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8
이름: bc8937
2009/10/4(일)
청장관전서 제52권/ 이목구심서 5(耳目口心書五)  


 
청장관전서 제52권/ 이목구심서 5(耳目口心書五)  

 
 
 
이목구심서 5(耳目口心書五)
 

개벽[開鑿]한 지 벌써 오래였으니 원기(元氣)가 점점 쇠해지는 것도 이치에 당연하다. 둥우리[巢]에 살고 나무 열매를 먹던 때의 백성은 체구와 기력이 크고 건장(健壯)해서 예사 사람보다 달랐다. 그런 까닭에 큰 더위와 모진 추위에도 병이 나지 않았으며, 나이도 거기에 맞추어서 사람마다 1백 살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복희씨(伏羲氏) 때에 와서 집을 지어 살고 의상(衣裳)을 입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풍속이 한 차례 크게 변했다. 그때부터 사람이 점점 약해져서 밖에서 잠을 자고 바람을 마시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요사(夭死)하는 조짐이 있었다. 이러므로 하늘이 신성(神聖)한 사람을 낳아서 이 거조(擧措)를 베풀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로부터 생물(生物)의 체구와 기력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도 주(周) 나라 때에는 장적(長狄 옛날 북적(北狄)의 일종) 같은 무리가 있었으나, 후세에 어찌 이런 무리가 있겠는가.
선왕(先王)께서 예법(禮法)을 마련하는 데에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을 참작해서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 가령 부모의 상(喪)에도 염[殯]하기 전에는 물 한 모금도 입에 넣지 않았고 염을 하고 나면 벌써 사흘이 지나게 되는데, 그제야 죽을 먹기는 하나 아침저녁에 쌀 두 줌뿐이었다.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을 마치면 거친 밥에 물을 마실 뿐, 채소와 과실은 먹지 않는다. 소상(小祥)을 지내면 채소와 과실을 먹고, 대상을 지내면 단술과 장을 먹으며, 담사(禫事) 후에는 단술과 술을 마시고 말린 고기도 먹었다.
3대(代 하(夏)ㆍ은(殷)ㆍ주(周)) 때에는 사람마다 기품(氣稟)이 건장하였다. 또 60살이 된 자가 비로소 고기를 먹었으니, 60이 못 된 사람은 나물밥만 먹었어도 기운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상을 당해도 기운이 크게 손상(損傷)되지 않았는데, 지금 사람이야 이 예법을 어찌 낱낱이 지켜내겠는가.
《논어(論語)》를 보면 공자께서 이르기를,

"옛적 백성은 세 가지 병폐가 있더니 지금에는 그것마저도 없어졌다. 옛적에 뜻이 높은 이는 작은 절개에 얽매이지 않더니 오늘날 뜻 높은 이는 방탕(放蕩)하고, 옛적에 긍지(矜持)를 가진 자는 청렴하더니 지금 긍지를 가진 자는 사납기만 하며, 옛적 우둔한 자는 곧기만 하더니 지금 우둔한 자는 간사할 따름이다."
하였다. 범씨(范氏)는 주석하기를,

"말세(末世)에 거짓이 불어나니 어찌 어진 자만이 옛적 같지 않을 뿐이겠는가. 백성의 본성(本性)이 물욕(物慾)에 가리운 것도 또한 옛사람과는 다르다."
하였다. 지금 이 말을 본다면 후세의 간사함과 거짓이 날로 성해서 3대 적과 같도록 변화시킬 수가 없다. 이서우(李瑞雨)가《초연재문집(超燕齋文集)》서(序)에 명(銘)하기를,

"하늘은 원기의 모체가 되니 비유하면 술독과 같네. 원기를 빚어서 사람을 만드는데 용수로 날마다 술을 거르네. 옛날은 가니 지금에 와서 박한 모주됨이 마땅하네. 술은 없어지고 찌꺼기 남아 오직 초파리만 있게 되었네."
했으니 참으로 명언(名言)이다.

아주 옛날 글자는 물형(物形)을 본뜬 것이다. 그러므로 육의(六意) 가운데 물형을 본뜬 것이 반이 넘었다. 그리고 창힐(蒼頡)이 과두 고문(蝌蚪古文)을 만들고부터 주(周) 나라 세대에 이르도록 글자에 옆 갈래가 없었다. 주 선왕(周宣王) 때부터 주 나라 중세(中世)의 문명이 점점 발생(發生)했는데, 사주(史籒)가 비로소 옛글자를 변경해서 대전자 주문(大篆字籒文)을 만들었다. 진(秦) 나라 이사(李斯)가 소전자를 만들기에 이르러서는 옛 뜻이 더욱 줄어들었는데, 왕차중(王次仲)이 팔분(八分)을 만들고 정막(程邈)이 예서(隷書)를 만든 후에는 옛글자는 점점 쇠퇴해져 버렸다.
옛 전자는 순박(淳樸)해서 다만 그 형상만 본뜬 것이므로 일(日) 자는 다만 한 동그라미였고, 월(月) 자는 반 동그라미였다. 조(鳥) 자는 새와 같았고, 어(魚) 자는 물고기 같았으며, 구(口) 자는 입 같고, 목(目) 자는 눈 같았다. 무릇 곡선(曲線)의 획을 긋더라도 한 군데도 꺾이거나 뾰족한 형세가 없었다. 대개 천지 사이에 저절로 생겨서 자라는 물(物)에는 둥근 것이 매우 많다. 비록 모난 것이 있더라도 네모 반듯한 것은 없다. 사람 몸뚱이의 털과 뼈, 구멍과 마디, 장부(臟腑)에 있어서 하나도 네모난 것은 없다.
이로써 초목과 금수(禽獸)도 모두 추측할 수 있으며 과실과 새[鳥]들의 알[卵] 따위는 더구나 동글동글하니, 하늘의 이치는 감추기 어려운 것이다. 풀 중에 비록 익모초(益母草) 같은 것이 있으나 어찌 네모 반듯하고 또 날카로운 것이 있겠는가. 이들은 대개 하늘의 명으로 태어난 것인데, 하늘은 양(陽)으로서 둥근 까닭에 물이 모두 하늘을 닮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여러 가지 기물(器物)에 모난 것이 많이 있다. 둥근 것의 이치는 살아 구르므로 규모(規模)가 크고, 모난 것의 이치는 국한(局限)해서 정한 것이므로 규모가 작다.
진(秦) 나라 때부터 풍속이 한 차례 크게 변했던 까닭으로 글자도 따라서 변했다. 팔분과 예서 따위에는 하나도 둥근 형세가 없고 모두 모난 꼴로 바뀌어졌다. 일(日) 자 같은 것은 네모가 톡 튀어나왔고 월(月) 자는 위쪽이 평평하면서 아래쪽은 비었으니 어찌 일월(日月) 모양을 본뜬 것이겠는가. 어(魚) 자와 조(鳥) 자에는 날개와 비늘 모양이 없고 구(口) 자와 목(目) 자에는 속눈썹과 부리 형상이 없다. 획을 긋고 점을 찍은 것이 갈고리 같고 창 같으며 칼 같고 송곳 같은 것이 종횡(縱橫)으로 비뚤비뚤해서 둥글고 아름다운 형세가 아주 없는데, 이것은 또 사람의 힘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국(戰國) 때에 병기(兵器)로 다투었고 진 나라 때에 와서는 사람을 수없이 죽인 까닭으로, 글씨도 저절로 다섯 가지 병기를 본뜨게 되었다. 이는 대개 진 나라 이전에는 양(陽)에 속했고, 진 나라 이후는 음(陰)에 속한 때문이었다. 소전(小篆)은 곧 과두와 주문의 후손이고 팔분과 예서의 조종(祖宗)인데, 천성(天性)이 참혹(慘酷)한 이사(李斯)가 그때의 풍속을 본뜬 것으로 거기에서 이미 살상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초서(草書)로 되어서는 세상 변괴(變怪)가 더욱 괴기(怪奇)했는데, 장전(張顚)을 초서의 성자(聖者)라 했음은 그가 미치광이어서, 예사보다 다른 때문이었다. 송 나라의 소식(蘇軾)과 황노직(黃魯直) 시대에 이르러서는 기울어지고 비스듬하며 방종(放縱)하여서, 다섯 가지 병기를 본뜬 것이 더욱 범벅이 되었으니 또한 말세의 일이었다.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때에 와서 정운(正韻)을 만들었는데 글자체(體)가 흐릿한 중에도 자법(字法)은 진실로 삼엄(森嚴)했고, 천하에 반포(頒布)해서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치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모나고 날카로운 것은 자못 대명(大明) 3백 년 동안 지극히 밝고 지극히 엄하던 정치가 반영된 것이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이 방식(方式)을 영구히 준행(遵行)하여 과장(科場)에 사용하면 자학(字學)이 그릇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이다.
범서(梵書)는 왼쪽으로 돌아서 오른편을 향하고 몽고(蒙古)도 또한 같다. 중화(中華) 글은 오른쪽으로 돌아서 왼편으로 향하는데, 이것도 또한 음과 양의 분별(分別)이다. 조선(朝鮮)의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자체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왼편으로 향하니 그 작은 중화됨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

진도남(陳圖南 도남은 진단(陳摶)의 자)이 화산(華山)에 들어가서 숨어 살고 있었다. 주 세종(周世宗)이 불러서 황백술(黃白術)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으므로 산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에 송 태종(宋太宗)이 불러서 왔는데, 재상(宰相) 송기(宋琪) 등이 묻기를,

"선생이 조용히 수양(修養)하는 방도(方道)를 깨쳤으니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겠소?"
하니, 도남이 말하기를,

"연단(鍊丹)하고 수양하는 방도는 모두 모르는 바이오. 가령 밝은 날에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 하더라도 세상에 무엇이 유익하겠소. 지금 성상(聖上)께서 고금 역사를 환하게 통해서 알고, 다스림과 어지러움을 깊이 궁구하시니, 진실로 도(道) 있는 어진 임금이오. 정히 임금과 신하가 덕(德)을 같이하고 힘을 합쳐서 교화(敎化)를 일으키고 다스림을 이룩할 때이니, 부지런히 행해서 수련(修鍊)하는 것이 이보다 더할 것이 없소."
하였다. 기(琪) 등이 그의 말을 표문(表文)으로 올리니 임금이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원(元) 나라 때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이름이 지공원군(指空元君)이었다. 순제(順帝)가 도(道)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닦는다는 것은 소의간식(宵衣旰食)하여 정사(政事)와 형벌(刑罰)을 밝게 한다면 천하가 다 편해지고 이륜(彝倫)이 밝혀지는 것이니, 어찌 천지를 도와서 길이 임금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승상(丞相) 삭사감(槊思監)이 와서 소찬(素餐)을 많이 차려 공양하면서 또한 지공에게 물었는데 그의 뜻은 복을 받는 데에 있었다. 지공이 이르기를,

"흉악하고 모진 자가 여기에 오면 임금의 기강(紀綱)이 서고 어리석은 백성이 와서 공양하면 나라 풍속이 순박해지지마는 왕신(王臣)이 여기에서 한유(閒遊)하면 백성에게 유익함이 없으니, 공상(公相)이 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이릅니다. 행실을 수양하는 방도가 많지마는 길은 달라도 이치는 한가지여서, 사람을 아는 데에 있고 백성을 편케 하는 데에 있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여 제 몸에 사사롭게 함이 없고 천하에 공변되게 하는 것입니다. 임금을 인(仁)으로 도와서 정성을 능히 갖춘다면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인간으로 태어나니 천상(天上)에 있는 왕신일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니 도남은 선술(仙術)을 배운 자이고, 지공은 불법을 배운 자이건만 말이 능히 이와 같았으니 잘 통했다고 할 만하며, 억지로 유인(誘引)해서 제 무리로 만들고자 하는 자가 아니었다. 옛적에 엄군평(嚴君平 군평은 엄준(嚴遵)의 자)이 성도(成都)에서 점술(占術)로 행세하면서 각자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 충효(忠孝)와 우애(友愛)로써 권유했으니, 무릇 이학(異學)을 하는 자는 모두 이 법을 따름이 가하다.
비록 우리 도(道)라도 또한 그 재질(才質)과 형편에 따라서 이롭게 인도하는 것에 불과하나 활용만 잘하면 천하에 버릴 사람이 없게 된다. 또 이술(異術)을 꼭 믿는 자는 어찌 이 두 사람의 말로써 자신을 반성(反省)하지 않겠는가.
근래에 지리(地理)를 보는 박중창(朴重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늙었으나 그 술법(術法)이 세상에 유명하였다. 내가 일찍이, 풍수설(風水說)에 대해 앎이 있는가 물었더니, 머리를 흔들고 웃으면서,

"사람들이 천리(天理)를 따르지 않고 한갓 지리만 일삼는데, 나도 또한 모른다."
하였다. 이 말이 풍수설에 미혹(迷惑)한 자에게 꼭 합당한 말이었다.

