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06
2012/12/1(토)
해동역사(海東繹史) 제17권 / 성력지(星曆志) / 역(曆) 중에서 발췌함  

 

○ 고려국에는 《구집력(九執曆)》이 있다. 그 법은 하늘은 왼쪽으로 돌고, 해와 달 역시 왼쪽으로 돈다. 하루의 밤과 낮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해가 3백 65도 4분의 1을 운행하면 하늘이 도는 것에 비해 한 바퀴가 적은데, 날마다 하늘의 운행에 미치지 못하는 바를 28수(宿)로써 계산하여 도수를 잰다. 대개 28수는 바로 경성(經星)으로 하늘에 붙어서 운행해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하여 도수(度數)를 잴 수가 있다. 그리고 땅의 거리를 잴 수가 있다고 하는데, 만약에 천리의 주군(州郡)에 정해진 장소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곳을 알고 있을 경우, 이곳을 가지고 기준점으로 삼아서 거리를 재는 것이다. 《유환기문(游宦記聞)》

 

《고려사》에는, “정인지(鄭麟趾)는 이르기를, ‘고려는 따로 역(曆)을 만들지 않고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썼는데, 장경(長慶) 임인년부터 고려 태조가 개국(開國)할 때까지는 거의 1백 년이 지났으므로, 역술(曆術)에 있어서 이미 차이가 났다. 이보다 앞서 당나라에서는 이미 역을 고쳤고, 이때부터 모두 22번을 고쳐 썼는데도 고려에서는 오히려 《선명력》을 그대로 써 온 것이다. 그러다가 충선왕(忠宣王) 때에 이르러서 원나라에서 《수시력(授時曆)》을 받아 고쳐서 썼다. 그러나 개방(開方)에 대한 역술(曆術)이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교식(交食)에 대한 일절(一節)은 오히려 옛 《선명력》의 방법을 그대로 따랐다. 이에 일식(日食)ㆍ월식(月食)의 시각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실제와 맞지 않았으나, 고려가 끝날 때까지 고칠 수가 없었다.’ 하였다.” 하였다.

○ 명나라에서 역서(曆書)를 반포하는 규례는, 유구(琉球)ㆍ점성(占城) 등 외국(外國)과 같은 경우에는 정통(正統) 연간 이전에는 모두 조공(朝貢)하는 것을 인하여 매번 돌아갈 때 왕력(王曆) 1본과 민력(民曆) 10본씩을 주었다. 지금 일정하게 항상 주는 나라는 오로지 조선국(朝鮮國)뿐으로, 왕력 1본과 민력 1백 본을 준다. 《대명회전(大明會典)》살펴보건대, 《명사(明史)》를 보면, 태조(太祖)가 오왕(吳王)이 되어 3년(1367, 공민왕16) 정미에 《무신력(戊申曆)》을 반포하였고, 홍무(洪武) 17년(1384, 우왕10) 갑자에 이르러서 누각박사(漏刻博士) 원통(元統)이 《대통력(大統曆)》을 만들었는데, 홍무 갑자년으로 역원(曆元)을 삼았으며, 비로소 천하에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를 보면, 공민왕(恭愍王) 19년 5월에 황제가 설사(偰斯)를 파견하여 《대통력(大統曆)》 1본을 하사하였으며, 또 성준득(成准得)이 귀국할 때 조서를 내려서 홍무 3년 《대통력》을 하사하였다. 공민왕 19년은 바로 홍무 3년 경술이니, 설사가 반포한 것은 바로 《무신력(戊申曆)》이지 원통(元統)이 찬한 《대통력》이 아니다.
《고려사》에는, “정인지(鄭麟趾)는 이르기를, ‘고려는 따로 역(曆)을 만들지 않고 당나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썼는데, 장경(長慶) 임인년부터 고려 태조가 개국(開國)할 때까지는 거의 1백 년이 지났으므로, 역술(曆術)에 있어서 이미 차이가 났다. 이보다 앞서 당나라에서는 이미 역을 고쳤고, 이때부터 모두 22번을 고쳐 썼는데도 고려에서는 오히려 《선명력》을 그대로 써 온 것이다. 그러다가 충선왕(忠宣王) 때에 이르러서 원나라에서 《수시력(授時曆)》을 받아 고쳐서 썼다. 그러나 개방(開方)에 대한 역술(曆術)이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교식(交食)에 대한 일절(一節)은 오히려 옛 《선명력》의 방법을 그대로 따랐다. 이에 일식(日食)ㆍ월식(月食)의 시각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실제와 맞지 않았으나, 고려가 끝날 때까지 고칠 수가 없었다.’ 하였다.” 하였다.
○ 명나라에서 역서(曆書)를 반포하는 규례는, 유구(琉球)ㆍ점성(占城) 등 외국(外國)과 같은 경우에는 정통(正統) 연간 이전에는 모두 조공(朝貢)하는 것을 인하여 매번 돌아갈 때 왕력(王曆) 1본과 민력(民曆) 10본씩을 주었다. 지금 일정하게 항상 주는 나라는 오로지 조선국(朝鮮國)뿐으로, 왕력 1본과 민력 1백 본을 준다. 《대명회전(大明會典)》
○ 성조(成祖) 영락(永樂) 원년(1403, 태종3) 11월 초하루 을해에 조선국에 《대통력(大統曆)》을 반포하는 것을 법령으로 정하였다. 《명사》

