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7
2009/8/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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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황제국이 될 수 있다, 정도전.  

조선도 황제국이 될 수 있다, 정도전.
daaknite 2009.07.16 12:22  

 

정도전(鄭道傳)의 부친은 형부 상서를 지낸 정운경이지만 모친이 서녀였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는 데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그 마저도 고려 우왕 1년(1375) 몽골(원)이 명 주원장에 의해 대륙에서 사막으로 밀려난 북원의 사신 접대를 거부했다가 지금의 전남 나주 지방의 거평 부곡에 유배됩니다. 이것은 그가 신념에 따라 친명 외교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은 부곡 주민들의 환대에 감격해 하며,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대다수 농민들이 몰락하여 권세가에게 땅을 빼앗겨 전호(소작인)가 되거나 노비가 되는 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왜구의 창궐과 권세가들의 박해 때문에 정착하지 못하던 와중에 우왕 9년(1383) 함경도로 가서 이성계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정도전의 혁명 의지를 후원해 줄 무력과의 결합으로 다시 벼슬길에 오른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중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으로 어수선한 정국에서 토지 개혁을 실시합니다. 우선 그 해 7월 조준이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상소와 간관 이행, 전법판서 조인옥 등이 연이어 사전 개혁을 주장하게 만들고, 드디어 공양왕 2년(1390) 기존의 모든 공사전적(公私田籍, 토지문서)를 불태운 후 이듬해에 과전법(科田法)을 반포합니다.

 


이성계가 다음 해에 조선을 개창하는 데에는 과전법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전법의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새 왕조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려의 옛 신하들도 이러한 농민들의 움직임을 봉기로 내몰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토지 개혁이 조선 개창의 원동력이었고, 그 토대는 정도전이 마련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존의 토지제도를 개선하는 과전법을 시행한 데에서 보이듯이 정도전은 여타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보수적이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비록 친명 외교를 주장하다가 유배까지 갔지만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사대주의에 반대되는 성향의 요동 수복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정도전이 개국 직후 1392년 10월 계품사 및 사은사로 명에 가는데, 겉으로는 조선의 개국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요동으로 보내 뇌물로 현지 장수를 포섭하며,  여진족을 회유하는 일종의 첩보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여진족 가권(家眷, 한 집안에 사는 식솔) 500여 명을 조선으로 데려 오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주원장이 알아채고 여진인을 모두 돌려보낸다면 조선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협박보다는 요청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조선이 여진족과 연합하여 북벌에 나선다면, 이제 막 건국하여 시국이 불안정한 명으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를 알았는지 정도전은 태조 2년(1393) 11월 구정(毬庭, 격구를 하기 위한 넓은 마당)에 군사들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실시합니다. 이에 명은 태조 5년 2월 표전문 사건을 빌미로 사신을 억류하고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정도전과 북벌에 동참했던 남은이 군사들의 훈련과 군량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 추모성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하다고 하자 정도전은 태조에게 외이(外夷)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하고, 남은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외이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은 중원을 정복했던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 등을 뜻합니다.

 


정도전은 조선군이 압록강을 넘으면, 조선과 명 중 하나가 끝장나는 전면전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이성계에게 '동명왕의 옛 강토 회복', 즉 한반도에 만족하는 왕이 아닌 황제의 길을 제안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재차 명의 정도전 인도 요구가 있고, 표전문 문제로 억류한 조선 사신 정총, 김약항, 노인도를 사형에 처합니다. 정총이 이성계의 부인 현비 강씨의 승하 소식에 흰 상복을 입었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사건은 이성계와 정도전을 분개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태조 6년(1397) 12월 22일 동북면 도선무순찰사가 되어 함경도 지역에서 전쟁 준비를 실시합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이란 대의명분으로 각 왕자와 공신들이 소유한 사병을 혁파하여 단일화시켜 관군으로 편재하려 했지만 왕자들이 진법 훈련에 사병들을 참가시키지 않자 이성계는 방간, 방의, 방원 등 왕자들과 그 부하 장수들을 태 50에 처합니다. 그러자 이러한 사병 혁파에 불만을 가진 방원과 방간 등이 태조 7년(1398) 8월 쿠데타(제 1차 왕자의 난)를 일으킵니다. 이때 정도전은 남은의 첩 집에서 이직과 술을 마시다 척살됩니다. 또한 정도전 외에 북벌을 주장했던 인물들은 모두 살해되어 요동 정벌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으며, 그 뒤 250여 년쯤 흘러 효종에 의해 다시 거론되기 전까지 묻혀 있게 됩니다.

출처 : [기타] 이덕일 著,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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