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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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1(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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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연보  

 

2003.11.02 16:07

 

정도전(1342∼1398)

 

1세

1342(충혜왕 복위 3)

· 홍복판관으로 재직중이던 정운경을 아버지로 하고, 영주(榮州) 출신의 산원(散員) 우연(禹淵, 혹은 禹延)의 딸을 어머니로 하여 3남 1녀 가운데 맏이로 출생함. 동생은 도존(道存, 혹은 道尊)과 도복(道復). 아마도 도(道)를 전하고, 도를 간직하고, 도를 회복하라는 뜻으로 3형제의 이름을 지은 듯함. 호는 삼봉(三峰)이며, 자는 종지(宗之).

 

18세

1359(공민왕 8)

· 아버지 정운경이 형부상서에 오름.

 

19세

1360(공민왕 9)

·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이 무렵 부인[최씨]을 맞이함.

 

20세

1361(공민왕 10)

· 장자 진(津) 출생.

 

21세

1362(공민왕 11)

10월 진사시 합격.

 

22세

1363(공민왕 12)

봄 충주목의 사록(司錄)에 임명됨.

 

23세

1364(공민왕 13)

여름 개경에 돌아와 전교주부(典校主簿, 종7품)에 임명됨. <고의(古意)>등 시를 씀.

 

24세

1365(공민왕 14)

· 왕의 비서직인 통례문지후[정7품]로 전임됨.

 

25세

1366(공민왕 15)

1월 부친상을, 12월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인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살이 시작.

· 두 동생과 남방 학자들을 가르침. 이 무렵 정몽주가 ≪맹자≫를 보내주어 정독함.

 

28세

1369(공민왕 18)

· 삼각산(三角山) 옛집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 <원유가(遠遊歌)>를 지어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위해 지은 영전(影殿) 건설 공자를 풍자함.

 

29세

1370(공민왕 19)

여름 성균관을 중수하여 이색·정몽주·이숭인·김구용 등의 학관을 임명하여 성리학을 강론한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에 다녀옴.

추석 이존오(李存吾)가 부여에서 삼봉으로 오자, 그를 위해 시를 써줌.

 

30세

1371(공민왕 20)

7월 신돈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옴.

· <추야(秋夜)> 등의 시를 씀. 성균관 학관들의 천거로 성균박사[정7품]에 임명되어 성리학을 강론하기 시작. 제사의식을 관장하는 태상박사(太常博士)에 특진함. 그 뒤 예의정랑(禮儀正郞, 종6품)으로 옮겨, 성균·태상 두 곳의 박사를 겸임.

 

33세

1374(공민왕 23)

9월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 사실을 명(明)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친원파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사게 됨.

 

34세

1375(우왕 원년)

여름 성균사예·예문응교(정4품)·지제교 등을 제수받고 문한직을 수행함.

· <감흥>이라는 시를 씀. 이해에 북원(北元) 사신이 명을 협공하기 위해서 입국할 때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하자, 정도전은 사신의 목을 베겠다고 하면서 저항하였는데, 이 일로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현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으로 귀양감.

12월 유배지에서 ≪심문천답≫ 2편을 저술함. 북원 사신을 배척하다가 귀양도중 죽은 박상충(朴尙衷)을 위해 <곡번남선생문>을 씀.

 

36세

1377(우왕 3)

· 유배지에서 <금남잡영>·<금남잡제> 등 여러 시문을 지음.

2월초 예에 따라 고향 영주로 가는 길에 장성 백암산 정토사 무열장로의 부탁으로 <정토사 교류기>를 지음.

· 고향[영주]에서 4년간 복거하는 중에 왜구의 침입으로 단양·제천·안동·원주 등지로 피난.

 

39세

1380(우왕 6)

· 진주인 하유종(何有宗)을 위해 <매천부(梅川賦)>를 지음.

가을 편한 곳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자 삼각산 삼봉재로 돌아옴.

