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8
2009/8/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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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적과 동지의 갈림길/정몽주와 정도전  
영원한 적과 동지의 갈림길
정몽주와 정도전

李離和/국사학자

고려의 말기는 비록 외침은 없었지만 국내외에는 풍운이 급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신흥의 명나라에 원나라가 고목처럼 쓰러져 가고 있었다. 원나라와 형제 또는 사위의 관계를 맺고 있던 고려는 이에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나라 안에서는 불승들이 타락을 거듭하고 있었고, 토호들은 광대한 토지를 독점하여 농민들의 반란이 여기저기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왕실은 더욱 미약하여 권신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이런 시대 배경에서 신진의 학자와 벼슬아치들이 불교를 배격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새로운 사상 경향이 일어났고 개혁을 주창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이런 때에 정몽주(1337-1392)와 정도전(1337-1398)이 태어났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걷다가 끝내 정적이 되어 갈라진다.

흔히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정도전은 변절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글을 통해 이 점에 대해 좀더 관심 있는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출생과 동문수학
두 사람이 청소년기를 맞이할 적에 이색은 명망 높은 벼슬아치 또는 선비로 개성에서 이름을 떨치는 한편 유학적 교양을 갖추고 개혁을 도모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된 것은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벼슬살이에 나갔을 적인 20대 후반으로 보인다. 당시 이색은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어 많은 제자를 기르고 있었는데, 여기에 두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벼슬이나 학문으로 선배가 된다.

두 사람은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열심히 배우고 현실 개혁에도 눈을 떴다. 정몽주가 후배인 정도전에게 [맹자]를 선물로 보내주며 학문을 권장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고 의지하는 처지였다.

어쨌든 이들은 조정에서 촉망을 받으며 벼슬살이를 이어갔다. 이들은 신진 세력이기 때문에 권신들과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또 이들은 유학자 출신이었기에 불교도와도 분란을 일으켰고, 친명파였기에 친원파와도 정적의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은 불교의 폐단을 배척하기에 열을 올렸다. 정몽주는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고, 정도전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그 폐단을 지적했지만 불경을 읽으며 그 진리를 거부하지는 못했고, 정도전은 철저하게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따라서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이단을 배척하는 데에 좀더 철저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이 사례로만 보아도 정도전은 모든 일에 신념을 굳건히 가지고 급진적으로 나아갔으나 정몽주는 좀더 온건하게 현실에 대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첫 시련이 닥친 것은 1375년(고려 우왕 2)이었다. 당시 권신 이인임은 권세를 쥐고 흔들면서 친원책을 강력하게 표방했다.

이에 신진 세력들은 친명책을 내면에 깔고 맞섰던 것이다. 특히 정몽주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도전 등 10여 명의 후배들과 함께 글을 올려 이인임을 탄핵했다.

이로 해서 이들은 감옥에 갇혔다가 모두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고 정몽주는 경상도 언양에서, 정도전은 전라도 회진에서 각기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2년 동안 이들은 모진 고초를 겪었다. 때로는 추위에 떨고 때로는 주림에 시달렸다.

2년의 유배 생활 끝에 이들은 풀려났다. 정몽주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제학 등의 벼슬을 받아 계속 활동했다. 특히 이성계가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며 왜구의 침입을 막고 있을 때 정몽주가 조전원수로 활약했다.

1380년 왜구는 지리산을 넘어 운봉으로 밀어닥쳐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때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는데, 정몽주는 44세의 나이에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것이다.

이성계와의 운명적 만남
그 후에는 그는 신진세력의 중심인물로 활동을 벌이다가 1383년 이성계와 다시 북쪽 오랑캐의 방비에 나섰다. 이성계는 함흥에서 군막을 치고 동북면도지휘사로 군대를 호령하면서 무공을 크게 떨쳤는데, 이때에도 정몽주는 조전원수로 활약했다.

이성계의 명망이 올라가면 정몽주의 성가도 올라갔다. 학자 문신으로 무공까지 세우고 있었으니 정몽주의 인기는 가히 절정에 달했다.
이와 달리 정도전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와서도 벼슬을 못 받고 삼각산에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거나 제자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그곳 고관 출신의 미움을 받아 서재를 부평, 김포로 옮기며 유랑 생활을 계속했다. 이렇게 떠돌기 6년 만에 그는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 나섰다.

그는 이성계가 거느린 대군을 보고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로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고 감탄했다. 이 말속에는 이성계를 이용해 한번 세상을 엎어보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 아니한가?

이렇게 해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가 되었다. 이성계, 그리고 정몽주, 정도전의 이 만남은 끝내 운명을 달리한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한미한 가문에 태어난 자신, 조정을 벗어나 고통에 찬 나날을 보낸 그로서는 새로운 출세길을 찾아 나선 것이리라. 좀더 확대해서 말하면 이들과 함께 묵은 세력을 꺾고 혁명을 도모하여 나라를 바로 잡으려는 동기에서 였을 것이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다음해 머나먼 중국땅으로 함께 간다. 새로 선 명나라는 고려에 공물을 더 내라는 따위 압력을 가해왔다. 그 해결사로 사신 정몽주, 서장관 정도전이 나선 것이다.

이 일을 원만하게 끝낸 뒤, 정몽주는 계속 승진하였고, 정도전은 이성계, 정몽주의 도움으로 대사성 등의 벼슬을 누렸다. 세 사람은 이때 모든 일에 뜻을 맞추어 나갔다.

1388년 최영과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는 회군하여 개성에 돌아왔다. 그리고 최영 등 보수 세력을 제거하고 집권했다.

