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朴民宇
2007/7/2(월)
조회: 2675
답변 입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東南里)에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입니다.


이 탑은 그 이름부터가 요상합니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맨 아래층 탑신의 제4면에 큰 전서체(篆書體)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 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작은 해서체(楷書體)로 당(唐) 고종(高宗)이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이를 토파(討破)한 사적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 비가 발견 되었을 당시 당평제탑(唐平濟塔)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제를 평정한 기념으로 세운 탑 인줄로 알았지요. 당연히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완벽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금석문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곳을 발굴하였더니 과거에 절터 였다는 증거물이 출토 되었는데 정림사라는 사찰 이름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기와가 출토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공식적으로 고려 정림사지 5층석탑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또한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는 석제 유물(石槽)이 구부여군아(舊扶餘郡衙)의 부지내(敷地內)에서 발견됨으로서 평제비(平濟碑)가 두 가지임이 밝혀졌습니다.


<구부여군아(舊扶餘郡衙)의 부지내(敷地內)에서 발견 된 평제비(平濟碑)>

 

그런데 여기에서 어느 것이 원본(原本)이고 어느 것이 복각(復刻)인가, 아니면 원(原) 비석은 따로 있고 두 가지 모두 복각인가 하는 문제와 소위 평제탑이 이 비명(碑銘)을 새기기 위해서 세워진 것인가, 아니면 전부터 있었던 탑을 이용해서 거기에 비명을 새긴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부여군현지(扶餘郡縣誌)』에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인용하여 “그 비는 현서2리(縣西二里)에 있고 소정방(蘇定方)이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입석기공(立石紀功)’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고려국정림사지탑은 현남쪽2리에 있음, 위치가 승람의 기록과는 틀린다. 1942년 발굴조사 에서 "대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大平 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 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왔으며 '대평 8년' 은 고려 현종 19년(1028)으로 추정되므로 당시 이 절은 고려시대에 축조 된 건물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게 소실되었고 조선 초기에 탑하나만 남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김유신 . 소정방(蘇定方) 입석기공(立石紀功) 이란 기록은 믿을 수가 없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편찬 사료인『동국여지승람』 은 세종 때 이미 왜곡이 많이 되어진 사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조선시대 초기에도 존재했을 법한 고려정림사지 5층석탑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런 망발성 기공문을 새겨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같은 당나라 괴수 유인원의 기공비 일부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소정방의 기공비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동국여지승람』 을 편찬할 때 그 비석이 없어지고 비명(碑銘)만 남아 있어서 누군가 그기에 새겼을 수도 있습니다.


<당유인원기공비>

마치 좃대가리 처럼 생긴 이 碑는 '유인원기공비' 입니다.

그 내용들을 훝어보니 화가 치밀어 집니다. 이건 분명히 누군가 이 땅에 패배의 역사를 심기 위해서 장난을 쳐 놓은게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래의 모든 글들은 "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 " 에서 퍼온 것들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직접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찾아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궁금해 하시는 백제인 '예식진' 에 관한 사료는 아직 없습니다. 뗏놈들이 밝히지를 않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땅 길림(吉林)성에서 발간되는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라는 책에서 베낀 자료들 뿐입니다. 아래의 신문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망국 백제 고위관리 묘지석 1천300여년 만에 찾았다
중국 시안서..당나라 조정 최고위급 경비부대장 '예식진'
의자왕.부여융처럼 포로로 끌려간 후 고위직에 올라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로 당나라에 끌려간 후 전향해 높은 벼슬을 지낸 한 백제 고관의 묘지석(墓誌石)이 타계 1천300여년 만에 당나라의 수도였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서 출토됐다.

지난해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이 묘지석의 주인공은 백제 고위무관 출신인 '예식진(예<示변에 爾>寔進)'이라는 인물로 당나라 조정에서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을 지냈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백제의 정1품 관직인 좌평(佐平.장관급)이었다.

당나라로 끌려간 백제 왕족 및 고관.장수들로서 그 묘지석이 중국에서 발견된 인물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흑치상지(黑齒常之), 흑치준(黑齒俊), 난원경(難元慶), 낙사계(諾思計)에 이어 예식진이 여섯 번째다.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최근호는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뤄양(洛陽), 루산(魯山), 시안에서 출토된 당대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뤄양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의 공동집필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에 전문이 인용된 묘지의 내용에 따르면, 예식진은 원래 백제 웅천(熊川.현재의 충남 공주) 사람으로서 관직이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인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에 올랐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다(藝多), 아버지는 좌평 사선(思善)이었다.

그는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멸망케 한 당 고종 통치시기인 서기 672년(咸亨 3년) 5월25일 현재의 산둥성 옌타이(煙臺)시 룽커우(龍口)인 내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해 11월21일 유해가 시안으로 운구돼 고관들이 묻히는 고양원(高陽原)에 안장됐다.

앞서 언급한 논문의 저자들은 묘지에 기재된 내용과 기존의 역사서 등을 토대로 예식진이 서기 660년 백제 멸망 후 의자왕, 부여융 및 기타 왕족.대신.장수 등과 함께 포로가 돼 당나라에 끌려간 후 전향해 관직을 수여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은 백제 멸망 연도, 예식진의 향년 등으로 미루어 그가 46세 때 당나라에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의 사망 장소가 현재의 산둥성인 이유에 대해서는 "조정이 서기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끌려온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그를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묘지의 전문을 검토한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새로운 백제 유민 관련 자료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의 연구에 따라 백제사의 해명과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동향 등 여러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논문 저자들은 서두에서 "2006년 뤄양의 한 시장에, 시안에서 출토된 예식진의 묘지석이 나타났다...묘지석이 출토된 지역은 (시안시 창안<長安>구의) 궈두전(郭杜鎭)일 가능성이 크다"는 식으로모호하게 언급, 정확한 출토 시기와 지점, 발굴자는 물론 보관처조차 밝히지 않았다.

한 저자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도 다른 곳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논문을 썼다. 아마도 작년에 출토됐을 것이다. 보관처는 모른다"는 말로 일관해 중국 문물당국이 아직은 이 묘지명의 공식적인 대외공개를 꺼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돈관 특파원 don@yna.co.kr (베이징=연합뉴스)

 

 

 

 

<망국 유민의 비극..백제 고관 예식진 묘지석>
 
 
[연합뉴스] 2007년 05월 31일(목) 오후 03:40   가| 이메일| 프린트
 
 
 