 

40세

1381(우왕 7)

· 재상들의 핍박으로 집이 헐리자 삼각산[북한산]·부평·김포 등지로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학문과 교육에 종사함. 이곳에서 후일 창왕의 왕사가 된 승려 찬영(餐英)과 교유함.

 

42세

1383(우왕 9)

가을 함경도 함주막(咸州幕)을 찾아가 당시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와 만나 혁명을 결의하고 김포로 돌아옴.

 

43세

1384(우왕 10)

여름 다시 함주에 다녀옴.

7월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됨. 9년 만에 벼슬길에 다시 오름.

· 이해에 서장관이 되어 성절사인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 금릉에 가서 우왕승습의 승인과 시호를 요청함.

 

44세

1385(우왕 11)

4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즉시 성균좨주[3품]·지제교를 제수 받음.

· 이해에 왕사인 태고 보우가 열반하자 그의 비문을 씀[양주 용문산 사라사]. 좌주 유숙(柳淑)을 위해 <제문희공문>을 씀.

 

45세

1386(우왕 12)

6월 명나라를 다녀온 정몽주를 위해 <포은봉사고서(圃隱奉使藁序)>를 씀.

 

46세

1387(우왕 13)

· 외직을 요청, 남양부사로 나가 혜정을 베품.

 

47세

1388(우왕 14, 창왕 즉위년)

6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잡자 왕의 비서직인 밀직부사[3품]로 임명되.

8월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과 대사성[3품]에 오름.

10월 <도은문집서(陶隱文集序)>를 씀.

· 이해에 의학서인 ≪진맥도결(진脈圖訣)≫을 지음.

 

48세

1389(창왕 원년, 공양왕 원년)

2월 예문관 제학이 됨.

4월 조준·윤소종 등과 더불어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시작함.

11월 이성계·조준·심덕부·지용기·정몽주·설장수·성석린·박위 등과 의논하여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가짜로 몰아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맞아들임. 이 공으로 12월 29일 봉화현 충의군에 피봉되고, 수충논도좌명공신의 호와 100결읠 토지를 받음. 재정을 담당하는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승진함.

12월 새로 지은 도평의사사의 <청기(廳記)>를 지음.

 

49세

1390(공민왕 2)

4월 정당문학[종2품]에 제수됨.

6월 하절사로 명에 가서 윤이·이초의 무고[이성계가 명을 치려 한다는 모함]에 대해 변명함. 김종연 일파가 이성계를 살해하려다 발각됨.

 

50세

1391(공양왕 3)

1월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우군총제사에 임명되어 병권의 일부를 장악함[이성계는 삼군도총제사, 조준은 좌군총제사]. 우왕의 승불행사를 맹렬히 비판하여 배불운동의 봉화를 들기 시작.

4월 왕이 구언하는 교서를 내리자, 우왕과 창왕을 옹립하는 데 앞장선 반대파인 이색·우현보 등을 탄핵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음.

5월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함. 이를 계기로 구세력의 반발이 거세짐.

9월 왕은 그를 평양윤으로 내려보냈으나, 곧 받대파는 출신이 미천한 그가 조정을 혼란시키고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를 씌워 탄핵, 봉화로 유배됨. 이로써 두 번째 유배 생활이 시작됨.

10월 나주로 이배되고, 그의 두 아들 진·영이 서인으로 폐해짐.

12월 봉화로 다시 이배됨.

 

51세

1392(공양와 4, 태조 원년)

봄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로 돌아옴.

4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자 정몽주·김진양 등이 이를 계기로 정도전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탄핵상소를 올린 것이 윤허되어, 정도전은 영주에서 체포되고 예천(醴泉) 보주(甫州)의 옥에 갇힘. 이때에도 정적들은 정도전의 출생을 문제로 삼음.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하자 사태가 역전됨.

6월 개경으로 소환되어 다시 충의군에 봉해짐.

