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4
이름: 꽃신
2010/2/19(금)
《산해경(山海經)》 위서변정(僞書辨正) 소개  

 


《산해경(山海經)》 위서변정(僞書辨正) 소개


2009.04.25 03:37


봉오선생(ckchang1)
 
http://cafe.naver.com/manchuria/189  
 
  중국의 유건국(劉建國)이 쓴 《선진위서변정(先秦僞書辨正)》 이란 논문 중에서 우리 고대사 연구와 관련이 매우 많은 《산해경(山海經)》이란 고적이 위서인지 여부에 대해 변정한 "《산해경(山海經)》 위서변정(僞書辨正)"이란 논문을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산해경》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고전이다. 이 논문을 번역하는 데 사용한 주요 서적은 상해고적출판사에서 펴낸 원가(袁珂)가 역주한 《산해경교역(山海經校譯)》과 천마도서유한공사에서 펴낸 장보천(張步天) 저 《산해경해(山海經解)》 등을 참고하였다.                    

 

                                       《산해경(山海經)》 위서변정(僞書辨正)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책은 자고이래로 바로 이 책을 쓴 사람의 이름이 없고, 그 때문에 이 책의 지은이와 책이 쓰여진 연대 문제에 대한 견해가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책이 위서라고 말하는 자는 도리어 소수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로 이 책의 작자 책이 만들어진 연대 혹은 진위문제에 데하여 약간의 고증작업을 하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이 위서라는 견해는 지금까지 조사된 것만도 3~4명에 이른다. 그 하나로 당대 두우(杜佑)가 《산해경(山海經)》을 위서로 생각한 것이다. 양계초(梁啓超)는 그의 《한대예문지제자략고석부(漢代藝文志諸子略考釋附)》 중에서 말하기를,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 논한 것이 가장 공평타당하다. 하 · 은 이전에는 이처럼 서책이 번다하고 부피가 큰 책은 존재할 수 없었고, 이런 것은 거의 상식적인 도리로써 추정할 수 있다. 다만 두우(杜佑) · 주자(朱子) 따위들이 모두가 다 한나라 이후에 두찬(杜撰: 근거나 출처가 확실치 못한 저술)한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얼토당토 않다."라고 하였다. 그 둘로 남송의 주희(朱熹)가 《산해경》을 위서로 생각한 것이다.  진진손(陳振孫)은 그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 중에서 말하기를, "홍경선(洪慶善)이 《초사(楚辭)》를 보주하면서 《산해경(山海經)》·《회남자(淮南子)》를 인용하여 《천문(天問)》을 해석하고 있으나, 주회옹(朱晦翁)이 말하기를 고금에서 말하는 《천문(天問)》이란 모든 것이 원래 이 두 책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문의로써 이를 상고해 보았더니, 이 두 책은 원래가 모두 《천문(天問)》을 따라서 해석을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주희가 보기에 《산해경》은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이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선진(先秦)의 진서(眞書)가 아니라 위서(僞書)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위서라는 근거는 열거하지 않았다.  그 셋으로 근대인 마서륜(馬敍倫)이 그의 《열자위서고부주(列子僞徐故附注)》 중에서 말하기를, "《사기(史記) · 대원전(大宛傳)》에 일럿으되 '《우본기(禹本紀)》·《산해경(山海經)》에 기재되어 있는 괴이한 물건들에 대해서 나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 형법가(形法家)》에 《산해경》 13편을 곽박(郭璞)이 참고로 했다는 것은 이 책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대원전(大宛傳: 宛자는 나라이름에 쓰일 때는 원으로 읽는다)》은 사마정(司馬正)이 저소손(褚少孫)이 보주한 것이라고 말했고, 근인 최괄(崔适)은 후인이 《한서(漢書) · 장건이광리전(張騫李廣利傳)》에서 직접 수집한 것이라고 말했은즉 《산해경》 운운하는 것은 역시 사마천이 쓴 글이 아니다. 요컨대 《열자(列子)》 는 정말로 거짓 없이 쓰여졌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마씨도 위서라는 근거를 내놓지도 못하면서 《열자》가 위서이니 《산해경》은 위서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산해경》은 선진의 진서요, 선진 이후의 위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요한 것은 아래와 같은 근거에 있다.  

   바로 그 이외의 증거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산해경》은 역대의 "사지(史志)"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한서(漢書) · 예문지수술약형법가(藝文志數術略形法家)》에는 《산해경》 13편이 기록되어 있다. 《수서(隋書) · 경적지지리기류(經籍志地理紀類)》에는 《산해경》 23권이 기록되어 있으며 주에 이르기를, "곽박이 주석을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나라 초기에 소하(蕭何)가 진(秦)의 지도와 호적을 얻었으며, 이 때문에 천하의 요해지를 알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또 《산해경》을 얻었는데 하우(夏禹)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 · 경적지지리류(經籍志地理類)》에 《산해경》 18권이 수록되었고, 곽박이 찬했다고 하였다. 《당서(唐書) · 예문지지리류(藝文志地理類)》에 《산해경》 23권이 기록되었고, 곽박이 주석을 했다고 하였다. 《송사(宋史) · 예문지(藝文志)》에 《산해경(山海經)》 18권이 기록되었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도 기록되어 있다.  