옛사람이,

"육합(六合 천지와 4방) 밖의 일은 그냥 두고 논(論)하지 않는다."
했는데 말은 매우 정대(正大)하였다. 그러나 호걸(豪傑)스러운 사람은 한 사물(事物)이라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육합같이 큰 것은 유독 알아서는 옳지 못하다는 것인가. 마음을 가다듬고 고요하게 생각하여, 의지하거나 가탁함 없는 생각이 광막(廣漠)한 데에 들게 되면 또한 발광(發狂)하기에 족하다. 굴원(屈原)이 지은 《초사(楚辭)》천문편(天問篇)도 또한 발광한 소리였다. 지금 여러 글 중에 다른 것을 대략 상고해서 기재(記載)한다.
《춘추(春秋)》원명포(元命苞)에는,

"해는 왼쪽으로 도는데 하늘을 일주(一周)하면 23만 리이다."
했고,《논형(論衡)》에는,

"해와 달은 하루낮 하룻밤에 2만 6천 리를 간다."
하였다.《설문(說文)》에는,

"해의 직경(直徑)은 4백 리요 둘레가 1천 2백 리이며 땅에서 2만 5천 리 되는 거리에서 황도(黃道)를 따라 운행(運行)한다."
하였다.《상서(尙書)》 고령요(考靈曜 상서위(尙書緯)의 일종으로 지금은 없어졌다)에는,

"햇빛이 40만 6천 리를 비치는데 해는 여러 별 너머 1만여 리 밖에서 나온다."
했고,《진서(晉書)》에는,

"해는 항상 땅에서 8만 리 거리에 있다."
하였다. 서정(徐整)의《장력(長曆)》에는,

"해와 달의 직경은 1천 리이고 주위(周圍)가 3천 리인데 하늘보다 7천 리가 낮다."
하였다.《주비(周髀)》에는,

"햇빛이 밖으로 직경 81리의 지면(地面)까지 비춘다."
했고,《설서(說書)》에는,

"해와 달이 지면 45만 리를 비친다."
하였다. 안정 호씨(安定胡氏 안정은 북송(北宋) 호원(胡瑗)의 자)는,

"남극은 땅 밑으로 36도를 들어가고, 북극은 땅 위로 36도 나와서 하루낮 하룻밤에 90여 만 리를 간다. 사람의 한 번 내쉬고 한 번 들이쉬는 것이 한 숨이 되는데 한 숨을 쉬는 동안에 하늘은 벌써 80여 리를 운행한다. 사람이 하루낮 하룻밤에 1만 3천 6백여 번 숨을 쉬기 때문에 하늘은 90여만 리를 운행한다."
하였다. 서정의《장력》에는,

"큰 별의 직경은 1백 리이고 중간 별은 50리이며 작은 별은 30리이다. 북두칠성은 별 사이의 거리가 9천 리인데 모두 해와 달 밑에 있다. 그리고 그늘진 별로서 보이지 않는 것은 거리가 80리이다."
하였다.《관령내전(關令內傳)》에는,

"북두 한 별의 면적(面積)이 1백 리이고 서로 거리는 9천 리이다."
하였다.《상서》고령요에는,

"땅에 사유(四游 네 계절의 뜻)가 있다. 동지(冬至)가 되면 땅이 북쪽으로 올라서 서쪽이 3만 리이고, 하지(夏至)에는 땅이 남쪽으로 낮아져서 동쪽이 3만 리인데 춘분(春分)과 추분에는 복판에 있게 된다."
했고, 또,

"28수(宿) 너머 동쪽과 서쪽이 각각 1만 5천 리가 되니, 이것을 사유의 극(極)이라 이르며 사표(四表)라고도 이른다. 사표 안과 성수(星宿) 안의 직경이 총 38만 7천 리가 되고 하늘 복판의 꼭 반이 되는 곳은 19만 3천 5백 리인데 땅이 그 안에 있어, 두께가 3만 리이다. 춘분 때에는 땅이 한복판에 있는데 이때로부터 점점 낮아지다가 하지에 이르면 땅이 1만 5천 리나 낮아져서 땅 위쪽이 하늘 복판과 맞닿는다. 하지 후에는 땅이 점점 높아지고 추분이 되면 땅이 바로 하늘 복판에 맞닿는다. 이로부터 땅이 점점 높아지다가 동지에 이르면 땅이 1만 5천 리나 높아져서 땅 아래쪽이 하늘 복판과 맞닿는다. 동지 후부터는 땅이 점점 낮아지는데 땅은 항상 3만 리 안에서 높았다가 낮았다가 한다."
하였다.
《관자(管子)》에는,

"땅이 동서(東西)는 2만 8천 리이고 남북은 2만 6천 리인데 물 밖에 나온 것이 8천 리이고 물 속에 잠긴 것이 8천 리이다."
하였다.《회남자(淮南子)》에는,

"하늘에는 구부(九部) 팔기(八紀)가 있고 땅에는 구주(九州) 팔주(八柱)가 있다. 구주 너머에 팔연(八埏)이 있고 팔연 너머에 팔굉(八紘)이 있으며 팔굉 너머에 팔극(八極)이 있는데, 팔극의 넓이가 동서는 2억 3만 3천 리이고 남북은 2억 3만 1천 5백 리이다."
하였다.《시함신무(詩含神霧)》에는,

"하늘과 땅의 거리는 1억 5만 리이다."
하였다.《산해경(山海經)》에는,

"우(禹) 임금이 수해(竪亥 우의 신하)를 시켜 동극(東極)에서 서극(西極)까지 보수(步數)를 밟았더니 5억 10만 9천 8백 8보였다."
하였다.《하도괄지상(河圖括地象)》에는,

"우(禹) 임금이 다스린 사해 안 땅이 동서로는 2만 8천 리이고 남북은 2만 6천 리였다."
하였다.《효경원신계(孝經援神契)》에는,

"구주(九州)로 나뉘어진 땅을 헤아려 보니, 큰 산릉(山陵)과 냇물이 모여드는 곳, 잡풀[茶洹]이 나는 곳, 조수(鳥獸)가 모이는 곳이 9백 11만 8천 24경(頃)이고 자갈밭이어서 개간(開墾) 못하는 것이 1천 5백만 3천 경이었다."
하였다.《회남자(淮南子)》에는,

"우 임금이 대장(大章)을 시켜 동극(東極)에서 서극까지 보수(步數)를 밟았더니 2억 3천 5백 25보였다."
하였다.《관령내전(關令內傳)》에는,

"땅의 두께는 1만 리이다."
했고,《장형영헌(張衡靈憲)》에는,

"땅의 깊이는 1억 1만 6천 2백 리이다."
했으며, 왕영(王嬰)의《고금통론(古今通論)》에는,

"땅의 두께는 3만 리이다."
하였다.《관자(管子)》에는,

"천하 명산(名山)이 5천 3백 70인데 철(鐵)이 나는 산이 3천 6백 9군데이다."
했고,《괄지도(括地圖)》에는,

"천하의 샘[泉]이 3억 3만 3천 5백 19군데이다."
했는데, 동떨어지게 먼 지역은 거의 알 수가 없다.

중국에 태어나지 않은 자로서 문장에 능숙하기는 더욱 어려운데 이는 방언(方言)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은 한 마디 말이라도 문자(文字) 아님이 없다. 아이 때부터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이 모두 음(音)과 뜻이 있다. 다만 글을 배우기 전에는 눈으로 무슨 글자인지를 분별하지 못할 뿐이다. 이런 때문에 석계룡(石季龍 계룡은 석호(石虎)의 자)이 눈으로는 글을 몰랐으나 사람을 시켜 한사(漢史)를 읽게 하여 옆에서 듣고는 마음에 벌써 환하게 알았고,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의 여종도 능히《시경(詩經)》을 외웠다. 비록 시골 백성과 마을 부인(婦人)이라도 남이 전기(傳奇 소설 따위) 읽는 것을 듣고는 모두 손뼉을 치며 시끄럽게 웃지만, 읽게 하면 모른다. 옛적에는 남녀(男女)가 겨우 4~5살만 되면 먼저《논어(論語)》ㆍ《효경(孝經)》ㆍ《열녀전(烈女傳)》등 글을 읽는데, 입과 귀가 서로 통하기 때문에 눈으로 그 글자를 아는 것은 쉽다. 그러므로 반만 노력해도 성취되지만, 우리나라 아이들 같으면 어찌 능히 처음부터《논어》등 글을 읽어 내겠는가. 가령 백 마디 말의 글을 중국 사람에게 읽게 하면 늘거나 줄어짐도 없어 다만 백 마디 말일 뿐이지만, 우리는 방언으로 풀이하므로 백 마디 말이 거의 3~4백 마디 말이 되고 또 토가 있어서 거의 50~60말이 되어 중국과 비교하면 4~5갑절이나 된다. 그러하여 일 년 내내 부지런히 공부해도 몇 가지 글을 읽게 될 뿐이므로 우리나라 사람의 문장에 대한 식견(識見)이 끝내 중국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 중국의 어리석은 백성이 도리어 문자를 대략 깨친 우리나라 사람보다 나은데, 중국의 어리석은 백성에게 우리나라 사람이 문자를 대략 깨치게 되는 정도의 공부를 하도록 한다면 그 견식(見識)은 제법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더구나 더러운 풍속에 얽매여서 능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울 및 서울 근처와 외방(外方)의 문체(文體)가 아주 다른데 그 산천(山川)의 국판(局版)이 작기 때문이다. 식견이 저속(低俗)한 선비는 또 글자의 뜻을 모른다. 대두(大荳)와 소두(小荳)를 분별하지 못하고 매양 두태(豆太)라고만 일컫는데, 대개 두(荳)를 소두라 하고 태(太)는 대두라 한다.
심지어는 표문(表文)을 짓는 자가 두분(豆分)과 태평(太平)으로써 대구(對句)로 삼았으니 고루(固陋)하구나. 옛 풍속에 관부(官府)의 문부(文簿)에 대두 몇 섬이라고 적으려면 번거로워 갖추어 적기가 어려워서 대(大) 자만 쓰고 그 밑에다 점 하나를 찍어서 콩 모양을 나타내었다. 이것이 오래되자 차츰 어긋나서 대(大)와 점을 합쳐 태(太) 자로 되었고, 온 세상이 모두 대두(大荳)를 태라 하는 것이 굳어져서 이제는 파할 수 없게 되었다. 푸른 생콩을 세속(世俗)에서 청태(靑太)라 한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의 일기(日記)에도 '마을 사람이 청태를 보내 왔다.'라고 하였다.
고금(古今)에 서적이 많아진 것은 대개 유서(類書)와 선서(選書)가 나오기 시작한 데에 연유하였다. 일체 서적에서 글줄과 구(句)를 뽑아내어 여기에는 넣고 저기에 빼고 해서, 앞머리를 고치고 면(面)을 바꾸기도 하였다. 유서는 더구나 좋은 것이 없고, 선서도 많기는 하지마는 대략은 같으면서 조금씩만 다를 뿐이다.《연감유함(淵鑑類函)》이 유서의 대가(大家)인데, 강희(康熙)가 유신(儒臣) 장영(張英) 등 1백 30여 명에게 명(命)해서 편찬한 것이다. 무릇 43부(部) 4백 50권이고 목록이 4권이다. 강희가 친히 서문하면서,

"옛적에 공자께서《주역(周易)》계사(繫辭)를 지었는데, '방(方)은 유(類)로써 모인다.' 하고 또 '하늘에 근본한 것은 상(上)에 친하고 땅에 근본한 것은 하(下)에 친해서 각각 그 유를 따른다.' 했고, 계사(繫辭)에는 '그 일컬은 이름은 작으나 그 유를 모은 것은 크다.' 하였다. 대개 천하의 고금 사물(事物)의 이치가《주역》에 다 갖추어져 있는데,《주역》이라는 글은 이치에 의해서 물(物)을 형상(形象)하고 물을 인해 말을 징험해서 천하의 의심을 결단하고 천하의 일을 이룩한 것으로 각각 그 유를 좇아서 밝힌 것이다. 그러니 유서를 꾸민 것도 또한 성인의 입언(立言)한 뜻에 어김이 없는 것인가. 유서로서 가장 드러난 것은 《예문유취(藝文類聚)》ㆍ《북당서초(北堂書鈔)》ㆍ《초학기(初學記)》ㆍ《백첩(白帖)》ㆍ《두씨통전(杜氏通典)》이다.
그러나 송 나라ㆍ명 나라 이래로 편찬한 것이 범위와 내용이 방대하면서도 번거롭지 않거나 간략하면서도 핵실(覈實)한 것은 드문데, 유안기(兪安期)가 엮은《당유함(唐類函)》만이 제법 상세하게 궁구되어 있다. 대저 구양순(歐陽詢)이 꾸민《유취(類聚)》를 근거하고 《서초》ㆍ《초학기》ㆍ《백첩》ㆍ《통전》을 조금씩 깎고 두어서 붙여 보탠 것이다. 안기는 명(明) 나라 사람이면서《당유함》이라 한 것은 그것이 모두 당 나라 때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송 나라 이후의 글이 빠졌고, 당 나라 이전 것도 빠진 것이 있다. 이에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멀리 상고하고 널리 찾아서, 옛 서적을 구하고 근대(近代)의 것도 망라(網羅)하여 없는 것을 보태고 간략한 것은 밝혔다."
하였다. 범례(凡例)에는,

"원본《당유함》에《예문유취》ㆍ《초학기》ㆍ《묵당서초》ㆍ《백첩》이 기재되었고, 《통전》ㆍ《세화기려(歲華紀麗)》등 여러 글이 곁들여져 있으나, 이것은 모두 당 나라 초기 이전의 전고(典故) 예문(藝文)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당 나라 초기 이후로부터 오대(五代 후당(後唐)ㆍ후량(後梁)ㆍ후주(後周)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송ㆍ요(遼)ㆍ금(金)ㆍ원(元)과 명 나라 가정(嘉靖) 연대까지로 했는데, 채록(采錄)한 것은 《태평어람(太平御覽)》ㆍ《사류합벽(事類合璧)》ㆍ《옥해(玉海)》ㆍ《공첩(孔帖)》ㆍ《만화곡(萬花谷)》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문원영화(文苑英華)》ㆍ《산당고색(山堂考索)》ㆍ《잠확유서(潛確類書)》ㆍ《천중기(天中記)》ㆍ《산당사고(山堂肆考)》ㆍ《기찬연해(紀纂淵海)》ㆍ《문기유림(問奇類林)》ㆍ《왕씨유원(王氏類苑)》ㆍ《사사유기(事詞類奇)》ㆍ《한원신서(翰苑新書)》ㆍ《당시유원(唐詩類苑)》및 21사(史)와 자집 패편(子集稗編)을 다 수집하고 죄다 전례(前例)를 따라 엮어 넣었다. 원본 《유함》에는 《예문유취》가 첫째이고,《초학기》가 둘째,《북당서초》가 셋째,《백첩》등 글이 넷째이면서 시문(詩文)이 뒷마무리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석명(釋名)ㆍ총론(總論)ㆍ연혁(沿革)ㆍ연기(緣起)를 첫째로, 전고를 둘째로, 대우(對偶)를 셋째로, 적구(摘句)를 넷째로, 시문을 다섯째로 했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풍부하고 광범위하기로는 이루 말할 수 없으나 대명(大明) 시대의 사실 및 시문이 여러 시대와 비교해서, 수록된 것이 자못 소략(疏略)하니 이것이 흠될 만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夷) 자를 혹 이(彝)로 바꾸고 혹은 이(夸)로 썼음은 고루(固陋)한 버릇이었다. 현(玄) 자를 원(元) 자로 바꾸고 엽(曄) 자에 화(華)의 내리긋는 획을 없앤 것은 대개 강희(康熙)의 이름자를 피한 것이었다. 윤(胤) 자에도 을(乙)이 없다.

