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3
2010/2/7(일)
조회: 2749
articleView.html(Load:632)
조선의 정신 담은 ‘서울 4대문’ 활짝 열리다  
       
[문화기획]조선의 정신 담은 ‘서울 4대문’ 활짝 열리다 
2010년 01월 23일 (토) 11:36:27 문화팀 newscj@newscj.com
   
▲ 서울 도성의 형태.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서대문(돈의문), 북대문(숙정문), 동대문(흥인지문), 남대문(숭례문). 가운데는 보신각. ⓒ천지일보(뉴스천지)

사람들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완벽한 집을 원한다. 이러한 집을 지을 때 중요시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문’이다.

문이란 한 장소의 경계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 만들어 놓는 것으로 성문·대문·현관문·방문·창문·세간문·목재문·철재문·유리문 등 각 문의 기능과 위치, 재료나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나뉜다. 옛날부터 집의 구조에서 빠져서는 안 될 문들은 바람을 막아주고 햇빛과 공기를 통해 환기시키는 역할 등을 해오고 있다.

보통 집·마을·도시 외곽의 경계에 문을 세우는 것은 방어를 위한 목적뿐 아니라 권세를 과시하거나 그 장소를 소유하기 위한 목적도 함께 지닌다. 특히 사찰이나 궁전의 문은 그 장소를 다른 장소와 구분시키고 성역화하거나 위엄을 부여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옛날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대문의 위치 및 좌향(坐向)을 중시했는데, 이유는 거주자의 수복강녕(壽福康寧)과 부귀다남(富貴多男)을 위해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의 방향이나 위치, 또 크기에 따라 지닌 의미와 사상들이 각각 다르게 담겨 있는 문 중 ‘4대문’은 조선 왕조시대 서울 도성의 사방에 세운 성문으로 서울의 상징물이다. 따라서 4대문이 지닌 의미와 정신은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5가지 덕목 담긴 4대문과 보신각

‘한강 북쪽은 백악산이 자리 잡아 그 모습이 마치 용이 서린 것과 같고 범이 쭈그리고 앉은 형세를 이룬다. 남쪽에는 한강이, 왼편엔 높은 관령(關嶺)이 연접하며 오른쪽에는 멀리 바다가 둘러 있으니 그 지형의 형세는 동방에서 제일이요. 안팎의 겹겹이 싸인 산하는 비길 데 없는 요새지다.’

조선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서울(한양)의 모습이다.

나각순(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간사) 교수는 “옛 조선의 수도 한양은 세계 어느 수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지형조건을 모두 갖춰 하늘이 만든 도읍지”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서울은 국방에서 뛰어난 지리적 요건과 함께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고루 갖춘 도성이다.

이러한 한양에 1394년 천도하여 터를 잡은 조선 태조(太祖, 1335~1408)는 백성을 치리하는 방법으로 권력과 무력 외에 백성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공동체 의식을 섭렵하고 통치할 수 있도록 인성을 중요시했다.

그 뛰어난 사상치리를 엿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서울 4대문’이다.

태조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동·서·남·북의 4대문과 보신각에 담아 건축했다. 이때 태조는 그의 충신인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함께 4대문의 현판을 만들었다.

동대문은 ‘인(仁)을 흥하게 하라’는 뜻을 담아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의(義)를 북돋우라’는 의미로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禮)를 높이라’는 뜻으로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은 ‘맑고 정돈됨’을 기원하며 숙청문(肅淸門)이라 지어졌으나 중종 18년 때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을 담아 숙정문(肅靖門)으로 개명돼 두 명칭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 가운데 숭례문 현판만 세로로 걸려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강 건너 화산에 해당되는 관악산이 마주 하고 있어 그 불기가 도성을 위협한다 해 불길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나머지 하나는 숭례문 정문으로 중국 사신 등 귀한 손님이 드나들게 되므로 서서 맞이한다는 예의를 표한 것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 4대문 중 유일하게 세로로 걸린 숭례문 현판. (출처:문화재청)

특히, 동대문 부근이 지형이 낮고 적을 방어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한 태조는 이를 보안하기 위해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흥인문을 옹성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투는 끊이지 않았고 이후 1869년 고종은 흥인문의 지형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용의 형상을 한 ‘지(之)’를 붙여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개명했다.

   
▲ 현재 보물 제1호로 지정된 흥인지문. (출처:문화재청)

북대문은 태조 5년 도성 축조 때 건립된 문으로 백악산(현 북악산)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한다. 하지만 태조 13년 경복궁의 좌청룡 지맥을 보존해야 한다는 풍수지리 사상에 의해 문이 닫혔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 성곽뿐 아니라 서울 성곽 밖으로 북한산성과 탕춘대(蕩春臺)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3개의 성을 이은 것이 지금의 도성이다. ‘지(智)’는 이때 지어진 탕춘대 성문에 들어가며 ‘지(智)혜를 널리 전파하라’는 의미로 홍지문(弘智門)이라 세워졌다.

마지막 덕목인 ‘신(信)’은 고종 때 ‘믿음을 널리 울려라’라는 뜻으로 ‘보신각(普信閣)’을 세워 수도 안의 5대 덕목을 채웠고 당시 백성들은 문을 드나들며 이 다섯 가지 덕목을 마음에 기렸다.

