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7
이름: 엄광용의 역사기행
2009/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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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나주의 '백동마을'  

정도전과 나주의 '백동마을'(백룡산이보이누만)

2007.03.31 00:20 | 자유게시판 | ALT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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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과 나주의 '백동마을'

정도전(鄭道傳)(1327-1405)

▶ 정도전은 이성계보다 두 살 아래로, 1337년 경북 영주에서 정운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으므로 이색에게서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정몽주, 이숭인 등과 학문적 교류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역성혁명을 꿈꾸게 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 24세가 되던 1360년(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후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동갑인 정몽주와 매일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하였다. 1375년(우왕 1년) 이인임 등의 친원파와 맞서다가 유배를 당하였고, 유배가 끝난 뒤에는 한양에서 칩거생활을 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1383년 이성계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여 마침내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건국 이후, 『조선경국전』,『불씨잡변』 등을 저술하여 정치, 경제, 사회의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정도전의 영향력 확대와 방석의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은 급기야 사병을 동원하여 그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을 한(漢)나라의 장량에 비유할 정도로 자신의 공적과 역량을 자부하였다. 왕자들의 권력다툼 이후, 그에 대한 평가가 조선왕조에서 의도적으로 인색하였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과 그 기틀을 다지는 데에 가장 큰 이바지를 했던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고려 말의 역사적 격랑기를 헤쳐 온 사람들 중, 여러 각도에서 비판과 찬사를 함께 받고 있는 인물이다.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이고,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왕조의 설계자’다. 그런데 그는 조선왕조에서도 크게 환영받지 못한 인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그는 역사의 이면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정도전을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추세다. 과연 그가 없었다면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물음에서 역사의 해석은 새롭게 그를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정도전의 가슴에 혁명의 씨앗을 심어준 토양은 무엇일까. 나는 그러한 근원적인 물음을 가슴에 안고, 그가 34세의 젊은 나이에 유배당했던 나주 땅을 밟았다. 영산강이라는 젖줄이 나주평야를 낳았으며, 그로 인해 옛날부터 이곳은 기름진 곡창지대로 잘 알려져 있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처럼, 옛날부터 이곳은 전라도 지역의 중심지로 ‘천년 목사 고을 나주’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흔히 ‘유배지’ 하면 삼수갑산처럼 깊은 산골이거나 외로운 섬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정도전의 유배지는 나주평야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會津縣)에 속한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이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의 ‘백동마을’이다.

나주시 다시면에 가면 ‘다시여객자동차터미널’ 3거리가 있는데, 그곳에 ‘삼봉 정도전 선생 유배지’란 안내판이 붙어 있다. 터미널 맞은 편 길로 1.8km쯤 가다 보면 눈앞에 댐이 보이고, 그 못미처 왼쪽에 ‘백동마을’이 있다. 백동마을 입구에 다시 ‘삼봉 정도전 선생 유배지’ 안내판이 보이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1.2km쯤 들어가면 논 건너편에 유배지 표석이 서 있다.



유배지 표석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인가도 없고 대숲에 둘러싸인 묘터 같은 곳에 달랑 표석만 하나 놓여 있을 뿐이다. 표석에는 ‘소재동비(消災洞碑)’라 씌어져 있는데, 이곳이 옛날에는 ‘소재동’이란 마을로 정도전이 유배 와서 살던 집터라고 한다.


소재동은 나주시 다시면 백룡산(白龍山) 서편 자락에 안겨 있는 마을로, 옛날에 그곳에 ‘소재사(消災寺)’란 절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지금 소재동에는 사람이 살지 않으며, 이곳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1.2km 떨어진 ‘백동마을’에 가야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외진 곳이 되어버렸다.‘소재동비’에 적힌 비문을 보면, 당시 소재동에는 5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정도전은 1375년(고려 우왕 1년)에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황연(黃延)의 집에 거처를 정하였으며, 1377년(우왕 3년)까지 약 2년간 생활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정도전이 유배를 당한 것은 우왕 즉위 원년, 당시 권문세족과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다. 그는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지지하던 신진사류였는데, 공민왕이 시해되고 나서 권문세족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시련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우왕 즉위 원년 북원(北元)이 고려와 힘을 합쳐 명(明)나라를 치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친원파인 권문세족들은 당시 성균박사였던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친명파였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내가 북원 사신의 목을 베어오거나, 아니면 사신을 체포하여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하여 친원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당시 친원파의 거두였던 경복흥(慶復興), 이인임(李仁任) 등 권신들은 우왕에게 고하여 정도전을 귀양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세로 보아 망해가는 북원과의 친선보다 한창 일어서는 명나라와의 친선이 현명한 외교였다.

권문세족 중에서도 염흥방(廉興邦) 같은 사람은 정도전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여 배상도(裵尙度)를 동쪽 교외로 보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

“내가 시중에게 말하여 노여움이 조금 풀렸으니 천천히 기다리라.”

그러나 유배를 떠나기 전에 술을 마시고 있던 정도전은 젊은 기개로 분연히 일어나 말하였다.

“나의 말과 시중의 노여움은 각기 관점이 다르지만, 모두가 나라를 위한 일이다. 지금 왕명이 내려졌는데, 어찌 그대 말로써 귀양을 중지시킬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남기고 정도전은 유배를 떠나기 위해 말 위에 올랐다. 그가 유배를 떠나면서 쓴 ‘감흥(感興)’이라 5언절귀가 있다.


