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
2009/8/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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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역성혁명론  


정도전의 역성혁명론

graciella


2003.09.23 20:13

 


정도전(鄭道傳)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에 대하여

 

 

 

 

<목차>

 

Ⅰ.서론------------------------2

 

 

Ⅱ. 본론-----------------------3

 

1) 성리학 인식에서의 역성혁명론-------------3

 

2) 정치사상에서의 역성혁명론----------------5

 

3) 역성혁명론의 의의 및 비판----------------7

 

 

Ⅲ. 결론------------------------9

 

 

Ⅳ. 참고문헌-------------------10

 

 

Ⅰ. 서론

 

三峰 鄭道傳(1337? ∼ 1398)은 조선왕조 건국에 있어서 정치적 주역을 담당한 대 정치가인 동시에, 고려적인 사회질서와 이념 체계를 전반적으로 비판하여 조선왕조의 통치 질서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뛰어난 성리학자적 이론가였다. 따라서 조선왕조 건국 주체 세력의 사회 개혁 이념과 건국 초기의 통치 질서의 기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鄭道傳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鄭道傳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고 그에대한 체계적인 연구 또한 미비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鄭道傳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두가지 관점에서 진행되었다고 할수 있다. 즉 사상가로서의 鄭道傳과 경세가로서의 鄭道傳이 그것이다. 사상가로서의 鄭道傳에 대한 연구는 주로 그의 排佛인식에 초점이 맞추어왔다. 이는 고려말의 개혁세력이 개혁으로 명분으로 내걸었던 것이 불교에 대한 척결이었고 또한 鄭道傳의 저술중 상당부분이 排佛이라는 시각에서 쓰여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유불교체와 왕조교체라는 시대상황에서 볼때 그의 사상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한편 경세가로서의 鄭道傳에 대한 연구는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전제 개혁이라던가 사병혁파같은 중요한 정책시행 과정에서의 그의 역할과 정권 투쟁 그리고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그의 전술에서 나타난 정치 이념 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사상가이면서 경세가인 鄭道傳은 분리된 채로 이해되어 왔고 바로 이점이 鄭道傳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鄭道傳은 <조선경국전> 및 많은 저서를 통해서 새 나라의 이념의 기반을 제시해주었는데 특히 그는 李成桂의 역성 혁명에 대한 이론적인 기반, 즉 역성 혁명론을 주창하였다. 이는 기존의 임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만을 강요하던 전통에서 한발짝 나아가 새로운 이념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조선건국의 합리성을 설명하고있을 뿐만이 아니라, 民을 나라의 주체세력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는, 좀더 선구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그 가치가 새로이 조명받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鄭道傳의 역성혁명론에 대해 좀더 깊은 이해를 위해 성리학자로써 그가 성리학에 대해 갖는 이해와, 정치사상가로써 그가 주장한 역성혁명론을 동시에 고찰함으로써 그의 역성혁명론에 대해 좀더 명확한 이해와 비판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2. 본론

 

