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3
이름: 중앙일보
2015/2/3(화)
中國은 韓민족의 故土  

 

 

中國은 韓민족의 故土


보도지면:중앙일보
보도일자:1995년 06월 03일
 

 

 

강위석의 '들으며 생각하며'
 [異說 在野 國史연구가 李重宰씨]

中國은 韓민족의 故土
신라王都는 西安

무소속 사학자 이중재(李重宰·1931년 11월생)씨의 이설(異說) 주장은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단군조선·삼한·삼국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조차도 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에 있었습니다.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쫓겨와 왕 노릇한 최초의 사람은 고려 공양왕입니다. 실크로드가 우리 민족의 본산이고 곤륜산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왕인 환인천황(桓因天皇)이 태어 났습니다.』
 

그는 역사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설화 문학을 창작하고 있는가. 역사는 문학과 혼동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역사는 실제인 반면 문학은 상상이라는 것이 이 둘 사이의 구별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과연 창작이 없고 문학에는 전혀 실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인가. 더구나「상상된 실제」즉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실제도 실제인가 아니면 상상인가. 멀티미디어의 시대가 실현되면서 컴퓨터가 만들어내는「가상 현실」이「실제 현실」을 대체해가고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李씨에게 중국 대륙은 새삼스레 한국사를 또 한번 건설하는데 필요한 사나의「사이버 스페이스」인가.

 어릴적 별명 쫌뱅이


 그는 자기의 명함에「한국상고사학연구회」회장이라는 직함을 서 놓고 있다. 그는『한민족우주철학사상』『한민족사』『상고사의 새 발견』이 세 책의 저자다. 멋진 양장본으로 출간된 이 책들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는 저자 약력에는 더 많은 저서, 더 많은 전 현직 짐학들이 나열돼 있다. 나는「한국상고사학연구회」의 명성이나 규모를 추궁하고 싶지않다. 맨 땅바닥에 앉기보다 짚방석이라도 깔고 앉는 쪽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을 트집잡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짚방석만으로도 하나의 훌륭한 연구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위에 앉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떳떳한 직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설(異說) 국사학자의 주장이 기성 국사학자들에 의하여 하나의 초라한 가상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며 한 펀치에 묵사발이 되고 말게 되더라도 그가 일평생 자기 식으로 이끌어온 연구 행위 그 자체 속에 담긴 그의 정열과 염원에 나는 감격하고 있다. 이 정열과 염원은 그의 출생 성장 내력과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너는 태어날 때 거꾸로 나왔다고 합니다. 게다가 먹을 것마저 없어 보리 암죽을 먹고 자란 바람에 신체가 너무 작았습니다. 작았을 뿐만 아니라 늘 병치레하는 허약아였습니다. 어릴 때부터「쫌뱅이」「난쟁이」이런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고향은 경남 통영군 욕지섬입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저는 열등감에 몸부림치며 지냈습니다. 키는 작고 몸은 허약하기 짝이 없고, 집은 지지리도 가난하고, 게다가 나라가 일본 사람들의 식민지라는 의식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아주 어릴 때부터 제 가슴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국민학교까지는 그럭저럭 졸업했는데 돈이 없으니까 중학교는 못 갔습니다. 제 열등감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면서도 무조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주로 어려운 책을 읽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책을 읽고서 얼마를 이해하는 것이 그 책을 이해하는 것인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그 책을 옳게 이해하는 것인지 몰랐으리라. 선생이 있어 가르침을 받고 시험을 치르게 되면 그 선생의 지도노선에 따라 이것을 안다. 무조건 어려운 책을 읽고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음의 절벽에 부닥치는 것이 이 소년에게는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에 진학한 다른 동무들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이 소년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이발사 하는 팔촌 형님이 저희 집에 왔습니다. 저더러「너는 몸도 약한데 나무를 하러 댕길 것이 아니라 내 밑에 와서 이발 기술을 배워라. 여가에 공부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 밑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머리 감기기만 하다가 나중에도 면도·이발도 하게 되었습니다. 추석 대목에 이발소 손님이 많았는데 열심히 일 했다고 월급 5백원 외에 따로 5백원을 더 받았습니다. 그 돈을 부모에게 드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욕지중학교 교장선생님을 다짜고짜 찾아가서 입학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학교에 낼 입학금과 공납금은 준비되어 있다고 했지요. 정기 모집 신입생이 입학한지 한 달이 지난 뒤였지만 간단한 시험을 치고 입학시켜 주었습니다.


 그러고서는「너 앞으로 큰 놈 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 말이 내 평생 언제나 엊그제들은 말처럼 한시도 떠나지 않고 귀에 쟁쟁합니다.』


 李씨가 중학교 3학년이 된 것은 스무 살 때였다. 그해 6 25전쟁이 터졌다. 그는 키 1백50㎝의 약골 청년이었지만 징병관들은 그를 몇 번이나 붙들어 갔다. 그는 용케 그때마다 빠져 나왔다. 3학년을 가까스로 끝내고 그는 집에 있는 땅의 전부인 밭 3백 평 가운데 반을 팔아 달라고 졸라 그 돈으로 배 삯을 내고 욕지도 근처에 있는 유명한 일본 밀항선 출발지였던 연화도에서 배를 탔다. 자기는 도저히 군대 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체력을 지니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본 하카타(博多)에서 내린 그는 대학에 다닐 목적으로 도쿄(東京)로 갔다. 이발소에 취직하였다. 그렇게 지난지 1년이 채 못되어 그는 밀항자로 붙들렸다.