   둘째, 《산해경》은 양한 시기에 바로 후세까지 유전된 전본(傳本)이 있었다. 사마천은 그의 《사기(史記) · 대원전(大宛傳)》 에서(끝 부분에 있는 사론에 있음: 역자주) 말하기를, "구주(九州)의 산천에 관한 것으로 말하자면 《상서(尙書)》에 있는 것이 사실에 더욱 가깝다. 《우본기(禹本紀)》·《산해경(山海經)》에 기록되어 있는 괴상한 물건들에 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는데 서한 시기에 사마천이 《산해경》이라는 책을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서한 말년은 곧 건평(建平) 원년(A.D 5)으로, 유흠(劉歆)이 《산해경》을 교정하여 황제에게 아뢴 글에서 말하기를, "시중 · 봉거도위 · 광록대부(侍中奉車都尉光錄大夫) 신(臣) 수(秀)(즉 유흠)는 궁중의 서적(秘書)을 교정작업을 주관하고 아룁니다. 교정작업을 담당한 태상(太常)의 속관인 신(臣) 망(望)이 교정한 《산해경》은 모두 32편이온데, 이번에 18편으로 정해서 이미 교정을 마쳤나이다. 《산해경(山海經)》은 요 · 순 시대에 세상에 나온 책입니다. ……(중략)……우임금은 천하를 9주로 나누고 토지에 따라 조정에 바쳐야 할 물품을 정하고(任土作貢), 익(益 )등이 사물의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여 《산해경(山海經)》을 지었읍니다. 모두가 성현이 끼친 사적으로 옛 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날이 밝은 것처럼 분명하고 믿을 만 합니다. 효무황제 때 일찍이 진귀한 새를 바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새에게 여러 가지 먹이를 먹여 보았으나 먹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동방삭(東方朔)이가 그것을 보고 그 새의 이름을 말하고, 또 그 새가 먹는 먹이를 아뢰었는데 동방삭이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그에게 어떻게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바로 《산해경(山海經)》에 나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효선황제 때 상곡(上谷)에서 반석(磻石)을 두드렸더니 무너지면서 석실이 나왔는데 그 안에는 뒷짐결박을 한 채 형틀(盜械: 범죄로 인해 차고 있는 형구)에 매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신의 부친인 향(向: 곧 유향)이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계셨는데 "그것은 이부신(貳負臣)이올시다"라고 했습니다. 황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물으시자 역시 《산해경(山海經)》에 나와 있다는 뜻으로써 대답을 했습니다. 그 글에는 "이부(貳負)가 알유를 죽이자 마침내 천제께서 그를 소속산(疎屬山)에다 묶고, 그의 오른 발에 차꼬를 채워 두 손을 뒷짐결박을 시켰다(貳負殺猰窳, 帝乃梏之疎屬之山, 桎其右足, 反縛兩手)"라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자 주상께서 크케 놀라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조정의 관원들은 이로 말미암아 《산해경》을 진기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아지고, 문학에 종사하는 대학자들도 모두 읽고 배우면서 진기한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박일봉 편역, 《산해경(山海經)》, 육문사, 1995년, 25쪽 참조) 이로써 서한 시기에 한무제(漢武帝) · 동방삭(東方朔) · 효선제(孝宣帝) · 유향(劉向) 및 당시의 조정의 관원이나 대학자들 모두가 《산해경》이란 책을 보았으며, 《산해경》이란 책을 배우고 익혔음을 알 수 있다. 후한 때 왕충(王充)은 그의 《논형(論衡) · 별통편(別通篇)》 중에서 《산해경》을 언급하였고, 동시에 동중서(董仲舒) · 유향(劉向) 등도 모두 《산해경》이란 책을 보았다고 하였다. 조엽(趙曄)은 그의 《오월춘추(吳越春秋)》라는 책 중에서 역시 《산해경》을 언급하였고, 안지추(顔之推)는 그의 《안씨가훈(顔氏家訓)》이란 책 중에서도 《산해경》이란 책을 언급하였다. 서진(西晉)에 이르서는 이미 곽박(郭璞)이란 사람의 주석본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양한 시대에 바로 후세에 전해진 전본(傳本)이 있었던 것이요, 결코 한대 혹은 그 이후의 가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진시대의 진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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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선진의 고적 중에는 《산해경》과 똑 같은 인물이나 산 이름 및 《산해경》을 인용한 글이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빨리 《산해경》에서 인용된 것과 똑 같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목천자전(穆天子傳)》 에는 《산해경》 가운데 서왕모(西王母) · 곤륜구(昆倫丘)가 있다고 하였다.  《열자(列子)》에서 인용된 것이 가장 많은데 《열자(列子)》라는 책에는 《산해경》 중의 불주산(不周山) · 고야산(姑射山) · 곤오산(昆吾山) · 서왕모(西王母) · 곤륜구(昆倫丘) · 대인국(大人國) · 소인국(小人國) · 초협목국(僬俠目國) · 발해(渤海)의 동쪽에는…큰 골짜기가 있다" 등이다.  《시자(尸子)》 에는 《산해경》 중에서 나오는 괴상한 물고기나 괴상한 짐승도 있고, 또 《산해경》 중에 나오는 맹문(孟門)을 일컬어 "옛날 용문(龍門)이 아직 열리지도 않았고, 여량(呂梁)이 아직 뚫어지지 않았을 무렵, 황하(黃河)가 맹문 위에서 나와 크게 넘쳐 역류하면서 구릉이 모조리 없어지고 높은 언덕도 그 속에 잠겨 버리고 말았는데 이름하여 홍수(洪水)라 한다"고 하였다. 《장자(莊子)》 중에는 《산해경》의 고야산(姑射山)이 있다. 굴원(屈原)의 《천문(天問)》에는 《산해경》 속에 나오는 곤륜(昆倫) · 독룡(獨龍) · 희화(羲和) · 불사(不死) · 흑수(黑水) · 능어(陵魚) 등이 있다. 분명히 《산해경》은 《천문》을 그대로 베껴서 쓰여진 것이 아니요, 《천문》 에 들어 있는 188구 중 단지 6, 7구가 《산해경》과 관련이 있을 뿐 그 나머지 180여 구는 《산해경》과 전혀 관련이 없다. 어떻게 《산해경》이 《천문》을 그대로 베낀 책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목천자전(穆天子傳)》·《열자(列子)》·《시자(尸子)》·《장자(莊子)》·《천문(天問)》 등에 나오는 똑 같은 글과 인용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산해경》은 《열자》보다 앞서서 일찍 존재하였던 것이지 나중에 나온 위서가 아니다. 그밖에 안문(雁門) · 계림(桂林) · 장사(長沙) · 영릉(零陵)에 관한 것도 있다. 계림(桂林)은 지명이 아니라 나무 이름이다." 계림팔수(桂林八樹)"는 곧 여덟 그루의 계수나무로 이루어진 숲이란 뜻이다. 안문(雁門)은 강 이름으로, 양거산(梁渠山)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고 금속광물과 옥이 많이 나며 수수(脩水)가 여기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안문수(雁門水)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곽박이 주하기를, "안문(雁門)은 강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장사(長沙)의 영릉(零陵)에 관해서는 장사(長沙)는 산 이름이요, 또한 옛 지명이라고 하였다. 영릉(零陵)은 원래 옛 지명으로 사마천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순임금이 남방을 순시하다가 창오(蒼梧)라는 들녘에서 죽자 장강(長江) 남녘의 구의산(九疑山)에 장사를 지냈으니 이곳이 바로 영릉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산해경》에 기록된 것과 일치된다.  《산해경(山海經) · 해내경(海內經)》에 이르기를, 남쪽의 창오구(蒼梧丘) · 창오연(蒼梧淵), 이들 중간에 구의산(九疑山)이 있는데 순임금이 묻혔던 곳으로 장사(長沙)의 영릉(零陵) 경내에 있다고 하였다. 

