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전용게시판, 공지사항, 출간도서, 본 홈페이지 관련 보도기사 등 제반 운영에 관한 일들

No, 18
2005/9/20(화)
고려의 대외 관계  
    송나라는 고려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지도에서 보듯이, 북송의 수도는 위쪽 변경(開封)이었고, 남송의 수도는 아래쪽 항주였습니다. 중원의 중심세력이 치열한 자리다툼을 벌였던, 교통과 물산의 요충지였던 한수 유역 밖에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사천성 성도에 수도를 두고 서경(장안)까지 장악했던 고려가 중원의 알짜배기 땅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 고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던가에 대해서는 대외관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북송은 거란과 1005년 단연회맹( 淵會盟)을 맺고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銀) 10만량을 거란에게 바치게 되고, 이후 1040년에는 거란이 서하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구실로 다시 비단 10만필과 은 10만량이 더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의 3차 침입을 굳건히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서희의 외교술로 강동6주를 되찾게되고, 강한찬(강감찬)의 귀주대첩 후, 강한찬이 거란의 사신 인물됨을 떠보는 유명한 일화까지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진족이 거란을 멸망시키고 금(金)을 세우고 난 뒤, 금은 북송의 변경(개봉)을 함락(靖康-變), 사실상 북송의 종말(1126년)을 가져오게 됩니다. 

  고려와 금의 관계에는 윤관 장군이 금의 침략에 대비해 9성을 쌓았고, 이후 1126년 인종 4년에 형제관계를 맺었으며, 1131년 금에 복종하는 대가로 오랫동안 갈망하던 보주(의주)를 되찾아왔다고 되어있는데(이홍식의 국사대사전), 좀 묘한 문장입니다. 복종의 대가로 원하던 땅을 받았다니 말입니다. 

  상호불가침 협정 같은 것이 아니었나 여겨지지만...

  거란이나 금과의 외교관계를 짚어보건대, 고려의 외교술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만큼 국력이 뒷받침되었거나. 

  어쨌거나 금과의 조약에서도 송(宋)마냥 해마다 금나라에 은과 비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고려가 오히려 땅을 획득했다고 한 걸로 보면, 상대적으로 고려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몽고족이 등장하게 됩니다.

  징기스칸의 생존시에는 중원대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듯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서하(西夏)와도 화친하는 선에서 뒤로 물러섰고(1209년), 금나라의 전쟁에서 역시 수도(中都:북경) 포위 정도로 그쳤으나, 금나라가 수도를 북송의 수도였던  京(開封)으로 옮기게 되자 중도를 함락하는 선에서 일단락 짓습니다(1215년).

  그의 정복사는 주로 이슬람세계와 러시아 지역이었는데, 보복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슬람세계의 콰레즘국에서 몽고사신을 죽이는 사고가 발생하자, 징기스칸은 그 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징벌전을 감행하여(1219년). 철저하게 그곳 주민들을 살륙하고 도시들를 초토화시켰다고 합니다. 러시아 일대에까지 이르는 그의 정복사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1224는 겨울에 몽고지역으로 돌아오게 되고, 서하의 몽고에 대한 배반(동맹약속 거역)에 분개하여 서하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와중에서 징기스칸은 병사하게 되고(1227년 8월경), 서하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서하의 몰락으로 중원과 서역 잇는 요충지였던 서하는 역사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묻혀버렸습니다.

  서하의 몰락 역시 몽고와의 약속 불이행에 따른 보복전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징기스칸의 뒤를 이어 오고데이가 제위에 오르자, 금(金)을 부수기 위해 그가 친히 출정하게 됩니다. 

  금의 수도 개봉으로 진격하기 위해 위하(渭河)를 점령하고 하남(河南) 지방을 관통했다고 하는데, 고려도경 속의 강역에서, 고려의 위치가 동쪽으로는 대금(大金)과 맞닿아있다고 했는데, 고려의 수도가 사천성 성도였다면 맞아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33년 5월 금의 수도 변경은 몽고군에게 함락하게 됩니다. 금의 애왕(哀王)은 말제(末帝)에게 양위하고 자살로 끝을 맺게 되고, 말제 역시 피살되므로써 금나라 역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남송의 몰락은 쿠빌라이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1276년 수도 항주가 몽고군에게 함락되고 어린 공종(恭宗)은 인질이 되어 몽고에 압송되었으며, 숙질간(아저씨와 조카의 관계)으로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1279년 남송 역시 멸망하게 됩니다.


   몽고의 고려에 대한 침입은 1231년부터 1259년까지 28년 동안에 이루어졌다고 기술되어있는데, 금의 멸망과 남송의 멸망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에 대한 몽고의 제1차 침입은 공교롭게도 몽고가 금의 수도 개봉으로 진격하던 해인 1231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다음은 룩 콴텐의 <유목민족제국사> 215쪽에서의 인용입니다.

