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
이름: 평생교육신문
2015/2/3(화)
신라왕릉은 지나 대륙에 있었다  

 

보도지면:평생교육신문
보도일자:1994년 03월 16일
 
 

 

<탐방기행문>

 

 

 "신라왕릉은 지나 대륙에 있었다"

 

 

 

 필자는 1986년「한民族宇宙哲學思想」을 출간한데 이어 1990년「한民族史」발표했다. 그리고 1993년 5월에「上古史의 새발견」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과연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는 한반도에 없었던가를 되뇌이며 믿지 못하였고, 나 역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드디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있는 지역을 답사하기로 결심하고, 1993년 6월 24일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25일 오후 천진(天津)에 도착하여, 밤 11시반 경 북경(北京) 회문중학 식당에서 식사하고 기숙사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갔다온 후 밤 12시 50분 산동성(山東省) 제남(劑南)으로 출발했다. 제남에서 다시 곡부(曲阜)로 향하였다.


 곡부에서 다음날 사수현(泗水縣)에서 50리 거리에 있는 천림사(泉林寺)를 찾아갔다. 천림사 북쪽 배미산(陪尾山) 아래에는 신라 41대 헌덕왕릉(憲德王陵 AD.806년)이 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고 답사하게 된 것이다.


 과연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헌덕왕의 묘 터라도 있는지가 무척 의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림(泉林)의 지명에는 천림사(泉林寺)가 옛날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비석이 남새밭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우리 일행 13명은 제각기 사진을 찍으며 확인했다. 그리고 천림사 북쪽으로 과연 배미산(陪尾山)이 있었다. 바로 아래에는 헌덕왕릉의 묘 터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배미산이라는 비석도 찾아 탁본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하나도 틀림없음을 현장의 확인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그후 소주(蘇州)로 향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고증대로 혁거세, 즉 거서간의 무덤이 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소주에 도착해 거서간 왕릉지를 찾았으나 1958년 공산당 대약진, 즉 공산당 대 파괴의 해에 거서간의 왕릉은 모두 파헤쳐지고 없었다. 그후 1968년 공산당 문화혁명을 기화로 묘지는 말끔히 정리되고 중학교, 공장, 마을이 들어서고 있었다. 묘 터에는 소나무과에 속하는 나무 한 그루를 기념으로 심었다고 맞추생(馬秋生·66세) 할아버지가 증언해 주었다. 지금은 거서간 즉 혁거세의 묘 터가 있는 곳은 육묘진(陸墓鎭)이라는 땅이름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시 소주의 호구산(虎丘山)에 올라 혁거세의 왕릉 위치를 조사해 보았다. 패철을 놓고 방향과 거리를 조사해 본 결과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대로가 틀림이 없었다.


 우리 일행 13명은 상해(上海)로 향했다. 가는 곳마다 역사박물관을 둘러보고 고서점(古書店)을 찾았다. 옛 역사의 기록이 되어 있는 책이라면 무조건 사서 항공편으로 우송했다.


 상해 비행장 대합실에서 5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일행 중 이종화씨가 한국에서 온 경남북 초등학교 교사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회장인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랬더니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와!" 하고 달려들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대합실에 앉은 자세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이구동성으로 식민사학을 바로해야 한다고 하였다.