   《산해경》이 진서라는 것은 또한 그 안에 있는 증거에 근거한 것이다.

    첫째,  《산해경(山海經)》 중에는 "곤민국(困民國)이 있어 성이 구씨(句氏)로 기장을 주식으로 한다. 이름을 왕해(王亥)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두 손에 각각 새 한 마리씩을 잡고 지금 그 머리를 먹고 있는 중이다. 왕해(王亥)는 은(殷)나라의 임금으로 일찍이 한 떼의 살찌고 힘이 센 소와 양을 유역족(有易族)의 군주와 하백(河伯)에게 맡겼던 적이 있었다. 유역족의 군주는 왕해가 자기의 아내를 간음한 것을 원망하여 왕해를 죽이고 그가 맡겼던 소와 양을 가로채 버렸다.  이런 점은 곽박이 주석을 한 《죽서기년(竹書紀年)》에서 말하는 "은나라 왕의 아들 해(亥)가 유역(有易)에 객빈으로 갔다가 거기서 여자를 간음하여 유역(有易)의 면신(綿臣)이 그를 죽여서 방치했다는 기록과 똑 같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은허(殷虛)의 문자 가운데 왕해(王亥) · 복우(僕牛)라는 여러 글자와 서로 똑 같은 것으로 보아 《산해경》은 아주 일찍부터 존재했던 책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양계초(梁啓超)는 왕국유(王國維)의 《은복사중소견선왕선공고(殷卜辭中所見先王先公考)》에 나오는 왕해(王亥) · 복우(僕牛)를 최초로 인용하여 《산해경》이 진짜임을 설명하였다.    

