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9
2010/11/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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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소인’으로 본 이숭인 통곡  

정도전을 ‘소인’으로 본 이숭인 통곡

정도전 한(恨)의 정치에 물든 지배층

박재목 칼럼니스트 (2007.10.12 10:03:57)

 

1392년 조선은 나라를 열었다. 고려 말 위대한 사상가, 지식인, 규범적 관료였던 도은(陶隱) 이숭인은 귀양지에서 정도전이 직접 보낸 심복 황거정(黃巨正)의 칼을 맞았다. 그는 죽기 직전 모질고 아픈 긴 꿈에 빠져 있었다.

슬픈 산새가 울고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칠흑같이 캄캄한 어느 깊은 가을밤…. 도은(陶隱)은 시름에 겨워 문득 졸고 있는데, 혼백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라 이윽고 옥황상제의 궁궐에 이르렀다. 사방 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으므로 서슴없이 안에 들어가 어전(御前)에 앉으니 옥황상제의 낯빛이 그지없이 부드러웠다. 이숭인은 미려한 목소리로 알현했다.

「하계에 사는 미천한 신하가 마음에 맺힌 한을 풀길이 없어 이렇게 엎드렸나이다. 제가 겨우 강보를 면하면서부터 반드시 옛사람을 본받아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인(仁)을 이루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을 따랐고, “뜻있는 선비는 시궁창에 있음을 항상 잊지 않는다.”고 맹자가 되새긴 공자의 말씀을 또한 힘을 다해 지켜 왔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만이 전부였고, 그 밖의 딴 생각이 있지 않았사온데, 학문을 그르치고 시속에 아첨하는 잡스러운 무리들이 저를 도마 위의 고기같이 난도질을 하고 있습니다. 하오나 아첨하고 중상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의 극성은 급기야 제 스스로를 망치게 할 것인즉, 제 무슨 유감이 있을까마는, 그러나 그 뜻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아 초연하게 높이 올라 멀리 내려다보며 오직 황은(皇恩)과 인덕(仁德)을 되새기며 처박혀 있을 뿐이 온 데 이 길 그르다고 하시면 다시 또 어디로 가야 하오리까.」

「지극히 현명하신 옥황상제님 원컨대, 침몰된 땅에서 이 몸을 건져 주옵소서.」

이숭인은 비처럼 쏟아지는 눈물로 가슴이 메도록 조아리니, 가엾이 여기신 옥황상제의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오호라 그대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학문하는 길이 유독 귀하다고 함은 세상 추세에 따라 변통할 줄 알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해가 중천에 뜨면 반드시 서쪽으로 기울고, 달이 차면 이지러지고, 하늘의 도리 또한 늘 같지 않은 것인즉, 인간들이 꾀하는 일에 어찌 곡절이 없으랴.」

「세상 사람들이 모난 것을 싫어하는데, 그대는 어찌 매사에 원만하지 못하며, 세상이 온통 시속으로 치닫고 있는데, 그대 어찌 홀로 고고하려 하는가. 그대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이 또한 그대 탓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위험에 들지 않고 일신을 편하게 하려거든 그 고집을 버리고 세상 추이에 따라 사는 게 어떨꼬.」

이러한 이숭인의 꿈으로 양녕대군은 온 몸을 적시는 땀과 으스스한 마음에 시달렸다. 또한 지난번에는 아버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을 무참히 살해하는 꿈과 태종의 심복 이숙번이 머리가 잘린 채, 그 몸뚱이가 피를 쏟으며 세자인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는 끔찍한 꿈에도 시달렸다.

이숙번은 이미 태종의 눈 밖에 나 귀양 간 상태에서 죽임을 당했다. 양녕은 이러한 섬뜩한 꿈속의 장면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치를 떨었다. 양녕은 얼마 전 자신이 아버지 태종을 알현했을 때 “조선은 왕권 중심이 아니라 백성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때 충녕(세종)의 장인 심온, 하륜 등은 따가운 시선을 허공에 돌리면서 태종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순간 양녕도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백성 중심의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정도전의 최후를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아버지 방원은 신권 중심, 백성 중심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핑계로 권력을 탐하던 정도전의 야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숙번 등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습격하여 살해했다. 또한 이복동생 세자 방석을 폐위시켜 귀양 보냈다가 방번과 함께 죽여 버렸다.