 호응도가 좋을 때마다 힘이 솟는 듯했다. 선생 대표들과 헤어진 뒤 우리 일행들은 무한(武漢)에 도착했다. 무한에 있는 역사 박물관에 이르니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흡사 우리 선조들의 활동상황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고고학은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이었던 임효재(林孝宰) 교수는 소련령인 카자흐공화국에서 신라 유물 45점을 발굴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카자흐공화국이 신라 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상과 같이 우리들은 의문을 갖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정(日政) 때 우리 민족은 나라를 탈취 당하고 멀리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경상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끼리 부락을 형성하여 민족의 혼을 달래곤 하였다. 그러기에 국가는 망해도 민족은 이동하여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인은 신라 사람끼리, 백제는 백제 사람들끼리 집단을 이루고 삼국시대 때 한반도로 계속 이주하여 정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한반도에 예로부터 원주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반도에 최초로 국가를 건설한 것은 고려도 아닌 이성계(李成桂) 때부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시조는 당나라의 혈통으로 제왕운기(帝王韻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13명의 학술조사단은 의창(宜昌)에서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중경(重慶)으로 가는 배를 탔다. 중경에 도착한 다음날 우리의 목표지번인 검강토가족묘족자치현(黔江土家族苗族自治縣)에 있는 낭산(狼山)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중경(重慶)에서 검강까지는 507㎞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지만 실은 험한 산길과 오지를 돌고 돌다보니,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반 거리밖에 되지 않는데도, 아침 6시에 출발하여 18시간 후인 밤 12시가 되었다. 빵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배가 고파 허기에 지쳐 있었다.


 두 운전사와 두 가이드들은 낭산이 어디인지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며 묻고 또 찾았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간단히 먹고 한나절을 찾아헤맸다. 그러나 일 길이 없었다. 모두들 낭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검강토가족묘족자치현 정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어 물어 찾은 곳이 검강토가족묘족자치현에 있는 현지(縣志) 공보실(公報室)이었다. 이곳은 옛날 기록을 찾아 수록하는 편집실이었다. 다시말해 검강토가족묘족자치현에서 발간하는 검강구지류편(黔江舊志類編)의 편집실이었다.


 1985년 10월에 발간한 청(淸)나라 광서(光緖 AD.1875∼1908년) 이전에 있었던 강역과 산(山), 수(水), 즉 자연(自然), 경제(經濟), 정치(政治), 군사(軍事), 문화교육류(文化敎育類), 원회류(元會類), 인물류(人物類)와 부록을 편집하여 수록한 책이다.


 편집장 포조정(浦祖政) 씨는 검강구지류편이란 책 1권을 내밀면서「先生이 찾는 낭산(狼山)이 이게 아닙니까」했다. 그때 나는 17쪽에 낭산(狼山)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환호성을 질렀다.「아! 찾았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곳에 신라 27대 선덕왕(AD.629년) 묘 터가 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묘 터가 있을까가 의문이었다. 편집장 포조정(浦祖政)씨는 편집주임 왕학군(王學軍)씨를 시켜 안내를 해 주도록 했다. 안내를 받아 낭산이 있는 곳을 찾았다. 검강의 시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낭산이 있었다.


 왕학군씨의 안내로 낭산을 찾았다. 낭산은 수낭산과 암낭산이 있었다. 그러니까 수낭산 바로 아래에 묘 터의 흔적이 있었다. 묘지가 하나 같지는 않고 약 100m 이상의 길이에 묘지가 두 쌍 있었던 흔적이 역력했다.


 본시 백제(百濟)가 호북성(湖北省), 사천성(四川省) 일대에 있었지만, 망한 후(AD.660년)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덕왕과 신문왕 정명(政明 AD.678년)의 묘지가 있을 수 있다는 기록에 의한 것이다.


 낭산에 도착해 보니 과연 묘 터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고, 1958년 공산당 대약진 때 모두 파괴시켰다고 왕학군씨가 일러주었다. 그러나 왕학군씨의 말을 빌면, 옛날 고려 장군이 유배와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을 뿐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수낭산 밑에 선덕왕과 신문왕의 묘지가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사기(史記)의 기록대로 위치와 지명, 그리고 묘지의 위치가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틀립없다고 생각되었다. 만약 한국에 신라가 있었다고 한다면 낭산(狼山)이란 지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찾아볼 길 없다. 또 낭산(狼山)이란 곳에는 묘지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선덕왕의 묘와 신문왕의 묘가 있어야만 신라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한국 땅에서는 왕의 묘를 판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신라왕은 56명이다. 그런데 묘가 없는 왕은 25명이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왕의 묘지는 31명이다. 그러면 31명의 왕릉이 비석과 함께 있어야 옳지 않겠는가. 그리고 백제왕의 묘도 모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분의 묘 이외에는 하나도 없다.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고려왕의 묘도 모두 한반도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신라왕릉이 31곳,백제왕릉이 32곳, 고려왕릉 34곳이 모두 한반도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모든 왕릉들은 흔적도 없다. 다만 경주에 있는 왕릉 몇 개는 다닥다닥 공동묘지처럼 붙어 있는데, 정작 비석이 없다.