   둘째, 《산해경(山海經) · 대황서경(大荒西經)》 중에 "서북해(西北海) 해외, 적수(赤水)의 동쪽에는 장경국(長脛國)이 있고, 서주국(西周國)이 있는데 성은 희씨(姬氏)로 오곡을 먹고 산다. 어떤 사람이 거기서 밭을 가는 중인데 이름은 숙균(叔均)이라 했다. 제준(帝俊)이 후직(后稷)을 낳고, 후직(后稷)은 온갖 종류의 곡물 종자를 하늘로부터 가지고 인간 세상에 왔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서주(西周)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禹)가 공공(共工)을 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하대(夏代)로부터 비롯된 사실임을 말해 주는 것이며, 또 적수(赤水)의 서쪽에 선민국(先民國)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있는데 오곡을 먹는다거나 황제(黃帝) · 전욱(顓頊) 등의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산해경》이란 책이 만들어진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로서, 최소한 삼황오제(三皇五帝) 및 하 · 상 · 주의 사료를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산해경》 중에는 급총서(汲冢書) 《목천자전(穆天子傳)》과 똑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목천자전(穆天子傳)》에서 목왕(穆王)이 서쪽에서 서왕모(西王母)를 만나보았던 것을 "곤륜구에서 객빈이 되었다(賓昆倫之丘)"라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 서산경(西山經)》에  "다시 서쪽으로 350리를 가면 옥산국(玉山國)이란 곳이 있는데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곳이다"라고 하였고, "서남쪽 400리를 가면 곤륜구(昆倫丘)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데 실은 바로 이곳이 천제(天帝)가 내려와 도읍을 했던 곳이다"라고 하였다. 《목천자전》에도 "북쪽으로 맹문(孟門)을 오르면 구하(九河)의 상류이다"라고 하였는데 《산해경(山海經) · 북산경(北山經)》 에 "다시 동남으로 320리를 가면 맹문산(孟門山)이 있다"고 하였다.  

   넷째, 《산해경》 중에 있는 몇몇 대산 · 명천은 원시 나라별로 조사해서 오늘날의 명칭과 이어지는 것이 허다하다. 예를 들어 원시부족으로 숙신(肅愼) · 견융(犬戎) · 조선(朝鮮) · 왜국(倭國) · 동호(東胡) · 흉노(匈奴) 등이 있다. 지명으로 번우(番禺) · 회계(會稽) · 민(閩) 등이 있다. 강 이름으로 한수(漢水) · 낙수(洛水) · 회수(淮水) · 상수(湘水) · 위수(渭水) 등이 있다. 산으로 민산(閩山) · 곤륜산(昆倫山) · 무산(巫山) · 화산(華山) · 숭산(嵩山) · 형산(衡山) · 태산(泰山) · 수양산(首陽山) 등이 있다. 아울러 각 부족의 토템을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수양산(首陽山)으로부 시작해서, 수산(首山)에서 병산(丙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9개 산으로, 통과한 길이는 267리(원문 367리는 오식임)인데 여러 산의 산신의 형상은 모두 용의 몸뚱이에 얼굴은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다. 북쪽의 우강(禺彊)은 사람의 얼굴에 몸뚱이는 새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이 중원인의 토템이었다.  휘제산(煇諸山)으로부터 만거산(蔓渠山)까지 모두 9개의 산으로, 통과한 길이는 1,670리였는데 여러 산들의 산신의 형상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몸뚱이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는 용이 사람에게 전해왔거나 하늘에서 제비(玄鳥)가 내려와 상(商)을 낳았다는 역사전설과 부합된다. 

   다섯째, 동해(東海)의 해외에는 하나의 깊은 구덩이(大壑)이 있는데 이는 개천설(蓋天說: 하늘은 삿갓같고, 땅은 엎어진 대야 처럼 생겼다는 중국 고대 일종의 천체설)의 물이 흘러들어 밑바닥이 얼마인지를 모르는 골짜기라고 생각하는 바, 하늘은 둥글로 땅은 모난다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 한대 이전의 설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섯째, 당시 해중(海中)에 봉래(蓬萊)가 있었다. 봉래산(蓬萊山)은 해중에 있었던 것으로 그 하나는 바로 지금의 봉래(蓬萊) 혹은 발해(渤海) 속에 있는 장도(長島)를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이상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산해경》은 위작이 아니라 대단한 가치가 있는 중국의 고대지리 전문서적이다.

    《산해경》의 진위 문제가 해결 된 다음에 바로 작자와 책이 만들어 진 시기가 문제된다.

    《산해경》의 작자에 관해서 유흠(劉歆) · 왕충(王充) · 고실(顧實: 민국시대 《목천자전서정강소(穆天子傳西征講疎)》를 엮은 지리학자임: 역자주) 등은 하우(夏禹) · 익(益)이 썼던 것이라 여기고 있으며, 후한 조엽(趙曄)의 《오월춘추(吳越春秋)》도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당 두우(杜佑)는 《통전(通典)》에서 공자님이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엮은 뒤에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자(尙奇)들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명의 호응린(胡應麟)은 "전국(戰國)의 이상야릇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好奇之士)이 《목천자전(穆天子傳)》에 들어 있는 글과 사건에 근거해서 과장된 것을 더욱 극대화시켜, 급총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진기한 이야기(異聞), 《일주서(逸周書) · 왕회(王會)》의 기이한 물건(詭物), 《이소(離騷)》·《천문(天問)》의 심원한 우의(遐旨), 《남화(南華)》·《정포(鄭圃)》의 우언(寓言: 우화) 등을 섞어서 이 책을 만들었다."라고 생각하였다.  주희(朱熹)는 한나라 이후의 사람들이 쓴 것으로 생각했다. 위취현(衛聚賢: 1899~1990)은 인도사람의 작품이다, 혹은 묵자(墨子)의 제자인 인도사람 수소자(隨巢子: 전국시대 사람으로 《수소자(隨巢子)》를 썼음)가 썼다고 생각했다. 또 어떤 사람은 고바빌론사람 · 고아메리카사람들이 썼던 것으로 생각하는 등 이론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최근에 또 하나의 새로운 설은 《산해경》은 왕자 조(朝)를 따라 초나라로 달아났던 주나라 왕실 도서관 관리와 학자 혹은 그 후예가 주왕실의 도서 문건과 자료에 근거해서 썼던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비교적 이런 의견에 기울고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산해경》에는 근거할 만한 하 · 상 · 주 이래의 이렇다 할 만한 사료가 없어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왕자 조(朝)가 기원전 519~510년 사이에 왕가의 내란사건에 참여한 바 있어 그 중에 확실한 주나라 왕실의 전적과 윤씨(尹氏) · 소씨(召氏) · 모백(毛伯) · 남궁효(南宮囂) 등 주나라의 전적을 받은 사람들과 함께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 가운데는 이미 주나라의 전적도 있었고, 당연히 이러한 전적을 관리하는 사관과 학자도 따르게 되었다. 