목홍공(木弘恭)의 자(字)는 세숙(世肅)인데 일본(日本) 대판(大坂) 상인(商人)이다. 낭화강(浪華江) 가에 거주하며 술을 팔아서 살림을 모았다. 날마다 귀한 손님을 초대해서 시를 짓고, 서적 3만 권을 사들였는데 1년 비용이 수천여 금이었다. 이런 때문에 축현(筑縣)에서 강호(江戶)까지 수천 리 사이에 선비로서 어질거나 어질지 않거나 간에 모두 세숙을 칭송(稱頌)하였다. 또 장삿배에 부탁해서 중국 선비들의 시 두어 편(篇)을 구해다가 문 중방에 걸었다.
강가에 겸가당(蒹葭堂)을 짓고, 축상(竺常)ㆍ정왕(淨王)ㆍ합리(合離)ㆍ복상수(福尙修)ㆍ갈장(葛張)ㆍ강원봉(罡元鳳)ㆍ편유(片猷)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당 위에서 조촐한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갑신년(영조 4, 1764)에 성대중 사집(成大中士執)이 일본에 갔다가 세숙에게 청해서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를 만들었다. 세숙이 손수 그렸고 여러 사람이 시축(詩軸)에다 시를 썼는데 축상은 서문(序文)을 지어서 주었다. 축상은 중이었으나 전고(典故)를 깊이 알았고 성품이 또 침착해서 옛사람의 풍치(風致)가 있었다. 정왕은 축상의 문도(門徒)로서 청초(淸楚)한 것이 사랑스러웠고 합리도 또한 기이한 재주가 있었다.
지금 그들의 시와 문을 기록하는데 비록 고루함을 벗지는 못했으나 먼 지역 사람들의 풍류(風流)가 사랑스럽다. 글씨가 모두 산뜻하고 그림도 속기(俗氣)를 벗어났다.

하곡(河曲) 합리(合離)의 시

천리 고향이 모두 물인데/千里鄕爲水
누가 오 나라 경치 같다 말했나/誰言景似吳
부유한 집이 많고/殷富家多少
풍류 아는 객(客) 있네/風流客有無
다만 봄 새벽에 술 마신다/只是春晨飮
어떤가 계 모임의 그림이/何如稧會圖
배 돌려서 좋은 일 전해오는데/回舟傳好事
사람은 아직도 갈대밭에 있네/人尙在菰蘆

영산(映山) 복상수(福尙修)의 시

함께 모신 이 자리 풍월이 좋아/俱陪風月勝
글 짓는 붓 몇 번이나 놀렸던가/賦筆幾爲遊
유명한 지경에 갈대는 묵어 있고/名境蒹葭古
작은 동산 새들이 한가하네/小園鳥禽幽
찬 마름은 항상 물에 떠 있고/寒藻偏依水
아름다운 꽃가지는 절반쯤 누에 들었네/芳花半入樓
금석 같은 계 모임을 어찌 알겠나/那知金石契
요금 켜는 즐거움 그침없어라/瑤琴樂未休
호해에 서로 만난 짝들이지만/相逢湖海侶
미치광이 태도는 나의 소탈함이네/狂態任吾疏
사람은 삼춘 술에 취했고/人醉三春酒
집에는 만권 책 갈무리했다/家藏萬卷書
누각을 둘러싼 산빛이 아름답고/繞樓山色秀
한 움큼 물을 뜨니 달빛도 비었네/掬水月光虛
초은시 짓기야 어렵지 않아/招隱非難賦
그윽한 뜻 본래 남음 있으니/幽情本有餘

두암(蠹葊) 갈장(葛張)의 시

천추에 모인 벗 문장이 있어/千秋會友有文章
화포와 약란과 초당이었네/花圃藥欄舊草堂
주점의 술은 사마가 팔던 것과 같겠지/罏酒應同司馬賣
서가 책은 업후보다 못지 않으리/架書不讓鄴侯藏
엷은 구름 담로에 갈매기 천 점/微雲淡路鷗千點
성긴 비 낭화에 두어 줄 기러기/疏雨浪華雁數行
호해에 유람하는 사람 몇인가/湖海溯遊人幾在
갈대 너머 포구에 비스듬한 돛대/蒹葭隔浦欹帆檣

격범(隔凡) 강원봉(罡元鳳)의 시

한줄기 봄 물이 불어나니/一水春漲後
갈대밭에 작은 배를 매었네/蒹葭繫小艭
누군들 구면 아니랴/人誰非舊識
시는 새로운 마음에서 나왔네/時自出新腔
밤비 개자 바다를 보고/夜雨晴觀海
새벽 꽃이 모여서 강을 덮었네/晨花聚覆江
이런 중에 큰 잔을 허락했으니/此中許深酌
두세 항아리를 기울이겠네/可倒二三缸

지암(芝菴) 석정왕(釋淨王)의 시

고당에 벗이 항상 모이지만/高堂常會友
하물며 양춘이 나를 부름에랴/況召向陽春
새벽 바다에 구름과 안개 깔렸고/海曙雲霞繞
꽃 피자 새들이 날아들었네/花開禽鳥臻
도류가 우리를 용납하는데/道流容我輩
문아한 선비는 저 사람일세/文雅屬伊人
평생에 막역한 좋은 사이니/莫逆平生好
주객을 어찌 물으랴/何須問主賓
동산의 봄날 길기도 하여/園林遲日永
종일 담소로 즐기었네/談笑無偏餘
좌석에 진번의 자리 연했고/座上連陳榻
문 앞엔 여안의 수레 나란하네/門前倂呂車
삼동에는 사기를 공부할 만하고/三冬堪用史
두 유산은 책 간직하기 좋네/二酉足藏書
서녘 창 밑이 싫지 않아서/不厭西窓下
촛불 켜고 도리어 머물러 있네/還留秉燭初

목홍공(木弘恭)의 시

작은 당이 굴강 굽이에 있어/小堂掘江曲
몇 해나 함께 거닐었던가/幾載共相羊
비녀장 뽑고서 항상 술 마시고/投轄常浮白
글을 평론하면서 날마다 탄황하네/論文日攤黃
누가 친구 사귈 줄을 알랴/誰知結交地
소년 모이는 곳 마음에 편치 않네/不屑少年場
맹사가 이와 같이 있는데/盟社如斯在
간광을 어찌해 시름하리요/何愁簡且狂

북해(北海) 편유(片猷)의 시

겸가당 위에 낭화의 봄/蒹葭堂上浪華春
한 조각 봄 마음이 그림 속에 새롭네/一片春心畵裏新
소회하는 한없는 흥을 누가 알리/誰識溯回何限興
은근히 이방인에게 적어 주네/慇懃寫寄異邦人

축상(竺常)의 서문
겸가당의 모임이 글로써 함께 한 것이기는 하나, 사람의 뜻이 각자 다르고 도(道)도 같지 않다. 그러나 흡족하게 즐거워하고 기쁘게 여김이 어찌 한갓 글 때문이겠는가. 대개 다른 것은 서로 배반하기 쉬운데 세숙이 능히 사이 좋게 조화시키고, 같은 것은 빠져들기 쉬운데 세숙이 능히 예(禮)로써 정돈하였다. 이 때문에 여기 겸가당에 모이게 된 것이다. 세숙이 이미 예와 화(和)로써 문사(文士)를 체결(締結)한 까닭으로, 한 고을 한 나라에서 천하에 이르도록 겸가당 그 사람을 찬양하지 않는 이가 없다. 세숙의 사귐이 또한 풍족하지 않은가.
이번에 마침 조선(朝鮮)의 여러분이 동쪽으로 왔다. 세숙 같은 자가 모두 객관(客館) 안에서 여러분을 뵈었더니 세숙을 예부터 서로 알았던 것처럼 좋아하였다. 그 후 그분들이 돌아갈 무렵에, 용연 성공(龍淵成公)이 세숙에 겸가아집도를 그리게 하고 함께 모인 자에게는 그 끝에다가 각자 시를 쓰도록 청하면서 '가지고 돌아가서 만리에 그리운 안면(顔面)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아아, 성공의 마음이, 몸을 겸가당 위에 둔 자와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그런즉 세숙의 사귐이 한 고을 한 나라에서 천하에 이르름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해서 이역 만리 밖의 그분과 사귐을 얻었던 것인가. 오직 국가에서 큰 빈객(賓客)을 예대(禮待)함이 엄숙하고 또 신중하기는 하나 그 사사로이 보고 즐거워함은 세숙의 무리가 하였다. 그러나 세숙이 비록 예와 화로써 조화하였다 하더라도 진실로 국가에서 관여(關與)한 바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았겠는가. 나는 글이 그 도(道)는 아니나, 성공께서 나를 세숙처럼 보았다. 그 이역 만리의 사귐에 감격하여 속에 쌓인 마음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기에 겸가아집도 끝에 서문을 지었다.
일본 보력(寶曆) 14년 갑신(甲申) 5월 4일, 담해(淡海) 축상은 낭화 교거(浪華僑居)에서 쓰다.

시축(詩軸) 끝에 이렇게 썼다.

"겸가당에 모이는 자는 월후(越後) 편효질(片孝秩), 평안(平安) 나파효경(那波孝敬)ㆍ평안 합려왕(合麗王)ㆍ낭화(浪華) 복승명(福承明)ㆍ낭화 강공익(罡公翼)ㆍ낭화 갈자금(葛子琴)ㆍ담해(淡海) 중 태진(太眞)ㆍ이세(伊勢) 중[僧] 약수(藥樹)ㆍ주인인 낭화 목세숙."

동자 장건(童子張健)은 옥성(玉城)의 후예이다. 11살 때에 두자미(杜子美)의 동곡칠가(同谷七歌)에 화답해서 그의 종형(從兄) 탁(倬)에게 부쳐 보냈는데 말뜻이 매우 웅장하고 아담하였다.
그 첫째,

세상에서 산중 여곽 국을 천하게 여기지만/世鄙山中藜藿羹
소부 따라 내 귀를 씻고 싶었다/欲追巢父洗吾耳
십년 동안 지하의 스스로 짓고/十年自製芰荷衣
빈 골에 띠풀로 집을 지었네/結茆爲廬空谷裏
날씨 찬 세밑에 바람 이니/天寒歲暮陰風起
병든 기마 슬피 울고 풀도 말랐네/病驥悲鳴枯草死
생각느라 술 안 마시니 마음 슬픈데/相思不飮令心哀
낙성에서 돌아오는 꿈만 꾼다오/祗擬歸夢洛城來
하고, 둘째,

북두밑 장안을 멀리 바라보며/遙望長安倚斗柄
긴긴 나의 회포 천명에 붙였네/悠悠我懷寄天命
거닐다가 오래 서서 서성거리며/佇立逍遙以相竿
짧은 옷이 종아리를 겨우 덮었네/短衣牛歌纔掩脛
나그네 꿈 차가운 눈에 섞여서/寒窓夢和蕭蕭雪
고요한 밤 빈 뜰에 내리네/留向空階滴夜靜
달 비친 서상에 노래 불러서/對月書床歌始放
임랑에 화답하니 뜻이 구슬퍼/和罷琳瑯意惆悵
형과 내가 각지에 표박하지만/與兄飄飄各一方
삼여에 글 읽음은 누가 더했나/三餘讀書誰最强
당 앞에 우뚝 선 천 길 잣나무/堂前硉兀千尋柏
공연한 바람과 비 세밑에 길다/歲寒空送風雨長
닭 울어도 달은 아직 삼경 전인데/荒鷄呼月未三更
내 옆에 있는 꿈을 밤마다 꾸오/夜夜夢見在我傍
창 앞에 핀 매화를 손수 꺾으니/晴窓手折寒梅發
소녀의 맑은 자태 옥골 겸했네/素女氷姿兼玉骨
하고, 넷째,

요화 꺾으며 이별을 추억해 보네/手折瑤花憶別離
꿈속에도 형은 굳세고 난 미련해/夢中兄强我曾痴
오동잎이 명년엔 가득 필 텐데/梧葉明年開滿樹
어느 때나 가을 빗소리 함께 들으리/共聽秋雨正何時
지난해엔 장안에 갔더랬는데/去年往在長安裏
용사 그림 깃발이 눈에 가득했소/滿月龍蛇畫旌旗
형 생각에 슬픈 노래 차마 못했는데/憶兄悲歌不忍奏
형도 날 생각하고 낮에 졸겠지/兄應思我眠白晝
하고, 다섯째,

바람 센 밤 서루에 누웠는데/書樓夜臥風緊急
사방 두른 산 숲이 습하네/四山屛擁雲樹濕
낙양성 안 저문 날에 눈이 엉겼고/洛陽城裏凝暮雪
강가의 찬 구름이 바위에 서리었네/江上寒雲觸石立
동녘 사람 신발 소리 앉아 듣다가/坐聽東墻人響屐
갖옷 입고 눈 쌓인 것 와서 보네/擁裘來看玉霙集
나그네살이 서울에 꿈만 아득해/旅食京華歸夢長
물 한 굽이 구름 마을 돌아가고파/滄浪一曲水雲鄕
하고, 여섯째,

천리 머나먼 용추라/千里悠悠隔龍湫
눈길 끝 산천 초목이 무성하구나/極目山川自鬱樛
장안과 멀어 동쪽으로 바라보기 괴롭고/地遠長安勞東望
조수가 창해에 연해 서녘으로 놀이하고 싶어라/潮連滄海欲西遊
옛적 동녘 언덕 오동나무 밑에서/憶昔東坡梧樹下
한 잎사귀 가을 소리에 풍우 쉬더니/一葉秋聲風雨休
새벽 꿈 못 꾸고 겨울 밤 긴데/殘夢不成冬夜遲
창 밖엔 우수수 솔과 잣나무/窓外蕭蕭松柏姿
하고, 일곱째,

밤낮 형 생각에 늙어가는데/日夜思兄令人老
산길이 구불구불 먼 길 막혔네/山坡悠悠隔遠道
길이 멀어 뒤척이며 생각도 못해/遠道展轉不可思
새벽 창에 누웠으니 달이 올랐네/曉窓歸臥月上早
속절없이 촛불만 마주했더니/惟有蠟燭空相對
나 대신 눈물 흘려 회포 슬프네/替人垂淚傷懷抱
슬픈 노래로 양춘곡 화답하니/悲歌更和陽春曲
쌀쌀한 세밑 바람 어찌 그리 빠른가/歲暮陰風一何速
하였다.

심계(心溪)의 큰집 조카 광석(光錫)은 생각하는 것이 환하게 트였고, 말이 허무한 경지에 들어서, 거의 불씨(佛氏)나 노자(老子)의 학설에 빠져들 뻔하였다. 내가 매우 걱정했더니 근래에 맹렬히 공부하였다. 성현(聖賢)의 학문을 하면서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문밖에 나가면 어른에게 공손하여 뛰어나게 법도가 있으니 참으로 공경할 만하였다. 그런데 그가 읊조린 것이 예사 사람의 생각을 뛰어나게 벗어나서, 깨친 것이 많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몰라주었으나 나는 그가 읊조린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도임을 알았다. 그 너무 괴벽(怪僻)한 것을 가끔 경계했는데 일찍이 웃으면서,

"그대의 시(詩)는 완연히《능엄경(楞嚴經)》을 읽은 자의 말이고《대학(大學)》을 읽은 자의 말은 아니다."
했더니, 드디어 두 손을 마주 잡고 말하기를,

"마음에 얽매임이 없어서 말이 혹 쇄탈(洒脫)했으나 우리 도(道)에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귀정로(龜井魯)의 자는 도재(道哉)인데 일본 사람이다. 20살 남짓하며, 재치가 있고 영리하며 민첩하였다. 그가 지은 호가(胡笳)의 노래에,

달 밝고 바람 소슬한데/月白風蕭瑟
호가의 곡조가 맑네/胡茄度曲淸
어떤 이가 나그네 생각 많던가/何人多旅想
변경 소리 아닌 데가 없어라/無地不邊聲
서리 내리자 모든 집이 쌀쌀하고/霜下千門肅
모래 평평한데 외딴 수루가 있네/沙平獨戍橫
하늘가 나는 기러기 미워라/生憎天際雁
죄다 고향을 향해 울며 나네/摠向故鄕鳴
하였고, 버들가지를 꺾어서 대판(大坂) 가는 객을 전송한 시에는,

하남 버들 아래서 객을 전송하는데/送客何南柳
가지마다 괴롭게도 짧기만 하네/枝枝苦不長
봄비에 푸른빛을 스스로 보태/自添春雨色
몇 사람의 애간장을 끊어 내려나/復斷幾人腸
하였다.

