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6
이름: bc8937
2011/5/5(목)
일본어 속의 한국어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출 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n=3276509

 

일본어 속의 한국어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10 비공개 | 03.07.18 10:34 답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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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18 10:46 답변공감  답변 내용
권해조 (육군준장(예), 육사초빙교수)

일본은 한국과 가까운 이웃국가로 옛날부터 왕래가 많았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일본 건국과 문화의 뿌리가 한국이라고 말하는 자도 많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인은 기마 민족(騎馬民族)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주장하고 있듯이 일본인은 우리와 같이 우랄 알타이계로 얼굴 생김새나 말의 어순도 비슷하다.

지금도 도쿄 아카사카(赤坂)나 우에노 아메요코(橫)시장의 김치골목에 가면 한국으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 이름의 상점이 많다. 또한 최근에 일본 동북부 최고 두메산골인 야마가다(山形) 도자와무라(戶澤村)란 작은 마을에도 한인촌을 형성하여 고려관(高麗館)을 세우고 도자와류 김치로 유명해 지고있다.

필자는 일본에서 근무할 때 일본의 언어, 지명, 성씨, 도예 등 여러 곳에서 우리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은 필자가 일본 속에서 찾아본 한국의 뿌리 가운데 일부분을 소개하는 것인데 일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일본어 속의 韓國語

 

옛날에는 글(文字)이 있기 전에 말이 먼저 있었다. 우리나라도 한글이 있기 전에 이두(吏讀)문자가 있었고 일본도 9세기경 한자의 한 부분을 따서 표음문자로 만든 가나(伽名)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물론 일본역사책에도 4세기경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가서 한자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삼국시대에 많은 문물이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사실이다.

 

필자가 일본에 처음 가서 하늘이 ‘구모리(曇)’하여 비가 올 것 같다는 일본말이 우리말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어 속에 한국어를 찾아보았으며, 현재 쓰이고 있는 일본어에 경상도 전라도의 옛 방언이 많이 쓰이고 있었다.

일본에서 우리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구마모토 지역에서는 우리말 네(yes)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규수 사쓰마(薩摩)반도에서는 가루를 치는 ‘체(sieve)’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접속사 ‘~가, 어미 ~다, 의문문 ~까?’ 등도 우리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의태어(擬態語)와 의성어(擬聲語)에는 비슷한 것이 많았다. 키가 ‘쑥쑥’ 자라다를 ‘수구수구’로, ‘슬슬’ 걸어가다를 ‘소로소로’로, 얼굴이 ‘까칠까칠’하다를 ‘까사까사’로, ‘깔깔’웃다를 ‘까루까루’로 크게 우는 소리 ‘어이어이’를 ‘오이오이’로 가마귀 우는소리를 ‘가아 가아’로 닭우는 소리를 ‘고께고꼬’로 매미 우는 소리를 ‘민민’ 등 대동소이한 것이 많았다.

학자들에 의하면 일본어 시마(島)는 경상도 방언 서마에서, 무라(村)는 우리나라 마을에서, 고호리(郡)은 고을에서 유래되었으며, 구다라(百濟)는 원래 큰나라(大國)에서 군나라- 구다라로 변천하였고, 규수지방 방언인 오도무이(무섭다)는 우리말 무덤(墓)이 무더무- 오도무로, 히(日)는 해에서, 히카리(光)은 빛깔에서, 우에(上)는 위에서, 쫀가(總角)는 총각에서, 도무다치(友)는 동무들에서 변했다고 보고있다.

특히 후쿠오까 지역에는 지금도 줄다리기를 할 때 ‘영사 영사’를 외치고 있고, 오사카시의 조선통신사 재현 축제에는 ‘왔쇼이 왔쇼이 꼬랴 삿토 왔쇼이’를 외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어 어원이 상당부분 우리말에서 전래된 것은 사실이며 아직도 여러 곳에서 우리말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속의 韓國 地名. 寺刹名

 

우리는 일본의 나라(奈良)가 우리말 나라(國家)에서 유래되었다고 들어왔다. 백제가 망하자 일본에 망명자들이 나라(國)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기분으로 살자는 뜻에서 ‘나라(奈良)’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 속에서 고대 우리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 삼한시대 한국의 이름과 같은 지명(地名), 사찰명(寺刹名)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 우리나라 문화가 일본으로 많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우선 고구려와 관련있는 이름을 찾아보면 사이타마 현 이루마(入間)군에 있는 고려향(高麗鄕)을 들 수 있다. 이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 직전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사신으로 갔던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장군 일행이 귀국하지 못하고 주위에 고려향(高麗鄕)을 만들어 오늘까지 1300여년간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고려진자(高麗神社)가 있는데 현재 약광 59대손 고마스미오(高麗澄雄)가 궁사(宮司)로 있다. 그 주위 산을 고마산(高麗山), 강을 고마센(高麗川), 기차역을 고마에끼(高麗驛)로 부르고 있다. 나라, 교도, 오사까 지역에도 고마마치(高麗町), 고마바시(高麗橋), 나라의 아스카(明日香)에 도다이지(東大寺), 규수지방에도 고마마치(高麗町), 고마바시(高麗橋), 고마도리(高麗通) 등이 있다.

 

신라와 관계되는 지명은 일본 서부 니가타(新瀉), 도야마(富山), 이시까와(石川), 후꾸이(福井) 지역에 많다. 신라는 3국중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으며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살았다. 니가타(新瀉) 현의 사도시마(佐渡島) 오끼마치(小木町)에는 신라인이 모여사는 신라촌(新羅村)이 있고 지금도 신라 시조 박헉거세왕을 조상으로 모시고 장자상속(長子相續)의 전통을 이어가며 15여 가족이 살고 있다. 또한 니카타에는 시라기진쟈(新羅神社), 신라왕비(新羅王碑), 시라키진쟈(白木神社) 등이 있고, 교도 나라지역에도 시라키진쟈(新羅神社), 사라키지(新羅社), 지금은 이름을 바꾸었지만 오사카의 도돈보리(道頓堀) 하천에 시라키바시(新羅橋) 등이 있다.

그리고 시가(滋賀)현 오쓰시(大津)시에 신라사(新羅寺)과 장보고 장군을 모신 사당인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시마네(島根)현 오타(大田)시에는 한신신라신사(韓神新羅神社), 규수 가고시마현 다루미즈(垂水)시에는 박혁거세왕을 제신으로 모시는 거세신사(居世神社)가 있다.