고구려 유민집단 위무임무 수행하다 객사한 듯

(베이징=연합뉴스) 이돈관 특파원 =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후, 적이었던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활동하다 객사한 백제인 예식진(예<示변에 爾>寔進)의 묘지석 발굴은 다시 한번 망국민의 비극을 되씹어 보게 하고 있다.
예식진의 묘지석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 난원경(難元慶), 노정빈(盧庭賓)으로도 알려진 낙사계(諾思計)에 이어 백제 유민의 것으로서는 여섯 번째로 발굴된 백제 유민의 묘지석이다.
백제 멸망 8년 후인 668년 역시 나당연합군의 공세로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석으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인 남생(南生)과 남산(南産),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 헌성의 손자 비(琵) 등의 것이 발굴된 바 있다.
뤄양(洛陽)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은 지린(吉林)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2007년 3-4월호에 실린 '뤄양, 루산(魯山),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당대(唐代)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논문을 통해 예식진의 묘지석을 처음 소개했다.
◇ 묘지명의 제원 = 푸른 색깔을 띤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형의 묘지석 두껑은 한 변의 길이가 57㎝, 두께가 15㎝ 크기로 그 위에 전서(篆書體)로 '대당고좌위위대장군예식진묘지지명(大唐故左威衛大長軍예<示변에 爾>寔進墓誌之銘)'이라는 16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역시 정사각형에 한 변의 길이 58.5㎝, 두께 13㎝인 묘지석에는 한 줄에 18자씩, 18줄에 걸쳐 모두 288자의 해서체(諧書體) 글씨가 새겨져 있고, 4개 측면에는 12간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음각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동북사지에 실린 예식진의 묘지석 두껑과 묘지석 탁본 사진은 이와 함께 게재된 부여융, 흑치상지, 흑치준, 난원경, 낙사계의 그것에 비해 훨씬 글씨가 선명해 사진만으로도 그 내용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 예식진은 누구 = 묘지 전문(全文) 내용과 두 저자의 분석 등을 종합해 보면, 백제 웅천(熊川. 현재의 공주) 사람인 예식진은 백제의 고위무관으로 있으면서 조정 안팎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를 이어 백제 조정의 장관급 고위관리인 좌평(佐平)을 지냈고, 그도 고위관직에 올랐으나 46세 때인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가 돼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끌려 간다.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비롯한 58명의 백제 왕족.고관.장수 등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었고 그들중 '예식(예<示변에 爾>植)'이라는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는 '구당서(舊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기록으로 보아 예식진이 바로 예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묘지에 나타나는 그에 대한 평가로 보아 당나라 조정은 고위관직을 지낸 다른 백제 유민들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예처럼 포로로 끌려온 그를 귀순시켜 조정 경비임무를 맡긴 후 그의 능력과 자질을 높이 평가,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승진시켰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나라로 끌려간지 12년 만인 672년, 예식진은 현재의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시 산하 룽커우(龍口)시인 래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묘지에 기록돼 있으나 왜 그가 거주지인 시안이 아니라 황현에서 사망했는 지에는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 두 저자는 4년 전(668년)의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에 안치된 고구려 유민집단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과 언어가 통하는 그를 임시차사로 파견한 것은 아닐까"라는 견해를 표시하고 사망 원인은 추측에 맡길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당나라 조정은 예식진의 사망보고를 받은 후 조서를 내려 유해를 시안으로 운구토록해 관청에서 주관하는 장례절차를 치른 다음 당나라 고관대작들이 밀집해 있는 고양원(高陽原)에 장사함으로써 극진한 예우를 했다는 것이 두 저자의 평가다.
◇ 국내 전문가 평가 =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자료가 아직 국내에 알려진 바 없는, 새로 출토된 당나라 백제유민 관련 묘지"라고 확인하고 "바로 이 점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어 "예식진의 묘지를 통해 백제시대 최고의 유력 귀족가문으로 좌평을 역임해 온 예씨가 존재했음을 알게 됐다"면서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흑치상지의 선대는 대대로 좌평보다 한 단계 아래인 달솔(達率)을 역임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료 빈곤으로 백제사 연구의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터에 예식진 묘지는 앞으로 연구에 따라 백제사의 해명과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동향 등 여러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중국 문물당국이 분명한 출토 지점과 시기, 발굴자 등 고고학적 기초자료를 공개하는 동시에 학계가 실물을 확인하고 정밀한 묘지 내용을 판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don@yna.co.kr
(끝)

 


 

 

정림사지5층석탑미석각자(定林寺址五層石塔楣石刻字) 


<판독문>

판독자 : 김영심

 

  (西 側)
內給事」
上▨▨」
▨道▨」
▨▨▨」
長▨▨」
衝上柱」
國▨▨」
爲▨▨」
通▨▨」
▨▨▨」
衝▨▨」
▨▨▨」
▨▨▨」
▨▨▨」
▨▨▨」
▨▨▨」
▨▨▨」
▨▨▨」
▨▨長」
▨▨▨」
▨▨▨」
▨▨▨」
君恪▨」
▨▨府」
▨▨▨」
長▨▨」
▨州府」
▨▨▨」
同▨▨」
▨▨▨」
▨▨▨」
▨▨▨」
(北 側)
▨▨▨」
▨▨▨」
▨▨▨」
▨▨▨」
▨▨▨」
州司馬」
李▨▨」
▨曹▨」
州司▨」
陰▨▨」
▨曹司」
農▨▨」
▨▨▨」
▨▨▨」
▨▨▨」
曹▨▨」
▨▨▨」
鎧▨▨」
州司▨」
李思約」
鎧▨▨」
▨府兵」
曹李▨」
師▨▨」
▨▨▨」
▨▨▨」
▨▨▨」
▨▨▨」
▨▨▨」
▨▨▨」
▨▨▨」
▨▨▨」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정림사지 석탑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새긴 석탑 제1층의 미석부(楣石部) 각명(刻銘)으로 해서체이며 자경(字徑)은 3.6cm이다. 동남 양측은 불명이며, 서측과 북측만이 남아 있다. 서측과 북측은 각각 32행으로 1행은 3자씩인데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극히 적다. 연대는 현경(顯慶) 5년(660)으로 추정된다.

 


 

  
    당평제비(唐平濟碑) ---> " 고려정림사지5층석탑평제비명 " 으로 명칭을 변경해야함.