변자흠 약순(邊子欽若淳)은 시를 지으면서 상투어를 쓰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스스로 한 문호(門戶)를 만들어서 말이 모두 명랑하고 영오(穎悟)하였는데, 사람들이 혹 비웃었으나 동요하지 않았다. 성품은 소탈하고 고아(高雅)하였으며 그가 시를 한창 생각할 적에는 육신도 잊은 듯하여 누워 있는 돌 관음상(觀音像) 같았다. 자흠이 나에게 눈 덮인 지붕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침 햇살에 자색(紫色)으로 변한 것을 읊조린 시를 외는데,

들 눈이 우뚝하게 지붕을 덮어/野雪隆然屋
엎드린 횐 낙타와 비슷하네/大逼白駝伏
찬 연기 등 위에 서리더니/凍煙結其背
붉은 반에 비치어 문채가 나네/赬盤映相郁
낙타가 함부로 소금 먹은 듯/如駝恣食鹽
특별히 살덩이가 우뚝 나왔네/別挺亭亭肉
하였다. 자흠이 남에게 그 시를 외면 사람들은 반드시 절도(絶倒)하였다. 자흠이 눈을 싱긋하면서,

"남의 시를 들으면서 옷깃을 여미고 앉아서 말도 않고 웃지도 않으면 그 시는 반드시 엄숙한 말일 뿐인데, 내가 외면 사람들이 반드시 웃으니 왜 그런가?"
하였다. 가을에 자흠이 여러 재자(才子)와 함께 백련봉(白蓮峯)에 놀이하다가 시를 지었다.

쓸쓸한 와엽정이 유명도 한데/蒼涼瓦葉自名亭
잣나무 바람에 부대껴 껍질 벗었네/庭柏磨風赤甲零
바위가 깨끗함은 맑은 샘물 탓이고/巖最泓淨泉以慧
저녁에도 어둡지 않음은 달빛 때문이네/夕無陰翳月之靈
피려는 국화를 서린들 어찌 막으리/欲開花菊霜何遏
머물 맘 없는데도 경치가 머물게 하네/無住心人境使停
일곱 사람의 시가 모두 뛰어나/七子者皆詩味雋
가락을 알아 거문고 소리 서로 듣는다/知音絃柱互相聽
밤에 읊조린 시는,

겨울 지낸 벼룻물이 쪽같이 맑아/硯汁經冬湛如藍
우리들 몽당붓을 용납해 주네/尙容吾輩禿筆含
한가로이 나그네 창에 칠하여 지나가는 학을 부르고/閒漆旅口招過鶴
공교로이 수심 무늬를 짜서 와잠에 오르고/工織愁紋上臥蠶
친한 우정은 매화처럼 추위와 더위를 함께하고/玅契與梅同冷暖
세정은 귤같이 시고 또 달아/世情如橘劇酸甘
평생에 도리는 응당 다름 없으리/平生塗轍應無異
등불 앞에 그림자 셋이 따르네/燈下相隨影祇三
하였다.

봄날에 자흠을 만났더니 자흠이, 그가 지은 두어 연구(聯句)를 외웠다.

노란 싹 푸른 꼬투리 아이처럼 움직이고/黃芽綠莢如孩動
주름진 물 무늬 비단 놀같이 곱구나/縐水紋嵐似縠纖
물 따뜻하니 오리 새끼 물거품에 노닥이고/水暖鳧雛泡影嬲
절 비어서 암여우가 부처 앞에 참례하네/寺空狐女佛光參
나는,

"예전에는 바로 원중랑(袁中郞)이더니, 근래에 들으니 치천(稚川)이 중랑집(中郞集)을 본다 하더라."
하였다. 이어 자흠과 더불어 두어 편(篇)을 지었는데 갑자기 한 격조(格調)가 진보(進步)한 듯하였다.

봄은 전부 드러내기 싫어서 먼저 버들에 달려들고/春嫌全露先侵柳
구름은 의지할 데 없음이 구슬퍼 삼나무를 넘어가네/雲悵無依竟度杉
하는 것이 있었으니 자흠은 정신을 수양한 공부가 없지 않았다. 자흠이 웃으면서,

"중랑서원(中郞書院)을 지어서 나를 배향하겠는가. 한 중랑은 비록 없을 수 없지마는 근래에 백 중랑을 만든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관아재(觀我齋) 조영우(趙榮祐)가 그린 동국 풍속도(風俗圖)를 수집해 그대로 그린 것이 70여 첩(帖)이나 되었는데 연객(煙客) 허필(許泌)이 상말로 평(評)했다. 세 여자가 재봉(裁縫)하는 그림에 쓴 것은,

한 계집은 가위질하고/一女剪刀
한 계집은 주머니 접고/一女貼囊
한 계집은 치마 깁는데/一女縫裳
세 계집이 간이 되어/三女爲姦
접시를 뒤엎을 만하다/可反沙碟
하였고, 의녀도(醫女圖)에 쓴 것은,

천도 같은 높은 상투 목어 귀밑털/天桃高髻木魚鬢
붉은 회장 초록 저고리에/紫的回裝草綠衣
벽장동을 향해서 새로 집을 샀으니/應向壁藏新買宅
오늘밤엔 누구집에 밤놀이했나/誰家今夜夜遊歸
했는데, 기생집이 벽장동에 많기 때문이라 했다. 유혜보(柳惠甫)는 화첩(畫帖)마다 여섯 자의 평(評)을 하였다. 흙담 쌓는 그림을 평한 것은,

물고기가 물에 놀아 장단 합치고/魚遊河長短合
목이 토 이겨서 승강 더디다/木克土升降遲
많은 밥을 끼니마다 먹어치우고/豐飯三時喫了
삯돈으로 십문을 갈무리하네/雇錢十文藏之
하였고, 조기 장수 그림을 평한 것은,

생선 조기 지고 가면서/生鮮石魚負去
큰 놈 손에 쥐고 너스레 떠네/手持大者誇張
계집종이 중문에서 달려나오며/小婢中門走出
생선 조기 장수요 하고 부른다/喚生鮮石魚商
하였다. 이진옥(李進玉)이 또 평하기를,

생선 장수 대답하는 소리는/生鮮商對答聲
귀가 어찌 그리 밝고 입도 빠른가/耳何聰口何疾
귀가 밝지 않으면 팔지 못하고/耳不聽賣不得
생선이 썩어 본전을 잃는다네/生鮮腐本錢失
하였다. 진옥이 통(桶) 때우는 장인(匠人) 그림을 평하면서,

해진 전립으로 해는 못 봐도/弊戰笠不見日
통쟁이의 소리는 크기도 해라/桶匠聲必雄大
고운 겨로 구멍 때워 남을 속이나/瞞人細糠塞孔
그 자리에 물 부으니 솰솰 다 샌다/卽時汲水洒洒
하였다. 혜보(惠甫)는 미장이 그림을 평하면서,

"한 켤레 버선을 끝내 안 벗고 뜰 위에 불쑥 나오면서 크게 꾸짖는데, 돌이 많고 말똥은 적으니, 이런 역군(役軍)은 처음 본다."
라고 하였다. 문인 재사(文人才士)로서 통속(通俗)을 모르면 훌륭한 재주라고 할 수 없다. 이 두어 사람은 그 묘함을 곡진하게 했는데, 만약 상것들의 통속이라고 물리친다면 인정(人情)이 아니다. 청(淸) 나라 선비 장조(張潮)가,

"문사는 능히 통속 글을 해도 속인(俗人)은 능히 문사의 글을 못하고 또 통속 글에 능하지 못하다."
했으니, 참으로 지자(知者)의 말이었다.

강희(康熙) 31년에 유구(琉球) 중산왕 정(中山王貞)이 상언(上言)하기를,

"강희 23년, 책봉 천사(冊封天使) 왕집(汪楫) 편에, 신(臣)의 나라 배신 자제(陪臣子弟)를 국자감(國子監)에 들어와서 독서(讀書)하도록 제준(題準)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신(臣) 정이 유지(兪旨)를 받들어서, 이미 강희 25년에 관주(官主) 양성집(梁成楫) 등 세 사람을 공사(貢使) 위응백(魏應伯)과 함께 황경(皇京)에 보냈더니, 황상(皇上)께서 국자감에 들어가서 글을 읽게 하신 은택(恩澤)을 우러러 받았습니다. 그리고 달마다 녹(祿)을 주고 계절마다 의복까지 주시니, 양성집 등은 높고 후한 성덕(聖德)에 감읍(感泣)하여 심력을 다해 외고 읽고 할 때입니다.
다만 제 아비가 전일 사신으로 입공(入貢)하면서 만리 먼 길에도 노고(勞苦)를 피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모두 나이가 늙어서 봉양(奉養)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으니, 이 점은 신 정도 생각해야 마땅합니다. 또 양성지 등 세 사람은 모두 아내가 없는데 부모의 근원은 사람마다 모두 있습니다. 하물며 신의 나라 사람은 모두 우매(愚昧)한데 성집 등이 국자감에 진학(進學)한 후로부터, 신 정은 그들이 나라에 돌아와 신하와는 충성을 말하고 자식과는 효도를 말하여 황상에게 같은 도(道)와 같은 풍교(風敎)로 하시는 덕화(德化)가 옅지 않음을 선포(宣布)하도록 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양성집 등이 귀국해서 부모 봉양하기를 청하는 등의 사정에 대해 가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신 정은 감히 함부로 참견할 수 없사오니, 예감(睿鑑)하심을 엎드려서 청하옵니다."
하였다. 유구 풍속이 여러 오랑캐 중에 가장 아름다워서 세상에서 작은 조선(朝鮮)이라 이르는데, 지금 이 주본(奏本)을 열람(閱覽)하니 참으로 그러하다. 그 사람들의 성명(姓名)도 중국 사람들과 같았다.

우통(尤侗)이 지은 외국(外國) 죽지사(竹枝詞)에 유구(琉球)를 말하면서,

환회문 안에 노선 펼쳤는데/歡會門中蘆扇開
미희가 쌀 머금고 행배 올리네/美姬含米上行杯
금잠 꽂은 장사는 옹용도 하다/金簪長史雍容甚
고협하다가 새로 태학에서 왔네/鼓篋新從太學來
하고, 주(注)에 '문 이름이 환회이고 금호로단선(金葫蘆團扇)으로써 의위(儀衛)를 한다. 미희가 쌀을 머금어서 술을 만들며 술 이름을 미기(米奇)라 한다. 관원(官員)은 모두 금잠을 꽂으며, 자제(子弟)가 국자감에 입학해서 글을 읽다가 돌아오면 장사가 된다.' 하였다. 우동이 대개 성집이 국자감에 입학한 일을 기록한 것이므로 아울러 여기에 기록하였다.

서문장(徐文長)이 영물(詠物)한 것은 예로부터 겨룰 사람이 없는데, 그 말 만든 것이 언구(言句)를 초월했다. 그 수선화(水仙花) 시에,

두약이 푸르게 강물과 연했는데/杜若靑靑江水連
자고새는 푸드득 강 안개 속으로 내리네/鷓鴣拍拍下江煙
상부인이 바로 창오산에 갔으니/湘夫人正蒼梧去
한 소리도 대숲 옆에 울지를 마라/莫遣一聲啼竹邊
했고, 설모란(雪牧丹) 그림을 읊조린 시는,

은해에 봄이 덮여 꼭두서니 짙은데/銀海籠春冷茜濃
솔 그을음 급한 모양에 미처 붉지 못했다/松煤急貌不能紅
달 아래 태진의 연지 찍은 뺨/太眞月下胭脂頰
누가 일찍 보았나 그림 속에서/試問誰曾見影中
하였다.

《군방보(群芳譜)》에,

"송(宋) 나라 홍매(洪邁)가 담질(痰疾)이 있었다. 만대(晩對 임금이 밤에 신하를 불러 경사를 강론하는 것)를 인해 임금이 사신(使臣)을 보내서 하유(下諭)하며 호도알과 생강을 잘 때에 씹어 먹는데 두어 차례만 하면 곧 낫는다 하였다. 말씀대로 먹었더니 아침에 가래 기침이 그쳤다."
하였다.

《이견지(夷堅志)》에는,

"임천(臨川)에 어떤 사람이 복사(蝮蛇 살모사)한테 물려 곧 까무라쳐서 죽게 되었다. 팔 하나가 다리만하더니 조금 후에는 온몸이 붓고 누르면서 검기도 하였다. 한 도인(道人)이 새로 길어 온 물에다 향백지(香白芷) 1근을 조합(調合)해서 먹이니 누런 물이 입 속에서 나오고 비린 냄새에 사람이 못 견딜 지경이었다. 한참 후에 부기가 다 빠지고 전처럼 회복되었다."
하였다.

《유근별전(劉根別傳)》에,

"금년 봄에 돌림병이 있을 참이니 대추씨 14개를 먹는 것이 좋다. 항상 먹는다면 온갖 사기(邪氣)가 다시 범접하지 못한다."
하였다.

손공(孫公)의《담포(談圃)》에는,

"증 노공(曾魯公)이 일흔 살 남짓할 때인데 이질(痢疾)로 고통을 받았다. 고을 사람 진응지(陳應之)가 수매화(水梅花)와 납다(臘茶)를 복용시켜서 드디어 나았다. 아들 효관(孝寬)이 그 부친에게 말하고 그 의술(醫術)을 이상하게 여겨서 한 책 끝에다 기록해 두었다."
하였다.

《계신잡지(癸辛雜志)》에는,

"위소(韋昭)가 이르기를 '지금 사람 중에 말 간(肝)을 먹는 자는 작약(芍藥)과 합쳐서 달여 먹음이 마땅하다.' 하였다. 말 간이 지극히 독해서 혹 잘못 먹고 죽기도 한다. 먹고서 중독(中毒)된 것을 제어하는 데에는 작약보다 좋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작약이 유독 약(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였다.