 

백제와 관련되는 지명은 교도 나라 오사카 지역과 규수지역에 많다. 오사카와 교도사이 마이반(枚方)에 왕인공원, 백제사적공원, 쿠다라지(百濟寺), 쿠다라진쟈(百濟神社) 등이 있고, 나라 지역에 쿠다라에키(百濟驛), 쿠다라무라(百濟村), 쿠타라가와(百濟川), 쿠다라바시(百濟橋), 아스카(明日香村)에 아스카지(飛鳥寺), 백제소학교 (小學校)가 있고. 오사카 지역에는 4대왕사(四大王寺)가 있다. 규수 휴가(日向)시에서 40키로 떨어진 남향촌(南向村)에 쿠다라 사토(百濟里)란 백제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백제 정가왕(禎嘉王)을 모신 신문신사(神門神社)가 있다. 그리고 최근 부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야자키(宮埼)시에 조성된 백제마을에는 국립 부여박물관과 같은 한국 전통 건축양식으로 백제관(百濟館)과 언덕에는 낙화암 백화정(百花亭)을 모방한 백화정(白花亭)을 건립하였다.

 

그밖에 가야 삼한과 관련있는 지명으로는 나라, 오사카지역에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종전 韓國神社)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규수지역과 대마도 지역에서 많다. 규수지역 가고시마현에는 환웅과 단군을 제신으로 모시는 환단신사(桓檀神社),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 유적(七王子 遺跡), 카라구니다케(韓國岳) 등이 있다. 규수 사스마(薩摩)반도 가세다(加世田)시의 니니기노 미코도(藝名) 유적은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가 일본에 도래하여 다가치호미네(高千穗峰)에 강림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어 나라를 다스렸다는 전설과 일본 사기, 고사기를 토대로 ‘일본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다가치호미네 인근 가라쿠니다케(韓國岳)는 해발 1,700미터로 일본 진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인 니니기노미코토가 산 정상에 올라가서 고국 출생국인 가야(伽倻)를 바라보며 “여기가 가라쿠니(駕洛國)을 향하고 있으니 좋은 곳이다” 라고한 조칙(詔勅)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구마소성(熊襲城) 근처에는 가야신을 모시는 가라쿠니우도우미네 신사(韓國宇豆峯 神社)가 있다.

또한 일본의 산 이름도 보통 야마(山)로 부르지만 후지산(富士山), 아소산(阿蘇山), 아오카키산(靑垣山) 등 우리나라와 같이 산(山)으로 부르는 것이 많이 있다. 하천도 보통 가와로 부르지만 에노센(可愛川), 가수노센(葛野川), 누다센(沼田川) 등 한국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도 통상 테라(寺)로 부르고 있으나 호류우지(法隆寺), 도다이지(東大寺), 고류지(光隆寺) 등 우리와 같이 절(寺)로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고대 한국의 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됨에 따라 한국의 지명이 지금도 일본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속의 韓國姓氏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에 이미 성씨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흑지상지(黑齒常之), 부여충성(扶餘忠勝),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성씨는 단일(單一) 성씨보다 복수(復數) 성씨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왕실과 귀족들은 한국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성명을 가졌으나 대부분 서민들은 19세기 후반에야 성명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의 고대사에는 수많은 한국 고관 명사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 의하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먼저 복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도 백제사람 수수허리(須須許里)이다. 일본의 고대 씨족을 기록한 사서(史書)로 주목되는 것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다. 이 성씨록에 등장하고 있는 고대 선조들은 신라, 백제, 고구려 왕족과 고관들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기록된 성씨는 약 300여 개인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그중 백제 왕족의 성씨로는 일본어로 쿠다라(百濟), 이와노(石野), 오오카(大丘), 마쓰다(沙田), 스가노(菅野), 오카야(岡屋), 하루노(春野), 오하라(大原), 나카노(中野), 쿠니모토(國本), 나가다(長田)등의 복성과, 하야시(林), 후미(文)씨 등 단성이 있다.

신라 후에 성씨들은 야마무라(山村), 미야께(三宅), 우나바라(海原), 오이치(大市), 다께하라(竹原), 야마다(山田), 토요하라(豊原) 등의 복성과 이토(系)시 등 단성이 있다. 고구려 성씨는 고마(高麗), 나가세(長背), 나니와(難波), 고부(後部), 다카이(高井), 다카다(高田), 쿠와하라(桑原), 아사케(朝明), 요시이(吉井) 등의 복성과 고(高), 오(王), 시마(島)씨 등의 단성이 있다.

그리고 괄목할 것은 고대 일본의 벼슬한 사람의 관명과 성명을 “중부덕솔 목협금돈(中部德率 木傀今敦)” 등과 같이 백제와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관직 명칭과 성씨와 이름의 3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 나라(奈良)시대 직제 등이 일본 조정의 실권을 가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책 의하면 1603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명자대도 금(命字帶刀 禁)”이란 법령을 만들어 평민이 성을 갖고 허리에 칼을 차고 무사 귀족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엄벌을 내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870년 9월 19일 일본정부에서 모든 사람이 성씨를 지어서 사용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평민도 묘오지(苗字: 名字)를 지어 쓰도록 허락하노라”하였으니 그전까지 일본 평민들은 성명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일본정부는 호적을 확실히 하여 징병목적에 두고 있었으나 오랜 봉건사회에서 지내온 평민들은 성명을 짓지 않고 신고를 기피하였다. 일본정부는 1871년 일본내각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천민들도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주는 “태정과포고”라는 “신분해방령(身分解放令)”을 내려 사회 계급을 화족(華族), 사족(士族), 졸(卒), 평민(平民)의 4민(四民)으로 분류하였다. 그후 1873년 태정관은 다시 징병령을 내려 만 20세 이상 남자는 3년간 군 복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간혹 좋은 성씨를 선호하여 막부관가에 돈을 바쳐 성씨를 사는 자도 있었으나 많은 평민들은 세금과 군대 가기를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정관은 1875년 2월에 “명자필칭 의무령(命字必稱義務令)”을 내려 성씨를 짓지 않으면 엄벌하도록 하였다.