<판독문>

판독자 : 김영심
   
          
  大唐平百」
濟國碑銘」
顯慶五年歲在庚申八月己巳朔十五日癸未建」
洛州河南權懷素書」
【原夫皇王所以朝萬國制百靈淸海外而」
擧天維宅寰中而恢地絡莫不揚七德以」
御遐荒耀五兵而肅邊徼雖質文異軌步」
驟殊塗揖讓之與干戈受終之與革命皆」
載勞神武未戢佳兵是知洶水挻祅九」
遂戮洞庭構逆三苗已誅若乃式鑒千齡」
緬惟萬古當塗代漢典午承曹至於任重」
鑿門禮崇推轂馬伏波則鑄銅交阯竇車」
騎則勒石燕然竟不能覆鯷海之奔鯨絶」
狼山之封豕況丘樹磨滅聲塵寂寥圓鼎」
不傳方書莫紀蠢玆卉服竊命島洲襟帶」
九夷懸隔萬里恃斯險阨敢亂天常東伐」
親隣近違】明詔北連逆豎遠應梟聲」
況外棄直臣內信祅婦刑罰所及唯在忠」
良寵任所加必先諂倖標梅結怨杼軸銜」
悲我」
皇體二居尊通三表極珠衡毓慶日角騰」
輝揖五瑞而朝百神妙萬物而乘六辯正」
天柱於西北廻地紐於東南若夫席龍圖」
裒鳳紀懸金鏡齊玉燭拔窮鱗於涸轍拯」
危卵於傾巢哀此遺甿憤斯兇醜未親弔」
伐先命元戎使持節神丘嵎夷馬韓熊津」
等一十四道大摠官左武衛大將軍上柱」
國邢國公蘇定方疊遠構於曾城派長瀾」
於委水叶英圖於武帳標秀氣於文昌架」
衛霍而不追府彭韓而高視趙雲一身之」
膽勇冠三軍關羽萬人之敵聲雄百代捐」
軀殉國之志冒流鏑而逾堅輕生重義之」
心蹈前鋒而難奪心懸氷鏡鬼神無以秘」
其形質邁松筠風霜不能改其色至於養」
士卒撫邊夷愼四知去三惑厄頁氷泉以表」
潔含霜栢以凝貞不言而合詩書不行而」
中規矩將白雲而共爽與靑松而競高遠」
懷前人咸有慙德副大摠管冠軍大將軍」
▨▨▨衛將軍上柱國下博公劉伯英上」
▨▨▨▨▨風雲負廊廟之才懷將相之」
器言爲物範行▨士則詞溫布帛氣馥芝」
蘭績著旗常調諧鍾律重平生於晩節輕」
尺璧於寸陰破隗之勳常似不足平▨▨」
策口未涉言副大摠管使持節隴州諸軍」
事隴州刺史上柱國安夷公董寶德▨志」
飄擧雄圖傑立藝包三略策運後▨▨▨」
眞梅能令魏軍止渴無勞實纊終使楚卒」
忘寒副大摠管左領軍將軍金仁問氣度」
溫雅器識沈毅無小人之細行有君子之」
高風武旣止戈文亦柔遠行軍長史中書」
舍人梁行儀雲翹吐秀日鏡揚輝風偃搢」
紳道光雅俗鑒淸許郭望重荀裴辯箭騰」
波控九流於學海詞條發穎掩七澤於文」
亮▨太傅之深謀未堪捧轡杜鎭南之遠」
略何可扶輪暫遊鳳池式淸鯨壑邢國公」
運秘策縱驍雄陰羽開偃月之圖陽文含」
曉星之氣龍韜豹鈐必表於情源玄女黃」
公咸會於神用況乎稽天蟻聚迊地蜂飛」
類短狐之含沙似長虫也之吐霧連營則豺」
狼滿道結陣則梟獍彌山以此兇徒守斯」
窮險不知懸縷將絶墜之以千鈞累碁先」
危壓之以九鼎于時秋草衰而寒山淨凉」
飇擧而殺氣嚴逸足與流電爭飛疊鼓共」
奔雷競震命豊隆而後殿控列缺以前驅」
氣妖氛掃之以戈戟崇墉峻堞碎之以」
衝棚左將軍摠管右屯衛郞將上柱國祝」
阿師右一軍摠管使持節淄州刺史上柱」
國于元嗣地處關河材包文武挾山西之」
壯氣乘冀北之浮雲呼吸則江海停波嘯」
咤則風雷絶響嵎夷道副摠管右武候中」
郞將上柱國曹繼叔久預經綸備嘗艱」
險異廉頗之强飯同充國之老臣行軍長」
史沂州司馬杜爽質耀璿峯芳流桂畹追」
風籋電騁逸轡於西海排雲擊水搏勁翮」
於南溟驥足旣申鳳池可奪右一軍摠管」
宣威將軍行左驍衛郞將上柱國劉仁願」
資孝爲忠自家形國早聞周孔之敎晩習」
孫吳之書旣負英勇之才仍兼文吏之道」
邢國公奉緣」
聖旨委以斑條欲令金如粟而不窺馬如」
羊而莫頋右武衛中郞將金良圖左一軍」
摠管使持節沂州刺史上柱國馬延卿俱」
懷鐵石之心各勵鷹鸇之志擁三河之勁卒摠六郡」
之良家邢國公上奉」
神謀下專節度或中權陷陣或後勁先鋒出天入地」
之奇千變萬化致遠鉤深之妙電發風行星紀未移」
英聲載路邢國公仁同轉扇恩甚投醪逆命者則」
肅之以秋霜歸順者則涵之以春露一擧而平九種」
再捷而定三韓降劉弘之尺書則千城仰德發魯連」
之飛箭則萬里銜恩其王扶餘義慈及太子隆自外」
王餘孝一十三人幷大首領大佐平沙吒千福國辯」
成以下七百餘人旣入重闈竝就擒獲捨之馬革載」
以牛車佇薦司勳式獻」
淸廟仍變斯獷俗令沐玄猷露冕褰帷先擇忠款烹」
鮮製錦必選賢良庶使剖符績邁於龔黃鳴絃名高」
於卓魯凡置五都督卅七州二百五十縣戶卄四萬」
口六百卄萬各齊編戶咸變夷風夫書東觀紀南宮」
所以旌其善勒彛鼎銘景鍾所以表其功陵州長史」
判兵曹賀遂亮濫以庸才謬司文翰學輕俎豆氣重」
風雲職號將軍願與廉頗幷列官稱博士羞共賈誼」
爭衡不以衰容猶懷壯節提戈海外冀效涓塵六載」
賊庭九摧逋寇窮歸之隘意欲居中乃弁餘詞敬撝」
直筆但書成事無取浮華俾夫海變桑田同天地之」
永久洲移鬱島與日月而長懸其銘曰」
悠悠遂古茫茫厥初人倫草昧造化權輿冬巢夏穴」
殼飮鶉居以結以刻或畋或漁淳源旣往大道淪胥」
爰及三五代非一主揖讓唐虞革命湯武上齊七政」
下均九土屢擾干戈式淸區宇未漸西掖豈東戶」
奧我聖皇道叶穹蒼瑩鏡千古牢籠百王逖矣」
遠徼遐哉大荒咸稟正朔竝預封疆蠢玆九種獨隔」
三光叛換澤國憑凌水鄕天降飛將豹蔚龍驤弓含」
月影劒動星芒貔貅百萬電擧風揚前誅蟠木却翦」
扶桑氷銷夏日葉碎秋霜赳赳五營明明三令仰申」
廟略府齊軍政風嚴草衰日寒江淨霜戈夜動雲旗」
曉暎▨戟前驅吳鉤後勁巨猾授首逋誅請命威惠」
▨▨邊隅已定嘉樹不翦甘棠在詠花臺望月貝殿」
浮空疎鍾夜鏗淸梵晨通刊玆寶刹用紀殊功拒天關以永固橫地軸以無窮

** 【 】표시가 된 부분은 「당평제명 석조각자(唐平濟銘 石槽刻字)」에서 판독이 가능한 곳이다.
- 범례 -
① 이견이 있는 글자 중 명백하게 오류라고 판단되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싣
는 것을 윈칙으로 했다.
② 여러 판독은 다음과 같은 약자로 표기한다.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삼,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해,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총,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전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당평제비(唐平濟碑)  


