을 이루는 것이 되고,
장정(長丁)은 최소한 50명 이상이 될 것이다.
 
대체적으로 십리(十里)는 10개의 마을(里)을 거쳐 가는 거리가 되어
지름이 약 4킬로미터가 되는데,
팔방(八方)으로 지름 10리(里)이면 마을이 최소한 40개의 마을이 있는 것이 되고,
리(里)를 쉽게 가(家)로 계산하면 최소한 40가(家)가 되어
약 8,000명이 읍(邑)을 이루는 인구수가 된다.
 
십리(十里)에 걸쳐 읍(邑)이 되고 백리(百里)에 걸쳐 국(國)이 되는데,
백리에 걸치는 소국(小國)은 최소한 400가(家)가 있는 것이 되어
4가 1승(四家一乘)으로 계산하면 약 100승(乘)의 나라가 된다.
대체적으로 지름 백리 정도가 되는 군(郡) 단위 크기의 나라가 소국(小國)에 해당한다.
 
당시 4가(家)를 한 구역으로 묶어서 일구(一區)로 하고,
전차(戰車) 일승(一乘)을 마련하게 하여 자체적으로 향토방위를 하게 한 것이 된다.
이것이 향토를 나누어 분담하여 지키게 하는 분수향위법(分守鄕衛法)인 것이다.
오늘날의 향토예비군 제도와 유사한 제도가 된다.
 
한편, 후대인 BC 192년 북부여 시대에 제2대 모수리 천왕이
경향분수법(京鄕分守法)을 세워 시행하였다고 기록되는데,
이는 서울과 지방을 윷놀이판과 같이 중앙과 사방(四方)으로 군대를 편성하여,
중앙은 천왕이 맡고 사방에는 지방의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하는 방위체제이다.
 
 
단군조선 초기에 백아강 지역에는 달지국(達支國)이 있었으며,
이 백아강에 단군왕검 천왕이 웅백다(熊伯多)를 비왕(裨王)인 마한(馬韓)으로 봉하여
마한(馬韓)의 수도로 삼았다.
 
BC 425년에 말기 단군조선의 수도였던 장당경(藏唐京){今 朝陽}의 남쪽에 위치하였던
해성(海城)을 이궁지(離宮地)로 하여 평양(平壤)이라 불렀다.
 
한편, BC 2357년에 당(唐)을 세운 요(堯)임금이 수도로 삼은 곳은 평양(平陽)인데,
황하(黃河) 중류지역에 위치한 낙양(洛陽)에서 황하를 건너
태원(太原)의 남쪽 사이의 중간 쯤에 위치하였다.
 
 
BC 1992 <풍년이 들다>
 
기유년(己酉年)에 풍년이 들어 벼 한 줄기에 이삭이 8개나 달렸다.
 
 
벼농사가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있었다는 증거로서
단군왕검의 천범(天範) 8조를 들 수 있다.
 
천범 8조는 단군왕검께서 조선을 개국하시고
백성들에게 인간윤리를 가르치신 하늘의 법이라는 뜻이다.
 
천범 8조 중 벼와 관련된 내용은,
“너희가 만약 벼밭(禾田)에 불을 놓아 벼가 장차 모두 타 없어지게 된다면,
하늘님과 사람이 모두 노할 것이며,
너희들이 비록 아무리 두껍게 둘러 싸더라도 그 냄새가 반드시 새어 나올 것이니,
너희들은 인간의 본성을 공경하며 지니고, 사특함을 품지 말 것이며,
악함을 몰래 숨기지 말 것임며, 재앙을 숨기지 말 것이니라.
마음으로 지극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친하게 여기면,
이에 복록이 무궁할 것이니, 너희 오가들은 이를 따를지니라”이다.
 
이 천범 8조에 나오는 벼밭(禾田)으로 볼 때는 밭농사를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논이라는 한자인 답(畓)은 수전(水田)으로서 물논(무논)이며
벼를 심는 논을 가리키는 바,
이 답(畓)이라는 글자가 처음 언제 생겼는지를 알면
벼 논농사의 역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논을 가리키는 답(畓)이라는 글자는
중국옥편(中國玉篇)에는 나오지 않는 한자(漢字)로서
선대의 한국(韓國)이 만든 순수한 우리글자가 된다.
 
그래서 파미르고원 동쪽에서 일어난 벼 논농사는
고대 한국이 먼저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BC 1990 <하(夏) 나라를 암행시찰하다>
 
신해년(辛亥年)에 천왕께서 미복(微服)을 하고서 몰래 국경을 나가
하(夏)나라의 사정(事情)을 시찰(視察)하시고 돌아와 관제(官制)를 크게 고치셨다.
 
 
 
BC 1987 <삼족오(三足烏)가 출현하다>
 
갑인년(甲寅年) 우서한 7년에 세발까마귀(三足烏)가 대궐 뜰 안으로 날아 들어왔는데,
날개의 넓이가 석자(三尺)나 되었다.
 
 
삼족오를 나타낸 형상을 보면 머리에 벼슬이 달려 있어
그냥 보통의 까마귀가 아니라 검은 봉황(鳳凰)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또 봉황(鳳凰)은 상상의 새가 되나 실존하는 새로서 가장 근접한 새는
공작류(孔雀類)가 될 것인 바, 결국 삼족오는 검은 공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신도(四神圖) 중 남쪽의 주작(朱雀)은 주작(朱鵲)이라고도 적는데,
주작은 불(火)처럼 붉은 색을 띤 공작류의 새가 된다.
 
검은 색은 북쪽을 상징하는 색인 바,
삼족오(三足烏)는 파미르고원의 동쪽이자 황하 북쪽에 위치하는
단군조선 고유(固有)의 새가 되며,
단군조선의 정통성(正統性)을 계승한 고구려(高句麗)의 상징적인 새이기도 하다.
 
한편, 삼족(三足)의 삼(三)이라는 글자는
천지인(天地人)의 셋을 가리키는 말로서 삼신(三神)과 관련되며,
검은 색은 신(神)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한 바,
이로써 삼족오는 삼신일체(三神一體)의 천신(天神)으로서
그 대표격인 태양신(太陽神)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삼족오는 태양(太陽)의 본체가 되는 태양신(太陽神)이자
태양(太陽)을 상징하는 새이다.
 
 
BC 1985 <금법위반자를 교화(敎化)하다>
 
병진년(丙辰年) 아술 원년에 천왕께서 어진 덕이 있으시어
백성이 금법(禁法)을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똥을 눈 땅이 비록 더럽다 하나 비와 이슬이 내리는 때가 있느니라” 하며
더 이상 논하지 않으시니,
금법위반자들이 이에 그 덕에 교화되어, 인정어린 도타운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금법이 체계적으로 잡혀 있었다.
후기 단군조선 시대가 시작된 후 얼마 안 되는 BC 1282년
번한(番韓) 서여(徐余)의 시대에,
막 후기 단군조선을 시작한 단군조선 색불루 천왕이 칙서를 내렸으며
이때부터 소위 8조금법인 금팔조(禁八條)를 만들어 시행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BC 2333년 10월 3일에 조선을 개국하신 단군왕검 천왕께서는
천범8조를 내려 백성들에게 성(誠), 심화(心化), 경효충(敬孝忠), 화목(和睦),
애우(愛佑), 양보(讓步), 구휼(救恤), 경천친민(敬天親民) 등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윤리를 가르쳤다.
 
또, BC 2049년에는 제6대 달문 천왕께서는 사형(死刑)과 책화(責禍)를 없앴다.
 
아술 천왕은 죄 지은 사람들에게 교화의 기회를 주어
끝내는 모든 범법자들이 일반 백성으로 돌아와 살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며,
이에 따라 죄지은 백성들도 죄를 뉘우치고 참된 백성으로 살게 됨으로써
교화정치가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두개의 태양이 출현하다>
 
이날 두개의 태양(太陽, 日)이 나란히 나타나
이를 구경하는 자들이 몰려 쌓은 담과 같았다.
 
 
하늘에 태양이 두개가 나타났다는 기록인데,
이는 이미 아침에 떠오른 태양이 개기일식 현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오니 낮에 두개의 태양이 출현한 것이라 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혜성(彗星)이 나타나 밝게 빛남으로써 태양이 출현한 것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다음해인 BC 1984년에 청해(靑海)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반란(叛亂)을 일으킨 것과도 관련이 되는 기록이라 볼 수 있는데,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혜성 출현을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고 보인다.
 
혜성은 출현한 후 사라지지만,
개기일식은 새로운 태양이 자리를 바꾼 상태가 되기 때문에
성공한 혁명에 해당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BC 1984 <청해 욕살 우착의 반란과 상춘 신궁(新宮) 창건>
 
경자년(更子年) 아술 2년에 청해(靑海)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니,
천왕께서 상춘(常春)으로 피하여
구월산(九月山) 남쪽 기슭에 신궁(新宮)을 창건하게 하였고,
우지(于支), 우속(于粟) 등을 파견하여 그를 토벌케 하여 주살(誅殺)하게 하고,
삼년 후인 BC 1982년에 서울(아사달)로 되돌아 오셨다.
 
 
청해(靑海)는 지금의 티벳고원의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욕살은 제후(諸侯)가 아닌 지방장관격이다.
 
우착(于捉)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아사달의 궁에 침범하니,
아술 천왕이 몸을 피하여 상춘의 이궁(離宮)으로 옮긴 것이며,
이때 상춘의 구월산 남쪽 기슭에 새로운 궁궐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 된다.
 
우착을 토벌하여 주살한 우지(于支)와 우속(于粟)은
우착의 친족(親族)으로 추정되는데,
아술 천왕이 우지와 우속에게 명을 내려 우착을 토벌케 한 것이 된다.
 
아술 천왕이 우착의 난으로 인하여 상춘으로 피한 후 3년이 지나
아사달로 환궁하였는데, 상춘은 이궁(離宮)이 있던 곳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BC 1950 <야생동물을 사육하다>
 
신묘년(辛卯年) 노을 원년에 처음으로 큰 우리(囿)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당시 가축은 대표적으로 단군조선의 오가(五加) 제도의 상징동물인
돝(돼지), 개, 양(또는 염소)과 닭, 소, 말 등이 될 것이며,
이러한 가축 외에 야생 짐승들을 길렀다는 것인 바,
범(호랑이), 표범, 곰, 늑대, 노루, 사슴, 여우, 멧돼지, 삵(살쾡이) 등이다.
 
 
 
BC 1949 <일반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 행차하다>
 
임진년(壬辰年)에 몸소 일반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행차하여 안부를 물으며 계시니,
어가(御駕)가 머문 야외에 현자(賢者)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BC 1946 <신원함을 설치하다>
 
乙未(BC1946) 노을 5년. 宮門밖에 伸寃木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실상을 들었다.
 
각 州의 首府에 伸寃函을 설치하고 원통함을 가진 백성들이
伸寃書를 함에 넣도록 하고 그 원한을 풀어주도록 하였다.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신원목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장치로서의 나무를 가리키는데,
근세 조선시대의 신문고(申聞鼓)와 같은 제도가 된다.
 
임금이 일반 백성들의 억울함을 직접 들으려면 번잡하게 측근과 호위병을 거느리고
몸소 마을로 행차하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데,
그보다도 간편한 방법으로서 억울한 백성들이 궁을 찾아와 신원목을 두드리거나
억울한 사연을 적은 글을 남겨 놓으면, 담당자를 통하여 그 사연을 듣거나
그 글을 직접 읽고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BC 1935 <기상이변과 지각변동이 일어남>
 
병오 노을 16년에는 동문 밖 10리 떨어진 곳에서 연꽃이 피더니 시들지 않았고
누워있던 바위들이 스스로 일어났으며,
천하(天河)에서는 신령스런 거북이 등에 그림을 짊어지고 나타났다.
 
그 그림은 윷판과 같았다.
 
그리고 발해 연안에서는 금괴가 노출되었는데, 그 양이 13석은 되었다.
{기상이변과 지각변동이 일어났음을 뜻함}.
 
 
천하신구(天河神龜)의 기록과 유사한 내용의 글이
BC 2267년경 요순(堯舜)시대 대홍수의 치수(治水)를 담당하였던
사공(司空) 우(禹)가 얻었다는 소위 낙서(洛書)와 관련하여 전해오는데,
낙서(洛書)는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이의 등판에 그려진
수리음양역(數理陰陽易)이다.
 
 
 
BC 1916 <감성(監星)을 설치하다>
 
을축년(乙丑年) 노을 35년에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이때 별을 관찰하는 감성이라는 관청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는 것이며,
처음으로 천문(天文)을 관측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별자리 관측은 이미 역법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해오던 것이 되는데,
역법이 시작된 해는 계산상으로 황궁씨(黃穹氏)가 화백(和白)으로 다스리던
마고성(麻姑城) 시대의 후기시대인 BC 25858년 계해년이 된다.
 
 
 
 
BC 1891<12명산(名山)에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다>
 
경인 도해 원년(BC1891)에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하여 12개의 명산을 택하여
(각 산의)가장 뛰어난 곳에 국선(國仙)을 양성하는 소도를 짓도록 하고,
그 둘레에 단수(檀樹)를 심도록 하였으며
(소도 주변에서) 가장 큰 나무를 택하여 환웅상(桓雄像)으로 모시고,
(그 나무에) 제를 올렸는데,
이것을 웅상(雄常, 환웅이 늘 함께 하는 나무)이라 명하였다.
 
왕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국자랑'의 사부(師傅) 중에
'자(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단제에게 책(策,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의견서)을 써 올리기를
 
"아뢰옵건대 신시(환웅 배달국시대)는 결실을 잘 맺었나이다.
환웅께서는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맞이하여
전인(佺, 완전한 인간)의 계(계율, 가르침)를 베풀어 교화를 하였나이다.
 
(환웅께서는)천부경과 삼일신고를 하늘로부터 받아 백성을 가르쳤고,
(환웅의)용모와 위엄은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었나이다.
 
이에 백성들은 서로 악행을 행하지 않고 함께 (환웅의) 다스림에 동참하였고,
나라안에는 도적떼가 없어 모두 편안하였나이다.
 
백성들은 질병에 걸리지 않고 자신의 천수를 누렸고,
백성들의 삶은 흉년이 들지 않아 넉넉하였나이다.
 
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달을 맞아 춤을 추는 것이
멀리까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흥하지 않는 곳이 없었나이다.
 
만백성이 모두 덕의 가르침을 받았고,
(가르침을)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쳤는데.
이는 백성들이 배우고자 하는 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단제께서는) 그 해 겨울 10월에(冬十月) 대시전(大始殿, 환웅천왕을 모시는
사당 겸 국선들의 교당, 소도의 대시전은 후에 사찰(寺)의 대웅전으로 바뀌었음)을
세울 것을 명하였으며, 대시전 건축을 적극 장려하였다.
 
(대시전에는) 천제환웅을 닮은 환웅상이 편안히 모셔졌고,
환웅상의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태양과 같았다.
 
우주를 밝히는 둥근 빛은 단수 아래 환화(무궁화, 현재 사찰(寺)에는 연꽃 위에
석가모니를 모시지만 당시 소도의 대시전에는 무궁화 꽃 위에 환웅을 모셨다.) 위에
앉아 계신 환웅상을 비추었는데,
마치 살아 있는 참신(一眞神)이 둥근 원 중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경을 손에 들고, 대원일의 그림을 표로 만들어 걸어 놓고,
대시전의 망루에는 기를 세웠다. 이를 일러 거발환이라 불렀다.
 
※ 居發桓(거발환) : "모든 것을 갖추어 새로움을 알리다."
                            또는 "모든 것을 갖추어 환한 빛을 발하다."
 
3일 간의 근신 기간을 거친 뒤 7일간 지켜야 할 계율(행동규범)을 강의하였다.
 
(단제의 가르침은) 바람을 타고 사해로 전파되었다.    
 
그 표문에 이르기를
"하늘(天)은 조용히 사색하게 함으로써 깨달음(위대함, 大)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하늘의 길이요, 하늘의 이치(圓)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이것이 새로움을 만들어(하늘의 창조 정신)내는 진일(眞一)이다.
 
※ 圓 : 천간도(天幹圖) - 하늘의 별자리와 천체의 움직임을 땅의 음양 오행과
인륜(人倫)에 따라 밝혀 놓은 둥근 원형의 천체 해설서 - 하늘의 이치(깨달음, 大圓)
 
※ 玄默爲大 : 조용히 침묵에 잠기어 위대함(大)에 이르다.
                   사색에 잠기어 깨달음(大)을 얻다.
 
땅(地)은 모아서 간직해 둠으로써 깨달음(위대함, 大)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땅의 길이요, 땅의 이치(圓)를 본받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이것이 사람은 부지런해야 함을 뜻하는 근일(勤一)이다.
 
※ 蓄藏爲大 : 쌓고 저장하여 위대함(大)에 이르다. 부지런하여 깨달음(大)을 얻다.
사람(人)은 지식(앎)의 힘을 끼움으로써 깨달음(위대함, 大)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사람의 길이요, 지식(앎)을 선택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이것이 사람은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없으므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협일(協一)이다.
 
※ 知能爲大 : 지식(앎)과 그 지식을 추구하는 능력으로 깨달음(大)에 이르다.
                   깨달음으로 위대함(大)에 이르다.
 
고로(故) 사람(一神, 王, 지도자)은 본성에 충실하여야 하며,
진리를 터득하여 세상을 밝혀야 하고,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세상을 다스려야 하며(在世理化),
모든 사람을 이롭도록 하여야 한다(弘益人間).
 
이에 이 글을 돌에 새겨 영원토록 보전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西經)의 기록에, 웅상(雄常)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다섯가지 천연색의 옷감을 걸친 신단수(神檀樹)가 있는 소도지역임을 나타내고 있다.
 
산해경의 해외서경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어 불함(不咸)이라 하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이고,
숙신국(肅愼國)은 백민국(白民國)의 북쪽에 있으며,
나무가 있어 이름하여 웅상(雄常)이라 하고,
앞선 8대의 임금(帝)들이 여기에서 취하였다
(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肅愼氏國 肅愼之國 在白民之國北 有樹 名曰雄常
先八代帝 於此取之).
 
여기서 대황은 황하 북쪽 지역 전체인 대황원(大荒原)을 가리키며,
숙신씨(肅愼氏)는 단군조선을 말한다.
 
백민국은 성(城)에 해당하는 백민성(白民城)을 나라(國)로 부른 것이 되는데,
숙신국이 백민성의 북쪽에 위치하였던 것이 된다.
 
BC 426년에 우화충(于和冲)의 난이 일어나자 물리(勿理) 천왕의 명을 받아 난을
진압한 구물(丘勿)이라는 인물이 백민성(白民城) 욕살(褥薩)이었다라고 기록된다.
 
웅상에서 무엇을 취하였다라고 적은 것은,
또 다른 중국측 기록인 진서(晋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알 수 있게 되는데,
진서 동이전에는 웅상(雄常)이 아닌 낙상(雒常)으로 적고 있으며,
낙상은 웅상을 오기한 것이 명백하게 된다.
 
진서 동이전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숙신씨에 나무가 있어 낙상이라 부르며,
만약 중국(中國)에서 성제(聖帝)가 대(代)를 이어 즉위함이 있으면,
그 나무의 날가죽으로 가히 옷을 해 입을 만 하였다
(肅愼氏 有樹 名雒常 若中國 有聖帝代立 則其木生皮可衣).
 
중국에서 대를 이어 즉위한다는 것은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임금자리를 잇는 경우를 가리키는데,
산해경의 해외서경에 기록된 8대제(代帝)가
진서 동이전에서 말하는 성제(聖帝)로서 대를 이어 즉위하는 임금이 된다.
 
8대제(代帝)는 고대중국의 대를 이은 임금 즉 천자(天子)로서,
BC 3500년경 인물인 태호복희(太皞伏羲),
BC 3200년경 인물인 염제신농(炎帝神農),
BC 2698년경 인물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소위 삼황(三皇)과,
황제헌원 이후 황제헌원의 나라, 유웅국(有熊國)를 이은 소호금천(少昊金天),
전욱고양(顚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요(堯), 순(舜)의 5제(帝)를 가리킨다.
 
원래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책이 순(舜)임금의 신하이던 사공(司空) 우(禹)가
BC 2267년 단군조선의 태자부루(太子扶婁)가 주관(主管)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치수법(治水法)을 전수받고서 우공(虞貢)의 사례(事例)로서
BC 2267년부터 BC 2247년 사이 약20년간에
우(禹)와 백익(伯益)이 치산치수(治山治水)와 관련하여
산천(山川)의 지리(地理)와 특산물(特産物) 등을 조사하여 엮은 책이다.
 
그리하여 산해경이 처음 엮어진 시기를 고려하면,
이 시대는 순임금 시대가 되어 8대제는 순임금 이전의 임금이 되어
소위 삼황오제(三皇五帝)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나무의 생 껍질로 옷을 해 입을 만 하였다라는 것은,
즉위 의식으로서 박달나무 즉 웅상(雄常)의 나무 껍질로 옷을 해 입었다라는 것고,
이는 고대 중국의 소위 삼황오제가 배달국과 단군조선 천국(天國)의 제후(諸侯)가
되는 천자(天子)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글이다.
 
즉, 제후는 임금으로부터 봉해지는 직책이다.
그리하여 천자(天子)는 천국(天國)의 천왕(天王)이나
천제(天帝)로부터 봉해지는 봉작(封爵)의 하나로서 곧 자작(子爵)이 된다.
 
상국(上國)이나 중앙조정(中央朝廷)의 임금을 천왕(天王), 천제(天帝)라 한다.
 
즉 왕(王)의 상국의 임금은 천왕(天王)이 되고
제(帝)의 상국의 임금은 천제(天帝)가 되는 것이다.
 
천자(天子)는 일반적으로 천하 왕(天下王)이 된다.
 
즉 천상(天上)의 왕인 천군(天君), 천왕(天王), 천제(天帝)와는 다르며,
천하(天下) 즉 지상의 인간세계 또는 지방(地方)의 왕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단군을 제(帝)라고 적을 때는
진짜 천국(天國) 즉 하늘나라의 임금은 천제(天帝)라고 하며,
단군조선의 비왕(裨王)인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의 임금을 왕(王)이라고 할 때는
진한(眞韓)의 임금은 천왕(天王)이 되는 것이다.
 
천제(天帝)는 인격신(人格神)에 해당하고 천신(天神)은 자연신에 해당한다.
즉 천제(天帝)는 천신(天神)의 화신(化身)인 것이다.
 
특히 고대중국의 소위 삼황오제(三皇五帝)와
후대의 왕(王)들은 스스로 천자(天子)라고 칭하였다.
 
즉 스스로 하늘나라에서 봉해진 자작(子爵)으로서 천하의 왕을 자칭한 것이다.
 
이는 곧 고대중국의 임금이 되는 소위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모두 상국(上國)이 되는 배달나라(檀國)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제후로서 봉해진
천하(天下) 즉 지방(地方)의 왕이 되는 것이다.
 
태호복희는 한웅천왕(桓雄天王)의 아들로서 천군(天君)에 해당하고,
나머지 염제신농 이하 요순(堯舜)까지는 모두 일반 천자(天子)에 해당한다.
 
천자(天子)를 극존칭하여 태상천자(太上天子) 등은 몰라도
천왕(天王)이라고 칭하거나 부를 수 없으며,
만약 이와 같이 참칭(僭稱)하거나 부르는 경우에는
상국(上國)의 천왕(天王)을 모독하는 대역죄를 짓는 것이 된다.
 
공자(孔子)는 예기(禮記)에서
천자(天子)가 돌아가시면 천왕(天王)이라 존칭한다라고 적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천왕(天王)이 엄연히 존재하던 시기이므로
예(禮)에 어긋나는 것이 되며 대역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천자(天子)가 죽으면 태상천자(太上天子)라 하거나
천자(天子)보다 높은 천공(天公), 천후(天侯), 천백(天伯)이라 함은 몰라도
천왕(天王)이라 함은 가당치 않은 것이 된다.
 
이로써 공자(孔子)는 핵심중화주의자(核心中華主義者)로 낙인 찍히는 것이며
신선불사 예의군자(神仙不死禮義君子)의 나라인 단군조선 구이(九夷)를
감히 글로써 모독(冒瀆)한 자가 되는 것이다.
 
임금이 제후를 봉함에는 일정한 의식(儀式)을 거행한다.
그리하여 천자(天子)를 봉함에도 의식을 치르는 것이 된다.
즉,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천왕(天王), 천제(天帝)가
천자(天子)를 봉하면서 옷을 해 입힌 것이다.
 
그 옷의 옷감이 곧 웅상(雄常)인 박달나무의 생껍질이라는 것인데,
웅상(雄常)은 곧 신단수(神檀樹)인 바,
나무껍질은 이 신단수에 걸쳐진
삼색(三色), 오색(五色) 등의 천연색 옷감을 비유적으로 기록한 것이 되어,
가히 옷을 해 입을 만 하였다라고 적은 것은,
웅상에 걸쳐진 옷감으로써 천자(天子)에게 하사(下賜)하는 옷을 만들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된다.
 
 
 
<마한(馬韓) 대성산(大聖山)의 대시전(大始殿) 건립>
 
경인년 마한(馬韓) 아화(阿火) 시대에,
도해(道奚) 천왕이 바야흐로 뜻을 세워 개화평등(開化平等)을 다스림으로 삼았으며,
명을 내려 대시전(大始殿)을 대성산(大聖山)에 세우고
큰 다리를 대동강(大同江)에 세웠으며,
삼홀(三忽)로 전(佺)을 삼아 경당(扃堂)을 설치하여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의식(儀式)을 정하고
삼륜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강론(講論)하게 하니
한도(桓道) 문명(文明)의 번성함이 나라 밖까지 들렸다.
 
삼홀을 기준으로 미혼의 자제들을 모아
참전(參佺)의 도(道)를 닦게 하는 전(佺)을 삼아 소도(蘇塗)를 설치하고,
소도 옆에는 경당(扃堂)을 설치하여,
소도에서는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의식을 행하고
경당에서는 삼륜구서(三倫九誓)를 비롯하여 6예(藝)를 닦게 함으로써
홍익인간 문명이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홀(三忽)은 즉 세 고을(골, 忽, 卒)을 의미하며,
홀은 대략적으로 지금의 군(郡) 단위의 크기가 되는 지역이 된다.
즉 일정 단위의 지방에 소도를 설치하고 그 옆에 경당을 설치하여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소도제천의 의식을 행하게 하고
심신수련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국자사부 유위자(有爲子)의 헌책(獻策)>
 
경인년에 국자사부(國子師傅)로 있던 유위자(有爲子)가 계책을 바쳐 올려 말하기를,
 
“생각컨대, 우리 신시(神市)는 한웅의 개천(開天) 때로부터 무리를 받아들여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계율(戒律)로 세워서 교화(敎化)하였으되,
천경(天經)과 신고(神誥)는 조칙(詔勅)에 의하여 위에서 짓고,
의관(衣冠)과 대일(帶釰)은 아래로 즐거이 본을 보였으니,
백성들은 죄를 짓지 않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둑이 없어 저절로 편안하며,
온 세상의 사람들은 질병이 없어 스스로 오래 살고, 굶주림 없이 스스로 넉넉하며,
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달을 맞아하여 춤을 추매,
멀리까지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고 흥하지 아니한 곳이 없었으니,
덕의 가르침은 만 백성들에게 더하여 노래하는 소리가 사해(四海)에 넘쳤사옵니다.
이러한 청이 있사옵니다.” 하였다.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이 마한의 아화에게 도(道)를 설파하다>
 
“도(道)의 큰 원천은 삼신(三神)에게서 나왔으니,
도는 이미 상대도 없고 명칭도 없고, 상대가 있으면 도가 아니며,
명칭이 있으면 또한 도가 아닙니다.
 
도는 무상(無常)의 도이며 때에 따르니 이에 도가 귀한 바입니다.
 
칭하되 무상(無常)의 칭이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니 이에 칭이 실재(實在)하는 바이며,
그 밖이 크지 않고 안이 작지 않으니, 도는 이에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하늘에는 틀(機)이 있으니 내 마음의 틀에서 보고,
땅에는 모습이 있으니 내 몸의 모습에서 보며,
사물에는 다스림이 있으니 내 기(氣)의 다스림에서 봄이니,
이에 하나를 잡아서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서 하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일신(一神)이 내리는 바 이는 사물의 이치이며
이에 천일(天一)이 물을 낳는 도리입니다.
 
성통광명(性通光明)은 삶의 이치이며 이에 지이(地二)가 불을 낳는 도리입니다.
 
재세이화(在世理化)는 마음의 이치이며 이에 인삼(人三)이 나무를 낳는 도리입니다.
 
대개 대시(大始)에 삼신(三神)이 삼계(三界)를 만들어 물로써 하늘을 본 따고
불로써 땅을 본 따고 나무로써 사람을 본 땄으니,
무릇 나무라는 것은 땅에 뿌리를 두고 하늘로 나오는 것은
또한 처음 사람이 땅에 서서 나와 능히 하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번한(番韓) 탕지산(湯池山)에 삼신단(三神壇)을 쌓다>
 
경인년에 번한(番韓) 계전(季佺)이 도해(道奚) 천왕의 명을 받아
탕지산(湯池山)에 삼신단(三神壇)을 설치하고 관리들의 집을 이사하게 하였는데,
탕지(湯池)는 옛 안덕향(舊安德鄕)이다.
 
이때 탕지산에 삼신단을 설치하고 번한의 수도로 삼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탕지(湯池)를 구안덕향(舊安德鄕)이라 하고 있으니,
탕지를 수도로 삼은 이후에 삼은 안덕향은 번한(番韓)의 오덕지(五德地)인
오경(五京) 중에서 중경(中京)에 해당하는 개평(開平)이 된다.
개평은 지금의 고하(沽河)와 난하(灤河) 사이에 위치하는 당산(唐山) 부근에 있다.
 
번한(番韓)의 수도는 BC 2333년 단군조선 개국 당시에는
요동의 험독(險瀆)에 두어 동경(東京)에 해당하며,
BC 2311년 순(舜)이 요(堯)임금에게 등용된 뒤 3년차가 되는 때에는
산동반도의 남쪽에 있던 낭야성(琅耶城)을 개축하여
가한성(可汗城)이라 하여 남경(南京)으로 남은 것이 된다.
또, BC 2049년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서효사(誓效詞)를 지은 때에는
번한의 수도가 안덕향(安德鄕)인 개평(開平)으로 중경이 되며,
탕지는 구안덕향이므로 BC 2049년 이전에 수도로 삼았던 적이 있는 곳으로서
승덕(承德){열하}에 해당하는 것이 되고,
다시 BC 1891년에 탕지를 수도로 삼은 것이거나
삼신(三神) 제천단(祭天壇)을 둔 곳이 된다..
 
그리고 번한 수도인 오덕지의 하나가 되는 서경(西京)으로는
고구려 요서10성 중의 하나인 한성(韓城)이 되는 한성(汗城)이 거의 틀림없다.
 
BC 323년에 연(燕)나라가 왕을 칭할 때
번한의 읍차(邑借)이던 기후(箕詡)가 스스로 번조선왕이라 칭하며
보을(普乙) 천왕에게 윤허를 구할 때,
처음에는 번한성(番汗城)에 머물며 연(燕)나라에 대비하였다 하는데,
이 번한성(番汗城)이 한성(汗城)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만약 당시 번조선의 수도였던 험독(險瀆)에 머물며 연(燕)나라에 대비하였다면
굳이 번한성(番汗城)이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번한의 오경(五京)은 BC 2333년, 2311년을 거쳐 2049년 이전에
약 300년 사이에 정립(定立)된 것으로 되며,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서보(西堡)로서의 기능을
번한(番韓)이 다 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번한의 수도는 저울추(秤錘)처럼 서쪽 즉 요순(堯舜), 하은주(夏殷周)의
군사적 정세에 따라 동서남북중의 오경(五京)을 오가며 조절(調節)한 것이 된다.
 
오덕지 외에 번한 관경에 속하는 산동 서쪽의 태산(泰山)에도 제천단이 있었는데,
아마도 단군왕검이 염제신농국의 후계국인
단웅국(檀雄國)의 비왕으로서 섭정을 할 때인 BC 2357년부터 BC 2333년까지 사이에
몸소 천제(天祭)를 올렸던 것이 되고,
BC 2267년 태자부루(太子扶婁)가 도산회의(塗山會議)를 주관할 때
번한(番韓) 낭야(琅耶)로 하여금 하늘에 제를 올리게 한 이후,
노(魯)나라 땅에 속하게 된 뒤에는 주(周)나라 천자(天子)가 봉선(封禪)을 행하는 등
진한(秦漢)을 거치면서 태산을 제천행사지로 숭앙한 것이다.
 
 
 
<하왕(夏王) 근(厪)이 마한(馬韓)에 조공(朝貢)하다>
 
경인년에 하나라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마한(馬韓)에 방물(方物)을 바쳤다.
 
하나라 왕 근(廑)은 제14대 왕으로서 BC 1901년부터 BC 1881년까지
21년간 재위에 있었는데,
하나라의 수도였던 언사(郾師)에서 보아
마한(馬韓)은 번한(番韓)보다 바다 멀리 떨어진 것이 되는데,
마한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아 배를 타고 간 것으로 보인다.
 
우(禹)가 단군조선에 반역함으로써
하(夏)나라 건국시조가 된 이후에 단군조선에 조공(朝貢)을 한 예로는
BC 2133년에 제4대 오사구(烏斯丘) 천왕 시절에 하나라 제5대왕 상(相) 시대와,
BC 2077년 번한(番韓) 호갑(虎甲) 시절에 하나라 제7대왕 소강(少康) 시대와,
BC 1891년 마한(馬韓) 아화(阿火) 시절에 하나라 제14대왕 근(廑)의 시대가 되는데,
그 외에도 교류 내지는 조공의 역사가 많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이처럼 하(夏)나라가
단군조선 진한(眞韓)이나 번한(番韓) 또는 마한(馬韓)에 조공을 한 것으로 보아,
하나라 스스로 단군조선의 제후격인 천자국(天子國)임을 깨닫고
예(禮)를 갖춘 것이 되며,
이로써 하나라는 안으로 정세가 안정되었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BC 1879 <천부의 땅 창해(滄海)>
 
壬寅(BC1879) 도해 13년.
일토산(一土山)에 사는 사람 <왕조명王祖明>을 박민잔(泊民長)으로 삼고
이엉을 엮어 만든 집에서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땅을 살펴 곡식을 심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한 찧는 도구를 만들어 낟알을 찧어 밥을 하도록 하였으니
치적이 매우 두드러졌었다.
 
<왕조명>은 하국(夏國)의 주인인 <공갑孔甲 (재위 BC1880-BC1850)>의 아우인데
<류누劉累>와 함께 변란을 보고 동쪽으로 평양의 일토산에 와서 살았었다.
 
帝는 창해(滄海)로 순행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기하여라 산과 강들의 아름다움이여! 이는 천부(天府)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 <참고> 단군조선과 하나라와의 관계 및  단군조선 후기 중국과의 국경
 
 
중국 기록에 의하면 하(夏)나라는 BC 2200년경에
황하강 중류(산서성, 하남성 일대)에서 일어났다.
 
단군조선 중기(BC 1900년경)에 단군조선과 하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이 미복 차림으로 국경을 넘어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제를 개편했다는 것과,
선비 20명을 착출하여 하나라에 보내 국훈(國訓)을 전파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단군조선의 서쪽 경계는 산서성, 하남성의 동쪽이었으며
강역은 하북성, 산동성 일대까지 단군조선의 통치구역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2세 단군 부루는 산동성에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다스렸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유주(하북성)와 영주(요동성)의 제후들을 몰아내었다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단군조선(고조선)의 존속기간(BC 2333 - BC 240) 중에
중국은 요(堯), 순(舜), 하(夏), 상(商), 주(周), 서주(西周), 춘추(春秋), 전국(戰國),
진제국(秦帝國), 서한제국(西漢帝國, 前漢)의 시대였다.
하나라와 단군조선이 황하의 중류를 기점으로 그 서쪽에 하나라가,
그 동쪽에 단군조선이 위치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망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秦)나라 시기(BC 220 - BC 206)에 이르러 통일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 당시는 단군조선(고조선)의 후기가 되는데,
이 시기에 단군조선(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을까?
 
중국의 역사서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 중에서 중국 동북방 국경 관련 기록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이다.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내용 중에
 
"진(秦)나라의 땅은 동쪽으로는 동해 및 조선에 이르렀고, - 중략 -
북쪽은 황하에 의거하여 요새로 삼고 음산과 나란히 요동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진(秦)나라 2세 황제가 동북 지역을 순행하였는데,
그때 수행하던 신하들이 진시황제(秦始皇帝)가
갈석산(碣石山)에 세워 놓은 석비(石碑)에 자신들의 이름만 새겨 놓고,
진시황제의 공덕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돌아온 것을 꾸짖자
신하들이 다시 갈석산으로 가 진시황제의 (통일관련) 공덕비를 다시 세우고 왔다."
는 기록이 있다.
- 사기(史記) 제6권 <시황제본기(秦始皇本紀)>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진(秦)나라와 단군조선의 국경은 갈석산(碣石山) 부근이며, 동해임을 알 수 있다.

갈석산은 우공갈석이며, 동해는 발해만의 해안선이 갈석까지 들어와 있었으며
진(秦)나라는  태행산맥 동쪽의 산동성과 하북성까지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진황교(秦皇橋)'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진시황제는 산동반도를 정벌하기 위하여
중국의 본토와 산동반도를 잇는 거대한 다리를 놓은 일이 있다.
 
이 다리 이름이 진황교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중국의 본토와 산동반도 사이에는 큰 강이 흘렀다는 말이다.
 
이 기록은 중국의 수경주(水經注)에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황하와 양즈강이 합해져 산동반도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흘렀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 대운하가 건설되어 있다. 
그렇다면 진시황제 시대에는 이 산동반도가 단군조선(고조선)의 땅이었다.
 
진시황제는 이 큰 강 때문에 산동반도를 접수하지 못하였고,
이 큰 강을 당시 중국인들은 동해라 한 것이다.
 
<시황제본기(秦始皇本紀)>에 실려 있는 "지동지해기조선(地東至海曁朝鮮)
진나라 땅 동쪽은 바다 및 조선에 이르렀다." 라는 말은
동쪽 바다를 기점으로 조선과 경계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대 단군조선(BC 1900년경)과 중국의 국경은
황하강의 중류를 기점으로 그 서쪽은 하(夏)나라의 강역이었고,
그 동북쪽은 단군조선(고조선)의 강역이었다.
 
참고로 당시 황하강은 중국의 서북부 파안객립산맥(巴顔喀拉山脈)에서 발원하여
내몽골지역을 거쳐 남으로 내려와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을 지나 양자강과 합류하여 일부는 발해만으로, 일부는 황해로 흘렀다.
 
산서성, 섬서성 일대가 황하의 중류이다.
 
이후 중국은 혼란한 시기를 거치면서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여(BC 220년 경)
전국을 35郡으로 나누어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秦 멸망 후 漢이 건국하여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기원 전후 경에 漢의 영토는 13州 105郡이었다.
 
우리는 秦이 지금의 전 중원을 통일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秦의 국토 면적은 漢의 1/3 정도밖에 되지 못하였다.
 
 
하북성 지역에 있던 단군조선(고조선)이 일시적으로 북쪽으로 밀리면서
그 강역을 상실하였던 적은 있지만 하북성과 산동성은 중원국가와
단군조선(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 및 고구려, 백제, 신라와의 격전지였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해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중국 본토와 산동반도 사이에는 황하와 양즈강이 연결된 큰강이 흘렀는데,
이 강을 당시 진나라는 동해라 칭했던 것이다.
  
이 고립된 산동성 지역의 단군조선은 이후에 한(韓)으로 분리, 독립되는데,
이름하여 대륙삼한이다.
 
이후 삼한은 한(漢)나라와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 의하여 정복되기도 하고,
다시 회복하기도 하면서 그들의 견제와 탄압에 항거하였다.
 
이후 고구려의 확장으로 그 세력이 이 삼한 지역까지 미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대륙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연호는 '다물(多勿)이었다.
 
다물이란 "옛 땅을 모두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회유책과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써 가며
삼한을 서로 견제하게 하였고(신라 이용), 상쟁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이 대륙삼한의 항쟁 과정에서
일부 세력은 황해를 건너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한반도에 새로운 세력을 형성한 백제, 사로(신라), 가야인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 삼한이다.
 
 
 
 
BC 1879 <절구와 띠풀>
 
임인년(壬寅年) 도해13년에 일토산(一土山) 사람인 왕조명(王朝明)이
박(泊) 땅의 민장(民長)이 되어 다스린 공적이 뛰어 났는데,
곡식을 찧는 그릇인 절구(臼)를 제작하고
백성들에게 띠풀(茅)을 뽑아 지붕을 이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이 방법이 편리하여 백성들에게 오래오래 전해졌다.
 
 
여기서 특히 절구(臼)는 곡식을 찧는 도구로서
단군조선의 화폐가 되는 소위 명도전(明刀錢)에도
절구를 가리키는 문자가 새겨져 있기도 한데,
절구라는 발음이 곧 절구모양을 본따 만든 글자를 읽는 소리로서,
글자의 소리로는 가림토 글자이며 모양으로 보면 상형문자로서
전체적으로 상형식가림토라 할 수 있다.
 
소위 명도전에 새겨진 글자의 형태로 보면,
상형문자, 상형-표음문자, 표음-상형문자, 표음(가림토)문자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절구라는 글자는 상형-표음문자 또는 표음-상형문자가 된다.
 
상형-표음문자는 원래는 상형문자인데 이를 가림토로 읽히는 글자이고,
표음-상형문자는 원래는 가림토 글자인데 상형식으로 표기된 글자이다.
 
일토산(一土山)은 왕산(王山)의 파자(破字)가 되는데,
왕씨(王氏)의 본거지가 되는 셈이다.
 
후대인 BC 1122년경에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가
단군조선으로 망명하여 제후가 되어 기후국(箕侯國)을 다스릴 때,
일토산 사람 왕수긍(王受兢)이 기자의 사사(士師)가 되어
단군조선에서 읽혀지던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박달나무판(檀木板)에 새겨 기자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고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왕씨는 황제헌원(黃帝軒轅)의 후손으로도 전하는데,
황제헌원은 배달나라 제후국의 천자 중
천자로서 오방(五方) 중 중부(中部)의 황제(黃帝)였으며,
그 후손들은 모두 배달겨레로서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단군조선의 백성으로서 살고 있었던 것이 된다.
 