   둘째, 《산해경》이라는 책은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해서 쓰여진 책이다. 《열자(列子)》에 의하면 당시의 중앙에 있는 나라는 바로 낙양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이었다. 《산해경》에서 말하는 바 산이란 낙양을 중심으로 한 서주(西周)의 산맥을 가리키며, 곧 《남산경(南山經)》·《서산경(西山經)》·《북산경(北山經)》·《동산경(東山經)》·《중산경(中山經)》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남산경(南山經)》은 서쪽의 작산(昔+隹山) · 초요산(招搖山: 즉 蜀伏山)으로부터 시작해서, 동쪽으로 향해  중간에 회계산(會稽山)을 거쳐 동쪽으로 남우산(南禺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낙양을 중심으로 한 남쪽 산맥이었다. 《서산경(西山經)》은 화산(華山), 곧 서악(西岳) · 전래산(錢來山)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쪽을 향해 불주산(不周山) · 곤륜구(昆倫丘) · 천산(天山)을 거쳐 암자산(崦嵫山)에 이르렀으니 이는 낙양을 중심으로 서쪽을 향한 여러 산맥이었다. 《북산경(北山經))은 단고산(單孤山)으로 중간에 괵산(虢山)을 거쳐 북단산(北單山)에 이르렀다. 이것이 황화(黃河) 이서의 북산(北山)이었다. 황하 이동의 북산은 임분하(臨汾河) 상류의 관잠산(管涔山)으로 중간에 진양(晉陽)의 현옹산(縣雍山)을 거쳐 방제산(放題山)에 이른다. 제3조의 북경산(北經山)은 태행산(太行山)을 기점으로 하여 동북쪽으로 갔다. 왕옥산(王屋山)을 거치고 또 상당(上黨)의 알려산(謁戾山) · 발구산(發구山), 호타하(滹沱河)의 발원지인 태희산(泰戱山)을 거쳐 무봉산(無逢山)에 이른다. 동산경(東山經)은 주향이 북에서 남이다. 제1조의 산맥은 수주산(樕주山)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태산(泰山)을 거쳐 죽산(竹山)에 이른다. 제2산맥으로 공상산(空桑山)으로부터 시작해서 고야산(姑射山)을 거쳐 인산(인山)에 이른다. 제3조의 산맥은 시호산(尸胡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무고산(無皐山)에 이른다. 제4산맥은 북호산(北號山)에서부터 시작하여 태산(太山)에 이른다.  《중산경(中山經)》의 여러 산들은 기본적으로 3개의 방향이 있는데 먼저 동쪽으로 향하는 것과 북쪽으로 향하는 것이 있다.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박산(薄山)에서 시작하여 조산(棗山)에 이르는데 중간에 우수산(牛首山)을 거친다. 또 화산(華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 향하다 음산(陰山)에 이르고 바로 고등산(鼓鐙山)에 이른다. 겨우 6백여 리이다. 제2산맥으로는 제산(濟山)으로부터 시작하여 서남으로 가다가 나중에서 서행하며 곤오산(昆吾山)을 거쳐 만거산(蔓渠山)에 이른다. 제3조의 산맥은 부산(부山)을 기점으로 시작해서 오안산(敖岸山)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다가 하산(河山)에 이른다. 제4조의 산맥은 정산(整山)을 기점으로 해서 녹제산(鹿蹄山)으로부터 서쪽으로 가다가 상락(上洛)의 웅이산(熊耳山)을 거쳐서 현호산(玄扈山)에 이른다. 제5조의 산맥으로 구상산(苟床山)으로부터 시작해서 동쪽으로 가다 조가산(朝歌山)을 거쳐 양허산(陽虛山)에 이른다. 제6조의 산맥으로 호저(縞羝)을 기점으로 해서 평방산(平幫逄山)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가다가 출곡수(出轂水)의 부산(傅山)을 거쳐 양화산(陽華山)에 이른다. 제7조의 산맥으로 고산(苦山)의 휴여산(休與山)을 기점으로 해서 동쪽으로 가다가 소실산(少室山)을 거쳐 태실산(泰室山)에 이르고 형양(滎陽)의 대괴산(大塊山)에 이른다. 제8조의 산맥으로 경산(景山)에서 시작하여 동남으로 가다가 형산(荊山)을 거쳐 금고산(琴鼓山)에 이른다. 제9조의 산맥으로 민산(岷山)을 기점으로 해서 동북쪽으로 가다가 거산(거山)을 거쳐 가초산(賈超山)에 이른다. 제10조의 산맥으로 수양산(首陽山)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가다가 병산(丙山)에 이른다. 제11조의 산맥으로 형산(荊山)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남으로 가다가 동으로 꺾어져 형산(荊山)을 거쳐 기산(幾山)에 이른다. 제12조의 산맥으로 동정산(洞庭山)으로부터 시작해서 동남으로 가다가 영여산(榮余山)에 이른다. 이러한 12조의 《중산경(中山經)》은 낙양을 중심으로 한 하남성(河南省) · 산서성(山西省) · 사천성(四川省) · 호북성(湖北省) · 호남성(湖南省) 등 5개 성의 내지 산맥의 크고 작은 산과 하류이다.  그리고 기 중에서도 가장 자세한 것은 낙양 이남의 여러 산이다. 이로써 《산해경》의 작자는 마땅히 낙양 이남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자 조(朝)가 초나라로 달아다면서 가지고 갔던 전적 및 사관 · 학자들이 옮겨 살았던 곳이 이 일대에 있었다. 그들은 우익(禹益)의 원래부터 있었던 사료를 근거로 하고 거기에서 조사를 해서 편집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에 남겨 놓은 "또 다른 일설(又一說)"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장으로부터 그들이 충분히 연구했던 경과를 알 수 있다. 

