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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두 작명(作名)  


정도전의 두 작명(作名)


chosun4


2004.07.19 18:53

 

 


정도전(鄭道傳)이 왜 호를 삼봉(三峰)이라 짓고, 임금의 침전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했을까?!

 

삼봉을 재조명하는 노력이 다각적으로 시도되는 가운데, 그가 이룩한 조선 건국 초기 업적이 새삼 돋보이면서 600년 전 한 야심에 찬 '킹 메이커'의 화가위국(化家爲國, 한 집안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다)에 바친 정렬을 가늠해 보고 싶다.

 

정도전이 한 왕조를 뒤엎고 새 나라 창건에 서게 된 이유를 그의 출생에서 부터 찾아보려는 풍운의 일색은 이색적인 태어나남에서 찾게 된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이 젊었을 때 단양팔경인 삼봉(三峰)을 자나다가 관상장이를 만났을 적에 "10년 뒤에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들을 얻을 것이다."는 말대로 10년 후 삼봉에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서 아이를 낳았다. "길에서 아이를 얻었다 하여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또 부모가 인연을 지은 삼봉을 호로 삼았다." 이것이 전래해온 정삼봉의 약전 서두이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산원(정8품 무관) 우연의 딸이었는데, 김전이란 중이 족인 우현보의 계집종을 사귀어 낳은 여인을 우연히 아내로 삼았으니, 정운경의 장모는 계집종의 딸인 셈이다. 여비의 딸이 바로 정도전의 외조모요. 정도전의 외외증조모가 여종 신분이었기 때문에, 3대 뒤까지 노비의 혈통이라 해서 그를 괴롭힌 것은 당시 제도의 한 단면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노비끼리의 동격혼은 인정되지만, 노(奴, 남종)가 양가의 여자에게 장가드는 노취양녀는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걸맞는 비유가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서양에서 흑인이 백인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과 흡사하다 하겠다. 조선조 때에도 부모의 한쪽이 노비일 때에는 소생 자녀도 노비가 되는 원칙은 고려 때와 같았으나, 사족(士族)이 비녀를 첩으로 삼는 취첩 때에는 그 계집종은 속량되고 그 소생 자녀는 양첩 자녀보다 한 등급 낮춰 천대하기는 해도 사족의 서열 자손으로 취급되어 낮은 직품의 벼슬은 허용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더 가혹하여, 부모가 어느 한쪽이 종의 신분이면 대대로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정도전도 대간의 고신(告身, 직첩)을 얻지 못해 출세에 큰 지장을 받았다. 그는 구신들로부터 가계가 바르지 못하고 불분명하여 미천하다는 헐뜯음을 여러 차례 들어 왔다. 우현보의 일족과는 심각한 원수관계를 맺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정도전이 이런 구김살 때문에 더욱 이성계를 지성으로 섬겨 그의 뛰어난 참모가 되었으며, 창업을 이룩하게 된 뒤에는 문물제도가 그의 손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적에도 그의 입김이 대단하여, 일찍이 태조가 임금이 될 것을 예언해 준 무학대사의 주장마저도 꺽을 만했다. 특히, 무학이 한양 지세의 허실을 들어 북악 대신 인왕을 주산으로 삼고 동향으로 대궐을 지으려는 시도를 꺽고서, 자고로 임금은 남면(南面)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오늘날의 경복궁의 면모대로 조선의 대궐을 지었던 것이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처럼 남쪽의 관악산 화기(火氣)가 성해서 병화의 우려가 있다 하여 남대문인 숭례문 현판을 가로로 쓰지 않고 세웠다. 또 동쪽이 허하다 하여 동대문인 흥인문은 '갈 지(之)'자 한자를 더 보태어 세로로 흥인지문이라 두줄로 꺽어 써서 지세를 보강하리만큼 풍수설을 중히 여겼다.

 

정도전이 호를 삼봉이라 일컬었으나 삼봉(三峰)의 내력을 밝힌 것이 없다. 통설로 단양의 도담에서 삼봉을 따온 것으로 여기고 있는데, 이에 대해 반론을 봉화 정씨 측에서 제시한 바 있다. 삼봉이 뜻하는 것은 서울 북한산에 백운(白雲) · 인수(仁壽) · 국망(國望) 세 봉우리인 삼각산(三角山)이라는 것이었다. 삼각산의 별칭이 삼봉산이기도 하여 그럴싸하게 들리나, 의아스러움도 없지 않다. 이른바 삼각인 삼봉이 있는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진산이란 도읍이나 성시 뒤쪽에 있는 큰 산을 일컫는 말로, 정도전이 서울의 진산인 삼봉을 스스로 호를 삼았다면 두 가지 면을 상정할 수 있겠다.