또,

"옛적에 파라문(婆羅門) 중이 동국(東國)에 와서 국수 먹는 사람을 보고 놀라면서 '이것에 큰 열(熱)이 있는데 어찌해서 먹는가 하다가 무[萊菔]를 보고는 '이것이 있기 때문이구나.' 했다."
하였다.
또,
"목구멍이 막히는 병은 증세가 매우 급하면서 심하다. 전배(前輩)는 장대산(帳帶散)을 붙였는데, 오직 백반(白礬) 한 가지뿐이고 간혹 효험이 없었다. 경험 많은 의원(醫員)이 오리 부리[鴨嘴]와 담반(膽礬)을 곱게 갈아 진한 초(醋)에다 조합해서 목구멍에 흘려 넣도록 가르쳐 주는데 목구멍에 조금만 내려가면 곧 크게 토하게 되고 끈끈한 담을 무릇 두어 되나 토한 다음에 곧 낫는다 하였다. 그러나 담반은 진짜를 구하기가 어려우니 양생(養生)하는 사람은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또,

"웅담(熊膽)은 먼지를 잘 제거한다. 시험하는 방법은 깨끗한 물 한 그릇에 먼지를 덮어 씌우고 웅담을 좁쌀만큼 넣으면 엉켰던 먼지가 짝 갈라진다. 이것으로써 눈에 무엇이 가려진 것을 치료하면 매우 효험이 있는데, 매양 조금씩 깨끗한 물에다 약간 타서 쓰면 근막(筋膜)에 끼었던 먼지가 다 없어진다. 빙뇌(氷腦) 한두 조각을 넣기도 한다. 혹 눈물이 흐르고 가려우면 생강 가루를 조금 타기도 하는데, 가끔 은(銀) 젓가락으로 찍어서 눈에 넣으면 아주 신기(神奇)한 효과가 있다. 충혈된 눈병에도 쓸 수가 있다."
하였다.

또,

"내 정강이에 종기가 나서 걷기가 좋지 않고 통증에다 가려움증이 있었다. 벗 유화보(兪和父)가 웃으면서 '내가 사흘이면 이 병을 낫게 할 수가 있다. 그 방법은 먼저 맑은 부추물로 헌 곳을 씻고 마르거든 국방주차환(局方駐車丸)을 쓰는데 매우 곱게 갈고 유향(乳香) 조금을 더해서 마른 가루를 뿌려 주면 효험이 당장 나타난다.' 하였다. 드디어 그 말대로 했더니 수일 만에 좋게 되었다. 대개 주차환은 본디 혈리(血痢)와 설사를 치료하는 약인데 이 허는 것도 또한 기혈(氣血)이 엉켜서 생긴 것이다. 의(醫)란 것은 의(意)인데, 옛사람이 처방(處方)해서 병을 치료하는 데에 뜻밖에 나오는 생각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또,

"어린아이들의 두창(痘瘡)은 진실로 위태한 것이나, 시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 긴요하다. 대개 장기(臟氣)를 굳게 하는 이외에는 자연대로 두어야 한다. 오직 본사방(本事方)에는 임금산(稔金散)이 가장 좋다."
하였고, 또 남검(南劍)의 진강옹(陳剛翁)은 '절대로 승마탕(升麻湯)을 많이 먹이지 말 것이다. 다만 사군자탕(四君子湯)에다 황기(黃芪) 한 가지를 가함이 온당하다.' 하였으며, 괄창(括蒼)의 진파(陳坡)는,

"세 살 된 손자가 열이 난 지 7일 만에 두창이 돋으면서 넘어졌다. 두드러기 색깔이 검고 입술이 얼음처럼 싸늘하여 위태한 증세였다. 어떤 선비가 마침 약이 있다 하면서 만들더니 잠시 후에 먹이는 것이었다. 한참 있으니 곧 붉고 윤택하여 회복되었다.' 하였다. 약을 만드는 법은 개파리 일곱 마리를 짓뭉개고 술을 조금 타서 먹이는 것이다. 파리가 여름철에는 매우 많아서 쉽게 구해지지마는 겨울에는 개의 귀 속에 숨어 있으니 알아두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두창을 앓은 후에 여독(餘毒)이 위로 올라가면 드디어 내장(內障)이 생겨서 눈으로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경험 많은 어느 의원의 방문에는, 뱀허물 하나를 깨끗하게 씻어 불에 쬐어 말리고, 또 천화분(天花粉)을 같은 분량으로 해서 가루를 곱게 만든 다음, 새끼 양(羊)의 간을 벌리고 그 안에 약을 넣어서 삼 껍질로 묶고 뜨물에다 삶아 익혀 베어 먹이는데 무릇 열흘 남짓하면 낫는다고 했다."
하였다.

《정사(程史)》에는,

"의원(醫員)의 말에 의하면 매를 맞으면 모두 흉터가 생기는데, 오직 피부에 상처가 난 즉시 금박(金箔)을 붙이면 흉터가 없어진다.' 한다. 생각건대, 금(金)이 목(木)을 이기는 성질 때문에 서로 사라지게 하는 것인 듯하다."
하였다.

《차지(車志)》에,

"왕형정(王亨正)이 쇠고기 구이를 즐겨 먹었다. 문득 학질(瘧疾)을 앓기 시작해서 반년이 되도록 온갖 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하루는 나른한 중에 꿈을 꾸었는데 누런 옷을 입은 사람이 이르기를 '네가 쇠고기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있지마는 다시 먹으면 죽는다.' 하였다. 꿈을 깨자 다시는 먹지 않기로 맹세했고 병도 드디어 나았다."
하였다.

《계신록(稽神錄)》에,

"강서(江西) 마을 안에 어떤 사람이 벼락을 맞아 죽었다. 조금 후에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나는데 '잘못되었다. 지렁이를 짓이겨서 배꼽을 덮어두면 살아날 것이다.' 하므로 그 말대로 두드려 붙였더니 드디어 깨어났다."
하였다.

《양로방(養老方)》에는

"정월 열엿샛날 천초(天椒) 가루 한두 푼에다 머리때를 넣어서 누에콩 크기만큼 만든 다음 복판을 오목하게 하여 눈언저리에 얹어두고, 별도로 잘 익힌 쑥을 쌀알 크기만큼 비벼서 오목한 속에다 넣는다. 이렇게 하여 눈언저리마다 일곱 방 혹은 아홉 방을 뜸하며, 청명(淸明)날을 기다려서 다시 같은 방법으로 뜸한다. 3년만 잇달아서 뜸하면 눈이 더욱 맑아지고 정채(精彩)가 더해진다."
하였다.

초씨(焦氏)의《유림(類林)》에는,

"동짓날 밤 자시(子時)에 머리를 1천 2백 번 빗으면 양기를 돕게 되어 평생 동안 오장(五臟)에 기운이 잘 유통하는데, 이를 신선세두법(神仙洗頭法)이라 부른다."
하였다.

《광제방(廣濟方)》에는,

"입동(立冬)날 뽕잎 1백 20잎새를 채취(採取)하고 윤년(閏年)에 10잎새를 더 채취하여 두었다가 눈 씻을 날짜가 되면 그때마다 10잎새를 달여서 그 물에 씻으면 온갖 눈병이 치료된다."
하였다.

《월령광의(月令廣義)》에는,

"입추(立秋)날 태양이 오르기 전에 가래나무잎을 채취해서 정해진 방법대로 기름에 볶은 다음, 잎을 찧어 즙(汁)을 내고 그 즙을 진하게 달여서 갈무리하여 두었다가 부스럼에 바르면 당장 낫는다."
하였다.

또,

"입추날 붉은 팥 일곱 알이나 혹은 열네 알을 정화수(井華水)로 먹되 서쪽을 향해서 삼키면 가을 내내 이질(痢疾)에 걸리지 않는다."
하였다.

또,

"입추날 첫닭 울 때에 정화수를 길어다가 어른 아이 모두가 조금씩 마시면 온갖 병을 물리칠 수 있다."
하였다.

《수신기(搜神記)》에는

"외자부(外姊夫) 장사선(蔣士先)이 하혈(下血)하는 병을 앓으면서 고독(蠱毒 몰래 독약을 먹여 중독시키는 것)을 당했다고 말하므로 그 집에서 가만히 양하(蘘荷 생강과에 속하는 풀)를 자리 밑에 넣어 두었더니, 문득 크게 웃으면서 '나를 고독한 사람은 장소소(張小小)이다.' 하고, 곧 소소를 잡으려 하니 벌써 달아나고 없었다. 이로부터 양하를 고독 해독하는 약으로 사용하였는데 효험이 많았다."
하였다.

갈홍(葛洪)의 《치금창방(治金瘡方)》에는,

"장미 뿌리를 태운 가루 한 숟가락씩을 하루 세 번씩 복용한다."
하였다.

《고금험록(古今驗錄)》에는,

"5월 5일 전에 재계(齋戒)하고 뽕나무 밑에 있는 토규(兔葵)를 보아두었다가, 5일 오시(午時)가 되거든 뽕나무 밑에 가서 주문(呪文)하기를 '계여호구당소바하(繫黎乎俱當蘇婆訶)라.' 한다. 주문을 마친 다음 손으로 뽕잎 뒷면을 한 차례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서 토규와 오엽초(五葉草)를 잘 씹어 그 침을 손에 바르는데 잘 문질러 두 번을 고루 바르며 이레 동안 손을 씻어서는 안 된다. 그 뒤 뱀ㆍ벌레ㆍ전갈(全蠍)ㆍ독벌 따위에 물린 자를 이 손으로 문지르면 곧 낫는다."
하였다.

유우석(劉禹錫)의《전신방(傳信方)》에는,

"판관(判官) 장연상(張延賞)이 얼룩 거미에게 머리를 물렸는데, 하룻밤을 자고 나니 종기가 두어 되들이 주발만하여 거의 목숨을 구원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장공이 고칠 수 있는 자를 모집했더니, 한 사람이 부름에 응해 와서 '고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큰 쪽풀[藍]의 즙을 한 주발 내고 거기다가 사향과 웅황(雄黃)을 더한 다음 거미를 넣으니 곧 물이 되었다. 이것을 물린 데에 찍어 바르니, 이틀 만에 나았다."
하였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송 나라 때 동경(東京)에서 운하(運河)를 개착(開鑿)하다가 돌 비(碑)를 파내었는데, 거기에 범서(梵書)를 큰 전자(篆字)로 쓴 시 한 수가 있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임영소(林靈素)가 한 자씩 분변해서 번역하니, 이는 풍증(風症)을 치료하는 방문(方文)이었다. 그 치료법은, 자색 부평(浮萍)을 햇볕에 말린 다음 꿀과 섞어 환(丸)을 지어 매양 한 알씩을 두림주(豆淋酒)로 먹으면 여러 가지 풍증을 치료할 수 있는데, 1백 알을 넘게 먹으면 곧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시에,
하늘이 뿌리도 줄기도 없는 신령한 풀 내었는데/天生靈草無根榦
산간에 있지도 않고 언덕에 있지도 않네/不在山間不在岸
처음엔 동풍에 불려 나는 버들솜 같더니/始因飛絮逐東風
물에 떠서는 푸릇푸릇 수면에 나부낀다/汎梗靑靑飄水面
신선도 한 번 먹으면 깊은 병이 낫는데/神仙一味去沈疴
채취하는 시기는 칠월 중순이라네/采時須在七月半
하였다."
하였다.

《감우전(感遇傳)》에는,

"청주 자사(靑州刺史) 장사평(張士平)이 중년에 부부가 함께 장님이 되었다. 하루는 서생(書生)을 만나 그가 시키는 대로 한 곳에 우물을 파고 솟아오르는 샘물로 씻었더니 눈이 모두 처음과 같아졌으므로, 서생에게 세상 사람을 구제할 수 있는 말을 남기도록 청하였는데, 그 요점은 '자ㆍ오년(子午年)에는 5월 술ㆍ유방(戌酉方)과 11월 묘ㆍ진방(卯辰方), 축ㆍ미년(丑未年)에는 6월 술ㆍ해방(戌亥方)과 12월 진ㆍ사방(辰巳方), 인ㆍ신년(寅申年)에는 7월 해ㆍ자방(亥子方)과 정월 사ㆍ오방(巳午方), 묘ㆍ유년(卯酉年)에는 8월 자ㆍ축방(子丑方)과 2월 오ㆍ미방(午未方), 진ㆍ술년(辰戌年)에는 9월 신ㆍ미방(申未方)과 3월 인ㆍ축방(寅丑方), 사ㆍ해년(巳亥年)에는 10월 신ㆍ유방(申酉方)과 4월 인ㆍ묘방(寅卯方)이 길한데, 그 방위(方位)와 연월 일시를 살펴서 우물을 파면 곧 복지(福地)가 된다.' 하였다. 사평이 가르침을 받고 나자 서생은 하늘로 올라가 버렸는데, 이는 대개 태백성관(太白星官)이었다."
하였다.

《풍속통의(風俗通義)》에는,

"범은 양물(陽物)이며 온갖 짐승 중에 어른으로 짐승을 잡아 먹고 귀매(鬼魅)를 잡아 먹을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갑자기 귀신으로 인하여 병을 앓게 되면 호피(虎皮)를 태워서 마시면 낫는데, 그 발톱을 차고 있어도악기(惡氣)를 피할 수 있다."
하였다.

또,

"지금 사람들은 갑자기 귀자비병(鬼刺痱病)을 앓게 되면 수탉을 죽여서 병자의 가슴 위에 붙인다. 적풍(賊風)을 앓는 자는 계산(鷄散)을 만들어 먹으면 되고, 동향(東向)의 닭집에서 기른 계두(鷄頭)로는 고병(蠱病)을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안씨가훈(顔氏家訓)》에는,

"유견오(庾肩吾)가 항상 회나무 열매를 먹었는데, 나이가 70이 넘었으나 눈으로 잔글자를 볼 수 있고 수염과 머리털이 오히려 검었다."
하였다.

또,

"내가 일찍이 이[齒]에 탈이 나서 흔들흔들 빠질 것만 같았는데, 음식은 뜨거운 것이나 찬 것이나 모두 아파서 고통스러웠다.《포박자(抱朴子)》에 이를 굳히는 법을 보니 이른 아침에 이를 3백 번 두드리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일 동안 시행했더니 곧 나았다."
하였다.

유우석(劉禹錫)의 나력(瘰癧) 치료하는 법에는,

"수은[鉛] 3냥(兩)을 쇠그릇 안에 담고 오래 볶으면 검은 재같이 되는데, 이 재를 술에 타서 나력 위에 바르고 헌 깁[帛]을 붙여둔다. 자주자주 깁을 떼고 나쁜 물을 닦아낸 다음 또 이와 같이 붙인다. 반달쯤 이렇게 하면 아프지도 않고 터지지도 않고 부스럼도 되지 않는다."
하였다.