국민소득 1392년 1달러, 500년 뒤 1910년도 1달러

양녕대군은 백성이 이밥<李씨 조선이 주는 밥, 고려 말 토지개혁 등으로 백성 중심의 나라를 의미>으로 배를 채우고 세상을 아름다운 풍악소리와 미소로 장식할 수 있는 민초의 나라를 자신이 펼치고 싶었다.

양년대군은 정도전 같이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권력을 행사하고 싶었다. 정도전은 평소 자신의 좋지 않은 집안내력을 노비의 피가 섞였다며 비난하면서 우습게보던 고려의 권문세가. 집권 승려, 왕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했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본 것이 아니었다. 정도전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고 다녔다. 그는 이성계를 개혁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하면서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하여 권력을 잡았고, 겉으로만 백성 중심의 나라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조선을 세운지 7년째, 백성 중심의 나라를 기획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세자 책봉 등에 적극 가담했던 정도전은 자신을 작은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르던 이방원의 철퇴를 맞고 자신의 집에서<지금의 종로구청과 이마빌딩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이름을 붙인 경복궁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정도전은 숨이 넘어 가는 순간에 자신의 한(恨)을 풀기 위해 억지로 죽인 도은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의 얼굴이 그의 가슴을 도려내고 있음을 느끼고 역사의 아이러니에 몸서리쳤다.

「이런 것은 아니었는데…….」

결국 정도전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후회했다. 1392년 7월 조선을 세우고 한 달 뒤,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을 바라보는 39세였다. 그리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태종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이와 같이 조선은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의 소지를 가지고 출발했다. 따라서 정도전에게 있어서 이미 백성의 삶과 그들의 인간적 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의 서로 다른 계산 방법으로 백성을 위한다는 당초의 개국 이념, 즉 이(李)밥은 이미 권력의 피비린내로 물들었고, 오직 ‘그들만의 권력의 잔치’만 난무했다.

누가 한(恨)으로 정치하라 했는가

도은(陶隱) 이숭인, 대학자이자 문장가로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했고, 성균사성(成均司成)이 되어 정몽주와 함께 고려실록을 편수한 백성 중심의 고려의 마지막 관료였다. 한번은 고려 조정중신들이 모여 평소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즐거운 것을 얘기하기로 했다.

「산방(山房) 고요한 집 밝은 창 아래 깨끗한 책상에서 향을 사르고 좋은 사람과 마주 앉아 차를 달이며 시를 답하여 짓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오」

이숭인이 이렇게 말하자,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겨울 첫 눈이 내릴 때 몰고 매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두 사람은 정치 역정만큼 대조적인 성격을 가졌다. 정도전은 이숭인을 정말 미워했다. 정몽주도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의 권력접근과 야욕을 이숭인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겉치레의 백성 중심이라고 질책하는 도은(陶隱)을 직접 제거하고 싶었다.

결국 도은(陶隱)은 정도전의 야망으로 귀양 가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는 정도전에게 송악산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 한 병과 차 한 봉지를 보내면서 그에게 겸손한 삶과 백성 중심의 정치를 펼칠 것을 진정으로 권유했다.

이숭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고려 삼은(三隱)을 다툰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문장은 전아(典雅)하여 중국의 명사들도 탄복했다.

그러나 정당문학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동지사사에 전임하였으나 강직한 성격으로 인하여 친명파, 친원파 양쪽의 모함을 자주 받으며 여러 번 옥사(獄事)를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정도전은 자신이 이미 귀양 보내어 모든 힘이 빠진 이숭인을 용서하지 않고, 또 다시 과거의 원한으로 그의 심복 황거정(黃巨正)을 시켜 귀양지에서 살해하고 말았다.