 

일본 교민들에 의하면 그 당시 한꺼번에 그 많은 창씨를 하려니 갖가지 애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갑자기 성씨를 짓기 위해 유식자들의 행패로 별개별 성씨가 생겨난 것이다. 예컨데 큰뱀(大蛇), 여우코(狐鼻), 메도키(百目鬼), 히토카베(人首), 우키(浮氣:바람끼), 시나씨(尻無:엉덩이가 없다), 쇼오유(醬酒: 간장), 와쇼쿠(華食), 후로(風呂: 목욕탕), 호즈미(8월1일), 토우지(冬至), 누쿠이(明日), 시토(刺刀: 날카로운 칼), 도께(時計), 이에데(家出), 나나시(名無), 반치(番地) 등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성씨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인구의 95퍼센트가 동시에 새로운 성씨를 만들려니 수 만개의 성씨중 이상한 성씨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와타나베 미치오(渡邊三男)교수는 그의 저서 ‘일본의 성자(姓字)’에서 일본성의 28퍼센트가 백제, 신라, 고구려인의 기본성이며, 하라지마 레이지(原島 禮二)교수도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성씨 가운데 32퍼센트가 한국에서 온 성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성씨의 30퍼센트 이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성이며, 1875년 이후 지어진 대부분 성씨도 한국 고대 성씨를 모방하였다고 보여진다. 특히 현재 일본의 성씨 가운데 신라에서 건너간 야마다(山田), 시미즈씨(淸水), 백제에서 건너간 하야시(林), 야마쿠지(山口) 등은 일본에서 20대 안에 들어가는 대성(大姓)이다. 또한 쿠다라(百濟), 쿠다라키(久多良木), 시리기(新羅), 시라키(白木), 고마(高麗), 코마(駒)씨 등의 삼한시대 국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의 후예들도 아직도 여러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일본속의 韓國陶瓷器

 

일본 도자기의 주요 생산지는 대부분 규수(九州)에 위치하고 있다. 규수의 가고시마(鹿兒島), 사카(佐賀), 나가사끼(長埼), 구마모토(熊本), 후꾸오까(福岡), 인접 야마구치(山口) 등에 산재하고 있다. 이들 도자기의 시작은 대부분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끌려온 우리 선조 도공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소위 일본도예의 3대 거봉(巨峰)이라고 일컷는 사스마야키(薩摩燒), 가라스야키(唐津燒), 아리다야키(有田燒)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이름있는 하기야키(萩燒), 아가노야키(上野燒)등 모두가 우리나라 선조들에 의해 전래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도예의 뿌리는 우리나라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가고시마 사쓰마야키(薩摩燒)이다. 이는 자기와 도기를 동시에 구워내는 것이 특징이며 초기에는 질그릇, 다기(茶器)가 주산이었으나 지금은 우리나라 인간문화재들이 만들어 내는 고급 도예품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쓰마야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은 심수관가(沈壽官家)다. 1598년 정유재란때 전라도 남원 전투에서 패한 후 약 70여명의 도공이 3척의 배에 실려 끌려갔다. 그 가운데 박의평(朴平意) 심당길(沈當吉) 등 43명이 탄 배가 규수(九州) 가고시마(鹿兒島) 시마비라(島平) 해변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5년간 살다가 1603년 12월 현재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의 미야마(美山) 마을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미야마는 200호의 세대중 100호 정도가 도공의 후손으로 조상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그 가운데 400여 년간 14대째 유업을 이어온 심수관(沈壽官)가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필자가 심수관씨를 만나 오늘의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만들어 낸 심수관가의 경험담을 듣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초대 심당길(본명은 讚)이 일본에 끌려와서 말도 통하지 않고 물건을 만드는 도구로 천대받으면서 굶주리고 고생하던 쓰라린 경험과, 일본 도착 16년후에야 백토를 찾아 백자를 만드는데 성공한 끈질긴 장인정신으로 오늘의 사쓰마 야키(薩摩燒)를 일구어낸 도공들의 애환(哀歡)어린 이야기는 정말 한편의 역사책이었다. 수관(壽官)이란 예명은 12대 조부때부터 사용했으며, 13대 부친도 교도(京都)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세계적인 도예가였다. 본인도 마을에 의사가 없어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후 “정치학을 공부하여 마을을 대변할 수 있도록 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와세대(早稻田)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부친의 업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특히 부친께서는 “인생이란 긴 사슬 가운데 한 개의 고리에 불과하다. 너도 그 사슬에 한 개의 고리를 걸면 된다”고 말씀하신 부친의 철학적인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필자가 본 심수관은 일본의 최대의 도예가 뿐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부친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직도 한국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항상 고국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애국자가 틀림없었다.

또한 사쓰마(薩摩)야키에는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번주(藩主)의 보호아래 1601년 가마를 연 가고시마현 다테노(堅野)계가 있고, 다음은 1608년 방중(芳仲)이 중심이 되어 연 가마가 있다. 이 가운데 김해는 29세의 나이로 도평에서 4키로 남방 가미노가와(神之川) 부근에 10여명 일행과 도착하여, 번주(藩主)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사쓰마야키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고 52세에 세상을 떠난 인물로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우선 본명이 불명하며 일본 번주의 허락 하에 호시야마 나카지(星山 仲次)란 일본 이름을 사용하면서 호를 김해로 사용하였다. 그는 경북 성산 사람으로 가마가 있던 산도 성산이라 불렀고 김해가 고향이라 호를 김해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두 번째로 사카현(佐賀縣) 가라스야키(唐津燒)다. 특징은 고회유(藁灰釉)를 많이 사용는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때 끌려간 도공과 일찍 왜구 일당인 마쓰우라(松浦)도당들에게 잡혀갔거나 그들의 유혹에 끌려간 도공들에 의해 이루어진 도자기이다. 특히 한강 이북출신 도공들이 이곳에서 일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이며, 이중 나가사토다로 우에몬(中里太郞 石衛門)은 일본을 대표하는 도예가이며 그의 부친은 국보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세 번째인 사카현의 아리다 야키(有田燒)다. 이는 우리나라 행남도자기, 한국도자기와 같은 대중 사기그릇 도자기가 주종이다. 정유재란때 공주에서 끌려와 사카현(佐賀縣) 아리타(有田)지방에서 문을 연 이참평(李參平)이 시조다. 그는 오랜 고행 끝에 1616년 석영분이 많은 도석(陶石)을 발견하여 일본 백자 아리다 야키의 도조(陶祖)로 숭상받았으며, 가네가에 산베어(金江三兵衛)란 일본이름으로 바꾸고 1655년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아리다시는 매년 4.29 - 5.6일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아리다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마을 뒷편 도산(陶山)공원에는 조그만 돌비석과 묘소가 있다. 그리고 아리다에는 현재 700여개의 도자기 상점이 줄지어 있고 이참평 13대 손도 도공으로 일하고 있으나 미미한 존재이다.