즉, 고대중국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는 황제헌원의 후손들은
물론 배달겨레로서 황제헌원을 이은 나라인 웅국(熊國)에서 사느냐
아니면 웅국을 제외한 그 외의 배달나라 땅에서 사느냐,
요순 하은주의 땅에서 사느냐 아니면 단군조선 땅에서 사느냐의 차이일 뿐
혈연족보(血緣族譜)상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후대에 왕조명의 손자인 왕해월(王海月)도 민장이 되어
배를 만들어 곡식을 운반하는 등 바다무역이 트이게 하였으며,
왕해월의 증손자인 왕명지(王明知)도 민장이 되어 농사를 권장하고 독려하여
농사짓는 때를 어기지 않도록 하였다.
 
 
 
BC 1864 <방물(方物) 진설소(陳設所) - 박람회(博覽會)>
 
정사년(丁巳年)에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아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과 같았다.
 
 
이때 소위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를 열었다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 시대에 지방 제후국(諸侯國)들과
우방국(友邦國)들의 특산물을 전시하는 박람회장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물론 배달국의 수도가 되는 신시(神市)라는 말이 신(神)들의 도시라는 말도 되며
저자(市) 즉 시장이 있어 교역이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의미가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도 10년에 한번씩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박람회와 같은 행사가 정기적으로 열렸던 것이 되며,
교역이 이루어지는 경제적인 행사 뿐만이 아니라 제천행사를 벌이는 종교적,
공물을 바치는 등의 정치적 행사였을 것임이 분명하다고 본다.
 
 
 
BC 1854 <선사(選士) 20명의 국훈(國訓) 전파(傳播)>
 
정묘년(丁卯年) 도해 38년에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壯丁)을 징집하여 모두 병사로 삼고,
선사(選士) 20명을 하(夏)나라 서울로 보내어
나라의 가르침(國訓)을 처음으로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이 기록은, 단군조선의 마지막 47대 고열가(古列加) 천왕 시절이 되는 BC 268년에
위(魏)나라 사람 공빈(孔斌)이 동이사절(東夷使節)이 위(魏)나라를 방문하였는데
그 위세가 등등하였다는 등으로 기록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공빈(孔斌)은 공자(孔子)의 7세손으로 전한다.
 
선사(選士) 20명을 하(夏)나라 수도로 보냈다는 것에서
당시 단군조선과 하나라의 관계는 불편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가서 단군조선의 국훈(國訓)을 가르쳐 위세(威勢)를 보였다는 것에서
하나라가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받는 입장으로서,
단군조선이 하나라의 군사부(君師父)의 나라가 되는 셈이다.
 
당시 국훈(國訓)은, 주나라 춘추시대의 공자(孔子)가 말하였듯이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에 있었던 것을 기록하였을 뿐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하은주의 윤리도덕의 기반이 되었던 가르침으로서 곧 단군조선에서 전파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삼강오륜(三綱五倫) 등 소위 유교적인 기본 원리는
이미 단군조선에서 하은주의 고대중국에 전수(傳授)되었던
단군조선의 윤리도덕을 응용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써 BC 2240년경 단군조선의 초기 중신(重臣)이던
대련(大連)과 소련(少連)의 효(孝)를 공자(孔子)는 예기(禮記)에 인용하면서,
대련과 소련을 동이(東夷)의 아들이라 하며 효(孝)의 본보기로 극찬하고 있다.
 
단군조선 이전의 배달국 시대에 이미 가정과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에 관한
인간윤리가 정립되어 있었다.
 
즉, 삼륜구덕(三倫九德) 또는 삼륜구서(三倫九誓)라는 윤리도덕적 가르침이
배달나라 시대에서 정립되어 단군조선으로 전해진 것이며,
이러한 가르침들이 하은주(夏殷周)로 전파(傳播)된 것이 되고,
이러한 고대중국의 윤리도덕이 공자(孔子)로 이어져
중국 유교(儒敎)의 가르침을 정립한 것이 된다.
 
선비(儒)라는 말은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는 말과 연관되어 있는데,
원래 선비라는 말은 배달조선의 선인(仙人)의 무리를 가리킨다.
 
 
 
BC 1836 <송화강 기슭에 기계공창을 설치하다>
 
乙酉(BC1836) 도해 56년.기계공창(機械工廠)을 송화강(松花江) 기슭에 설치하고
각종 기계를 제조하였는데,
나라 안에 현상을 걸어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자는 각각 상을 받게 하였다.
 
상을 받게 된 새로운 발명품은 다음과 같다.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차(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뇌차(自發雷車), 천문경(天文鏡), 조담경(照膽鏡), 구석편(驅石鞭),
자명종(自鳴鐘), 경중누기(輕重漏器), 연적(涓滴), 발뇌동용기(發雷動舂機),
소금(素琴), 천리상응기(千里相應器), 목류마(木流馬), 진천뢰(震天雷),
어풍승천기(御風昇天機), 흡기잠수선(吸氣潛水船), 측천기(測天機), 양해기(量海機), 양청계(量晴計), 측우기(測雨機), 측한계(測寒計), 측서계(測暑計),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이런 것들이 발명되어 이 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다.
(居漆夫小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송화강은 원래 속말(粟末)이라는 강으로서
소말(소마리, 소머리), 소물, 소믈, 소므르라는 말을 나타낸 이두식 표기이며,
소머리라는 말을 표기한 것이 되는 우수리(牛首里)라는 말과 결국 같은 것이 된다.
 
BC 2131년에 이미 살수(薩水)의 상류에 조선소(造船所)를 설치한 적이 있기도 하다.
 
 
 
BC 1833 <유위자와 여홍성>
 

아한 2년 여름에 발이 하나인 짐승이 송화강(松花江)가에 와서 놀며 슬피 울었는데,
임금께서 <유위자有爲子>에게 묻기를
“이것은 알지 못하는 짐승인데 발 하나로 뛰어다니며 슬피 우는구나.”하시니,
<유위자>가 대답하기를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좋은 징조가 잇고,
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러운 일이 생겨서 신물(神物)에 나타나며
사체(事體)에 움직이고, 화와 복이 장차 이르게 되면
착한 것도 알게 되며 착하지 못한 것도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은 천지조화의 징조입니다.
 
이 짐승은 夏 나라 남쪽의 양수(陽獸)인데 신명(神明)한 물건입니다.
 
夏 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미리 알고,
그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슬피 울고 잇습니다.
 
다만 이 짐승만 보아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천도(天道)의 운행을 살피면 만세(萬世)의 일도 능히 미리 알 수가 있습니다.”하니
 
임금께서
 
“하(夏)나라를 대신하여 천자(天子)될 사람이 누구냐.”하시니
 
<유위자>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夏 나라의 인물을 살피니 夏 나라에는 그런 인물이 없고,
다음가는 사람으로는 <천을天乙>이라는 사람이 잇습니다.
 
그는 어진 보좌관(賢佐)인 <이윤伊尹>을 얻어 덕행(德行)을 길러
그 이름이 세상에 높아졌으니 하 나라를 쳐서 천자가 된다면
그 자손이 600여년은 이어나갈 수 있겠습니다.”
 
임금께서
 
“그 다음은 누구냐.”하시니,
 
<유위자> 아뢰기를
 
“서이(西夷)에 성인(聖人)이 나서 덕을 닦고 은혜를 베풀면
민심이 다시 돌아와 그 어진 분의 보필이 생기게 될 것이니,
그 자손이 왕위를 계승한다면 800년은 이어갈 것입니다.”
 
임금게서
 
“내 후손의 성쇠(盛衰) 시기는 과연 어느 때인지 그 대략을 묻노라.”하시니,
 
<유위자> 대답하기를
 
“국가성쇠(國家成衰)의 운수는 하늘이 정하게 되어있는 것이므로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백성을 선하게 다스리시어 덕이 만방에 넘치니,
나라의 문명(文明)정도가 중화(中華)를 훨씬 초월합니다.
 
그러나 중화가 은조(殷朝)에 이르러서는 에악법도(禮樂法度)가 찬연히 구비될 것이며,
성현(聖賢)이 배출되어 경전(經傳)을 저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 여러 학자들이 각각 그 이상(理想)을 말하리니,
문화의 향상이 전무후무하여 천하를 휩쓸 것이므로, 만국이 그 문화를 암오하여,
다투어 그 나라에 와서 배우고 익혀 한학(漢學) 전성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전하의 성자신손(聖子神孫)이 혹 북방에서 터를 보전하며,
혹 동방으로 도읍을 옮기며 혹 남방에서 건국하는 자가 있겠으나,
큰 자는 땅이 수천리 될 것이며 작은 자는 수 백리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후손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상대를 침략하는 전쟁만 일삼고,
문화는 점점 퇴보하여 조국문자(祖國文字)는 돌보지 않고,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날로 높아져 수 천 년 후에는
모화(慕華)하여 유학(儒學)에 미친 사람이 나라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문자(文字)는 다 없애고 한문자(漢文字)만 전용(專用)할 것이며,
한문으로써 우리나라 국명(國吊)과 왕호(王號)와 관명(官吊)과 지명(地吊)과
모든 물건의 이름을 번역할 것이며,
이름까지 중화 사람의 이름과 같아 우리를 중화 사람으로 알게 되고,
마지막에는 자손들이 그 선조(先祖)를 잃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고 심히 원통한 일입니다.
 
엎드려 비옵기는,
오직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염려하시어 뒷일을 미리 준비 하시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선생은 참으로 천고의 신인(神人)이로다. 능히 반만년 후의 일을 추측하도다. ”하시고
 
가을 8월에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던 중 요하의 왼쪽에 이르렀다.
 
천하에 조서를 내려, 비석을 나라의 사방 경계에 세우고,
그 비면(碑面)에 우리나라 문자로 제왕(帝王)의 이름을 새겨,
영원히 국문(國文)을 보전하라 하셨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후에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
이 비석을 보고 시 한 수를 지어 남겼다.
 
촌교칭번한(村郊稱弁韓) : 마을 밖 변한이라 칭하는 곳에
별유수상석(別有殊常石) : 빼어난 돌 하나 우뚝 솟아 있도다.
대황척촉홍(臺荒躑躅紅) : 주위는 황망해도 진달래 철쭉 만발하고
자몰매태벽(字沒莓苔碧) : 글자는 마모되고 이끼만 푸르게 끼어 있도다.
생어부판초(生於剖判初) : 처음에 떼어낸 돌조각 흔적이 생생한데
입료흥망석(立了興亡夕) : 흥망의 황혼에 돌만 서 있도다.
문헌구무징(文獻俱無徵) : 글자에 새겨진 뜻은 알 수 없지만
차비단씨적(此非檀氏跡) : 이것이 단씨(단군)의 발자취가 아니겠는가?
 
 
외뿔 짐승 즉 뿔이 하나만 달린 짐승을 일각수(一角獸)라 하는데,
양(羊)과 같이 생겼다 하여 외뿔양이라고도 한다.
 
이 외뿔양이 바로 해치(獬豸, 廌)이다.
 
원래 법(法)이라는 글자는,
물의 흐름을 따라 해치(廌)가 따라가는 모습을 조합한 회의문자(會意文字)로서
 해치(廌)를 내포(內包)하고 있던 글자인데,
이 廌(치)를 생략하여 약자(略字)로서 法(법)이라 쓰게 된 것이 된다.
 
해치는 고대중국의 순(舜)임금 시절에 신령스런 동물로 전하는데,
선악(善惡)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단군조선의 삼사오가(三師五加) 제도에서
선악(善惡)을 담당하였던 양가(羊加)의 업무와 직결된다,
 
그리하여 해치는 순임금 시절에 형벌(刑罰)을 담당하였던
고요(皐陶)라는 사람이 관직에 해치(廌)를 사용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후대 조선시대에도 법과 형벌을 관장하는 관청이 되는 사헌부(司憲府) 등에서
해치(廌)를 관모(官帽)나 관복(官服)에 새기기도 하였다.
 
한편, 경복궁 앞에 화기(火氣)를 죽이기 위하여 세운 소위 해태(海駘)는
현재 서울의 상징동물이기도 한데,
원래는 해치(獬豸, 廌)는 일각수(一角獸)인 외뿔양(一角羊)으로서
선악(善惡)을 구분하는 신령스런 동물이었으나,
해치(廌)를 법(法)이라는 글자에서 유추하여
물(水)과 관련된 해태(海駘)라고 인식함으로써
불을 진압(鎭壓)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 된다.
 
외뿔 짐승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선악(善惡)과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되는데,
원래 일각수(一角獸)가 순임금 시절에 관직에 사용한 상징적인 동물인 바,
순(舜)임금 나라의 땅을 이어 세운 하(夏)나라에
무슨 변고(變故)가 생긴 것을 알리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는 서기전2224년에 선 하(夏)나라가 약400년이 지나면서
이때부터 망조(亡兆)가 나타난 것을 알리는 것이 된다.
 
 
※ <참고>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 - BC 200년경의 인물
 
사마천의 <사기(史記)> <세가(世家)> 25권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유후(留侯) 장량(張良)과 창해군(滄海君) 창해역사(滄海力士)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유후(留侯)는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하여
후에 유현(留縣)에 봉읍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후(留侯)는 유주의 제후라는 뜻으로 제후명이다.
 
이 유후(留侯)가 <장량張良>이다.
하지만 창해군(滄海君)에 대한 봉읍 기록은 없다.
 
그러나 창해군(滄海君)이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여홍성은 창해(발해)의 제후(君)로 봉해진 듯하다.
창해군 설치지역은 중국의 천진(天津) 지역이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는 창해역사 여홍성이 장량과 함께
진시황제의 어가를 공격하여 시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기록을 보면
“滄海力士 黎洪星 與韓人張良 狙擊秦王政于搏浪沙中 誤中副車”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인(韓, 번한인)인 장량과 함께
진왕을 박랑의 모래벌판에서 (철퇴로)저격하였으나 맞지 않고 어가만 부서졌다.”
 
이상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창해역사(창해의 천하장사, 협객) 여홍성과 장량은 모두 한인(韓人)이다.
 
그들은 진시황제가 현 하북성 지역에 있던 번한(番韓, 番朝鮮)을 공격하자
그를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과 장량(張良)은
유방(劉邦)이 진(秦)나라를 멸하고,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하여
장량은 유주(留州, 하북성)의 제후로 봉해졌고,
여홍성(黎洪星)은 창해(滄海, 현(現) 천진(天津)의 군주로 봉해졌던 것이다.
 
 
 
 
BC 1824 <아한단제, 直諫을 받아 들이다>
 
아한 11년에 임금께서 더욱 국정을 밝게 살피실 때에 조회(朝會)를 피하시고
 
간관(諫官) <홍경弘景>에게 물으시기를
 
“나는 어떠한 임금인가.”하시니,
<홍경>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질지 못한 임금입니다.”하니,
 
임금께서는
 
“무슨 일로 내가 어질지 못한가.”하시니,
 
<홍경>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친아우를 봉하지 않으시고,
맏아들을 봉하였으니 어찌 어진 임금이 되겠습니까.”했다.
 
임금께서 기뻐하지 않다가,
<홍경>이 나가고 <유위자有爲子>가 들어왔는데 임금께서 또 묻기를
 
“나는 어떤 임금인가.”하시니,
<유위자> 대답하기를
 
“어진 임금입니다.”했다.
 
임금께서
 
“무엇으로 나의 어짐을 아는가.”하시니,
 
<유위자> 대답하기를
 
“제가 묻사오니 임금이 어질면 신하도 바르다 하였는데,
아까 <홍경>의 말이 바르니 이것으로 아나이다.”했다.
 
임금께서 크게 기뻐하시어, <홍경>을 불러 간의 대부(諫議大夫)로 삼았다.
이때부터 바른 말을 서슴치 않는 선비가 많이 나왔다.
 
 
 
 
BC 1813 <夏의 桀을 원조하다>
 
무신년(戊申年) 아한 22년에 용가(龍加) 소속 내량(內良)을 파견하여
하(夏)나라 걸(桀)왕을 도와 상(商)나라 탕(湯)을 치다가
탕이 사죄하므로 내량이 군사를 돌렸다.
이때 내량이 염이(厭夷) 때문에 관중(關中)의 기주(岐周)에 살게 되었다.
 
 
단군조선 시대에 삼사오가(三師五加)에서 나아가
팔가(八加) 구가(九加)라고도 부르는데,
팔가는 삼사오가를 합칭한 것으로 되기도 하고,
구가는 팔방과 중앙을 합친 구방을 직책으로 분류한 것이 되는데,
용가(龍加) 또는 호가(虎加)가 총괄직에 해당한다.
 
단군조선 초기에 팔가구가(八加九加)로 기록된 것을 나열해 보면,
호가(虎加)는 용가(龍加)라고도 하며 태자부루(太子扶婁)가 맡았던 직책이고,
마가(馬加)는 신지씨(神誌氏)가 맡았으며,
우가(牛加)는 고시씨(高矢氏)가 맡았고,
웅가(熊加)는 치우씨(蚩尤氏)가 맡았으며,
응가(鷹加)는 부소(扶蘇)가 맡았고,
노가(鷺加)는 녹가(鹿加)라고도 하는데 부우(扶于)가 맡았으며,
학가(鶴加)는 주인씨(朱因氏)가 맡았고,
구가(狗加)는 여수기(余守己)가 맡았으며,
봉가(鳳加)는 아밀(阿密)이 맡았다.
 
웅가(熊加)는 국방군사 담당으로서 목숨을 담당한 마가(馬加)에서 파생된 것이 되며,
응가(鷹加)는 형벌 담당으로서 구가(狗加)에서 파생된 부서가 되고,
노가(鷺加)는 질병(疾病) 담당인 저가(豬加)에 해당되며,
학가(鶴加)는 선악(善惡)을 담당하여 양가(羊加)에 해당하고,
봉가(鳳加)는 재정(財政) 담당으로서 부루단군 천왕 때 신설된 부서가 된다.
 
단군왕검 천왕 시대에 오가(五加)의 업무 중에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는 명칭을 그대로 두고,
양가(羊加)는 배달나라 시대 때에는 계가(鷄加)라고도 하였던 것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는 학가(鶴加)라 별칭한 것으로 되며,
저가(豬加)를 노가(鷺加)로 별칭하고,
마가(馬加)에서 웅가(熊加)를 별도로 두어 치우(治尤)의 별칭이 된 것으로 되고,
구가(狗加)에서 응가(鷹加)를 별도로 두고,
총괄직으로서 용가(龍加) 또는 호가(虎加)를 신설하였던 것이며,
부루천왕 때 저가(豬加) 또는 노가(鷺加)에서 별도로 봉가(鳳加)를 신설한 것이 된다.
 
호가 또는 용가는 태자부루가 맡아 진한(眞韓)으로 봉해졌으며,
마가 신지씨는 숙신(肅愼)에 봉해지고,
우가 고시씨는 청구(靑邱)에 봉해지고,
웅가 치우씨는 남국(藍國)에 봉해지고,
응가 부소는 단군왕검 천왕의 둘째아들로서 구려(句麗, 九黎)에 봉해지고,
노가 부우는 단군왕검 천왕의 셋째아들로서 진번(眞番)에 봉해지고,
학가 주인씨는 개마(蓋馬)에 봉해지고,
구가 여수기는 예국(濊國)에 봉해졌는데,
여기에 단군왕검 천왕의 넷째아들인 부여(扶餘)가 부여에 봉해지고,
그 외 옥저(沃沮)가 봉해져 모두 기본 9군후국(君侯國)이 되며,
그 외에도 졸본(卒本), 비류(沸流) 등 소국들이 많았다.

내량(內良)은 단군조선의 팔가(八加) 중 총괄직인 용가(龍加)에 소속된 인물로서
하(夏)나라 걸(桀)왕을 도우라고 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것이며,
상(商)나라 탕(湯)을 치다가 탕이 사죄하므로 군사를 돌렸던 것이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서남방이 되는 서이(西夷)에 속하는 염이(厭夷)의 소란 때문인지
내량(內良)이 단군조선 본국으로 복귀하지 아니하고,
BC 1766년 이후 은(殷)나라 시대에 백작(伯爵)의 제후국인
주(周)나라가 소재하였던, 관중(關中)의 기주(岐周)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은 견이(畎夷)와 가까운 곳인데,
백이(白夷)에 해당하는 서이(西夷)와 더불어 하은주의 서쪽 변방을 다스렸던 것이다.
 
내량이 활동한 역사는 BC 1767년에 신지 우량(于亮)이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는 역사와 연관된다.
 
빈기는 빈(邠)과 기(岐)의 땅이며 은나라 제후국으로서
은나라를 멸하고 세운 주(周)나라의 제후국시절 주무대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하(夏)나라의 제후국이던 은나라의 제후 탕(湯)이
서서히 군사를 일으킨 것이 되는데,
BC 1766년에 은나라를 세우기까지
최소한 약 50년간의 준비기간이 있었던 것이 된다.
 
은탕(殷湯)은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삼아
하(夏)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잡았는데,
은(殷)의 원래 국명이 상(商)이므로 상탕이라고도 한다.
 
이때는 단군조선이 정식 천자국인 하(夏)나라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소위 반란군이 되는 은탕(殷湯)의 군사를 진압한 것이 된다.
 
아직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인정 즉 천명(天命)을 받지 못한 것이 된다.
 
 
BC 1806 <욕살을 한(汗)으로 승진시켜 봉하다>
 
을묘년(乙卯年)에 청아(靑莪) 욕살(褥薩) 비신(丕信)과
서옥저(西沃沮) 욕살 고사침(高士琛)과
맥성(貊城) 욕살 돌개(突蓋)를 열한(列汗)으로 봉하였다.
 
 
 
BC 1799 <하(夏)나라의 망조(亡兆)가 무르익다>
 
임술년(壬戌年) 아한 36년에 하(夏)나라 사람이 들어와
걸왕(桀王)이 무도하여 스스로 망할 것이라 전하였다.
 
 
 
BC 1767 <夏의 멸망>
 
갑오 흘달 16년(BC 1767)에 州와 縣을 정하고 그에 따른 직책과 제도를 마련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는 일이 없어졌고,
평안을 되찾아 고향에서 자신의 일에 열심히 종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가야금 소리와 노랫소리가 전역에 넘쳐났다.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들이 하(夏)나라를 정벌하였다.
 
하(夏)나라 군주 <걸桀>이 지원을 요청해 왔다.
 
단제께서는 읍차(邑借) <말량末良>에게 명하여
구환(九桓)의 장수들을 이끌고 가 전쟁을 도우라 하였다.
은(殷)나라 왕 <탕湯>이 관리를 보내어 사죄하기에 군사를 되돌리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하(夏)나라 왕 <걸桀>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보내 길을 막고 맹약을 깨고 죽음을 자초하였다. 
 
마침내 은(殷)나라와 더불어 하(夏)나라 <걸桀>을 정벌하기로 하고,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畎軍){견족 군사, 일명 西夷}을 이끌고
낙랑군(樂浪軍){ 번한(番韓) 소전(少佺)의 치운(蚩雲)의 군사}과 합세하여 진격한 후
관중(關中)의 빈기(邠岐)의 땅{夏, 周, 秦, 漢나라 본거지, 섬서성}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면서 관청을 짓고 관제를 정비하였다.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경(京), 이궁(離宮), 국(國), 주(州), 원(原), 성(城), 읍(邑),
구(區), 가(家) 등의 행정단위가 정립되었던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주(州)와 현(縣)의 제도를 재정비한 것이 된다.
 
여기서 국(國)은 군후국(君侯國)을 가리키는데
소국(小國)은 대략적으로 지름 100리(里) 이상의 나라가 될 것이고,
주(州)는 국토를 크게 나눈 지역단위가 되며,
원(原)은 그 크기가 주(州)보다는 적으며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이 봉해지는 행정단위가 되고,
성(城)은 성곽을 가진 도시(都市)를 가리키고
지방장관인 욕살이 봉해지는 행정단위가 되며 경우에 따라 국(國)이 되기도 한다.
 
또, 현(縣)은 주(州)와 원(原)보다 적은 행정단위가 되고,
읍(邑)은 성곽이 없는 도시로서
대략 반지름이 10리(里) 정도에 걸치는 마을들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최소한 10가(家) 이상으로 이루어지며,
구(區)는 4가(家)로 이루어지고,
가(家)는 대략 20호(戶)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되며,
1호(戶)에는 대략 10명의 식구(食口)가 있는 것이 된다.
 
주(州)와 현(縣)을 정하고 분직(分職)의 제도를 세웠다는 것은
주와 현의 관리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범위 내에서만 권력을 행사하며
다른 직책을 겸하지 않고, 법과 규칙에 따라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인데,
단군조선의 삼사오가 제도 또한 권력분립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주와 현의 관리들이 정치를 잘하여 이에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지 않고 정착하여
일하는 곳에서 스스로 편안함을 즐기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부르는 소리가 온땅에 넘쳐 흘렀다.
그야말로 태평시대이다.
 
 
 
BC 1766 (탕의 상 건국)
 
을미(BC1766) 흘달17년.
 
<유위자>가 <이윤>에게 말하기를
 
“재주와 덕망을 갖춘자를 선택하여 네 주인을 보좌하여 좋은 정치를 하라”고 하였다.
 
<유위자>는 본디 경제에 재주가 있어 이름을 천하에 날리었다.
 
<이윤>은 당연히 <유위자>에게서 학문을 배워 재덕을 겸비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湯>의 보좌가 되었다.
 
이때에 <탕>이 <걸>에게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걸>은 우리에게 구원병을 애걸하였는데 임금께서 물리치며 말씀하시기를
 
“도리가 없는 왕이구나”라고 하시며 허락하지 않으시었다.
 
<탕>은 이내 병사를 일으켜 <걸>을 남소(南巢)로 옮기고
<이윤>의 말을 따라 왕위에 올랐다.
 
<유위자>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것도 역시 하늘에 순종하고 사람에 응답하는 것이니
이윤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상(商)에 복종하지 않는 백성과 신하들 다수가 망명해 오니
제(帝)께서 후하게 대하고 구휼하라고 명령하셨다.
 
 
기원전 1766년, 자천을(子天乙)이 군대를 일으켜 걸 임금을 쫓아냈다.
 
하나라 왕조가 멸망하니 나라를 세운 지 440년 만이었다.
 
자천을이 자리를 이어 임금이 되어 상(商)나라 왕조를 열었다.
 
이름을 높여 상탕제(商湯帝)라 하고, 호읍(亳邑)을 세워 도읍으로 삼았다.
 
큰 가뭄이 일곱 해 동안 계속되어 모래가 달아오르고 돌이 녹아내렸으며
낙수(洛水)가 고갈될 지경이었다.
 
탕 임금이 후손들에게 세 발 솥을 남겨 산과 강에 제사지냈다.
 
을미년(乙未年)에 번한(番韓) 소전(少佺)이 묵태(墨胎)를 보내어
은탕의 즉위를 축하해 주도록 하였다.
 
 
묵태(墨胎)는 단군조선의 비왕(裨王)인 번한 소전의 명을 받아
은나라 탕왕의 즉위를 축하해 준 인물인데, 고죽국의 임금(君)이었다.
 
번한(番韓)은 단군조선의 서보(西堡)의 장(長)에 해당하는 비왕(裨王)으로서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고,
단군조선의 군(君)은 천군(天君)에 해당하여 제사장을 겸하는 지위에 있다.
 
즉 고죽국의 임금인 묵태는 천군(天君)으로서 천왕격이 되는
번한(番韓)의 아래 직위에 해당하고, 고죽국은 번한관경에 속하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묵태(墨胎)는 천군(天君)으로서 천왕격인 번한(番韓)의 명을 받아
천자(天子)인 은탕(殷湯)의 즉위를 축하한 것이다.
 
즉 단군조선이 은탕(殷湯)을 하(夏)나라를 이은 천자(天子)로 인정한 것이 된다.
 
반면에 BC 2224년에 세워진 하나라의 시조 우(禹)는 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것이며
천자로 즉위축하를 받지 못하였고 이후 약 30년간
단군조선의 사자였던 유호씨와 전쟁을 하다가 진중(陣中)에서 사망하였다.
 
고죽국은 도산회의(塗山會議)가 있었던 시기인
BC 2267년경에 봉해진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제후국(諸侯國)에 속하며,
고죽국의 수도는 고죽성(孤竹城) 또는 무체성(無棣城)이라고도 불린다.
 
 
 
BC 1763 <천지화랑>
 
戊戌 흘달 20년, 각 지역에 많은 소도(蘇塗)를 짓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소도에서는 미혼의 자제들이 모여 글을 읽고, 활을 쏘는 것을 익혔다.
 
그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일컫는다.
 
국자랑들은 출행을 할 때에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다.
 
이로 인해 예부터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칭하였다.
 
 
천지화(天指花)는 하늘을 가리키는 꽃이라는 말로서,
밝은 하늘 꽃인 한화(桓花)이자
하루하루 끝없이 피고지는 무궁화(無窮花)를 가리키는데,
제단(祭壇)의 꽃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도 무궁화를 샤론의 장미라고 하여 제단의 꽃임을 나타내고 있다.
 
국자랑들이 머리에 천지화 즉 무궁화를 꽂고 다녀 천지화랑이라 한 것이다.
 
국자랑(國子郞)은 나라에서 뽑은 미혼의 자제들이며,
주로 황실(皇室)이나 삼사오가(三師五加)를 비롯한 지도층의 자제들이 될 것이다.
 
한편, 지방 고을에서 선출된 선랑(仙郞) 중
제천(祭天)을 담당하고 계율(戒律)을 맡은 책임자를 전(佺)이라고 하며,
나라 전체에서 선출 즉 나라의 부르을 받으면 종(倧)이 되어
국자랑(천지화랑, 國仙花郞)들의 스승이 되는데 통상 선인(仙人)이라 부르는 것이다.
 
고구려시대에는 선인도랑(仙人徒郞) 중
제천의식과 계율을 담당한 자를 참전(參佺)이라 하고,
무예를 관장한 자를 조의(皁衣 : 검은 옷)라 불렀는데,
조의는 오늘날 흑띠(黑帶)를 매는 자로서 무예사범(武術師範)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BC 1757 <흘달단제 유위자에게 道를 묻다>
 
26년에 임금께서 <유위자有爲子>에게 묻기를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 선생은 나를 위하여 설명하기를 원하노라"하시니,
 
<유위자>가 대답하기를
 
”도(道)는 상대(尊)가 없으므로 억지로 이름을 붙여 도(道)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道)를 도(道)라 하면 정상적인 도(道)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정상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천지가 큰 것에서부터 하나의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다 그 도(道)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는 천지의 도(道)가 있고,
인생은 인륜(人倫)의 도(道)가 잇고, 만물은 만물의 도(道)가 있고,
각종 업무에도 다 그 도(道)가 있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형(無形)하고 유실(有實)하게 도(道)를 이룬 자는 신(神)이니,
보아도 볼 수 없으며,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고,
사물의 형체로 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천지가 비록 크나 그 안에서 떠나지 못하고,
짐승의 털이 비록 작으나 능히 대도(大道)를 담을 수 있으며,
밝은 것은 어두운데서 형태가 생겨나고,
형태가 있는 것은 형태가 없는데서 생겨납니다.
 
정신은 도(道)에서 생기고, 형체의 근본은 정(精)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물이 형상(形狀)으로 서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아홉 구멍(九穴)이 있는 것은 태로 낳는(胎生) 것이며,
여덟 구멍(八穴)은 알로 낳는(卵生) 것이고,
일곱 구멍(七穴)은 부화하여 나오는(孵生)것이며,
세포공(細胞孔)이 많은 것은 심어서 나는(椊生)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있기는 하나, 온 자국(趾象)은 없고
그것이 갈때에는 없어져 가는 형질(잔질=殘質)이라도 남아 있으나,
정한 곳(定涯)이 없어 출입하는데 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 안에 충만한 것은 일진기(一眞氣)입니다.
 
우주는 무한히 광대한 공간과 영원무궁(無始無終)한 시간을 이르는 것이니,
진기(眞氣)가 공간에 충만하여 항상 보편운동(普遍運動)이 있어
영구히 윤회상(輪回狀)을 지어냅니다.
 
그러나 혹은 일정한 진화(進化)의 과정을 밟아 나가는데,
그 진화의 상태는 늘 그 밀도(密度) 변화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밀도는 계량(計量)할 것도 있고 계량 못랄 것도 있어,
이 두 가지는 엄연히 구별되어 각각 무한한 소소체(小素體)를 만들어 내는데,
이 소소체는 수 없는 응집중심(凝集中心)을 거쳐서 실체(實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는 감성(感性)과 경향(傾向)이 또한 하나의 원인이 되어,
이렇게 미소(微小)한 실체(實體)가 점점 모여서 큰 것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그 응집의 경로를 거쳐 마침내 한 쪽의 형체를 이루니,
다른 쪽이 그 반동력(反動力)으로
중간에 반드시 계량을 할 실질적인 긴장세력(緊張勢力)을 일으킵니다.
 
이 때에 우주의 모든 물체가 서로 충동(衝動)함으로 파괴하여,
능히 고도의 회전력이 생겨 대기(大氣)를 운동하게 하고,
기계적 충돌원인에 의하여 고도의 열(熱)을 내기 때문에,
반드시 신진운동(新振運動)의 세력(勢力)이 생겨나 성운(星雲)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성운은 곧 태양과 만물의 본체이므로,
스스로 원심(遠心)과 근심(近心)의 서로 끄는 작용으로써,
혹은 집중하여 혹은 분산하여 나선형(螺旋形)․ 타원형(橢圓形)․환형(環形)을 이루고,
다시 집중작용으로써 끝내는 구형(球形) 혹은 성군(星群)을 이루니,
그 집단의 성원(成員)은 몇 개 혹은 몇 백 몇 천입니다.
 
이것이 천체 중의 태양계입니다.
 
태양계의 물체는 집중작용에 의하여 분형상태(分形狀態)로 되어,
널리 두루 구형(球形)으로 된 기체(氣體)중에 포함된 분자(分子)가
운동력 분산으로써 내부와 외부 사이에 점점 차고 더운 온도의 차이가 생기며,
때때로 환형(環形)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한 물체를 이룹니다.
 
그 나머지 부분은 오히려 분화작용(分化作用)을 하여
점점 같은 온도와 같은 종류를 합하여 커져서 꼴을 이루니,
이것이 항성(恒星)과 태양과 혹성(惑星)과 중성(衆星)이 생기는 현상입니다.
 
지구도 태양계의 하나의 행성이나 본래는 태양에서 분리된 천체이니,
한편으로는 공기와 수소의 높은 열로 각종 기체를 만들고
또 다른 요소를 합하여 환상기체(環狀氣體)를 조직하여
자체의 주위를 싸서 반사작용에 의하여 점점 냉각(冷却)됩니다.
 
이것이 장구한 시일을 경과하여 제일 뜨거운 부분을 분리하여
끝내는 냉각되어 고체(固體)를 이루기 때문에,
환기(環氣)중에 포함된 무거운 요소는 가라앉아 고체와 액체를 이루고,
가벼운 요소는 위로 올라가 기체가 되어 늘 온도의 변화로써 구름과 비도 되고,
혹은 서리와 눈도 되고, 운동으로 전광(電光)이 일어나고 뇌성(雷聲)이 일어납니다.
 
태양의 빛은 기(氣)의 맑고 탁함과 두껍고 얇음 때문에 변색(變色)하는데,
붉은 색(赤),노랑색(黃),등색(橙),녹색(綠),파랑색(靑),남색(藍),자색(紫)이
다 흡수되면 검은색(黑)이 되고, 발산되면 흰색(白)이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태양광선이 늘 알맞는 정도와 때를 맞추어 비치므로
형형색색의 동식물(動椊物)이 빚어지기 때문에
동식물의 무수한 종자(種子)의 원인을 연구하니,
다 같은 원자(原子)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그 위치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만물이 만들어지니,
스스로 위와 아래, 영원과 순간, 고통과 즐거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 같은
상대성(相尊性)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생명을 갖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靈長)인 것은 우주생명(宇宙生命)의 돌발점(突發點)이며,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하나의 사상(思想)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천지 자연 생물의 원리이며 현상(現狀)입니다.“하였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옳은 말이라, 선생은 참 천고의 성인(聖人)이라.”하시고 궤장(几杖)을 내리셨다.
(萬里元論에 기록되어 있다.)
 
 
 
BC 1748 <이윤의 등극>
 
기원전 1748년, 이윤이 자천을의 손자 자태갑(子太甲)을 동읍(桐邑)으로 내쫓고
자리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BC 1733 <오성취루(五星聚婁)와 황학(黃鶴)>
 
무진 50년(戊辰 五十年, BC 1733)에 오성(五星, 화성, 수성, 토성, 목성, 금성)이
모두 한자리(婁)에 모이고(五星聚婁) 누른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오성취루 현상은 '셀레스티아'와 '스텔라리움'이라는 슈퍼 컴퓨터로 확인 됨.}
 
 

 
 
 
 
BC 1727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이 돌아가시다>
 
갑술년(甲戌年) 9월에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이 돌아가셨다.
흘달 천왕께서 이를 슬퍼하며 통곡하고 국장(國葬)으로 장사를 치렀다.
 
 
BC 1722 <흘달단제의 죽음>
 
기묘 61년 단제께서 붕어하시자,
만백성이 모두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하였으며 그 통곡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명을 내려 모든 죄수들을 석방하고,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였다. 다음 해 장사를 지냈다.
 
우가(牛家) <고불古弗>이 즉위하였다.
 
 
※ <참고> 삼한의 군장 칭호 : 신지, 검측, 읍차
 
신지(臣智)와 읍차(邑借)는 삼한의 군장 칭호의 하나이다.
《삼국기》<위지>(魏志) 변진조(弁辰條)에 따르면,
삼한 대국의 우두머리를 신지(臣智), 그 다음 소국의 우두머리는 검측(儉側),
그다음 허락(墟落, 변두리 거수국)의 우두머리는 읍차(邑借)고 불렀다고 한다.
 
이들 칭호는 격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장군에 대한 칭호로,
그중 가장 높은 칭호가 상장군 격이 '신지(臣智)'이다.
 
삼한에는 대국이 2개, 소국이 20개, 허락이 3624개 있었다고 한다.
 
큰 나라의 우두머리는 신지를 비롯하여 진지(秦支), 축지(蹴支) 등이 있었고,
소국에는 검측(儉側) 및 험측(險側), 견지(遣支), 건길지(鞬吉支) 등이 있었다.
허락인 거수국의 우두머리는 읍차(邑借) 또는 번예(樊穢)라 하였다.
 
 
※ <참고>  천지화(天指花) - 무궁화(無窮花)
 
천지화(天指花)란 하늘을 향해 피는 꽃이라는 뜻으로 군자의 상징이며,
100일간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핀다고 하여 무궁화(無窮花)이다.
 
무궁화는 해가 뜨면 꽃잎을 열고, 해가 지면 꽃잎을 접는다.
 
그래서 무궁화를 '태양의 꽃'이라 한다.
중국의 한나라 시대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에
 
"군자국(君子國)에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이 있는데,
이 꽃의 향기가 천리를 덮고 있으며
군자국 사람들은 이 꽃의 향기로 만병(萬病)을 고친다"란 부분이 있다.
 
그래서 그 이름을 훈화초(薰華草)라 하였다고 한다.
 
훈화초(薰華草)란 '향기 훈(薰), 빛날 화(華), 새로운 초(草), 무성할 초(草)'로
'향기를 내뿜어 새롭게 하다, 또는 무성하게 하다.' 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經), 고금기(古今記),
예문유취(藝文類聚)에도 수록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더라",
 
고금기(古今記)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었더라.",
 
예문유취(藝文類聚) 권(卷)89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백성들이 그것을 먹는다."라며 각각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환단고기>에 무궁화를 환화(桓花),
천지화(天指花)로 표현하고 있고, <규원사화>에는 훈화(薰花)로 표현하고 있다.
 
그 외의 기록으로 신라의 혜공왕 때와 고려 예종 때에는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서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香)의 나라라고 표현할 만큼 무궁화가 많이 피어 있었다.
 
1928년 발행된 <별건곤> 3권 2호에 게재된 <조선산 화초와 동물>편에는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무궁화는
꽃으로 개화기가 무궁하다 아니할 수 없을 만치 참으로 장구하며,
그 꽃의 형상이 엄연하고 미려하며 정조있고 결백함은
실로 민족성을 그려내고 있다."고 하였다.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가 쓴 <풍류한국>에는
 
"프랑스, 영국, 중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꽃이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인 꽃들로 정해졌으나
조선의 나라꽃인 무궁화는 유일하게도 황실의 이화(배꽃)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로 정해졌으니, 무궁화는 평민의 꽃이며 민족 전통의 꽃이다."
라고 쓰여 있다.
 
나라마다 애국가가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10여 종의 애국가가 있었는데,
1896년 11월 21일 독립협회 주관으로 이루어진
독립문 정초식에서 불려진 애국가의 후렴 가사를 보면
 
“무궁화 삼쳔리 화려 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 답세”라고 쓰였고,
또 그렇게 불렸다.
 
이후 1930년경 '안익태'에 의하여 지금의 애국가가 작곡되면서도
그 후렴은 그대로 인용되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무궁화에 대한 인식은 어떠한가?
 
진딧물이 많이 낀다면서 무궁화를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정체도 알 수 없는 외래수종을 심는가 하면
일본의 국화(國花)인 벚나무를 심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심장부라고 하는 여의도 광장에 가보면
무궁화 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온통 벚나무뿐이다.
 
천년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신라의 고도 경주의 보문단지에도
역시 온통 벚나무뿐이다.
 
진해 군항제가 열리는 경남 창원시 중원로 길은 또 어떠한가?
 
봄이 되면 벚꽃 축제는 여기저기서 열리지만
무궁화가 만발하는 8월에 무궁화 축제를 여는 곳은 찾아 보기 힘들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무궁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다.
 
진딧물이 많이 낀다는 것은 그만큼 무궁화에는 독성이 없다는 말이며
그러니 진딧물이 붙어 수액을 빨아 먹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의 고통과 시련을 무궁화도 역시 함께 하였다.
 
이 시기에도 무궁화는 뿌리째 뽑혀 불쏘시개가 되었고,
그 자리에 일본제국주의 황실의 상징인 벚나무가 심어졌다.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번영과 애환을 함께 해온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나라꽃인 것이다. 
 
매년 8월 8일은 무궁화의 날이다.
 
숫자 8을 90° 회전시키면 무한대(∞)가 된다.
 
그래서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정한 것이다.
우리 모두 무궁화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고,
매년 식목일에는 무궁화 심기 운동을 적극 전개해 보자.
 
 
 
 
- 무궁화(槿花) 원산지 “시리아”와 근역(槿域) 조선은?
 
주체혁 <김동길교수의 Freedom Watch 2012/11/12(월)>
 
“무궁화”의 학명은 시리아에서 온 꽃이라는 뜻의 Hibiscus Syriacus입니다.
 
영어로는 샤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이지요.
 