이처럼 정도전에게 있어 역사는 힘을 가진 자의 놀이터에 불과했다. 정도전은 권력으로 피의 역사를 만들어 더욱 더 ‘시간의 보복’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이숭인을 죽인 정도전은 1398년 이방원의 칼을 받고 숨을 거두면서 자신에게 ‘소인’으로 살지 말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이숭인의 미소를 그려보면서 일그러진 역사의 반복을 탄식하고 또 후회했다.

사라진 잠룡(潛龍) 양녕대군

백성을 향한 도은 이숭인의 학문과 인품을 장인 김한로를 통하여 접한 후 양녕대군은 그의 사상을 깊이 사랑했다. 그래서 이숭인의 백성 중심의 정책을 쫒고 그 뜻을 어떠한 경우에도 굽히지 않을 것을 장인 김한로 앞에서 다짐했다.

무릇 국가는 그 주인인 백성이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이숭인의 소신을 양녕은 항상 존경했다. 이 말은 정도전도 정책의 전면에 내 세우면서 조선을 설계했다.

양녕은 정치적으로는 배원친명(排元親明), 학문은 이제현·이곡·이색의 자율적 경학 계통의 주자학적 수양론을 수용했다. 또한 불교를 배척하는 것에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하였다. 왜냐하면 불교의 사부대중(四部大衆)<남녀 수행승인 비구·비구니, 재가(在家)의 남녀 신도 우바새(優婆塞:거사)·우바이(優婆夷:보살)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의 평등사상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또한 양녕은 경학을 중심으로 윤리와 도덕과 관련된《소학(小學)》과《대학(大學)》을 강조했다. 특히 학문의 단계는《소학》에서 시작하여《대학》으로 나아가는 것에도 적극 동조했다. 그리고 문장에도 뛰어나 명나라 태조도 탄복할 정도였다.

그러나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될 때 이숭인을 그 일당으로 몰아 유배지 남평(현재 나주)에서 처단한 정도전을 이번에는 아버지 태종이 장살로 죽인 사실에 양녕은 치를 떨면서 저주했다. 또한 양녕은 조선 초 새롭게 등장한 신흥 권력자들이 갖은 불법행위를 규탄하고, 백성들을 약탈하기 시작하는 것과 이를 묵인한 태종과 정도전의 부도덕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권력에 다가선 자 권력의 칼날에 졸하니

한민족의 웅대한 역사에 본격적으로 구멍을 내기 시작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아무 죄 없는 정지상을 묘청의 난에 연루시켜 임금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먼저 죽여 버렸다.

절에서는 불경소리 그치고 琳宮梵語罷(림궁범어파)
하늘은 유리처럼 고와라 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

정지상(鄭知常, ?~1135)은 신동이었다. 그는 고려 12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역학(易學)·불교(佛敎)·노장사상(老莊思想)·글씨·그림에도 통달했다. 그래서 김부식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당대의 위대한 학자이자 시인인 정지상을 시기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위의 시(詩)에 반해 그 시구를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으나 무식하다는 핀잔과 함께 거절당했다. 그러자 김부식은 자신의 정치적 동지였던 척준경과 금나라를 정벌하여 한민족의 위대한 꿈을 펼치자고 외치던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을 정지상과 엮어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래서 우리 역사는 수많은 ´역사의 구멍´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정치는 한(恨)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도전이 이숭인을 죽인 것과,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것처럼 지금 자신의 소인(小人)같은 한(恨)을 풀라고 백성이 권력을 위임한 것이 아니다. 대신에 권력은 미래와 가치와 인간적 사랑에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도전의 ´치장 정치´와 ´핑계 정치´에 물들어 있다. 겉으로만 백성을 위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그 권력으로 갈등의 잔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정도전의 권력 마수에 중독되었다면 빨리 그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쩌면 정도전 예찬의 중독이 우리 정치를 국민에게서 멀어지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해독제´로 작동되어야 한다. 결국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17대 대통령에게 바라는 마지막 희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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