그밖에도 1604년 한국 도공 이작광(李勺光), 이경(李敬) 형제가 야마구치(山口)현의 마스모토야키(松本燒)에서 시작한 하기야키(萩燒), 조선도공 팔산(八山)에 의해 시작된 후꾸오카의 다가도리야키(高取燒), 조선도공 존해(尊楷)에 의해 시작된 구마모토현 아가노야키(上野燒), 조선인 웅천(熊川) 출신 거간(巨關)에 의해 시작한 백자세공이 특징인 나가사끼현의 미가와우치야키(三川內燒)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우리 선조들이 전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 도자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혼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촌 및 팬들에게 공감한 내용이 전달됩니다. 싸이월드 공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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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7.18 10:43 답변공감  답변 내용
일본어 속의 한국어 찾기-「奈良」도 「チョンガ-」도 한국어로부터 1995년도에 한신(阪神)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신(阪神)이라고 하는 것은 오오 사카(大阪)와 코베(神戶)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곳 근방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 는 쿄토(京都)와 나라(奈良)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 「奈良」라는 글자의 어원이 한 글‘나라’에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먼 옛날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많은 한국인이 건너와 나라(奈良)분지를 보고 ‘나라’라고
부른 뒤 자신들의 조국인 ‘백제(百 濟)’를 가리켜‘큰 나라’라고 부른 것이
일본어로‘쿠다라’라고 발음하게 된 것 입니다.


한국어에서 온 대표적인 일본어로는 ‘촌가(チョンガ-)’가 있습니다. 이 말 뜻은
일본어로도 독신남성을 가리키며 ‘촌가’라고 발음하는데 이것은 한국어 總角(총 각)에서 온 것입니다.
지금 창 밖에서 「わっしょい?わっしょい!」(영차! 영차!)하는 마츠리의 오미코
시(お神輿:신위를 모신 가마)를 짊어졌을 때의 구호가 들려옵니다. 이 「わっしょ い」도 한국어 ‘왔어’에서 온 말입니다.


나라(奈良)에서 곧장 서쪽으로 가면 큐슈(九州)지역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제일 큰
도시가 하카타(博多)입니다. 이 「博多」라는 이름은 그 옛날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이 큐슈에 도착했을 때 밝은 하카타 항을 보고 ‘밝다’라고 표현한 것에서 온 것입 니다.
이곳 하카타 명물로 「明太子」(めんたいこ)가 있습니다. 이 말도 ‘명태(明 太)의 子供(알)’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와 같은 예로「ハナから出來ないって 思っちゃだめよА」의 「ハナから」는 처음부터라는 뜻을 가진 한국어 ‘하나’와
‘까지’라는 뜻을 나타내는 일본어 「から」가 붙은 합성어입니다.


한국어 속에도 일본어가 들어 있습니다.
“평소에 사용하고 있던 ‘츠메키리(つめきり)’ ‘소데나시(そでなし)’ ‘와리바 시(わりばし)’
라는 말들이 순수한 한국어가 아니고 일본어에서 왔다는 사실을 안 순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라는 말을 한국인 학생들에게 서 자주 듣곤 합니다.
사실 여기에는 한국과 일본의 어두운 과거역사가 반영된 일부 분으로 일본인들은
이 사실에 대해 깊이 반성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여러분에게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어원 찾기를 통해 일본어 공부의 재미 를 한층 더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본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시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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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1.13 11:50 답변공감  답변 내용
아마도 문화재들인것 같습니다.
여러 강대국으로 약탈당한 우리문화재들이요..
애랫분들 욕하지 말아요출처 : 본인의 글입니다 일촌 및 팬들에게 공감한 내용이 전달됩니다. 싸이월드 공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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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carismaaos12 프로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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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08 19:01 답변공감  답변 내용
  일본어를 공부하는 한국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일본어와 한국어가 너무나 비슷한 것에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2002년 4월초 일본 공영방송 nhk, 도쿄신문, 일본 최대 경제일간지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충격적인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이들 매체는 일본 히로시마대학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명예교수, 도야마대학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며 일본어는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언어였다는 것이다.


일본어는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언어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한국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일본어가 한국어와 너무 비슷한 것에 놀란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어의 생성 자체가 한반도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2002년 4월 일본 공영방송 nhk, 도쿄신문, 니혼게이자이 신문 등의 일본언론은 ‘가타가나의 발상, 조선전래?’, ‘8세기 조선에서 가타가나?’, ‘日 가나 한반도 유래 확실’ 이라는 제목 하에 일본 문자가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충격적인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이들 매체들은 일본 히로시마대학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명예교수, 도야마대학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인용했다. “한자의 일부를 이용해 만들어진 가타가나는 일본에서 고안됐다고 여겨져 왔으나 한자를 생략한다는 발상이 한반도에서 전래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한자를 읽는 보조수단으로써의 가타가나의 원형이 한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 문헌에서 가타가나와 비슷한 문자가 발견된 것은 귀중한 사실이다”

  그리고 kbs는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2002년 10월 12일 ‘천 년 전 이 땅에 또 다른 문자가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역사스페셜에 방영하였다.

 

◆ 각필의 대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나가야마 야스오(長山靖生)는 그의 저서 <사람은 왜 역사를 위조하는가?> 에서 일본이 역사를 조작한 사실들을 파헤쳐 폭로했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수상이 재임 중에 “일본은 신의 나라다”라고 발언하여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는데, 나가야마씨는 이 책에서 일본이 신국(神國)으로 신앙하는 뿌리는 조작한 역사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 역사조작의 주범으로 다음의 내용을 들었다.

1. 일본의 정사(正史)라는 ‘일본서기‘

2. ‘일본은 고대부터 세계를 제패 했다’, ‘예수는 일본에서 죽었다’

3. 대표적인 황국사관 날조의 개척자  히라다 아쓰타네(平田篤胤)의 ‘상기(上記)’

4. 스에마쓰 겐쵸(末松謙澄)의 ‘칭기스칸은 일본인이었다’ 등의 위서(僞書)를 꼽았다.