이어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신진 세력의 기반을 확실하게 했다. 이때 정몽주와 정도전은 각기 좌익, 우익으로 크게 이성계를 도왔다. 그 후에도 두 사람의 손발은 척척 맞아 떨어졌다.

정몽주가 신진 세력의 집권에 힘입어 불교를 배척할 적에도 정도전은 동조했고, 정몽주가 불교의 의식을 버리고 [주자가례]로 제사 의식을 정할 적에도 정도전은 철저한 협조자가 되었다.

이렇게 신진 세력이 집권하고 이어 개혁을 단행해나가면서 신진 세력 내부에서 또다시 틈이 벌어지는 사태로 번졌다. 세력이 커지면 또다시 나뉘어 싸움질을 하는 것은 영원한 권력의 속성이 아니겠는가?

끝내 운명을 달리하다.
이성계의 세력은 너무 커지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신진 세력들은 이성계의 명망을 업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곧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소외되고 있었다. 정몽주는 현실개혁을 도모하되 온건한 방법을 택했다. 다시 말해서 우파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타협적 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런 그의 성향은 곧 급진 세력에 의해 소외되었던 것이리라.

이에 그는 이들 급진 세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굳혔다. 그도 일전을 불사할 각오를 세운 것이다. 이성계파와 정몽주파는 권력 투쟁의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1392년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성계는 세자를 마중하러 황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그의 세력들인 대간에 말했다.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지금 병세가 위독하다. 그의 수하를 먼저 제거한 뒤에 이성계를 없애야 한다.”

이에 대간에서는 정도전를 비롯하여 조준, 남은 등에 탄핵했고 이어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성계가 벽란도에 이르자, 그의 아들 방원이 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렸다. 이성계부자는 황급하게 개성으로 돌아와 대책을 세웠다.

이방원과 이성계의 동생 이화, 사위 이제 등이 휘하 장사들에게 외쳤다. “이씨가 왕실에 충성하는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이다. 지금 몽주가 모함을 하여 악명을 덮어씌우니 후세에 누가 이를 알아 분별하리요.”

그러고는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성계의 조카사위 변중량이 이를 정몽주에게 알렸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갔다. 정몽주를 맞은 이성계는 전과 다름없이 대해주었다.

이방원이 이때 정몽주의 심중을 떠보려 했을 적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라는 단심가로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시조는 그때 부른 것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정몽주가 집으로 돌아가자, 이방원은 이때를 놓칠 수가 없다 하여 조영규 등 장사 대여섯 사람을 급히 보내 선죽교에서 그를 때려 죽였다.

이 사실을 들은 이성계는 짐짓 진노한 척 했으나 정몽주의 목은 저자에 내걸렸다. 그리고 남은 정몽주의 세력들도 제거했다.

정몽주의 죽음은 표면으로는 이방원의 음모로 이루어졌지만 그 배후에는 정도전 등이 있었던 것이다. 권력 앞에는 적과 동지도 없고 또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은 고금이 다 같지 않은가?

정몽주의 세력이 제거되자 이성계는 이제 걸릴 것 없이 왕위에 나갔고, 그 일급 공신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정몽주가 죽을 즈음, 예천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정도전은 정몽주의 탄핵을 받고 벼슬이 떨어져 목숨이 위태롭다가 정몽주가 죽고 난 뒤 풀려났다. 그리고 거리낄 것 없이 이성계를 떠받들고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권좌를 누렸다. 그러나 그도 결국 이방원의 손에 죽고 말았다.

두 사람은 처음 뜻을 같이하다가 끝내 합해질 수 없는 정적이 되었다. 정몽주는 옛 동문수학인 정도전을 귀양 보냈고 정도전은 스승 이색, 선배 정몽주를 제거하는 극렬성을 보였다.

역사에 남긴 두 사람의 행동
위의 과정에서 보면 정몽주는 조선조에서 역적으로 대접받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방원은 뒷날 왕(태종)이 되어 자기가 죽인 정몽주에게 시호를 내리며 복권시켰다. 그리고 동지였던 정도전을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가차 없이 제거했다 정도전이 오히려 역적으로 몰린 것이다.

그 후 정몽주는 충신의 표본으로 대접받았다. 효종은 늘 그의 단심가를 읇조리며 충신의 표상으로 삼았다. 이런 모습은 새로운 충신을 배출해내기 위한 이미지 조작이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정도전의 개혁 정치에 별로 평가를 내리지 않고 깔아뭉갠 것은, 자칫 이방원에게 그 잘못이 뒤집어 씌어질까 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뒷날, 이들 두 사람의 세력은 역사에 이어졌다. 정몽주를 잇는 세력은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져 사림파 또는 절의파로 불렸고, 정도전을 잇는 세력은 참여파 또는 어용파로 불렸다. 다시 말해서 정몽주계열은 성리학의 정통파로 추앙을 받고, 정도전계열은 정학의 말류로 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평가는 적절치 않다. 누가 진정 백성을 위하고 나라에 봉사했느냐를 따져 보아야 한다. 임금 한 사람 또는 한 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그 왕조에서는 기릴 수 있으나 역사에서는 다시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정몽주의 충절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권력의 암투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정도전에 대한 헐뜯음도 지나치게 이루어져 있으면서 그의 개혁 정치가 낮게 평가되어 있다.

권력과 현실 문제를 두고 인간은 얼마든지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시비는 좀더 역사 정신에 맞추어 가려야 할 것이다.

[역사산책], 종합출판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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