   셋째, 《산해경》은 오행설(五行說) · 낙서하도설(洛書河圖說)이 성행할 때에 쓰여졌다. 

   《해경(海經)》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사해(四海)의 안쪽과 사해 밖의 각개 부족 소국의 위치를 말하고 있다. 이 해(海)는 대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중앙의 나라에 있는 해내(海內)를 말하며, 각 부족 국가의 해외(海外)는 근본적으로 오늘날 가리키는 중국지리 경계 밖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더욱이 인도나 옛 바빌론을 일컫는 해외의 일이 아니다. 그중에 중원을 제외하고 대략 50여 개의 부족 소국이 있었다.  

   이로써 그것은 오행(五行) · 사시(四時) · 하도낙서(河圖洛書)와 주역(周易)을 활용하단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만들어진 때를 기원전 510년에서 기원전 460년 사이로 보는 것이다. 《산해경》이란 책이 열자(列子: 사람 이름)의 눈에 띄었던 게고, 그래서 그처럼 많이 인용되었던 것이다. 

   넷째, 《산해경》에서 말한 강역은 주나라에 미치는 것이다.  

   주나라의 강토 및 그 영향은 광범하여 동쪽에는 성왕(成王)이 상보(尙父)를 제후로 봉하여 박고씨(薄姑氏)의 토지와 인민을 통치하고, 영구(營口)에 도읍을 하였으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동북쪽은 연국(燕國)이요, 더 동북쪽으로는 송화강(松花江) · 흑룡강(黑龍江) 유역의 숙신족(肅愼族)이다. 영(榮)나라의 백(伯)이 《회숙신지국(賄肅愼之國)》을 쓴 것이 그 증거이다. 내몽고 · 길림 토성자(土城子)에서 발굴된 고고 유물은 상문화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주나라의 동남쪽 가장 먼 곳에 있던 제후국은 오국(吳國)이었다. 강소(江蘇) · 절강(浙江) · 강서(江西) · 광동(廣東) · 대만(臺彎) 등지도 모두 하 · 상 · 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주나라의 남쪽은 초국(楚國)으로 상문화를 계승하여 주와 더불어 한(漢)나라 일대(一代)에 양자강에서 웅거했다. 서남쪽으로는 세력이 파(巴)에까지 미쳐 주나라의 봉국이었는데 바로 지금의 사천(四川) · 중경(重慶)과 천북(川北)이다. 파촉(巴蜀) 등지의 부족은 모두 주나라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주나라 서, 북쪽은 견융(犬戎) 및 서왕모(西王母)의 나라에 이르렀고 중아(中亞)지구에 미쳤다. 이와 같이 주나라에 이르는 강역과 영향은 모두 《산해경》에 포함되어 있고 더욱이 《산해경》 중에는 또 문왕과 주나라의 몇몇 사건이 언급하고 있는 바, 이 책은 원래 우익(禹益)의 원본에 기초해서 주나라 말기의 사관 혹은 학자들이 엮어서 만든 것이다. 이 책 속에 언급하고 있는 동북의 숙신(肅愼), 서북 서부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천산(天山) · 서왕모 및 곤륜구(昆倫丘), 서남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민산(岷山), 동남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번우(蕃禺) · 절강(浙江) · 민(閩) · 구의산(九疑山) · 형산(荊山), 동쪽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봉래(蓬萊) · 발해(渤海) · 태산(泰山) 등은 모두 주나라에 미치는 땅이었다. 이 책은 역사 발전과 서로 부합되고, 주나라 경왕(敬王) 건원에서부터 주나라 정왕(定王) 중기의 작품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또 주나라 왕자 조(朝)가 초나라로 달아난 뒤 낙양을 중심으로 한 화림(和臨)과 가까운 낙양의 초지(楚地) · 진지(晉地) · 정지(鄭地)에는 하나의 중앙문화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문화권에서 가장 왕성할 때는 바로 경왕(敬王)에서 난왕(赧王) 때까지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화권 중에는 풍부한 주나라의 문서로 보관된 전적을 가지고 있어 노담(老聃) · 열자(列子) · 장노자 (長盧子) · 첨하(詹何) · 등석(鄧析) · 자방(子方) · 귀곡자(鬼谷子) · 자화자(子華子) · 시자(尸子) 등 철학가도 있었으며, 또 일군의 사관 · 학자 즉 《산해경》의 편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리류의 《산해경》이란 책을 엮어 썼을 뿐만 아니라 현전하는 《이아(爾雅)》 등의 책도 이들 문화집단인들이 엮어 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이런 문화권과 제로문화권(齊魯文化圈)은 동시에 존재하였다.  그들의 공헌과 제로문화(齊魯文化)의 공헌은 똑같이 중효하다. 특히 하 · 상 · 주 및 그 이전의 문화연구에 대한 공헌은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산해경》을 엮어서 쓴 것은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산해경》은 하 · 상 · 주 시기의 지역 및 그 영향이 미쳤던 곳을 증명해 주고 있다. 거기서 말한 사면팔방의 지역으로 볼 때, 주나라는 기본적으로 중화민족의 광활한 영토의 초석을 놓은 밑바탕이 되었다. 