7월 17일, 남은·조준 등 52명과 함께 이성계를 신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함. 20일, 도평의사사의 기무에 참의하고, 인사를 담당하는 상서사의 일을 참장할 것을 명함. 28일,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에 관한 교서를 지어 중외의 대소신료와 한량·기로·군민에게 교시함[개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고, 아울러 이색·이숭인·우현보 등 반혁명세력 56명을 극형에 처할 것을 명령]. 좌명공신·문하시랑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춘추관사·의흥친군위절제사·봉화군에 임명되어 정치·경제·군사의 실권을 장악함.

8월 20일, 배극렴·조준 등과 더불어 나이와 공(功)을 따져 세자를 정할 것을 요청했으나, 왕이 가있 소생을 세자로 봉할 것을 고집하자, 배극렴의 주장에 따라 강씨의 둘째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정함. 23일, 손흥종·황거정 등을 시켜서 이색의 아들인 이종학, 최을의, 우현보의 아들인 우홍수, 우홍명, 우홍득, 그리고 이숭인, 김진양, 이확 등 8인을 곤장 100대를 때려 죽임.

9월 17일, 문하시랑찬성사로서 개국 1등공신에 봉해져서 200결의 공신전과 25구의 노비를 받고, 기타 여러 특전을 받음.

10월 왕명으로 ≪고려사≫편찬 시작. 25일, 이성계의 창업을 알리고 신년 인사를 올리기 위해서 명나라에 계품사 및 사은사로 감. 사행 도중에 요동의 사정을 살피고 옴.

 

52세

1393(태조 2)

3월 20일, 명나라에서 돌아옴.

4월 ≪오행진출기도≫와 ≪강무도≫를 제작.

7월 5일, 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 도안무사에 임명되어 함길도의 여진족을 회유하고, 행정구역을 정리함. 26일,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정동방곡>·<궁수분곡> 등 여섯 편의 악사(樂詞)를 찬진하여 이성계의 공로를 찬양함.

8월 2일, 동북면 도안무사를 이지란이 대심함. 20일, 병서인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를 찬진 함.

9월 13일, 재정을 관리하는 판삼사사[종1품]에 임명됨.

11월 9일, 절제사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 중 무략이 있는 자들을 골라 이들에게 <진도(陳圖)>를 가르칠 것을 건의하고, 3일 뒤에 구정(毬庭)에 군사들을 모아 <진도>를 펴놓고 고각(鼓角)·기휘(旗麾)·좌작(坐作)·진퇴(進退)의 방법을 훈련시킴.

 

53세

1394(태조 3)

1월 27일, 판의흥삼군부사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제독(祭纛, 깃발에 대한 제사)의 행사를 지냄.

2월 29일, 판의흥삼군부사로서 병제개혁에 관한 상소를 올림.

3월 3일, 판삼사사로서 경상·전라·양광 삼도도총제사에 임명되어 행정구역을 개편. 11일, 판삼사사로서 5군에게 <진도>를 강습함. 절제사로서 훈련에 불참하거나 명령을 어긴 자는 처벌하겠다는 교지를 내리게 함. 이 달에 ≪조선경국전≫을 찬진함.

4월 10일, 판삼사사로서 왕에게 매일 아침 정전(正殿)에 앉아 장상(將相)과 더불어 군국사를 함께 논의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얻음. 이는 요동정벌을 위한 비상체제로 보임.

5월 ≪심기리≫ 3편을 지음.

6월 12일, 판삼사사로서 <역대부병시위지제>를 지어바침[부위제의 폐단과 부병의 연혁사의를 그림을 곁들여 설명]. 이 달에 명나라로 사행을 떠난 이방원을 위해 <송시서(送詩序)>를 씀.

7월 10일, 판삼사사로서 음양산정도감에서 권중화·성석린·남은·정총·하륜·이직·이근·이서, 그리고 서운관원과 더불어 지리도참에 관한 책들을 모아 참고·산정함

8월 12일, 판삼사사로서 무악(毋岳)으로의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음양술수설을 반박함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이 설치되자, 한양에 내려가 궁궐·관아·종묘·사직·시전·도로의 터 등 한양의 도시설계도를 만들어 바침.