한국 발효식품의 대명사인 된장과 간장의 원료 콩의 원산지가
만주(滿洲)와 한반도 북부인 것처럼, 무궁화의 원산지가 시리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땅을 근역(槿域: Korea; the Land of Roses-of-Sharon)이라고 했음은, 동양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의 관계기록이나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에
무궁화의 고향(槿花之鄕)이라고 적은 것을 비롯해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근역”(槿域)이 서로 멀고멀지만,
역사유산이나 분위기가 너무 닮아 있는 게, 정녕 역사적으로도 우연이기만 할까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 박물관 정문은
기원전 2000년경의 옛 앗시리아왕궁 유적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무궁화문양(槿花紋樣)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어,
한국의 국화(國花)가 왜 4000여 년 전에
여기서도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나를 도무지 알 수 없게 한답니다.
 
예서도 강건한 생명력으로 왕족이나 귀족을 상징하는 나라꽃이라네요.
 
근래 불과 몇 십년 만에 국민의 대다수였던 우리농민 비중이
10%미만으로 확 줄어들었듯이,
순록·양유목민의 경우도 반만년 세월을 지내는 동안
팍스 몽골리카를 정점으로 그후 그렇게 희미해진 것은 아닐까요?
 
아프가니스탄 유목민이 삶은 콩을 자루에 넣어 말안장으로 깔고 앉아 다니다가
끓인 물에 그 가루를 넣어 조선(朝鮮) 된장국을 끓여 먹는 그림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보았지요.
 
몽골리안루트를 따라 무궁화(槿花)의 역사적 족적들을 그간 끈질기게
말없이 추적해온 탐사의 발길들을, 그래서 다시금 새삼 되돌아보게 됩니다.
 
매우 까다롭고 어렵더라도 어떤 적응적 진화과정에서,
누가 언제 어디서 왜 그럴 수 있었고 그럴 수 밖엔 없었는가를 면밀하게 꼼꼼히
밝혀내갈 때만 비로소 구체적으로 진지한 소통의 실마리가 잡히기는 하겠지요.
 
어찌 됐건,
결정적으로 중요한 적응적 진화과정에서 설계된 유전자는 지금도 우리의 혈맥 속에
무궁화(槿花)처럼 제 나름으로 말없이 피어나고는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BC 1716 <고불단제 기우제를 지내다>
 
을해 6년(乙亥 六年),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었다.
 
단제께서는 친히 기우제를 지내며 하늘에 간절히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비록 위대하다 하지만 백성이 없다면 어찌 그 위대함을 베풀 수 있으며,
비가 만물을 기름지게 한다지만 곡식이 없다면 어찌 비의 귀함을 알겠나이까?
 
백성이 하늘 처럼 믿는 것은 곡식이요, 하늘이 천심이라고 믿는 것은 백성이외다.
하늘과 사람이 한 몸이거늘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려 하시나이까?
 
바라옵건대 비를 내려 곡식을 적셔주시고 이 어려운 시기를 구제하여 주소서!"
라고 말씀하셨다.
 
단제의 말씀(기도)이 끝나자 큰 비가 수천리에 내렸다.
 
 
이 큰가뭄 이전에 단군조선 전기에 있었던 땅이나 곡식과 관계된 천재지변으로는,
BC 2284년의 대홍수와, BC 2098년에 있었던 황충(蝗蟲) 사건이 있는데,
아마도 기우제(祈雨祭) 관련 기록으로는 처음이 된다.
 
대홍수는 치수를 잘하여 마무리 하였고,
황충의 소란은 천왕이 삼신(三神) 하늘님께 기도하여 물러가게 하였던 것이다.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며, 곡식은 비가 내려야 번성하게 되고,
사람은 하늘이 내어 한몸이나 마찬가지여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존재이며,
사람은 먹는 곡식이 생명줄과 같아서 낳아 준 하늘이나 마찬가지인 바,
어찌 하늘이 사람인 백성을 버릴 것이며,
하늘이 내리는 비가 어찌 곡식을 버릴 것인가!
비가 내리면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곡식이 번성하고
이에 백성들은 먹는 것에 대하여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천재지변(天災地變)은 후대에는 임금의 부덕(不德)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기우제에 대한 기록은 수 없이 나타난다.
 
 
BC 1680 <자모전(子母錢)을 주조(鑄造)하다>
 
신유년(辛酉年) 고불 42년에 자모전(子母錢)을 만들었다.
 
자모전(子母錢)은 글자대로 보면
자전(子錢)과 모전(母錢)을 함께 부른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의 글자가 새겨진 주조전(鑄造錢)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데,
역사상으로 볼 때는 BC 2181년에 가림토 38자라는 표음문자가 정립되었던 것으로
자음과 모음을 새긴 화폐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자모전은 주조(鑄造)된 화폐이다.
 
이 자모전 이전의 주조된 화폐로는
BC 2133년에 발행된 원공패전(圓孔貝錢)이 있는데,
화폐상에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는 자모전의 자모가 자음과 모음을 가리킨다면
BC 1680년에 주조발행된 자모전(子母錢)이 되는 것이며,
후대의 소위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는 자모전의 후신이 되는 것이다.
 
명도전 이전의 단군조선 화폐로 소위 첨수도(尖首刀)도 있는데,
첨수도에 새겨진 글자는 명도전의 글자보다는
상형문자에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자음(子音)과 모음(母音)으로 분리와 조합이 가능하여
표음문자식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되어 자모전이라고 함에는 큰 난점이 없다.
 
소위 명도전(明刀錢)은 통상 BC 500년경 이전에 주조된 화폐가 되는데,
대체적으로 주(周)나라 초기나 춘추(春秋)시대 이전부터 주조된 것이 되며,
명도전(明刀錢)으로서 최초로 주조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 되는
은(殷)나라 중기가 되는 BC 1500년경이 될 것이다.
 
소위 첨수도(尖首刀)는 명도전(明刀錢) 이전에 주조된 화폐가 되고,
화폐상에 새겨진 문자의 형태로 보아
소위 명도전은 이 첨수도의 후신(後身)이 되는 바,
BC1680년에 주조된 자모전(子母錢)은
이 첨수도(尖首刀)가 시초가 되어 차츰 명도전(明刀錢)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첨수도에 새겨진 글자는 거의 모두 자음과 모음이 조합되어
상형문자식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되는데,
명도전에 이어지면서 그 글자의 형태가 상형문자식, 상형-표음문자식,
표음-상형문자식, 표음문자식 등 4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상형문자식 명도전의 글자는 첨수도에 새겨진 상형문자와 유사하거나
조금 더 부드러운 곡선 등으로 나타나며,
자음과 모음의 분리를 한층 더 쉽게 할 수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첨수도에 비하여 가림토 글자를 새긴 화폐라고 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상형-표음문자식 명도전의 글자는
전제적으로는 상형문자이면서 상형문자의 틀에서 조금 더 벗어나
자음과 모음의 분리가 훨씬 더 쉬워 가림토 글자로 해독이 가능함으로써,
표음문자로 읽을 수 있는 글자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된다.
 
표음-상형문자식 명도전의 글자는
가림토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상형에 맞춤으로써 전체적으로는 상형문자로 보이나,
자음과 모음이 분리되어 있어 순수한 표음문자로 읽히는 경우가 된다.
 
표음문자식 명도전의 글자는
순수한 가림토 글자의 자음과 모음을 차례로 새긴 것으로
상형문자와는 거의 관계가 없이 자음과 모음으로 읽히는 글자가 되어,
지금의 한글과 유사한 체계로 자음과 모음이 배치된 경우가 된다.
 
이상의 명도전에 새겨진 문자의 형태가 되는 네가지 유형은,
첨수도에서 명도전으로 다시 후대에 발행된 명도전으로 이어지면서
글자의 모습이 상형문자 형태에서 표음문자 형태로 변한 것을 대별한 것인데,
이는 문자 발전단계와도 일치하게 된다.
 
BC 1680년에 가림토38자가 정립된 이후 훨씬 후대까지도
배달국 시대에 사용되던 가림토의 전신이 되는 글자들을
첨수도나 명도전에 계속 새긴 것이 되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가림토 38자를 중심으로 하여 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위 명도전의 출토지역이 되는 북경 부근에서 발해만 유역과 요동반도 및
한반도 북부지역과 만주지역은 단군조선의 삼한(三韓) 영역에 속하며,
단군조선 땅에서도 경제적인 활동이 왕성하던 곳이 된다.
 
첨수도와 명도전은 주조화폐로서 수급에 따라 지속적으로 주조한 것이 되는 데,
그리하여 똑 같은 글자가 새겨진 화폐가 많이 주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된다.
 
특히 소위 명도전에는 같은 글자가 새겨진 경우가 허다하다고 보면 된다.
이는 주조형틀을 이용하여 계속하여 주조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엽전(葉錢)의 시초는 BC 1426년에 주조된 패엽전(貝葉錢)이 되며,
원공패전과, 자모전이라 할 수 있는 첨수도 및 명도전과, 패엽전은
모두 청동화폐(靑銅貨幣)가 된다.
 
BC 645년에 주조된 방공전(方孔錢)은 철전(鐵錢)이 된다.
 
철전은 청동전보다 산화(酸化)가 잘 되어 부서지기 쉬워서
사용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이 되는데,
철전이 주조되던 시기에도
명도전인 청동화폐가 지속적으로 주조되어 사용되고 유통된 것으로 된다.
 
 
 
<오색 큰닭(五色大鷄) 출현>
 
BC 1680년 9월에 마른 나무에 싹이 나고
오색(五色)의 큰 닭이 성(城)의 동쪽 자촌(子村)에서 깨어나오니,
이를 본 사람들이 잘못 알고 봉(鳳)이라 하였다.
 
 
 
BC 1666 <호구조사를 실시하다>
 
을해 고불 56년(乙亥 五十六年)에 관리를 전국에 파견하여 호구(인구) 조사를 하였다.
 
총 인구가 1억 8천만 명이었다.
 
 
BC 1666년이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시작된지 약700년이 되는 해가 되는데,
총인구수가 1억8,000만명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영역에 속하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을 계산한 것이 된다.
 
단군조선은 배달국을 정통계승한 나라이므로
당연히 배달국의 영역에 포함되는 사람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으며,
이 당시 고대중국은 은(殷)나라 초기이며
특히 은(殷)나라는 단군조선의 군사적 후원으로 건국된 나라로서
제후국이 되는 천자국(天子國)에 해당되어 당연히 총인구수에 포함된 것으로 된다.
 
실제로 당시 은나라의 크기는
현 중국대륙의 1/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은나라 주위에는 곧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존재하였던 것이고,
은나라는 일개 제후국인 천자국에 해당할 뿐이었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대제국(大帝國)으로서
대국(大國)으로서 마한과 번한을 거느리고 소국으로는 20여개국을 넘어서며,
그 외 조공하는 나라를 포함하면 70여개국이 넘는 등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렸던 것이다.
 
단군조선은 배달국의 정통성을 이었고
배달국은 환국(桓國)의 정통성을 이었던 것이므로,
단군조선 영역은 환국(桓國)의 영역을 전부 포함하는 것이 되는데,
그리하여 파미르고원 동쪽으로 남북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인구수를 포함한 것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에서 특히 봉한 제후국이 아닌 배달국의 제후국이나
환국(桓國) 시대의 12환국에 해당하는 나라들은
환국(桓國)과 배달국의 정통성을 가진 단군조선에 조공(朝貢)을 하는 나라로서
제후국으로 간주되었다고 보면,
파미르고원 동쪽으로 인구수가 BC1666년에 1억 8,000만이었다는 기록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것이 된다.
 
BC 7197년경부터 존속한 12환국(桓國) 중에서
수밀이국(須密爾國),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일군국(一群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우루국(虞婁國), 선비국(鮮卑國) 등은
단군조선 시대까지도 존속하였으며,
고구려 광개토태황(廣開土太皇) 시대까지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객현한국(客賢汗國),
매구여국(賣句餘國) 등이 존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환국(桓國)의 중심지가 되는 환인씨(桓因氏)의 나라는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이 되며,
진한의 북쪽과 서북쪽과 서쪽에 산재한 12환국들은 환국에서 배달국,
배달국에서 단군조선으로 계승될 때에도 망하지 않은 채
구족(九族)에 속한 나라로서 정통계승국인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섬기며
조공(朝貢)을 바쳤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 수밀이국, 비리국, 양운국, 일군국, 구다천국 등이
조공(朝貢)을 바치기도 하였고,
우루국의 망명자들이 단군조선에 들어와 살았다라고 기록되고 있으며,
선비국(鮮卑國)의 남쪽에는 남선비(南鮮卑)를 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BC 1661 <은(殷)나라 소갑(小甲)이 화친을 구하다>
 
경진년(庚辰年) 대음(代音) 원년에
은(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와 화친(和親)을 구하였다.
 
 
은나라 왕 소갑(小甲)은 
BC 1667년부터 BC 1639년까지 29년을 재위한 제7대 왕이다.
 
BC 1661년에 소갑이 화친을 청하였다는 것에서
이 이전에 소갑이 군사를 움직여 단군조선의 영역을 침범하다
패퇴당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C 1766년에 건국된 은(殷)나라는 단군조선의 군사적 원조로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되어 단군조선의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하(夏)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진정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펼치지 못하고,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주변국과의 전쟁을 일삼게 되었다.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은나라의 침범행위는
BC 1291년경에 은나라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정벌하고
색도(索度)와 영지(永支)를 침공한 것을 들 수 있다.
 
무정은 BC 1325년부터 BC1267년까지 59년 동안 재위한 은나라의 제22대 왕이다.
 
귀방(鬼方)은 서남방(西南方)이 되는데,
이는 단군조선에서 볼 때의 서남방이며 은나라로 볼 때는 북방(北方)이 되고,
영지(永支)는 단군조선 번한 지역에 있던 요중(遼中) 12성(城)의 하나로서
지금의 천진(天津) 서북쪽이자 옛날의 유수(濡水)가 되는
지금의 탁수(涿水){거마하} 상류지역에 위치하였다.
 
한편,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도 귀방(鬼方)이라는 것이 보이는데,
이는 신방(神方)이 되는 북방(北方)을 낮춘 것이 되는데,
보통은 서남방이 되는 것이다.
 
색도는 영지 부근이며,
곧 귀방은 색도와 영지의 서방으로서 은나라의 북방이 되고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서남방이 되어
지금의 태원(太原) 북쪽으로서 태행산(太行山) 서쪽 지역이 되는 것이다.
 
BC 1122년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서자
은나라 왕족 기자가 패잔병 5,000명을 이끌고 정착한 곳이
지금의 태원 북쪽이 되는 서화(西華)라고 불린 땅으로서
고죽국(孤竹國)의 북쪽이자 단군조선의 귀방(鬼方)에 속한 지역이 되는 것이다.
 
 
<80분의 1 세율의 조세법>
 
BC 1661년에 80분의 1의 세제(稅制)로 고쳤다.
 
 
 
BC 1660 <양운국과 수밀이국 사신이 래조하다>
 
신사 2년(辛巳二年)에 홍수가 나서 강물이 크게 범람하여 민가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단제께서는 심히 걱정하여 구휼하도록 하였다.
 
곡식을 창해사수(蒼海蛇水){滄海濱으로 추정}지역으로 옮기고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겨울 10월(冬十月)에 양운국(養雲國){바이칼호 서쪽, 몽골 북쪽지역}과
수밀이국(須密爾國){흑룡강 지역, 숙신 북쪽}의 사신들이 와서 조공을 바쳤다.
 
 
 
BC 1652 <금(金)과 쇠(鐵)와 원유(原油)를 캐다>
 
기축년(己丑年)에 천왕께서 서쪽으로 약수(弱水)에 행차하고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금철(金鐵)과 고유(膏油)를 채취(採取)하도록 하였다.
 
 
약수(弱水)는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땅으로 볼 때 서쪽에 위치하는데,
BC 2177년에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이
약수(弱水)에 종신금치(終身禁置) 당하였다가 뒤에 사면받아 봉해져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되는 바,
이 약수가 곧 여기서 말하는 약수라는 강이 틀림없는 것이 된다.
 
신지(臣智)는 신지(神誌)와 소리가 같아 동일 관직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문자(文字) 및 명령(命令)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우속(禹粟)은 인명(人名)이 된다.
 
금철(金鐵)의 금(金)은 쇠로서 황금(黃金)이며,
철(鐵)은 무기나 농기구 등을 만드는 재료인 일반적인 쇠(釗)를 가리키게 된다.
 
원래 철(鐵)이란 글자의 옛 글자는 銕(철)인데 이족(夷族)의 쇠라는 뜻으로서,
동이족이 발명하여 주조(鑄造)한 쇠라는 의미가 된다.
 
고유(膏油)는 찐득찐득한 기름을 가리키는데 원유(原油)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이때 이미 천연(天然)의 석유(石油)를 채취하여 연료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된다.
 
아마도 약수(弱水) 지역은 예전에 동물이 번성하였던 곳이거나
물고기가 많이 살았던 바다였다는 것이 된다.
 
한편, 나무가 울창하던 지역에서는 석탄(石炭) 종류가 나게 되는데,
석탄은 나무가 썩으면서 탄소화(炭素化) 한 것인데,
원래부터 식물이 자라던 육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우루(虞婁) 사람 20가(家) 투항>
 
BC 1652년 가을 7월에 우루(虞婁) 사람 20가(家)가 와서 투항하였는데,
천왕께서 염수(鹽水) 부근지역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우루(虞婁)는 BC 3897년 이전의 환국(桓國) 시대부터 존속하였던
12환국(桓國) 중의 하나인 우루국(虞婁國)을 가리키는데,
이때 투항한 우루 사람들은 이 우루국의 후예(後裔)가 되는 것인데,
우루(虞婁)는 지역적으로 보아 파미르고원의 서쪽에 있었던
소위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되는 옛 수메르 지역의 우르(크)로 추정된다.
 
이 수메르 땅에 있던 우르(UR)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BC 2000년경에 이르러
바빌론에게 망하면서 수메르 땅을 벗어나 사방으로 흩어져 살다가
이때에 이르러 동쪽으로 이동해 와 단군조선에 투항한 것이 되는 셈이다.
 
역사적으로는 BC 2348년경에 소위 노아홍수가 수메르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것이며,
이후 BC 2000년경에 바빌론의 함무라비왕이 정복하면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는 아브라함이
BC 1950년경에 가족을 이끌고 갈데아 우르(UR)를 탈출하여
서쪽의 가나안 땅으로 갔으며,
이후 이삭과 야곱의 시대를 거쳐 12지파로 불어났고,
약 300년이 지난 BC 1652년에 이르러
야곱의 후손 중 일파가 20가(家)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단군조선 땅의 염수(鹽水)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20가(家)는 사람의 수로 보면 단순히 20명(名, 口)이 아니라 약 4,000명 정도가 된다.
 
4,000명이면 대이동이 된다.
 
최소한 20개의 마을(里) 합친 것이 되는 큰 읍(邑)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된다.
 
아브라함의 시대는 BC 1950년경이 되고,
이삭의 시대는 BC1900년경이 되며,
야곱의 시대는 늦어도 BC1800년경이 되는데,
이때부터 BC1652년까지는 약150년이 지난 것이 되며,
이에 야곱의 아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불어난 후손은
약4~5대를 지난 기간이 되어 20가(家)가 충분히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적고 있는 우루 사람 20가(家)는
역사적으로 수메르 지역의 우르국 출신이 되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리킬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된다.
 
 
 
※<참고>  약수(弱水)와 패수(沛水)
 
많은 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이 우리나라나 중국의 고서에 등장하는
약수(弱水)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였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중국 북서쪽을 흐르는 황하의 상류를 약수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북만주의 남북을 흐르는 눈강을 약수라고 결론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확한 증거를 내세우지는 못하고 있기에
지금도 많는 이들이 약수(弱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강(江) 지도라는 "수경(水經)"이나 "수경주(水經注)"에도
약수(弱水)에 대한 설명은 없는 듯하다.
 
그 이유는 약수(弱水)는 특정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패수(浿水)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패수(浿水=沛水)는 특정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야 지역을 흐르는 강을 말한다.
 
그래서 '늪 패(沛)' 자를 써서 '패수(沛水)'라 하였고,
 
이 패수(沛水)가 후에 '강이름 패(浿)' 자를 쓴 '패수(浿水)'와 혼용되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학자마다 '이것이 패수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패수 관련 주장들은 많다.
 
난하설, 대릉하설, 고려하설, 요하설, 압록강설, 대동강설, 예성강설 등 설도 많다.
 
하지만 패수는 평야지역을 흐르는 '강(江)의 하류'를 일컫는 말이고,
약수는 '강(江)의 상류'를 일컫는 보통명사이다.
 
다음은 약수(弱水)에 대한 설명 및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약수(弱水)라는 말의 활용 예이다.  
 
① 전설 속의 강
 
- 신선(神仙)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강.
길이가 3,000리나 되며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을 정도로 부력이 아주 약하다는 강.
(산서성 서쪽 황하강의 상류라는 설과 만주 서쪽 눈강의 지류라는 설이 있음)
 
- 속세와 멀리 떨어저 있는 선경(仙境, 신선과 인간의 경계 지역)에 있다는 강.
 
[현종실록 권 제22, 현종 15년 7월 10일(임신)]
承旨鄭載禧追及於纛島 積已乘船矣 載禧傳諭聖旨 而積不入城 乃上一疏 其疏曰
臣罪戾餘喘 屛伏田里 回首脩門 如隅弱水 未死之前 豈復有重入之望…
 
승지 <정재희>가 독도(纛島)까지 뒤쫓아 가보니 <허적>이 벌써 배에 올라 있었다.
 
<정재희>가 임금의 분부를 전하면서 권유하였으나,
<허적>은 도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소를 올렸다.
 
그 소에 이르기를,
 
“신이 죄를 짓고 살아남은 목숨으로 향리에 물러나 살면서 대궐을 돌아볼 때
약수(弱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으니
죽기 전에 어찌 다시 들어갈 희망이 있었겠나이까…” 하였다.
 
② 멀거나 물이 얕아 배가 다닐 수 없는 보잘것없는 강.
 
[현종개수실록 권 제12, 5년 11월 25일(임자)]
吏曹判書金壽恒 旣自北關還 條上弊瘼 至是 又疏陳數條曰
六鎭絶遠 王化未及 去咸興遠者 半月程 間以三大嶺 六鎭之民 望營門如弱水…
 
이조 판서 <김수항>이 함경도에서 돌아와 폐단에 대해 조목별로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또 몇 가지 사항에 대하여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육진은 아주 멀어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데,
함흥과의 거리가 먼 곳은 반달이나 걸리고 그 사이에는 큰 고개가 세 개나 되어
육진의 백성들이 영문(營門)을 바라보기를 마치 약수(弱水)를 보듯 합니다.…” 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약수(弱水)의 의미는 어느 특정의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깨끗하고 순수하여 기러기 깃털도 가라앉을 정도의 맑고 깨끗한 강으로
신선이 사는 강 혹은 신선과 사람이 사는 경계지역의 강을 의미하기도 하고,
수량이 많지 않아 배가 다닐 수 없는 수심이 얕은 강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의미는 결국은 같은 말이다.
 
신선이 사는 맑은 강(江), 혹은 신선과 사람의 경계지역의 강(江)이라는 말은
심산계곡을 흐르는 강(江)을 말하는 것으로 강(江)의 상류를 의미하고,
수량이 적어 또는 수심이 얕아 배가 다닐 수 없다는 강(江) 역시
강의 상류를 의미하는 것이다.
 
강의 중류나 하류가 수량이 적고, 수심이 얕다면 아마 강(江)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천(川)이라 표현했을 것인데 강(江)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강(江)이 중류와 하류의 큰 강과 연결되기 때문에 강(江)이라 표현한 것이다.
 
즉 약수(弱水)란 특정의 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산계곡을 흐르는 강의 상류,
즉 발원지 부근을 흐르는 강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약수(弱水)는 특정의 강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맑고 깨끗한 강의 상류를 말하는 보통명사인 것이다. 
 
 
※ <참고> 단군조선 우가(牛加)의 후예 - 대국(代國)
 
중국의 오호십육국 시대 중국인들이 말하는 대국(代國)은
단군조선(고조선) 우가(牛家)의 후손들이 세운나라였다.
 
단군조선(고조선)의 우가(牛家)는 중국의 북부에 위치했던 단군조선국이었으며,
우가의 전성시기에 우가의 단군은 성씨(姓氏)가 대씨(代氏)였다.
 
단군조선은 초대 단군 왕검(王儉)부터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 까지는
웅족(熊族)으로 성씨(姓氏)가 단씨(檀氏, 熊族)였고,
 
5세 단군 구을(丘乙)은 계가(鷄加)로 그 성씨가 구씨(丘氏)였다.
 
구을이 남쪽지방을 순행하다 급사하자,
남쪽지역의 우가(牛加)의 6세 단군 달문(達門)이 즉위하였다.
 
후에 다시 권력은 계가(鷄加, 7세 단군 한율(翰栗)),
웅족(熊族, 8세 단군 오사함(烏斯含), 9세 단군 아술(阿述))을 거쳐
10세 단군 노을(魯乙)에 이르러 다시 권력은 우가(牛加)로 넘어간다.
 
10세 단군 노을(BC 1950)의 우가(牛加)는
이후 22대 단군 색불루(索弗婁, BC 1285)에 의하여 단군조선이 재통일될 때까지
약 670년(BC 1950 - BC 1285) 간 단군조선을 이끌었다. 
 
13세 단군 대음달(代音達, 흘달), 14세 단군 대불(代弗, 고불), 15세 단군 대음(代音)의
시대는 우가(牛加) 대씨(代氏)의 전성시대로 우가(牛加) 단군조선의 전성기였다.
 
이 기간은 172년이다
(대음달 재위 기간 61년, 대불 재위 기간 60년, 대음 재위 기간 51년).
또 15대 단군 대음(代音)은 자신의 동생 대심(代心)을
남선비국(南鮮卑國)의 대인(大人)으로 봉하였다.
 
이렇게 하여 당시 만주의 서부와 중국의 북방은 모두 대씨(代氏)의 나라였다.
 
이 대국(代國)은 제22대 색불루 단군에 의해 다시 삼조선(三朝鮮)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단군조선(고조선)이 망한 뒤 대국(代國)은 다시 중흥하여
AD 4세기경 북중국과 내몽골 자치구를 아우르는 대국(大國)을 건설하였었다.
 
 
 
BC 1634 <태백산(太白山)에 공적비(功績碑)를 세우다>
 
정미년(丁未年) 대음 28년에 천왕께서 태백산에 올라 비석을 세워
열성조(列聖祖)와 여러 한(汗)들의 공적을 새겼다.
 
비석을 세운 예는 제12대 아한(阿漢) 천왕께서 요하(遼河)의 동쪽인
번한(番韓) 땅에 BC 1833년에 세운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가 있으며,
 
제30대 내휴(奈休) 천왕께서 청구국(靑邱國)을 둘러보고
배달국 제14대 한웅(桓雄)인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공덕을 새긴 비가 있다.
 
 
 
BC 1622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 대인(大人)에 봉하다>
 
기미년(己未年)에 천왕의 아우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삼았다
 
 
남선비(南鮮卑)는 선비(鮮卑) 땅의 남쪽 지역이 되는데,
선비국(鮮卑國)은 BC 3897년 이전의 환국(桓國) 시대에 12한국의 하나로서
줄곧 존속해 온 나라이며,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거치면서 반역하지 아니하고
정통성을 인정하며 9족에 속한 나라로서 배달국에 복속한 나라가 된다.
 
선비국은 몽골의 남쪽 지역이자 구려국의 서쪽에 위치하며
흉노의 북쪽이자 견족(畎族)의 활동지역의 동쪽에 위치한다.
 
대인(大人)은 일반제후 아래의 직책이 되는데 대부(大夫)라는 직에 해당한다고 보며,
대부(大夫)는 공후백자남의 제후보다는 아래이고 지방장관보다는 윗 자리가 된다.
 
BC 3897년 이전의 환국시대에 지위리 한인(桓因)의 아들 한웅(桓雄)이
서자부(庶子部) 대인(大人)의 직을 수행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천왕(天王)이 되는 제(帝) 아래
천왕격(天王格)이 되는 한(韓)을 두어 비왕(裨王)이라 하였으며,
한(韓)의 아래에 일반 제후국인 국(國)의 왕(王)인 군후(君侯)가 있는데
이 군후를 통칭 한(汗)이라 하였고,
한(汗)의 아래에 대인(大人)이 있으며,
대인의 아래에 원(原)이나 성(城)에 봉해진 지방장관격인 욕살(褥薩)이 있는 것이다.
 
일반 성(城)의 욕살(褥薩)이 승진되어 한(汗)으로 봉해진 경우도 있다.
 
한(汗)은 일반적으로는 왕(王)이라 해석하지만,
독자적인 왕국(王國)의 왕(王)이 아니라 제후에 해당하므로
원칙적으로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 아니한다.
 
즉, 왕은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만,
한(汗)은 제후로서 명을 받아 군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비왕(裨王)인 한(韓)도 넓은 의미로 한(汗)이 되며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 아니한다.
 
한편, 단군조선의 말기가 되는 BC 425년부터는
단군조선 삼한(三韓)의 관경(管境)이 각 삼조선(三朝鮮)이라는 나라가 됨으로써,
진조선(眞朝鮮)의 임금(단군)은 천왕(天王)이 되고,
번조선(番朝鮮)과 마조선(馬朝鮮)의 임금(韓)은 각 왕(王)이라 부르게 되어
번조선왕(番朝鮮王), 마조선왕(馬朝鮮王)이라 하게 되어
독자적인 군사권을 행사하게 된다.
 
다만, BC 323년에 읍차(邑借)로서 번조선왕이 된 기후(箕詡)는
먼저 번조선왕이라 칭하고
사후에 단군 천왕의 윤허(允許)를 밟는 절차를 취하였다고 기록된다.
 
 
 
BC 1614 <은(殷)나라 왕 태무(太武)가 번한에 조공하다>
 
정묘년(丁卯年) 대음 48년에 번한(番韓) 진단(震丹)이 즉위하고
은(殷)나라 왕 태무(太武)가 번한(番韓)에 방물(方物)을 바쳤다.
 
진단(震丹)은 번한(番韓)의 제20대 임금으로
BC1614년부터 BC1579년 사이에 재위하였으며,
은나라 왕인 태무는 제9대 왕으로 BC1638년부터 BC1564년 사이에 재위하였다.
 
은(殷)나라가 번한(番韓)에 조공(朝貢)을 하였는데,
은(殷)나라의 왕은 천왕격(天王格)에 해당하는 번한보다 아래이며
천군(天君)보다 아래인 천국(天國)의 자작(子爵)으로서,
천국(天國) 즉 천상(天上)의 나라인 단군조선의 지방(地方)
즉 천하(天下)에 봉해진 천자(天子)인 것이다.
방물(方物)은 지방의 특산물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BC 1610 <유덕자(有德子)를 태자태부로 삼다>
 
신미년(辛未年) 위나(尉那) 원년에 유위자(有爲子)의 아들 유덕자(有德子)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유위자는 BC 1727년에 돌아가시어 유덕자는 아마도 유위자의 손자가 아닌가 한다.
 
태자태부(太子太傅)는 태자의 스승을 가리킨다.
 
역사기록상 태자의 스승으로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가 있다.
 
 
 
BC 1596 <탐모라가 마한(馬韓)에 조공하다>
 
기유년(己酉年)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匹)을
마한(馬韓) 을아(乙阿)에게 바쳤다.
 
 
탐모라는 탐라(耽羅)로서 지금의 제주도(濟州道)를 가리킨다.
탐모라 또는 탐라는 섬라와 같은 말로서 섬(島) 땅이라는 의미가 된다.
 
BC 1200년경에 제23대 아홀(阿忽) 천왕 시대에
태자(太子) 고연나(高延那)의 아우인 고을나(高乙那)를 신도후(神島侯)에 봉했다는데
이 신도(神島)가 곧 탐라로서 지금의 제주도이다.
탐모라는 이때 한반도 땅인 마한(馬韓)의 관경에 속한 것이 된다.
 
 
 
BC 1595 <병법가(兵法家) 신우천(新尤天)의 신병서(新兵書)>
 
병술년(丙戌年)에 전략가(戰略家) 신우천(新尤天)이
신병서(新兵書) 한 질(帙)을 바쳤다.
 
 
BC 1216년경 출생으로 BC1150년경에 등용되어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스승이 된 강태공(姜太公)은
병법서(兵法書)인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지은 인물로 추정되는데,
강태공은 본명이 여상(呂尙)으로서 산동지역의 동해(東海) 출신이며,
육도삼략은 곧 단군조선의 병법이거나 여기에서 나온 것이 된다.
 
 
 
BC 1583 <구환의 무리들이 영고탑에 모이다>
 
무술 28년(戊戌 二十八年)에 구환의 지도자(汗, 왕)들이 영고탑에 모였다.
 
그들은 삼신 상제에게 제를 올리고,
환인, 환웅, 치우와 단군왕검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配享)하였다.
 
5일 동안 백성들과 함께 대향연(제천행사)을 열었다.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외우고
지신(마당)밟기를 하였다.
 
한 곳에는 횃불을 밝혀 놓고, 한 곳에서는 둥글게 모여 춤을 추며
애환가(愛桓歌)를 제창하였다.
 
애환가(愛桓歌)는 옛 신(神 = 先人(지도자(王), 선각자(先覺者), 조상(祖上) 등
먼저 돌아가신 분들의 총칭)을 찬양하는 노래의 한 종류이다.
 
'선인의 꽃'이라는 '선인지환화(先人指桓花)'는 별도의 이름이 없다.
그냥 꽃이다.
 
애환가(愛桓歌)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山有花                        산에는 꽃이 피네
山有花                        산에는 꽃이 피네
去年種萬樹  今年種萬樹  지난 해도 만 그루 올 해도 만 그루
春來 弗咸 花萬紅           봄이 오면 불함땅은 꽃들이 만발하여 붉게 물드니
有事天神 樂太平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28년에 만국(萬國)의 제후(諸侯)들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이게 하여 회의를 하였다.
 
<황극을黃克乙>이 아뢰기를
“사람이 스스로 업신여기면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나라가 스스로 교만해지면 반드시 사람들이 교만해지며,
고목(古木)에 벌레가 생기며 썩은 물에 구더기가 생기는 것과 같이
법(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도(道)가 오래되면 마귀가 유혹하기 때문에,
나라의 기상을 새롭게 고치며 정치와 법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결승(結繩) {새끼줄 매듭으로 된 문자}으로 하는 정치로는
문명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며,
쓸모없는 도덕으로는 복잡한 세상을 교화시킬 수 없으니,
마치 육지에서 배를 움직이는 자는 힘만 들고 얻는 것이 없으며,
겨울에 갈포 옷을 입는 자는 몸이 얼어 기(氣)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과 지금은 물과 육지, 겨울과 여름의 차이와 같으나,
왜 옛 정치와 법을 혁신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가 건국 된 지 천년이 가깝도록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것은,
다 선열(先烈)과 성제(聖帝)의 유덕(遺德)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백성들은 안락을 오래 누리고 있어 환란을 모르고 있으며,
문약(文弱)에 빠져 용맹에 힘쓰지 않으니 문명이 점점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경박(輕薄)한 자들이 은(殷) 나라 문풍(文風)에 취하여
끝내는 음모자들이 권력을 희롱하여 나라를 잃는 비참한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 일을 염려하옵소서.“하니,
 
임금께서 그 아뢰는 말을 신중히 받아들여 법전(法典)을 새로 고치시며,
<황극을黃克乙>을 수상으로 삼았다.
 
 
 
영고탑(寧古塔)은 단군조선의 이궁(離宮)에 해당하는 곳이다.
실제로 BC 1345년에 영고탑에 이궁을 지었다.
 
이 기사로 보면 마당밟기는 역사가 최소한 3,600년이 된다.
 
또 둥글게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는 태백환무가(太白環舞歌)로서
이미 배달국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때 부른 환무가(環舞歌)가 애환가(愛桓歌)이다.
 
환화(桓花)는 지금의 무궁화(無窮花)로서 하늘꽃이라는 의미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국자랑들이 머리에 꽂고 다닌 꽃으로 천지화(天指花)라고도 한다.
 
 
 
※ <참고>  애환가(愛桓歌)와 선인지환화(先人指桓花)
 
애환지가(愛桓之歌), 일명 애환가(愛桓歌)이다.
애환가(愛桓歌)는 신(神)을 찬양하는 노래이기에 애신가(愛神歌)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애환가(愛桓歌) = 애신가(愛神歌)이고, 환(桓) = 신(神)이다.
그럼 환(桓), 신(神)은 무엇인가?
 
환(桓)은 삼신상제(三神上帝)인 '하늘님' 즉 환인(桓因(仁))을 말하며,
대표적인 창조의 신(神)이다.
 
인류의 기원인 '나반'과 '아만'이 '하늘님'이다.
'나반'은 아버지 신(神)으로 '하늘'이며, 아만은 어머니 신(神)으로 '땅'이다.
 
신(神)에는 삼신(三神)이 있다.
 
삼신(三神)은 창조(創造)의 신(神)인 하늘(天, 하늘님, 환인, 천신)과
교화(敎化)의 신(神)인 땅(地, 지신)과 치화(治化)의 신(神)인 사람(人, 인간)이다.
 
그래서 삼신은 천(天), 지(地), 인(人)이다.
 
인간은 누구나 꾸준한 노력으로
창조(創造)와 교화(敎化)와 다스림의 원리를 두루 갖출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원리를 모두 터득하여 재세이화(在世理化, 솔선수범)하고,
홍익인간(弘益人間, 무실역행)하는 사람이 곧 삼신(三神)이며 일신(一神)이다.
 
그래서 '천부경'에서는 삼신(三神)은 서로 작용하여 일신(一神)이 된다고 한 것이다.
 
즉 사람만이 진정한 신(神)이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나온 사상이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재세이화(在世理化, 솔선수범), 홍익인간(弘益人間, 무실역행)의 정신을
무리 속에서 실현한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지도자요, 왕이요, 대통령인 것이다.
 
즉 지도자다운 지도자인 것이다.
재세이화(在世理化, 솔선수범), 홍익인간(弘益人間, 무실역행)의 정신을
자라나는 후세들을 위하여 실현한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선생이요, 스승인 것이다.
 
즉 선생다운 선생인 것이다.
재세이화(在世理化, 솔선수범), 홍익인간(弘益人間, 무실역행)의 정신을
가정 내에서 실현한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아버지요, 어머니요, 부모인 것이다.
 
즉 부모다운 부모인 것이다.
 
이것이 삼륜(三倫)이다.
 
삼륜(三倫)을 실현한 사람은 모두가 신(神)이다.
지도자다운 지도자도 신(神)이요, 선생다운 선생도 신(神)이요,
부모다운 부모도 신(神)이다. 
 
위 글에서 이런 분들을 선인(先人)이라 하였으니 즉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이다.
그리고 그런 분들을 기리는 꽃이 '선인지환화(先人指桓花)'이다.
 
'선인지환화(先人指桓花)'는 선인(先人)들의 환생이라고 보았던 모양이다.
'선인지환화(先人指桓花)'는 일명 '하늘의 꽃'이라는 '천지화(天指花)'이며
천지화(天指花)는 오늘날의 '무궁화(無窮花)'이다.
 
불함의 땅(광의의 의미-유라시아 대륙, 협의의 의미-만주와 한반도)에
'선인지환화(先人指桓花)'가 만발한다는 것은
조상들 중에 유능한 분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올렸으니 그 행사가 '제천행사'인 것이다.
 
제천행사 시(時)에 경(經)을 외우고,
애환가(愛桓歌)를 부르며 춤을 추며 즐거워하였는데,
애환가(愛桓歌) 가사의 주요 내용이 '선인지환화(先人指桓花)'인 것이다.
 
참고로 흔히 삼신(三神)이라고 일컫는 분들은
환인(桓因(仁)), 환웅(桓雄), 단군(檀君)이다.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환인(桓因(仁)), 환웅(桓雄), 단군(檀君)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다.
 
환인(桓因(仁))은 환국(桓國)의 지도자들로 전하여 오는 일곱 명의 칭호이고,
환웅(桓雄)은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의 지도자들로 전하여 오는
십팔 명(18人)의 칭호이며,
단군(檀君)은 단군조선(古朝鮮)의 지도자들로 전하여 오는 사십칠 명의 칭호이다.
 
근세의 왕(王), 오늘날의 대통령(大統領)과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삼신당(三神堂)에 모시는 삼신(三神)인 환인(桓因(仁)), 환웅(桓雄),
치우(蚩(治)尤), 단군(檀君)은 고유명사이다.
 
즉 인류의 기원이며 환국을 처음으로 여신 "나반" 환인과
배달국의 초대 환웅인 '거발환'환웅, 청구(靑丘)의 땅을 여신 치우(蚩(治)尤) 환웅,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인 '왕검'단군이다.
 
청구(靑丘)는 산동성을 기점으로 한 중국의 동북부 땅이다.
 
 
 
 
BC 1566 <기우(杞憂)의 연원>
 
을묘년(乙卯年) 위나 45년에 풍년이 들어,
산동지역의 기국(杞國)을 비롯한 모든 제후국들의 왕들이 천왕(天王)을 알현하였으며,
이때 천왕께서 각 나라의 생활형편이 어떠한지를 물으니,
모든 제후들이 집집마다 잘 살고 별다른 우려가 없으며
다만 하늘이 기울까 우려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이후 사람들이 우려할 일이 없는 것을 가리켜 기우(杞憂)라 하게 되었다
 
 
기(杞)라는 나라는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기(杞)는 BC 2224년에 세워진 하(夏)나라의 제후국으로 기록되기도 하나,
하우(夏禹)가 BC 2224년에 반역하여
마음대로 제후(諸侯)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는 등 하였는데,
이때 많은 단군조선의 직속 제후국들이 夏나라의 폭정으로 조공을 하였던 것이 되며,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라를 탈출하여
단군조선 직할영역으로 피난하였던 역사가 있는데,
이후 상당수의 제후국들이 제자리를 도로 찾았던 것이 되는데
기국(杞國)도 이에 해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하(夏)나라 자체가 단군조선의 지방제후국인 천자국(天子國)에 해당한다.
 
 
 
BC 1549 <은(殷)나라가 참성단(塹城壇) 제사를 돕다>
 
임신년(壬申年) 여을 4년 3월 16일에 마한(馬韓) 두막해(豆莫奚)가
몸소 마리산(摩璃山)에 올라 참성단(塹城壇)에서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렸는데,
이때 은(殷)나라 왕 외임(外任)이 사신을 파견하여 제사를 도왔다.
 
