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한民族의 시원지(始原地) 天池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고대국가들... (朴民宇)
No, 35
이름: 朴民宇
2006/1/5(목) 20:57 (MSIE6.0,WindowsNT5.1,SV1,i-NavFourF) 221.139.160.66 1024x768
경주의 위치는 큰사막(大漠) 남쪽 순화현(淳化縣)  

 

 

위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금성(金城)의 북쪽에 큰사막(大漠)이 있습니다.

경주의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 입니다. 이곳이 낙랑지역 이었음을 다음 내용에서 알수 있습니다.

"김부를 제수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로 봉하고,  " 

 





경주는 역사상 모두 다섯군데 있었던 것으로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우리나라 제외)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경주(慶州)는 처음 정주(定州)였다. 정주(定州)는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 서북이다. 두 번째 경주는 순화현(淳化縣)이다. 이 곳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위쪽, 세 번째 경주는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동쪽, 네 번째 경주는 섬서성(陝西省) 경양현(涇陽縣) 북쪽, 다섯 번째 경주는 사천성(四川省) 기주부 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주편에 의하면,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1, 3, 4, 5는 별로 중요하지않다.)

주목할 것은 두 번째 경주가 순화현(淳化縣)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경순왕 김부에게 내려준 봉지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가 그 봉호이다.

경주의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에 있었다.

그리고 경주(慶州)란 이름도 신라가 망했기 때문에 생긴이름이다. 즉, 신라의 수도가 아니라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왕건으로부터 동맹(同盟)의 답례로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고 식읍으로 받은 땅에 경주(慶州)라는 이름을 왕건이 내려주었던 것이다.

원래 수도는 계림, 또는 금성인데 지금 한반도 경주에는 계림도 있고 금성도 있고, 낭산, 명활산, 황룡사, 포석정 등이 마치 영화셋장 처럼 한 곳에 뭉뚱거려져 있으니 말이 되겠는가?



고려사절요 태조 을미18년

○ 봄 3월에 , 견훤의 아들 신검(神劒)이 그 아버지를 금산(金山 금제(金提))의 불사(佛寺)에 가두고 ,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였다.

견훤이 아들 10여 명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자 하니 , 그 형 신검․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근심하며 번민하였다.

이 때 양검과 용검은 지방에 나가서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신검만이 홀로 옆에 있었다. 이찬(伊粲) 능환(能換)이 사람을 시켜 양검․ 용검과 함께 몰래 모의하고 , 신검을 권하여 난을 일으키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이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 “나주(羅州)의 40여 군(郡)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풍화(風化)에 복종하고 있었는데 근년에 후백제에게 침략되어 6년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 곳을 진무(鎭撫)하겠는가” 하니 , 공경(公卿)들이 유금필(庾금弼)을 천거하였다. 왕은 이르기를 , “나도 역시 이를 생각해 보았으나 그러나 요사이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을 금필이 이를 통하게 하였으니 그의 노고(勞苦)를 생각하니 다시 명하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금필이 아뢰기를 , “신이 비록 아니 이미 노쇠(老衰)했사오나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 “경이 만약 명을 받든다면 어찌 이보다 더 기쁨이 있으랴” 하고 , 금필로서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을 삼아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하고 어선(御船)을 주어 보내었다. 금필이 나주(羅州)에 가서 경략(經略)하고 돌아오니 , 왕이 또 예성강까지 행차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 6월에 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여자(女子 나인(內人)) 애복(哀福)과 사랑하는 첩 고비(姑比)등과 함께 나주(羅州)로 도망 나와서 고려에 들어와 붙어살기를 청하므로 장군 유금필과 대광(大匡) 만세(萬歲)와 원보(元甫) 향예(香乂)와 오담(吳淡)․능선(能宣)․충질(忠質) 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견훤이 이르매 , 다시 견훤을 일컬어 「상부」(尙父)라 하고 , 남궁(南宮)을 사관(舍館)으로 주고 , 위(位)는 백관의 위에 있었다.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 겸하여 금과 비단과 노비 각 40명과 말 10필을 내려주고 , 후백제에서 항복해 온 사람 신강(信康)으로서 아관(衙官)을 삼았다.

○ 가을 9월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황주(黃州)와 해주(海州)를 순시하고 돌아왔다.

○ 겨울 10월에 임술(任戌)에 신라왕 김부(金溥)가 시랑(侍朗)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들어와서 조회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攝侍中) 왕철(王鐵)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 등을 보내어 회보 하였다.

11월 갑오(甲午)에 신라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출발하니 , 사대부와 서민(庶民)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혔고 ,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 구경꾼들이 쭉 둘러 서 있었다. 길 가에 있는 주(州)․현(懸)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癸卯)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오니 , 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고 들어와서 유화궁(柳花宮)에 머무르게 하였다.

계축(癸丑)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아가 문무 백관을 모으고 예(禮)를 갖추어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내었다.

기미(己未)에 신라왕이 글을 올리기를 ,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危亂)을 겪어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으니 다시 기업(基業)을 보전할 희망이 없습니다. 원컨대 , 신하의 예(禮)로써 뵈옵고자 합니다” 하니 ,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에 신유(辛酉)에 뭇 신하들이 아뢰기를 ,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땅에는 임금이 둘이 없사오니 ,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 신라왕의 청을 들어주옵소서” 하였다. 임신(任申)에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서 재신(宰臣)과 백관을 모으고 이르기를 , “짐(朕)이 신라와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을 맺어 두 나라가 각기 사직(社稷)을 보전하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랐었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일컫기를 청하며 , 경(卿)등도 역시 옳다고 하므로 짐이 마음으로는 부끄럽게 여기나 의리로써 굳이 거절하기가 어렵다” 하고 , 이에 김부(金傅)의 뜰 아래서 뵈옵는 예(禮)를 받으니 뭇 신하들이 칭하(稱賀)하여 그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김부를 제수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로 봉하고 , 위(位)가 태자(太子)의 위에 있었다. 해마다 녹(祿) 1천석을 주고 ,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慶州)라하여 김부에게 주어 식읍(食邑)으로 하게 하였다. 그따라온 사람들도 모두 채용(採用)하고 토지와 녹(祿)을 주어 그전보다도 더 우대되었다. 또 신란궁(神鸞宮)을 세워 김부에게 주었다.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부호장(副戶長) 이하 관직(官職) 등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功臣)들도 역시 이를 본받아 각기 그 주(州)의 사심관이 되었으니 , 사심관은 이 때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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