《필담(筆談)》에는,

"거미가 벌에 쏘이면 토란 줄기를 물어서 살짝 터뜨린 다음 쏘인 데를 문지른다. 그 뒤부터 벌에 쏘인 자가 토란 줄기를 꺾어다 붙이면 나았다."
하였다.

또,

"한 농부가 갑자기 온몸이 썩어 문드러졌는데, 절의 중이 알고 '이것은 천사독(天蛇毒)이다.' 하고, 나무껍질을 가져다가 1말쯤 되도록 달여 놓고 마음내키는 대로 마시도록 하였는데, 첫날에 병이 반쯤 낫더니 2~3일이 되자 말끔히 나았다. 그 나무를 살펴보니 바로 지금의 진피(秦皮)였으나 천사란 것은 어떤 것인지 모른다. 혹자는 '풀 사이 황화(黃花)에 붙어 있는 거미가 이것인데 사람이 그 독에 쏘이고 잇달아서 이슬에 젖게 되면 이 병이 된다.' 하니, 이슬이 내린 풀 사이로 다니는 사람은 조심하여야 한다."
하였다.

또,

"궁궁(芎藭)이를 오랜 기간 복용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사람을 갑자기 죽게 하는 경우가 많다. 고삼(苦蔘)은 이를 깨끗하게 하나 신기(腎氣)를 해쳐서 사람의 허리를 무겁게 한다."
하였다.《묵장만록(墨藏漫錄)》에는,
"여지(荔芰) 껍질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 불태우면 시충(屍蟲)을 끌어들인다."
하였다.

또,

"천평산(天平山) 백운사(白雲寺)의 중 몇이 버섯 한 떨기를 따다가 함께 볶아 먹었다. 밤이 되자 토기(吐氣)가 발작했는데, 그 중 세 사람이 급히 원앙초(鴛鴦草)를 가져다가 생으로 씹어먹고 드디어 나았다. 원앙초는 등(藤)처럼 덩굴이 지며 누른꽃과 흰꽃이 함께 피는데, 아무 곳에나 있다. 등창과 수종다리 독을 치료하는 데에 더욱 신묘한데 먹거나 붙이거나 간에 모두 좋다. 이는 심존중(沈存中)의 양방(良方 좋은 방문)에 기재된 금은화(金銀花)이다."
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이 정승이 되어 하루는 전(殿) 위에서 정사를 아뢰는데, 갑자기 한쪽 머리가 아파 참을 수가 없으므로 돌아가서 병을 치료하기를 청했다. 유릉(裕陵 영유릉(永裕陵)의 준말로 송 신종(宋神宗)의 능호이다)이 중서(中書)를 시켜 그를 드러눕도록 하고 금배약(金杯藥)을 하사(下賜)하면서,

"왼쪽이 아프거든 오른쪽에 쏟아 넣고 오른쪽이면 반대로 하며, 왼쪽과 오른쪽이 함께 아프거든 아울러 쏟아 넣으면 아픈 것이 즉시 나을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조정(朝廷)에 들어가서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궁중(宮中)에는 태조(太祖) 적부터 이와 같은 방문(方文)이 수십 가지 있었으나 민간(民間)에는 전하지 않는데 이것도 그 중 한 가지이다."
하고, 이 방문을 하사하였다. 소식(蘇軾)이 금릉(金陵)을 지날 적에 안석이 그 방문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용해 보니 신통하였다. 다만 눈[目]은 붉어져도 잠시 후에 두통은 곧 나았다. 그 법은 생무의 즙(汁)을 내고 거기다가 생 용뇌(龍腦)를 조금 넣어서 고루 섞은 다음, 머리를 들고 사람을 시켜 콧구멍에 한 방울씩 넣는 것이었다.

《지림(志林)》에는,

"의원 이유희(李惟熙)가 이르기를 '마름[菱]과 가시연밥[芡]은 모두 물에서 나는 것이지마는 마름의 성질은 차고 가시연밥의 성질은 따뜻한데, 이는 마름꽃은 해를 등지고 피고 가시연밥은 해를 향해 피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복숭아나 살구의 씨가 쌍으로 된 것을 먹으면 곧 사람이 죽게 되는데, 그 꽃은 본디 다섯 잎이 나오는 것으로 여섯 잎이 나올 경우에는 씨가 반드시 쌍으로 되어 있다.' 했다."
하였다.

또,

"요환(姚歡)이 몸에 버짐과 옴이 생겨 목에서 발뒤꿈치까지 두루 퍼졌는데, 어떤 사람이 황련(黃連)을 먹도록 가르쳐 주어서 드디어 나았고, 오래 먹었더니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았다. 먹는 법은 황련의 털을 없애고 하룻밤 동안 술에 담갔다가 볶아 말려서 가루로 만든 다음 꿀에 버무려서 오동씨만큼의 크기로 환(丸)을 만든다. 이것을 빈속에 먹는데 한낮과 잠자리에 들 무렵 술과 함께 스무 알을 삼킨다."
하였다.

또,

"미원장(米元章)에게 일러 준 말에 '송지(松脂)는 진짜가 좋은데 이를 고운 베포대에 담아 하루 동안 물에 적셨다가 물에 넣고 끓이는데. 물 위에 뜨는 것을 새로 만든 대 조리로 건져내어서 새로 길어 온 물에 넣는다. 오래 끓여도 물 위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모두 버리고 쓰지 않는다. 여기에다 생 복령(茯苓) 가루를 넣는데 제(製)하지 않고 껍질만 없앤 채 가루로 만들어서 고루 섞는다. 이것을 매일 아침 3돈씩을 입 안에 넣고 조금 데운 물로 뒤섞어서 손가락으로 예사 방법같이 이[齒]를 매우 문지른 다음 다시 조금 데운 물을 머금어 우물우물하여 뱉어내면, 치아(齒牙)가 굳어지고 젊은 얼굴을 오래 보존할 수 있으며 수염도 검게 한다.' 했다."
하였다.

《민수연담(澠水燕談)》에는,

"중 보명(普明)이 풍병(風病)에 걸려서 눈썹과 머리털이 아울러 빠지고 온몸이 썩어 문드러졌는데, 문득 이인(異人)이 와서 장송명(長松明)을 복용하도록 가르쳐 주었으나 알아 듣지 못하니, 다시 알리기를 '큰 노송의 뿌리를 파서 먹는 것이다. 뿌리 가운데 껍질 빛이 제니(薺苨 모싯대 뿌리를 말한다) 같은 것을 세 치나 다섯 치로 잘라서 쓰는데 맛이 약간 써서 인삼(人蔘) 같으며 맑은 향기가 좋고 독이 없다. 이것을 먹으면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겸해서 여러 가지 고독(蠱毒)을 풀어 주고 정채(精彩)를 밝게 한다.' 하였는데, 그 말대로 복용했더니 열흘이 못 되어서 머리털이 다시 나고 얼굴 모양도 예전 같게 되었다."
하였다.

《묵객휘서(墨客揮犀)》에는,

"벌레 따위로서 귀에 잘 들어가는 것은 유독 그리마[蚰蜓]만이 아니다. 진드기[壁蝨]ㆍ개똥벌레ㆍ딱정벌레[叩頭蟲]ㆍ조협충(皂莢蟲) 같은 것도 모두 귀에 들어가서 해를 끼칠 수 있다. 나의 종조(從祖)께서 복통(腹痛)을 많이 앓았는데 벌레가 갉아먹는 것과 비슷하였다. 어떤 사람이 복숭아나무 잎사귀로 베개 만드는 것을 가르쳐 주므로 그대로 하였더니, 하루 저녁에 벌레가 코에서 나왔는데 모양이 매의 부리와 같았다. 어떤 사람의 귀에 그리마가 들어갔는데 극도로 심할 때를 당하면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서 피가 흘러도 모를 정도로 가려움을 참을 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마가 귀에 들어가면 가끔 뼈 속의 기름을 파먹으며, 겨울이 되면 여러 마리로 번식하기도 한다. 무릇 벌레가 귀에 들어가면 오직 생기름을 한 방울씩 넣는 것뿐이다."
하였다.

또,

"무릇 버섯으로 국을 끓일 때에 얼굴을 국물에 비쳐 봐서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먹어서는 안 된다.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
하였다.

또,

"능소화(凌霄花)ㆍ금전화(金錢花)ㆍ거나이화(渠那異花)는 모두 독이 있어 눈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능소화를 쳐다보다가 잎에서 떨어지는 이슬이 눈에 들어갔는데, 그 후 드디어 실명(失明)했다."
하였다.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외[苽]가 코가 둘이거나 꼭지가 둘인 것은 사람을 죽게 하며, 낙숫물 지는 곳에 있는 채소는 독이 있고, 노랑꽃 제비콩[薑]과 붉은 겨자[芥]도 사람을 죽게 한다. 만취가 되어서 기장 짚대 위에 누워서는 안 된다. 누우면 눈썹과 머리털이 빠지며, 아기 밴 부인이 생강을 먹으면 아기가 태[胎] 안에서 녹는다. 10월에 서리 맞은 채소를 사람이 먹으면 사람의 안면에 광채(光彩)가 없어 보이며, 뱃바닥의 이끼로는 돌림병[天行病]을 치료한다. 과부가 깔던 볏짚 자리는 어린아이 곽란(霍亂)을 없앨 수 있으며, 스스로 목매어 죽은 끈으로는 미친 병을 고칠 수 있고, 상주[孝子]의 옷깃을 태운 재를 얼굴 기미에 붙이면 없어진다. 동녘 집 닭장 회나무를 재로 만들어서 목쉰 것을 치료할 수 있으며, 게[蟹]의 배 밑에 털이 있는 것은 사람을 죽게 한다. 짐승의 꼬리가 두 갈래지고 사슴이 얼룩져 표범 같은 것과 염소의 염통에 구멍이 있는 것은 죄다 사람을 해롭게 하며, 백 말 안장 밑의 살을 먹으면 사람의 오장(五臟)이 상한다. 까마귀가 저절로 죽어서 눈을 감지 않은 것, 오리 눈이 하얀 것, 까마귀 뒷발톱이 넷인 것, 알에 '八' 자가 씌어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을 죽게 한다."
하였다.

또,

"구욕(鴝鵒)의 눈동자를 뽑아 사람 젖을 타서 갈아가지고 눈에 한 방울씩 넣으면 아주 먼 데까지 볼 수가 있다."
하였다.

또,

"백로(百勞)는 박록(博勞)인데 백기(伯奇)가 화한 것이라고 전해온다. 그 새가 밟았던 나뭇가지로 어린아이를 때리면 빨리 말할 수 있게 된다. 남방에서는 어머니가 아이를 뱄을 적에 젖먹이가 곽란 같은 병을 앓으면 왜가리[鵙] 털로 치료한다."
하였다.

또,

"코끼리 앞 가슴에 가로질린 작은 뼈를 재로 만들어서 술과 함께 복용하면 사람이 물에 떠서 마음대로 출몰(出沒)할 수 있다."
하였다.

또,

"호랑이 수염은 치통(齒痛)을 고친다. 늙은 가지를 먹으면 장위(腸胃)가 두터워지고 기(氣)가 동하면서 병을 발생시킨다. 그 뿌리는 귀촉(龜瘃 손ㆍ발의 동상)을 치료할 수 있다."
하였다.

《서계총어(西溪叢語)》에는,

"허숙미(許叔微)는 의술(醫術)에 정통(精通)하였다. 그가 이르기를 '오장(五臟)의 벌레가 모두 위로 올라가는데 오직 폐충(肺蟲)만 아래로 내려가므로 치료하기가 가장 어렵다. 물개 발톱을 가루로 만들어서 약을 조합(調合)하여 초나흗날이나 초엿샛날에 치료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날에는 폐충이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했다."
하였다.

또,

"천주(泉州)에 한 중이 금잠고독(金蠶蠱毒)을 잘 치료하였다. 중독된 자가 있을 경우 먼저 백반(白礬) 가루를 맛보게 하는데, 맛이 떫지 않고 달게 느껴진다고 하면 다음에는 검정콩을 먹인다. 이를 먹어도 비린 줄 모르면 중독된 것이니 곧 석류나무 뿌리 껍질을 진하게 달여서 마시게 한다. 약물이 내려가면 곧 산 벌레를 토해내므로 낫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회지(李晦之)는 이르기를 '무릇 중독된 데에는 백반과 아다(牙茶)를 가루로 만들어서 냉수로 마신다.' 했다."
하였다.

또,

"순우의(淳于意)가, 왕 미인(王美人)이 아이를 가졌으나 젖이 나오지 않는 것을 고쳤다. 의가 낭탕(蒗蕩) 한 움큼을 술로 마시게 하였더니 곧 젖이 나왔다. 지금 의방(醫方)에는 어느 곳에도 낭탕이 젖을 통하게 한다는 말이 없다."
하였다.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는,

"나의 친척에 상소(相小)라는 아이가 토사자환(兔絲子丸)을 먹은 지 두어해 만에 갑자기 등에 종기가 났다. 마침 금은등(金銀藤) 꽃이 필 무렵인 4~5월에 종기의 증세가 크게 위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금은등 꽃이 들어간 양방(良方)의 방법대로 해서 이틀 동안에 두어 근이나 먹였더니, 등의 종기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하였다.

《풍창소독(楓窓小牘)》에는,

"자첨(子瞻)이 손수 쓴 한 종이에 적혀 있기를 '발병에는 오직 위령선(威靈仙)ㆍ우슬(牛膝) 두 가지를 가루로 만들어 꿀에 버무려 환(丸)을 지어 빈속에 복용하면 반드시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이다. 다만 위령선은 진짜를 구하기가 어려운데 세속 의원이 쓰는 것은 자잘한 고본(藁本)이 많다. 그것을 징험하는 데에는 맛이 매우 쓰고 색깔은 검은 자색(紫色)으로 호황련(胡黃連) 모양 같아야 한다. 또 연해서 질기지 않고 부러뜨리면 고운 먼지가 일어나는데, 밝은 데를 향해 보아서 끊어진 곳에 검고 흰 무리[暈]가 있는 것이 진짜이다. 종기와 손발 굳어지는 병을 모두 낫게 하며 오래 복용하면 달리는 말을 따라가서 잡을 수 있다. 두 가지를 등분(等分)하여 혹 오장(五臟)의 기운이 허(虛)함과 실(實)함을 보고 참작해서 마시는데, 우슬주(牛膝酒)나 데운 물로는 먹을 수 있으나 오직 차[茶]로 마시는 것은 금한다.' 했다."
하였다.

