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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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9/25(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원본을 불태웠다고...  



‘삼국사기·유사’ 일제가 240자 변조



2005.09.08 23:55




<한국인 뿌리를 캔다-9>

가락국 역사 싹둑…



일본 서기에 꿰어 맞추기 작업“황제나라 안된다” 明감독아래 조선초 개작 아픔도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아픔을 아는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과거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영인본으로서 이미 상당부분이 일제에 의해서 더 조작되었었던 것임이 증명되었다. 필자는 내용이 모화사상으로 서술되었다거나 신라위주로 편협되게 기술하였다는 비난을 받아온 사학자 김부식과 보각국사 일연(一然)스님에 대하여 죄송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리(高麗)황조를 무너뜨리고 왕조로 격하시킨 이성계장군은 고리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로 있을 당시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기기로 하는 신하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고리까지 이어온 황실역사를 왕실역사로 격하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제기되었었다.



◇조선초 ‘신히나라’역사로 격하이성계는 사대주의 통치자를 자처하였으나 고명금인(誥命金印)을 받지 못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고려권지국사로 운명했다.

마침내 명나라의 사신이 감독하는 가운데 정도전이 총 지휘하는 가운데 진의귀 김거두 등 사학자 8명이 참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모화사상에 입각하여 신하나라가 황제나라의 역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명나라의 신하나라가 되기로 한 이상, 신하나라에 걸맞는 왕조역사로 상대(上代 : 고대조선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역사를 개작(1393~1394)한 다음 각각 3부씩 만들어 명나라에 1부를 개작증거로 진상하고 왕조조선이 2부를 보관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의 입회하에 김부식과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지었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원본을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조국의 황조역사를 마감하고 왕조역사로 출범하려던 서기1393년~1394년 사이에는 고리(高麗)황실을 무너트리고 나서 수습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부랴부랴 황조역사를 왕조역사로 개작할 수밖에 없었던 정도전의 서러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상대(上代)국가 역사는 당연히 황조역사로 꾸며져야 하고 조선의 상대역사는 명나라의 신하나라가 되는 조선의 급에 맞도록 모두 비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황조의 역사를 그대로 갖는다는 것은 명나라에 대한 반역이 되므로 서둘러서 개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가에 있어서도 “못난 자식을 두면 부모가 욕을 먹는다.”는 속담이 그대로 통한 셈이다.이후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중종7년(1512년)에 이계복을 통하여 두번째로 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계복이 개작한 것을 아예 동경대학으로 가져갔다. 조작된 일본서기에 꿰어맞추기에 유리하도록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중요부분마다 한자씩 한자씩 왜인답게 변조했다. 결국 본래의 내용을 바꾸어 엉뚱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왜곡한 것이다.일제는 식민통치의 구실을 마련하고 한일역사에 비추어 일본에 유리하도록 개작한 것이다. 일제는 광개토호태왕의 비문을 조작 하였듯이 삼국사기까지 날조한 ‘역사의 왜곡’을 자행한 것이다.



그렇게 변조한 후에 일제가 일본제국시대에 공수하여 보관하라 했던 것이다.

왜식 강단사학자들이 실증사학 표본의 유일한 정사(正史)로 여기어왔던 삼국사기, 삼국유사마저 변조라는‘파란만장(波瀾萬丈)한 과거사(過去事)’를 지닌 것이다.따라서 몇 차례 개작된 사실과 왜곡된 내용이라는 것 자체를 알 수 없었던 후손들은 원저자인 김부식과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모화사상가라며 부당하게 비난과 원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작과 변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분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日 변조전 삼국유사 고본 발견마침, 지난 1990년 12월 16일 경북대학교 도서관학 교수 남권희씨가 삼국유사 고본을 발견하였다. 이 고본은 1394년 그러니까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서 정도전의 지휘 하에 진의귀와 김거두 등이 개작 편찬한 바로 그 삼국유사 권2와 중종 때에 이계복이 재판한 권3 그리고 같은 시기의 것으로서 필사본 왕역(王歷) 권1·권2로서 현존하는 최고의 고본(古本)이다.

이 고본(古本)은 사대주의 원칙을 기본으로 개작하였기 때문에 원작과는 달리 크게 비하(卑下)된 점은 있겠으나, 일제의 손을 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주목을 끌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일제가 변조후 공수된 삼국유사에는 빠지고 없었던 가락국의 기록이 여기에는 있다는 사실이다.

가락국(駕洛國 : 금관가야로서 6개가야 제국의 중심국 즉, 中國)의 맹주 금관가야의 마지막 황제였던 구형황조는 신라의 침략을 받았을 때 “사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지 못할 전쟁에서는 백성의 생명을 보전케 하는 것이 국왕의 도리”라는 양민지도(良民之道)를 생각하고, “가야의 백성들을 노예로 삼지 않고 양민으로서 신라백성으로 받아주기로 하는 합의”를 하여 합병한 후에 방장산, 지금의 지리산 동쪽 기슭의 수정궁에서 기거하시다 붕어(崩御)하였다.



구형황제(仇衡皇帝)의 능이 있는 곳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왕산’이고, 능은 ‘대왕릉’이라고 하는 적석총으로서 만주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高句麗將軍塚)과 유사하다. 유품이 있었던 곳은 ‘왕산사(王山寺)015라는 신라 사찰이 있다는 기록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제4의 제국 가야사 복원기존의 삼국유사에서 제외되어 그동안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던 제4의 제국(帝國)인 가야사(伽倻史)에 대해서도 상당부분에 대한 재조명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1866년 병인양요 등 근세에 일어난 서양세력의 침략으로 많은 서고의 고서들이 불에 타버리거나, 프랑스 등 침략국에게 약탈당했다.

귀중한 사료가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 보관되어 있다. 국내소장사료와 민가에서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고서들은 일제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수거한 뒤 가져가고 동종의 30여만 권을 소각해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의 역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풍요 속의 기근을 맛본 셈이다.

결과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귀중본으로 보관중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는 옥산서당의 것을 일제가 동경대학으로 가져갔었던 것이며, 일본 현지에서 변조하고 조작한 후에 등사(謄寫)본으로 우리나라에 보내왔었다는 것이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일제가 고의적으로 탈자(빼버린 문자), 오자(틀리게 한 문자), 이자(전혀 다른 문자)로 조작하고 문질러서 보이지 않게 한 것 등 240여 자를 다시 복원함으로서 일제시대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해석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문제가 된 문자 240여자에 대해서 소위 역사를 강의하는 모 원로교수(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생출신)는 “그래도 240자 정도라면 일제가 별로 손대지 않은 것 아니냐?”면서 가볍게 간과해버리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역사 기록상 240여 자는 적은 수가 아니다.

일제의 날조방법을 보면, 전쟁사의 경우 기본 줄거리는 그대로 놔두고 ‘이겼다’를 ‘졌다’ 즉 ‘승전(勝戰)’에서 ‘패전(敗戰)’으로 그러니까 “승”자를 “패”자로 1자만 바꿔치기 하는 식으로 하나의 사건을 왜곡시켜버리기 때문에 문자의 수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그런데도 일본의 반도사관에 젖어있는 모습을 보면 연민의 정이 느껴지기도 한다.문자 240여자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사실들을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어서, 일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엄청난 승전의 전과를 올릴 수 있게 된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펜이 칼보다 무섭다’는 것을 실감하고 추진한 사업이 아니었겠는가?





/김정권<한민족정통사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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