 
 
BC 1547 <흉년 구휼(救恤)>
 
갑술년(甲戌年)에 흉년이 들어 쌓아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BC 1543 <고수노에게 政事를 묻다>
 
여을 10년 봄에 임금께서 <고수노>를 불러 정사(政事)를 물으니,
 
<고수노>는 대답하기를
“정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도(道)입니다.
 
비록 한 정부 밑에 있다 해도 지방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서로 달라,
백성의 문명과 미개한 정도가 같지 않으니 일률적으로 다스리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젖먹이는 젖이 아니면 키울 수 없고 어른은 밥이 아니면 배부르지 않으며,
노인은 고기가 아니면 영양이 부족하고, 병자는 약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정도에 합당한 정치를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술법(術法)입니다.
 
대체로 정치는 백성을 교도(敎導)하는 일이며
법률은 백성을 징벌하여 다스리는 것이니,
먼저 가르치지 않고 벌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그물질 하는 것과 같아서,
어진이가 왕위에 있으면서 어찌 백성을 법만으로 다스리겠습니까.
 
교도하는 방법은 대략 몇 가지 있습니다.
낮은 백성은 먹고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항상 먹고 입는 것을 풍족하게 한 후에 예의를 가르치며 법도로써 이끌어야 하고,
서로 도와 순종하는 것이 마치 물이 낮은데로 흐르는 것과 같아서
산에는 도적이 없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줊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을 위한 정치입니다.
 
만일 백성이 늘 할 수 있는 생업(生業)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어지고,
항심이 없으면 사기(詐欺)와 도적을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고, 추워도 입을 옷이 없으면
아무리 자비로운 아버지일지라도 자식을 기를 수 없는데,
군주(君主)가 어떻게 그 백성을 다스리겠습니까.
 
옛 글에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야 예절을 아고,
옷과 먹을 것이 풍족해야 영광과 욕됨을 안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옛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은 생산을 늘려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을
정치의 요소로 삼고, 혹 세금을 낮추며 대부(貸賦)하여 주며,
물가와 물자를 알맞게 조정하며
가축을 빌려주는 등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국고(國庫)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으로 하여금 정신 차리게 하기를,
마치 벌통에 꿀을 넣어주는 것과 같이하여 감동되게 하면
힘든 것도 잊고 생업에 매진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상을 주지 않고도 백성을 움직이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 다음 상류층 백성들에게는 민권옹호정치(民權擁護政治)를 해야 합니다.
 
옷과 밥으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민권옹호로써 그 인격을 존중하여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주어, 배운 학문과 평생의 포부를 펼치게 하면,
공적인 일에 용감히 나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날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또 장병(將兵)을 양성하는 데는 특권을 허락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그 위풍을 우러러보게 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기르고,
국립장관학교(國立將官學校)를 세워 백성들에게 수업하게 하면
이것은 국방을 위한 정치입니다.
 
또 높은 관직에 있는 자는,
그 지도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알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으면,
이것은 나를 버리고 공(公)을 받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군관군민(君官軍民)이 일치되어 행정이 이루어지면
곧 사위일체(四位一體)의 정치이니,
항상 대세와 환경에 따라 비록 사소한 차이가 있기는 하나,
국시(國是)를 잊지 않으면 빈틈없이 완전한 정치가 되는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고, 국태사(國太師)로 삼았다.
 
 
 
BC 1533 <일식(日蝕)>
 
무자년(戊子年)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BC 1528 <은(殷)나라를 정벌하다>
 
계사년(癸巳年) 여을 25년에 번한(番韓) 소밀(蘇密)이
은(殷)나라가 조공(朝貢)을 하지 아니하므로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정벌하니
이에 은나라 왕 하단갑(河亶甲)이 사죄하였다.
 
 
단군조선의 비왕(裨王)의 나라인 번한(番韓)은 은나라의 상국(上國)이 된다.
 
은나라 왕 하단갑은 BC 1535년부터 BC1527년까지 재위한 제12대 왕이며
수도를 상(相)에 두었다.
 
하단갑이 홍수가 나자 수도를 박(亳)에서 상(相)으로 옮겼는데,
이 상(相)이 북박(北亳)이 된다.
 
은(殷)나라의 수도는 통상 박(亳)이라 하는데 모두 6경(京)이 된다.
 
즉 BC1766년경에 성탕(成湯)이 수도로 삼은 박(亳)은 중박(中亳)이 될 것이며,
BC1560년경 중정(仲丁)이 수도로 삼은 하남성의 효(囂)는 남박(南亳)이 될 것이다.
또, BC1528년경에 하단갑(河亶甲)이 수도로 삼은
하북성의 상(相)은 북박(北亳)이 될 것이며,
조을(祖乙)의 시대인 BC1520년경 수도로 삼은 하북성의 경(耿)은
산서(山西)지역에 있어 서박(西亳)이 될 것이고
산동성 비(庇)는 동박(東亳)이 될 것이다.
 
그리고, BC1430년경 남경(南庚)이 수도로 삼은 엄(奄)도 동박(東亳)에 해당된다.
 
이들 수도는 모두 홍수로 옮긴 것이 된다.
 
BC 1402년경 은나라 후기를 시작한 반경(盤慶)이 박(亳)을 다시 수도로 삼았는데,
이때의 박(亳)이 은(殷)이라는 국명(國名)이 나오는 땅으로서
지금의 안양(安陽)의 서쪽이 되는 은(殷)이라는 땅이다.
 
박(亳)은 BC 2436년경 은나라의 선조인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가 도읍한 곳이기도 하다.
 
BC1430년경 은나라의 제17대 왕 남경(南庚)이 수도로 삼은 엄(奄)이라는 땅은
BC1266년 산동지역에 위치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남국(藍國)이 차지하였던 엄독홀(奄瀆忽)과
BC 1236년에 단군조선의 군후국(君侯國)인 남국(藍國), 청구(靑邱), 구려(句麗),
몽고리(蒙古里)의 군사들이 합공으로 회대(淮岱)지역을 평정하여 제후국으로 봉한
엄(淹)이라는 명칭과 같은 것이 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수도이던
한단(邯鄲)의 남쪽에 소재한 지금의 안양(安陽)은
하북(河北)지역에 있는 소위 은허(殷墟)이기도 하며,
중앙에 둔 수도(首都) 즉 중경(北京)에 해당하는 중박(中亳)이 되는 것이다.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청구국(靑邱國)과 남국(藍國)과
BC 1236년에 봉해진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수(淮水)지역에 봉해진 회국(淮國)은,
주(周)나라가 봉한 제후국인 제(齊)나라가 청구국과 남국의 일부를 차지한 것이 되고,
청구국과 남국과 엄국이 언제까지 존속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최소한 BC 909년경까지 청구국과 엄국은 존속한 것이 되며,
서국은 오(吳) 합려왕에게 망한 BC 512년까지 존속하였고,
회국은 진시황(秦始皇) 시대가 막 시작되는 BC 221년경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BC 1511 <고수노의 충언>
 
여을 42년에 나라가 태평하고 무사하니 이때에 동등한 나라는 殷 나라 뿐이며,
그 외는 모두 따르며 복종하는 나라이며,
그 나머지는 봉건제후(封建諸侯)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하루는 임금께서 조용히 <고수노高叟老>에게 묻기를
 
“인생 백년이 마치 갈매기의 틈을 잠깐 지나가는 것과 같고,
백발은 누구나 다 가는 길이니,
귀하고 천한 차이가 없는 것인데 사람이 홀연이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되는가.”하니,
 
<고수노>가 대답하기를
 
“사람은 천지간의 하나의 물(物)입니다.
 
물(物)은 양(量)이 무궁하여 시(時)가 그침이 없으며, 분(分)이 같지 않으며,
시작과 마침은 고정(固定)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뛰어난 슬기는 멀고 가까운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작아도 적다고 하지 않으며 커도 많다고 하지 않는 것은, 양(量)이 무궁하기 때문이며,
옛과 지금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아득히 멀어도 근심하지 않으며,
어두워도 빛이 차지 않음은 시(時)의 그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고(盈) 빈(虛) 것을 살폈기 때문에 얻어도 기뻐하지 않으며,
잃어도 근심하지 않는 것은 분수(分數)의 무상(無常)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항도(恒道)에 통달했기에 나도(生) 기뻐하지 않으며 죽어도 화(禍)하 하지 않는 것은,
나중과 처음이 고정되지 못함을 아는 까닭입니다.
사람이 아는 것을 계산하면 그의 모르는 것에 미치지 못하며,
살고 있는 때가 태어나기 전보다 낫지 않으나,
이미 태어났으니 난 자는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할 제물(祭物)이며,
사람의 몸은 그 책임을 위하여 사용할 기구입니다.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그 몸을 써서 목적을 달성하면,
몸은 비록 죽으나 대아(大我)의 정신에는 해(害)가 없을 것입니다.
 
관민장병(官民將兵)은 그 한 사업을 위하여 분담한 편리한 방법입니다.
 
절대적인 책임으로 보면 관민장병은 서로 같은 한 몸이니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관(官)은 높고 백성은 낮으며 장(將)은 귀하고 졸(卒)은 천하다는 것은,
나라가 가난해지고 군사가 약해질 수 있는 악한 원인입니다.
 
옛말에 백성의 현철(賢哲)은 군주의 용렬하고 어두움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평범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는,
군주라도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도 절대로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책임을 다한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 천궁(天宮)에 가면,
사업(事業)과 영혼이 공존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어찌 인생이 잠깐 백발이 되는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겠습니까.
 
백발은 사업의 표증(表證)이니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고
공연히 백발만 탄식하는 것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위대한 공적과 대업(大業)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내려다 보아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 말은 나에게 약이 된다.“하시고 더욱 정사에 힘쓰셨다.
 
 
 
 
BC 1501 <청포노인(靑袍老人)의 하례(賀禮)>
 
庚申 52년에 단제께서는 오가(五加)와 더불어 나라 안을 차례로 순시하였다.
 
개사성(蓋斯城){장당경,조양} 지역에 이르렀을 때
청포노인(靑袍老人)이 축하의 잔치를 베풀며 말하기를
"선인의 나라에 오랫동안 살면서 선인의 백성으로 즐거움을 누리고 있나이다.
 
단제님의 덕은 거스름이 없고, 왕도(王道)는 편중되지 않아 백성들과 이웃 간에도
서로 믿으므로 근심, 걱정, 괴로움, 꾸짖음(다툼), 재앙(화) 등을 볼 수 없나이다.
 
(9환의) 관경은 (단제의) 은혜를 입어 성들도 나라들도 전쟁을 하거나
서로 뺏고 뺏기는 것을 볼 수 없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단제께서 말하기를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짐의 수덕(修德)이 깊지 못해 백성들의 여망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려웠는데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답하였다.
 
52년 봄에 임금께서 백산(白山)에 가보실 때에,
백산 봉인(封人)[주:封人-봉역(封域)을 지키는 벼슬아치]이 아뢰기를
 
“성인(聖人)에게 비오니,
성인으로 하여금 오래사시고 부(富)하시고 아들을 많이 두소서.”하니
 
임금께서
 
“사양하노라. 오래 살면 이웃에 욕이 되고, 부하면 많은 사람의 원한을 사게 되고,
남자가 많으면 사람의 허물을 받게 된다.
 
천하에 도(道)가 살아 있으면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게 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도를 닦고 덕을 기르다가,
늙어 세상을 뜨면 천궁(天宮)에 가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하셨다.
 
 
 
BC 1483 <은(殷)나라의 조공(朝貢)>
 
무인년(戊寅年) 동엄(冬嚴) 2년에 은(殷)나라가 사절(使節)이 와서 사례하였다.
 
 
 
BC 1480 <국사 편찬>
 
신사년(辛巳年)에 고수노(高叟老)가 국사(國史) 18권을 편찬하였다.
 
 
단군조선 초기인 BC 2180년에 신지(神誌) 고글(高契)이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찬한 사실이 있는데,
단군조선 중기가 되는 이때에 고수노가 역사책을 편찬한 것이 된다.
 
고글과 고수노는 모두 고씨(高氏)가 된다.
 
BC 1285년에 제22대 단군 천왕으로 즉위한 색불루는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의 손자로서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으며,
고씨(高氏) 단군(檀君)의 시조가 된다.
 
단군조선 시대로 보면 단군왕검은 천왕(天王)에서 천제(天帝)로 받들어졌으며,
이후 부루 단군부터는 천제의 아들로서 그 아래인 천왕(天王)이 된다.
 
고열가(古列加) 천왕(天王)의 현손(玄孫)이 되는
졸본(卒本)의 왕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천제자(天帝子)라 하며,
고주몽(高朱蒙)이 천제자(天帝子)라 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BC 1465 <지백특(支伯特)의 조공(朝貢)>
 
병신년(丙申年) 동엄 20년에 천왕께서 서쪽 변방을 돌아 볼 때,
사람을 서장(西藏)에 보내어 함문경(咸文經)을 구하여 왔다.
BC 1465년에 지백특(支伯特) 사람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지백특은 서장(西藏)으로서 지금의 티벳(Tivet)을 가리킨다.
 
이때 동엄 천왕이 서쪽 변방이라 돌아 본 지역은
진한관경(眞韓管境)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가깝게는 태원(太原) 북쪽에 있는 대동부(大同府)에 땅이 될 것이고,
멀게는 흉노(匈奴)나 선비(鮮卑)의 서쪽이 되는 견족(畎族)이나
청해(靑海)의 땅이 될 것이며, 지백특은 지금의 티벳고원 지역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의 영역은 동서로 동쪽은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지백특(티벳)에 이르는 것이 되는데,
BC 2175년에 티벳의 강거(康居)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데서 알 수 있다.
 
물론 이 반란을 진압한 군사는 천왕의 명을 받은 티벳지역이나
인근 견족(畎族) 등에서 동원된 군사가 될 것이다.
 
한편 청해(靑海)는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을 둔 곳이기도 하다.
 
 
 
BC 1435 <단제의 아우 종선을 청아왕으로 삼다>
 
구모소(緱牟蘇) {종년縱年} 원년 맏아들 <고홀固忽>을 태자로 삼고,
아우 <종선縱鮮>을 청아왕(菁莪王)으로 삼으니,
청아왕의 증손(曾孫)은 <서여西餘>인데,
이 분이 조선기자(朝鮮奇子)의 태조(太祖)가 되었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제19대 천왕을 구모소(緱牟蘇)라 적고 있으나,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종년(縱年)이라 적고 있으면서
아우 종선(縱鮮)을 청아왕으로 봉하였다라고 적고 있는데,
구모(緱牟)와 종년(縱年)은 글자가 엇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 글자로서
종년(縱年)이 구모(緱牟)의 오기라고 보이고,
종선(縱鮮)은 구선(緱鮮)의 오기가 되는 듯 하다.
 
청아왕은 왕(王)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나
단군조선 시대에 일반적인 제후의 통칭이 되는 한(汗)에 해당되며,
작위로는 천왕의 친(親)아우이므로 군(君)에 해당되어,
지방의 제후국들은 청아왕을 천군(天君)이라 부르게 된다.
 
청아왕의 증손이 서여(西餘)로서 BC 1285년에 색불루 천왕에 의하여
비왕으로서 번조선(番朝鮮)의 번한(番韓)에 봉해진다.
 
한편 BC 1120년에 단군조선의 서방변경에 망명하는 은(殷)나라 왕족 기자(箕子)는
서여(胥餘)로서 글자가 다르며 명백히 다른 인물이다.
 
BC 1286년에 제21대 소태(蘇台) 천왕이 종실(宗室)인 상장(上將)이었던
해성(海城)의 욕살(褥薩) 서여(西餘)를 해성(海城)의 남쪽에 위치한
살수(薩水)지역의 기수(奇首)로 봉하면서 천왕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우현왕(右賢王) 색불루와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만류하였던 것이며,
소태 천왕이 고집을 꺽지 않자 우현왕 색불루가 스스로 천왕의 자리에 오르니,
소태천왕은 색불루 천왕에게 선양하고
서여(西余, 徐于餘)를 서인(庶人)으로 폐하였다.
 
이때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해성(海城)으로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전사하였다.
 
마한 아라사는 처음 소태 천왕이 서여에게 천왕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반대하였다가
우현왕 색불루가 스스로 천왕으로 즉위하자 군신(君臣)의 도리를 어긴 것이라 하여
군사를 이끌고 해성으로 가서 색불루 천왕의 군사와 전쟁을 하였던 것이 되며,
이때 전사한 것으로 된다.
 
즉 마한 아라사는 서여(西余) 편도 아니며 색불루(索弗婁) 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서여(西餘)가 좌원(坐原)에서 몰래 군사를 일으켰으며,
색불루 천왕의 신하인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이 제후들을 설득하였고,
한편으로 서여(西餘)와 전쟁을 하다가 개천령은 전사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색불루 천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여(西餘)를 토벌하러 가면서
먼저 사람을 보내어 비왕(裨王)에 봉할 것을 약속하니,
이에 서여(西餘)가 응함으로써 전쟁이 끝나게 되고,
색불루 천왕은 약속대로 서여(西黎)를 번한(番韓)에 봉하였던 것이다.
 
한편,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전쟁 중 사망하여
비왕(裨王)인 마한(馬韓)이 빈자리가 되자,
색불루 천왕은 자신이 천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 공이 큰
여원흥(黎元興)을 마한(馬韓)에 봉하였던 것이 된다.
 
만약 개천령(蓋天齡)이 살아 있고 서여(西餘)가 제거되었더라면
개천령이 색불루 천왕의 번한(番韓)이 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BC 1426 <패엽전(貝葉錢) 주조>
 
을해년(乙亥年)에 패엽전(貝葉錢)을 주조(鑄造)하였다.
 
 
패엽전은 조개모양으로 나무 잎사귀처럼 주조한 동전(銅錢)이 된다.
 
후대에 엽전(葉錢)이라고 불리는 명칭의 원류가 된다.
 
BC 1680년에 주조된 자모전이 있음을 고려할 때
패엽전에도 문자를 새긴 것이 틀림없다.
 
단군조선 시대에 화폐를 주조한 역사는,
대표적으로 BC 2133년에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주조(鑄造) 화폐인 원공패전(圓孔貝錢)이 있으며,
BC 1680년에 가림토의 자음과 모음을 새긴 주조 화폐로서
소위 첨수도(尖首刀)나 명도전(明刀錢)이라 불리는 자모전(子母錢)이 있고,
BC 1426년에 주조된 패엽전이 있으며,
BC 642년에 철전(鐵錢)이 되는 주조 화폐인 방공전(方孔錢)이 있다.
 
단군조선의 화폐주조의 역사는 BC 2133년부터 BC 240년경
단군조선 종기(終期)까지 줄곧 이어진 것이 되는데,
위 화폐 외에도 많은 형태의 주조화폐가 있었다고 보인다.
 
처음에는 동전(銅錢)을 주조하다가 나중에는 철전(鐵錢)을 시도한 것이 되는데,
방공전은 주로 철전이 되며 그 이전의 화폐와 이후에 지속적으로 발행된
소위 명도전(明刀錢)은 동전(銅錢)이 된다.
 
 
 
BC 1420 <닥종이(韓紙)와 칡옷(葛衣)를 만들다>
 
16년에 공창(工廠)을 세우고,
닥나무껍질로 종이를 만들고 칙껍질로 베를 짜 옷감을 만들었다
 
 
한지(韓紙) 제조의 역사가 최소한 3,400년을 넘는다.
 
닥나무의 껍질로 종이를 만들었으므로
종이에 붓으로 글을 쓴 것이 되어 이때 이미 먹과 붓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먹이 있었다는 것은 BC 1766년경 고죽국의 임금이 묵태(墨胎)로서
먹 묵(墨)자를 쓰고 있어 먹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에 이르러 먹으로 글씨를 쉽게 슬 수 있는 한지를 생산한 것이 된다.
 
실제로 명도전에 새겨진 글자도 닥종이라고 한 글자가 있기도 한 바,
단군조선 시대에 한지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된다.
 
칡 껍질로 베를 짜서 옷감을 생산하였는데,
아마도 여름철 옷으로 입은 것이 아닌가 한다.
 
겨울철에는 누에실로 만든 비단옷이나 털옷(毛衣)이나 깃털옷(羽衣)을 주로 입었던
것으로 되는데, 여름철에는 삼베옷(麻衣)이나 칡옷(葛衣)을 입은 것이 된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후한(後漢) 시대인
서기105년에 채륜(蔡倫)이 처음 종이를 만들었다라고 하나,
단군조선의 종이제조 역사와 비교하면 1,300년 뒤이며
그 기술이 극히 일천한 것이 되는데,
채륜이 단군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종이제조 기술을 접하여
세상에 공개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BC 1412 <남상인(南裳人)이 입조(入朝)하다>
 
기축년(己丑年)에 남상인(南裳人)이 조정에 들어왔다.
 
 
남상(南裳)은 남장(南掌)의 오기가 되는데,
지금의 베트남 등 중국대륙의 서남쪽에 위치한 운남성(雲南省) 지역에 있던 나라이다.
 
베트남은 원래 중국대륙의 동남쪽에 있던 주나라 제후국이 된 월(越)나라가
서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이루어진 나라가 된다.
 
베트남 즉 월남(越南)은 그들의 역사에서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손이라 한다.
 
입조(入朝)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조정(朝廷)에 들어왔다는 뜻도 있고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한다는 뜻도 있는 것이 되는데,
단순히 조공(朝貢)을 바치려고 조정(朝廷)에 들어왔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 시대는 각 지역간의 문화교류가 정체된 것이 아니라
환국(桓國)시대부터 형성된 9족(族)과 12한국(桓國)의 후예들이
종주국인 단군조선을 방문하였던 것인데,
이는 단군조선 시대에도 배달국의 신시제도(神市制度)를 이어
10년마다 신시(神市)를 베풀어
사해제족(四海諸族)을 초청하였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며
단군조선은 거대한 해상세력 국가인 것이다.
 
 
BC 1410 <조선소(造船所) 건립>
 
신묘년(辛卯年)에 조선소(造船所)를 송화강(松花江) 남쪽 기슭에 세웠다.
 
 
BC 2131년에 살수(薩水)의 상류에 조선소(造船所)를 설치한 적이 있으며,
BC 1846년에 송화강의 기슭에 작청(作廳) 즉 공장을 설치하여
배(舟)와 노(楫) 등 관련 기물(器物)을 많이 만들었는데,
약400년이 지난 이때 조선소를 설치한 것이다.
 
살수(薩水)는  해성(海城)의 남쪽으로 흘러 발해로 남하(南下)하는 강이며,
고구려 시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송화강 유역에 설치한 조선소는 주로 강에 띄우는 배를 만든 것이 되고,
살수의 상류에 설치한 조선소는 살수(薩水)라는 강과
발해만이나 황해(黃海)를 운행하는 배를 만든 것이 된다.
 
 
BC 1401 <殷邑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殷으로 바꾸다>
 
BC 1401년, 도읍을 형읍에서 은읍(殷邑)으로 옮기고
이를 기회로 나라 이름을 은(殷)으로 고쳤다.
 
 
 
BC 1391 <지남차(指南車)와 목행마(木行馬) 발명>
 
경술년(庚戌年)에 황운갑(黃雲甲)이 지남차(指南車)와 목행마(木行馬)를 발명하였다.
 
지남차는 남쪽을 가리키도록 만든 장치를 가진 수레가 되는데,
자석(磁石)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 된다.
 
목행마는 나무로 걸어다니게 만든 목마(木馬)가 된다.
 
BC 1846년에 송화강가에 설치한 작청(作廳)에서 많은 기계들을 만들었는데,
그 발명품들 중 목류마(木流馬)가 여기서 말하는 목행마(木行馬)와
거의 같은 작동원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목류마는 나무로 만들어 물이 흐르듯 움직이는 목마로서
다리가 움직이지 않고 발에 바퀴등을 달아 굴러가게 만든 것이 되고,
목행마는 나무로 말이 걷는 모양으로 이동하게 만든 목마가 된다.
 
서방에서는 BC 1100년경에 일어난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를 사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사가 있다.
 
 
 
BC 1382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만들다>
 
기미 54년에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 태양력)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 고조선의 환력(桓曆))을 만들었다.
 
 
주천력(周天曆)은 하늘을 일주(一週)하는 태양과 별들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月曆)으로서 태양력(太陽曆)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된다.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은 태호복희가 창안한 8괘를 이중(二重)으로 겹친
64괘나 삼중(三重)으로 겹친 512괘 등을 해석한 역해설서(易解說書)가 된다.
 
64괘를 논한 것이 소위 역경(易經) 또는 주역(周易)이다.
 
이 팔괘상중론은 춘추시대가 되는 BC 500년경에 지으진 주역보다 약900년이 앞선다.
 
 
 
BC 1380 <은(殷)나라의 조공(朝貢)>
 
신유년(辛酉年) 고홀(固忽) 원년에 은나라가 사절을 보내 사례하였다.
 
 
 
BC 1377 <북흉노(北匈奴)의 반란>
 
갑자년(甲子年)에 북흉노(北匈奴)가 변방에서 어른 노릇을 하므로
군사를 보내 물리쳤다.
 
 
BC 1370 <해가 무지개를 뚫다>
 
신미년(辛未年) 가을에 하얀 태양이 무지개(虹)를 뚫었다.
 
 
 
BC 1353 <은(殷)나라 서울  시찰>
 
무자년(戊子年)에 천왕께서 서남쪽으로 행차하여
은(殷)나라 서울에 이르러 다음달에야 돌아왔다.
 
 
 
BC 1345 <영고탑(寧古塔) 이궁(離宮) 건립>
 
병신년(丙申年)에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이궁(離宮)은 별궁(別宮)이 되는데,
천재지변이나 전쟁 또는 화재 등 변고가 있을 때 임시수도로 삼은 곳이 된다.
 
영고탑은 동만주(東滿州)에 위치하며,
위치적으로 대진국(大震國, 발해)의 초기 수도 부근에 있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 진한(眞韓)의 이궁으로는 상춘(常春)의 신경(新宮)과
조양(朝陽)의 장당경(藏唐京)과 영고탑(寧古塔)이 있는 것이 된다.
 
 
 
BC 1341 <구환(九桓)의 지도를 제작하다>
 
경자년(更子年)에 공공(共工) 공홀(工忽)이
구환(九桓)의 지도(地圖)를 제작하여 바쳤다.
 
 
 
 
BC 1338 <태자(太子) 소태(蘇台) 즉위>
 
계묘년(癸卯年)에 세상이 아직 평안하지 못한데 고홀(固忽) 천왕께서 붕하시고
태자(太子) 소태(蘇台)가 즉위하였다.
 
 
세상이 아직 평안하지 못하다는 것은
당시 단군조선의 정세가 조금 혼란스러웠다는 것인데
아마도 제후들이나 욕살들의 군사적 행동에 질서가 흐트러져
천왕의 명령이 잘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BC 1289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 고등(高登)이
BC 1291년에 은나라 제22대 무정(武丁)이 점령한 바 있던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서북의 땅을 군사적으로 차지하여 강성하게 되었으며,
이때 고등이 소태 천왕께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천왕은 이를 위태롭다하여 허락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고등이 거듭하여 청하므로 마침내 허락하여
두막루(豆莫婁)라 부르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천왕의 명령이 고등의 요청을 묵살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단군조선의 정세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귀방과 서북의 땅은 당시 단군조선의 서남쪽 또는 서쪽에 해당하며
단군조선의 봉군후국(封君侯國)인 구려(句麗)와 몽고리(蒙古里)
그리고 환국시대부터 자치세습의 조공국인 선비(鮮卑) 등의 땅이 되는데,
우현왕(右賢王)의 우(右)는 곧 서방(西方)을 나타낸다.
 
두막루(豆莫婁)라는 말은 “큰마루, 큰머리”를 이두식으로 표기한 글자가 되는데,
서기전108년에 졸본(卒本)의 천자(天子)이던 한(汗)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동명(東明)이라 칭하며 위씨조선을 멸망시킨 한(漢)나라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북부여를 부흥시킨 고두막(高豆莫)의 두막(豆莫)이
곧 “큰마루, 큰머리”를 표기한 것으로 두막루(豆莫婁)의 약자가 된다.
 
 
 
BC 1337 <은(殷)나라의 조공>
 
갑진년(甲辰年) 소태(蘇台) 원년
은나라 왕 소을(小乙)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하였다.
 
 
 
 
BC 1335 <여심심을 滄海君으로 삼다>
3년에 공신(功臣) <여심심黎尋心>을 창해군(滄海君)으로 삼았다.
 
 
 
BC 1333 <우사(雨師) 소정(小丁)이 번한(番韓)에 봉해지다>
 
무신년(戊申年)에 우사(雨師) 소정(小丁)을 번한에 보(補)하였다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우사(雨師)의 직을 수행하던 소정(小丁)을
번한(番韓)에 봉하도록 소태 천왕께 임명하도록 권한 데에 따른 것이 된다.
 
즉, BC 1333년에 번한(番韓) 해모라(奚牟羅)가 죽자 그 아들을 세습하게 하지 않고,
지모(智謀)가 뛰어났던 고등(高登)이 단군조선 조정(朝廷)의 우사(雨師)이던
소정(小丁)을 번한(番韓)에 봉하도록 소태 천왕께 청을 올려 이룬 것이 된다.
 
 
 
BC 1325 <거인 절인적>
 
13년에 동해빈(東海濱)에 역사(力士)가 있었는데,
키가 아홉자나 되고 천 사람의 힘을 가졌다 하여,
임금께서 사람을 시켜 불러다가 수변장(守邊將)을 삼으니,
절인적(絶人跡)이라 불렀다.
 
 
 
 
BC 1291 <은 무정이 귀방을 침공하다>
 
경인 47년(BC 1291)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葷粥(훈죽)=薰育(훈육), 현 섬서성 서북부)을 쳐 승리하고는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용방(龍方) 현 산서성(색륜산 지역))와
영지(令支=토방(土方), 현 하북성 남부지역)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다.
 
우리에게 대패하고 화친을 청하며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BC 1291년은 殷 자무정(子武丁)35년이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조선이 은나라 무정 8년에 해당하는 BC 1286년경에
아사달(阿斯達)을 수도로 한 단군조선이 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이때는 단군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BC 1285년에 색불루(索弗婁) 천왕이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서 즉위하여
후기 단군조선을 시작한 것이 된다.
 
제왕운기에서 말하는 은나라 무정 8년은 연대기적으로 맞지 아니하며
오히려 3년상을 치른 것을 고려하면 무정 40년이 된다.
 
즉 서기전1325년에 은나라 왕 소을(小乙)이 죽고
BC1325년에 무정이 즉위하여 40년째인 해가 BC1286년이 되는 것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나이가 1908세라 적은 것은
서기전2333년부터 서기전426년까지로서
아사달시대와 백악산아사달 시대를 합한 기간이 되며,
서기전425년부터 시작된 장당경(藏唐京) 시대 이전이 되는 것이다.
 
 
 
 
 
 

<商代 形勢圖>
 
 
BC 1289 <개사원 욕살 고등(高登)의 은나라 정벌 등 군사적 행동>
 
임진 49년(BC 1289)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군사를 잠입시켜
귀방을 멸하였다.{은나라 무정에게 빼앗긴 땅을 회복하였다는 의미}.
 
일군국(一群國)과 양운국(養雲國)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은 많은 군대를 장악하고,
서북의 땅을 공략하였는데 그세가 매우 강성하였다.
 
(고등은 마침내) 사신을 보내 자신을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줄 것을 청하였다.
 
단제께서는 나라의 위기로 생각하여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간청으로 마침내 허락하여 그를 우현왕으로 봉하고,
그 지역을 두막루라 하였다.
 
 
이후 두막루의 후예인 고두막한(高豆莫汗, 동명성왕)이
BC 195년경 고구려의 전신인 동명왕국(東明王國)을 세운다.
일명 서국(西國)이다.
 
이후 고두막한(高豆莫汗, 동명성왕)의 후손인 고추모(高鄒牟, 고주몽)가
BC 37년경 고구려를 세우고 고토 회복에 나선다.
 
 
BC 1291년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병사를 일으켜 귀방(鬼方)을 정복하고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永支) 등의 나라를 침범하니,
BC 1289년 임진년(壬辰年)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겼으며,
은나라 무정의 군사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러 병사를 보내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이때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西北)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해졌다.
 
이에 여러차례 소태 천왕께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태 천왕이 이를 위태롭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서북의 땅은 귀방, 색도, 영지 등의 서북의 땅을 가리키며,
태원(太原)의 북쪽에 위치한 구려(句麗)의 서부지역
과 몽고리(蒙古里)와 선비(鮮卑) 등의 땅이 된다.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습격하다>
 
BC 1289년경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고등(高登)과 함께
은(殷)나라가 정벌하였던 색도(索度)를 역공하여 정벌한 뒤,
이어서 몸소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일군국(一群國)과 양운국(養雲國)의 조공>
 
BC 1289년 일군국(一群國)과 양운국(養雲國) 두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죽이다>
 
 
BC 1289년경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은나라의 북박(北亳)을 습격한 뒤,
병사들을 탕지산(湯池山)에 주둔시키고 자객을 보내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 등을 함께 싣고 돌아왔다.
 
즉 상장 서여가 번한 소정을 자객을 보내어 살해한 것이 된다.
 
아마도 천왕의 권세가 약해진 시기에 번한 자리를 차지할 욕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실재역사로 보아 상장 서여는 해성(海城)의 욕살(褥薩)이 되었던 것이며,
BC 1285년에 제22대 색불루 천왕에 의하여 번한(番韓)에 봉해진 인물이 된다.
 
탕지산(湯池山)은 역사상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이 있는 곳으로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에 속하는 탕지(湯池)에 있는 산이며,
지금의 난하 중하류 지역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BC 1287 <고등(高登)이 모반(謀叛)을 일으키다>
 
갑오년(甲午年)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開城)에 웅거하면서
소태(蘇台) 천왕에게 항거하였다.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고등(高登)을 토벌(討伐)하러 가다>
 
BC 1287년에 고등(高登)이 모반(謀叛)을 일으키자
마한(馬韓) 아라사(阿羅斯)가 군대를 일으켜 고등을 토벌하고자 하여
홍석령(紅石嶺)의 경계지점에 이르렀는데,
소태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여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토벌을 멈추었다.
 
 
<개사원 욕살 고등(高登)이 우현왕(右賢王), 두막루(豆莫婁)로 봉해지다>
 
BC 1287년 고등이 모반을 하고 있던 중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거듭 청하므로
소태 천왕이 마지못하여 이를 허락하고 두막루(豆莫婁)라 부르게 하였다.
 
 
 
 
BC 1286 <색불루의 삼조선>
 
을미 52년(BC 1286)에 우현왕 <고등高登>이 죽고
그 손자인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을 세습하였다.
 
단제께서 나라 안을 순수하다가 남쪽 해성(海城)에 이르러
원로들을 모아 놓고 제천행사를 열었다.
 
이에 오가를 불러 놓고 그들과 더불어 전위를 논하였다.
 
단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몸도 늙고 힘들어 서우여에게 정사를 넘기고자 한다시며
살수지역 사방 100리를 (서우여에게) 봉하였다.
 
그리고 (서우여를) 섭주(攝主)라 명하고, 그 지역을 기수(奇首)라 하였다.
 
우현왕 (색불루가) 이 소문을 들었다.
 
(색불루는) 사신을 보내어 단제에게 (전위를) 중지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끝내 단제는 (색불루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이에 우현왕(색불루)은 자신의 군사들과 렵호 수천을 거느리고
마침내 부여신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 참고  <색불루의 혁명>
 
우가(牛加), 계가(鷄加) 중심의 단군세력은
색불루의 신흥 세력에 의하여 권력이 이양됨.
 
색불루의 등장은 중국과 빈기(섬서성 순읍현, 하남성 안양현 하, 상(은),
주나라의 발상지)를 놓고 혈전을 벌이게 됨.  
 
단제는 부득이 나라의 상징물인 옥(옥쇄), 책(법전),
국보(천부인=청동검, 청동방울, 청동거울)를 (색불루에게) 전하였다.
{색불루의 혁명을 수용하고 단군으로 인정함.}
 
그리고는 서우여를 폐서인하였다.
{번한(番韓)의 실추}
단제께서는 아사달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임종하였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 그리고 고죽국 왕의 자손들은 고죽국을 떠나
동쪽 바닷가 동해빈에 살았다.
{색불루의 험독(백악산 아사달) 입성으로 난하하류 인근에 있던 고죽국 세력은
동해(발해) 해변으로 이주함.
그리고 스스로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였다.}
 
 
※ 참고 <귀방(鬼方), 훈육(葷粥), 용방(龍方), 여방(呂方), 토방(土方),
고죽(孤竹)>
 
귀방(鬼方)은 흉노(匈奴)를 말한다.
<왕국유王國維>의「귀방곤이험윤고(鬼方昆夷獫狁考)」에 의하면
 
'은(殷), 주(周) 시대의 외만(外蠻)의 귀방(鬼方), 곤이(昆夷), 훈육(薰育)과
전국시대(戰國時代) 이래 진(秦), 한(漢)의 위협이 되었던 흉노(匈奴)와 험윤(獫狁)은
같은 민족이지만 확증은 없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흉노(匈奴)는 분명 중국의 북부를 지배하던 동이족이며
단군조선 진한(辰韓)의 일부 세력이다.
 
중국은 진한을 일명 숙신(肅愼)이라 칭한다.
흉노(匈奴)는 요(堯), 순(舜)시대 이후 다른 명칭으로 불렸다.
 
요(堯), 순(舜) 때에는 산융(山戎) 또는 훈죽(薰粥), 하(夏)때에는 순유(淳維),
그리고 은대(殷代)에는 귀방(鬼方)이라 불렸다.
 
그 후 진(秦), 한(漢) 때에는 흉노(匈奴)라 칭(稱)해졌으며
연(燕)나라와 진(秦)나라의 장성은
이 흉노(匈奴)와 고조선(番韓)을 막기 위해 쌓은 성(城)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상(商)왕조의 <무정武丁>은 귀방(鬼方) 뿐만이 아니라 강방(羌方)도 정벌하였으며
또한 남쪽의 형만(荊蠻)도 공격하였다고 한다.
 
위치로는 귀방(鬼方)과 강방(羌方)은 서북쪽, 형만(荊蠻)은 남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 사마천의 기록은 위 <단군세기, 21대 단군 소태>의 기록과 차이점이 없다.
 
이 시기에 중국의 북서부와 북동부는 고조선과 흉노
그리고 중국 세력과의 접전(接戰)지역이었던 것이다.
 
북서부(北西部)는 진한(辰韓) 세력인 흉노(匈奴)와의 전쟁이었고,
북동부(北東部)는 번한(番韓) 세력인 고죽국(孤竹國)과의 전쟁지역이었던 것이다.
 
《역괘(易卦) · 효사(爻辭)》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왕조 고종(高宗, 무정武丁)은 귀방(鬼方)을 정벌하러 나선지 3년만에
귀방(鬼方)을 이겼고, 이후 양국의 백성들은 서로 혼인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귀방(鬼方)은 곤융(昆戎), 낙천(洛泉), 곤이(昆夷), 곤이(緄夷), 관이(串夷)등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상(商)시대에는 크고 작은 주변국을  “방(方)”이라고 칭하였다.
 
그 예로 토방(土方), 여방(呂方), 고방(苦方), 용방(龍方), 마방(馬方), 촉방(蜀方),
우방(盂方) 등을 들 수 있다.
 
귀방(鬼方), 흉노(匈奴)에 대한 중국 고대에서 불리던 칭호는 다음과 같다.
 
遠古時代-黃帝時期匈奴稱 葷粥(훈죽).(音:熏育(훈육))
上古時代-堯舜時期稱 葷粥(훈죽) “山戎(산융)”, “玁狁(험윤)”. (音:险允(험윤))
夏朝-葷粥(훈죽)
商朝-鬼方(귀방)
西周-昆夷(곤이), 犬夷(畎夷(견이), 玁狁(험윤)
春秋-戎狄(융적).
戰國-胡(호), 匈奴(흉노) 
 
서쪽의 견이는 중국 중원으로 진출하였다.
 
이 시기가 바로 고등(高登)의 귀방(鬼方) 회복 시기이다.
<고등高登>은 번한 서북부의 신흥세력이며 색불루는 고등의 손자이다.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고등高登>은
번한(番韓), 진한(辰韓) 중심인 고조선의 판도를 바꿔 놓는다.
 
<고등>의 뒤를 이은 <색불루>는 혁명으로 단군의 자리에 오르고,
삼한을 재통일한 후 삼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색불루는 이후 고죽국의 번한 세력을
산동반도와 회하 지역(일명 회대지역)으로 이주시킨다.
 
<고등高登>, <색불루索弗婁>의 후손들은 후에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다.
 
 
 
 
BC 1285 <고등왕의 사당을 짓다>
 
병신원년(BC 1285)에 단제께서는 녹산에 성을 쌓고(修築 鹿山) 관제를 개편하였다.
 
가을 9월(秋九月)에는 친히 장당경에 행차하여
고등왕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렸다.
 
11월에 (단제께서는) 친히 구환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전쟁을 거친 뒤
은(殷)나라의 수도(현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 은허 발굴지역,
초기의 수도는 하북성 정주(定州))를 격파하고 화친을 맺었다.
 
다음 해 2월(明年 二月)에 (은나라를) 하(河, 淮河를 말함)의 상류까지 추격하였다.
 
그리고는 승리의 축하를 받았다.
 
변(弁)의 백성들을 회대지역으로 이주시켜그곳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국가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BC 1285 <奇子조선(번조선) 건국>
 
기자(奇子)의 성(姓)은 환(桓)이며 이름은 서여(西余)이다.
전단조(前檀朝) 19세 단제 <종년縱年>의 아우인 청아왕(菁莪王)
<종선縱鮮>의 증손(曾孫)이다.
 
첫 해에 미서(微西)에게 명을 내려 정전법(井田法)을 만들어 공포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일에 힘쓰도록 독려하였으며,
납세의 의무를 알게하여 소득의 9분의 1을 바치게 하였다.
 
맏아들 아락(阿洛)을 태자로 삼고 운양후(雲養侯)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그 다음 세 아들에게 각각 성을 내려(賜姓) 한(韓)․선우(鮮于)․기(奇)라 하였다.
 
기자(奇子)가 세운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수도 평양이 갈석산 인근에 있는
今 북경시 남서쪽 보정시(保定市)인근이다.
 
 
기자(奇子)조선(번조선)의 건국은 색불루단제 원년(BC 1285)이고
솔나 39년(BC 1112)은 箕子가 1120년에 망명하여
奇子조선의 제후국인 수유국을 세운 해이다.
 
 
 
 
BC 1282 <금팔조(禁八條) - 팔조금법(八條禁法)>
 
기해년(己亥年)에 진조선(眞朝鮮)이 천왕의 칙서(勅書)를 전하여 가로되,
 
“그대들 삼한(三韓)은 천신(天神)을 위로 받들고
무리들을 직접 교화하여 번성하게 하라”하였다.
 