 

어느 왕의 묘인지도 모른다. 공동묘지라도 비석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왕릉에 비석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삼국시대에는 묘를 파 옮기면 삼족(三族)을 몰살시키는 무서운 법이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한民族史」250∼272쪽 참고).


 현재 경주에 있는 묘는 비석이 없다. 신라인들은 멀리 이주해 와서 선조들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집단적으로 옮겨와 조상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묘지를 경주 일원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992년간 왕의 묘지가 경주에만 공동묘지처럼 비석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삼국시대에는 왕의 위치와 왕족, 그리고 군신의 지위는 대단하였다. 공동묘지처럼 비석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잇는 왕의 묘라니, 한심한 생각이 든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있는 경상도 경주는 낙랑(樂浪)이라고 되어있고, 낙랑은 현재 순화현(淳化縣)에 정해 있었다는 기록대로 하자면, 한국 땅에 잇는 경주는 낙랑이 아니므로 한국 땅이 아님이 쉽게 짐작이 간다.


 그렇다면 순화현(淳化縣)이란 어디인가. 현재 지나대륙에 있는 서안(西安) 위쪽에 있는 곳이 순화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있는 경주는 두 번째 경주이다. 경주는 모두 5번 옮긴 것으로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24대 양원왕(陽原王 AD.496년) 8년에는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이 있다. 그리고 25대 평원왕(平原王 AD.522년) 28년에는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장안성은 어디인가. 지금의 지나 대륙 한복판에 있는 서안에 있다.


 고구려 26대 영양왕( 陽王 AD.563년) 18년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고구려 본기자소봉지지 (高句麗本箕子所封之址)』


 이 말은 고구려는 본시 기자가 도읍해 있었던 땅에 있었다. 그렇다면 기자는 어디에 있었는가. 다름아닌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 일대이다.


 다음 문장을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漢晋皆僞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城, 先帝欲征之久矣』


 한나라, 진나라가 모두 함께 있었던 군과 현의 당이다. 그러나 지금 신하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고로 그곳은 별천지인 다른 곳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대왕들은 그곳을 정벌하기 위해 얼마나 오래도록 욕심을 갖고 있었던가,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AD.634년)에는『高代自漢有國, 今九白年, 高句麗自秦漢之後』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씨는 스스로 한나라에 있었다. 그리고 약 900년이다. 고구려는 스스로 한나라와 진나라의 뒤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의자왕(義慈王)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新羅人自次 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이 말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다. 고로 김씨 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했다. 소호금천씨는 지나대륙(支那大陸)에 있는 황제(黃帝)의 아들이다.


 또한『高句麗亦次高辛氏之後姓高氏』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고신씨의 후손이며, 그러므로 고씨 성을 가지고 되었다는 뜻이다.


 백제 온조왕(溫祚王)편에는『惟此河南之址』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말할 것 없이 하남성(河南省)의 땅이다, 라는 뜻이다. 하남성 땅은 한국 땅에 없다. 그러기에 하남위례성은 대륙 하남성에 있다는 증거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요동(遼東)·요서(遼西)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요동·요서의 기준을 실크로드가 있는 천산(天山)을 기준했다. 인류의 발상지가 천백(天白)이고 인류의 건국지가 바로 천산(天山)이기 때문에, 천산을 기준하여 요서(遼西)·요동(遼東)의 기준을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고시대에 최초의 동경(東京)은 서안(西安)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요동·요서의 기준을 서안(西安)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안에서 1천리 떨어진 낙양(洛陽)이 동경이었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