  이 중에서 ‘상기’는 역사조작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은 수만 년 전부터 일왕이 통치하는 신국이었다. 신(神)시대에 고유 문자가 있었으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일본문자 가나는 한자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신(神)시대의 문자를 응용한 것이다’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히라다가 이러한 내용을 발표하자 한반도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던 당시의 일본인 지도자들은 ‘일본 역사 이래 최고의 가치를 지닌 국보 제1호’라고 호들갑을 떨며 전 일본열도가 흥분했다고 한다.

  이에 일부 학자들이 히라다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증거를 요구하자 본래 없었던 것을 날조해 놓아 증거물을 내놓을 수 없었던 그는 궁여지책으로 불에 그을린 철판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이 철판을 검증한 결과 그곳에는 히라다가 제멋대로 새겨 놓은 한문과 비슷한 괴상한 문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곧 가짜임이 들통났다고 한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과 함께 양심적인 학자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芳規, 사진)에 의거 일본어의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고바야시 교수는 도쿄대 문리과를 졸업하고 히로시마대학 명예교수로서 <각필문헌의 국어학적 연구>, <각필이 안내하는 세계> 등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그는 일본 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은사상(恩賜賞)’과 ‘일본학사원상(日本學士院賞)’을 수상했다. 1961년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각필 문헌을 찾아낸 각필연구의 권위자다.

※ 각필(角筆) : 옛날 뾰족하게 깎은 대나무나 상아로 만든 필기도구로써 종이를 눌러 쓴 것이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며 특수 제작된 적외선 스코프 또는 야간 촛불 등으로 확인 가능하다.

  그 동안 일본 학계는 가타가나가 서기 9세기경 일본인들에 의해 한자의 일부를 줄여 만들고, 히라가나는 한문의 초서체에서 본떠 만든 일본의 독자적인 문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고바야시 교수도 연구 초기에는 일본문헌의 원문 한자 옆에 각필로 새겨진 훈점(訓点)이 한자 발음이나 번역 순서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이는 일본의 독자적 발명이며, 이것이 점차 가나문자로 발전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는 2000년 7월 서울 성암고서박물관(誠庵古書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와 고려의 불경에서 일본에서 발견된 것 보다 년대가 앞서는 점과 부호 등의 각필 흔적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리고 고바야시 교수는 “일본의 가나가 한국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입장을 바꾸었다. 또 2000년 말에는 이러한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한반도의 문헌에 각필로 새겨진 구결(口訣)이 일본 가나의 원류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까지 펴게 되었다.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판비량론

  고바야시 교수는 "백제인들이 건축한 일본 나라(奈良)시에 소재하는 세계최대 목조 사찰인 동대사(東大寺) 도서관에 있는 화엄경(華嚴經)과 그 주석서인 화엄간정기(華嚴刊定記) 등 740 ~ 780년대인 8세기에 만든 문헌에서 한자 옆에 발음이나 해석을 눌러 적은 각필 가점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이것은 일본의 가타가나가 한반도에서 전래됐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밝혔다.

  그 이유는 화엄경과 화엄간정기에서 발견된 각필 가점에 사용된 부호들은 일본 오타니(大谷) 대학에서 발견된 7세기 신라 원효대사의 저술 ‘판비량론(判比量論)’에서 보이는 신라의 각필 가점(角筆加點)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7세기 말 신라에서 만들어진 판비량론의 각필과 일본 가나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9세기 초 일본 각필을 연결하는 8세기 자료임으로 ‘일본 가나 한반도 유래설’은 더욱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즉, 고바야시 교수는  이보다 앞선 서기 740년 신라에 유학한 일본인 승려 신쇼(審祥)가 일본 왕에게 바친 ‘판비량론’에 가타가나와 비슷한 조어(造語) 방식을 가진 신라인의 각필을 발견함으로써 가타가나가 한반도에서 유래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판비량론(判比量論)’은 두루마리 불경으로 약 1,400년 전 7세기 후반 신라의 원효대사가 저술한 것이다. ‘판비량론’은 원효대사가 당대 인도와 중국에서 최고의 학승으로 추앙 받고 있던 현장(玄奬) 스님이 인도 유학 도중 고안해 발표했던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증명하는 논증식”과 “대승불교가 부처의 교설임을 증명하는 논증식”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현장이 해결하지 못했던 불교논리학의 난제들을 명쾌하게 풀어내어 현장과 호법을 한꺼번에 비판한 저술이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판비량론(判比量論)은 일본인이 신라에서 베껴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타니 대학의 미야자키 겐지(宮崎健司) 교수가 97년 종이의 지질(紙質)과 당시 정황을 살펴볼 때 신라에서 만든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최초로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를 최근 정밀 감정한 결과 신라에서 필사된 문서로 밝혀졌다. 고바야시 교수는 여기에 신라인의 각필까지 확인함으로써 가타가나가 한국에서 넘어왔다고 확신했다.

  또, ‘판비량론’에서는 수십 가지의 각필이 발견되었다. 특히 한자 발음을 읽기 위한 문장부호처럼 생긴 각필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는 이후 일본에서 발견되는 각필 문장부호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것이었다. 일본인이 베낀 것이라면 신라식 각필까지 베낄리가 없다는 논리다. 이 판비량론에서 가타가나 문자의 기원 문제와 관련하여 비상한 관심을 끄는 것은 한자의 발음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부호들이다.

  첫 번째는 뿌리 근(根)자 옆에 쓰인 ‘マリ’라는 각필 글자다. 이 글자 중 ‘マ’자는 부(部)자의 오른쪽 부(우부방) 부분을 줄인 것이며 ‘リ’자는 ‘리(利)’자를 줄인 것 같다고 고바야시 교수는 말했다. 이 중 ‘リ’자는 현재 가타가나에서도 ‘리’로 읽는다. ‘부리’라고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는 주장이다. 남풍현 한국구결학회 회장은 “신라시대에 뿌리를 ‘부리’로 읽었을 가능성은 확인할 수 없지만, ‘マ’를 부(部)의 약자로 쓴 사례는 여러 차례 나온다.”고 확인했다. 두 번째는 ‘공(共)’자 옆에 적힌 ‘궁(宮)’이라는 한문이다.