 


지금 청와대 뒷산, 곧 경복궁 뒷산인 북안산에는 대궐을 짓고부터는 함부로 오를 수가 없었듯이, 조선왕조를 창업한 1등 공신인 정도전이 북악보다 더 위쪽에 있는 왕궁의 진산인 북한산의 별칭인 삼봉을 자호(自號)할 수가 있을까?! 당시 빼어난 지식인 정도전이 분수에 지나침을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설혹 정안대군 방원이 왕실을 능멸했다는 구실로 삼봉을 제거했을 적에도 봉화백(奉化伯) 정도전의 별호를 빌미 삼지 않았으니, 삼봉이 호를 북한산으로 지칭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고려말부터 한양에 왕기가 서려있고, 또 목자(木子). 곧 이(李)씨가 왕이 된다는 참설이 나돌아, 오얏을 심어 한창 무성해지면 베어서 그 지기를 빼도록 했다. 조선조가 들어서자마자, 목자(李)설을 대신해서 전읍(奠邑). 곧 정(鄭)씨가 왕이 된다는 정감록 비결이 등장했다. 이런 참설이 횡행하는 가운데 봉화백이 "왕실을 넘본다"는 혐의점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북한산 '삼봉'으로 자처했을까 싶다.

 

정도전이 왜 '삼봉'이라는 호를 지었을까?! 한양 북한산을 겨냥했다 해도 경복궁과 왕실을 넘본다는 참람함을 면할 길이 없고, 단양 도담을 상정했다 해도 아버지가 길에서 만난 여인과 산에서 맺은 인연의 봉우리를 꼭 드러내야 했을까?! 비상한 세대에, 비상한 처신을 해온 정도전이었기에 여느 사람과는 다른 일면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가 일찍이 검은 신과 흰신을 짝짝이로 신고 입궐하면서, 의아해하는 이에게 "흰 쪽을 보면 흰신뿐이요 검은 쪽을 보면 검은 신뿐인데, 그게 무슨 대수인가"라며 대범해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대궐을 창건하고 작명한 전각과 문루의 이름에서 삼봉의 생각이 엿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일컬어 강녕전(康寧殿)은 경복궁의 안의 왕의 침전인데, 왕후 강씨의 성자인 '편안할 강(康)'자를 넣은 것에 눈길이 끌린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은 상고하건대, 홍범(洪範) 아홉째 오복(五福)에서 셋째가 강녕(康寧)이었습니다.

 

[추가] 서경에서 말한 오복(五福), 즉 수(壽)ㆍ부(富)ㆍ강녕(康寧)ㆍ유호덕(攸好德)ㆍ고종명(考終命)을 말한다. 홍범(洪範)은 우(禹)임금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에 있었다는 9장(章)의 문장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큰 법인데,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의 물음에 대답한 후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한다. 그리고 아홉째 오복이란 홍범 9장의 맨 끝에 씌어 있으므로 이르는 말이다.

 

대개 인군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 대중지정(大中至正)한 도를 세우면 오복(五福)을 누릴 수가 있으며, 강녕은 곧 그 오복의 하나인데 그 중에서 강녕만 든 것은 그를 들면 나머지(수(壽)ㆍ부(富)ㆍ유호덕(攸好德)ㆍ고종명(考終命))는 모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 일은 여러 사람이 다 보는 데서는 애써 실천하지만, 한가하고 혼자 있을 때는 쉽게 안일에 빠져서 경계하는 뜻이 매양 게으르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는 바가 있고 덕이 닦여지지 못하는 바가 있어, 대중지정한 도가 서지 못하여 오복이 이지러지게 됩니다. 옛날 위무공(衛武公)이 스스로 경계하는 시에 이르기를,

 

너 군자와 벗함을 보건대 / 視爾友君子

얼굴을 화하고 부드럽게 하며 / 輯柔爾顔

어떤 과실이 없을까 두려워하는구나 / 不遐有愆

너 집에 있을 적에 / 相在爾室

옥루(屋漏)에도 부끄러움이 없게 행해야 한다 / 尙不愧于屋漏

 

고 했습니다. 무공(武公)의 경계하고 삼감이 이러했으므로 그 향년이 90이었으니, 그가 대중지정의 도를 세워 오복을 누린 확실한 증거이옵니다. 대개 그렇게 하는 공정은 마땅히 한가하고 홀로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법받아, 안일을 경계하고 경외(敬畏)를 가져서 대중지정의 무궁한 복을 누리소서. 그러면 성자ㆍ신손(聖子神孫)이 계승하고 계승해서 천만 대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삼봉집 권4)

 

태조 4년, 궁궐 전각의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의의(意義)를 써 올리며, 경계하는 말을 잇달아, 뒷날 임금의 거울을 삼계 한 정도전의 상언의 대목이었다. 태조 1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달포만에 막내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은지 3년이나 지났고, 신덕왕후 강씨의 궐내 영향력이 막강할 적에 침전의 이름에 '강(康)'자가 들어간 것이 결코 우연만이었을까 반문하고 싶다.

 

강녕전으로 작명을 하고 나서 왕후 강씨는 강녕하지 못해서 이듬해 세상을 떠났으며, 잇달아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태조가 임금 자리를 버리며 '함흥차사'의 고사를 남기는 비극을 빚어 강녕하지 못한 강녕전이 되고 말았다. 대학자요 정치가인 정도전의 꺽임과 '삼봉'과 '강녕'의 두 작명에 설익은 생각이 떠나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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