한편, 4대문은 저마다 상징적인 동물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 사신사(四神沙)라 한다. 동대문은 좌청룡, 서대문은 우백호, 남대문은 남주작, 북대문은 북현무를 뜻한다. 그 가운데 조선실록 기록을 보면 우청룡·좌백호라는 말이 표현돼 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좌청룡·우백호를 경복궁 중앙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왕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으로 다른 뜻을 가진 것은 아니다.

◆4대문·성곽이 완성되기까지

4대문의 완성과 철거, 그리고 복원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태조로부터 성터 건축의 모든 것을 위임받은 정도전은 직접 현장을 방문해 18km에 이르는 터를 만들고 태조 5년부터 성곽건축을 시작한다. 1차 공사는 백악신과 5방신에게 도성 축조를 고하는 개기제(開基祭)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11만 명이 넘는 농민을 동원해 49일간 진행됐다.

하지만 1차 공사는 추운 날씨에 서둘러 진행됐기 때문에 축성이 견고하지 못해 폭우로 일부 구간이 무너지는 등 피해가 많아 태조는 다시 그해 8월 2차 공사를 49일간 진행했다.

이러한 두 차례에 걸친 공사를 통해 세워진 성곽과 4대문은 현재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 것이다. 태조 때는 토성(土城)으로 지어졌다면 세종 때 와서는 석성(石城)으로 지어진다.

그 뒤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쟁으로 무너진 성곽들을 숙종 때에 다시 재정비하게 되는데, 이때는 농민을 동원하지 않고 군인들을 동원해 더 잘 다듬어진 돌로 짓게 된다.

◆다시 살아나는 조선의 정신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오랜 전통을 간직해 온 성터는 일제침략에 의해 급격히 훼손됐다. 일제는 한국의 주권을 빼앗은 뒤 정신까지 빼앗기 위해 먼저는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의 원형을 변질시키기 위해 총독부 건물을 짓고,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경복궁 정문 광화문이 총독부 앞을 가린다는 이유로 위치를 옮겨버리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상징이면서 오랜 전통을 간직해 온 성곽을 도시계획이란 명목 아래 파괴하기 시작했다.

먼저 교통의 요충인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 주변의 도성 일부분을 헐어 교통로로 활용했고, 숭례문 북측 성곽을 시작으로 서소문, 흥인지문, 광희문, 창의문, 혜화문까지 차례로 성곽을 헐었다. 특히 돈의문은 형체도 없이 철거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1908년 흥인지문 부근의 북쪽, 남쪽 성벽이 철거됐고 1926년 성곽을 허문자리에 일본 왕세자 결혼을 축하하는 ‘경성운동장’이 건설되기도 했다.

게다가 서울성곽은 광복 후 한국전쟁을 겪으며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성곽 주변에 무허가 건물이 마구 들어서게 되면서 더욱 파괴됐다. 이후 복원의 계기가 됐던 것은 청와대 무장간첩 습격사건이었다.

습격이 서울성곽 근처에서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정부는 국가안보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로 추진해 일부 복원하게 된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쁘고 물질만능주의시대에 접어들면서 복원은 중단됐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문화적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자 2008년 서울성곽의 복원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복원의 어려움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일제에 의해 성곽을 허물고 지어진 동대문운동장 철거는 많은 야구인들과 주변 상인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지난 10월 성곽복원과 조선의 이간수문이 복원돼 일부 개장되면서 국민들에게는 역사적 가치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대문 중 유일하게 형체가 없던 돈의문도 최근 복원이 추진됨으로써 2013년이면 돈의문과 함께 모든 성곽이 복원을 마쳐 그때서야 비로소 웅장한 서울 도성의 자태를 볼 수 있다. 또한 완공과 함께 서울시는 서울성곽을 북한산성, 탕춘대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일괄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 화재가 나기 전의 숭례문(국보 제1호) 모습. (출처:문화재청)

한편, 4대문 중 유일하게 오랜 원형의 모습과 위용을 갖추고 있었던 숭례문이 2008년 2월 방화사건에 의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고 말았다. 다행히 최근 6명의 장인을 선정해 숭례문 복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국보 제1호가 훼손됐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나각순 교수. ⓒ천지일보(뉴스천지)
나각순 교수는 “서울 도성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지형조건, 교통, 원형의 모습을 완전성에 가깝게 형상화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복원에 여러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이지만 시민 모두와 공동의 선을 찾는 작업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시민들도 문화재 가치를 고려해 적극 협조해 줘야 복원이 순조롭다”고 강조했다.

또한 “복원이나 형체로 존재하는 가치에서 끝난다면 의미가 없다”며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의 팽배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 시대에 성문에 담긴 의미의 기본 정신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복원은 가치가 있고 중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이 같은 교육적 효과는 “우리민족이 건전하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는 희망도 내걸었다.

나각순 교수의 희망과 함께 최근 우리 문화재 복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고, 깎인 벽을 메우는 이러한 일들은 일제 식민지를 통해 무너진 우리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 깎여진 우리의 자존심을 쌓는 계기가 될 것이다.

조상들의 정신과 사상이 깃든 서울 4대문의 복원과 동시에 우리 마음속에 무너져 있을 5가지 덕목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또한 다시 복원되길 기대한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