<해석문>

해석자 : 김영심
   
          
  대저 천자(天子)가 만국(萬國)에게서 조회를 받고 백령(百靈)을지배하는 까닭은 해외(海外)를 맑게 해서 천유(天維)를 일으키고 환중(寰中)에 자리를 잡아서 지락(地絡)을넓힘으로써, 칠덕(七德)을드날려 먼 오랑캐의 땅을 어거하고 오병(五兵)을 빛내 변방을 고요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비록 질(質)과 문(文)이궤(軌)를 달리하고, 걷는 것과 달리는 것이 길을 달리한다 해도 읍양(揖讓)의 전쟁에 대해서와, 수종(受終)의 혁명(革命)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전쟁과 혁명은) 모두 헛되이 뛰어난 무용(武勇)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요, 훌륭한 병사를 거두지 않는 것이다. 이것으로 흉수(汹水)에서 재앙을 당기다가 구영(九嬰)이 마침내 주륙되고, 동정호(洞庭湖)에서 역모를 꾀하다가 삼묘(三苗)가 이미 주륙되었음을 알겠다. 이에 천년을 본보기로 삼고 천착하며, 만고(萬古)를 생각하니 출세해서 한나라를 대신하고, 사마(司馬) 벼슬을 맡아 조정을 계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은 착문(鑿門 : 문 뚫는 것 ?)을 중히 여기고 예(禮)는 추곡(推轂)을 높이 여기기도 하니 마복파(馬伏波)는 교지(交阯(趾))에서 동(銅)을 주조하고, 두거기(竇車騎)는연연(燕然)에서 돌에 (공을) 새겼으나 끝내 제해(鯷海)의 분경(奔鯨)을뒤집어엎거나 낭산(狼山)의 봉시(封豕)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 하물며 산의 나무가 다 닳아 없어지고 소리지르던 사슴이 고요해지며 단정(丹鼎)도 전해지지 않고 방서(方書)도 기록되지 않음에랴! 준동하는 이 오랑캐들이 도주(島洲 : 섬)에서 목숨을 훔치며, 요해처에 있는 구이(九夷)는 만리에 뚝 떨어져 있어서 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감히 천륜(天倫)을 어지럽혀 동쪽으로는 가까운 이웃을 쳐서 가까이 중국의 (밝은) 조칙(詔勅)을 어기며, 북쪽으로는 역수(逆豎)와 연계되어 멀리 효성(梟聲)에 응한다. 하물며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망한 계집을 믿어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한테만 형벌이 미치며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이 먼저 총애와 신임을 받아 표매(標梅)에 원망을 품고 저축(杼軸)에 슬픔을 머금는다.
우리 황제께서는 두 가지 것을(善을) 체득해서 높은 자리에 있으시고 세 가지 일에 통달하신 것이 매우 뛰어나시며, 성현(聖賢)의 용모는경사를 만들고 귀인(貴人)의 상(相)은 빛을 드날리셨다. 오서(五瑞)에 읍(揖)하여서 백신(百神)을 조회하고, 만물을 신묘하게 해서 육변(六辯)을 꾀하여 서북쪽에서는 하늘의 기둥을 바르게 하고 동남쪽에서는 지뉴(地紐)를 돌리셨다. 대저 용도(龍圖)를 진열하고 봉기(鳳紀)를 모으며 금경(金鏡)을 매달고 옥촉(玉燭)을 가지런히 하셨도다. 학철(涸轍)에서 궁지에 몰린 고기를 빼내주고, 기울어진 새집에서 위태로운 새알을 건져 주시면서도 이 유민을 불쌍히 여기고 저 흉포한 무리를 분히 여겨 친히 조민벌죄(弔民罰罪)하지 않고 먼저 장군들에게 명하셨다.
사지절(使持節) 신구(神丘)·우이(嵎夷)·마한(馬韓)·웅진(熊津) 등 십사도(十四道) 대총관(大摠管) 우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은 증성(曾城)에서 여러 번 구함(構陷)을 당하고 위수(委水)에서 긴 파란을 일으켰으며, 뛰어난 계획은 무장(武帳)에서 맞추었고 빼어난 기개는 문창성(文昌星)에 나타냈으니 위곽(衛霍)을 능가하면서도 따라잡지 않으며, 팽한(彭韓)을 굽어보면서도 높게 여긴다. 조운(趙雲)은 일신(一身)의 담력으로 용맹이 삼군(三軍)의 으뜸이 되었고 관우(關羽)는 만인(萬人)을 대적할 만한 능력으로 명성이 백대(百代)에 떨쳤다. 자기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을 가지고 유적(流鏑)을 무릅쓰면서도 더욱 더 견고해졌고 목숨을 가벼이 하고 의(義)를 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앞장을 섰어도 (마음을) 빼앗기 어려웠다. 마음은 빙경(氷鏡)에드러나 있어 귀신도 그 형상을 감출 수 없고, 바탕은 송균(松筠)에(절조 갖추기를) 힘써 바람과 서리도 그 색깔을 고칠 수 없었다. 사졸(士卒)을 길러 변방 오랑캐를 어루만짐에 이르러서는 사지(四知)를 삼가고 삼혹(三惑)을 제거하여, 빙천(氷泉)을 고요하게 해서 깨끗함을 드러내고 서리맞은 잣나무를 품고서 정절을 굳게 하니 말하지 않아도 『시경(詩經)』·『서경(書經)』에 부합하고 행하지 않아도 법도(法度)에 들어맞는다. 흰 구름을 거느리고서 상쾌함을 함께 하고, 푸른 소나무와 더불어서 고고함을 다투면서도 멀리 앞사람을 생각하여 모두 덕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이 있었다.
부대총관(副大摠管)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위장군(衛將軍) 상주국(上柱國) 하박공(下博公) 유백영(劉伯英)은 위로는 ▨▨▨ ▨▨풍운(風雲)으로 정치를 할 만한 재주를 가졌고 장상(將相)의 그릇을 품었다. 말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고 행동은 군대의 법칙이 되었으며, 말씀(詞)은 포백(布帛)을 따뜻하게 하고 향기는 연꽃과 난초의 향을 내었으며, 공적은 기상(旗常)에 드러나고 조리는 종률(鍾律)에 맞았다. 만년(晩年)의 절개보다 평생(平生)을 중히 여기고 짧은 시간보다 1척이나 되는 옥을 가벼히 여기며 매우 높은 공적도 항상 부족한 듯이 여겨 평책종책(平策縱策)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부대총관(副大摠管) 사지절(使持節) 농주제군사(隴州諸軍事) 농주자사(隴州刺史) 상주국(上柱國) 안이공(安夷公) 동보덕(董寶德)은 ▨는 드날릴 것에 뜻을 두고 걸출함은 뛰어나게 설 것을 도모했으며, 재주는 삼략(三略)에 통하고 계책은 후(後)▨를 움직였다. ▨▨진매(眞梅)하여 능히 위(魏)나라 군사로 하여금 목마름을 그치게 하고, 수고롭히지 않고도 솜옷을 채워 끝내 초(楚)나라 병졸로 하여금 추위를 잊게 했다.
부대총관(副大摠管) 좌령군장군(佐領軍將軍) 김인문(金仁問)은 기량(氣量)이 온화하고 아담하며, 기국(器局)과 식견(識見)이 침착하고 굳세어서 소인배의 자잘한 행위는 없고 군자의 고매한 풍모만 있었으며, 그의 무(武)는 싸우지 않고도 드러났으며 문(文) 또한 부드럽고 원대했다.
행군장사(行軍長史) 중서사인(中書舍人) 양행의(梁行儀)는 구름같은 머리꾸미개로 빼어남을 드러내고 해거울로 빛을 드날리며, 풍모는 진신(搢紳)보다 뛰어나고 도(道)는 아속(雅俗)을 빛내어 거울은 허곽(許郭)보다맑고 덕망은 순배(荀裴)보다 중하였다. 분별 잘하는 것(辯箭)은 파도를 튀어 오르게 하여 배움의 바다에서 구류(九流)를 잡아당기고, 문장의 조리는 빼어남을 발하여 글 잘하는 사람에서 칠택(七澤)을가리웠다. ▨태부(太傅)의 심오한 계책으로도 그의 말 고삐 받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두진남(杜鎭南)의 원대한 계략으로도 그의 수레바퀴를 붙들 수 없었도다. 잠시 봉지(鳳池)에 있으면서(중서성(中書省)에 있으면서) (이번 원정을 도와) 경학(鯨壑)을 깨끗하게 하였다.