1231년 2월 오고데이와 톨루이가 지휘하는 몽고군 2대는 금(金)의 판도안으로 침공하여, 위하(渭河) 유역을 다시 점령하고 하남(河南) 지방을 관통하여 전진하였다…몽고군의 일부는 남송(南宋)의 영토를 통과하여야만 했으며 남송조는 그를 기꺼이 허락하였다.…


  이때 오고데이 칸은 금조의 멸망을 위해 온 병력을 투입하게 되는데, 고려에 대한 제1차 침입은 금나라를 치고자, 남송의 영토가 아닌 고려의 영토를 통과했던 사실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만...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고의 다음 차례는 고려가 됩니다.
고려는 강화로 천도하고(호남성 강화현 동남) 28년간 항쟁을 계속 합니다.


  그런데 중동의 이슬람세계, 러시아전역, 서부유럽까지 파죽지세로 휩쓸어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몽고병이었지만, 고려를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음은 율곤 이중재 선생의 <새 고려사의 탄생>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고려사절요 본문에서 보면 고려가 몽고군에 의해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라…이곳저곳을 정신없이 침탈당하다보니 고려도 지칠대로 지쳤다…하는 수없이 김보연 장군과 송언기 어사를 파견하여 강화조약을 맺게 했던 것이다.(811쪽)

  고종 25년 겨울 12월, 김보연 장군과 송언기 어사는 몽고의 임금을 배알하게 되었다.…
  몽고왕이 말하기를…항복이 아니라 서로 강화조약을 맺는 것이므로 비굴하다거나 스스로 낮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작은 나라가 잠깐동안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며 때가 되면 허물은 덮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추하다거나 방탕하다고 생각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어서 몽고왕은 말하기를 큰나라(大國)인 몽고가 고려와 강화조약에 응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나라를 관대하게 대해주기 위함이다.…
  몽고와 고려가 함께 강화조약을 우호적으로 맺는 것은 자손만대를 통해 화합하고 교류하면서 상통하는 길이다…
  몽고는 앞르로 고려의 조공을 받지 않을 것이므로 고려에서는 진퇴(進退)를 알아서 하시오…(808쪽∼)


   이렇듯이 몽고는 징기스칸이 떨치고 일어난 이래, 그들에게 칼을 겨루었던 나라 모두 철저히 파괴되고 패망의 길을 걸었건만, 고려와는 전례에 없는 관대함으로 강화조약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송이 몽고에 의해 명망되고나자, 이후 명나라 주원장이 일어날 때까지 중원의 전지역은 몽고와 고려의 차지로 남게 됩니다.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중원의 땅을 원(元)으로 명명해놓았지만, 중원에 대한 실권은 고려가 장악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몽고족은 말과 한 호흡을 나누며 거대한 스텝을 무대로 태어났는데, 생리적으로 생활방식이 철저히 다른 스텝을 떠나 중원대륙에 주저앉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고려는 남송의 땅, 금의 땅을 고려의 행정권에 편입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룩 콴텐 의 <유목민족제국사>를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요조(遼朝)의 사치는 특히 여진족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여진족은 거란황실에 겨울에 강의 얼음을 깨고 채취해야만 했던 귀중한 진주와, 지극히 희귀한 종자인 흰발톱을 가진 회색빛 매(海東靑)를 잡아서 진상해야 했다.
이러한 품목들을 준비하는 데는 엄청난 인력이 소요되었으며, 특히 그 특수한 매를 획득하기 위하여 여진족은 해안에 거주하던 부족들과 전쟁을 하여야만 했다…(139쪽)



  위의 내용을 보자면 해동청은 발해만 일대의 해안에 살고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고려에 해동청을 잡아 몽고로 보내기 위해 설치했던 응방(鷹坊)이 있었다는 것은, 몽고와의 강화조약 후에 여진족(金)의 옛 땅이었던 발해만 일대까지 고려의 강역으로 자리매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번 추측해봅니다. 
  


                   
번호제 목이름첨부작성일조회
     [추천] 자매홈페이지 소개
     저서 '환단원류사' 구입 문의
20   박사등호(博斯騰湖)와 청해(靑海) 그리고 청해진...   10/03(월)  3043
19   청해진의 위치로 본 신라 노성매   09/21(수)  3106
18   고려의 대외 관계   09/20(화)  3101
17   살수대첩에 대한 의문과 추론 ... 노성매   09/19(월)  2672
16   곤륜구(崑崙丘)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bc8937   09/16(금)  3147
15   장사성(張士誠)의 난(亂)을 통해본 고려의 위치   09/12(월)  3335
14   벽골제를 조사하다 보니 노성매   08/19(금)  2665
13   삼국의 각축장-낙랑 노성매   08/12(금)  2365

 
처음 이전 다음       목록

ⓒ Copyright 1999~   TECHNOTE-TOP / TECHNOTE.INC,



| 상고사 | 게시판 | 자료실 | 천문해자 | Music Box | Photo | Poem

Copyrightⓒ 2005 BC.8937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