이로부터 백성들에게 예의, 누에치기, 베짜기, 활쏘기, 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조(禁八條)를 만들었다.
 
 
금팔조 즉 소위 팔조금법은 아래와 같다.
 
1. 상대가 죽이면 바로 그때에 죽여서 갚는다 (살인을 금한다) [살인죄-사형]
2. 상대가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賠償)하게 하라 (상해를 금한다)
    [상해죄-벌금(손해배상)형]
3. 상대가 도둑질 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 그 집의 노예(奴隸)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婢)이 되게 하라 (절도를 금한다) [절도죄-노비형]
4. 소도(蘇塗)를 훼손한 자는 가두어 두라 (소도훼손을 금한다)
   [신성모독죄, 손괴죄-금고형]
5. 예의(禮儀)를 잃은 자는 군(軍)에 복무하게 하라 (무례를 금한다)
   [무례죄-군복무형]
6.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負役)을 시켜라 (게으름을 금한다)
   [근로해태죄-부역형]
7. 음란(淫亂)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리라 (음란을 금한다)
   [음란죄-태형]
8. 사기(詐欺)치는 자는 훈방(訓放)하라 (사기를 금한다) [사기죄-교육형]
이상의 죄를 지은 자는 공표(公表)한다.
만약,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공표하는 것을 면하여 준다.
 
 
 
BC 1280 <영고탑으로 천도를 건의하다>
 
신축 6년에 신지 <륙우陸右>가 상소(奏)를 올려 말하기를
 
"아사달(阿斯達)은 천년간 단제들의 위업을 이룬 땅이지만 이제 그 운이 다하였고,
영고탑(寧古塔)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능가하오니
청하옵건대 이곳에 성을 쌓고 천도하시지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단제께서는 불허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신도(新都)(난하의 험독, 백악산 아사달)에 궁(宅)이 있는데,
다시 어떻게 타지역으로 간다는 말이냐."라고 하였다.
 
 
 
BC 1280 <은나라의 조공>
 
BC 1280년에 은(殷)나라 왕 무정(武丁)이
번한(番韓)을 거쳐 천왕께 글을 올리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BC 1266 <남국(藍國)이 엄독홀에 진출하다>
 
을묘년(乙卯年)에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아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남국(藍國)은 BC 2333년경에 세워진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치우천왕의 후손들이 봉해진 나라가 되며,
산동지역의 서부에 위치하고 청구국(靑邱國)의 서쪽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청구국은 치우천왕이 도읍한 지역이다.
 
고죽국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서 은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지금의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한 나라가 되는데,
남동쪽에 위치한 남국(藍國)과 합공(合攻)으로 남하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진출한 것이 된다.
 
엄독홀(奄瀆忽)은 태산(泰山)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서
은나라 서울인 은허(殷墟) 즉 박(亳)의 동쪽에 위치하며,
BC 1236년에 세워진 엄국(淹國)의 땅이 된다.
 엄(淹)은 엄독(奄瀆)을 포함한 지역이 될 것이다.
 
 
 
BC 1266 <빈-기의 땅에 여(黎)를 세우다>
 
BC 1266년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여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遺民)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더불어 은나라 집안의 제후들 사이에 섞여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皇帝)의 교화(敎化)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까지 미치게 되었다.
 
빈기(邠岐)의 땅은 빈(邠)과 기(岐)로서
은나라의 제후국이던 주(周)나라가 일어난 곳인데,
주나라가 번창하기 이전이 되는 이때 여파달이 빈기의 땅에 진출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하였던 것이며, 서융(西戎)과 섞여 다스린 것이 된다.
 
 
BC 1250 <신독(申督)의 반란>
 
신미년(辛未年)에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병력을 믿고 난(亂)을 일으켰는데,
이에 천왕이 잠시 영고탑(寧古塔)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들이 이에 따랐다.
 
 
 
BC 1237 <황숙(皇叔) 고불가(固弗加)를 낙랑홀(樂浪忽)에 봉하다>
 
갑신. 아홀(阿忽) 원년(BC 1237)에 단제께서는
숙부(叔父)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을나(高乙那)를 신도후(神島侯)에 봉하다>
 
BC 1237년경에 태자 연나(延那)의 아우 을나(乙那)를 신도후(神島侯)에 봉하다.
 
아홀 천왕이 숙부 고불가를 낙랑홀 임금으로 봉하면서
작은 아들 을나를 지금의 제주도(濟州道)가 되는
신도(神島)의 제후로 봉한 것이 되는데, 직위로 보아 군(君)에 해당된다.
 
즉 제주(濟州) 고씨(高氏)의 시조는 고을나(高乙那)인 것이며,
단군조선의 종실이 되고, 후대 고구려 고씨와 같은 씨족인 것이다.
 
아홀 천왕의 작은아들 고을나(高乙那)가 봉해진 신도(神島)인 제주도에
선량한 신하(臣下)인 양을나(良乙那)와 으뜸 백성인 부을나(夫乙那)도
각 제주 양씨(梁氏)와 제주 부씨(夫氏)의 시조가 되었다 하는데,
여기서 을나(乙那)는 아기(嬰兒)라는 말이 되며,
후대에 출현하는 김알지(金閼智)의 알지나 누루하치의 하치와 뜻이 통하는 말이 된다.
 
알지와 하치는 모두 아기 또는 아지를 나타낸 이두식 표기이며
새끼(子息)라는 말로서 후손(後孫)이라는 뜻을 가진다.
 
양씨(良氏)는 후대에 양씨(梁氏)로 바뀐다.
 
 
<은나라를 정벌하다>
 
BC 1237년 천왕께서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남국군(藍國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사가 은(殷)나라 땅에
여섯군데의 읍(邑)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결정을 보지 못하므로,
이에 군사를 진격시켜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신독(申督)의 반란진압과 환궁(還宮)>
 
가을 7월(秋七月)에 신독(22대 색불루 단군 때 반란을 주도했던 인물)을 주살하고
환도하여 포로들을 석방해 주도록 명하였다.
 
BC 1250년 신독의 반란으로
색불루 천왕이 백성들과 함께 이궁(離宮)인 영고탑(寧古塔)으로 피난하였다가
대를 넘겨 13년째인 아홀 천왕 때인 BC 1237년 가을 7월에
신독을 주살하고 환궁하였던 것이며,
반란자 신독의 무리로서 포로가 된 자들을 석방하였던 것이다.
 
 
 
BC 1236 <엄(淹), 서(徐), 회(淮)를 봉하다>
 
을유 2년(BC 1236) 람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주관하여
청구(산동성을 말함)의 임금, 구려(산서성을 말함)의 임금과
주개(周愷, 주(周)나라 발상지 기산(岐山)으로 추정)에서 회동을 갖고,
몽고리 병사와 합세하여 은(殷)나라 오지 깊숙이 침입하여 곳곳에 있는
은나라 성(城)과 책(柵)을 모두 격파하였다.
 
(이후) 회대의 땅을 평정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각각 제후를) 봉하였다.
 
포고(蒲古)씨는 엄주(淹州)(산동성 서남부 곡부(曲阜)로 추정)의 제후로 봉하고
영고(盈古)씨는 서주(徐州)(산동성 동쪽, 강소성)의 제후로 봉하고,
방고(邦古)씨는 회하(산동성 남쪽 회하 지역)의 제후로 봉하였다.
 
은나라 사람들은 겁에 질려 바람에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기만 할 뿐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엄국(淹國)은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엄이(淹夷)라 하는 나라이며,
태산(泰山)을 중심으로 한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것이다.
 
태산지역이 주(周)나라의 제후국인 노(魯)나라
또는 제(齊)나라에 속하게 된 때에 엄국이 축소되거나 망한 것이 된다.
 
서국(徐國)은 산동지역의 남방에 위치한 나라로서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서이(徐夷)라 하는 나라이며,
후대 주(周)나라를 압박하여 36국(國)의 종주(宗主)가 된
서언왕(徐偃王)이 다스리던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BC 1236년에 세워져 BC 512년 오(吳)나라의 합려왕에게 망하기까지
725년의 역사를 가진다.
 
회국(淮國)은 BC 2267년에 도산(塗山)회의가 열렸던 회수 지역에
BC 1236년에 세워진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회이(淮夷)라 하는 나라이며,
BC 221년경 진시황의 진(秦)나라에 망하기까지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이다.
 
부도지(符都誌)에서 부루씨(夫婁氏)가 일찍이 운해족(雲海族)과 긴밀히 연락하여
하토(夏土)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더니
이도(異道)가 점차 번성하게 되어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
 
여기서 부루씨는 곧 색불루 천왕의 후대 시기의 천왕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운해족은 황하 이남의 산동지역의 황족(黃族)과 남족(藍族) 및
회수(淮水) 지역의 남족(藍族) 등 내륙의 소위 동이족(東夷族)과
양자강 유역의 적족(赤族, 南蠻)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제22대 색불루 천왕이 BC 1285년에 즉위하자마자
그해 11월에 직접 은(殷)나라를 정벌하였고,
BC1266년에는 서남방의 빈기(邠岐)의 땅을 점령하여 여(黎)라는 제후국을 세웠으며,
이후 아홀 천왕 때인 BC 1237년과 이듬해에 대대적으로 은(殷)나라 땅을 공략하면서
엄(淹), 서(徐), 회(淮)라는 제후국을 산동지역과 회수(淮水)지역에 걸쳐 세우면서,
하(夏)나라의 대를 이은 은(殷)나라를 통제하고 통합하려는 차원에서
전초기지로 삼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이미 이도(異道)가 번성하여 단군조선의 정치문화제도에서 벗어나,
은(殷)나라도 하나라의 제도를 답습함으로써 독자적으로 폐쇄정치를 하고,
이후 주(周)나라를 거치면서 춘추전국시대로 말마암아
이탈(離脫)이 심화되고 고착화되어
더 이상 되돌리기에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던 것이 된다.
 
춘추(春秋)시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주(周)나라는 천자국(天子國)으로서
단군조선을 천왕(天王)의 나라인 상국(上國)으로 모시고,
주나라의 제후국들은 주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모신 정치체제를 유지하였으나,
춘추시대 이후 패권주의(覇權主義)가 남발하면서
종주국(宗主國)인 주(周) 조정을 무시하게 되고,
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아예 스스로 천자(天子)
즉 왕(王)이라 칭하면서 전쟁을 일삼게 되니,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후 진시황의 출현으로 주(周)나라 땅이 평정되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요순하은주(堯舜夏殷周)의 상국(上國)이던 단군조선의 후계국을
상국(上國)이 아닌 전쟁으로 차지하려는 정벌(征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왕도(王道)와 인도(人道)가 사라진 말세(末世)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로써 이후에는 신제자(臣弟子)의 나라였던
고대중국(古代中國) 땅에서 일어난 나라들이,
군사부(君師父)의 나라였던 고대한국(古代韓國)을 오랑캐나 미개인으로 날조함으로써
그들의 종주(宗主)이자 스승(師)이자 조상(祖上)을 업신여기는
패륜아적(悖倫兒的)인 족속이 되어 버린 것이다.
 
 
 
BC 1233 <영고탑(寧古塔) 천도(遷都)를 건의하다>
 
무자년(戊子年)에 마한(馬韓) 여원흥(黎元興)이 명을 받고
진조선(眞朝鮮)의 도읍인 백악산아사달에 들어가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간하였는데,
천왕이 마한(馬韓)과 번한(番韓) 및 오가(五加)들을 불러서 불가하다며 따르지 않고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BC 1280년에도 신지(臣智) 육우(陸右)가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한 적 있었으며,
 
47년이 지난 BC 1233년에도 마한(馬韓) 여원흥이
영고탑으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나, 천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BC 1161 <황숙(皇叔) 고불가(固弗加)를 섭정(攝政)으로 삼다>
 
경자년(庚子年) 연나(延那) 2년에 아우 솔나(率那)를 태제(太弟)로 세우고,
황숙(皇叔) 고불가(固弗加)를 섭정(攝政)으로 삼았다
 
 
황숙(皇叔) 고불가는 조부(祖父)인 색불루(索弗婁) 천왕의 아우이며,
연나(延那) 천왕에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된다.
 
섭정(攝政)이란 정치를 대신 하는 것을 의미하는 바,
아홀 천왕이 황숙 고불가를 낙랑홀(樂浪忽)에 봉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던 것이며,
연나(延那) 천왕이 조정(朝廷)으로 불러 들여 섭정을 맡긴 것이 된다.
 
낙랑홀(樂浪忽)은 단군조선의 천왕이 직접 봉하였고
번조선의 관경 내에 속한 나라로서 해상무역의 중신지 였으며
천왕의 아우가 봉해진 나라이므로
일반적인 제후국이 아니라 군국(君國)이상의 나라가 된다.
 
후대에 나타나는 소위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은
낙랑홀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지금의 북경 남쪽 보정(保定)시 인근 지역이다.
 
번조선의 관할의 진번국(眞番國)은 지금의 북경 동쪽 지역으로
진번국의 북쪽에 구려국(句麗國)이 위치하며,
구려국과 번조선 사이에 요수인 조백신하가 있었다
 
번조선의 서쪽인 산서성 최 남단에 고죽국(孤竹國)이 소재하며,
고죽국의 남동쪽이 되는 산동반도 지역에 청구국(靑邱國)이 위치하며,
산동지역의 서부에 남국(藍國)이 위치하는 것이다.
남국(藍國)의 서부에 BC 1236년에 봉해진 엄국(淹國)이 소재하며,
남국과 청구국의 남쪽에 서국(徐國)이 소재하고
서국의 남쪽이 되는 회수 지역에 회국(淮國)이 위치하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 시대에 홀(忽)이라는 이름으로 된 땅으로는
낙랑홀(樂浪忽), 엄독홀(奄瀆忽), 안촌홀(安村忽)의 기록에 보이는데,
그 외에도 홀(忽)이라 이름이 붙여진 나라가 있었던 것이 될 것이다.
홀(忽)이란 고을(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의 군(郡)단위에 해당하는 행정단위가 된다.
원래 군(郡)이라는 글자가 자체적으로 군(君)의 나라(邦)라는 의미를 가진다.
 
 

<번조선(奇子조선)의 오덕지(五都) 및 箕子의 수유국과 백이 숙제의 고죽국>
 
산서성 요주에는  기자조선의 시발지인 기산(箕山)이 있고,
요산현(遼山縣=遼山故縣)이 있음을 요주지지(遼州地志)는 밝히고 있다.
 
 

<기자 시봉지 기산>
 
 

<요주 요산현>
 
 

<요주의 요산과 기산>
 
 
 
BC 1160 <소도(蘇塗) 제천(祭天)>
 
신축년(辛丑年)에 모든 한(汗)들이 조서(詔書)를 받들어
소도(蘇塗)를 증설(增設)하고 하늘에 제(祭)를 올렸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생기면 여기서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세웠다.
 
 
소도(蘇塗)는 지방제후국(地方諸侯國)에 거의 모두 설치한 것이 되며,
이때에 이르러 증설(增設)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의 중앙 조정에서 직할한 소도를 상소도(上蘇塗)라 한 것이 된다.
 
BC 1891년에는 12명산(名山)에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여
한웅상(桓雄像)을 모셨는데,
국선소도는 단군조선 조정에서 엄선(嚴選)하여 설치한 소도가 된다.
 
 
 
BC 1130 <천단가(天壇歌)>
 
신미년(辛未年)에 번한(番韓) 임나(任那)가
솔나 천왕의 조서(詔書)로써 천단(天壇)을 동쪽 교외에 설치하고
삼신(三神)께 제사를 지냈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을 치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께 축수하세(精誠乙奴 天壇築爲古 三神主其 祝壽爲世)
황운을 축수함이며 만만세로다(皇運乙 祝壽爲未於 萬萬歲魯多)
만인을 돌아봄이며 풍년을 즐거워하도다(萬民乙 睹羅保美御 豊年乙 叱居越爲度多)
 
 
 
※ 참고 <복골과 갑골>
 
은허(섬서성 안양현 소둔촌) 지역에서 복골(卜骨)의 흔적이 발굴되었는데,
복골이란 동물의 뼈를 불에 태워 뼈의 갈라진 모습을 보고
앞 일을 예측하는 일종의 점술(占術)이다.
 
이후 귀갑(龜甲, 거북이 등가죽)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복골이나 귀갑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을 갑골문(甲骨文)이라 한다.
 
갑골문은 점을 친 날짜, 점을 친 사람, 점을 친 내용, 판단의 결과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은허의 갑골 문화에 고조선이 일익을 담당하였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BC 1123 <기자의 감금과 미자의 탈출>
 
기원전 1123년, 주 임금이 소사(少師)인 비후(比侯) 자간(子干)을 살해하고
기자(箕子)를 감금하자 미자(微子)가 탈출해 도망쳤다.
 
 
BC 1122 <殷 멸망>
 
기원전 1122년, <희발姬發>이 군대를 일으켜 주 임금의 폭정에 항거했다.
 
주 임금은 싸움에서 패하자 스스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이로써 은나라가 망했는데, 나라가 세워진 지 612년 만이었다.
 
<희발>이 중원 지역의 우두머리에 올랐다.
 
우두머리 이름을 왕(王)이라 고치고, 주(周)나라 왕조를 세운 후,
이름을 높여 ‘무왕(武王)’이라 했다.
 
기원전 1122년(을묘), 주나라 무왕(武王) 희발(姬發)이 크게 제후들을 봉했다.
 
희씨 성을 가진 자손들 중 미치거나 정신이 나가지 않았으면
모두 작위를 내리고 땅을 찢어 주었다.
 
제나라 태공(齊太公) 강상(姜尙)이
숨어 사는 선비인 광휼(狂矞)과 화사(華士)를 무고해 살해했다.
 
 
BC 1120 <기자의 망명>
 
기자조선 임나(任那)18년(BC 1120)에 은(殷) 나라 주(紂)의 친척인
기자(箕子=子胥餘)가 주(周) 나라의 신하될 마음이 없어 동쪽으로 나오니,
강달(姜達)․궁흠(弓欽) 등 50명이 따라와 요수(遼水=西遼河)변에 이르러 머물렀다.
 
임금께서 그 사정을 가련하게 여기시고 요서(遼西)의 한 모퉁이에 거주하게 하셨다.
은(殷) 백성들 중에는 기자(箕子)를 우러러 받드는 자들이 모여 살면서
기자정(箕子井)과 기자경(箕子畊)이라 하였다.
 
기자국(箕子國)은 단군조선의 기후국(箕侯國)으로서 수유(須臾)라고도 불리는데,
천자국(天子國)인 주(周)나라의 북쪽,
천군국(天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의 서남쪽,
천군국(天君國)인 고죽국(孤竹國)의 북쪽에 위치한 나라가 되는 것이며,
서기전650년경 이후에는 주류(主流)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번한(番韓) 지역에서 읍차(邑借)로 활동하다가
BC 323년에 읍차 기후(箕詡)가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었다.
 
BC 1120년 신사년(辛巳年)에 자서여(子胥餘)가 거처를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莫朝鮮)이 이를 듣고 모든 주(州)와 군(郡)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閱兵)을 하고 돌아왔다.
 
자서여(子胥餘)는 기자(箕子)의 성명으로서 성씨가 자씨(子氏)이며,
서여(胥餘)는 그의 이름이다.
 
기자(箕子)는 기(箕)라는 땅에 봉해진 자작(子爵)을 가리킨다.
 
즉 기(箕)라는 땅에 봉해진 시조(始祖)가 자서여(子胥餘)로서
은(殷)나라의 자작인 것이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마지막 30대왕인 주(紂)의 숙부(叔父)이다.
 
주왕(紂王)은 이름을 수(受)라고도 하며 중국측 기록에서는
호(號)를 제신(帝辛)이라고도 한다.
 
고대중국의 역사기록에서 진한(秦漢) 시대 이전에 제(帝)로 붙여진 왕은
은나라의 29대왕인 제을(帝乙)과 제30대왕인 제신(帝辛)이 있는데,
왕(王)을 봉(封)하는 자리인 제(帝)의 의미와는 달리
은나라의 제을과 제신은 폭군(暴君)을 연상하게 한다.
 
하(夏)나라의 왕은 통상 후(后)라 하고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는 왕(王)이라 하는데
특히 주나라 천자(天子)는 무왕(武王), 성왕(成王) 등
모두 왕(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태행산맥(太行山脈)은 고죽국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武王)의 요청으로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도(道)로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 주었으나,
끝내 주무왕(周武王)의 신하(臣下)가 되기를 거절하고
패잔병 5,000명을 이끌고서 태행산맥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소위 서화(西華)라는 땅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막조선(莫朝鮮)은 마조선(馬朝鮮)을 나타낸 다른 표기가 되는데,
마조선의 임금인 마한(馬韓) 아도(阿闍)가
은나라 망명객인 기자(箕子)가 태행산맥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모든 주(州)와 군(郡)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閱兵)을 하고 돌아왔다는 것인데,
마한 아도가 혹시라도 기자의 소행으로
마조선 즉 마한 땅에 무슨 변고라도 일어날까 염려하여
마조선(馬朝鮮)의 각 지역을 순수하고 열병(閱兵)을 함으로써
사전(事前) 단속(團束)하였던 것이 된다.
 
이때 번조선(番朝鮮)의 임금인 번한(番韓)은 임나(任那)인데,
기자(箕子)가 태행산맥의 서북 땅으로 피하여 가는 것을
번한(番韓)이 조사하였을 만한 사건이라고 보이는 바,
당연히 번한(番韓)이 마한(馬韓)보다도
기자(箕子)의 소행(所行)을 철저히 감시(監視)하였던 것이 될 것이다.
 
이후 기자국(箕子國)은 수유(須臾)라 불리면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
BC 653년 제36대 매륵(買勒) 천왕(天王)이 파견한 군대와 연합으로
연(燕)나라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수유(須臾)라는 말은 자서여(子胥餘)의 서여(胥餘)와 통하는 말이 된다.
 
 
BC 1116 <周 武王 姬發의 죽음>
 
기원전 1116년(을유),
희발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성왕(成王) <희송姬誦>이 자리를 이었다.
 
기원전 1116년(을유), 주나라 성왕 <희송>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주공(周公) <희단姬旦>이 재보(宰輔)가 되어 정치했다.
 
 
 
BC 1114 <기자(箕子)의 은거(隱居)>
 
정해 37년 기자(箕子)가 서화(西華)로 옮겨 가서 살았는데, 인사조차도 사절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서화(西華)라는 땅은 태항산맥(太行山脈)의 서북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원래의 서화는 옛 기(箕)의 땅으로서 개봉부(開封府)의 서쪽 90리에 있었으며
이곳에 기자대(箕子臺)가 있다.
 
기자(箕子)는 단군조선의 직할영역 안으로 망명함으로써
주(周)나라의 영향력을 벗어났던 것이고,
이후 단군조선에서 제후(諸侯)로 인정받은 것이 된다.
 
원래 은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에 해당하는 천자국(天子國)으로서
은나라가 왕족 자서여(子胥餘)를 기(箕)의 땅에 자작(子爵)으로 봉하였는데,
이는 천하왕이 봉한 제후로서
또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으로부터도 제후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즉 기자는 단군조선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단군조선의 직속 제후가 되는 것이다.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은거하였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망한 은(殷)나라의 왕족이자 제후(諸侯)로서
주(周)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절하고 주나라 영역을 벗어난 땅에
망명(亡命)한 처지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보인다.
 
그러나 이후 기자(箕子)는 단군조선의 문화제도를 접하면서
단군조선의 제후로서 활동하였던 것이 된다.
 
특히 기자는 사사(士師)였던 왕수긍(王受兢)에게 부탁하여
단군조선의 경전의 하나인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단목판에 새기게 하고서 읽었다라고
대진국(大震國, 발해) 제3대 문황제(文皇帝)가
대흥(大興) 3년인 서기739년 3월 15일에 지어
태백산(白頭山) 보본단(報本壇) 석실(石室)에 보관한
삼일신고봉장기(三一神誥奉藏記)에 전한다.
 
 
 
※ 참고 <기자(箕子), 그는 누구이며,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은 맞는 역사인가?>
 
                                       
<다음 내용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린 글을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기자(箕子)는 중국 은(殷)의 군주인 문정(文丁, 太丁)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간언(諫言)을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 척을 하여 유폐(幽閉)되었다.
 
은(殷)이 멸망한 뒤 석방되었으나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주(周)를 벗어나
북(北)으로 이주하였다.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함께 은(殷)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
 
성(姓)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余)이다.
기(箕, 지금의 山西 太谷)에 봉(封)해져 기자(箕子)라고 한다.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기(箕)는 은(殷)의 강역 중 가장 북쪽이고, 토방(土方),
귀방(鬼方) 등으로 불리는 북방(北方) 민족(民族)이 강성(强盛)했던 지역이다.
 
귀방(鬼方)은 훈죽, 훈육이라 불리던 진한(辰韓)의 별종(한 갈래)이다.
기자(箕子)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복속(服屬)시켰고,
그러한 공을 인정받아 태사(太師)로서 형인 제을(帝乙)을 보좌하며
은(殷)을 융성(隆盛)케 하였다.
 
하지만 제을(帝乙)의 뒤를 이어 주왕(紂王)이 즉위한 뒤 은(商)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주왕(紂王)은 자신의 재능을 과신(過信)하여 신하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았으며,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기자(箕子)는 형인 비간(比干)과 함께 주왕(紂王)에게 거듭 간언(諫言)하며
정치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주왕(紂王)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기자에게 상아젓가락[象箸]을 만들게 하자
기자(箕子)는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고 한다
 
“상아젓가락으로 식사를 하게 되면
그때까지 사용하던 질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옥그릇을 만들게 하고,
옥그릇을 쓰면 푸성귀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진귀한 음식을 만들게 하고,
다음에는 화려한 복장과 호화스런 궁궐을 만들게 한다”
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간언(諫言)하였다.
 
여기에서 하찮은 낭비가 국가를 망치는 사치로 이어진다는
‘상저옥배(象箸玉杯)’라는 고사성어도 만들어 졌다고 한다.
 
하지만 주왕(紂王)은 폭정(暴政)을 멈추지 않았으며,
간언(諫言)을 하는 숙부(叔父) 비간(比干)의 충심(忠心)을 확인한다며
몸을 갈라 심장을 끄집어내는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기자(箕子)에게 은(殷)을 떠날 것을 권했지만,
기자(箕子)는 신하된 도리로 임금이 간언(諫言)을 듣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은
임금의 악행(惡行)을 부추키는 것으로 따를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을 하며 남의 노비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주왕(紂王)은 그를 사로잡아서 유폐(幽閉)시켰다.
 
유폐(幽閉)라는 말은 유주(幽州)로 보내어 가두어버렸다는 말이다.
 
유주(幽州)는 현(現) 하북성(河北省) 하간(河間)의 늪 지대이다.
 
주무왕(周武王, 주나라 무왕)은 충신(忠臣)을 잔인하게 살해한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은(殷)을 공격하였다.
 
BC 1046년 은(殷)은 멸망하였다.
 
주무왕(周武王)은 유주(幽州)로 찾아가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고,
자신을 도와줄 것을 청하였으나
기자는 상국(上國)을 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친 것을 말함}
 
주무왕(周武王)은 할 수 없이 정치(政治)에 대해 자문을 구하였는데,
기자(箕子)는 주무왕(周武王)에게 하(夏)의 우(禹) 임금이 실천했다는
'아홉 가지 정치 원칙'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홍범구주(洪範九疇)’ 혹은 ‘기주(箕疇)’라고 한다.
 
‘홍범구주(洪範九疇)’ <서경(書經)>의 ‘홍범편(洪範編)’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이 '기자(箕子)'가 후에 한반도(韓半島)로 옮겨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고 하며 이것이 소위 말하는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
또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이다.
 
과연 그랬을까?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수록하고 있는 옛 사서(史書)들은 많다.
 
중국의 사서(史書)로는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상서대전(尙書大傳)> 은전(殷傳)/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등이 있으며,
국내 사서(史書)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古朝鮮 條 (古記)/
<제왕운기(帝王韻紀)>/ <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이 있다.
 
이 중 일부 사서(史書)는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
(기묘년, BC 1122, 삼국유사 기묘년이라 기술)고 한다.
 
하지만 이 내용에 관한한 위 사서(史書)들은 모두가 위서(僞書)이다.
 
우리 역사서에는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로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BC 1122 - BC 195)을 세워 약 928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그 기자조선(箕子朝鮮)은 BC 195년에 위만(衛滿)에게 멸망되었고,
그 자리에 위만은 위만조선(衛滿朝鮮, BC 194 - BC 108)을 세워
87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이후 위만조선(衛滿朝鮮)은 BC 108년에 한(漢)나라에게 멸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한(漢)나라의 한사군(漢四軍)이 설치되었으며
한사군은 AD 313년 낙랑군을 마지막으로 소멸되었다고 한다.
 
한사군(BC 108 - AD 313)이 설치되었던 기간은 421년이다.
그 자리는 지금 북한의 평양이란다.
 
이렇게 하여 한사군은 한반도에 설치되었고,
우리 민족은 기원전부터 중국의 지배을 받던 민족이란다.
 
그 기간이 무려 1436년이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의 사서(史書)에 의존하여 기술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고,
과거 고려시대, 조선시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빠진 사가(史家)들이
중국의 사서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의 우리 민족 죽이기 역사관(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고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 이라는
현 우리나라 역사체계를 더욱더 고착시켰고, 세뇌시켜 버렸다.
 
우리는 빨리 이 역사 체계를 깨야한다.
 
이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다.
 
지금 평양에는 반경 40Km 안에 수천기의 고인돌이 있고,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은 기원전 5000년까지 올라간다.
 
너무 역사가 올라가 그 연대를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기원전부터 약 1500년 가까이 중국이 평양(한반도)을 지배했다면
그 문화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중국이 자랑하는 중화문화인 앙소문화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간혹 어떤 이들은 '미송리 항아리'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데,
'미송리 항아리'는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던 시기보다 한참 앞선 시기의 유물이다.
 
그리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어 있었다면
만주 역시 한나라의 지배하에 있었을 텐데, 지금 만주에서 발굴되는 유물 유적,
특히 요녕성과 내몽골 지역의 홍산문화(요하문명) 유적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유물, 유적은 중국의 앙소문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앙소문화와 홍산문화는 완전히 다른 이질문화이다.
 
여기서 출토되고 있는 비파형동검, 빗살(Z자 무늬)무늬 토기, 적석총 돌곽분 무덤은
한반도에서도 출토되는 우리 문화이다.
 
중국의 검은 양날의 곧은 1자 형식이며 칼과 칼자루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비파형동검은 표주박의 모습이며,
칼과 칼자루, 귀틀(칼과 칼자루 연결 부분)이 모두 분리된 조립식이다.
 
중국의 검과 우리의 검이 부딪치면 어느 쪽 검객이 충격을 많이 받았을까?
 
당연히 중국의 검객이다.
 
그 이유는 중국의 칼은 소위 말하는 '통자로 칼'이기 때문에
그 충격이 그대로 검객에게 전달되었다.
 
반면 우리의 칼은 조립식이기 때문에 그 충격이 완화되어 검객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검을 만드는 기술도 중국보다는 우리가 훨씬 앞섰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미개한 한(漢)족이
한나라 주변의 일부 지역을 지배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수천리나 떨어진
한반도 평양까지 와서 약 1500년간을 지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증거도 없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물, 유적은 중국의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은 섣부르고 확인되지 않은 루머(소문)지만,
지난 2000년을 전후로 하여 중국 중원의 한복판 서안(장안)에서
대형 피라미드(적석총)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곧바로 발굴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발굴 도중 갑자기 중단하고 다시 덮어버렸다고 한다.
 
이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인부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이상한 글자(한글) 관련 자료
(고대 가륵 단군 시절에 만들었다는 가림토로 추측)가 출토되어 덮어버렸다고 한다.
 
이 내용은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므로 강력히 주장할 수 없어 서운할 따름이다.
 
위 7개 사서(史書)에 기록된 내용을 조금이나마 인정해 주자면
『환단고기』「단군세기」제46대 단군 보을(普乙) 조(條)에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BC1122년(삼국유사 기묘년이라고 기록) 경에 살았던 기자(箕子)는
절대로 평양에 오지 않았다.
 
평양에는 기자조선도 없었고, 위만조선도 없었으며, 한사군도 없었다.
 
기자(箕子)는 위 <단군세가>의 기록처럼
22대 단군 색불루와 23대 단군 소태의 은(殷)나라 정벌로 기자는 서쪽으로 갔다. 
 
북쪽으로 갔다는 설도 있다.
 
기자(箕子)는 기자조선(奇子朝鮮) 임나(任那) 18년(BC 1120)에 殷에서 요서로 망명해 와
요서의 한 모퉁이에 살게 된 殷 마지막 왕 紂王의 숙부일 따름이다.
 
 
 
BC 1112 <영고탑으로 천도하다>
 
39년에 임금께서 영고탑(寧古塔)으로 도읍을 옮겼다.
 
후단조(後檀朝) 제1세 단제(第一世檀帝) 솔나(率那)는
전단조(前檀朝) 제23세 단제 아홀(阿忽)의 둘째 아들이며,
24세 연나(延那)의 아우이다.
 
임금께서 무(武)에 용맹하시고 명철(明哲)하시며,
강직하시고 공평하시며 정치적 분부가 일관성이 있으며,
법도(法度)가 평탄하시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을 어루만지셨다.
 
 
※ 참고 <영고탑(寧古塔)>
 
여기서 말하는 영고탑(寧古塔)은 장광재령(선춘령(先春嶺))의 동쪽
영안시(寧安市)에 있는 영고탑(寧古塔)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시조 전설과 관련된 영고탑(寧古塔)으로
청나라 건국 후 명명된 영고탑(寧古塔)이다.
 
영고탑(寧古塔)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유배지(오지(奧地))라는 의미도 있었고, 왕기(王氣)가 서려있는 땅,
또는 여러 부족이 모여 나라를 세운다는 혁명지(革命地)의 의미도 있었다.
 
또 오지(奧地)로 유배 또는 도피했던 사람이 그곳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재기를 노려 결국에는 대권에 도전하여 성공한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즉 영고탑(寧古塔)은 왕기가 서려 있는 땅이거나 혁명지로서 신성시되던 곳이었다.
 
그 예로 발해가 망하자 회령(會寧, 거란의 발상지, 서요하의 발원지,
대흥안령산맥의 파림좌기, 파림우기, 율량합의 서쪽 지계,
율량합은 조선초 조선의 속국, 이성계는 회령 사람, 이지란(퉁두란)은 여진 사람)
지방으로 피신하였던 여진족의 추장 아골타(阿骨打)는
그곳에서 와신상담 끝에 재기하여 결국 대금국(大金國)을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또 동만주 길림성 영안시(寧安市)에 있는 영고탑(寧古塔)은
만주의 시조(始祖)이며, 청나라의 건국 설화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만주의 시조라는 6형제가 그곳에서 탄생하여
많은 고생 끝에 만주를 여는 쾌거를 이루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청나라는 그곳을 신성하게 여겨 영고탑(寧古塔)이라 명명하였다.  
 
<만주원류고>의 번역자인 <장진근>에 의하면
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이라는 책을 쓴 <오진신吳振臣>은
그의 아버지 <오조건吳兆騫>이 영고탑(寧古塔)으로 유배당하자
부인이 남편 뒷바라지를 위하여 유배지로 따라가 살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오진신吳振臣>은 어릴 때 아버지가 귀양살이하던 당시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기반으로 글을 써서 남겼는데
그 책이《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이라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영고탑은 큰 사막(大漠, 중국의 선화부 북쪽 지계를 말함)의 동쪽에 있는데,
황룡부(黃龍府, 장춘 지역) 서쪽 7백리를 지나
고려(高麗: 당시는 조선을 가리킴)의 회령부(會寧府)와 땅을 접하고 있는 곳으로
그곳은 금나라 아골타가 군사를 일으킨 곳이다.
 
탑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기는 하나 실제로 탑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여섯 형제가 모여 각기 한 곳을 차지했다고 하며,
만주말로 여섯을 영고(寧古)라고 한다. 갯수는 탑(塔)이다.
 
그래서 영고탑이라 하는데, 만주말로 '여섯 개'라는 뜻과 같다."고 하였다
<왕운오 주편,《영고탑기략》, 상무인서관, 1쪽 참조>. 
 
이 내용을 종합해 보면《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에서 말하는 영고탑(寧古塔)은
길림성 영안시(寧安市)에 있는 영고탑(寧古塔)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주의 서쪽 변방에도 영고탑(寧古塔)이 있었다는 뜻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영고탑(寧古塔)은 유배지였거나
아니면 신흥세력의 거국지를 일컫는 말이다.
 
즉 유배지이기도 하지만 왕기가 서려 있는 명당 자리라는
조금은 아이러니한 복합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영고탑은 특정 지역이나 지명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다.
 
궁궐이나 개국지 또는 건국지로서 적정한 터(터는 만주어, 特(te), 곳, 명당자리)를
일컫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종족에 따라 영고탑(寧古塔)이라는 용어를
계속 유지하며 사용을 한 경우도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다르게 표현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터(特, te)와 대(臺, 垈, dae), 단(壇, dai), 탑(塔, top) 등이다.
 
사실 만주 흥안령산맥과 퉁베이평원(동북평원)에는
명당 자리를 의미하는 터(特, te)와 탑이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다.
 
지금은 지명이 되고 도시명이 되었지만 자라이터(扎○特), 자루터(扎魯特),
오란하오터(烏蘭浩特), 시린하오터(錫林浩特), 웡뉴터(○牛特) 등은
당시 어느 종족이나 부족들의 발상지이거나 건국지였을 것이다.
 
도시명에 모두가 터(特, te)가 붙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분명 그 지역은 어느 종족이나 부족의 발상지요 건국지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일 것이다.
 
또 흥안령산맥의 중남부에는 여러 개의 탑(塔)이 있다.
 
이 탑(塔)이 정말로 탑(탑, top)을 의미하는지,
또 그곳에 정말로 탑(塔)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단(壇, 제단)을 탑(塔)이라 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본다.
그곳에는 백탑(白塔), 남탑(南塔), 북탑(北塔), 대명탑(大明塔) 등이 있다.
 
사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터(特, te)와 대(臺, 垈, dae), 단(壇, dai), 탑(塔, top)은
그 음(音)이 비슷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음이 전음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본다.
그리고《영고탑기략(寧古塔紀略)》에서 말하는 영고탑(寧古塔)은
중국 선화부(宣化府) 북쪽 지계(地界)인 대막(大漠)계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중국 선화부 북쪽 지계인 대막(大漠)계의 동쪽은 흥안령산맥이다.
 
이곳은 사실 고대 웅족의 발상지요, 번한의 발상지요, 부여족의 발상지요,
발해의 건국지요, 동명왕국(서국)의 건국지요, 거란의 건국지요,
아골타의 건국지다. 
 
이곳에서는 근래 많은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 소하서(小河西) 유물은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그 연대가 무려 BC 6500년 이상 올라가고 있다.
 
이 지역의 문화를 홍산문화 또는 요하문명이라 한다.
여기서 발굴되는 유물, 유적은
중국 본토에서 발굴되는 소위 앙소문화와는 확실히 다른 문화이다.
 
이곳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 토기나 비파형 동검, 세형동검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이곳은 고대 여러 부족이 오랫동안 살아왔고,
여러 부족국가가 흥망성쇠했던 지역이다.
 
영고(寧古)라는 말이 만주말로 '여섯 개'를 의미한다는 것은
한 나라를 창업하는데 있어 단일 씨족이나 부족으로는 역부족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따라서 여러 부족의 연맹에 의하여 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이 부족들의 연맹지를 '영고(寧古)'라 했을 것이다.  
 
부여에는 예부터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영고(迎鼓)'의 한자 의미는 '북을 치며 환영한다'는 뜻으로
여러 부족 또는 연맹체들이 함께 모여 하늘에 제를 지내고 어울린다는 뜻이다. 
 
영고(迎鼓)라는 한자는 후세에 전해지면서 의미가 변하고 가차(加此)되어
'영고(迎, 맞이할 영, 鼓 북 고)'라고 표기되었을 것이다.
 
원래는 '영고(寧古)'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옛날 하늘에 제(祭)를 올리는 제천행사 장소는 영기(靈氣, 명당자리)가
서려 있는 곳을 골라 그 곳에 단(壇)을 쌓고, 제(祭)를 올렸기 때문이다.
 
이 단(壇)을 후에 '안녕을 비는 탑(塔)'이라 하여
영고탑(寧古塔)이라 불렀을지도 모른다.
 
즉 후세의 영고탑(寧古塔)은 제왕이 제천행사를 올리던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고대 환국시대에는 제를 올리던 명당자리에
 '소도(蘇塗, 다시 태어나다, 암흑에서 깨어나다)'를 짓고
미혼자제(未婚子弟)를 교육시키기도 하였고,
단군조선 초기 계가(鷄加(家)) 시대에는
이곳에 '솟대'를 세워 제천행사 자리임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솟대 위에는 새(鳥)를 올려 놓았는데 그 이유로는 혹자에 의하면
그 새(鳥)가 하늘과 땅을 연결해 준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며
그 새(鳥)는 북쪽에서 날아온 '청둥오리'라고 한다. 
 
하지만 이 새(鳥)는 계가(鷄加(家))의 상징물인 '닭(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새벽을 알리는 닭(鷄), 시작과 시간을 알려주는 닭(鷄)으로 보는 것이
맞는 해석일 것이다.
 
예부터 닭(鷄)은 '새로움을 알리는 동물'이었다.  
 
또한 고조선 붕괴 후 이어지는 근세 열국시대(列國時代)에는
열국(列國)의 개국자(예, 동명성왕, 추모, 김알지, 박혁거세 등)들의 탄생설화는
거의 알(卵)과 관련이 있는데,
이 또한 영고탑(寧古塔), 소도(蘇塗), 닭(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영고탑(寧古塔)은 유배지를 의미하기도 하였으나
성지(聖地)이며, 영지(靈地)였다.
 
그곳에서는 개국자가 나오기도 하였고, 혁명가가 나오기도 하였고,
개혁가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하늘에 제(祭)를 올리기도 하였고,
소도(蘇塗)를 지어 후세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그곳은 신성시 될 수 밖에 없었다.
 
즉 영고탑(寧古塔)이란 어느 특정지역을 일컫는 고유명사가 아니며,
특정 시기에만 사용하던 용어도 아니었다.
 
영고탑(寧古塔)은 성지(聖地)이며, 영지(靈地)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다.
 
한편 <환단고기>가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위서의 증거로 이 영고탑(寧古塔)을 들고 있다(예, 모 대학의 조인성 교수).
 