   둘째, 《산해경》은 중화민족이 자고이래로 바로 중다한 화하민족인 50여개의 소문민족과 함께 살고 모여서 이루어진 것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속에 언급한 원시 부족의 이름에는 어떤 것은 지금의 소수민족과 딱 들어 맞는 호칭도 있고 어떤 것은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수량상으로 보아 50여개 소수부족인 소국과 오늘날의 소수민족의 수량은 서로 비슷하다. 

   셋째, 《산해경》은 기본적으로 명산 · 대천의 위치를 측정하였는 바, 예를 들어 화산(華山) · 태산(泰山) · 형산(衡山) · 숭산(崇山)의 지리위치와 같은 것들이요, 예를 들어 구의산(九疑山) · 웅이산(熊耳山) · 형산(衡山) · 민산(岷山)의 지리위치와 같은 것은 지금까지도 고쳐진 일이 없다.  예를 들어 장강(長江) · 황하(黃河) · 한수(漢水) · 이천(伊川) · 낙수(洛水) · 회하(淮河) · 상강(湘江) 등의 수류는 모두 물의 근원과 흐르는 방향을 말했다. 

   네째, 《산해경》은 상고 원시 부족 시기의 각 민족의 토템 숭배를 게시하여, 기본적으로 역사전설 혹은 사실과 부합된다. 과거에는 《산해경》에는 허다한 괴물이 쓰여 있어 좋게 이해하지를 못하고 한 이후에 어떤 사람이 말한 신화다, 어떤 사람은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실제로 굴원의 《천문(天問)》 이래 바로 이런 설이 분분한 것이 문제였다. 우리는 《산해경》 중의 괴물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요, 그것을 원시부족의 역사환경 가운데 놓고 본다면 바로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산해경》 중에 말하는 괴물(怪物) · 괴수(怪獸)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각 민족들이 믿는 토템이었다고 생각한다. 《산해경》 중에는 모두 수십 개의 괴물신이 있는데 예를 들면 《남산경(南山經)》 중에 그 신상은 모두 새의 몸뚱이에다가 용의 머리를 한 것으로, 이는 작산(鵲山)으로부터 기미산(箕尾山) 일대의 부족들은 모두 새의 몸뚱이에 용의 머리를 한 토템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남산이경(南山二經)》에는 광산(框山)으로부터 칠오산(漆吳山)까지로, 그 신상이 모두 용의 몸뚱이에 새의 머리를 하고 있다. 《남차삼경(南次三經)》은 천우산(天虞山)으로부터 남우산(南우山)까지로, 그 신은 모두 용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이 부족의 토템이 모두 용과 새로부터 뗄레야 뗄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서산경(西山經) · 서차이경(西次二經)》에는 첨산(鈐山)으로부터 내산(萊山)까지로, 그 신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몸뚱이는 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서차삼경(西次三經)》은 숭오산(崇吾山)으로부터 익망산(翼望山)까지로, 그 신은 모두 양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지역 부족들은 말과 양이 많아 그래서 양과 말로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으로 삼았던 것이다. 《북산경(北山經)》은 단고산(單孤山)으로부터 제산(제山)까지로 그 신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몸은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북차이경(北次二經)》은 관검산(管涔山)으로부터 돈제산(敦題山)까지로 그 신은 모두 뱀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는 뱀을 신앙하는 토템숭배이며 지금 북방의 혁철족(赫哲族) · 만족(滿族) · 오르죤족(鄂倫春族) · 달알아족(達斡兒族) 등도 그 샤만교 중에는 여전히 뱀을 신봉하고 있다. 그리고 《북차삼경(北次三經)》에는 태항산(太行山)으로부터 무봉산(無逢山)까지로 그 신상은 모두 말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이 일대의 오랜동안 말을 기르던 것과 관계가 있다. 《동산경(東山經)》에는 수주산(樕주山)에서 죽산(竹山)까지로 그 신상은 모두 사람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동차이경(東次二經)》은 공상산(空桑山)에서 인산(인山)까지로, 그 신은 모두 짐승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동차삼경(東次三經)》은 시호산(尸胡山)에서 무고산(無皐山)까지로, 그 신상은 모두 짐승의 몸뚱이에 양의 뿔을 한 모습을 하고 있는바, 이 일대의 부족들은 수렵을 하고 양을 기르는 것을 생업으로 하니 토템은 짐승과 양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중차이경(中次二經)》은 제산(諸山)에서 만거산(蔓渠山)까지로, 그 신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몸뚱이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중차칠경(中次七經)》은 고산(苦山)으로부터 대괴산(大塊山)까지로, 신상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머리가 