1) 성리학 인식에서의 역성혁명론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성리학 특히 그 가운데서 理氣論은 끝없는 논쟁을 통해 심화되었고 바로 이점에서 조선 성리학의 특징으로 자주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사상과 사회를 단절적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분명 잘못된 것이며 理氣논쟁은 단순한 관념상의 논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연적으로 사회현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성리학에서는 우주와 인간의 존재원리 그리고 인간이 정치 사회적으로 실천해야 할 도덕규범까지도 일관되게 이와 기로써 설명하고 있다. 다라서 이기론은 당시의 정치 사회 사상과도 일정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이해햐아 할 것이다. 따라서 鄭道傳의 정치 사상을 살피기 앞서 먼저 그가 성리학에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가를 살펴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鄭道傳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그가 우주와 인간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주자의 설을 거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에 대한 언급은 거의 모두 排佛이라는 목적과 관련해 단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보기위해서 人間論과 理氣論만을 중심의 성리학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면서 아울러 그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鄭道傳은 천지만물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는 태극에는 천지만물의 理가 갖추어 있는데 이 태극이 움직여 음양이 생기고 음양이 변합하여 오행이 갖추어지며 이 음양오행이 시합하여 인간 및 만물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이 천지만물의 이론은 천지만물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에서 초월적이지만 동시에 개개 만물에 내재해서는 마땅히 그렇게되는 소이의 법칙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내재적인 원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理의 성격 때문에 천지만물의 이치는 동일한 것이다. 이와같이 만물의 생성원리는 똑같지만 만물가운데서 人과 物의 구별에 있고 人가운데서도 知愚, 賢不肖, 貴賤, 富貧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음양오행의 氣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정도전에 의하면, 만물의 생성과정에서 人과 物 의 차이가 생기고 人가운데서 차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음양오행의 기때문이지만 이 차이는 어떤 의도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비록 선천적으로 타고난 氣라고 할지라도 후천적인 실천에 의해서 변화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기질을 변화시켜 성현에 이를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다시말해서 인간의 '능동성'을 인정하고 있던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정도전은 불교의 인과설을 비판할수 있었고 인간의 귀천이론 및 역성혁명론까지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형성된 인간에 대해, 鄭道傳에 있어 인간은 우주의 생성 원리에 따라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理와 氣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그는 인간에 내재된 理가 곧 性이고 그 形을 이룬 것이 氣라는 말이다. 그리고 心에 대해서는 인간이 하늘로 부터 얻어서 태어난 바의 氣이면서 동시에 理를 그 안에 갖추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앞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동일한 理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에서 말하는 천하의 理를 관장하는 體는 곧 심에 존재하는 理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려 用은 인간의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겨난 기를 말한 것이다. 결국 鄭道傳은 理가 내재된 氣로서의 心을 心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악이 생기게 된 근원에서도 그것을 氣로써 설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恒産을 마련해주지 못하는 데에서 찾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악은 사회 제도상의 문제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가 理와 氣, 體와 用을 일원적으로 파악했던 것은 氣의 능동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理는 형이상적 존재 원리로만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형이상의 理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가치로서 仁義禮智라는 내용물을 담고있지만, 그리고 이 점에서 理가 중시되지만 기의 매개없이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론에서 기본적으로 鄭道傳은 心에 내재된 理와 氣를 나누어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지 않았고 이러한 점은 그의 우주에 대한 인식에서도 나타난다. 이처럼 鄭道傳에 있어서 理와 氣는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행위에 있어서는 氣에만 그것을 부여함으로써 氣가 갖는 현실성을 중시하였다.

그런 면에서 鄭道傳은 天과 人역시 하나로 보는 天人合一說을 인정하였다. 다시말하면 천지와 인간은 같은 근원과 같은 종류의 陰陽의 氣를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陰陽의 氣가 부조화하면 그에 감응되어 천지의 음양의 기도 부조화하여 홍수, 한발등 각종 재해가 발생한다. 그러나 인간의 氣가 조화를 이루면 그 반대현상이 나타난다고 보아 인간 세상의 吉, 凶, 災, 祥은 모두가 음양의 기의 조화여부에 달려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동시에 有意志的인 인격신으로서의 上帝가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간의 음양의 기를 조화시키려면 통치자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인민 가운데 통치자에 대한 원성이 쌓이면 악기가 생겨 음양의 조화기 깨지게 된다. 다라서 통치자는 마음을 바로잡고 덕으로써 정치를 행하여 한편으로는 민심을 얻음으로써 민의 요구에 부응하고 동시에 음양의 기를 순화시켜 천재지변을 방지하고 天心=上帝心에 부합될 때 비로소 천명을 얻어서 통치권의 정당성을 가질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天理를 어겼을 때 그의 헉명론은 정당성을 갖는 것이고 조선왕조의 개창도 합리화될수 있었다.