조교수는 위에서 나오는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 시조 설화와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므로 영고탑(寧古塔)이란 용어는 청나라 이전에는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역사의 시차를 뛰어 넘는 역사의 왜곡으로 보았다.
 
그래서 <환단고기>는 위서(僞書)라는 것이다
(한국사시민강좌, 제2집, 일조각, 82쪽 참조).
 
하지만 영고탑(寧古塔)의 의미가 무엇인지,
과연 영고탑(寧古塔)이 청나라 이후에만 사용되었으며
정말로 그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는지,아니면 다른 용어로는 사용되지 않았는지,
또한 영고탑(寧古塔)이 고유명사인지, 보통명사인지,
더 연구해 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조금은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발이 빠르면 헛딛는다.'는 말을 잘 새겨봐야 할 것이다.
 
 
 
 
後檀君 (BC 1112-  BC 240) (1세 率那 - 23세 古列加) 
 
 
BC 1105 <북막(北漠)의 침공과 토벌>
 
병신년(丙申年)에 번한(番韓) 노단(魯丹)이 즉위하였으며,
북막(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노일소(路日邵)를 보내 토벌하고 평정케 하였다.
 
 
 
BC 1104 <영신(佞臣)과 직신(直臣)>
 
정유년(丁酉年)에 솔나(率那) 천왕께서 상소도(上蘇塗)에 계시면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 영신(佞臣)과 직신(直臣)의 구분을 물으시니,
이에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서서 대답하여 아뢰되,
“이치를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直臣)이며,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侫臣)이며,
임금은 근원이고 신하는 흘러가는 물인데,
근원이 이미 흐렸다면 그 흐름이 맑기를 구하여도 될 수 없는 일이나니,
때문에 임금이 성인(聖人)이 된 후에야 신하(臣下)가 바른 법이옵니다” 하니,
천왕께서 “옳은 말이오”라고 하셨다.
 
 
상소도(上蘇塗)는 전국에 소재한 소도(蘇塗)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을 가리키는데,
천왕(天王)이 제천행사를 주관(主管)하는 곳이 된다.
 
삼랑(三郞)은 삼신시종랑(三神侍從郞)의 준말로서
삼신(三神)을 모시는 벼슬 이름이 된다.
 
 
BC 1092 <밭곡식 풍년(豊年)>
 
기유년(己酉年)에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莖)에 다섯 개 이삭이 달린 조(粟)가 있었다.
 
 
단군조선 시대에 풍년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BC 1992년에 벼(禾) 한포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달렸다는 기록과,
여기 BC 1092년에 조(粟)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이 달렸다는 기록과,
BC 795년의 오곡(五穀) 풍년에 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BC 1066 <감성(監星) 설치 - 천문관측>
 
을해년(乙亥年)에 번한(番韓) 모불(牟弗)이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감성(監星)은 천문(天文) 관측기관인데,
단군조선 진한(眞韓)에서는
BC 1916년에 처음으로 감성을 설치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BC 1062 <흰사슴 출현>
 
서기전1062년 가을 7월에 백악산(白岳山)의 계곡에
흰사슴(白鹿)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어 놀았다.
 
 
 
BC 1047 <주(周)나라의 조공>
 
갑오년(甲午年)에 번한(番韓) 을나(乙那)가 즉위하고
주(周)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주나라 왕 하(瑕)는 소왕(昭王)이라고 하며 제4대왕으로서
BC 1053년부터 BC 1002년까지 51년간 재위하였다
 
 
 
BC 1012 <소련, 대련의 묘(廟)를 세우고 삼년상 제도를 정하다>
 
기사년(己巳年)에 번한(番韓) 등나(登那)가 즉위하였고,
이극회(李克會)가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의 묘(廟)를 세우고
삼년상(三年喪)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번한(番韓)이 이에 따랐다.
 
 
소련과 대련은 단군조선 초기인 BC 2240년경의 인물로서
효(孝)의 대명사로 불리는데,
특히 공자(孔子)는 예기(禮記 雜記 下)에서 상을 잘 치뤘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 주해(註解)에서 삼년상(三年喪)의 유래를 들면서
소련과 대련을 동이(東夷)의 아들(子)이라 밝히고 있는 바,
예기의 주해를 단 인물은
소련과 대련의 효에 관한 역사를 기록을 통하여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동이의 아들이란 단군조선(檀君朝鮮) 본국 즉 삼한(三韓) 출신임을 나타내는 것인데,
소련과 대련은 BC 2239년에 제2대 부루(扶婁) 천왕의 부름을 받고
단군조선 진한(眞韓) 조정에 들어가 다스림의 도리 즉 치도(治道)에 관하여 아뢰었다
라고 기록되고 있다.
 
 
 
BC 997 <아란산(阿蘭山) 붕괴>
 
갑신년(甲申年)에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 아란산(阿蘭山)이 무너졌다.
 
 
천해(天海)는 하늘(天)의 바다(海)라는 뜻인데,
단군조선 땅에서 하늘의 바다는 지금의 바이칼호로서,
북쪽이 하늘을 상징하여 북해(北海)가 된다.
 
큰물이 모여 있는 곳이 바다(海)라고 기록되는데,
육지 속에서는 호수(湖水)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북해(北海)라는 말은 단군조선 시대 말로
‘바이하이’라고도 발음되었던 것이라 보이는 바,
이 ‘바이하이’의 마지막 발음인 ‘이’가 ‘ㄹ’로 변음되면서 ‘바이할’이 되고,
‘ㅎ’이 ‘ㅋ’으로 격음화 되어 ‘바이칼’로 소리가 변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위치상으로 아란산(阿蘭山)은 바이칼호 주변에 있던 산이 되는데,
특히 바이칼호의 서쪽에 위치한 양운국(養雲國) 부근에 소재한 산으로서
지금의 사얀(Sayan)산맥에 위치한 산이 될 것이다.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의 조공>
 
BC 997년에 수밀이국(須密爾國), 양운국(養雲國), 구다천국(句茶川國)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方物)을 바쳤다.
 
양운국(養雲國)은 바이칼호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나라가 된다.
한편 바이칼호 동쪽에는 12한국의 하나인 비리국(卑離國)이 소재하였던 것이 되는데,
지금의 부리야트공화국 자리가 된다.
 
구다천국(句茶川國)은 독로국(瀆盧國)이라고 불렸는데,
북개마대령(北蓋馬大嶺)이 되는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이 되며,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BC 990 <큰 가뭄과 홍수와 구휼>
 
신묘년(辛卯年)에 큰 가뭄 끝에 큰 비가 쏟아져 백성들에게 곡식의 수확(收穫)이
없으므로 천왕께서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두루 나누어 주게 하였다.
 
 
 
BC 980 <중국내륙 동이(東夷)의 맹주(孟主) 서언왕(徐偃王)>
 
BC 980년경 서국(徐國)의 언왕(偃王)이 주(周)나라를 공격하여 36군(郡)을 차지하니,
주나라 목왕(穆王)이 서언왕을 동방 36국의 주인(主人)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제5대 왕으로 BC1001년부터 BC 947년까지
55년을 재위하였으며 이름을 만(滿)이라고 한다.
 
서국(徐國)은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서이(徐夷)라고 불리는데,
BC 1236년에 산동지역에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출발하여
BC 980년경에 출현한 서언왕(徐偃王)이 반경 500리(里)의 땅을 차지하여
36국을 다스려 주나라와 대등한 천자국(天子國)을 이루었더 나라이다.
 
이후 서국(徐國)은 BC 680년경에 이르러
초(楚)나라 문왕(文王)에게 크게 패(敗)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BC 668년에 관중이 재상으로 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 시절에
제나라에 복속하였고, 이후 독립을 시도하다가
BC 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시절에 초나라에게 정벌을 당하였으며,
BC 526년에 다시 안영이 재상으로 있던 제(齊)나라 경공 시절에
제나라에게 정벌을 당하였고,
BC 512년에 오(吳)나라 합려왕에게 완전히 망하였다.
 
이리하여 서국(徐國)은 BC 1236년에 산동지역에서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봉해져,
약 250년이 지난 BC 980년경에는
중국내륙의 대표적인 동이족 국가의 맹주(孟主)로서
주(周)나라와 종주(宗主)를 다투었던 것이며,
그로부터 다시 약300년이 지난 BC 680년경 이후에는
초(楚)나라와 제(齊)나라의 침공으로 위축되었다가,
BC 512년에 오(吳)나라에 완전히 망하게 된 나라로서,
무려 725년을 존속한 나라가 된다.
 
 
 
BC 979 <삼성묘(三聖廟) 제사>
 
임인년(壬寅年)에 번한(番韓) 해수(奚壽)가
아들 물한(勿韓)을 상춘(常春)의 구월산(九月山)에 파견하여
삼성묘(三聖廟)에 제사를 돕게 하였는데,
묘(廟)는 상춘(常春)의 주가성자(朱家城子)에 있다.
 
 
삼성묘(三聖廟)는 삼성(三聖)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삼성(三聖)은 세분의 성인이란 뜻으로서
통상적으로 환국(桓國)의 시조이신 환인(桓因),
배달국 시조이신 한웅(桓雄),
단군조선의 시조이신 단군왕검(檀君王儉)을 가리킨다.
 
번한 해수가 아들 물한을 진조선(眞朝鮮)에 파견하여
삼성(三聖)께 올리는 제사를 돕게 하였다는 것이다.
 
상춘의 구월산에 삼신(三神) 제천단(祭天壇)이 있으며
삼성묘(三聖廟)도 건립하여 삼성(三聖)을 모신 것이 된다.
 
 
 
BC 971 <백의동자(白衣童子)>
 
경술년(庚戌年)에 천왕께서 질병을 앓으시어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빌게 하였더니 곧 치유되었다.
 
 
 
BC 964 <석고(石鼓)>
 
정사년(丁巳年)에 탁암(卓岩)이 돌로 된 북(北)을 만들어 바쳤다.
 
 
돌로 된 북은 악기의 일종으로서 석경(石磬)에 해당하는 것이 된다.
 
 
 
BC 961 <폭우에 하늘에서 물고기가 쏟아져 내리다>
 
경신년(庚申年) 여름 4월에 회오리바람(旋風)이 크게 일어 폭우(暴雨)가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 종류가 어지럽게 떨어졌다.
 
 
 
BC 954 <빙해(氷海)의 제후(諸侯)들의 조공>
 
정묘년(丁卯年)에 빙해(氷海)의 여러 제후(諸侯, 汗)들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쳤다.
 
 
빙해(氷海)는 단군조선의 위치로 보아 북극해(北極海)를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그 제후들은 북극해에 가까운 북시베리아 지역의 제후들이 된다.
 
 
 
BC 943 <주(周)나라의 조공(朝貢)>
 
무인년(戊寅年)에 주(周)나라 사람이 공물(貢物)을 바쳤다.
 
 
이때 주(周)나라 왕은 제6대 공왕(共王)으로서,
공왕은 서기전947년부터 서기전935년까지 12년간 재위하였다.
 
 
<형제가(兄弟歌)>
 
BC 943년에 번한(番韓) 누사(婁沙)가 천조(天朝)에 들어가
마휴(摩休) 천왕을 뵙고서는,
태자(太子) 등올(登屼)과 작은 아들 등리(登里)가 별궁에서 한가하게 기거하고 있어,
이에 태자형제(太子兄弟)께 노래를 바쳤다.
 
이 노래가 소위 형제가(兄弟歌)이다.
 
형은 반드시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털끝만한 일로써 골육(骨肉)의 정(情)을 상(傷)치 마오!
말(馬)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行)을 만드나니,
내실(內室)에서 비록 환락(歡樂)하나,
작은 말일랑 삼가 듣지를 마오소!
 
 
BC 936 <지진(地震) 발생>
 
BC 936년 을유년(乙酉年)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BC 935 <해안선의 변화>
 
병술 9년에 남해{발해 북안}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났다.
 
 

 
<BC 2300년경 발해연안 지형도>
 
 
위 지도는 BC 2300년경의 발해 연안의 지형도이다.
 
BC 2300년경에 중국 본토와 산동반도는
초원 지대(늪)와 경작지로 분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해안선이 지금과는 다르게 내륙으로 많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 하북성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천진(天津)'은 아예 없다.
 
북평(北平)이 바다에 표시되어 있고,
현재 내륙에 있는 갈석산(위 지도에 갈(曷)로 표기)이 해안선에 인접해 있다.
 
또한 현 하북성 내륙 한복판에 있는 현 정정시(正定市)가 해안가와 접하고 있고,
안휘성 한복판에 있는 서주(徐州)가 해안에 인접해 있다.
 
강소성은 보이지도 않는다. 
 
산동성 한복판에 있는 현 제남(濟南) 역시 해안가에 있다.
단군 마휴9년(BC 943) 당시 조수가 3척(약 1m) 이나 물러났다고 하였는데,
BC 2300년경과 약 1350년 후의 일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해안선의 변화는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발해만은 지각 작용으로 지반이 융기하였던지
아니면 점진적인 대륙의 이동으로 바다의 폭이 넓어지고 수심이 얕아지면서
해안선이 점차로 밀려나 오늘날과 같은 지형을 형성한 것이다.
 
『환단고기』「단군세기」29세 단군 마휴 조(條)의 위 기사는
발해만의 지형 변화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환단고기』가 허무맹랑하게 쓰여진 것만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BC 925 <왕문(王文)의 부예(符隸)와 이두법(吏讀法)>
 
병신년(丙申年)에 번한(番韓) 이벌(伊伐) 시대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마휴(摩休) 천왕께서 좋아라 하시며
삼한(三韓)에 명하여 칙서(勅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왕문이 만든 이두법을 단군조선 삼한(三韓)에 모두 시행하게 하였다는 것이며,
왕문은 이 이두법과 함께 상형문자인 전문(篆文)을 간략히 고쳐서
부예(符隸)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부예(符隸)의 서체(書體)는 진(秦)나라 이후
소위 예서체(隸書體) 즉 팔분(八分)의 성립에 영향을 준 것이 된다.
 
전문(篆文)은 단군조선의 진서(眞書, 참글)
즉 신전(神篆)으로서 상형문자이며 배달국 문자를 계승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에는 초기부터 이미 신전(神篆)이 있었고
BC 2181년에 가림토(加臨土) 38자가 정선(精選)되었으며,
BC 925년에 부예(符隸)와 이두법(吏讀法)이 왕문(王文)에 의하여 정리된 것이 된다.
 
물론 이두법은 상형문자에 해당하는 부예(符隸)를 사용한 것이 된다.
 
가림토는 소리글자이므로 가림토로 표기한 것을
굳이 이두법이라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BC 909 <청구(靑邱)를 순시하고 치우천왕 공덕비(功德碑)를 세우다>
 
임자 원년(BC 909)에 단제께서 남쪽 지방을 순시하였다.
청구의 정세를 둘러보시고, 치우천왕의 공덕을 돌에 새겼다.
 
 
단군조선 초기인 단군왕검 천왕(天王) 시절에
산동지역에 청구(靑邱)와 남국(藍國)이 봉해졌는데,
청구는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을 봉하고 남국(藍國)에는 치우천왕의 후손을 봉하였다.
 
청구군(靑邱君)과 남국군(藍國君)은 일반 제후가 아닌 군(君)으로서
천왕(天王)이 봉한 군후(君侯) 중에서 천군(天君)에 해당한다.
 
고시씨는 황족(黃族) 중에서 황하유역으로 이동한 웅족(熊族) 출신이며,
치우천왕은 배달국 초기부터 있었던 병감(兵監)
즉 군사담당(主兵)인 치우(治尤)의 직책을 맡았던 인물로서,
배달나라 제14대 자오지(慈烏支) 한웅(桓雄)이며 일명 치우천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치우(蚩尤, 治尤)라는 말은 세상을 갈아 치우다는 등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남국(藍國)은 산동지역 중에서 청구(靑邱)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태산(泰山)부근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이며,
태산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지역이 소위 남이(藍夷)지역으로서,
남국(藍國)의 백성은 주로 남족(藍族)과 황족(黃族)이 되는데,
원래 남족(藍族)은 양자강 유역과 양자강 남쪽에 사는 적족(赤族)과는 같은 족속이며
황궁씨(黃穹氏)의 아우가 되는 청궁씨(靑穹氏)의 후손이 된다.
 
청구(靑邱)의 백성은 주로 황족(黃族)이 되고 남족(藍族)이 섞인 것이 되는데,
남국(藍國)과 청구(靑邱)는 내륙의 동이(東夷)가 된다.
 
청구지역에는 소위 양이(陽夷), 우이(隅夷), 래이(萊夷), 개이(介夷) 등이 있었으며,
남국(藍國)의 남이(藍夷), 엄국(淹國)의 엄이(淹夷), 서국(徐國)의 서이(徐夷),
회국(淮國)의 회이(淮夷)와 함께 내륙 이(夷)가 되고
그 외 사이(沙夷), 사이(泗夷) 또는 도이(島夷)를 합하여 내륙 이(夷)라고도 부른다.
 
BC 2294년경 요임금의 섭정 순(舜) 또는 BC 2284년경 우순(虞舜)이
BC 2267년 이후 지금의 북경지역에 유주(幽州)를 설치하고
그 남쪽이 되는 산동지역의 서쪽에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는데,
이 영주(營州)가 남국(藍國)의 인근에 설치되었던 것이며,
BC 2267년에 폐지되어 단군조선 직할영역에 편입되었다가,
BC 2247년경에 우순(虞舜)이 다시 설치하였던 것이고,
BC 2240년에 부루(扶婁) 천왕이 정벌하여 폐지하고 제후를 봉하였던 것이며,
이후 순(舜)은 BC 2224년에 단군조선의 유상(有象)과
단군조선의 후원을 얻고 있던 우(禹)의 합공(合攻)으로 제거되었던 것이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BC 2706년에 제14대 한웅으로 즉위하여
소위 청구(靑邱)시대를 열었는 바,
당시 염제신농국의 쇠퇴로 많은 제후들이
서로 병탄하려 욕심을 내며 전란(戰亂)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종주국(宗主國)으로서 천병(天兵)을 일으켜
회대(淮岱)지역을 평정하여 수도를 청구(靑邱)에 정하고,
BC 2697년에 염제신농국(炎帝神農國)의 제8대 천자(天子)인 유망(楡罔)을 폐하여
그 아들 괴(魁)를 단웅국(檀熊國) 천자로 봉하였으며,
또 BC 2698년에 유웅국의 천자가 된 헌원(軒轅)의 10년이상에 걸친
70여회의 도전(挑戰)을 물리치고 결국 신하(臣下)로 삼아
중부(中部)의 황제(黃帝)로 봉하는 등 당시 동서남북중에 걸쳐 12제후국을 평정하여
이후 BC 2357년경까지 300년 이상의 평화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치우천왕 시절에 5부(部)의 천자(天子)가 되는 5제(帝)로는
동부(東部)의 청제(靑帝)로는 창힐(蒼詰),
서부(西部)의 백제(白帝)로는 소호(少昊),
남부(南部)의 적제(赤帝)로는 축융(祝融),
북부(北部)의 흑제(黑帝)로는 대요(大撓),
중부(中部)의 황제(黃帝)로는
유웅국(有熊國) 출신의 천자(天子)인 헌원(軒轅)을 두었던 것이다.
 
치우천왕이 수도를 삼은 청구(靑邱)는
배달국 동서남북중에서 동부(東部)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회대(淮岱)지역에 위치하며,
단군조선 시대에는 번한(番韓) 관경 중 서남부에 속하는 곳으로서
이 이름을 따서 군국(君國)인 청구국(靑邱國)이 봉해진 것이 된다.
 
 
<엄독홀(奄瀆忽) 제천(祭天)과 주(周)나라와의 수호(修好)>
 
서쪽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分朝의 여러 지도자(汗)들과 회동을 갖고,
군사들을 열병한 후 하늘에 제를 올리고, 주나라와 수호 관계를 맺었다.
 
 
천왕이 청구(靑邱)를 둘러보고 치우천왕의 공덕비를 세운 후,
이어 엄독홀(奄瀆忽)로 가서 군후(君侯)들과 회합하고
열병의식(閱兵儀式)을 행하며 제천행사(祭天行事)를 벌인 것이다.
 
분조(分朝)란 조정(朝廷)을 나눈 것으로
단군조선의 군후국(君侯國)이 되는 나라의 조정(朝廷)을 가리킨다.
 
즉 단군조선 진한(眞韓)의 조정은 중앙조정(中央朝廷)이 되며,
마한과 번한의 조정은 진한(眞韓)의 분조(分朝)가 되고,
삼한(三韓) 관경 내의 수많은 군후국들은 진한과 마한과 번한의 분조(分朝)가 된다.
 
한(韓)은 천왕(天王)의 비왕(裨王)으로서 분조(分朝)의 임금이 되고,
한(汗)은 일반 군후국(君侯國)의 임금인 비왕(裨王)을 가리키는데,
이 한(汗)들의 나라가 곧 일반적인 분조(分朝)가 되는 것이다.
 
엄독홀(奄瀆忽)은 엄독(奄瀆)이라는 강이 있는 고을(忽)이며,
BC 1266년에 남국(藍國)이 고죽국(孤竹國)과 함께
군사를 몰아 주둔하였던 곳이기도 하고,
BC 1236년에는 남국(藍國), 청구(靑邱), 구려(句麗), 몽고리(蒙古里)의 군사가
합공으로 은나라를 정벌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포고씨(蒲古氏)를 엄국(淹國)에 봉하였는데,
약 330년이 지난 BC 909년에 이곳에 내휴(奈休) 천왕이 순수(巡狩)하여
여러 군후(君侯)들과 회합하여 제천행사를 벌이는 등 단합대회를 연 것이 된다.
 
이때 회합한 한(汗) 즉 군후(君侯)들은 엄독홀에 가까운 나라들의 왕이 되는데,
엄(淹), 서(徐), 회(淮), 남국(藍國), 청구(靑邱), 고죽(孤竹), 래(萊), 우(隅), 양(陽),
개(介) 등 산동지역과 회대(淮岱)지역과 황하(黃河)유역에 걸쳐 자리한
제후국들의 제후들이 될 것이다.
 
특히 산동지역의 남쪽에 위치한 서국(徐國)은
BC 980년경에 주(周)나라를 공격하여 황하지역까지 이르러
반경 500리를 차지하는 대국(大國)이 되었는데,
이때 36국(國)을 거느려 종주(宗周)와 쌍벽을 이루었던 것이다.
 
소위 금문(金文)에 천군(天君)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이 있는데,
아마도 BC 909년의 내휴(奈休) 천왕의 행적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BC 1236년에 제23대 아홀(阿忽) 천왕 시절에 있었던
남국(藍國), 청구(靑邱), 구려(句麗), 몽고리(蒙古里)의 연합군이
은(殷)나라를 정벌하여 엄(淹), 서(徐), 회(淮)라는 제후국을 세운 것과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금문(金文) 내용>
丙午天君鄕稷酉才斤天君賞厥征人斤貝用作父丁樽彛天0
병오(丙午)일, 천군(天君)이 근(斤)땅에서 직신(稷神)께 술로 제를 올리고,
천군(天君)이 그 정벌자 근(斤)에게 재물을 상으로 주어,
이를 사용하여 부정(父丁)에게 준이천0 (술통, 솥등 祭器)을 만들게 하다.
 
BC 909년이면 주(周) 8대 효왕(孝王) 원년이 되는데,
이때는 서주(西周)시대로서 금문(金文, 鐘鼎文)이 새겨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만, BC 909년경 고죽국(孤竹國)이나 산동지역의 엄국(淹國), 남국(藍國),
청구(靑邱) 부근의 근(斤)땅에서 주조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위 당시 부정(父丁)이라는 인물이 고죽국(孤竹國)의 왕이라면
천군(天君)은 내휴(奈休) 단군천왕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고,
당시 고죽국의 임금인 고죽군(孤竹君)을 천군(天君)이라 한 것이라면
부정(父丁)은 당시 고죽군의 아들이나 손자가 될 것이다.
 
엄독홀은 엄국(淹國, 淹夷)의 땅이 되며,
엄국은 태산을 중심으로 한 나라이고,
태산(泰山)은 천제(天祭)를 지내는 천단(天壇)이 있는 곳으로,
BC 2267년에 태자 부루의 명을 받아 번한(番韓) 낭야(郞耶)가
천제(天祭)를 지낸 곳이기도 하며,
이후 태산은 노(魯)나라 땅에 들어가게 되었고
제환공(齊桓公)이 BC 660년경 봉선(封禪)을 흉내낸 곳이기도 하다.
 
은주(殷周)시대의 금문(종정문)에는 보통 왕(王)의 행적을 새기고 있는데
위 금문에서는 천군(天君)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어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주(周)나라와 수호를 맺었는데,
BC 980년경에 서국(徐國)의 강성(强盛)으로 인하여
주(周)나라가 위축되었던 것이 되고,
BC 909년에 내휴(奈休) 천왕이 청구(靑邱)와 엄독홀(奄瀆惚)에 친림(親臨)하여
제천행사를 벌였던 것이며, 주나라와 수호를 맺어 평화시대를 열었던 것이 된다.
 
 
BC 905 <흉노(匈奴)의 조공(朝貢>
 
병진년(丙辰年)에 흉노(匈奴)가 조공(朝貢)을 바쳤다.
 
 
흉노(匈奴)는 BC 2177년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이 죄를 지어
처음 종신금고형(終身禁錮刑)에 처해진 곳이 약수(弱水)인데,
나중에 사면을 받아 봉해지니 흉노의 한(汗)이 되어 흉노의 시조가 되었던 것이며,
BC 650년경 이후에는 기자(箕子)의 작은 아들의 후손인 선우씨(鮮于氏)가
흉노의 왕이 되기도 하였고,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인 김씨(金氏)가 왕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BC 905년에 흉노가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칠 당시에는
흉노왕(匈奴王)이 색정(索靖)의 후손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 된다.
 
 
 
BC 902 <주(周)나라를 정벌하다>
 
기미년(己未年)에 번한(番韓) 이벌(伊伐)이 상장(上將) 고력(高力)을 보내어
회국(淮國)의 군사와 함께 주나라를 정벌하였다.
 
 
회국(淮國)은 BC 1236년에 회대(淮岱)지역의 남쪽이 되는 회수(淮水) 유역에 세워진,
번조선(番朝鮮)의 관할에 속한 제후국으로서,
BC 902년에 번한(番韓)이 보낸 상장(上將) 고력(高力)과 함께 군사를 내어
주(周)나라를 정벌한 것이다.
 
번조선(番朝鮮)이 주(周)나라를 정벌한 이유는
아마도 천자국(天子國)에 지나지 않는 주나라가
천왕격의 번한(番韓)이 다스리는 번조선에 조공(朝貢) 등
예(禮)를 다하지 아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BC 902년은 주나라 제8대 고왕(考王)의 8년째 해가 되며,
고왕은 이름이 벽방(辟方)이라 불리는데
BC 909년부터 서기전895년까지 15년간 다스렸다.
 
 
 
BC 895 <주(周)나라가 번한(番韓)에 조공하다>
 
병인년(丙寅年)에 주(周)나라 이공(二公)이 번한(番韓) 아륵(阿勒)에게 조공을 바쳤다
 
 
주나라 왕 이공(二公)은 이왕(夷王)이라고 하며 이름은 섭(燮)이고,
BC 894년부터 BC 879년까지 16년간 재위한 왕이다.
 
이 이왕(夷王) 시대에 초(楚)나라가 왕(王, 天子)을 칭하였다.
주나라 시대에 제후국으로서 가장 먼저 왕을 칭한 나라가 초(楚)나라가 된다.
 
BC 902년에 번조선(番朝鮮)이 주나라를 정벌한 이후,
주나라가 상국(上國)인 번조선(番朝鮮)에 예(禮)를 갖추어 조공(朝貢)을 한 것이 된다.
 
 
 
BC 882 <신주역서(新周易書)를 바치다>
 
28년에 주태보(周太甫)가 신주역서(新周易書) 13권을 임금께 바쳤다.
 
그 편집내용은 태양태음설(太陽太陰說)과 현공설(懸空說)과 복서(卜書)와
천문설(天文說)과 지수설(地水說)이다.
 
임금께서 훑어보시고 불쾌하여 이르시기를
“후세에 이 글로써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자가 있으리라."하셨다.
 
 
 
BC 873 <삼권분립(三權分立)>
 
무자년(戊子年)에 조자문(曹子文)이 등올 천왕께 아로기를,
“정치와 법률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행정관과 사법관은 각각 그 직책이 달라야 서로 권한을 빼앗지 않고
그래야만 정치와 법률이 명백하여 공정하게 시행될 것입니다” 하니,
천왕께서 옳다 하시며
입법, 사법, 행정을 각각 나누어 다스리니 정치와 법률이 공평하였다.
 
입법(立法), 행정(行政), 사법(司法)은
BC 3897년 배달국 초기에 이미 정립되었던 제도이며,
단군조선도 배달나라의 삼권분립(三權分立) 제도를 계승하였던 것인 바,
이때에 이르러 다시 정비한 것이 된다.
 
 
 
BC 859 <태평시대(太平時代)>
 
임인년(壬寅年)에 봉황(鳳凰)이 백악(白岳)에서 울고
기린(麒麟)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놀았다.
 
 
봉황은 신령(神靈)스런 날짐승이며, 기린(麒麟)은 신령(神靈)스런 길짐승이다.
 
봉황의 봉(鳳)은 봉황새 중에서 수컷이며 황(凰)은 암컷이다.
 
봉황은 머리에 벼슬을 달고 있는 신령스런 새로서 불사조(不死鳥)라고도 불리운다.
 
BC 2598년경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벼슬이름을 새이름으로 정하였는데
봉황을 총리로 삼았던 것인 바,
후대에는 봉황이 왕(王)을 상징하는 것으로 된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문장(紋章)이 봉황이다.
 
단군조선 시대부터 나타나는 삼족오(三足烏)는
머리에 벼슬이 있는 검은 새로서 흑봉황(黑鳳凰) 즉 검은 봉황이 된다.
 
백악(白岳)은 후기 단군조선의 수도가 있던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 있는 산(山)이다.
 
백악산아사달은 아사달로서 백악산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린(麒麟)은 초원지대에서 긴 목을 가지고 나뭇잎을 뜯어 먹고 사는 짐승으로서,
사슴(鹿)과 같은 무늬를 가진 큰 동물이다.
 
한편, 천리마(千里馬)를 가리키는 기린마의 기는 기(驥)이다.
 
 
 
 
BC 855 <周 왕조의 쇠퇴>
 
기자조선 세이벌 2년에 <한문거韓文渠>가 글로 아뢰기를
 
“도*덕*인*의*예(道․德․仁․義․禮)의 다섯가지는 일체(一體)이니,
이것이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기국입니다.
 
도(道)란, 사람이 밟는 것이니 만물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도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덕(德)이란, 사람이 얻어야 되는 것이니 만물이 저마다 하고자 하는 것을 얻되,
끝에는 혼자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仁)이란, 사람이 친해야 할 것이니 측은한 마음이 있어,
그 생성(生成)을 구조(救助)하는 것입니다.
 
의(義)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니 사업에 성공하여
당연히 선(善)한 상(賞)과 악(惡)한 벌(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禮)란, 사람이 실천해야 할 것이니 일찍 일어나며 밤이 되면 잠을 자는,
인륜(人倫)의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구비되면 법률이 필요 없으나, 도(道)가 없어지면 인(仁)이 나고,
인(仁)이 없어지면 의(義)가 나고, 의(義)가 없어지면 예(禮)가 생긴다 하였습니다.
 
예(禮)라는 것은 사시(四時)의 변천과 같아서 항상 그 시대를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그 때가 아니면 도리어 폐해가 되는 것이므로,
말세(末世)를 당하면 법률이 없을 수 없습니다.
 
법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권위이므로
법이 백성에게 신망을 받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입법(立法)이 제일이며,
신뢰되어야 할 것은 사법(司法)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좋은 것은 널리 의논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화(禍)는 무윤(無倫)한 것 보다 더 화가 없고,
즐거움(樂)은 선하게 사는 것 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고,
신(神)을 섬기는 일은 지성(至誠)보다 더한 것이 없고,
형세를 잘 살피는 것 이상 더 밝은(明) 것이 없고,
백성을 부하게 하는 것 이상 길(吉)한 일이 없고,
병사를 강하게 하는 것 이상 승(勝)은 없습니다.
이 일을 하고자 하시면 먼저 사람의 뜻(志)를 구해야 하는데
사람의 뜻을 구하는 데는 몇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즐기는 것을 끊으며 욕심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누(累)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며,
흉(凶)한 것을 누르고 악한 것을 버리는 것은 허물을 책망하는 것이며,
술을 금하며 여색(女色)을 막는 것은 더러운 것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싫은 것은 피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멀리하는 것은 착오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학문을 널리 익히기 위해 간절히 묻는 것은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이며,
행동은 고상하게 하며 말을 자상하게 하는 것은 수신(修身)하는 길이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겸손하고 절약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
 
깊이 헤아리고 앞일을 염려하는 것은 궁하지 않기 위해서이며,
어진(仁)것을 가까이 하고 바른(直) 것을 사귀는 것은
기울어지는 것을 받쳐 세우는 일이며,
악을 숨기고 선을 나타내 주는 것은 사람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재주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며 능한 사람을 부리는 것은
사물을 잘 경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간사한 것을 멀리하고 거짓을 물리치는 것은 난을 그치게하는 일입니다.
 
옛 것을 쌓아 새것을 알게 하는 것은 이치를 가리는 것이며,
변(變)을 일으켜 권(權)에 이르는 것은 맺은 것을 풀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성제명왕(聖帝明王)께서 겸손한 언사와 후한 예물로
어진 선비를 대우 할 때에, 한번 먹으면서(一飯) 세 번 토했다 씹으며(三吐哺),
한번 목욕(一沐)하는데 세 번 털을 잡으니(三握髮) 누가 감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임금되신 분은 깊이 생각하며 힘써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웃나라 주(周) 왕조가 전국(戰國)이 되었으니,
그 영향이 우리 나라에 적지 않습니다.
 
지금 전하의 좌우에 있는 모든 신하는 다 전(前) 임금의 옛 신하입니다.
 
전 임금게서 남긴 덕을 생가하여 받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진심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보좌하고 있으니,
진실로 귀를 기울이시어 열성조(列聖朝)의 유업(遺業)을 견고하게 하시며,
지사(志士)들의 의기(義氣)를 널리 펴게 하시며,
스스로의 긍지를 갖게하여 충성스럽게 하는 바른 말을 막지 마소서.
신(臣)도 역시 전 임금의 신하로서 나이 90이 넘어 오랫동안 병상에 누어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잇사오니, 생명이 조석(朝夕)을 다투고 있습니다.
 
다시는 천측(天側)을 가까이 할 수 없기에 고통을 억지로 참고
몇 말씀 드리고자 하오나 정신이 혼미하여 고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임금께서 끝까지 들으시고 슬프게 여기시며 칭찬하여 감탄하시기를
“새도 죽을 때에 그 우는 것이 슬프고 사람도 죽을 때에 그 말이 선하다 하더니,
이제 <한문거韓文渠>의 말이 선하고 아름답도다.”하시고,
 
사람을 시켜 문병하게 하였는데,
그 날 바로 <한문거>가 죽으니 국장(國葬)을 명하셨다.
 

 
周 무왕의 건국(BC 1122년) 이후 25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서주는
10대 여왕(厲王·재위 BC 879~BC 842년)에 이르러 중대한 고비를 맞는다.
 
여왕(厲王)이 부정부패의 화신으로 정권을 농단한
<영이공榮夷公>이라는 인물을 기용한 게 화근이었다.
 
여왕(厲王)은 듣기 싫은 직언을 금하고 비방하는 자를 죽이자
백성들은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충신 <소공召公>이 간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건 물을 막는 것보다 나쁩니다.
물이 막혔다 터지면 피해가 더 많지 않습니까.
 
치수하는 자는 수로를 열어 물을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백성들을 이끌어 말을 하게 합니다.
 
백성이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후에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왕(厲王)은 듣지 않았다.
 
3년 뒤 마침내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여왕(厲王)을 습격했다.
 
여왕(厲王)은 체(체·산시성 훠셴:縣)로 달아났다.
 
이때부터 소공과 주공(周公·무왕때 주공의 둘째아들 후손) 등
두 재상이 나라를 14년간 다스리니 그 시대를 공화(共和)라 한다.
 
공화정의 시효라 할 수 있다.
 
두 재상은 14년 뒤 성장한 여왕(厲王)의 아들 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39년 뒤 다시 강족(姜族)의 침략을 받고 대패한다.
 
이 때부터 천하에 혼란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그러다 선왕의 뒤를 이은 유왕(幽王·BC 782~BC 771년)에 이르러 파국을 맞는다.

 
 
BC 847 <선비(鮮卑)의 조공>
 
갑인년(甲寅年)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酋長) 문고(們古)가 찾아와 공물을 바쳤다.
 
 
선비산(鮮卑山)은 선비족(鮮卑族)이 사는 지역에 있는 산(山)이 된다.
 
선비(鮮卑)의 역사는 BC 3897년 이전의 환국(桓國)시대가 되는 BC 5000년경부터
12환국의 하나로서 이어져 온 것이 되는데,
특히 BC 1622년에는 단군조선 제15대 대음(代音) 천왕이
아우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봉하였던 것이며,
대대로 반역하지 않고 배달국을 중앙조정으로
정통성을 이은 나라로서 받들었던 것이 된다.
 
남선비(南鮮卑)는 선비의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며,
단군조선에서 선비를 나누어 그 남쪽에 대인(大人)을 특히 봉한 것이 된다.
 
대인(大人)은 고대중국의 대부(大夫)에 해당하는 벼슬직책이 된다.
 
선비(鮮卑)는 구려(句麗)의 서쪽이자 몽고리(蒙古里)의 남쪽이며
흉노(匈奴)의 북쪽이자 견족(畎族, 犬戎)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가 된다.
 
선비의 동쪽이 단군조선 삼한(三韓) 본국을 가리키는 동이(東夷)가 된다.
 
선비(鮮卑)를 선패(鮮稗) 또는 선백(鮮白)이라고도 하며,
통고사(通古斯, Tunggus)라고도 하는데,
통고사는 동호(東胡)의 다른 말로서,
결국 단군조선에 속한 백성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 된다.
 
고대중국의 기록은
흉노(匈奴), 선비(鮮卑), 번조선을 경우에 따라 동호(東胡)로 기록한다.
 
 
 
BC 838 <초(楚)나라 사람이 단군조선 조정(朝廷)에서 벼슬하다>
 
계해년(癸亥年)에 초(楚)나라 대부(大夫) 이문기(李文起)가
조정(朝廷)에 들어와 벼슬을 하였다.
 
 
초(楚)나라는 양자강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한 나라였는데,
적족(赤族, 南蠻)의 나라이며
전욱고양(顚頊高陽)의 아들이 여기에 봉해져 축융(祝融)이라 불렸고
그 후손이 BC 1180년경에 주문왕(周文王)을 섬기고
BC 1110년경 주나라 성왕(成王) 때 단양(丹陽)에 봉해졌다.
 
이후 BC 890년경 주나라 이왕(夷王) 때에 초나라가 왕을 참칭하였다 하고,
BC 741년에 초자웅거(楚子熊渠)라는 사람이 왕을 참칭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초자(楚子)는 초나라의 제후인 자작(子爵)이라는 말이며,
웅거(熊渠)는 그 사람의 이름이다.
 
BC 838년에는 주나라가 약해져 가면서
초나라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던 시대가 되는데,
주(周)나라는 폐쇄정치를 하였던 하(夏)나라나 은(殷)나라와는 달리
단군조선과 그 백성들이 오고가는 왕래가 상대적으로 쉽고 자유로왔던 것이 된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주(周)나라 또는 주나라 제후국 출신의 사람들이
단군조선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많이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BC 837 <일식(日蝕)>
 
갑자년(甲子年) 봄 3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BC 835 <흉년(凶年)>
 
병인년(丙寅年)에 농사가 크게 흉작(凶作)이었다.
 
 
 
BC 818 <주(周)나라의 조공>
 
계미년(癸未年)에 주(周)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이때 주나라 왕은 제11대 선왕(宣王)이며 이름은 정(靜)이고,
BC 828년부터 BC 782년까지 46년간 재위하였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주나라 사람 한직(韓直)이
호랑이 가죽과 코끼리 가죽을 많이 가져와 천왕께 바쳤다라고 기록하는데,
이 한직은 주나라 초기에 제후로 봉해졌던 한씨(韓氏) 집안 사람이 된다.
 
한씨는 주나라 초중기에 거의 망하여 제후국 대열에서 사라졌는데,
BC 403년에 조(趙)나라와 위(魏)나라와 함께
진(晋)나라를 나누어 독립하여 한(韓)나라가 되었으며,
한나라 출신으로 한비자(韓非子)가 유명하다.
 
 
 
BC 813 <삼성사(三聖祠) 건립>
 
무자년(戊子年)에 감물 천왕께서 영고탑(寧古塔)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祭)를 올렸다.
 
이때 맹서하여 올린 서고문(誓告文)의 글이 있다.
 
“삼성(三聖)의 존귀하심은 삼신(三神)과 함께 그 공을 나란히 하시며,
삼신(三神)의 덕(德)은 삼성(三聖)에 의하여 더욱 크시도다!
 
텅빈 것과 속이 있는 것은 같은 몸이며, 낱과 모두는 하나로 같도다!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 형체와 영혼은 함께 움직여 가도다!
 
참된 가르침은 이에 서고 믿음은 오래오래 스스로 밝도다!
 
그 기세를 이어 존중하고, 빛을 돌이켜 몸을 돌아보면,
저 백악(白岳)은 만고(萬古)에 하나같이 푸르리리!
 
열성(列聖)께서 이어 문명를 짓고 예약을 일으키니 근 본보기는 이로써 크며,
도(道)와 술(術)은 깊고 크나니,
하나를 잡으면 셋이 포함되고, 셋을 모으면 하나로 돌아가도다!
 
크게 하늘의 계율을 펴서 영원히 세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로다
 
 
영고탑(寧古塔)은 단군조선 시대에 본궁(本宮)에 화재(火災) 등
천재지변이나 변란(變亂)이 생겼을 때 잠시 피하던 이궁(離宮) 즉 별궁이었다.
 
영고탑 서문 밖에 감물산(甘勿山)이 있고,
이 감물산 밑에 한인(桓因), 한웅(桓雄), 단군왕검(檀君王儉, 桓儉)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서, 감물(甘勿) 천왕께서 친히 제(祭)를 올린 것이다.
 
이 감물산(甘勿山)과 감물(甘勿) 천왕의 휘자(諱字)가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즉 감물산에 삼성사를 세운 것으로 인하여
감물이라 시호를 올린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서고문(誓告文)은 하늘에 맹서하여 올리는 글이라는 말이다.
 