10월 25일, 한양으로 천도[이달 28일 도착].

11월 3일, 정도전·조준·남은 등이 병권과 정권을 가진 것에 대하여 불만을 말한 변중량을 체포·구금함.

12월 3일, 종묘와 궁궐의 기공식에 참석,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냄. 이해에 한양건설을 찬양하는 ≪신도가≫를 지음.

 

54세

1395(태조 4)

1월 25일, 판삼사사로서 정총[정당문학]과 더불어 ≪고려사≫ 37권을 찬진함.

3월 13일, 세자이사로서 ≪맹자≫를 강함.

6월 6일, 판삼사사로서 ≪경제문감≫을 찬짐함.

9월 19일, 궁궐[경복궁]과 종묘가 완공됨.

윤9월 13일, 판삼사사로서 인왕산·백악산 등을 직접답사하고, 도성의 성터를 정함.

10월 6일, 판삼사사로서 궁궐 여러 전각의 명칭을 지어서 바침. 경복궁·근정전·사정전·교태전·숭례문 등의 이름을 지음. 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왕이 유종공종(儒宗功宗)의 네 글자를 대서특필하여 내림. 이해에 이무가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자 그를 위하여 ≪감사요약≫을 지어줌.

12월 새 궁궐로 이사.

 

55세

1396(태조 5)

3월 판삼사사로서 과거시험 고시관이 되어 처음으로 초장에 경서를 논하는 과목을 넣음.

4월 19일, 한성부 52방의 명칭[坊名]을 지음.

6월 11일, 표전문사건이 문제가 되자 명나라는 그를 표전문 찬자로 지목하여 그의 입조를 명함.

7월 19일, 나이가 55세인데다 판삼사사로서 각기병이 있음을 이유로 들어 입조할 수 없음을 명에 통고하는 한편, 표문의 찬자는 정탁임을 알림. 27일, 봉화백에 봉해짐. 명의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잠시 관직을 물러남.

9월 24일, 도성 8대문의 이름을 지음.

11월 30일, 요동정벌운동을 다그치기 위해 의흥삼군부에서 ≪수수강무도≫에 의해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할 것을 왕에게 상소함.

12월 일본의 일기도와 대마도를 치기 위해 병선을 출병시킴.

 

56세

1397(태조 6)

3월 15일, 조준과 더불어 내관(內官)의 호를 세울 것을 청하여 정함. 26일, 봉화백으로서 초립을 하사받음

4월 17일, 사은사가 가지고 온 명의 예부 자문 가운데 정도전을 '화(禍)의 근원'이라고 한 표현이 보임

6월 14일, 판의흥삼군부사로서 다시 병권을 장악하고 요동공격을 목적으로 진도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왕에게 출병을 요구하였으나, 조준·김사형등은 이에 반대. 남은은 조준을 가리켜 두승출납이나 할 수 있지 대사를 도모할 인물이 아니라고 비난함.

10월 6일, 병권을 잃고 봉화백으로 가례도감(嘉禮都監)의 제조가 됨. 16일, 새로 설치된 유비고[군수물자 관리]의 제조관이 됨. 역시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함.

· 이 무렵, 표전문사건으로 명에 간 정총·김약항·노인도가 강비의 상을 당하여 상복을 입은 것을 이유로 처형당했다는 소식이전해지자, 태조 이성계를 격노하게 만들고 요동정벌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됨.

12월 16일, 조준으로 하여금 판의흥삼군부사를 겸임하게 하여 병권을 넘겨줌. 22일, 봉화백으로서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함길도의 주군을 구획하고 성보를 수리하며 호구와 군관을 점검함. 이 역시 전쟁을 위한 배후점검의 성격을 띤 것임.

· 이해에 ≪경제문감별집≫·<국초군영진적첩>을 저술함.

 

57세

1398(태조 7)

2월 1일, 태조는 함길도에 사람을 보내 정도전의 노고를 치하하고, 음식과 의복을 하사. 16일, 함길도 경원부에 성을 쌓음.