  한편 오늘날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가나의 기원을 알리는 구결, 각필이 1993년 열반한 성철스님의 유품에서도 사용된 흔적이 2002.10.12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제목: 천 년 전 이 땅에 또 다른 문자가 있었다) 취재 팀에 의해 발견된바 있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문자 한글


◆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 ‘한글’

1. 한자나 한문의 음과 훈(訓·새김)을 빌어 한국어를 적던 이두(吏讀)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 국어국문학교수는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사마왕 왕비의 은팔찌(국보 160호)에서 서기 520년 백제시대에 쓰인 음각돼 있는 명문(銘文)인 이두문(吏讀文)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정교수는 한반도가 일본열도에 한자를 전파하는 시기를 대폭 앞당기는 것으로 해석했다. (2003.07.18 중앙일보)


2. 한문 해석을 돕기 위해 단어나 구절 사이에 집어넣던 구결(口訣)

  이것은 한문을 읽을 때 우리말 토(吐)를 넣어 읽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須菩提若有人言”라는 문장은 ‘須菩提야 若有人이 言하되'라 읽었다. 이와 같이 한문을 읽을 때에 한문의 구성요소(構成要素) 즉, 단어 또는 구절(句節) 사이에 들어가는 우리말을 가리켜 구결(口訣)이라 한다. 앞의 ’야, 이, 하되‘가 이에 해당된다.


3. 한문 번역상의 편의를 위해 글자 옆에 찍은 훈점(訓點), 각필가점 

  이러한 문자들은 그 옛날 고구려, 신라, 가야, 백제는 물론 고려, 조선 그리고 최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수천 년간 사용되었던 또 다른 문자였다. 물론 1446년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도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가나의 원류인 구결과 훈점 각필가점에 근간을 두고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에 의하면 닿소리(자음)는 발음기호에 따라 ‘ㄱ,ㄴ,ㅁ,ㅅ,ㅇ’의 기본 다섯 자를 만들고 이에 획을 더해 나머지 자음을 만들었다. 또, 홀소리(모음)는 < ㆍ, _, | → 天, 地, 人을 뜻함> 3가지 각필 가점을 합성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물론 천지인(天地人)은 동양철학 역학(易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이 땅에서 사용하던 문자인 각필 가점, 구결 등의 불완전한 점을 해소하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젊은 완벽한 또 다른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글 창제 이전까지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통역 없이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 한글로 세계문명을 바꾸자

  한편 훈민정음해례본에서 보듯이 한글을 만든 제자(製字) 원리와 문자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하여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세계최고의 문자임을 주저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째 : 훈민정음, 언문, 반절, 암클, 중글, 국문, 가갸글, 한글 등의 명칭을 가진 한글은 문자의 탄생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이며, 세계에서 가장 젊은 문자다.

  세종대왕께서 반포한 <훈민정음 訓民正音>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그 서문에는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여도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엽게 여겨 새로 28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이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라고 했듯이 한글은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독창적인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한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역사적인 일이다. 그리고 일반백성을 위하여 전제주의(專制主義) 국가의 국왕이 문자를 창제한 것도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둘 째 : 한글은 제자(製字) 원리가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다.

  한글은 훈민정음해례본과 앞서 언급했듯이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서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ㄱ,ㄴ,ㅁ,ㅅ,ㅇ’의 기본 다섯 자를 만들고 이에 획을 더해가면서 나머지 자음을 만들었다. 홀소리(모음) 11자 역시 하늘과 땅과 사람을 뜻하는 ‘ㆍ, ㅡ, ㅣ‘를 기초로 하여 이것을 조합해 만들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역사학자 존 맨은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한국의 알파벳은 알파벳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고, 또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라고 극찬했고, 언어 연구학으로 유명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는 세계 모든 문자에 대하여 과학성, 합리성, 독창성 등 기타 세부기준으로 순위를 매긴 결과 한글을 제1순위에 올려놓았다.

  미국의 레어드 다이어먼드라는 학자는 1994년 6월 과학전문잡지 디스커버리지에 ‘쓰기 적합함’이란 기사에서 “한국에서 쓰는 한글은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 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다. 그리고 한글이 간결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조선일보 1994.5.25)

  소설 ‘대지(大地)’로 1932년 퓰리처상을 받고, 1938년에는 미국 여류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6.25전쟁으로 생긴 고아와 혼혈아 약2천 명을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 동안 돌보며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미국의 유명한 작가 펄벅(pearl s. buck)여사는 “한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다.” 그리고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라고 그녀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e. o. reischauer), 페어뱅크(j. k. fairbank) 교수는 1960년대 하버드 대학 교재 동아시아 부분에서 “한글은 아마도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체계일 것이다(hangul is perhaps the most scientific system of writing in general use in any country)”라고 기술했다.

  네덜란드 전(前) 라이덴대학 포스(frits vos) 교수는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알파벳을 발명하였다.(they invented the world's best alphabet)”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맥콜리(j. d. mccawley) 전(前) 시카고대학 교수는 1966년 미국언어학회지 language(42권 1호)에 기고를 통해 “한글은 벨(a.m. bell)의 가시언어기호보다 4백 년이나 앞선 것이기 때문에 포스가 한글에 대하여 최상급형을 쓴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vos's use of the superlative has much justification, since the hangul anticipates by over 400 years the idea of alexander melville bell's 'visible speech.')”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해마다 한글날은 한국사람뿐만 아니라 언어학자라면 반드시 기념해야 될 경사스런 날이라면서 강의마저 휴강한 채 자기 집으로 학생들을 불러 모아 파티를 열면서 기념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 가시언어기호 :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언어의 발음을 통일하기 위해 기호로 표기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을 말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시화 된 것이 ipa(international phonetic association : 국제 음성학 협회)의 창설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정된 발음기호가 ipa(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 국제음성기호)이다. 사실 발음을 정확하게 적는다는 것은 쉽지 않아 개정이 잦을 수밖에 없다. 매년 국제음성학회가 열리고 있으며, 여기에서 이러한 개정 문제에 대해 토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셋 째 : 한글은 문자의 활용도를 극대화할 수 있는 음소(音素)문자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 한반도 사회 전반은 한자 문화권이었다. 음절(音節)문자인 한자의 영향하에 있었음에도 음소문자를 창제하신 것은 독특한 발상이었다. 그러면서도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을 모아서 쓰는 음절 방식의 표기를 사용한다.