결국 주자학적인 천인합일사상은 고려로부터 조선으로 天命이 바뀐 것을 합리화시키는데 이용되었고 또한 군주에 대하여 엄격한 도덕적 의무를 지움으로써 국왕에의 권력집중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관념화된 天에 公의 개념을 포함시키고서, 天을 대신해 모상과 벌 등의 모든일을 관장하는 인간의 군주은 公에 입각해서 그것을 행해야지 私的으로 행해서는 안된다고 함으로써 관념화된 天을 公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鄭道傳의 '혁명론'은 天때문이 아니라 公 때문에 그 정당성을 획득할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鄭道傳은 고려인이 발견한 인생론 내지는 행복론, 즉 세상에서의 재왕과 선단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정할것인가 하는 논리가 鄭道傳에게는 위와같이 재고됨으로써, 그것은 믿음에 대한 구제관을 제시하기 때문에 서구사의 중세를 결산한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비될 사상성을 지니고 있다."고까지 평가한 입장도 있는 것이다

鄭道傳에 있어서 理는 氣를 매개로 드러낼수 있기 때문에 그는 철저한 이기일원론의 입장에서 氣를 능동적으로 인정하는 독특한 철학적 입장을 가졌다. 아울러 氣, 用, 器의 능동성이 현실적으로 인정되면서 상대적으로 理, 體, 道는 오히려 관념화되었고 따라서 鄭道傳은 실재하는 인간, 인간의 감정, 인간의 '능동성'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한 대단히 현실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입장은 훗날 그의 역성혁명론을 정당화시켜주는 철학적 기반이 된 것이다.

 

2) 정치사상에서의 역성혁명론

 

鄭道傳의 정치사상상에 나타나는 역성혁명론을 살피기 앞서 유가사상사들이 내걸었던 민본 사상에 대해 우선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성리학에 대해서는 당중엽이래 농업생산력 발전에 따른 지주전호제의 확대라는 사회적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여 종래의 불교적 사유 구조를 극복하고 나타난 사상체계로 지주층의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관점이 강조되어 왔다. 즉 성리학의 기본시작인 명분론이 봉건적 신분 질서 유지를 위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명분론은 일체의 인간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예의로 구체화되어 현실사회에 주입되었다. 그 때문에 예의를 범한다는 것은 곧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중벌로 다스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성리학의 정치 사상은 봉건적 지주 계층의 지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명분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 유교에서부터 내려오는 민본 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정치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왕조가 추구한 이상 사회는 봉건적 신분 질서가 유지되는 유교적 민본 사회였고 그것은 성리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고 할수 있다. 곧, 유가의 궁극적 관심은 治國平天下에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사상으로서 지배층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민본 사상이었던 것이다.

民을 나라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민본사상은 원시유교, 특히 맹자의 위민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즉 맹자는 "민을 얻으면 이는 곧 천하를 얻는것"이라 하면서 민심을 얻기 위한 구체적 방도를 <<맹자>>전편에 걸쳐 누누히 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맹자의 입장이 종국에는 "임금에게 큰 과오가 있으면 諫하고, 반복해서 諫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왕위를 갈아버린다"는 '혁명론'으로까지 진전되어 송대 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의 이론은 명분론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론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평범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임금다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 '임금다와야 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맹자가 통치자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仁政'을 바탕으로 한 민본 정치였던 것이다. 맹자는 仁政을 행하는 왕도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德治로 들었다. 즉 형이나 법같은 제도로 다스리는 의미가 아닌, 德治에 의한 仁政이야말로 전통적 민본사상에서 추구했던 목표였고 또한 끊임없이 통치자에게 요구된 덕목이기도 했다.

鄭道傳은 이 입장에 누구보다도 충실하여 君主보다는 國家가, 國家보다는 民이 우위에 위치하므로 民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군주는 民을 극진히 존중하고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통치자의 모든 행동이나 명령, 법제 따위가 하나하나 民을 위하고 民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엣날에 군주가 관리들에게 권력과 녹봉을 준 것은 관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민을 보호하고 사랑하고 이롭게 해주기 위한 것이며 관리가 군주에게 보답하는 것도 군주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을 위한 보답이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군주나 관리는 民을 지배하는 권력자라기보다는 民을 위해서 일하는 봉사자로서의 의미가 더욱 뚜렷하다.