《학림옥로(鶴林玉露)》에는,

"영남 사람은 빈랑(檳榔)으로 차를 대신하며, 또 장기(瘴氣)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하였다.

《채란잡지(採蘭雜志)》에는,

"한 부인이 음부(陰部) 속이 가려운 증세가 있었으나 감히 남에게 말도 못하고 매우 괴로워하였다. 평소에 관세음상(觀世音像)을 매우 삼가 숭봉(崇奉)하였는데, 한창 앓을 때에 한 여승(女僧)이 약함(藥函) 하나를 가지고 나타나서 '이것을 달여서 씻으면 곧 나으리라.'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함을 열어 보니 이는 사상자(蛇床子)ㆍ오수유(吳茱萸)ㆍ고삼(苦蔘)이었다."
하였다.

《낭환기(嫏嬛記)》에는,

"어떤 사람이 뱀에 물렸는데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으려고 하였다. 작은 아이 하나가 나타나서 '칼 두 개를 물 속에서 서로 갈다가 그 물을 마시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말을 마치자 파란 도마뱀이 되어 벽 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사람이 그 방문(方文)대로 하였더니 곧 나았다."
하였다.

《잠거록(潛居錄)》에는,

"8월 초하룻날 주발로 나뭇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그 물로 진사(辰砂)를 갈아서 아저(牙箸)로 몸에 군데군데 찍어 바르면 온갖 병이 모두 사라지는데 이를 천구(天灸)라 한다. 옛사람은 이날을 천의절(天醫節)로 삼아서 황제(黃帝)와 기백(岐伯 황제의 신하)에게 제사(祭祀)한다."
하였다.

《요화주한록(蓼花洲閒錄)》에는,

"범 문정공(范文正公)의 네 아들 중 맏이가 순우(純祐)인데 병서(兵書)에 능통하고 도가(道家)를 배워서 능히 신(神)을 나오게 하였다. 하루는 바야흐로 귀신을 보기 위하여 앉았는 중인데, 매서(妹婿) 채교(蔡交)가 지팡이로 방문을 침으로써 호신(戶神)이 놀라서 오지 않으니, 이로부터 드디어 실성하였다.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다만 손녀 하나가 있었는데, 그 또한 남편이 죽은 후에 미쳐서 늘 방안에 가두어 두었었다. 창 밖에는 큰 복숭아나무가 있었고 마침 꽃이 많이 피어 있었는데, 하루 저녁에는 창살을 끊고 나무에 올라가서 복사꽃을 거의 다 먹어버렸다.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이 보니 단신으로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으므로 사다리를 놓아 내려 주었더니 이로부터 미친병이 드디어 나았다. 그리하여 낙양(洛陽) 사람 봉의랑(奉議郞) 임서(任諝)와 재혼(再婚)해서 명대로 살다가 죽었다."
하였다.

《양가만필(養疴漫筆)》에는,

"무릇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금설(金屑) 가루를 먹고 죽은 자에게는 오리 피를 먹이면 살릴 수 있다."
하였다.

또,

"귀가 갑자기 어두워진 자에게는 전갈(全蠍)을 쓴다. 독을 없애고 가루로 만든 다음 술에 타서 귀에 한 방울씩 넣는데 물소리가 들리면 귀 어두운 것이 곧 낫는다."
하였다.

또,

"구기자(枸杞子)의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고 책을 보면 시력을 좋게 할 수 있다."
하였다.

또,

"칼ㆍ도끼 따위 쇠붙이로 인한 상처는 큰 외톨밤을 갈아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들어 붙이면 곧 낫는다. 혹 갑작스러울 경우에는 날것을 씹어서 붙여도 효험이 있다."
하였다.

또,

"악성(惡性)의 여러 가지 종기가 처음 생길 때에 당귀(當歸)에다 황벽피(黃蘗皮)ㆍ강활(羌活)을 고운 가루로 만들어 섞고 생 가마우지[鸕鶿] 다리를 찧어서 낸 즙에다 조합(調合)하여 부스럼 둘레에다 붙인다. 이렇게 하면 저절로 독기가 한군데로 몰려서 작은 핵이 되어 곧 터진다. 직접 부스럼 위에 붙이는 것은 절대로 좋지 못하다. 독기가 사방으로 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데에는 개 침[犬涎]을 쓰고, 곡식 가시랭이가 걸린 데에는 거위 침을 쓰면 낫지 않는 것이 없는데, 모두 의견(意見)으로 추리(推理)한 것이다."
하였다.

또,

"효종(孝宗)이 일찍이 이질을 앓았는데 여러 의원이 치료했으나 효과가 없어 덕수(德壽 송 고종(宋高宗)의 비(妃)를 가리킨다)가 걱정하였다. 궁(宮) 안을 지나다가 우연히 소약(小藥)을 만났었는데, 중사(中使)를 보내어 '네가 이질을 치료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전문 과목(專門科目)입니다.' 하므로 드디어 불러서 왔는데 병을 얻게 된 연유를 물었다. 그래서 호수(湖水)의 게를 많이 먹은 때문에 이 병이 되었다고 말하고, 드디어 맥도(脈度)를 진찰하도록 했더니 '이것은 냉리(冷痢)입니다. 치료하는 법은 새로 캐낸 연(蓮)뿌리 마디를 곱게 갈아 뜨거운 술에다 타서 병용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 치료법대로 했더니 두어 번 병용하자 곧 나았다."
하였다.

또,

"눈병에 적장(赤瘴)이 생긴 것은 우렁이[田螺] 한 개를 껍질을 벗기고 황련 가루를 덮어서 버무린 다음 이슬이 내리는 데에 두었다가 새벽에 가져다 보면 우렁이 살이 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눈에 한 방울씩 넣으면 적장이 저절로 사라진다."
하였다.

또,

"월주(越州) 어느 학록(學錄)이 이르기를 '젊었을 때 기침병을 앓아서 온갖 약을 써도 낫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가르쳐 주기를 남쪽으로 향한 뽕나무가지 한 묶음을 가지마다 한치 길이로 자른 다음 냄비에 넣고 물을 대략 다섯 주발 부어서 한 주발이 되도록 달여 두었다가 한창 더운철 갈증(渴症)이 날 때에 마시라는 것이었다. 한 달을 먹었더니 나았다."
하였다.

또,

"상산현(象山縣)에 수종(水腫)을 앓는 마을 백성이 있었는데, 귀신의 화액(禍厄)이라 하여 점쟁이에게 물었더니, 점쟁이가 약방문을 주었다. 우렁이ㆍ큰 마늘ㆍ질경이를 갈아 고약을 만들어 큰 떡같이 이겨서 배꼽 위에 덮어 두면 물이 소변을 따라 나온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하였더니 수일 만에 드디어 나았다."
하였다.

《문창잡록(文昌雜錄)》에는,

"한 선비가 고기 가시가 목구멍에 걸려서 여러 날 음식을 먹을 수 없었는데, 문득 백탕(白湯) 파는 것을 보고 사서 먹었더니 갑자기 아무 탈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손 진인(孫眞人)의 방서를 보니 이미 이 방문이 있었다. 정주 통판(鼎州通判) 유응신(柳應辰)이 나를 위해 고기가시 걸린 것을 치료하는 방법을 전(傳)했는데, 그 내용은 거꾸로 흐르는 물 반잔을 가지고 먼저 그 사람에게 물어서 응답(應答)하게 한 다음 그 기운을 불어서 물 속에 넣게 하고, 동쪽을 향해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을 일곱 번 왼 다음, 기운을 빨아들이면서 물을 마시는데 조금만 마셔도 곧 낫는다는 것이었다. 일찍이 시험해 보았더니 매우 효험이 있었다."
하였다.

《속명도잡지(續明道雜志)》에는,

"어떤 부잣집 자식이 몰래 나와 창가(娼家)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이웃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집을 밀어서 벽이 움직였다. 부잣집 자식은 놀라고 두려워 바삐 달아나다가 황급해서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시장에는 형벌한 시체(屍體)를 벌여 놓고 있었는데 부잣집 자식이 달아나다가 그 시체 위에 엎어졌다. 그래서 크게 놀랐는데 집에 와서는 미친병이 발생하였다. 방안시(龐安時)가 약을 조제(調劑)하면서 죄수(罪囚)를 목매어 죽인 노끈을 구해다가 불에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약 한 제와 조합해서 먹였더니 그 병이 나았다."
하였다.

《소담(蘇譚)》에는,

"무릇 중풍ㆍ중서(中暑)ㆍ중기(中氣)ㆍ중독ㆍ중악(中惡)ㆍ건곽란(乾霍亂) 등 일체 갑작스러운 증세에는 생강즙에다 어린아이의 소변으로 조합해서 먹이면 증세를 즉시 해산시킬 수 있다."
하였다.

또,

"위국공(魏國公) 서붕거(徐鵬擧)가 늙은 나이에도 계집 거느림이 줄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비술(祕術)을 전하는데, 붉은 대추 수십 개를 젊은 첩에게 입에 머금고 자도록 했다가 밤을 지나고 나서 그 대추를 달여 먹는다는 것이었다."
하였다.

또,

"한기(寒氣)가 들면서 배가 아프고 음부(陰部)가 조여서 위독(危篤)한 증세를 치료하는 데에는, 급히 뜨거운 술을 먹이고 겉으로는 총위법(蔥熨法)을 쓴다. 총백(蔥白) 한 묶음 가량을 삼 노끈으로 묶은 다음 두미(頭尾)를 끊어 버리고 복판의 것을 한 치쯤 남겨서 배꼽에 두텁게 얹어 놓고 그 위에다 베조각을 덮고 다리미에다 불을 담아 다려서 뜨거운 기운이 배에 들어가도록 하며, 파가 뭉개지면 다시 바꿔서 땀이 나고 아픈 것이 그칠 때까지 한다."
하였다.

또,

"코가 붉은 병은 양명경(陽明經)과 위화(胃火)가 올라와서 그런 것이다. 한 방문에, 식염(食鹽) 한 가지만을 곱게 갈아 두고 새벽에 일어날 때마다 조금씩 집어서 이를 문지른 다음 물을 머금어서 우물우물하여 양치하고 나서 도로 손바닥에 뱉어 낯을 씻는다. 한 달 남짓 하면 코빛이 예전대로 회복되고 또 이에도 유익하다."
하였다.

또,

"구창(口瘡)에는 새로 생긴 것, 오래된 것 할 것 없이 밤이 되어 누웠을 때, 자기의 양쪽 불알을 손으로 꼭 잡고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가면서 30~50번을 문지르고, 밤에 잠자다 깰 때마다 그렇게 하면 약을 먹는 것보다 낫다."
하였다.

또,

"무릇 산후(産後)에는 병이 있거나 병이 없거나 할 것 없이 곧 아이의 소변을 좋은 술에다 끓여서 뜨거울 때 마시면 온갖 병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소아의 급만성 경풍(驚風)에 담(痰)이 성해서 목구멍이 막혀 그 소리가 조수(潮水) 소리 같으면 이를 조연(潮涎)이라 부른다. 다만 금성몽석(金星礞石)을 한 차례 불에 달군 다음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들어 생 박하즙(薄荷汁)에 넣고 벌꿀을 조금 집어 넣어 따뜻한 물에 타서 먹이는데, 오래 먹이면 그 약이 저절로 담을 싸서 대변을 통하여 나온다."
하였다.

《승암외집(升菴外集)》에는,

"고독(蠱毒) 어떤 책에는 요술(妖術)로 어육(魚肉)을 만들어서 사람을 해친다고 되어 있다. 이 위쪽에 있으면 승마(升麻)를 먹여서 토하게 하고 아래쪽에 있으면 울금(鬱金)을 먹여서 내리게 한다. 혹 승마와 울금을 합쳐 먹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면 토하거나 내리게 된다. 송(宋) 나라 시랑(侍郞) 이손암 도(李巽巖燾)가 뇌주(雷州)의 추관(推官)이 되어 옥수(獄囚)를 국문(鞫問)하다가 이 방문을 얻어서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였다.

《숙원잡기(菽園雜記)》에는,

"치질(痔疾)을 앓는 자는 고거채(苦菜)를 쓰는데, 싱싱한 것이나 마른 것을 물에 문드러지도록 삶는다. 끓인 물을 고거채 건더기와 함께 그릇에 담고 판자(板子) 하나를 가로질러 얹은 다음 그 위에 앉아서 훈(燻)을 하는데, 물에 손을 담글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고거채를 흔들어 가면서 환부(患部)를 자주자주 씻다가 물이 싸늘해지면 곧 중지하며, 하루에 두어 차례씩 한다. 내가 선부(宣府)에 사신(使臣)갔을 때 일찍이 이 병을 앓았었는데 태감(太監) 궁승(弓勝)이 이 방문을 가르쳐 주었으므로 수일 동안 씻었더니 과연 효과를 보았다. 거()를 다른 곳에서는 거(苣)라 하며 북방에 매우 많고 남방에도 있다."
하였다.

《설저(說儲)》에는,

"시질(時疾)을 치료하는 데는 대황(大黃)을 먹는 것이 좋다. 진의중(陳宜中)의 꿈에 신인(神人)이 말하기를 '천재(天災)가 유행해서 사람들이 역질(疫疾)에 많이 죽을 터인데, 오직 대황을 먹는 자는 살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 일은《송사(宋史)》에 보인다."
하였다.

《저기실(楮記室)》에는,

"무릇 미친개나 독사에 물린 상처에는 인분(人糞)을 바르는데, 새로 눈 인분이 더욱 좋다."
하였다.

《돈재한람(遯齋閑覽)》에는,

"회서(淮西)의 선비 양면(楊勔)이 중년(中年)에 이상한 병에 걸렸다. 매양 소리를 내어서 말을 주고받으면 배 안에서 문득 소리가 있어 따라 하더니 두어 해 동안에 그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한 도사(道士)가 이르기를 '이것은 응성충(應聲蟲)이다. 오래도록 치료하지 않으면 처자(妻子)에게 전염(傳染)된다.《본초(本草)》를 읽는 것이 마땅한데, 충이 소리에 응하지 않는 대목을 만나거든 그 방문대로 먹도록 하라.' 하였다.《본초》를 읽어 내려가다가 뇌환(雷丸)에 이르니 충의 소리가 없으므로 그 약을 두어 날 먹었더니 드디어 나았다."
하였다.