형국공(邢國公)은 비책(秘策)을 움직이고 용감하고 굳세게 행동하여, 음우(陰羽)는 언월(偃月)의 계획을 열고 양문(陽文)은 샛별의 기운을 머금었다. 용도(龍圖)와 표검(豹鈐)은 반드시 정원(情源)에 드러내고 현녀(玄女)와 황공(黃公)은 신용(神用)에 모두 모였다. 하물며 하늘 끝까지 개미처럼 모여들고 땅을 삥 둘러 벌떼처럼 날아드는 것이 단호(短狐)가 모래를 머금은 것과 유사하고 장사(長蛇)가 안개를 토해내는 것과 비슷하여 영(營)을 서로 합치면 시랑(豺狼)이길에 꽉 차고 진(陳)을 맺으면 효경(梟獍)이 산에 꽉 참에랴! 이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 이 궁벽지고 험한 곳을 지키고서는 매달린 줄이 장차 끊어져서 대단히 무겁게 떨어지고, 쌓아올린 바둑돌이 먼저 위태로와 구정(九鼎)으로 누르게 될 줄은 알지 못한다. 이때 가을 풀이 시들어 가을산이맑아지고 서늘한 바람이 일어 추운 기운이 심해지며, 빠른 걸음과 재빨리 지나가는 번개가 다투어 날고 첩고(疊鼓)와 분뢰(奔雷)가 다투어 친다. 풍(豊)·융(隆)에게 명하여 맨 뒤에 서게 하고 열결(列缺)에게앞장서게 하며, 간사한 기운과 요망한 기운은 칼과 창으로 쓸어버리고 높은 담과 가파른 성가퀴는 충붕(衝棚)으로 부숴버린다.
좌장군(左將軍) 총관(摠管) 우둔위랑장(右屯衛郞將) 상주국(上柱國) 축아사(祝阿師)와 우일군총관(右一軍摠管) 사지절(使持節) 치주자사(淄州刺史) 상주국(上柱國) 우원사(于元嗣)는 지역은 관하(關河)를 차지하고 있고 재주는 문무(文武)를 아울렀으며 산서(山西)의 장엄한 기운을 끼고 기북(冀北)의 뜬 구름을 타고서 호흡을 하면 강과 바다가 파도를 멈추고 소리내어 꾸짖으면 바람과 천둥이 소리를 끊는다.
우이도부총관(嵎夷道副摠管) 우무후(右武候) 중랑장(中郞將) 상주국(上柱國) 조계숙(曺繼叔)은 오랫동안 정치에 참여하여 일찌기 어렵고 험한 것을 맛본 것이 염파(廉頗)의 강반(强飯)과 다르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늙은 신하와 같다.
행군장사(行軍長史) 기주사마(岐州司馬) 두상(杜爽)은 바탕은 아름다운 봉우리를 빛내고 향기는 계수나무밭에 흐른다. 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밟아 서해(西海)에서 뛰어난 말을 달리며, 구름을 밀치고 물을 쳐 남해(南海)에서 굳센 깃촉을 잡으니 기족(驥足)이 이미 펴져서 봉지(鳳池 : 중서성 재상)를 가히 빼앗을 만하다.
우일군총관(右一軍摠管) 선위장군(宣威將軍) 행좌효위랑장(行左驍衛郞將) 상주국(上柱國) 유인원(劉仁願)은 효성을 바탕삼아 충성을 하고 집에서 비롯해서 나라를 이루어 일찌기 주공(周孔)의 가르침을 듣고, 나중에는 손오(孫吳)의책을 익혔으며 이미 영용(英勇)한 재주를 띠고 아울러 문리(文吏)의 도(道)를 겸하였다.
형국공(邢國公)은 성지(聖旨)를 받들어 따르고 반조(斑條)를 위임받아 금(金)이 조와 같이 많아도 엿보지 않고 말이 양과 같이 순해도 조용하지 않게 하고자 했다.
우무위중랑장(右武衛中郞將) 김양도(金良圖), 좌일군총관(左一軍摠管) 사지절(使持節) 기주자사(沂州刺史) 상주국(上柱國) 마연경(馬延卿)은 모두 굳은 마음을 품고 각기 맹위를 떨치고자 힘써 삼하(三河)의 굳센 군사를 끼고 육군(六郡)의 지체있는 집안을 거느렸다.
형국공(邢國公)은 위로 뛰어난 계략을 받들고 아래로 절도(節度)를 오로지 하여 혹은 중권(中權)으로 군대를 함락시키기도 하고 혹은 후경(後勁)으로 선봉이 되게 해서 하늘에서 솟아나고 땅으로 꺼지는 기이함으로 천번 만번 변화하며, 멀리까지 이르고 깊은 데까지 끌어당기는 기묘함으로 번개같이 일어나고 바람처럼 가서 성기(星紀)가 미처 옮겨지기도 전에 훌륭한 명성이 길에 가득 찼다. 형국공(邢國公)은 인(仁)은 전선(轉扇)과 같고 은혜는 투료(投醪)보다 심하여 명을 거스르는 자는 추상(秋霜)과 같은 위엄으로 숙청하고, 귀순하는 자는 춘로(春露)와 같은 은택으로 적셔 주었다. 한 번 군대를 일으켜 구종(九種)을 평정하고 두 번 승전해서 삼한(三韓)을 평정하여 유홍(劉弘)의 간단한 글을 내리니 천성이 덕을 우러르고 노련(魯連)의 비전(飛箭)을 쏘니 만리(萬里)가 은혜를 머금었다.
그 왕(王) 부여의자(扶餘義慈) 및 태자(太子) 융(隆) 이외 왕자(王子) (餘)효(孝) 13인은 대수령(大首領) 대좌평(大佐平) 사탁천복(沙吒千福), 국변성(國辯成) 이하 700여 인과 함께 이미 궁궐에 들어가 있다가 모두 사로잡히니 말가죽을 버리게 하고 우거(牛車)에 실어다가 잠시 있다가 사훈(司勳)에 올리고 이에 청묘(淸廟)에 드렸다. 인하여 이 사나운 풍습을 바꾸어서 현묘한 꾀에 젖게끔 하였으니 면류관을 벗고 휘장을 걷음에는 먼저 충성되고 정성된 사람을 택하고, 생선을 삶고 비단을 만듦에는 반드시 현량한 사람을 선택해야 거의 부부(剖符)로 하여금 공적이 공황(龔黃)보다 뛰어나고 명현(鳴絃)으로 하여금 이름이 탁로(卓魯)보다 높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5도독(都督) 37주(州) 250현(縣)을 두고 호(戶) 24만, 口 620만을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하여 모두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게 했다. 대저 동관(東觀)에 기록하고 남궁(南宮)에 기록하는 것은 그 선행을 드러내기 위함이요, 이정(彛鼎)에 새기고 경종(景鍾)에 새기는 것은 그 공(功)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능주장사(陵州長史) 판병조(判兵曹) 하수량 (賀遂亮)이 외람되이 용렬한 재주를 가지고 잘못 문한(文翰)을 맡아 배움은 조두(俎豆)를 가벼이 여기고 기운은 풍운(風雲)을 중히 여기면서도 직책은 장군(將軍)이라 불리워 염파(廉頗)의 열(列)에 들기를 원하고 벼슬은 박사(博士)라 칭해져 가의(賈誼)와 함께 우열을 다투기를 바란다. 쇠약한 용모라 하지 않고 오히려 장엄한 절개를 품어 해외(海外)에서 무기를 들고 근소한 것이라도 본받기를 바라고, 여섯 번 적정(敵庭)에 실려가고 아홉번 달아나다가 잡혀 궁벽해서 돌아와 설 때도 뜻은 거중(居中)하고자 한다. 이에 남은 할 말을 안하고 삼가 직필을 휘둘러 다만 성사된 일만을 쓰고 부화(浮華)는 취하지 않아 저 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되어도 천지가 영구한 것과 같이 하고 모래톱이 우거진 섬으로 바뀌어도 일월(日月)과 더불어 길이 매달리게 하고자 한다.
그 명(銘)에 이르기를
아득히 먼 옛날, 아득한 그 처음에 인륜(人倫)은 아직 혼돈하여 어두웠으나 천지 자연의 이치는 비롯되었다. 겨울에 보금자리를 지었다가 여름에는 방랑하며 껍질을 숨기고 순거(鶉居)하여 (집을) 맺기도 하고 새기기도 하며, 혹은 사냥, 혹은 고기잡이도 하니 청정한 근원이 이미 지나갔고 큰 도(道)가 빠져 없어졌다. 이에 삼황오제(三皇五帝)에 미쳐 대대로 한 주인이 아니어서 선양(禪讓)을 한 것은 당요(唐堯), 우순(虞舜)이요, 혁명(革命)을 한 것은 탕왕(湯王)·무왕(武王)이니 위로는 칠정(七政)을 가지런히 하고 아래로는 九州를 고르게 하며, 여러번 무기를 소란케 하여 이에 천하를 맑게 하였으되 아직 서액(西掖)을 적시지도 못했으니 어찌 동호(東戶)에 미치겠는가?
아! 우리 황제께서는 도(道)가 궁창(穹蒼)에 화합하고 영예(榮譽)는 천고에 거울이 되어 뭇왕을 통합하니 멀고 먼 변방과 아득히 먼 대황(大荒)이 모두 정삭(正朔)을 품부받고 아울러 봉강(封疆)에 참예하였다. 준동하는 이 구종(九種)이 홀로 삼광(三光)을 막아놓고서 은혜를 베푼 나라에 배반을 하고 수향(水鄕)을 침범하니 하늘이 비장(飛將)을 내리고 표범이 읍양(揖讓)을 성하게 하며 활은 달그림자를 머금고 칼은 별빛을 움직인다. 용맹스런 군대 백만이 번개처럼 일어나고 바람같이 드날려 앞에서는 반목(蟠木)을 베다가도, 물러나서는 부상(扶桑)을 베어버리며 얼음은 여름해에 녹여버리고 잎은 가을서리에 부서지게 한다. 굳센 오영(五營)과 밝고 밝은 삼령(三令)으로, 우러러서는 묘략(廟略)을 펴고 굽어서는 군정(軍政)을 가지런히 하여 바람은 풀잎이 시들 때보다 엄하고 태양은 강물이 맑을 때보다 차도다. 서리같이 매서운 창은 밤에 움직이고 구름그린 깃발은 새벽에 빛나 재잘거리며 전군(前軍)을 찌르고 큰 소리치며 후비(後備)의 정병(精兵)을 잡아당기니 크고 교활한 놈이 머리를 바치고, 체포되어 주살될 놈이 목숨을 청한다. 위엄과 은혜가 ▨▨하여 변방 모퉁이가 이미 평정되고 아름다운 나무가 베어지지 않아 임금의 은혜를 읊고 화대(花臺)가 달을 바라보니 패전(貝殿)이 공중에 떠있고 그림을 새긴 종(鍾)이 밤에 울리니 맑고 맑은 깨끗함이 새벽에 통한다. 이 보찰(寶刹)을 깎아 특별한 공을 기록하니 천관(天關)을 막아서 영원히 견고하고 지축(地軸)을 가로질러서 끝이 없기를 바란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당평제비(唐平濟碑)  