그런데 鄭道傳은 옛날의 통치자들과는 달리 현재의 통치자들은 통치자들로서의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관리가 民을 괴롭히는 벌레가 되었다고 개탄했는데 그의 민본 정신은 고려 말기의 부패 타락한 관료 지배층의 학정밑에서 신음하던 광범위한 民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려는 현실적인 개혁사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민이 나라의 근본으로 민을 사랑하고, 위하고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통치자에게 요청되는 도덕규범인 것이다. 그러면 만약 통치자가 위와같은 민본, 애민의 도덕규범을 저버리고 이에위배되는 악정을 행한다고 가정할 때 이를 구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여기에서 맹자의 혁명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혁명론에 의하면 통치권은 天命=天工=天理에 의해 부여되고 합리화되는 것으로서 天命이 떠나면 통치권은 소멸되고 다른 有德한 자에게 天命이 옮아가서 그가 새로운 통차지로서의 통치권을 부여받는다. 이와같은 과정이 곧 革命, 또는 易姓革命인 것이다.

그런데 鄭道傳은, 天心은 곧 民心의 반영이므로, 혁명이 하늘의 주체적인 의지로서만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는 민심을 얻느냐 못얻느냐가 군주의 통치권을 정당화 하느냐 안하느냐의 관건이 됨을 설명하며 民의 주체적인 동의여부가 군주의 통치권의 성공 혹은 실패를 가늠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군주가 덕을 잃어 民心과 天命을 잃었다고 가정할 때 새로운 통치자와의 교체방법으로 혁명사상에 입각한 왕위교체의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민심을 잃은 군주가 자기의 失德을 자인하고 스스로 다른 有德者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형식이다. 이것이 이른바 '선양(禪讓)'이며 역사적으로 볼 때 堯가 舜에게 讓立한 것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심의 추대를 받은 다른 有德者가 덕을 잃은 군주를 폭력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는 것이니 이를 '放伐'이라고 했다. 즉 周殷의 武王이 殷의 紂王을 무력으로 구축한 것이 그러한 실례라고 들었다. 전자가 가장 평화적이고 바람직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때는 후자의 방법이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鄭道傳의 혁명사상은 조선왕조 건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조선왕조의 건국 과정 그 자체가 그러한 혁명사상에 입각하여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에 의하면 새로운 왕 李成桂는 스스로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民心의 투대와 天命의 허락을 받아서 이른바 '應天順人'(하늘과 인민의 위지에 순응함)함으로써 왕위를 얻은 것이다. 李成桂가 민심의 추대를 받았다는 것은 위화도회군 당시 광범위한 軍과 民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과, 비록 인민전체가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50여명의 現職 및 閑良官吏가 스스로 李成桂 추대에 발위하여 최종적으로 당시의 국가의 최고정무기관이던 도평의사사의 승인을 거쳐 신왕으로 추대가 결정되었다는데서 증명했다. 한편 고려왕조가 民心과 天心을 잃었다는 것은 恭讓王代의 계속적인 災異의 발생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李成桂의 즉위는 따라서 정당한 '혁명'을 이룩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 방법에 있어 폭력적인 '放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장 이상적이며 평화적인 '禪讓'의 형식을 취했다는 데에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즉, 비록 李成桂일파의 강요에 못이긴 것이긴 하지만 공양왕은 스스로 失德을 자인하고 李成桂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러한 선양방식에 의한 새왕조의 건국은 본질적 면에서는 李成桂일파의 무력의 위압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왕조교체사상 최초의 일이며 그것을 실현시킨 사상적 기초는 다름아닌 민본 사상과 혁명 사상이었던 것이다.