  즉, ‘ㅅ ㅏ ㅇ’로 풀어 쓰지 않고 ‘상’처럼 자음과 모음의 음소를 음절 단위로 묶어 다시 한 글자로 만들어 쓰는 독창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mit대학에서 언어학을 강의하는 수전 플린(suzanne flynn) 교수는 “중국 문화권에 있던 한국에서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글을 만들어냈다는 게 놀랍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영국 리즈 대학(university of leeds)의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교수는 1985년 이라는 저서(한글판 1999년 한국문화사 ‘세계의 문자 체계’)에서 한글을 독립된 장에서 다루면서 “세계 문자사와 문자론은 한글로 인하여 새롭게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글이 발음기관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하지만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방법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하다"면서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극찬했다.

  그동안 한글은 한자의 표의(表意)문자와는 달리 알파벳과 더불어 표음(表音)문자로써 전통적인 문자 분류방식에 따라 음소문자로 분류되어왔다. 이에 샘슨 교수는 한글을 음소문자라는 경지를 넘어 그 보다 더 세분되고 진보된 단위인 새로운 차원의 “자질문자(feature system)”라는 개념으로 분류했다. 샘슨교수의 이러한 분류방법은 세계 최초의 일이며, 한글이 세계 유일의 자질문자로써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덕수궁 안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앞에 이르러 이렇게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 주신 분이라며 갑자기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세계 문자의 발달사를 살펴보면 여러 민족이 수천 년에 걸쳐서 ‘그림 → 그림문자(picture writing) → 단어문자(표어문자 word writing, logograph) → 음절문자(syllabic script) → 음소문자(phonemic script) → 자질문자(feature system)’로 발전해 왔다.

  여기에서 자질문자라고 함은 글자에 각각의 자질 특성이 드러나는 문자라는 의미이다. 한글에서 ㄱ-ㅋ-ㄲ, ㄷ-ㅌ-ㄸ, ㅂ-ㅍ-ㅃ, ㅅ- ㅆ, ㅈ-ㅊ-ㅉ를 각각 살펴보면 각 음운의 자질이 드러난다. 하나의 기본글자를 두고 겹쳐 쓰면 된소리, 하나의 획을 더하면 거센소리처럼 하나의 자질이 더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기본글자와 비슷한 모양을 지닌 것으로 보아 어떤 소리에서 어떤 자질이 더해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알파벳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글의 ㄷ, ㅌ에 해당하는 알파벳이 d, t라 할 경우 두 알파벳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자질의 추가가 이루어져 다른 소리로 날 것이라는 점을 한글은 알 수 있지만 알파벳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어휘들을 다양하게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표음, 음소문자인 한글이기에 가능하다. 검정색을 예로 들면 ‘검다, 까맣다, 꺼멓다, 새까맣다, 시꺼멓다, 거무스레하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하지만 한자, 일본어 및 영어의 ‘black’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가 없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한글은 소리 표현만도 약 9000개로써 중국어의 약 400개, 일본어 약 300개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글은 발음기관의 모양까지 반영한 음성공학적 문자이기 때문에 천상의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라고 한다.


  넷 째 : 한글의 모음은 소리에 변화가 없다.

  알파벳은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 즉, 소리문자로써 조합이 쉽다. 하지만 모음은 위치나 쓰임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같은 ‘a’일지라도 위치에 따라 (a),(eo),(ae),(ei) 등등으로 발음이 다를 수 있고, 나라별로 독음(讀音)이 다른 단점도 있다.

  그러나 한글은 하나의 글자는 하나의 소리만 가진다. 그리고 한글에는 영어에서 볼 수 있는 묵음자도 없다. 그래서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글이 가장 배우기 쉽고 과학적이어서 ‘아침글자’ 또는 ‘알파벳의 꿈’이라고까지 표현하여 세계 문자 중 으뜸이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경이적인 기록으로 거의 0%인 세계 최저의 문맹률은 이런 이유에서 가능한 것이다.


  다섯 째 : 한글은 기계 친화력도 좋아 정보통신(it) 시대의 준비된 ‘디지털 문자’이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지난 500년 동안 세계 언어의 거의 절반가량이 사라졌다고 한다. 2003년 말 현재 세계 239개국에는 약 6천여 개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파푸아뉴기니는 약 860개의 언어를 사용고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는 약 427개, 카메룬 약 270개, 자이레 210개, 탄자니아 131개, 바누아투 105개, 코트디부아르 73개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그 중 문자를 보유하고 있는 언어는 세계적으로 약 50개 정도에 불가하다고 한다. 21세기에는 인터넷 등 이런저런 이유로 이 중에서 최소한 절반이나 그 이상의 언어가 사라질 것으로 학자들은 전망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한글은 초고속 정보화시대의 무한속도 경쟁에서 그 위력을 더욱 발휘하고 있다. 현재 세계는 정보전달 체계가 컴퓨터에서 휴대전화로 그 무게 중심이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과거 세계적인 다국적기업인 맥도날드가 판매하는 햄버거 가격으로 국가간의 물가를 비교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애니콜지수’가 생겨날 정도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가 된 휴대전화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기능들이 흡수되는 올인원 시대다. 카메라, 게임, 금융거래, 신용카드, tv, mp3, 캠코더, 무선인터넷, 정보검색, 전자사전, 지리정보, 쇼핑, 예매, 건강관리, 개인정보관리, 민원서류신청, 노래방 기능 등이 이미 휴대폰 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홈 네트워크를 집 밖에서 조작하는 리모콘형 휴대전화, 외국어 통역을 해주는 휴대전화도 가시화되고 있다.

  그래서 세계적인 it업체들이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휴대전화의 자판에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모두 표시하여 우리의 의사표시를 완벽하게 표현해 문자 메시지로 보내고 있다. 로마자와 같이 대문자, 소문자의 구분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중국과 같이 표의문자를 가진 나라나 일본, 앞서 언급한 언어가 여러 가지인 국가들은 컴퓨터 입력 방식 개발부터 골칫덩어리다.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낼 때 한글로 5초면 되는 문장을 중국, 일본은 35초가 걸린다는 비교가 있었다. 한글의 입력 속도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의 중이거나 밀폐된 공간, 공공장소에서는 사생활을 침범 당하지 않고도 긴급히 통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정통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미 2005년 상반기를 기점으로 문자통화가 음성통화량을 앞질렀다고 한다. 초고속 정보통신시대에 엄청난 경쟁력이 아닐 수 없다. 한글타자기를 발명했던 공병우 박사의 "한글은 금이요, 로마자는 은, 일본 가나는 동, 한자는 철"이라는 말이 새삼 생각난다.