 
 <개 관>
  
  
시대   백제
 
 
연대   660년
 
 
유형/재질   비문 / 화강암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현재 높이 8.33m(?) 
 
 
출토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 
 
 
소재지   (한국)-충청남도부여군부여읍 동남리 정림사지 
 
 
서체   비문(碑文) : 해서(楷書), 제액(題額) : 전서(篆書)
 
 
찬자/서자/각자    하수량(賀遂亮) / 권회소(權懷素) / 미상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東南里)에 있는 화강석으로 만든 방형(方形) 5층 석탑 제1층 사면(四面)에 새겨져 있다.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는 석제 유물(石槽)이 구부여군아(舊扶餘郡衙)의 부지내(敷地內)에서 발견됨으로서 평제비(平濟碑)가 두 가지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느 것이 원본(原本)이고 어느 것이 복각(復刻)인가, 아니면 원(原) 비석은 따로 있고 두 가지 모두 복각인가 하는 문제와 소위 평제탑이 이 비명(碑銘)을 새기기 위해서 세워진 것인가, 아니면 전부터 있었던 탑을 이용해서 거기에 비명을 새긴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부여군현지(扶餘郡縣誌)』에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인용하여 “그 비는 현서2리(縣西二里)에 있고 소정방(蘇定方)이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킴에 이르러 ‘입석기공(立石紀功)’했다”고 하는 점, 또 지금의 소위 평제탑이 현남2리(縣南二里)에 있는 점, 당시 소정방보다 하위(下位)에 있던 유인원(劉仁願)을 위해서 따로 비가 세워져 있는 점으로 보아 재래의 탑에 새겼다기보다는 소정방을 위해서 따로 특별히 따로 현서이리(縣西二里) 지점에 비를 세웠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동국여지승람』 편찬 후 군현지 편찬 때까지 사이에 진짜 비가 없어지고 그 복각인 탑문(搭文)만이 세상에 알려져 군현지에는 그것을 평제비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정방의 지위나 역할로 보아 원래 있던 백제의 대표적인 탑에 그 공을 새겨 넣었을 가능성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소위 당평제탑(唐平濟塔) 제1층의 탑신(塔身)은 높이 136.4cm, 폭 218.2cm이다. 제1면은 24행, 제2면은 29행, 제3면은 28행, 제4면은 36행 등 총 117행이며 각 행은 16자 또는 18자인데, 자경(字徑)은 4.5cm로 해서체(楷書體)이다. 제액(題額)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의 8자를 2행으로 전서(篆書), 그 아래에 ‘현경(顯慶) … 계미건(癸未建)’이라고 2행으로 각서(刻書)했는데 전서체(篆書體)이다. 연대는 신라 660년(무열왕 7)이며, 내용은 대체로 소정방의 기공비(紀功碑)로서 당(唐) 고종(高宗)이 문무왕과 힘을 합쳐 백제를 쳐서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키고 마침내 이를 토파(討破)한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문장은 사륙병려체(四六騈驪體)로 과대(誇大)한 필치를 사용하였고, 서체(書體)는 정해(正楷)로 당조(唐調)에 육조(六朝)의 여풍(餘風)이 가미되었다. 당(唐) 학사(學士) 하수량(賀遂亮)의 글에 당(唐) 학사(學士) 권회소(權懷素)가 썼다.  
 
  
 
 
(단행본)『朝鮮金石總覽』上
(단행본)權悳永,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학연문화사
(논문)李道學, 1997, 「定林寺址 五層塔 碑銘과 그 작성 배경」 『先史와 古代』 8, 韓國古代學會
(단행본)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Ⅰ, 國史編纂委員會
(단행본)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단행본)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古代篇, 亞細亞文化社
(논문)金允經, 1929, 「大唐平百濟國碑に就いて」 『史苑』1-5
(논문)喜田貞吉, 1925, 「大唐平百濟國碑に關する疑問」『考古學雜誌』 15-5, 日本考古學會
(논문)管政友, 1887, 「唐平百濟國碑」 『如蘭社話』20-12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판독문>

판독자 : 김영심  
   
          
  盖聞龍躍天衢必藉風雲之力聖人膺運亦待將帥之功方邵▨▨▨▨周衛霍馳節於强漢其能繼▨歌詠者惟在劉將軍乎君名仁願字士元雕陰大斌人也▨土開家▨▨」
建旆於東國分茅錫讓王孫杖節於北疆三楚盛其衣簪六郡稱其軒冕分枝布葉可略而言高祖▨▨散騎常侍寧東將軍徐州大中正彭城穆公屬魏室不綱尒朱陵虐東京淪」
喪▨▨西遷陪奉鑾輿徙居關內尋除鎭北大將軍持節都督河北諸軍事綏州刺史因官食封仍代居之▨鼓▨▨之▨北州之望曾祖平鎭北大將軍朔方郡守綏州刺史上開」
府儀同三司襲爵彭城郡開國公祖懿周驃騎大將軍儀同三司隨使持節綏州諸軍事綏州摠管▨州刺史▨▨郡開國公父大俱皇朝使持節同綏二州摠管卄四州諸軍」
事綏州刺史尋遷都督左武衛將軍右驍衛大將軍勝夏二州道行軍摠管冠軍大將軍鎭北大將軍上柱國別封彭城郡開國公竝桂馥蘭芬金貞玉潤名高大樹譽滿詞林珪璋」
閥閱見於斯矣君稟度河基資靈嶽瀆牆宇凝峻孝敬日躋命偶昌期逢時遇主欽明啓運光宅普天太宗文皇帝乃聖乃神乃文乃武倂呑六合席卷八荒博訪群材用康大」
寶英髦特達幽顯必臻君以地蔭膏腴門承勳業令聞之譽僉議攸歸起家爲弘文館學生▨進右親衛▨▨▨▨▨▨▨▨旅力▨健膽氣過人嘗從出遊手格猛獸」
太宗深歎異之特加賞賜卽降恩詔入仗內供奉貞觀十九年太宗親駈六軍省方遼碣千乘雷動萬騎雲屯▨▨▨▨▨▨畢集而高麗賊臣蓋蘇文獨生携貳鳩聚亡命」
招納姦回囚其君長擧兵稱亂▨率蟻衆敢抗王師皇赫斯怒龔行弔伐兵鋒所到若破▨▨▨其遼東盖牟▨▨▨十城駐▨▨▨新城安地等三▨虜其大將延壽惠眞俘」
其甲卒一十六萬君身預戎旃手奉羈靮前茅後殿每陣先登摧强陷堅同於拉朽戰勝攻取▨▨▨▨▨賜物乘馬一疋▨▨▨▨▨▨▨弓二張大箭三百隻竝是供奉」
御仗特加褒異遼東行還累前後戰功超拜上柱國別封黎陽縣開國公擢授右武衛鳳鳴府左果毅都尉壓領飛騎於北門長上卄一年任行軍大摠管隨英國公李勣經略延陀」
竝迎接車鼻安撫九姓鐵勒行還改授右▨衛郞將依舊▨▨供奉卄二年又任大摠管向遼東經略以公事除名其年更授右武衛神通府左果毅都尉卄三年」
太宗宮車晏駕宗廟社稷不可一日無▨儲皇諒闇纂戎▨▨周邦雖舊厥政惟新凡百庶寮勉修其職君以沐浴聖智材明被用未踰朞月又蒙」
今上駈使永徽二年更入鐵勒撫慰行隨▨勅簡折衝果毅强明堪統領者隨機處分君受▨經略頻度遼東五年授蔥山道行軍大摠管隨盧國公程知節討▨賀魯行還從行」
洛陽顯慶元年遷左驍衛郞將二年應詔擧文武高第▨進三階後入鐵勒安撫四年入吐谷渾及吐藩宣勞五年授嵎夷道行軍大摠管隨邢國公蘇定方平破百濟執其王扶」
餘義慈竝太子隆及佐平▨率以下七百餘人自外首領古魯都▨奉武▨扶餘生受延尒普羅等竝見機而作立功歸順或入移絳闕或入▨▨▨合境遺黎安堵如舊設官分」
職各有司存卽以君爲都護兼知留鎭新羅王金春秋亦遣少子金泰同城固守雖夷夏有殊長幼懸隔君綏和接待恩若弟兄功業克就盖由於▨然昔周武平殷商奄續叛漢定」
西域䟽勒被圍餘風未久懷草竊蠻貊之俗易動難安況北方逋寇元來未附旣見雕戈東邁錦纜西浮妖孼侏張仍圖反逆卽有僞僧道琛僞扞率鬼室福信出自閭巷爲其魁」
首招集狂狡堡據任存蜂屯蝟起彌山滿谷假名盜位竝▨將軍隳城破邑漸入中部堙井刋木壞宅焚廬所過殘滅略無遺噍凶威旣逞人皆脅從布柵連營攻圍留連雲梯俯瞰」
地道旁通擊石飛矢星奔雨落晝夜連戰朝夕憑陵自謂興亡繼絶▨▨▨▨▨▨閑然高枕不與爭鋒堅甲利兵以▨其弊賊等曠日持久力竭氣衰君乃陰行間諜▨其卒墮構」
▨▨▨▨釁待時鑿門開穴縱兵掩襲 (중간의 43자 판독 불가) 柵二城時屬窮冬▨▨▨▨ (중략; 제22행부터 제32행까지 판독 전혀 불가능)