 

3) 역성혁명론의 의의 및 비판

 

한편, 이러한 鄭道傳의 역성, 민본 이념은 맹자에게서 빌어온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교과서적인 이론으로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맹자의 시대와 다른 특수한 역사적 상황속에서 특수한 방법론과 연결된 것이라는 점에서 특수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맹자의 혁명 이론은 개인가 개인간에 이루어지는 禪讓과 放伐의 두가지 형식만을 말하였고 士나 民의 집단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鄭道傳은 士, 民의 집단을 주체로 설정하여 방벌의 수단으로 혁명을 수행하였고, 밀려난 자에게는 禪讓의 형식을, 집권자에게는 국민적 推戴形式을 밟았다. 말하자면 鄭道傳의 혁명이론은 맹자의 개인적 혁명이론을 집단적 혁명이론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력이양 과정에 推戴와 禪讓 그리고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鄭道傳의 민본, 혁명사상은 이전에 民을 통치수단으로만 보던 당시 위정자들의 정치인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사상에는 자연 현상을 빌려서 군주의 선정을 촉구한다는 理知的인 면이 있고, 또 실제로 變異를 계기로 선정이 베풀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나아가서는 惡政의 군주를 추방할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그것이 가진 일정한 진보성을 무시할수 없을 것이다.

한편, 鄭道傳의 민본, 혁명사상을 근대 민주 정치 사상과 비교해 본다면 형식상의 여러 차이점이 있다. 근대 민주 정치 사상에 있어서는 투표에 의해서 民의 의사가 측정되고 다수의 동의를 얻는자가 정치를 운영하며 그 임기가 제한되어 수시로 정권이 바뀐다. 이헤 미하여 전자에 있어서는 民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고, 다수지배의 원칙도 지배하지 않으며 정권의 임기도 없다. '혁명'에 의해 교체되는 것은 다만 군주 한사람일 뿐이다. 서구의 민주정권이 '계약정권'이라고 한다면 鄭道傳의 민본정부는 '신탁정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체제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속단이며 이를 위해서는 좀더 다각적인 비교와 고찰이 필요한 것이지만 鄭道傳의 민본사상은 당시 시대적 현실의 한계 한에서 최대한의 진보를 추구한 까닭에 나름대로 한계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3. 결론

 

鄭道傳은 국가,사회적으로 가장 혼란했던 고려말기에 태어나서 스스로의 뛰어난 능력에 힘입어 사대부 대열에 올랐으나 그의 혈통상의 하자와 경제적 빈곤은 사대부로서의 안락한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사대부와 하층민의 공유를 추구할수 있는 사회 개혁의 기반을 가다듬을수 있었다. 그리고 李成桂를 만남으로써 자신이 새롭게 가다듬은 유교주의적 이상국가의 이론을 마음껏 펼수 있었다.

鄭道傳의 사회, 정치사상은 한마디로 '周禮'를 모델로 하고 여기에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의 제도를 참작, 손익한 유교적 이상국가의 건설에 있다고 할수 있다. 그의 사상의 근본에는 민본사상이 깃들어있으며,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 또한 그것에서 찾는 동시에 새 왕조의 통치이념을 그것에서 출발하여 새로이 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조선시대의 인식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중기이후의 도학적 분위기에서 두 임금을 섬긴다는 鄭道傳의 이러한 모습은 비판받기 충분했다. 또한 그가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게 살해된 이후 역사상으로 그가 중요 인물에서 제외되고 그의 후손들이 고통을 받았던 것또한 그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 부정적 인식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또한 1970년대부터 실시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 전반은 조선후기 실학사상가나 17세기 중국의 선진적 사상가인 황종의의 사회 정치사상과 비교될 수 있을 만큼 근대적인 사상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14세기말이라고 시대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 鄭道傳의 사회 정치사상은 매우 선진적인 것이며 우리나라 사상사상 중세와 근세를 구분하는 분수령이라고도 할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앞으로는 좀더 체계적이며 본격적인 연구가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Ⅳ. 참고문헌

 

 

李碩圭, <鄭道傳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한국학논집>> 18, 한양대, 1990

 

韓永愚, <鄭道傳의 人間과 社會思想>, <<진단학보>> 50호, 1980

 

韓永愚, <鄭道傳의 사회,정치사상>, <<한국사론>>1권, 1973

 

金海榮, <鄭道傳의 反功利 思想>, <<정신문화연구>> 여름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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