 


 日人과 유치장 격투


『네리마(練馬)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 있는 동안 나는 내 몸에서 이가 나온다고 이죽거린 일본인 구치자들을 상대로 대판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난폭자 낙인을 받았습니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다음 저를 나가사키에 있는 오무라(大村) 수용소를 향해 기차로 이송하면서도 난폭자라 하여 호송관을 세 명이나 붙였습니다. 8개월을 수용소에서 지낸 다음 휴전되던 해 한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 꼭 덧붙여 말씀드려 둘 것이 있는데, 한일 국교가 열리기 전인 1953년 제가 오무라 소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때에도 일본은 비밀리에 엄청나게 많은 교포를 북송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수용되어 있던 제2동과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제1동 건물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북송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저와 같이 제2동에 있던 사람들이 한동안 바깥에서 친북계 사람들이 넣어 주는 사식을 얻어먹고 용돈을 받아쓰고는 제1동으로 가 있던 것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그는 한국으로 송환되자마자 제주도 훈련소에 보내졌다. 훈련을 마치고는 22사단 교육대에 배치되었다. 심한 참나무「빳다」


기합을 받은 다음 약한 몸을 추스리지 못해 의무대에 입원했다. 야전병원을 거쳐 대전 63병원에 후송되었다가 군대생활 1년 10개월 만에 의병 제대한다. 26살 때였다.



노벨賞 타는 망상도


『집에 돌아와서도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일본 밀항·수용소·군대생활을 거치면서도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한문은 어릴 때 아버지한테 배워 중학교 다닐 때는 제가 한문 선생보다도 글이 나았습니다. 철학·문학·한문 원전을 손에 닿는 대로 읽었습니다. 제대하고 집에 누워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있었던 그동안도 책을 손에서 뗀 일이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기력이 쇠잔해서 그랬는지 환상과 망상이 주체할 수 없을만큼 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해야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망상은 도통(道通)을 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방안에서 누워만 지내던 그 시절 그는 쉴 새 없이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동인 문학상을 타는 생각, 노벨 문학상을 타는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망상이다. 그때 구상했었다는 소설의 줄거리를 들어보았다. 내용은 실망스럽다. 오히려 나는 그가「도통」이라는 말을 쓴 것을 중시한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이설 국사학의 내용, 즉「한민족의 중국대륙 웅거설」도 혹시 李씨가 도달한 하나의「도통」또는「도통」을 위한 준비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말한다.
『우리가 태어남은 역사가 태어나는 것이요 우리가 살아있음은 역사가 살아있는 것이다』라고. 개인 이중재씨가 그런 것처럼 그의「한민족」은 위대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판단이야말로 그의「도통」일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몸은 마른나무 꼬챙이처럼 말라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한 겨울에도 팬티 하나만 입고 지내면서 저는 금방 덥다고 느꼈다간 또 금방 춥다고 느꼈습니다. 때론 참을 수가 없어 집안의 물건을 부순 일도 있습니다. 그런 저를 어머니와 동생이 나무막대기에 묶어두곤 했어요.


 어느날 어머니가 어떤 집에서 참기름을 얻어 와서는 몸에 좋다며 먹으라고 했어요. 냄새가 역겨워 먹고 싶지 않았으나 어머니가 하도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뱃속이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 길로 저는 바닷가로 나와 무작정 걸었습니다. 구름이 꽉 낀 날씨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제 앞에「天門」이 갑자기 환히 열렸습니다.』


문헌考證으로 증명


 그가 28살 때 일어난 일이다. 그는 그때부터 걸인으로 나섰다. 남의 사주나 관상을 보아주는 일도 했다. 서른 살 때 동네 처녀와 결혼을 했다. 지금 부인이다. 부산 영도다리 근처에서 여관방을 얻어 관상 보는 일을 업으로 삼아 보기도 했으나 다 걷어치우고 7년 전부터 전업 역사학자가 되었다. 그는 최근 방대한 분량의「고려사(高麗史)」집필을 끝내고 곧 출판할 것이라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 준 곳은 지금의 중국 산서성 안읍(山西省安邑)입니다. 거기서 서안(西安)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그곳을 송악(松嶽)이라 하고 나라 이름을 다시 옛날대로 고려라 했습니다. 서안은 신라의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철저히 문헌고증(文獻考證)을 통하여 입증했습니다. 중국을 지배한 일이 있는 여러 민족들, 글안·말갈·여진 이들은 세력이 쇠하면 모두 동북방으로 쫓겨났습니다. 우리 한민족도 그렇게 되어 반도로 건너왔던 것입니다. 중국 대륙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땅입니다.』


 그는 지금은 매우 건강하다. 예순 다섯 살 난 사람으로 보기에 그의 작은 체구는 너무도 다부지고, 걸음걸이나 말소리는 바쁘기 짝이 없다. 그가 찾아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한민족」의 영광된 역사를 하루라도 빨리,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알리고자 바쁜 것이리라. 그의 외모와 분위기에서는「도사」나「학자」같아 보이는 구석을 찾아낼 수 없다. 이 점이야말로 미더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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