셋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돼지의 몸뚱이에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중차팔경(中次八經)》은 형산(荊山)에서 금고산(琴鼓山)까지로, 그 신상은 모두 새의 몸뚱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중차십일경(中次十一經)》은 형산(荊山)에서 익망산(翼望山) 남쪽까지로, 신의 모습이 모두 돼지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중차십이경(中次十二經)》에는 동편산(東遍山)에서 영여산(榮餘山) 남쪽까지로, 신상은 모두 새의 몸뚱이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토템으로 볼 때, 모두 말 · 양 · 돼지 · 뱀 · 새 · 용과는 뗄레야 뗄 수 없으며, 중원 일대에는 모두 용(龍)이 있는 바, 이는 전설 중의 상(商)의 시조 설(契)이요, 그의 어미 간적(簡狄)이 제비의 알을 삼키고 태어났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우리 중화민족은 용의 자손이요, 심지어 고대 황제가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용이라고 하였던 것은 모두 상고이래 용을 토템으로 삼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원시종교 토템숭배도 당시의 사회생산력과 경제문화의 발전정도를 반영하며 선사시대사를 연구하는 데 모두 중대한 의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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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째, 《산해경》은 당시의 각종 학설과 기술의 종합 운영을 반영하였다. 바로 그 장절에 있는 방위를 조성하고 있는 부분으로 볼 때, 이 책은 당시의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 ·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 역학팔괘설(易學八卦說) · 사면팔발상하우주설(四面八方上下宇宙說) · 고대개천설(古代蓋天說)과 측회학(測繪學)을 융합한 것이었다. 《산해경》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산맥 중의 산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을 붙인 유일한 자연지리저작일 뿐만 아니라, 여러 산의 특징 및 그 광산자원 · 임목자원 · 생물자원과 약초자원을 설명해 주었다. 《대황(大荒) · 서경(西經)》에 영산(靈山)이 있어 무함(巫咸) · 무팽(巫彭) 등 11명의 무사(巫師: 박수)들이 거기서 여러 가지 종류의 약초를 채집했다고 무함(巫咸) · 무팽(巫彭)은 상나라의 유명한 무의(巫醫)로 약으로써 병을 치료하였다. 이 점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없지 않다.  

   여섯째, 《산해경》 중에서 진술한 지형(地形) · 지모(地貌)는 산천 · 하류를 제외하고 아지까지 존재하고 있는 택지(澤池) · 호박(湖泊: 호수) · 해양(海洋)은 중국의 자고 이래의 지형 · 지모의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근거이다. 예를 들면 그 중에 언급한 수행(水行)이 몇 리라는 것들은 지금은 이미 육지로 변했지만 당시의 이곳이 내호(內湖)였음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서북의 사구(沙丘) 중에 산이 있었다고 한다거나 산중의 천지(天池)에 물이 있다고 한 것 같은 것은 바로 이곳이 화산(火山)과 화산구(火山口)의 지형일 가능성이 있다. 

   일곱째, 《산해경》은 선사이전사가 반영된 저작으로 우리들이 가일층 선사시대를 연구를 하여 선사이전사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그처럼 특수한 가치가 있다. 중국 역사문화를 연구함에 있어 하나라의 사료는 원래부터 매우 부족한데다, 하나라의 이전의 사료는 더욱 부족하다. 《산해경》은 선사시대의 사료 부족을 보완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산해경》이 진짜 책이요, 그 내용에 대한 의혹이 풀린 만큼, 중국 각 민족의 씨족사회의 정치 · 경제 · 원시종교의 발전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 생각한다. 그 중에는 철이 나는 곳을 기록한 것이 많은데 바로 이런 것이 좋은 설명이 된다고 하겠다. 그래서 위서로 생각하여 거들떠 보지 않으려고 해서도 안되며, 괴서로 여겨 웃어 넘겨서도 안될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원시사회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지위와 가치를 점하고 있다.(끝) 

                                                                               2009.  4.  26 

                                                                                  봉오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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