살펴보건대, 고려 때 최성지(崔誠之)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나라로 들어가 수시력법(授時曆法)을 구해 돌아와 추보(推步)하여 준용(遵用)하였다. 그러나 일월(日月)의 교식(交食)과 오성(五星)의 행도(行道)에 대해서는 아직도 곽수경(郭守敬)의 산술법(算術法)을 몰랐다. 조선이 개국하여서도 홍무(洪武)의 정삭(正朔)을 받아 《대통력(大統曆)》을 준용하였으나, 역법(曆法)에 있어서는 《수시력》을 그대로 썼다. 세종 15년(1433) 계축에 정인지(鄭麟趾)ㆍ정초(鄭招)ㆍ정흠지(鄭欽之) 등에게 명하여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찬하게 하였다. 명나라의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취해 약간의 오류를 수정한 다음 합하여 내편(內篇)을 만들고, 이어 《수시력(授時曆)》의 지원(至元) 18년 신사(辛巳)를 역원(曆元)으로 삼았으며, 또 회회력법(回回曆法)을 구해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에게 교정하여 외편(外篇)을 만들게 하였는데, 윤월(閏月)은 쓰지 않았다. 인조 22년(1644) 갑신에 관상감제조 김육(金堉)이 서양 사람 탕약망(湯若望)의 《시헌력(時憲曆)》을 쓰기를 청하였다. 효종 4년 계사에 이르러서 비로소 시헌력법을 시행하였으나, 오성(五星)의 산법(算法)에 대해서는 오히려 알아오지 못하였다. 숙종 34년(1708) 무자에 추산관(推算官) 허원(許遠)을 파견해 연경(燕京)으로 들여보내 흠천감(欽天監)에서 칠정표(七政表)를 사 가지고 오게 하여 비로소 《시헌력》의 오성법(五星法)을 썼다. 영종(英宗) 원년(1724) 갑진에 새로 수찬한 《시헌칠정법(時憲七政法)》을 썼는데, 일월(日月)의 교식(交食)에 대해서는 서양 사람 갈서니(噶西尼)의 법을 쓰고, 오성(五星)에 있어서는 매각성(梅殼成)의 법을 그대로 썼다. 대개 숭정(崇禎) 초기부터 비로소 《시헌력》을 써서 중국에 시행되어 지금까지 이를 준용해 오고 있는데, 그 법이 아주 정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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