조국의 멸망을 차마 못 본 채 할 수 없어
충의의 심장은 찢어지고
대궐 문 손수 밀고 들어가
임금 앞에서 언성 높여 간했더라오
예부터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을 목숨이니
구차하게 살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느니


정도전의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시가 아닐 수 없다. 이 시는 옛날 중국 하나라 폭군 걸왕에게 충언하다 불로 지지는 포락형을 받은 용방과 은나라 폭군 주왕에게 충언하다 배를 갈라 심장을 도려내는 죽임을 당한 비간을 생각하며 지은 것으로, 자신도 그들처럼 의(義)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남향에 자리 잡은 유배지 터에는 햇살만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다. 옷깃을 스치던 소슬 바람만 대숲 속에서 수런대며 알 듯 모를 듯한 비밀을 속삭이고 있을 뿐이다. 정도전은 이곳 황연의 집 앞마당에 나와 뒤란의 대숲에서 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집 앞은 논이고, 그 건너는 작은 언덕이 수평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무런 볼만한 경치도 없는 그곳에서는 문자향이나 서권기를 들먹이는 것이 무색할 지경이고, 어쩌면 그 곤궁한 토양 속에서는 혁명을 꿈꾸는 길밖에 자기와의 소통 방법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문장이나 가다듬고 글씨로 마음을 수련할 만큼 인생의 연륜이 쌓이지 않았다. 그는 그런 호사취미로 만족할 수 없을 만큼 젊었고 패기가 있었다.

정도전이 유배지 소재동에서 쓴 <소재동기(消災洞記)>에 보면, 그가 기거하는 황연이란 농부 집으로 동네 사람들이 매일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서로 친구처럼 담소하며 지냈다고 되어 있다. <답전부(答田父)>라는 글에서 그는 농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까지 보여 전부(田父)를 ‘숨은 군자’라 부르며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얻은 것은 농사나 짓는 시골사람이라고 해서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깊은 깨달음이었다. 그들이 오히려 유학자들보다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국가의 조세제도에 대한 비판을 통해 건강한 시골 농민들의 눈에 중앙 관료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정도전의 마음속에서 혁명의 불씨가 살아난 것은 유배지에서 농민들과의 어울림을 통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농민들의 한과 설움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이론으로 무장한 유학(儒學)이 한낮 허위의식에 가득 찬 것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실천적 의지가 없는 이론은 한갓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었다.

정도전은 우왕 3년(1377) 7월 나주 거평부곡에서 고향인 영주(榮州)로 돌아왔다. 그러나 귀양살이가 완전히 풀린 것이 아니라 거주지가 조금 편한 곳으로 옮겨졌을 뿐이었다. 당시 나주에서 왜구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고향으로 옮겨왔으나, 그곳도 왜구 때문에 시달림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왜구를 피해 단양, 제천, 안동, 원주 등지로 피난길을 전전하였다. 그 뒤 겨우 귀양살이가 완화되어 비로소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이 같은 9년간에 걸친 유배와 유랑 생활은 정도전에게 있어서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혁명 사상으로 씨알을 굵어가게 만들었다. 정도전은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9년 후인 우왕 9년(1383) 가을에 당시 함경도에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왜구토벌로 명성이 높았던 무장을 찾아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혁명’을 모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건국과정을 노래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보면 이성계를 찾아간 정도전이 질서정연한 군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성계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정도전은 짐짓 ‘혁명’이란 말을 뒤로 숨기고 다음과 같이 거짓말을 하였다.

“동남방의 근심인 왜적을 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군영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소나무 위에다 시를 한 수 짓겠습니다.”

당시 정도전은 말을 마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 속에 자랐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 남겼네.


정도전은 이 시에서 ‘천명(天命)’을 말하고 있다. ‘몇만 겹의 청산’은 백성을 의미하고, ‘한 그루 소나무’는 그 백성들 가운데 우뚝 솟은 제왕을 뜻한다. 그는 이성계를 ‘한 그루 소나무’로 지칭한 것이다. 당시 이성계는 분명 그 시의 속뜻을 알아차렸음에 틀림이 없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이 이성계의 ‘장자방’이 되어 조선왕조 건국의 기초를 닦는 주역으로 등장한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역성혁명에 성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함경도 함주(咸州: 지금의 함흥)가 혁명의 불씨를 당긴 장소였다면, 전라도 나주에 있는 정도전의 유배
지 거평부곡 소재동은 혁명의 불씨를 탄생시킨 장소로 보아도 좋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처음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단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그 처음은 사라지고, 결과만 중요시되는 경향이 있다. 조선왕조 탄생을 위한 역성혁명의 불씨가 된 그 터전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인가도 없고 빈 터만 남아 있다.

정도전의 유배지 터를 떠나 논두렁길로 걸어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니, 소나무 두 그루만 우뚝하고 그 뒤의 대숲에선 여전히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가 무슨 비밀을 저희들끼리만 속닥거리고 있다. 그 소나무 두 그루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분신인가. 하늘거리며 머리만 흔들어대는 저 대숲의 수런거림은 그들만이 혁명을 모의하던 그 비밀의 소리일까.



*여행안내

호남고속도로 광산 인터체인지에서 13번 국도로 갈아타고 나주로 들어가도 되고,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무안 인터체인지에서 1본 국도로 갈아타고 나주로 접근할 수도 있다. 나주는 배로 유명하므로 나주배박물관에 들러보는 것도 좋다. 금성산의 정기가 모였다는 다보사, 홍어로 유명한 영산포, 장어구이집이 즐비한 구진포 등이 명소로 알려져 있다. 반남면과 다시면의 고분군, 나주향교와 나주 객사로 쓰던 금성관은 역사 유적 탐방 코스로 적격이다.
또한 거북선을 설계한 나대용장군도 이곳 문평(거평)에 사당이 있다.

출처<엄광용의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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