3월 20일, 동북면도선무순찰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옴. 왕은 그의 공을 윤관의 9성역보다 크다고 치하함. 정도전은 남은과 더불어 절제사를 혁파하고, 왕이 친히 군권을 장악할 것을 건의함. 이로부터 태조가 직접 군사훈련을 주도함.

4월 20일, 봉화백으로서 권근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현임 및 한량 4품 이하 유신과 삼관(三館) 유생들을 모아 경·사를 강습함. 26일, 한양과 그 인근지역을 찬양하는 <신도팔경시>를 지음

4월∼5월 16일, 이전 성균관제조로서 ≪불씨잡변≫ 19편을 저술하여 성리학 입국의 의지를 천명함.

윤5월 18일, 왕이 북량정에서 주연을 마련하고 정도전·이지란·설장수·성석린 등을 불러 봉사(奉使)의 노고를 위로함. 26일, 왕이 내루(內樓)에서 주연을 여렁 봉화백 정도전·남은 등과 술을 마시면서 개국의 일을 회상함. 28일, 국영목장인 양주목장에서 <진도>를 가지고 군사훈련. 다음날도 훈련을 계속함. 29일, 진도훈련을 계속함. 절제사와 군사들을 사습케 하고, 사졸들에게 매질을 가하면서 독려함.

6월 환관을 전라도와 경상도에 내려보내 <진도> 강습의 실태를 조사하게 함.

7월 순군천호 김천익을 전라도와 경상도의 각 진(鎭)에 내려보내 <진도>에 통하지 못하는 첨절제사를 태형에 처함.

8월 1일, 왕이 헌사(憲司)로 하여금 <진도>를 익히지 않는 여러 왕자와 남은·이무·상대장군 등을 문책케 함. 4일, 헌사에서 <진도>를 익히지 않는 삼군절제사와 상대장군·군관 등 292명을 탄핵함. 9일, <진도>를 익히지 않는 절제사와 군인들을 태(笞) 혹은 장(杖)을 때림. 남은·이지란·정사길·이천우·이화·방간·방과·방의·방원·방번·이양우 등은 용서. 조준이 요동공격 중지를 왕에게 건의하여 윤허를 받음. 26일, 새벽 2시경 송현(松峴, 지금의 한국일보 부근)에 있는 남은 첩집에서 남은·심효생·이근·장지화 등과 담소를 나누다가 이방원 군사의 기습을 받아 방원에게 참수당함. 둘째아들 유(游)도 이방원 군사에게 살해되고, 넷째아들 담(湛)은 집에서 자결함. 큰아들 진(津)은 마침 안변의 석왕사에 왕을 따라간 덕에 살아 남아서 세종 때 형조판서에 이르는데, 그 후손은 지금 평택에 살고 있음. 셋째아들 영(泳)의 손자 정문형은 후일 우의정에 오름. 정도전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광주 사리현[지금 양재역 부근]에 있다고 전함.

 

사후 393년

1791(정조 15)

· 정도전의 학문을 재평가한 정조의 명으로 ≪삼봉집≫에 빠진 글들을 수집하고, 편차를 재구성하여 더 완벽한 ≪삼봉집≫을 간행함. 이것이 현재 널리 이용되는 ≪삼봉집≫임. 정조 때 만든 목판은 현재 경기도 평택시 진위에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음.

 

사후 467년

1865(고종 2)

9월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왕대비의 명으로 한양의 설계자인 정도전의 훈작(勳爵)을 회복시켜 주고, 시호를 내려주도록 전교.

 

사후 472년

1870(고종 7)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함께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편액을 하사함.

 

사후 474년

1872(고종 9)

·후손과 죽산부사 이헌경의 노력으로 경기도 양성현 산하리에 문헌사라는 상당을 지음.

 

사후 514년

1912

·후손들이 사당을 현재 평택시 진위면 은산2리로 옮김
출처 : [기타] http://snewworld.xtpn.com/mainfor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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