제33행: 제26・27자는 ‘二城’으로 판독
제34행: 제22자부터는 ‘害▨牒新羅追兵前▨▨▨▨▨▨▨▨▨乘
▨▨其’로 판독
- 범례 -
① 이견이 있는 글자 중 명백하게 오류라고 판단되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싣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② 여러 판독은 다음과 같은 약자로 표기한다.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삼,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해,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총,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전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해석문>

해석자 : 김영심
   
          
  대저 듣건대 용이 하늘 거리에서 뛰놀 때는 반드시 풍운(風雲)의 힘에 도움을 받고 성인이 운(運)을 받을 때도 장수의 공을 기다린다 하였으니, 방숙(方叔)과 소호(邵虎)는 ▨주(▨周)에서 ▨▨하고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은 강한 한(漢)나라에서 부절(符節)을 빨리 전했다. 그 능히 (이들을) 계승하여 읊조릴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유장군(劉將軍)인 듯하다.
군(君)의 이름은 인원(仁願)이고 자(字)는 사원(士元)이며 조음(雕陰) 대빈(大斌) 사람이다. ▨토(▨土) 개가(開家)하여(집안을 열어) ▨▨가 동국(東國)에 깃발을 세우게 하고, 모토(茅土)를 분봉(分封)하여 넘겨줌으로써 왕손(王孫)이 북강(北疆)에서 정절(旌節)을 가지게 하였다. 삼초(三楚)가 그 관리들을 장하게 여기고 육군(六郡)이 그 관직을 칭송하니, 갈라져 나간 가지와 퍼진 잎사귀(갈라져 나온 자손・종족)를 대략 말할 수 있다.
고조(高祖) ▨▨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영동장군(寧東將軍) 서주대중정(徐州大中正) 팽성목공(彭城穆公)이다. 위(魏)나라 왕실이 기강이 없어져 이주(爾朱)가 전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동경(東京 : 洛陽)이 망하여 없어지고 ▨▨서쪽으로 옮긴 때를 당해 천자의 수레를 받들어 모시고 관내(關內)로옮겨 살았다. 얼마 있다가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지절(持節) 도독(都督) 하북제군사(河北諸軍事) 수주자사(綬州刺史)를 제수받고 관직으로 말미암아 식읍(食邑)을 받고 대대로 거기에서 살아 ▨고▨▨지(▨鼓▨▨之)하여 ▨북주지망(▨北州之望)했다.
증조(曾祖) 평(平)은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삭방군수(朔方郡守) 수주자사(綬州刺史)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로서 봉작을 이어받아 팽성군개국공(彭城郡開國公)이 되었다.
조(祖) 의조(懿周)는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 수(隨 : 隋나라의)사지절(使持節) 수주제군사(綬州諸軍事) 수주총관(綬州摠管) ▨주자사(▨州刺史) ▨▨군개국공(▨▨郡開國公)이다.
부(父) 대구(大俱)는 황조(皇朝 : 唐나라)의 사지절(使持節) 동・수이주총관(同・綬二州摠管) 24주제군사(州諸軍事) 수주자사(綬州刺史)였는데 얼마 있다가 도독(都督)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승・하이주도행군총관(勝・夏二州道行軍摠管) 관군대장군(冠軍大將軍)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상주국(上柱國)으로 관직이 바뀌고 따로 팽성군개국공(彭城郡開國公)으로 봉해졌다. 모두 계수나무 향기와 난꽃 향내가 있었고 쇠처럼 곧고 옥처럼 윤이 났으며 명성이 커다란 나무보다 높고 명예가 사림(詞林)에 꽉 차니 인품이 높은 벌열을 여기에서 보겠도다.
군(君)은 하기(河基)에서 도량을 품부받고, 악독(嶽瀆)에서 정기를 자뢰받아 도량이 믿음직스럽고 효성과 공경이 나날이 진보했다. 운명이 창성한 때에 짝하고, 좋은 때를 만나고 좋은 임금을 만났으며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여 운을 열어서 넓고 너른 하늘을(천하를) 밝게 다스렸다.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는 성스럽고 영묘하시며,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셔서 육합(六合)을 병탄하고 팔황(八荒)을 석권하여 널리 여러 재주있는 사람을 찾아서 대보(大寶)를 편하게 하였으며, 뛰어난 사람은 특별히 뛰어나게 하고 어두운 사람・밝은 사람은 반드시 도달하게 하셨다.
군(君)은 지위가 풍요로운 데 힘입고 가문이 공적을 이어서, 아름다운 소문의 기림과 뭇사람들의 의견이 합치되는 바였다. 집안을 일으키어 홍문관학생(弘文館學生)이 되었고 (승진하여) 우친위(右親衛)▨▨▨▨▨▨▨▨가 되었다. 완력은 ▨건(▨健)하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 일찌기 왕을 수행해서 다른 곳에 가 노닐 때 맨손으로 사나운 짐승을 사로잡으니 태종이 출중함에 깊이 감탄하여 특별히 상을 더 내리고 곧 은혜로운 조서를 내려 관내(闕內)에 들어와 내봉공(內供奉)을 맡게 했다.
정관(貞觀) 19년(645) 태종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서 멀고 험한 곳을 순행하니 천승(千乘)이 우뢰처럼 격동하고 만기(萬騎)가 구름처럼 모여 ▨▨▨▨▨▨ 다 모였으나 고구려의 역신(逆臣) 개소문(蓋蘇文)만이 홀로 딴 마음을 품고서 망명한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간사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 군장을 가두고 병사를 들어 난을 일으켜서는 개미같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감히 왕의 군대에 대항하였다. 황제께서 대단히 성을 내시어 조민벌죄(弔民伐罪)를 삼가 행하시니 군대의 날카로운 기세가 이르는 곳마다 마치 ▨▨를 깨뜨리는 것과 같아서 요동(遼東)・개모(蓋牟)・▨▨ 등 10성(城)을 ▨하고 ▨▨・신성(新城)・안지(安地) 등 3성에 주둔하여 그 대장 연수(延壽)・혜진(惠眞)을 사로잡고 그 군사 16만을 포로로 잡았다. 군(君)은 몸소 전장에 참여하여 손수 굴레와 고삐를 받들고, 척후병과후군(後軍)이매번 진을 칠 때마다 먼저 올라 강하고 견고한 성을 꺾고 함락시키기를 썩은 나무를 꺾어 부러뜨리는 것과 같이 쉽게 하여서 싸움에 이기고 공격하여 빼앗은 것이 ▨▨▨▨이었다. (공에 대하여) 내린 물건이 승마(乘馬) 1필(疋)과 ▨▨▨▨▨▨▨궁(弓) 2장(張), 큰 화살 300척(隻)인데 모두 천자를 호위하는 호위병으로서 특별히 더 포상을 받은 것이다. 요동에서 돌아온 뒤 그간 누차의 전공(戰功)으로 상주국(上柱國)에 특별히 배수되고 따로 여양현개국공(黎陽縣開國公)으로 봉해졌으며 우무위(右武衛) 봉명부(鳳鳴府)의 좌과의도위(左果毅都衛)로 임명되어 북문장상(北門長上)의 기병을 총괄하였다.
21년(647)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임명되어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따라 설연타(薛延陀)를 경략하고 아울러 거비(車鼻)를 영접하였으며 구성(九姓) 철륵(鐵勒)을 안무하였다. 돌아옴에 다시 우무위랑장(右武衛郞將)을 제수받고 예전과 같이 [내]공봉([內]供奉)을 맡았다.
22년(648)에 또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어 요동을 향해 경략하려다가 다른 공적(公的)인 일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해에 다시 우무위(右武衛) 신통부(神通府)의 좌과의도위(左果毅都慰)를 제수받았다. 23년(649)에 태종이 붕어함에 종묘 사직은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없어, 황태자가 거상중(居喪中)에서도 병장기를 모아 ▨▨하니, “주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그 정치는 새롭다”고 한 것과 같았다. 군(君)은 천자의 지혜를 입고 재주와 명민함으로 기용이 되어 한 달도 되지 않아 또 현재 임금의 부림을 받았다.
영휘(永徽) 2년(651) 다시 철륵(鐵勒)에 들어가 위무하였는데, 돌아와서는 조칙에 따라서 적의 예봉을 꺾음이 결단성이 있고 굳세며, 강하고 현명함이 통령(統領)을 감당할 만한 자로 간택되어 때에 맞춰 처분되었다.
군(君)은 경략(經略)을 임명받고서 자주 요동을 다녀와 5년(654)에 총산도행군대총관(蔥山道行軍大摠管)을 제수받고 노국공(盧國公) 정지절(程知節)을 따라 ▨하로(▨賀魯)를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낙양으로 천자의 행차를 좇았다.
현경(顯慶) 원년(元年 : 656) 좌효위랑장(左驍衛郞將)으로 관직이 바뀌고, 2년(657) 조서에 응하여 문무가 뛰어난 관리를 천거하였으며 세 관등을 특진하였다. 후에 철륵(鐵勒)에 가서 이들을 위무하였다. 4년(659)에는 토욕혼(吐谷渾) 및 토번(吐藩)에 들어가 있는 힘을 다해 다스렸다. 5년(660)에 우이도행군대총관(嵎夷道行軍大摠管)을 제수받고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백제를 완전히 평정하고 그 왕 부여의자(扶餘義慈)와 태자(太子) 융(隆) 및 좌평(佐平)・[달]솔([達]率) 이하 700여 인을 사로잡았으며 이외 수령 고로도▨(古魯都▨), 봉무▨부여생(奉武▨扶餘生), 수연이보라(受延尒普羅) 등은 모두 (당군(唐軍)의 작전에) 참여시켜, (이들이) 공을 세우고 귀순하니 혹은 맞아들여서 대궐로 재빨리 오게 하고, 혹은 들어오게 해서 ▨▨▨하니 그 지역 전체의 유민 들이 예전과 같이 편안히 여겼다. 관직을 설치해서 직분을 나누어 각기 맡은 바가 있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군(君)을 도호(都護) 겸 지유진(知留鎭)으로 삼았다.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 또한 막내 아들 김태(金泰)를 보내어 함께 성을 굳게 지키게 하니, 비록 오랑캐와 중국의 다름이 있고 어른과 아이의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나, 군(君)이 마음 편하게 접대해 주는 것이 그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공업(功業)이 능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옛날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평정할 때 상엄(商奄)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한나라가 서역을 평정할 때 소륵(䟽勒)에서 포위당하였으니, 이는 남아있는 나쁜 풍습이 아직 없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품어온 생각이 좀도둑질되었기 때문이다. 만맥(蠻貊)의 풍속도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려운데, 하물며 북방으로 달아난 구적(寇賊)들이야! 원래부터 따르지 않았고, 이미 조과(雕戈)를 보았으며 동쪽으로는 금람(錦纜)으로 순행하고 서쪽으로는 재앙의 조짐을 띄워 강성해지면 이내 반역을 도모하니 곧 가짜 승려 도침(道琛), 가짜 한솔(扞率) 귀실복신(鬼室福信)이 그들이다. 민간에서 나와 그 우두머리가 되어서는 사납고 교활한 사람을 불러모아 임존성(任存城)에 성채를 쌓고 웅거하여, 벌떼처럼 모여 있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서 산곡에 가득차 있다. 남의 이름을 빌리고 지위를 훔쳐 모두 장군(將軍)이라 칭하고서 성읍(城邑)을 모두 무너뜨리고 점차 중부(中部)로 들어가 우물을 메우고 나무를 베며, 집들을 무너뜨리고 태워버려서 지나는 곳마다 잔해(殘害)하여 멸망시켜 거의 살아남은 백성이 없었다. 흉악한 위세가 이미 드러나서 사람들이 모두 위협당해 복종하며 성채를 벌여놓고 영을 늘어세워 놓아 오래 머물러 있는 우리 군대를 공격해서 포위하였다. 운제(雲梯)로 굽어보고 지도(地道)로 환히 들여다보며, 돌을 치고 화살을 날리는 것이 별처럼 달리고 비처럼 쏟아지며, 밤낮으로 계속해서 싸우고 아침 저녁으로 세력을 믿고 침범하면서도 스스로 일컫기를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잇는다고 하며, ▨▨▨▨▨▨ 한다. 무심하게 안심하는 척하여 더불어 창검을 가지고 다투지 않고, 병력을 정예하게 하여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내어 그 나쁜 적들이 힘이 다하고 기운이 쇠해지기를 기다려서, 군(君)이 (이에) 몰래 간첩을 보내서 그 병사들이 게을러진 때를 엿보아 ▨▨▨를 구축하고 틈을 타고 때를 기다려 문을 뚫고 굴을 열어 병사를 풀어서 엄습케 하여 (하략).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개 관>
 