여기 감물산(甘勿山) 삼성사(三聖祠) 서고문(誓告文)은
삼신(三神)과 삼성(三聖)의 은덕(恩德)을 찬양하고 그 뜻을 받들어
하늘의 계율(戒律)을 법(法)으로 삼겠다는 맹서(盟誓)를 담고 있다.
 
한편, BC 1285년에 후기 단군조선을 시작한 제22대 색불루(索弗婁) 천왕이
마한(馬韓) 여원흥(黎元興)으로 하여금 백두산 제천단에서 대독(代讀)하게 한
소위 백두산서고문(白頭山誓告文)은 색불루 천왕이 선대 천왕의 대를 잇고
그 정통성을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을 맹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BC 795 <도리가 - 풍년 축가(祝歌)>
 
병오년(丙午年)에 오곡(五穀)이 풍성하게 익어
백성들 모두가 기뻐하며 도리가(都里歌)를 지어 불렀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에는 아침해 솟아, 밝은 빛으로 비추어 빛나고,
나라에는 거룩한 분 계시어, 덕의 가르침은 널리 퍼지네!
큰 땅 나라 우리 배달, 거룩한 조정으로,
많고 많은 사람마다, 가혹한 정치 보지 못하네!
빛나게 밝게 노래하며 길이길이 태평하리!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도리가는 “드리 노래“라는 소리를 나타낸 이두식 표기로서,
드리는 노래, 바치는 노래 즉 헌가(獻歌)를 가리킨다.
 
도리가는 공수(貢壽), 공수(供授), 두열(頭列), 조리(朝離), 주리(侏離), 도솔(都率)
등으로 불리는데, 모두 “바침, 받드리, 드리”라는 말을 나타낸 이두식 표기가 된다.
 
 
 
BC 786 <두개의 태양과 누런 안개>
 
을묘년(乙卯年)에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BC 771 <주나라의 분열>
 
기원전 771년(경오) 주나라 유왕 11년(진(晉)나라 문후 10년),
 
유왕이 신나라를 치려 하자 신후(申侯)가 견융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서
호경을 공격하여 여산(驪山) 아래에서 유왕을 살해하고 포사를 사로잡았다.
 
제후들이 태자 <희의구>를 임금으로 세우니 이 사람이 바로 평왕(平王)이다.
 
평왕이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니 역사에서는 이를 동주(東周)라 한다.
 
괵공(虢公) 곽한(郭翰)이 따로 유왕의 아들 <희여신姬餘臣>을 임금으로 세우니
이 사람이 바로 휴왕(攜王)이다.
 
이로써 주나라 왕조는 둘로 분열되었다.
 
정나라 환공(桓公) <희우>가 여산에서 전사하자
아들 무공(武公) <희굴돌姬掘突>이 자리를 이었다.
 
 
 
BC 767 <황충(蝗蟲) 피해와 홍수>
 
갑술년(甲戌年)에 황충(蝗蟲)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황충(蝗蟲)은 누리라고 하는데,
들판의 벼 등 곡식을 먹어 치우는 메뚜기의 일종이 된다.
 
단군조선의 화폐가 되는 소위 명도전(明刀錢)에 메뚜기의 원어가 되는 말로서
“메도긔”라고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세종대왕 때에는 메뚜기를 “멧독”이라고 적고 있다.
 
한편, 메는 벼(禾, 稻)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BC 759 <범(호랑이)이 궁전에 들어오다>
 
임오년(壬午年)에 범(虎)이 궁전(宮殿)에 들어왔다.
 
 
 
 
BC 753 <주(周)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올리다>
 
무자년(戊子年)에 주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어
마조선(馬朝鮮)의 마한(馬韓) 사우(斯虞)에게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올렸다.
 
 
주나라 왕 의구(宜臼)는 제13대 평왕(平王)이며,
BC 770부터 BC 720년까지 51년간 재위하였으며,
수도를 낙읍(洛邑) 즉 낙양(洛陽)에 두어 동주(東周)시대의 첫 왕이 되었다.
 
즉 이때부터 소위 주나라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되었다.
 
춘추시대란 주나라 조정(朝廷)의 세력이 약해지고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대로서,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라는 역사서를 집필한 데서 나온 말이 된다.

주나라 왕인 의구가 마한에게 신년하례를 올렸다는 기록은
주(周)나라의 왕인 천자(天子)는
마한(馬韓)의 아래 직책에 해당하는 것임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마한은 천왕의 비왕으로서 천왕격의 임금이 되어
일반적인 천군(天君)보다도 위가 된다.
 
천군(天君) 저 아래에 일반적인 하늘의 제후인 천자(天子)가 있다.
 
 
 
BC 723 <웅습(熊襲)의 난을 평정하다>
 
무오년(戊午年)에 사벌 천왕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해상(海上)의 웅습(熊襲)을 평정하였다.
 
 
 
BC 707 <사벌단제 燕과 齊를 정벌하다>
 
갑술년(甲戌年)에 사벌 천왕께서 조을(祖乙)을 파견하여
바로 연(燕)나라의 수도를 뚫고 나가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전쟁하였는데, 승전하였음을 알려 왔다.
 
 
이때 연(燕)나라는 순덕부(今 석가장시)와 하간부(今 하간)지역에 있었고
BC 650년경에 고죽국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합공으로 망한 것이 되는데
BC 323년에 연나라 이왕(易王 또는 역왕)이 칭왕을 하고,
BC 226년경 연(燕)나라가 진(秦)나라에 수도를 함락당하여
연희왕(燕喜王)이 요동(遼東)으로 가서 수도를 삼은 곳이
지금의 북경(北京) 동쪽 계(薊)지역이다.
 
이때 요수(遼水)는 북경의 동북쪽 밀운을 감싸도 흐르는
대요수(大遼水)로서 지금의 조백신하가 된다.
 
고죽국은 산서성 최 남단에 위치하였는데, BC 650년경 燕과 齊의 합공으로 패망하고
그 유민이 백이 숙제의 사당을 지금의 노룡에 세운 것이다.
 
단군조선의 군사가 연나라를 뚫고 남하하여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臨淄)의 남쪽 부근에서 제나라 군사와 전쟁을 하여 승전하였던 것인데,
임치는 산동반도의 북부가 되는 황하 하류 부근에 위치하며,
당시 임치의 주위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현존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BC 703 <흉노가 번한에 조공하다>
 
무인년(戊寅年)에 흉노(匈奴)가 번조선(番朝鮮)의 번한(番韓) 엄루(奄婁)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天王)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조공(朝貢)을 하고 돌아갔다.
 
 
 
BC 677 <지진과 해일>
 
갑진년(甲辰年)에 지진(地震)과 해일(海溢)이 있었다.
 
 
 
BC 673 <다리가 8개 달린 송아지 출생>
 
무신년(戊申年)에 서촌(西村)에 있는 민가(民家)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BC 670 <용마(龍馬) 출현>
 
신해년(辛亥年)에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BC 667 <삼도(三島)의 난(亂) 평정>
 
갑인년(甲寅年)에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槃命)을 보내어
해상(海上)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는데,
마조선(馬朝鮮)의 마한(馬韓) 궁홀(弓忽)이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戰船) 500척을 이끌고 가서 왜(倭)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하였으며,
12월에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BC 665 <제(齊)나라의 단군조선 제후국 침공>
 
BC 665년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영지국(永支國),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였다
라고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적고 있다.
 
 
BC 770년부터 주나라는 소위 춘추시대가 시작되는데,
BC 679년부터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패자(覇者)가 되어
BC 668년에 단군조선의 직할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병합하고,
BC 666년에 위(衛)나라를 침공하고
BC 665년에 영지국(永支國)과 고죽국(孤竹國)을 침공한 것이 된다.
 
영지국(永支國)은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요중(遼中) 12성(城) 중 하나인
영지성(永支城)으로서 일개 성(城)에 지나지 아니하나,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나라(國)로 기록되고 있어
제후국에 버금가는 세력을 갖춘 것이 된다.
 
보통 성(城)의 책임자인 성주(城主)는 주로 지방장관인 욕살(褥薩)이 되나
대부(大夫)에 해당하는 직(職)이나 제후(諸侯)가 봉해지는 경우도 있다.
제후가 봉해지는 경우는 국(國)이 된다.
 
고죽국(孤竹國)은 BC 2224년에 시작된 하(夏)나라 이전부터 존속하여
BC 650년경에 연나라와 제나라의 침공으로 망한 것으로 되어
약1,600년을 존속한 나라가 된다.
 
 
 
BC 653 <매륵단제의 燕 정벌과 齊나라의 구원>
 
무진년(戊辰年)에 매륵(買勒) 천왕께서 군사를 보내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케 하였더니,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齊)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伏兵)에 걸려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하고 물러갔다.
 
 
제(齊)나라 환공(桓公) 시대의 고대중국 기록에서는
산융(山戎)의 임금을 말로(末路)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산융(山戎)은 위치상으로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던 구려(句麗)가 되며,
말로(末路)라는 글자는 당시 단군조선의 제36대 천왕이던
매륵(買勒)과 유사한 소리가 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산융(山戎)을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으로 사용한 것이 된다.
 
한편, 고대중국의 기록에서는 BC 651년 제나라 환공이
산융(山戎), 이지(離支), 고죽(孤竹)을 정벌하였다고 하는 바,
이 기록은 단군세기의 BC 653년 기사와 관련있는 것이 되는데,
BC 653년에 단군조선이 수유국(須臾國)과 합공으로 연나라를 정벌하자,
연나라는 당시 주(周)나라 제후국 중에서 패자(覇者)의 나라이던
제(齊)나라에 긴급을 알려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제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의 보필로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고죽국(孤竹國)에 쳐들어 왔다가, 소득없이 물러간 것이 된다.
 
당시 제나라 환공이 관중과 함께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고,
수유국으로  진격하였으나 모랫바람에 후퇴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BC 642 <방공전(方孔錢) 주조>
 
기묘년(己卯年)에 방공전(方孔錢)을 주조(鑄造)하였다.
 
 
 
BC 639 <모문국(毛文國)의 반란>
 
임오년(壬午年)에 모문(毛文)의 제후인 유례(有禮)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BC 637 <주(周)나라 공주를 천왕비로 삼다>
 
갑신년(甲申年)에 마물(麻勿) 천왕께서 주(周)나라 공주(公主)를 천왕비로 삼았다.
 
 
 
BC 622 <거미와 뱀의 싸움>
 
기해년(己亥年)에 궁궐 동산에 큰 뱀이 들어와 죽었다.
 
 
궁액기(宮掖記)에 의하면,
“궁궐 뜰안에 큰 거미가 있었는데 큰 뱀이 와서 거미를 잡아 먹으려 하자
이에 거미줄 아래 엎드려 위를 향해 입을 열고 독기를 토하였으며,
몇날이 못되어 뱀이 죽고 거미는 여전히 살아 있었는 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뱀의 배를 가르고 검사 해보니,
배 안에 큰 석웅황(石雄黃) 한 뭉치가 있는 것을 보고
거미가 복수하고자 뱀을 죽이는 유일한 독약인 석웅황을 구하여
묘한 계책으로서 먹여 죽인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궁액기라는 기록에 거미와 뱀의 싸움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면,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BC 609 <연못이 만들어 지고 샘이 솟다>
 
임자년(壬子年)에 성(城)의 북쪽 땅이 내려앉아 큰 연못이 되니,
큰 샘이 솟아나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였다.
 
 
BC 599 <용사(龍師) 황학노(黃鶴老)>
 
임술년(壬戌年)에 도인(道人) 황학노(黃鶴老)가 신술(神術)이 있어
풍력(風力)으로 40리를 오고가니 용사(龍師)라 하였다.
 
 
용사(龍師)란 용과 같이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도술(道術)을 부리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 된다.
 
황학노(黃鶴老)라는 말은 성씨가 황씨(黃氏)이며
이름이 학노(鶴老)라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황학(黃鶴)처럼 신선(神仙)같은 늙은이(老)라는 명칭일 수도 있다.
 
풍력(風力)으로 40리를 오고갔다는 것은, 바람을 타고 40리를 다녔다는 것이 되는데,
풍력을 이용하는 비법(秘法)을 알고 있었던 것이 된다.
 
 
 
BC 597 <신선(神仙) 양선자(養仙子)>
 
갑자년(甲子年)에 장백산(長白山)에 양선자(養仙子)라는 숨어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160살에 이르렀어도 피부가 어린아이와 같았다.
 
 
 
BC 591 <한웅, 치우, 단군왕검의 삼조(三祖)의 상(像)을 모시게 하다>
 
경오년(庚午年)에 천왕께서 사신(使臣) 고유(高維)를 파견하여
한웅(桓雄), 치우(蚩尤),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삼조(三祖)의 상(像)을 나누어 주어
관가(官家)에서 모시게 하였다.
 
 
BC 591 <천왕께서 남쪽을 순수하다 기수(淇水)에서 붕하시다>
 
경오년(庚午年)에 마물(麻勿) 천왕께서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하시니 태자(太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BC 581 <정(鄭)나라 사람이 들어와 살다>
 
경진년(庚辰年)에 정(鄭)나라 사람 신도회(申屠懷)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살았다
 
 
BC 268년경 공자(孔子)의 7세손이라 기록되는
위(魏)나라 사람 공빈(孔斌)이 지었다는 홍사(鴻史)의 서문에서
주(周)나라와 동이(東夷)가 1,000년을 넘게 우방(友邦)이었으며,
양국의 백성들이 오고감이 많았다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정(鄭)나라는 낙양의 동쪽에 있던 나라로서,
BC  800년경에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환공(桓公)을 봉한 곳이며,
BC 375년에 제33대 군을(君乙)이
한(韓)나라의 애후(哀侯)에게 망하면서 정(鄭)은 한(韓)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BC 576 <백학(白鶴)이 춤을 추다>
 
을유년(乙酉年)에 흰 두루미(鶴)가 궁궐의 안에 있는 소나무에 와서 살더니
음악소리를 듣고 내려와 춤을 추었다.
 
 
학(鶴)은 우아(優雅)한 자태를 지니고 있고
특히 하얀 학은 평화로움을 나타내는 새라 할 것인 바,
백학(白鶴)이 음악을 듣고 춤을 추었다는 것은
태평시대(太平時代)임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BC 567 <래(萊)나라가 제나라에 망하다>
 
갑오년(甲午年)에 산동지역에 있던 래국(萊國)이 제나라에 망하였다.
 
 
래국(萊國)은 래이(萊夷)라고 불리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데,
BC 650년경에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연합군에 망하였던
고죽국(孤竹國)의 후예국인 즉묵(卽墨)이라는 나라의 후신(後身)이 된다.
즉묵은 절묵(節墨)이라고도 한다.
 
 
 
BC 565 <송(宋)나라 황노술의 딸이 태자궁(太子宮)에 살다>
 
병신년(丙申年)에 송(宋)나라 사람 황노술(黃老述)의 딸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입국하여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함께 살았다.
 
 
 
BC 558 <표상술의 상주문>
 
33년에 <표상술表相述>이 아뢰기를
 
“새의 둥지를 뒤집어 놓으면 알이 떨어져 성할 리 없고,
나라가 망한 속에서는 평안한 백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타는 집과 새는 배에서 근심을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음식이 떨어져 여러날 굶주리면 병이 나지 않을 몸이 없으니,
국가는 천하의 대기(大器)입니다.
만일 한번 기울면 사람의 힘으로 갑자기 바로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훌륭한 왕이 기울기 전에 힘쓰는 것은
앞으로 기울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밝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임금께서는 이 말을 따라, 국정을 밝게 살피셨다.
 
- 표상술(表相述)의 시(詩)
 
孤燈滄海夜   외로운 등불은 밤바다를 밝히고
秋雨讀兵書   가을비 내리는데 병서만 읽네.
洗劍掛石壁   칼을 씻어 석벽에 거니
雷聲動天地   우레 소리 천지를 진동하도다.
 
 
위 표상술의 시를 보면, 단군조선은 병법이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고대중국 역사에서 전쟁의 신(神)으로 받들어지는 배달국 제14대 한웅(桓雄)이신
치우천왕(蚩尤天王)이 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 백전백승한 전력(戰歷)과
BC 2470년경 출생한 인물로서 순(舜)의 아버지이기도 하며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보필한 유호씨(有戶氏)가
하(夏)나라 우(禹)와 계(啓)와의 약30년에 이르는 전쟁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였다는 전력(戰歷)만 보더라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것이다.
 
 
BC 556 <진(晉)나라 김일선의 입조(入朝)>
 
을사년(乙巳年)에 진(晉)나라 사람 김일선(金日善)이
천문지리학(天文地理學)을 가지고 조정(朝廷)에 참여하였다.
 
 
진(晉)나라는 주(周)나라 춘추시대에 주로 황하 북부지역에 있던 나라로
진(秦)나라 동쪽이자 연(燕)나라 서쪽에 위치하였으며,
BC 632년에 문공(文公) 시절에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춘추시대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BC 453년에 한위조(韓魏趙)의 세나라에 망하였고,
BC 403년에 이 한위조 세나라가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후 전국(戰國)시대라 부르게 된다.
 
 
 
BC 551 <제(齊)나라 상인 노일명(老一明)의 조공>
 
경술년(庚戌年)에 제(齊)나라 상인(商人) 노일명(老一明)이
고급비단을 싣고와 천왕께 바쳤다.
 
 
BC 551년은 노(魯)나라 양공 22년으로서 노나라에서 공자(孔子)가 출생한 해가 된다.
공자는 BC 479년에 사망하여 72세를 살았다.
 
 
BC 549 <초나라 사람 번석문의 망명>
 
임자년(壬子年)에 초(楚)나라에서 망명한 번석문(樊釋文)이
황금 40근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초(楚)나라는 주(周)나라 제후국 중에서 가장 먼저 왕(王)을 칭한 나라로서,
BC 741년에 웅거(熊渠)가 칭왕을 하였는데,
이 웅거의 성씨가 웅씨(熊氏)로서 배달나라 웅족(熊族)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웅족으로는 크게 웅씨(熊氏), 고씨(高氏), 여씨(黎氏), 공손씨(公孫氏), 희씨(姬氏)
등이 있다.
 
웅씨의 시조는 배달나라 천황비(天皇妃)가 된 웅녀군(熊女君)이 되고,
고씨의 시조는 배달나라 초기에 농사담당이 된 고시씨(高矢氏)가 되며,
여씨의 시조는 BC 2800년경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단허(檀墟)에 왕검(王儉, 임금)으로 봉해진 사람이며,
공손씨의 시조는 유웅국(有熊國) 시조인 소전씨(少典氏)의 후손 중에서
나온 인물이 되고, 희씨의 시조는 공손씨의 후손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이다.
 
 
 
BC 545 <연(燕)나라 사절의 입조(入朝)>
 
병진년(丙辰年)에 연(燕)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BC 544 <초(楚)나라 사절의 입조(入朝)>
 
정사년(丁巳年)에 초(楚)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BC 542 <슬후(膝侯)의 아들 섭이(攝珥)의 입조(入朝)>
 
기미년(己未年)에 슬후(膝侯)의 아들 섭이(攝珥)가 입조(入朝)하였다.
 
 
 
BC 536 <송(宋)나라 정상충(鄭尙忠)의 입국(入國)>
 
을축년(乙丑年)에 송(宋)나라 사람 정상충(鄭尙忠)이
자기 나라 사람 50명을 거느리고 입국(入國)하였다.
 
 
송(宋)나라는 BC 1122년경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던
미자(微子) 자계(子啓)를 하남성(河南省) 상구(商丘)에 봉한 제후국이다.
 
미자(微子)는 기자(箕子)의 조카가 되며,
은나라가 망하자 은나라의 제사를 잇기 위하여 옷을 벗고
한손에는 제기(祭器)를 들고 한손에는 양(羊)을 끌며
이마에는 띠를 두르고 무릎으로 걸으면서 호소하며 군문(軍門)을 나서자,
이에 무왕(武王)이 용서하여 송나라에 봉하고서
은(殷)나라의 대(代)를 잇게 하였던 것이다.
 
송나라는 춘추시대 중엽에 조(曹)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융성하기도 하였으나,
BC 286년에 제(齊), 초(楚), 위(魏)의 연합군에 망하였다.
 
노(魯)나라 사람 공자(孔子)는 그 조상이 송(宋)나라 사람인데,
그 후손이 노나라에 옮겨 살았던 것이다.
 
 
BC 533 <제(齊)나라 사절이 오다>
 
무진년(戊辰年)에 제(齊)나라의 사절이 왔다.
 
 
제(齊)나라는 BC 1122년경에 주무왕(周武王)이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산동(山東)지역에 봉한 제후국이다.
 
강태공의 선대는 원래 강씨(姜氏)로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의 후손인데,
하(夏)나라 때 여(呂)에 봉해져 여씨가 된 것이다.
 
강태공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라 하는데,
BC 1211년생으로 BC 1140년 72세로 은나라의 제후국이던
서방의 주(周)나라 서백(西伯) 창(昌)에 의하여 등용되었으며,
이에 무왕에 의하여 문왕(文王)으로 추봉된 서백 창(昌)이
태공(太公)이라 불리는 할아버지인 고공단부(古公亶父)가
기다리던(望) 인물이라 하여 여상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던 것에서,
강태공(姜太公)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제(齊)나라는 주(周)나라 초기에 강성하였다가 쇠퇴하였는데,
이후 BC 700년경 춘추시대에 다시 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BC 679년에 환공(桓公)이 패자(覇者)가 되었다.
 
제나라는BC 567년에 산동지역의 래이(萊夷)를 멸망시켰으나
래이는 이후 다시 부흥하여 BC 284년까지도 존속하였던 것이 되며,
BC 668년에 병합되었다가 다시 부흥한 서국(徐國, 徐夷)을 BC 526년에 정벌하였고,
 
BC 386년에 전씨(田氏)가 주인(主人)이 되었는데
BC 334년에 선왕(宣王)이 칭왕을 하였던 것이고,
BC 286년에 위(魏)나라, 초(楚)나라와 연합하여 송(宋)나라를 멸망시켰으며,
BC 221년 전국(戰國)시대에 마지막으로 진(秦)나라에 망하였다.
 
 
 
BC 531 <진(晉)나라 사절이 오다>
 
경오년(庚午年)에 진(晋)나라 사절(使節)이 왔다.
 
 
진(晋)나라는 주(周)나라 2대 성왕(成王)의 아우인 당숙우(唐叔虞)가 봉해진 곳으로,
황하 중류에서 산서성(山西省) 일대에 걸쳐 위치한다.
 
즉 진(晋)나라의 중심은 BC 2357년에 천자(天子)가 된
요(堯)임금의 당(唐)이라는 땅이 된다.
 
당(唐)나라의 수도는 태원(太原)의 남쪽으로
황하 남류(南流)와 동류(東流) 사이에 위치한 평양(平陽)이라 불리던 곳이다.
 
진(晋)나라는 BC 632년에 문공(文公) 중이(重耳)가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BC 453년에 한위조(韓魏趙)의 제후들에게 망하였으며
BC 403년에 결국 한(韓), 위(魏), 조(趙)의 나라로 삼분(三分)되었고,
BC 378년에 완전히 망하였던 것이다.
 
한(韓)나라는 수도가 평양으로 하남성 남부에서 산서성에 걸친 나라이며,
위(魏)나라는 수도가 안읍(安邑)으로 섬서성(陝西省) 동부와 산서성(山西省) 남부와
하북성(河北省) 북부에 걸쳐 천하의 중앙이었으며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하였고,
조(趙)나라는 수도가 중모로서 하북성 남쪽에서 산서성 북쪽에 걸치며
서쪽의 진(秦)나라와 접하였다.
 
진(晋)나라는 그 위치상으로 북동에 위치한 산융(山戎)과 관련이 많은데,
산융은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인 구려국(句麗國)이 되며,
단군조선의 대칭(代稱)이 되기도 한다.
 
 
 
BC 530 <초(楚)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다>
 
정미년(丁未年)에 초(楚)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
 
 
 
BC 526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다
 
을해년(乙亥年)에 제(齊)나라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
 
 
 
 
BC 518 <공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묻다>
 
계미년에 노나라 사람 공구(공자 BC551-BC479)가 주나라에 가서 예(禮)가 무엇인지,노자 이이에게 물어 보았다.
 
(대답 중에) 노자 아버지의 성은 한(韓)이고, 이름은 건(乾)이며,
조상은 풍인이라 하였다.
 
후에 서토를 탈출하여 내몽고에 들어가 아유타에서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고 하였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지만 은(상)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사기 공자세가>
 
 
노자의 아버지는 한건(韓乾)이며 그 선조는 풍인(風人)이라 한다.
풍(風)은 태호복희(太皞伏羲) 후손들이 사는 땅이 된다.
 
노자는 한씨(韓氏)를 고쳐 목자(木子)로서
즉 동방(東方)의 아들(子)이라는 뜻으로 이씨(李氏)를 사용한 것이 된다.
 
노자는 BC 603년생이며 공자는 BC 551년생으로서 52년의 차이가 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해당하는 것이 되며,
BC 518년에 노자는 86세이며 공자는 34세였던 것이 된다.
 
 
※ 참고 <공자(孔子)>
 
중국의 사상가 공자(BC 551-BC 479)는 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에 의하면
춘추시대 송나라 사람 미자(微子)의 후손이다.
 
그는 불우하게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 정수리 부분이 오목하다 하여
이름을 구(丘)라 하였고, 후에 중니(仲尼)라 하였다. 중니(仲尼)는 공자의 자(字)이다.
 
공자의 사상은 인(仁)과 예(禮)를 중시하는 사상으로
당시 혼란한 춘추전국시대가 온 것은 여러 제후들의 하극상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이 혼란의 시대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인(仁)과 예(禮)를 중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중니(仲尼)의 사상은 당시로는 혁신적 사상이었으나 제후들은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니(仲尼)는 여러 나라(송나라, 조나라, 제나라, 노나라, 위나라, 초나라 등)를
떠돌다 끝내는 벼슬을 포기하고 68세에 초야에 묻혀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닦아 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논어(論語)는 공자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그는 72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공자(孔子)라는 칭호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공(孔)은 당시 혁신적 사상을 가졌던 사람을 칭하는 말이며,
자(子)는 존칭의 접미사다.
 
『사기』「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에 자신이 은(殷)나라 식으로 제사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나의 조상은 은(殷)나라 사람이니,
내가 죽으면 은(殷)나라 식으로 장례를 치러줄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은(殷)나라는 상(商)나라의 후예로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다.
 
당시 공자(孔子)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와 "유교무류(有敎無類)"를 들 수 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는 뜻이다.
 
이 말은 당시의 '하극상'과 무질서함을 꼬집어 제후가 왕을 멸하고,
신하가 주군을 죽이고, 자식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아비를 죽이는
혼란했던 시대 정신을 꾸짖는 말이었다.
 
"유교무류(有敎無類)"라는 말은
'가르치는 데는 종류가 없다.'라는 뜻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신분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모두 받아들여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즉 신분타파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런 혁신적 사상을 가졌던 공자는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환영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뜻과 합치하는 제후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였고,
끝내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초야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공자는 뛰어난 사상을 가졌지만 시대에 맞지 않게 태어난 불운의 영웅이었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공자가 주(周)나라 시대의 '봉건제도'로 환원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정명(正名)을 주장하였는데,
극기복례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자.'라는 뜻으로,
하극상의 욕망을 버리라는 주장이었고,
정명은 '이름의 뜻과 실제가 같도록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시 말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유교무류(有敎無類)",
"극기복례(克己復禮)", "정명(正名)" 등의 주장은
봉건제도로의 환원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혁신을 위한 공자의 뜻깊었던 주장이었다.
 
 
 
BC 516 <진충노(秦忠老)가 치도(治道)를 아뢰다>
 
을유년(乙酉年)에 진충노(秦忠老)가 아뢰기를,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도(道)는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人材)를 얻는 데 있사온대,
가장 시급한 일은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영재(英才)를 기르는 일이며,
각 부분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여 그 중에서 뽑아쓰면
천하가 태평하게 될 날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하니,
 
천왕(天王)께서 그렇다 하고서 각종 학교를 많이 세워 백성을 교육하였으며,
외국인들도 와서 유학하는 자가 많았다.
 
 
 
BC 512 <서국(徐國)이 오(吳)나라에 망하다>
 
기축년(己丑年)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서국(徐國)이
오(吳)나라 합려왕에게 망하였다.
 
 
오(吳)나라는 태백(太伯)과 중옹(仲雍)이 봉해진 곳이다.
 
태백과 중옹은 모두 주문왕(周文王)의 백부(伯父)인데,
아우 계력(季歷)에게 자리를 양보하고서
양자강 남쪽의 형만(荊蠻)으로 피하였던 인물로서
머리를 깎고 문신(文身)을 하여 살았던 인물이며,
이후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태백(太伯)의 자손을 봉한 것이다.
 
중옹(仲雍)은 우중(虞仲)이라고도 한다.
 
BC 580년경 태백(太伯)의 19대째인 수몽(壽夢)이 칭왕(稱王)을 하였다.
 
즉 오나라는 주나라의 제후국 중에서 초(楚)나라 다음으로 칭왕을 한 나라가 된다.
 
BC 515년에 즉위한 합려왕(闔呂王, 또는 闔盧王)이
BC 512년에 서국(徐國)을 멸망시켰으며,
BC 506년에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하기도 하였고,
BC 494년에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왕(越王) 구천(勾踐)을 사로잡는 등
전성기를 누리다가, BC 473년에 월(越)나라에 도리어 망하였다.
 
 
BC 509 <초(楚)나라 사절 입조>
 
병신년(丙申年)에 초(楚)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초(楚)나라는 전욱고양씨(BC 2514~BC 2436)의 아들이 봉해진
축융(祝融)이라 불리는 나라이며,
주(周)나라 성왕(BC 1115~BC1079) 때 웅역(熊繹)이
안휘성(安徽省)의 단양(丹陽)에 봉해졌다.
 
주나라 춘추시대가 시작되던 평왕(平王 : BC 770~BC 720) 시절에
초(楚)나라의 자작(子爵)이던 웅거(熊渠)가 BC 741년에 왕을 칭하여
주나라의 제후국으로서는 가장 먼저 주나라와 대등한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였다.
 
초나라 문왕(文王)이 BC 680년경에 산동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직할 제후국인
서국(徐國)을 침공하여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서국을 서산(徐山)으로 옮기게 하여 축소시켰으며,
BC 530년에도 다시 서국을 정벌하였다.
 
초나라는 BC 479년에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BC 447년에는 채(蔡)나라를 멸망시켰으며,
BC 334년에는 월(越)나라를 멸망시켰고,
BC 259년에는 노(魯)나라를 멸망시겼으며,
BC 223년에 초왕(楚王) 부추(負芻) 때 진(秦)나라에 멸망당하였다.
 
 
 
BC 504 <견융(犬戎)이 복종하다>
 
정유년(丁酉年)에 견융(犬戎)이 와서 복종하였다.
 
 
견융(犬戎)은 견융(畎戎)으로서 소위 구이(九夷) 중의 견이(畎夷)이며
한배달조선의 9족 중의 견족(畎族)이다.
 
융(戎)이란 병기(兵器)를 사용하는 족속이라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견족(畎族)은 서쪽의 삼위산(三危山)을 중심으로
황하중류의 서안(西安) 지역에 걸쳐 살던 황족(黃族)의 일파로서
대표적인 9족(族)에 속한다.
 
서안(西安)을 비롯한 그 서쪽의 사막지대는
한배달조선의 9족 중 백족(白族)인 백이(白夷) 즉 서이(西夷)가 살던 곳이다.
 
주(周)나라는 서이(西夷)를 주축으로 세워진 나라가 되는데,
그러나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天下)를 통일한 후
서이(西夷)를 서융(西戎)으로 야만족이라 하며 배척하였다.
 
BC 3897년경 배달국 초기에는 반고(盤固)라는 자가
10간(干) 12지(支)의 신장(神將)을 인솔하여 삼위산을 근거로 가한(可汗)이 되어
배달국의 천자국(天子國)이 되었으며,
단군조선의 구족(九族)에 속하며 후대 고구려(高句麗)와 대진국(大震國)의
동맹국으로서 형제국이라 불리는 돌궐(突厥 : 투르크, 터키)의 선대가 된다.
 
단군조선 말기에 이르러 천하(天下)의 천자국(天子국)들이
서서히 독립왕국으로 활동하면서 분리되어 나간 것이 되는데,
이 견족(畎族)인 견융(犬戎)도 이에 해당한다.
 
BC 504년에 견융(犬戎)이 와서 복종하였다는 것은
옛 질서대로 단군조선의 신하국으로서 예(禮)를 갖춘 것이 된다.

역사상 하은주(夏殷周)의 서쪽, 서북쪽, 북쪽, 동쪽, 남쪽에는
각각 소위 서융(西戎), 견융(犬戎), 북적(北狄) 또는 북융(北戎),
동이(東夷), 남만(南蠻)이 있었는데,
서융은 서이(西夷)이자 백이(白夷)인 백족(白族)이며,
견융은 견이(畎夷)이자 견족(畎族)인 황족(黃族)이고,
북적은 북이(北夷)이자 황이(黃夷)인 황족(黃族)이며,
동이는 단군조선 삼한관경 내 양족(陽族)과 우족(于族)과
방족(方族)을 포함하는 황족(黃族)과 회대(淮岱)지역의 남족(藍族)으로 이루어지며,
남만은 적이(赤夷)이자 적족(赤族)이 되는데,
이들 백족, 견족, 양족, 우족, 방족, 남족, 적족은
종주(宗主)인 황족(黃族)과 흑룡강 유역에 정착한 현족(玄族)과 더불어
모두 단군조선의 9족에 해당하는 것이다.
 
 
BC 490 <연(燕)나라 사절 입조>
 
신해년(辛亥年)에 연(燕)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BC 471 <정나라 사절이 오다>
 
경오년(庚午年)에 정(鄭)나라 사절이 왔다.
 
 
 
BC 461 <제나라 전굉의 망명>
 
경진년(庚辰年)에 제(齊)나라 대부(大夫) 전굉(田宏)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BC 447 <북적(北狄)이 입조하다>
 
BC 447년 북적(北狄)의 사자가 입조하였다.
 
 
 
BC 426 <우화충의 반란>
 
을묘년(乙卯年)에 융안(隆安)의 사냥꾼(獵戶) 우화충(于和冲)이
장군(將軍)을 자칭하고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郡)을 함락시켰는데,
천왕께서는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都城)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천왕께서는 좌우의 궁인(宮人)들과 함께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신주(神主)들을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海頭)로 나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어명(御命)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니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東西)의 압록(鴨綠)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BC 426년에 마조선(馬朝鮮)의 제32대 마한(馬韓) 가리(加利)가
융안의 우화충의 반란(叛亂)을 토벌(討伐)하러 출전(出戰)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BC 426년에 마한(馬韓) 가리(加利)의 손자인 전나(典奈)가
가리의 대를 이어 제33대 마한(馬韓)으로 즉위하였다.
 
 
우화충의 군사가 함락시킨 서북 36군(郡)은 백악산아사달의 서쪽에 있는 땅으로서
구려국(句麗國)과 진번국(眞番國)과 부여국(扶餘國)의 군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백악산아사달은 부여 땅 중에서 북부여에 위치하고,
진번국은 부여의 서쪽에 있는 서압록인 지금의 난하 서편으로
지금의 북경지역과 조백신하에 위치하여
BC 414년에 태원에서 대동으로 옮겨 온 燕나라와 접하고 있었다.
 
구려국은 선비와 흉노의 동쪽으로 진번국의 서북쪽이자
번조선의 북쪽에 걸치는 땅으로 내몽골 지역 남부의 일부도 포함된다.
 
물리(勿理) 천왕이 반란군을 피하여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나갔다는
그 해두(海頭)는 바닷가의 나루(津)가 되는데,
백악산아사달의 궁을 빠져나와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바닷가까지 나온 것이며,
이곳은 아마도 위치상으로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는 하구(河口)가 될 것이다.
 
물리 천왕이 전쟁 중에 붕하시어 경황이 없어 태자(太子) 등이 대를 잇지 못하고
어명(御命)을 받아 전공(戰功)을 세운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것이 되는데,
BC 295년에 단군조선의 마지막 제47대 천왕(天王)에 오른 고열가(古列加)는
물리 천왕의 현손(玄孫)이라고 전해진다.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어명(御命)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켰다는 것은,
구물은 당시 상장(上將)으로 욕살이었는데,
물리 천왕의 최측근으로서 신임을 받고 있었던 것이 되며, 종실(宗室)이 분명하다.
 
장당경(藏唐京)은 단군조선 시대에 전기와 후기에 이궁이었으며
BC 425년부터 BC 232년까지 단군조선 말기에 대부여의 수도로 삼은 곳이다.
 
동서(東西)의 압록(鴨綠) 18성은,
동압록은 지금의 요하이며 서압록은 지금의 난하인 바,
이 동압록과 서압록에 걸치는 지역에 있던 18성(城)이 되며,
물리 천왕의 명을 받은 욕살 구물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러한 사정을 듣고 18성의 욕살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구원한 것이 된다.
 
이때 마조선(馬朝鮮)의 제32대 마한(馬韓) 가리(加利)가
우화충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전(出戰)하였다가
날아오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는데,
당시 마조선(馬朝鮮)은 요동반도와 한반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마한(馬韓) 가리(加利)가 전사하자 가리의 손자인 전나(典奈)가 대를 이어
제33대 마한(馬韓)으로 즉위하였던 것이 된다.
 
 
 
BC 425 <상장(上將)인 백민성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다>
 
병진년(丙辰年) 3월에
큰물이 도성(都城)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이 큰 혼란에 빠졌으며,
이에 상장(上將) 구물(丘勿)이 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우화충의 무리를 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저절로 괴멸되니
마침내 우화충(于和冲)의 머리를 베었다.
 
 
BC 425년 병진년(丙辰年) 3월에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는 것에서,
단순한 홍수가 아니라 수공(水攻) 작전을 펼친 것이 된다.
상장 구물이 백악산아사달 부근의 강을 이용하여 수공작전으로
궁궐에 홍수가 나게 만들어 반란군을 혼란에 빠뜨려 승전한 것이 된다.
 
 
<구물(丘勿) 천왕 즉위>
 
병진년(丙辰年) 3월에 백민성 욕살(褥薩)인 상장(上將) 구물(丘勿)이
우화충(于和冲)의 반란(叛亂)을 진압하였으며,
이에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단(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藏唐京){今 朝陽}에서 즉위하였다.
 
 
음력 3월 15일은 BC 2241년에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붕하신 날로서
어천절(御天節)이라고 부르며,
다음날인 3월 16일은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지내는 날
즉 대영절(大迎節)이라 한다.
 
장당경은 단군조선 초기부터 이궁(離宮)으로 삼아 왔던 곳이며
제22대 색불루 천왕이
조부(祖父)인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의 사당을 세운 곳이기도 하다.
 
 
<대부여(大夫餘)와 삼조선(三朝鮮)>
 
BC 425년에 구물 천왕은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고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바꾸었으며,
이후 삼조선은 비록 단군(檀君)을 한분의 절대권자인
천왕(天王)으로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하였으나,
화해(和解)와 전쟁(戰爭)의 권한은 단군 천왕 한분에게만 있지 않았다.
 
 
구물 천왕이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바꾸었다 하였는데,
BC 1285년에 제22대 색불루(索弗婁) 천왕 때부터
이미 삼한(三韓)을 진조선(眞朝鮮), 마조선(馬朝鮮), 번조선(番朝鮮)의
삼조선이라는 관경으로 사실상 운영되어 왔던 것이 되며,
다만 군사권은 이때까지 천왕(天王) 한분이 전권(專權)을 가지고
명령을 하였던 것이 된다.
 
이때에 이르러 삼조선(三朝鮮)은 비록 단군(檀君)을 한분의 절대권자인
천왕(天王)으로 받들어 모시고 통치를 받기는 하였으나,
화해(和解)와 전쟁(戰爭)의 권한은 단군 천왕 한분에게만 있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진조선의 임금은 천왕(天王), 마조선의 임금은 마조선왕(馬朝鮮王),
번조선의 임금은 번조선왕(番朝鮮王)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임금인 한(韓)은 비왕(裨王) 또는 보왕(補王)으로서
본 임금인 천왕(天王)을 보좌하는 직책이 되고,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지 못하여 천왕의 명을 받아 군사를 부릴 수 있는데,
왕(王)은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지는 직책이 된다.
 
그리하여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의 임금을 한(韓)이라 하고
그 외 일반 군후(君侯)들을 한(汗)이라 하여
군사권은 어명(御命)을 받아 행사하도록 하여 군사적 분쟁을 없앴던 것이다.
 
다만, 왕(王)이라는 제도를 두기도 하였는데
BC 1289년에 개사원(蓋斯原)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소태(蘇台) 천왕께 우현왕(右賢王)에 봉해 줄 것을 요청하여 봉해졌던 것이며,
그 손자 색불루도 군사력을 기반으로 천왕(天王)에 즉위하는 혁명에 성공한 것이 된다.
 
대부여는 단군의 직할국(直轄國)을 말하며,
삼조선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퍼져 있던 고조선의 거수국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고조선의 국가 구조는 단군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국이 있었고,
단군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거수(渠帥)가 다스리는 거수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직할국의 도읍지가 신시(神市, 藏唐京)이고,
거수들이 다스리는 거수국의 도읍지를 국읍(國邑)이라 하였다.
 
초기 거수국들은 씨족 중심의 토착세력 추장들이 나라를 다스렸으나
후기에는 단군의 후손들이 거수국의 거수로 임명되어 거수국을 다스렸다.
 
이 제도는 삼한(三韓, 마한, 번한, 진한)이라는 만주와
한반도의 전 국토를 하나로 묶어 통일된 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토착세력과 단군의 후손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단군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토착세력들은 하나, 둘 독립을 하게 되는데,
이 시대가 바로 고조선 말기의 열국시대이다.
 
중국 사서와 삼국유사, 제왕운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조선의 열국들은 대략 20여 국이다.
 
그 20여 국의 열국은 다음과 같다.
가야, 신라, 한, 백제, 대방, 최씨낙랑, 동예, 동옥저, 행인, 읍루(숙신), 동부여,
개마, 구다, 조나, 주나, 해두, 갈사, 비류, 졸본부여, 고구려 등이다. 
 
중앙집권적이었던 고조선의 권력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지방분권화된다.
 
또 제정일치의 권력독점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제정이 분리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단군은 나라를 대표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을 전적으로 맡아 하였으나
이민족과의 전쟁에 관한 사항은
각 거수국의 거수들이 알아서 처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중국의 혼란과 연나라의 등장으로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일대의 번한지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고,
서융(우화충의 무리)의 만주 진출은 진한을 약화시켰다.
 