《물리소지(物理小識)》에는,

"아이가 바늘을 삼켰으면 유향(乳香)ㆍ여지(荔芰)ㆍ박초(朴硝)를 가루로 만들고 개나 돼지 기름에다 소금과 함께 타서 삼키면 저절로 낫는다. 만약 쇳조각이면 조협(皂莢)과 요사(硇砂)를 쓴다. 뇌효(雷斅)는 '철이 신사(神砂)를 만나면 진흙반죽같이 물렁물렁하게 되는데, 신사는 곧 요사이다.' 하였다. 하자원(何子元)은 '여러 해 동안 금은을 단련하던 쇠망치도 조각(皂角) 나무로 자루를 하면 즉시 부서진다. 철속 굳은 덩이를 핵(核)이라 하는데 향유(香油)에 넣으면 핵이 흩어진다. 복주(福州)에서 생산되는 철은 모두 덩이로 되어 있는데, 붓을 백수(白水)에 담갔다가 돌려 그은 다음 탁 치면 획 그은 곳을 따라서 끊어지는데, 이 이치도 또한 기이하다."
하였다.

또,

"아이가 막 나서 울지 않을 적엔 표주박을 치면서 고양이를 울게 하면 아이가 곧 울게 된다. 아이가 말할 때가 되었으나 말을 하지 않으면 왜가리[鵙]가 밟았던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아이를 때리면 곧 말을 한다. 중통(中通 진관(陳貫)의 자)은 '울지 않는 아이를 세속(世俗)에서 민적생(悶寂生)이라 한다. 옆사람이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불러서 아버지가 응답하면 아이가 곧 운다.' 했다."
하였다.

《막씨팔림(莫氏八林)》에는,

"고기 낚는 낚시를 잘못 삼킨 데에는 그 낚싯줄에 한쪽을 자른 고치[繭]를 꿰되 자른 쪽을 안으로 향하도록 하고, 그 뒤에다 반들거리는 염주(念珠)를 포개어 꿰어 목구멍 안으로 바짝 밀어 넣는다. 그렇게 해서 낚시 바늘을 고치가 덮어 씌운 다음 당기면 낚시를 씌운 고치가 염주 뒤를 따라 나온다."
하였다.

《객중한집(客中閒集)》에는,

"장갑(張甲)이 사도(司徒) 채모(蔡謨)의 집에 붙어살면서 멀리 나가서 몇 밤을 묵게 되었다. 모가 낮에 졸다가 꿈을 꾸니, 갑이 이르기를 '갑자기 심복통(心腹痛)을 앓게 되어 배에 가득 찬 것을 토하지 못해서 죽었다.
이 병은 건곽란(乾霍亂)으로 치료할 수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병에 맞는 약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 다만 산 거미의 다리만 끊어 버리고 그냥 삼키면 낫는다.' 하였는데, 모가 꿈을 깨어 탐문(探問)하니 과연 죽었다. 그 후 건곽란을 앓는 자가 있어 시험했더니 곧 나았다."
하였다.

또,

"밤[栗]은 연주(兗州)와 선주(宣州) 것이 가장 좋다. 한 송이에 여러 알이 들었는데 복판에 납작한 것을 율설(栗楔)이라 하며 이것으로 신기(腎氣)가 허(虛)해서 허리와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을 치료할 수 있다. 자루에 담아 통풍(通風)이 잘되는 곳에 두어서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아침마다 10여 개를 먹은 다음 저신죽(猪腎粥)을 먹어서 돕게 하는데, 오래 계속하면 반드시 건강해진다. 대개 바람에 말린 것이 햇볕에 말린 것보다 낫고 불에 굽거나 기름에 볶은 것이 삶거나 찌는 것보다 낫다. 모름지기 매매 씹어서 침과 함께 삼키면 도움이 있지마는 만약 한꺼번에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르게 하면 도리어 비위를 해치게 된다. 소자신(蘇子申)의 시에,
늙어가니 허리 병 다리 병이 절로 생기는데/老去自添腰脚病
산옹이 밤 먹는 것은 전해오는 방문이다/山翁服栗久傳方
객이 와서 말하기를 새벽과 밤늦게/客來爲說晨與晩
세 번 씹어 천천히 삼키고 백옥장을 마시라 하네/三咽徐收白玉漿
했는데, 이것이 밤을 먹는 요결(要訣)을 깨친 것이다."
하였다.

또,

"《중주집(中州集)》에 이르기를 '정우(貞祐) 연간에 고기(高琪)가 국정(國政)을 잡았을 적에 사부(士夫)가 태형(笞刑)을 맞는 욕(辱)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의가(醫家)에서 지룡산(地龍散)을 술에 타서 먹이고 납환(蠟丸)을 투약(投藥)하면 형장(刑杖)을 맞아도 아픔을 몰랐다.' 하였다. 범중(范中)의 노래에는,
씹는 맛이 가장 좋음을 누가 알리/嚼味誰知味最長
한 잔 아침 술 지룡이 향기롭다/一杯卯酒地龍香
연래 장안에 종이값이 비싼데/年來紙價長安貴
새 시는 중히 여기지 않고 약방문만 중히 여기네/不重新詩重藥方
하였다. 맞아서 시퍼렇게 멍들어 부은 데에는 무[萊菔]를 이용해서 뜨겁게 찜질하면 곧 사라지는데, 혹 녹두 가루를 조합해서 붙이기도 한다."
하였다.

또,

"상아(象牙)ㆍ숫쥐의 간과 골, 밤가루나 새ㆍ닭의 꼬리깃을 태운 재와 백매(白梅), 사람의 손톱이나 치석(齒石)을 검은 이[虱]와 타서 쓰면 모두 살 속에 박힌 화살촉을 나오게 한다. 장자화(張子和)의 유문사친방(儒門事親方)에는 '단옷(端午)날 낭탕(莨菪)을 채취해서 환(丸)을 만든 다음, 황단(黃丹)을 입혀서 배꼽에 두면 화살촉이 저절로 나온다.' 하였다. 유천숙(劉薦叔)이 이르기를 '근일 항오중(行伍中)에서는 오직 마른 비름 나물[莧菜]과 사탕만 발라도 화살촉과 납 총알을 나오게 할 수 있다 한다. 이것은 항상 경험하는 것이나 옛 방서에는 기재되지 않은 것이다.' 했다."
하였다.

또,

"구인분(蚯蚓糞)이 벌에 쏘인 데를 치료할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 황감(黃柑)을 따다가 벌에 쏘였는데, 급히 샘물로 구인분을 이겨서 발랐더니 아픔이 곧 그쳤다. 옛사람에게 듣건대 땅벌이 거미줄에 걸렸는데 거미가 나와서 벌을 잡다가 쏘여서 땅에 떨어지자, 담모퉁이를 기다가 뒷발로 구인분을 묻혀 쏘인 데를 덮으니 잠시 후에 탈없이 기어갔고, 마침내 그물에 걸린 벌을 먹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하였다.

《비설록(霏雪錄)》에는,

"갈가구(葛可久)는 고소(姑蘇) 사람이다. 같은 고을의 17~18세쯤 되는 부잣집 딸이 갑자기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먹지 못하고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가구가 이르기를 '이것은 치료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고, 이에 그 방안 향렴(香匳 화장대)과 유소(流蘇 장식술) 따위를 죄다 찾아서 지판(地板)에 헤쳐놓고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었다. 여자를 메어다가 그 안에 둔 다음 문을 잠그고, 집사람들에게 여자가 수족을 움직이고 소리치기를 기다리도록 주의시켰다. 오래 있으니 과연 소리쳤으므로 약 한 알을 먹인 다음, 다음날 구덩이에서 나오도록 하였다. 대개 이 여자는 평소에 향을 즐겼는데 지라[脾]가 향기에게 침식(侵蝕)당한 때문이었다."
하였다.

《군쇄록(群碎錄)》에는,

"파두(巴荳)와 말똥구리를 갈아서 상처에 바르면 화살촉이 나오게 된다."
하였다.

또,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장수(張收)가 미친개에게 물렸으나 두꺼비 회(膾)를 먹고서 나았으며, 또 살구씨를 두드려 깨뜨려서 상처에 넣으면 곧 낫는다."
하였다.

《근봉문략(近峯聞略)》에는,

"강서(江西) 사람은 상한병(傷寒病)을 앓으면 두시탕(豆豉湯)을 많이 마시는데 땀이 나면 곧 나았다."
하였다.

또,

"근래에 어린아이가 실 추[線錘]를 입 안에 넣고 놀다가 잘못 삼켜버렸는데 어떤 호승(胡僧)이 엿 반 근을 먹였더니 곧 창자 안에서 똥을 따라 나왔다. 무릇 5금(金)을 잘못 삼킨 자는 모두 엿을 먹는 것이 좋다."
하였다.

《삼여췌필(三餘贅筆)》에는,

"버섯을 끓일 때에 등심초(燈心草)를 타거나 혹은 은잠(銀簪)을 담가 보는데, 만약 등심과 잠빛이 검어지면 독이 있는 것이니, 버리고 먹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진여(塵餘)》에는,

"명망(名望) 있는 의원이 촉(蜀) 지방에 들어갈 참인데, 섶을 진 사람이 땀을 많이 흘리며 와서 곧 물에 목욕하는 것을 보았다. 의원은 '이 사람이 반드시 죽을 것이니, 따라서 구원해야겠다.' 하였는데, 그 사람이 객점(客店) 안에 들어가더니 큰 마늘을 가져다가 자잘하게 썰어서 뜨거운 국수에 타서 먹는데 땀이 비같이 나왔다. 의원은 '가난하고 천한 신분의 사람도 또한 약을 아는데, 하물며 부귀(富貴)한 자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촉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였다.

《국파총화(菊坡叢話)》에는,

"아직 젖을 먹는 어린아이가 있는데 어미가 잉태(孕胎)를 하면 젖먹이 아이는 문득 양 눈썹 복판이 검푸르고 설사를 하며 누렇게 여위니, 이 병을 세상에서 기(記)라 이른다. 《이아익(爾雅翼)》에 이르기를 '백로(伯勞 때까치)로 계병(繼病)을 치유할 수 있다.' 하였는데, 계병이란 어미가 잉태 중에 아이에게 젖을 먹이다가 아이가 학질 같은 병을 얻게 된 것이다."
하였다.


[주D-001]육의(六意) : 한자(漢字)의 구성 및 활용에 관한 여섯 종류. 곧 상형(象形)·지사(指事)·회의(會意)·형성(形聲)·전주(轉注)·가차(假借)를 말한다.
[주D-002]다섯 가지 병기 : 과(戈)·수(殳)·극(戟)·추모(酋矛)·이모(夷矛), 또는 궁(弓)·수(殳)·모(矛)·과(戈)·극(戟)을 말하기도 하고, 또 도(刀)·검(劍)·모(矛)·극(戟)·시(矢)를 말하기도 한다.
[주D-003]황백술(黃白術) : 도사(道士)가 단사(丹砂)로 황금과 백은(白銀)을 만드는 방법.《史記 淮南王傳》
[주D-004]소의간식(宵衣旰食) : 임금이 정사에 애쓴다는 뜻인데,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고 어두워진 뒤에 밥먹는다는 말이다.
[주D-005]주점의……같겠지 :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팔던 술과 같다는 뜻.《史記 司馬相如列傳》에 "사마상여가 그의 아내 탁문군(卓文君)과 임공(臨邛)에 가서 주점을 차려놓고 술을 팔았다." 하였다.
[주D-006]업후(鄴侯) : 당(唐) 나라 이승휴(李承休)를 말하는데, 그는 책 2만여 권(卷)을 수장(收藏) 하였다.《困學記聞》
[주D-007]담로(淡路) : 일본 병고현(兵庫縣)에 속한 섬 이름. 뇌호내해(瀨戶內海)와 대판만(大坂灣) 사이에 있다.《古事紀上》
[주D-008]낭화(浪華) : 일본 대판의 옛 명칭.
[주D-009]진번(陳蕃)의……연했고 : 훌륭한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뜻.《후한서(後漢書)》 진번전(陳蕃傳)에 "진번이 탁자를 하나 매달아 두고 있었는데, 오직 주교(周璆)와 서치(徐穉)가 왔을 때만 이 탁자를 내려 접대하였으며, 가고 난 뒤에는 다시 매달아 놓았다." 하였다.
[주D-010]여안(呂安)의……나란하네 : 그리던 벗들이 찾아왔다는 뜻. 《진서(晉書)》〈혜강전(嵇康傳》에 "혜강의 벗 여안이 늘 혜강의 고상한 지취에 감복하여 생각날 때면 곧 수레를 타고 천리 길을 달려왔었다." 하였다.
[주D-011]두 유산(酉山) :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대유(大酉)·소유(小酉)란 두 산의 동굴(洞窟)에 고서(古書) 1천여 권을 수장(收藏)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郡國誌》
[주D-012]비녀장……하였고 : 서로 못 가게 만류하면서 늘 술을 마셨다는 뜻. 한(漢) 나라 진준(陳遵)이 빈객을 모아 술잔치를 베풀면서 손님들이 돌아갈 때가 되면 그 수레의 비녀장을 빼서 샘에 던져 못 가게 하였다 한다.《漢書 陳遵傳》
[주D-013]탄황(攤黃) : 운어(韻語)로 고사(古事)나 시사(時事)를 엮어 만든 가곡(歌曲)을 말한다.《楊州畫舫錄》
[주D-014]간광(簡狂) : 뜻하는 바는 크지만 실제 행동이 그 뜻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D-015]여곽(藜藿) 국 : 명아주와 콩잎으로 끓인 국으로 빈천한 사람의 음식을 말한다.
[주D-016]소부(巢父) : 태고적의 고사(高士).《고사전(高士傳)》에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양여하려 하자 허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 하여 시냇물에 귀를 씻었는데, 소부가 이를 보고 그 이유를 물어 안 다음 '내가 소에게 물을 먹이려 하였었는데 소의 입이 더러워질까 염려스럽다.' 하고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하였다.
[주D-017]지하의(芰荷衣) : 마름잎이나 연잎같이 깨끗하고 향기로운 풀로 만든 옷을 말하는데, 이는 덕을 닦고 절조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楚辭 離騷經》
[주D-018]임랑(琳瑯) : 주옥(珠玉)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아름다운 글의 뜻으로 씌었다.
[주D-019]삼여(三餘) : 글을 읽을 수 있는 여가로 즉 겨울·밤·비올 때를 말한다.
[주D-020]양춘곡(陽春曲) : 가곡(歌曲)의 이름.
[주D-021]고협(鼓篋) : 취학(就學)한다는 뜻.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북을 두드려 선비를 모으고 상자를 열고 책을 편다." 하였는데, 여기서 온 말이다.
[주D-022]두약(杜若) : 양하과(蘘荷科)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주D-023]상부인(湘夫人) : 순(舜) 임금의 아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이들은 순 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자 상강(湘江)에 이르러 통곡하다가 빠져 죽었는데, 그들이 흘린 피눈물 때문에 반죽(斑竹)이 생겼다 한다.
[주D-024]태진(太眞) : 선녀(仙女)로 서왕모(西王母)의 딸이라 한다.《雲笈七籤》
[주D-025]5금(金) : 금·은·동·철·석(錫)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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