  
  
  
시대   백제
 
 
연대   663년
 
 
유형/재질   비문 / 대리석 
 
 
문화재지정   보물 - 21호 
 
 
크기   비신 높이 237.9cm 두께 30.9cm, 이수 높이 113.6cm 폭 133.3cm
 
 
출토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부소산성 
 
 
소재지   (한국)국립부여박물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6-1
 
 
서체   비문(碑文) : 해서(楷書), 제액(題額) : 전서(篆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유인원(劉仁願) / 미상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官北里)에 소재한 부소산(扶蘇山)의 산성내(山城內)에서 출토되었다. 비신(碑身) 상부(上部)에 이수(螭首)가 있고 귀부(龜趺) 위에 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일찌기 무너져서 비신 왼쪽 부분이 세로로 갈라져 둘로 되었으며 귀부의 소재는 불명(不明)이다. 비는 담흑색(淡黑色) 대리석으로 회백색(灰白色) 반조(斑條: 얼룩무늬)를 띠고 있다. 현재 비신을 접합해서 이것을 수립(竪立)하고 비각(碑閣)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비신의 높이는 237.9cm, 두께 30.9cm이며 이수는 높이 113.6cm, 폭 133.3cm로 이룡을 반결(蟠結)시킨 상을 새겨 매우 웅장하고 힘차다. 비문(碑文)은 자경(字徑) 24.2cm의 해서(楷書)이며 제액(題額)은 자경 6cm의 전서(篆書)로 양각(陽刻)되었다. 비문은 오른쪽 과반이 남아 있지만 닳아져 없어진 정도가 심하다. 총 34행에 1행은 대체로 69자로 되어 있는데 현재 제20행까지는 거의 판독이 가능하나 제21행은 18자 정도가 판독이 되며 22행부터는 대부분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비문 내용은 당(唐)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사비성(泗沘城)에 유진(留鎭)해서 잔당(殘黨)을 진정시킨 사력(事歷)을 싣고 있다. 비의 찬인(撰人)·서인(書人)은 모두 불명인데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유인원의 서(書)로 되어 있다. 비 건립 연대는 당(唐) 고종(高宗) 용삭(龍朔) 3년(신라 문무왕 3, 663), 「당평제비(唐平濟碑)」보다 3년 뒤이며 유인원이 부여풍(扶餘豊)을 평정한 해에 해당한다.  
 
 
 
(논문)拜根興, 2002, 『 7世紀 中葉 羅唐關係 硏究』, 경북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단행본)權悳永, 2002, 『韓國古代金石文綜合索引』, 학연문화사
(논문)郭丞勳, 1997, 「新羅 哀莊王代 誓幢和上碑의 建立과 그 意義」『국사관논총』74집, 국사편찬위원회
(단행본)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Ⅰ, 國史編纂委員會
(논문)方香淑, 1994, 「百濟故土에 대한 唐의 支配體制」『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上-古代篇·高麗時代篇
(단행본)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논문)成周鐸, 1990, 「百濟 炭峴 小考-金庾信將軍의 百濟攻擊路를 中心으로」『百濟論叢』2
(논문)金榮官, 1990, 「羅唐聯合軍의 百濟侵攻戰略과 百濟의 防禦戰略」『STRATEGY21』제2권 제2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단행본)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古代篇, 亞細亞文化社
(논문)沈正輔, 1983, 「백제부흥군의 거점에 관한 연구」 『백제연구』 14  

 


 


 정림사지 5층석탑
 
 

 

 

 


bc8937:

중국에 역사잡지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역사잡지 눈 씻고 봐도 없습니다.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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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답변 bc8937   04/28(토)  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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