고조선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마한은 중앙집권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결국은 각 거수국들에게 자위권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해성(海城)을 평양(平壤)이라 하고 이궁(離宮)을 짓다>
 
BC 425년 가을 7월에 구물 천왕께서 해성(海城)을 개축하도록 명령하여
평양(平壤)으로 삼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해성(海城)을 개축하도록 명령하여 평양(平壤)으로 삼고 이궁(離宮)을 지었는데,
해성(海城){험독(산해관 유역)}은 장당경의 서남쪽에 위치한 성(城)으로서
BC 1285년에 색불루 천왕에 의하여 번한(番韓)으로 봉해진
서우여(徐于餘)가 욕살(褥薩)로 있었던 곳이며,
구물(丘勿) 천왕이 이때 해성(海城)을 평양이라 부르고 이궁(離宮)을 지은 것이다.
 
 
 
BC 424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
 
정사년(丁巳年)에 예관(禮官)이 청하여
3월 16일에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행하였다.
 
구물 천왕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조아리는 예를 올렸고,
따르는 무리들은 특별히 열 번 조아렸는데, 이를 삼육대례(三六大禮)라 한다.
 
 
 
BC 409 <효자(孝子)와 청렴(淸廉)한 자를 천거토록 하다>
 
임신년(壬申년)에 감찰관(監察官)을 각 주(州)와 군(郡)에 파견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을 살피게 하여 효자와 청렴한 자를 천거토록 하였다.
 
 
 
BC 403 <연(燕)나라가 새해 인사를 올리다>
 
무인년(戊寅年)에 연(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인사를 올렸다.
 
 
 
BC 401 <홍수로 밭농사 흉년이 들다>
 
경진년(庚辰年)에 홍수가 일어나 밭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BC 396 <제(齊)나라 사절 입조>
 
을유년(乙酉年)에 제나라의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다>
 
을유년(乙酉年)에 장령(長嶺)의 낭산(狼山)에 성을 쌓았다.
 
 
장령(長嶺)이 BC 396년 당시에는 단군조선의 영역 내에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요동(遼東) 땅이 되는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지역에 있는 긴 고개로서
당시 요수(遼水)가 되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의 동쪽에 있다.
 
장령(長嶺)은 장령(長岺)과 같은 말이다.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은 것은 아마도 연나라를 대비한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6년째인 BC 380년에
연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범하였다.
 
 
BC 393 <대동율령(大同律令) 공포>
 
무자년(戊子年)에 법령을 개정하여 대동율령(大同律令)이라 하여 천하에 공포하였다.
 
 
신왕종전(神王倧佺)의 시대 즉 소위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에는
계율(戒律)이나 율법(律法)이 곧 나라를 다스르는 법이 되는데,
단군조선 시대에는 실체적인 법규범을 만들어 공포하여 실시하였는 바,
BC 1282년에 공포된 8조금법(八條禁法)이 있으며,
이때 이르러 대동율령이 공포된 것이 된다.
 
이 대동율령(大同律令)이 8조금법에서 나아가 60여개조로 확장하여
구체적으로 더 자세하게 만든 법이 될 것이다.
 
 
 
BC 391 <빈민 구제>
 
경인년(庚寅年)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의 쌀을 다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BC 387 <감천이 솟다>
 
갑오년(甲午年)에 감천(甘泉)이 대묘(大廟) 앞에서 솟아 나왔다.
 
 
 
BC 385 <양생론을 바치다>
 
병신년(丙申年)에 곽태원(郭太原)이 양생론(養生論)을 저술하여 천왕께 바쳤다.
 
 
 
BC 380 <연나라의 침범>
 
신축년(辛丑年)에 연(燕)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郡)을 침범하므로
수비 장수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BC 379 <온천(溫泉)이 솟다>
 
임인년(壬寅年)에 온천이 성(城) 남쪽 삼사(三舍: 90리) 쯤 되는 곳에서
새로 솟아났다.
 
 
 
BC 377 <정(鄭)나라 사람이 누시계(漏時計)를 바치다>
 
갑진년(甲辰年)에 정(鄭)나라 사람 누경(屢景)이
누시계(漏時計)를 가지고 입조(入朝)하였다.
 
 
 
BC 376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에 봉하다>
 
을사년(乙巳年)에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에 임명하였다.
 
 
대부례(大夫禮)는 단군조선의 번조선(番朝鮮) 사람으로서
연(燕)나라가 도(道)에 어긋나는 짓을 하자
연나라로 건너가서 도(道)에 관하여 가르침을 주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BC 372 <가뭄>
 
기유년(己酉年)에 크게 가물어 초목(草木)이 말랐다.
 
 
 
BC 365 <연나라의 요서(遼西) 침범>
 
병진년(丙辰年)에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을 육박하였는데,
이에 번조선이 상장(上將) 우문언(于文言)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조선(眞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역시 군대를 보내와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伏兵)을 숨겨두고 협공(夾攻)하여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는
요서(遼西)의 모든 성(城)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여기서 요서(遼西)는 지금의 조백신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데,
이는 단군조선에서 패수{今 潮河)}를 기준으로 패수 서쪽이 되는 요서(遼西)이며,
운장(雲障)은 번조선의 요새(要塞)로서
상하 두곳이 있어 상하운장(上下雲障)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오도하(五道河)는 다섯 갈래의 강이 있는 곳이 되는데,
영정하(永定河)와 조백신하 사이에 있는 강이 된다.
 
당시 연나라의 침공이 대대적인 것이어서
진조선(眞朝鮮)과 마조선(馬朝鮮)에서도 군사를 파견하여 막게 하였던 것이며,
복병작전(伏兵作戰) 등을 통하여 연제(燕齊)의 연합군을 격퇴시키고
단군조선의 요서(遼西)지역인 조백신하 서쪽 지역을 모두 회복한 것이 된다.
 
 
 
BC 364 <우문언(于文言)의 추격>
 
정사년(丁巳年)에 연(燕)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며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이를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BC 362 <송나라 사람의 입경>
 
기미년(己未年)에 송(宋)나라 학사(學士) 오문언(吳文偃)이 입경(入京)하였다.
 
 
 
BC 355 <예기(禮記)>
 
병인년(丙寅年)에 노(魯)나라 학자 소문술(蘇文述)이
예기(禮記)를 가지고 입조(入朝)하였다.
 
 
 
BC 352 <주역(周易)>
 
기사년(己巳年)에 노(魯)나라 사람 안사득(顔思得)이
주역(周易)을 가지고 입경(入京)하였다.
 
 
 
BC 350 <북막(北漠)과 합공으로 연(燕)나라를 정벌하다>
 
신미년(辛未年)에 북막(北漠) 추장(酋長) 액니거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燕)나라를 칠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번조선의 소장(少將) 신불사(申不私)로 하여금 병력 일만명을 이끌고
합공(合攻)하여 연나라의 상곡(上谷)을 쳐서 빼앗아 성읍(城邑)을 설치하였다.
 
 
 
BC 349 <두개의 해가 뜨다>
 
임신년(壬申年) 8월에 두개의 해가 함께 떴다.
 
 
 
BC 347 <북견융의 침입>
 
갑술년(甲戌年)에 북견융(北犬戎)이 쳐들어와서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BC 345 <중화(中華) 열국(列國) 시찰>
 
병자년(丙子年)에 천왕께서 중화(中華)에 행차하시어
열국(列國)의 형세를 관찰하고 환궁하였다.
 
 
중화(中華)는 곧 고대 중국(中國)을 가리키는데,
특히 BC 1122년에 건국된 주(周)나라가
춘추전국시대에 주(周)나라를 중화(中華)라고 불렀던 것이며,
주(周)나라 밖에 있던 동서남북의 다른 나라를 사이(四夷)로서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 북적(北狄)으로 낮추어 불렀던 것인데,
이들 동서남북의 이족(夷族)들은 원래 단군조선의 천자국(天子國)이며,
특히 동이(東夷)는 고대 중국의 내륙 동이(東夷)를 포함하여
단군조선 삼한관경(三韓管境)의 본국(本國)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BC 345년은 주나라 시대로 보면 전국(戰國)시대 초기에 해당하는데,
단군조선은 BC 425년에 삼조선(三朝鮮)으로 불리게 되고,
번조선왕과 마조선왕으로 불리게 됨으로써
 번조선과 마조선이 각 군사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던 것으로
주나라의 정세와 단군조선의 정세는 유사한 면이 있기도 하다.
 
다만, 단군조선의 내부정세는 BC 425년부터 삼조선 시대가 되었으나
여전히 천왕(天王)의 권위를 부정하지 못하고 사후윤허(事後允許)를 받는 등
어느 정도 질서가 있었던 것이나,
주나라는 전국(戰國)시대에 각 제후들이 함부로 스스로 천자(天子)
즉 왕(王)을 칭하는 등 하여 주나라 천자(天子)를 무시하였던 것이다.

여루 천왕이 당시 중국의 열국을 시찰하였다는 것은
정세를 참작하여 정치에 반영하기 위하였던 것이 되는데,
당시 시찰하였던 주나라 열국들이 어느 나라들이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단군조선이나 번조선의 인근 나라가 되는
연(燕), 제(齊), 위(魏), 한(韓), 조(趙) 등이 될 것이다.
 
 
 
BC 343 <연(燕)나라와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다>
 
무인년(戊寅年)에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
 
 
상곡(上谷)은 영정하의 상류 부근에 위치하며,
태원(太原)의 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대동(大同)인데,
원래 단군조선의 구려국(句麗國)의 서남쪽 지역이 된다.
 
대동(大同)에서 태원에 걸치는 지역이 태행산(太行山)의 서쪽으로서
BC 1120년경에 은나라 왕족 기자(箕子)가 망명하여 정착한 기후국(箕侯國)으로서
소위 서화(西華)라는 땅이며, 태행산의 서남쪽에 고죽국(孤竹國)이 있었고,
이 기후국과 고죽국의 북쪽에 구려국이 있었던 것이며,
구려국과 기후국의 서쪽에는 흉노(匈奴)와 선비(鮮卑)
그리고 몽고리(蒙古里)가 남에서 북으로 걸쳐 있었던 것이 된다.
 
여기 조양(造陽)은 상곡(上谷)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 되는데,
후대에 대릉하 부근에 생긴 조양(朝陽)과는 다른 지역이며,
여기 조양(造陽)은 지금의 고하(沽河) 상류에 위치한 것이 된다.
 
이후 연나라 진개 때인 BC 281년경에는 조양의 동쪽이자 지금의 난하 서쪽이 되는
만번한{滿城과 번한의 汗城}을 경계로 하였으며,
이 때 설치한 연장성은  조양(造陽)에서 양평{今 계현}까지이다.
 
BC 202년에 燕나라가 秦나라에 멸망하고 BC 207년 秦나라가 漢나라에 멸망하자
북부여의 해모수 재위 시에 만성(滿城){今 보정시 지역}과 한성(汗城){今 북경지역}
을 되찾고 漢나라의 燕國은 지금의 태원 방면으로 물러나게 된다.
 
燕나라가 지금의 북경지역을 차지한 것은 진개의 침략 후 길게 보아도 80년을
넘지 못한다.
 
북경지역은 위의 80년을 제외하면
여전히 단군조선에 이어 북부여, 고구려의 영토였다.
 
 
 
BC 342 <기우제(祈雨祭)를 드리다>
 
기묘년(己卯年) 여름에 크게 가물어
죄(罪) 없이 옥(獄)에 갇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赦免)하고,
여루(余婁) 천왕께서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드렸다.
 
 
 
BC 341 <번조선왕 해인(解仁)이 연(燕)나라 자객에게 시해당하다>
 
경진년(庚辰年) 12월 번조선왕(番朝鮮王) 해인(解仁)이
연(燕)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해인(解仁)은 번조선의 제68대 왕이며, 일명 산한(山韓)이라고도 한다.
 
연나라가 자객을 보내어 번조선왕 해인을 시해한 것인데,
이에 번조선의 오가들이 번조선왕이 되기 위하여 다투어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인의 아들 수한(水韓)이 서기전340년에 제69대 번조선왕이 되었다.
 
 
 
BC 339 <연나라의 기습과 단군조선의 역습>
 
임오년(壬午年)에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하여 노략질을 하고 또 험독(險瀆)에도 들어오니,
수유 사람 기후가 자제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조선과 번조선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므로 공자(公子)를 인질(人質)로 삼았다.
 
 
배도(倍道)는 BC 365년에도 요서(遼西)지역을 함락시키고
운장(雲障)까지 기습한 사실이 있다.
 
이때 번조선의 상장 우문언이 명을 받아 방어하였으며,
진조선과 마조선에서 군사를 보내어 복병작전으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격퇴하고
요서의 모든 성을 수복하였던 것이다.
 
BC 339년에 연(燕)나라의 배도(倍道)가
안촌홀(安寸忽)과 험독(險瀆)을 공격하여 들어왔는데,
안촌홀은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으로서
단군조선의 번한(番韓) 요중(遼中) 12성(城) 중 하나인 탕지(湯池) 지역이 된다.
 
안촌홀(安寸忽)은 “안 말 고을”이며 안시성은 “안 벌 재”로서
안시성은 안촌홀에 축조한 성(城)이 되는 것이다.
 
탕지 또는 안촌홀, 안시성은 당시 번조선(番朝鮮)의 北都로서 
서압록인 난하(灤河)의 바로 서쪽으로 중류지역에 있었던 것이 된다.
 
한편, 험독(險瀆)은 당시 번조선(番朝鮮)의 東都로서
난하의 하구에 위치하였는데, 지금ㅇ 산해관 인근으로
번한의 요중(遼中) 12성의 하나로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성이다.
 
번한, 번조선에는 5경이 있었는데 이를 오덕지(五德地)라 하며,
동경(東京)은 험독(險瀆), 서경(西京)은 한성(汗城),
남경(南京)은 낭야성(琅耶城, 可汗城), 북경(北京)은 탕지(湯池),
중경(中京)은 개평(蓋平)이 된다.
 
개평을 안덕향(安德鄕)이라고도 하고 탕지를 구안덕향(舊安德鄕)이라고도 한다.
 
BC 339년 연나라의 침입 때 수유(須臾) 사람 기후(箕詡)가
자제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움을 도왔는데,
기후는 번조선의 읍차(邑借)이며,
이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BC 323년에 번조선왕이 된다.
 
기자(箕子)의 후손을 수유족(須臾族)이라 하는데,
기자의 이름이 서여(胥餘)로서 수유(須臾)라는 말과 유사한 바,
서여를 수유라고 부른 것이 될 것이다.
 
번조선의 奇子조선을 이어 읍차(邑借)이던 箕珝가 번조선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읍차(邑借) 기후(箕詡)의 군사와 진조선과 번조선의 군사가 협공으로
연(燕)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한편으로 군사를 나누어 연나라의 수도인 계성의 남쪽까지 가서
기습적으로 전쟁을 개시하려 하자, 연(燕)나라가 겁을 먹고 화해를 청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자(公子)를 번조선에 인질(人質)로 주었는데,
여기 공자(公子)는 후대 연(燕)나라 장수가 되어 번조선을 침략함으로써
28년간 인질로 잡힌 데 대한 복수를 한 진개(秦開)가 분명한 것이 된다.
 
 
 
BC 338 <백두산 천지 물이 넘치다>
 
계미년(癸未年)에 백두산(白頭山)이 밤에 울고 천지(天池)의 물이 넘쳤다.
 
 
이때 아마도 백두산이 폭발하기 직전에 마그마가 끓어 오르는 상황이었던 것이 되며,
마그마가 천지에 분출되어 물이 끓어 오르면서 물이 밖으로 넘쳐 흐른 것이 된다.
 
 
 
BC 327 <황충(蝗蟲)과 흉년>
 
갑오년(甲午年)에 황충(蝗蟲)이 밭곡식을 다 먹어 버렸다.
 
 
 
BC 323 <읍차(邑借) 기후(箕侯)가 번조선왕(番朝鮮王)이 되다>
 
무술년(戊戌年) 정월에 번조선왕 수한(水韓)이 죽었는데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이에 기후(箕詡)가 명을 받아 번한성(番汗城)에 머물며
군령을 대행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는데,
이에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때 연(燕)나라가 왕(王)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므로,
번한성에서 군령을 대행하던 읍차(邑借) 기후(箕詡)도
병력을 이끌고 험독성(險瀆城)에 입궁(入宮)하여
자칭하여 번조선왕(番朝鮮王)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允許)를 구하므로,
보을(普乙) 천왕은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때 연나라는 마조선(馬朝鮮)에 사신을 보내와 함께 기후(箕詡)를 치자고 하였으나
마조선왕(馬朝鮮王) 맹남(孟男)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번조선의 읍차 기후(箕詡)가 명을 받고 군령을 대행하던 번한성(番汗城)은
서쪽에 있던 번조선 5덕지(五德地)인 5경(京) 중에서 서경(西京)에 해당하며,
번한 요중(遼中) 12성의 하나인 한성(汗城){북경지역}이 될 것이다.
 
단군조선의 한성(汗城)은 고구려의 요서(遼西) 10성의 하나인 한성(韓城)이 된다.
 
고지도에 북경 북쪽에 고려성이 있는데 이 고려성이 고구려의 한성(韓城)이다.
 
읍차 기후가 번조선왕의 자리를 대신하여 군령을 대행할 때,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축하인사를 하였는데,
이는 연나라가 장차 스스로 왕이라 칭하려 하는 의도에서
같은 처지라고 여기며 축하를 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연나라는 BC 323년에 스스로 왕이라 참칭을 하였으나,
번조선왕이라 자칭한 기후(箕詡)는
보을 천왕께 사후윤허(事後允許)를 받았던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한편, 연나라는 마조선(馬朝鮮)에 번조선을 치자며 유혹하였는데,
이는 연나라의 번조선 침공을 위한 전략전술에서 나온 것이 된다.
 
 
<주(周)나라 제후국들의 칭왕(稱王) -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는 BC 334년에 선왕(宣王)이 왕을 칭하였고,
진(秦)나라는 BC 324년에 혜문왕(惠文王)이 왕을 칭하였으며,
연(燕)나라는 BC 323년에 역왕(易王)이 왕을 칭하였고,
한(韓)나라는 연나라와 같은 해에 선혜왕(宣惠王)이 왕을 칭하였으며,
위(魏)나라와 조(趙)나라는 BC 320년경
위(魏)의 애왕(哀王)과 조(趙)의 무령왕(武寧王)이 각 왕을 칭하였다.
 
한편, 초(楚)나라는 BC 980년경 주(周)나라 목왕(穆王) 시절에
이미 왕을 칭하였다가 BC 741년 웅거(熊渠)가 본격 왕을 칭하였으며,
오(吳)나라는 BC 515년경에 합로왕(闔盧王)이 있어 이때 왕을 칭한 것이 되고,
월(越)나라는 BC 494년에 월왕 구천(勾踐)이 있었다.
 
위에서 왕(王)을 자칭한 연(燕), 제(齊), 진(秦), 한(韓), 위(魏), 조(趙), 초(楚) 나라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부르는데,
오(吳)나라는 BC 474년에 월(越)나라에 일찍 망하였고,
월(越)나라는 BC 334년에 초(楚)나라에 일찌감치 망하였다.
 
BC 770년부터 BC 403년 이전의 춘추시대에 패자(覇者)가 되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진(晋)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의 다섯 나라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전국시대 초기에 진(晋)나라가 망하고 한위조(韓魏趙)의 세나라로 나누어졌으며,
송(宋)나라는 BC 286년에 제(齊)나라에 망하였다.
 
전국시대까지 존속한 작은 나라로 정(鄭)나라는 BC 375년에 한(韓)나라에 망하였고,
노(魯)나라는 BC 249년에 초(楚)나라에 망하였고,
위(衛)나라는 BC 240년에 진(秦)나라에 망하였다.
 
 
 
※ 참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
 
중국의 사서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은
BC 12 - BC 11세기경, 상(商=殷)나라가 주(周)나라에 망하자
당시 상나라(은나라) 왕족인 기자(箕子)는 그 일족을 이끌고,
북동쪽에 있던 하북성의 기주(箕州)로 망명한 사실이 있었는데,
당시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그를 추격하여 살해하지 못하고,
그의 존재를 인정한 역사 기록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하북성은 번조선(番朝鮮)인 奇子朝鮮의 강역이었고,
기주(箕州)는 당시 하북성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기자(箕子)의 후한이 두려워
기자를 다독거려야 할 필요성을 느껴 그를 기주(箕州)의 제후(王)으로 봉한 것이다.
 
사기(史記)에 기자(箕子)는 후에 주무왕(周武王)의 초대로 주나라를 방문하여
홍범(洪範)에 대하여 논한 바 있으나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거나
주나라의 종묘를 모시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기자(箕子)는 원래가 고조선족(동이족)이었으며,
기자가 하북성으로 망명한 것은 그의 뿌리를 찾아 하북성으로 이주한 것뿐이다.
 
하북성 난하 지역에는 고조선의 거수국인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는데,
이 고죽국은 중국인들이 지조(志操)의 열사로 꼽는 '백이와 숙제'의 조국이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왕손이었다.
 
기자(箕子) 역시 그 조상은 고조선족의 왕족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고조선과 지나족(漢族)의 역사나 강역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고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였고,
고조선의 사상과 철학이 중국의 사상과 철학이었다.
 
이후 중국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한(漢)나라를 거치면서
고조선(동이족)에서 독립을 하였고,
그 독립의 과정에서 고조선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사기(史記)라는 역사서를 편찬하였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동이족의 글자였던 신지(神誌)의 녹도문자(鹿圖文字)를
그들의 글자인양 한자(漢字)로 바꾸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한자의 어순을 바꾸었고, 간체를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동이족에서 탈피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기자(箕子)의 하북성 이주를
기자(箕子)의 고조선 망명설로 만들었고,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인정해 주면서
고조선과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국경 등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역사의 기록은 BC 12 - BC 11세기경의 역사 기록이다.
 
이후 후한(後漢, 東漢)의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에
"기자(箕子)가 바다로 들어가 소식이 끊겼다."는 기록과
"기자(箕子)가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말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약 1500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후한서(後漢書)>는 송(宋)나라 때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의 사서(史書)이다.
 
한(漢)나라의 건국은 BC 220년이고, 멸망은 AD 220년이다.
 
<후한서>의 기록은 위의 <단군세기> 기록과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한(漢)나라는 BC 220년경 중국 서쪽 장안(長安)에서 일어났다.
 
그 후 AD 8년에 왕망(王莽)에 의하여 한나라는 멸망한다.
 
왕망은 신(新)나라를 세웠으나 불과 18년 만에 망하였다.
 
AD 22년에 낙양(洛陽)에서 한(漢)나라가 다시 부흥하였다.
그래서 장안 중심의 한(漢)나라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이라 하고,
낙양 중심의 한(漢)나라를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 한다.
 
AD 22년 동한(東漢)이 신(新)나라를 멸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자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에 있던 고조선(번조선)의 잔존 세력은
바다(황해, 발해)를 건너 한반도와 요동(난하 하류)지역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위 단군세기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하북성의 기주(箕州)에 살던 기자(箕子)는
발해를 건너 현 난하 지역인 요동으로 간 것이다.
 
그가 <단군세기>에서 말하는 기후(箕詡)이고, 기비(箕丕)이다.
 
중국인들이 볼 때 기후(箕詡)와 기비(箕丕)는 기주(箕州)의 제후이므로
그들을 기자(箕子)라 칭한 것이다.
 
중국은 제후들을 칭할 때 지역명에 자(子)를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
 
중국인들이 칭하는 기주(箕州)가
<단군세기>에서는 수유국(須臾國)이라 칭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말하는 기자조선은 두 개다.
 
하나는 BC 12세기경의 역사 기록인 <사기>에서 말하는
상(商, 殷)나라, 주(周)나라 교체기의 기자조선(奇子朝鮮)이고,
하나는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는 고조선 말기의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다.
 
BC 12세기경에 세운 기자조선은 奇子朝鮮으로
하북성 보정시 인근에 세운 단군조선의 후손인 奇子가 세운 나라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 중에는 이 역사적 기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주장하며, 기자한반도설(箕子韓半島說),
기자평양설(箕子平壤說)을 운운하고 있으니 참 갑갑한 노릇이다.
 
더 갑갑한 것은 중국 <사기>의 기록을 신봉하는 학자들 중에는 BC 12세기경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BC 322 <정(鄭)나라 사람의 입국>
 
기해년(己亥年)에 정(鄭)나라 사람 정발(鄭拔)이 음악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BC 375년에 정(鄭)나라는 한(韓)나라에 망하였는데,
여기서 정발(鄭拔)이라는 사람은 정(鄭)나라 출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BC 319 <태풍>
 
임인년(壬寅年)에 북풍(北風)이 크게 불어 나무가 꺾어지고 집이 무너졌다.
 
 
 
BC 314 <붉은 흙비가 내리다>
 
정미년(丁未年) 4월에 적토우(赤土雨)가 쏟아졌다.
 
 
 
BC 312 <정권이 외척에게 돌아가다>
 
기유년(己酉年)에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정권이 외척 환윤(桓允)에게 돌아갔다.
 
 
BC 1286년 이전의 전기 단군조선의 천왕족(天王族)이 환(桓)씨인데,
여기서는 외척(外戚)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외척의 권세(權勢)가 국정을 휘두를 만큼 비대해졌던 것이 된다.
 
외척이나 환관(宦官) 등 측근(側近)의 권세가 비대해지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나라는 기울게 되어 있다.
 
 
 
BC 304 <해성(海城)의 이궁(離宮)으로 피하다>
 
정사년(丁巳年)에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천왕께서는 해성(海城)의 이궁(離宮)으로 피난하였다.
 
 
이궁(離宮)으로서의 해성(海城)은 BC 425년 7월에
구물 천왕 때 개축하여 평양(平壤)이라고 부른 곳이다.
 
북부여 시대인 BC 192년에는 해성을 평양도(平壤道)에 속하게 하였다.
 
 
BC 298 <북막 추장이 음악을 바치다>
 
계해년(癸亥年)에 북막(北漠)의 추장 이사(尼舍)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BC 296 <수유인(須臾人) 한개(韓介)의 반란과 상장(上將) 고열가(古列加)의 토벌>
 
을축년(乙丑年)에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천왕이 되려 하니,
상장(上將) 고열가(古列加)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이를 격파하였는데,
천왕께서 서울로 돌아와서는 크게 사면(赦免)을 하였으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지고 나라의 재정이 따라 주지 못하였다.
 
 
한개(韓介)는 수유족 출신이며, 기자(箕子)의 먼 후손이 된다.
기자(箕子)의 후손에 기씨(箕氏), 한씨(韓氏), 선우씨(鮮于氏)가 있는 것이 되는데,
기씨는 기자의 종손이며, 선우씨는 기자의 차자 후손이 된다.
한씨는 기씨와 선우씨의 방계(傍系)가 되는 것이다.
 
 
BC 295 <물리 천왕의 현손 고열가(古列加)의 즉위>
 
을축년에 천왕께서 붕하시니 후사가 없으므로
고열가(古列加)가 단군물리(勿理)의 현손(玄孫)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고 또한 전공이 있어 드디어 8월 15일에 즉위하였다.
 
 
BC 1285년 이후 천왕(天王)의 태자나 아들이 아니면서 천왕으로 즉위한 예는
BC 425년에 제44대 천왕으로 즉위한 백민성 욕살이었던 구물(丘勿)과,
BC 295년 제47대 천왕으로 즉위한
제43대 물리 천왕의 현손이 되는 상장(上將) 고열가(古列加)가 있다.
 
 
 
BC 294 <천왕(天王)의 친정(親政)>
 
정묘년(丁卯年)에 천왕께서 친히 국정(國政)을 집행하였다.
 
외척(外戚)의 권위를 물리치고 어진 이를 기용하는 등
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 백성을 다스렸다.
 
 
보을(普乙) 천왕 시절인 BC 312년 기유년(己酉年)에 국정(國政)이 문란하여
외척 한윤(桓允)에게 돌아갔던 정권을 도로 찾은 것이다.
 
고열가(古列加) 천왕은 보을(普乙) 천왕의 아들이 아니라서
보을 천왕의 외척(外戚)과 거의 관련이 없으므로
그 외척을 축출하고 정권을 도로 찾을 수 있었던 것이 된다.
 
 
 
BC 291 <견융(犬戎) 평정>
 
경오년(庚午年)에 견융이 복종하지 않아 군사를 보내어 물리쳐 평정(平定)하였다.
 
 
 
BC 290 <번조선왕 기석(箕釋)이 현량(賢良)을 추천케 하다>
 
신미년(辛未年)에 기석(箕釋)이 번조선왕(番朝鮮王)에 즉위하였으며,
이해에 각 주군(州郡)에 현량(賢良)을 천거토록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들이 270인이나 되었다.
 
 
 
BC 282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사당(廟)를 백악산에 세우다>
 
기묘년(己卯年)에 단군왕검의 묘(廟)를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사철마다 제(祭)를 지내게 하였으며,
천왕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번조선왕 기석(箕釋)이 교외에서 밭을 갈다>
 
기묘년(己卯年)에 번조선왕(番朝鮮王) 기석(箕釋)이
교외(郊外)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BC 281 <연나라와 만번한을 경계로 삼다>
 
연(燕)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진개(秦開)는 연나라 공자(公子)이며,
BC 339년 연나라가 번조선을 침범하였다가 역습을 당하여
수도였던 계성(薊城)을 정벌당하려 하자 사신을 보내 사과하고
공자(公子)를 인질로 잡혔는데,
이때 진개(秦開)와 진개의 측근들이 번조선에 BC 311년경까지
28년간 인질이 되었던 것이다.
 
BC 339년 당시에는 연나라 문공(文公) 시절이 되며
진개는 곧 공(公)의 아들로서 공자(公子)가 되고,
풀려났던 BC 311년은 연나라가 BC 323년에 왕을 칭한 후
12년이 지난 소왕(召王) 시절이 된다.
 
BC 311년에 인질에서 풀려난 진개(秦開)가 연나라로 돌아갔으며,
이후 늙은 장수가 되어 번조선을 침공하는 등
복수심으로 소위 동정(東征)을 한 것이 되는데,
BC 281년에 번조선과 만번한(滿番汗)을 경계로 삼았던 것이다.
 
 
 
BC 280 <위(魏)나라 사절의 입조>
 
신사년(辛巳年)에 위(魏)나라 사절(使節)이 입조(入朝)하였다.
 
 
위(魏)나라는 BC 225년에 진(秦)나라에 망하였는데,
55년전인 BC 280년에 단군조선에 사절을 파견하였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이로부터 12년후인 BC 268년에
위(魏)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위세(威勢)를 보여 주었던 사실이 있다.
 
BC 268년에 위(魏)나라를 방문한 단군조선(檀君朝鮮, 東夷)의 사절단(使節團)이
위세(威勢)를 보여주었다고 기록한 글로는,
위(魏)나라 사람이던 공빈(孔斌)이 쓴 홍사(鴻史) 서문(序文)이 있다.
 
이 홍사 서문에서는 단군조선과 배달국을 동이(東夷)라 기록하고 있다.
 
BC 280년경의 위(魏)나라 왕은 안리왕 바로 전의 왕인 애왕(哀王)이 되는데,
위나라가 왕을 칭한 것은 BC 319년 애왕 때가 되며,
애왕 이전의 혜왕(惠王)은 일명 양혜왕(梁惠王) 또는 위혜왕(魏惠王)으로서
추존(追尊)된 경우가 된다.
 
 
 
BC 276 <연나라가 번조선에 조공하다>
 
을유년(乙酉년)에 연(燕)나라가 번조선(番朝鮮)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朝貢)을 바쳤다.
 
이해에 풍년이 들고 동해(東海)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다.
 
 
연(燕)나라가 번조선에 조공을 하였다는 것은
당시에 연나라는 번조선을 상국(上國)으로 모셨던 것이 되며,
이때는 연나라 소왕(召王)의 아들인 혜왕(惠王) 3년이 된다.
 
 
 
BC 268 <위(魏)나라에 사절단을 보내다>
 
계사년(癸巳年)에 위(魏)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위세(威勢)를 보였다.
 
 
위(魏)나라가 BC 280년에 단군조선에 사절단을 보낸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되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번조선(番朝鮮)이 아닌
진조선(眞朝鮮)에 사절단을 보낸 것이 분명한 바,
BC 268년에 위(魏)나라에 파견한 단군조선의 사절단은
진조선(眞朝鮮)의 사절단이 될 것이다.
 
BC 268년에 위(魏)나라 사람 공빈(孔斌)은
단군조선(東夷)는 비록 대국(大國)이나 함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나라라고
그가 지은 홍사(鴻史)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BC 265 <신원함(伸寃函) 설치>
 
병신년(丙申年)에 각처에 신원함(伸寃函)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투서(投書)하도록 하였다.
 
 
단군조선 전기인 BC 1946년에 이미 신원목(伸寃木)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역사가 있기도 하다.
 
신원목은 신문고(申聞鼓)와 유사한 장치가 된다.
 
 
 
 
BC 256 <암행어사(暗行御史) 파견>
 
BC 256년 어사(御使)를 시켜 백성들의 사회를 몰래 다니며
부정한 사건을 비밀리에 탐지하여 바로 잡았다.
 
 
 
BC 252 <연나라가 새해 인사를 올리다>
 
기유년(己酉年)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 왔다.
 
 
 
BC 251 <연(燕)나라 대부(大夫)의 망명>
 
경술년(庚戌年)에 연(燕)나라 대부(大夫) 형운(荊雲)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BC 255년에 진(秦)나라가 주(周)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이때부터 진(秦)나라가 서서히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연나라 대부 형윤이 단군조선에 망명한 것은 시대를 읽은 것이 아닌가 한다.
 
BC 227년에 연나라에 형가라는 유명한 자객이 있었는데,
형운과 같은 씨족인(氏族人)이 되는 셈이다.
 
고대중국의 땅에 변란이 있을 때 동쪽으로 피난하여
우리나라에 망명귀화한 사례가 역사속에 수없이 나타난다.
 
 
 
BC 248 <북막(北漠)이 요청한 연나라 정벌을 거절하다>
 
BC 248년 겨울에 북막(北漠)의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燕)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했으나,
천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후 북막(北漠)은 단군조선의 영향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이 되는데,
BC 229년에는 북부여의 서쪽 변두리를 습격하여 크게 약탈을 하기도 하였다.
 
 
<보을(普乙) 천왕의 묘를 세우다>
 
BC 248년에 선단제묘(先檀帝廟)
즉 보을(普乙) 천왕의 묘(廟)를 성(城)의 남쪽에 세웠다.
 
 
고열가 천왕이 바로 앞 천왕인 제46대 보을 천왕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祠堂)을 장당경(藏唐京)의 성(城)의 남쪽에 세운 것이다.
 
고열가 천왕이 보을 천왕의 아들은 아니지만
고열가 천왕이 선대 천왕의 묘를 세움으로써
스스로 그 정통성을 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BC 239 <해모수의 출현 - 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키다>
 
임술년(壬戌年) 4월 8일에 23세이던 종실(宗室) 대해모수(大解慕漱)가
천왕의 자리에 오르고자 몰래 수유(須臾) 사람 기비(箕丕)와 약속하고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서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해모수는 단군조선의 종실인 원래 고씨(高氏)이며,
BC 239년 4월 8일에 23세의 나이로 번조선의 기비(箕丕)와 모의하여
쇠퇴하여 가던 단군조선의 옥새(玉璽)를 차지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처음 웅심산(熊心山)을 근거지로 삼아 기다리다가 하산하여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며,
장당경(藏唐京) 이전의 서울인 백악산(白岳山){今 적봉 지역}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던 것이다.
 
해모수는 BC 239년 군사를 일으키고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천왕(天王)이 아니라 천왕이 될 자격을 가진 사나이라는 말로서,
천왕의 자제(子弟)라는 말이 된다.
 
천왕랑(天王郞)은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천지화랑(天指花郞)과 같은 의미가 된다.
 
여기 해모수(解慕漱)는 원래 고씨(高氏)로서 고모수(高慕漱)이기도 하고
북부여 시조로서 대해모수(大解慕漱)라고 하는데,
고주몽의 아버지가 북부여의 제후국인 옥저국(沃沮國)의 제후
즉 옥저후(沃沮侯)이자 일명 불리지(弗離支)인 고모수(高慕漱)로서
고씨(高氏)는 해씨(解氏)이므로 곧 해모수(解慕漱)이기도 하며,
후기 북부여 시대인 BC 59년에 고두막(高豆莫) 단군의 아들로서
북부여 단군이 된 고무서(高無胥)가 백성들을 잘 다스렸으므로
소해모수(小解慕漱)라 불렸다.
 
즉, 역사기록상 해모수가 3분이 있는데,
북부여 시조인 대해모수(大解慕漱),
후기 북부여의 단군 고무서인 소해모수(小解慕漱),
고주몽의 아버지인 옥저후 불리지(弗離支)가 있는 것이 된다.
 
고(高)는 높다는 뜻이며 지상에서 볼 때 높은 것은
하늘에 떠있는 해(解, 태양)이므로
북부여 시조 해모수는 고씨(高氏)를 두고 해(解)로써 성씨를 삼은 것이 된다.
 
고(高)라는 글자는 높은 성(城)을 나타낸 상형문자가 되는데
그 옛 발음이 호(戶)에 가까워
해(解, 태양)와 상통하는 소리와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해모수 천왕랑이 북부여 수도를 난빈(蘭濱)에 정하다>
 
 
해모수(解慕漱)는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빈(蘭濱)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용광(龍光)의 칼(釰)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녔다.
 
따르는 종자들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더니 이에 즉위하였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다.
 
웅심산(熊心山)은 백악산아사달에 가까이 있는 산으로서
개마산(蓋馬山)을 가리키며,
개마산은 북개마(北蓋馬) 또는 서개마(西蓋馬)로서
지금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에 있는 산이 된다.
 
웅심산을 뒤로 하고 궁궐을 지은 것이 되는데,
난빈(蘭濱)이라는 곳은 강가에 있는 것이 된다.
 
당시 수도가 장당경으로서 중부여(中夫餘) 땅이 되는데
웅심산은 북부여 땅이 되므로 해모수의 나라를 북부여라 하는 것이다.
 
개마산(蓋馬山)의 개(蓋)의 옛 발음이 해(解, 태양)와 유사하거나 음운변화로 인하여
개마산은 해마리산으로서 백두산(白頭山:희마리산)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즉 단군조선시대와 북부여 시대에는 해마리산
즉 개마산(蓋馬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서개마(西蓋馬) 또는
북개마(北蓋馬)인 지금의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에 있는 개마산과
지금의 백두산인 동개마(東蓋馬)가 있었던 것이 된다.
 
해모수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다녔던 것인데,
오우관은 단군조선 시대 국자랑(國子郞)
즉 천지화랑(天指花郞)들이 머리를 장식하던 관이며,
측근으로 500인(人)을 두고 함께 오전부터 낮 동안에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정사(政事)를 돌보고, 밤에는 궁궐로 돌아갔던 것이다.
 
즉 저녁에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적은 것은
낮에는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순방정치(巡訪政治)를 하다가
밤에는 궁(宮)으로 숙소로 되돌아 가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 해모수의 고향이 고리국인데,
여기 고리국은 곧 구려국(句麗國)이며,
구려국은 처음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인 부소(扶蘇)가 봉해진 나라이고,
BC 1285년 이후 색불루 단군 또는 이후 고씨단군의 친족이 봉해진 것이 된다.
 
해모수(解慕漱)는 고씨 단군의 종실로서 역시 원래 고씨(高氏)인 것이다.
 
 
 
BC 238 <고열가 천왕께서 오가(五加)들에게 나라를 맡기다>
 
계해년(癸亥年)에 천왕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어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난리를 자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따라주지 않았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쇠퇴하였다.
 
3월 16일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五加)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옛 우리 열성조(列聖祖)들께서 나라를 열어 대통(大統)을 이어가실 때는
덕(德)을 심어 널리 미쳐 오랜 세월 법(法)이 되었으나,
이제 왕도(王道)는 쇠미(衰微)하여지고 여러 한(汗)들은 강함을 다투는데,
짐은 덕이 엷고 겁이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며
방책(方策)을 세워 어진이를 불러 무마시키지 못하여 백성들은 흩어지니,
너희 오가(五加)들은 어진이를 택하여 천거(薦擧)하라” 하시며,
옥문(獄門)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 보내게 하였다.
 
이튿날인 3월 17일에 마침내 천왕 자리를 버리고
아사달(阿斯達) 산에 들어가 수도하여 신선(神仙)이 되시니,
이에 진조선(眞朝鮮)의 오가(五加)들은 공화정치(共和政治)를 6년을 하다가
마침내 회복하지 못하고 BC 232년에 해모수에게 나라를 넘김으로써,
BC 2333년 10월 3일 시작된 단군조선은 2,102년만에 종말을 맞았다.
 
 
<해모수 천왕랑의 3월 제천과 연호법(煙戶法) 제정>
 
BC 238년 3월 16일에 해모수 천왕랑(天王郞)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호법(烟戶法)을 제정하더니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을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BC 232 <단군조선의 멸망 - 해모수가 오가(五加) 공화정치를 철폐하고
천왕(天王)이 되다>
 
기사년(己巳年)에 해모수 천왕랑(天王郞)이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五加)들을 회유하여 마침내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으로 즉위하여 천왕(天王)이 되었다.
 
 
여기서 옛 도읍은 BC 425년에 수도로 삼은 장당경(藏唐京)을 가리키는 것이다.
 
BC 238년부터 BC 232년까지 장당경에서는
오가(五加)의 공화정치(共和政治)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인데,
어진 자를 찾아 세우라는 고열가 천왕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해모수가 군사를 이끌고 장당경에 들어가 오가들을 회유하여 공화정을 철폐하고
단군조선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단군조선은 BC 2333년부터 BC 232년까지
합 2,102년의 역사를 마감한 것이 된다.
 
한편, 고열가 천왕이 나라를 내놓은 BC 238년에
사실상 단군조선이 망한 것으로 계산하면 2,096년의 역사를 가지는 것이 된다.
 
해모수는 군사를 일으켜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였다가
단군조선의 오가공화정(五加共和政)을 철폐하여 접수하니,
이에 만백성들이 단군(檀君)으로 추대하였던 것이 된다.
 
이리하여 BC 232년에 해모수는 천왕랑(天王郞)의 칭호에서 나아가
정식으로 본 임금인 천왕(天王)으로 즉위한 것이 된다.
 
천왕(天王)은 천하에 제후를 거느린 천상(天上)의 왕이 되는 것이며,
결국 지방 제후국들의 상국(上國)의 본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때 번조선왕 기비(箕丕)는 해모수 천왕이 인정하여 봉한 비왕(裨王)이며,
그 외 북부여에 속한 제후국들이 많이 존재하였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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