 


일본은 한반도의 후국(侯國)이다


◆ 일본어의 모어(母語)는 옛 한반도 언어

  한편 하와이대학의 허드슨(mark j. hudson) 교수는 “일본어는 고대 야요이시대(bc 400 ~ ad 300) 한반도인들이 사용하던 언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대해 비교언어학의 권위자인 일본인 시미즈 기요시(淸水記佳) 전 일본 구마모토(熊本)대학 교수와 한국인 박명미(朴明美)씨는 2003년 한글학회 창립 95돌 기념 연구발표대회에서‘한어 비교언어학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논문과 2004년 서울대에서 ‘한ㆍ일간 유전학ㆍ언어학ㆍ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재구성’이라는 논문, 2004년 9월 ‘아나타(당신)는 한국인’(정신세계사)이라는 단행본 발행을 통해 “일본어의 모어(母語) 즉, 일본어의 뿌리는 한국어”라고 규정했다.

  시미즈 전 일본 구마모토(熊本)대학 교수는 만주에서 출생했으며, 아프리카 언어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아프리카연구소에서 18년 동안 재직했다. 이후 그는 1994년 구마모토대 언어학과에 부임했다. 시미즈 교수는 일본어 뿌리 찾기에 매료되면서 2002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했다. 박병미씨는 한, 일간 언어비교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서울 출생으로 일본 큐슈산업대, 시모노세키시립대학 한국어 강사로서 원래 이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박명미씨와 시미즈교수가 2002년 9월 공동 연구를 시작하며 세운 가설은 “일본어와 한국어는 자매 관계에 있으며, 양 언어가 거의 모두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차용한 한자어와 서양으로부터의 차용어를 제외한, 한국과 일본의 고유어가 거의 전부 같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은 비교언어학적 연구결과를 역사학 및 고고학적 연구와 접목시켜 볼 때 한반도인이 청동기시대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국가를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어와 아프리카어가 같은 계통이고, 영어는 앵글로색슨족이 대륙에서 게르만어를 가지고 영국으로 이주한 것처럼 한민족 역시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언어도 고스란히 갖고 갔으며, 두 언어가 서기 500 ~ 600년까지 통역 없이도 서로 통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들은  한국어를 반도한어(半島韓語), 일본어를 열도한어(列島韓語)로 각각 규정했다.

  이들은 인간의 한 언어는 보통 약 5만 어(語) 이상의 어근(語根)을 가지고 있는데, 한ㆍ일 두 언어의 음운이 대응하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기초어휘를 약 5,000어나 찾아냈다고 한다. 그 중 1,500개 어휘를 한글과 일본어를 로마자로 표기한 뒤 어근과 접사를 따로 구분하는 방식을 통해 어근의 유사성을 이 책에서 예로 제시했다.

  이를테면 반도한어의 ‘산길, 물길’은 경상도 사투리‘산질, 물질’로 발음하듯이 일본에서는 산로(山路)를 sanji로, 아소로(阿蘇路)는 asoji, 담로(淡路)는 awaji로 발음한다.

이야기의 사투리 ‘이바구’는 이와쿠(iwaku)
가마솥 - 부(釜, kam―a)
가마 - 요(窯, kam-a)
사라지다(sar-) - 사루(sar―u)
구두(gud-u) - 화(靴, kut-u)
노루(noru) - 노로(noro)
갓(gas) - 가사(kas-a)
무리(mur-i) - 무레(mur-e)
아가(aga) - 아카(aka)
위, 우에(ue) - 우에(ue)
하나(1, hana) - 하나(단(端), hana)
후리다(hur-i-) - 후루(huru)
꾸리다(ggur-i) - 야리구리(yari-kuri)
논(non) - 노(no)
아가리, 아구(ag-) - 아고(ag-o)
다물다(dam-u-r) - 다마루(dam-a-r-u)
오들오들(떨다) - 오도오도(o-do-o-do)
터벅터벅 - 토보토보(tobo-tobo)
홀리다(hor-ri) - 호레루(hor-eru)
시(댁)(si) - 시우토(시아버지, si-uto) 시우토메(시어머니, si-uto-me)
(버선)볼(bor-) - 보로(bor-o)
대두(dai-du) - 다이두(dai-du)
나물(na-mur) - 나(na)
무르다(mur-) - 무레루(mur-er-u)
병 - 비잉(bin)
고리(짝)(gori) - 고리(kori)
다발(dab-a-r) - 다바(dab-a)
마루(maru) - 마루(maru, 넓은마당)

  두 교수의 연구 결과에서 밝혀진 성과는 반도한어와 열도한어 사이에는 어근뿐만 아니라, 음운, 형태, 문법 구조 등 그 무엇을 비교하더라도 조직이 같으며 역사적으로는 열도한어는 반도 고(古)한어의 글자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전했다. 이 같은 성과는 한ㆍ일 양국의 언어학에 엄청난 혁명으로, 앞으로 양국 언어의 문법체계가 크게 달라질 것임은 물론, 한국어사전과 일본어사전도 영어나 독일어, 불어사전과 마찬가지로 어원이 실리고,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인 비교언어학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두 학자는 주장했다. 이 확인 작업은 5만 어의 어휘를 대상으로 진행 중이며, 인간의 디옥시리보헥산(dna) 해독 작업에 시간이 걸렸듯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작업도 완료될 것이라고 밝혔다.

  언어를 통한 일본의 비밀을 밝힌 이들은 북큐슈 지역에서 발굴되는 야요이인들의 인골 유전자(dna)는 바로 현대의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고대 일본열도는 한반도인들이 건설한 국가였음을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연구를 통해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신화와 전설은 전부 고대 한국인들의 이야기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이들은 밝혔다. 한편 이들은 “이를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이 더욱 가까워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일본은 한반도의 후국(侯國)이다.

  첫 째,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은  "나 자신과 관련해서는 옛 칸무(桓武) 50대 일왕의 생모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84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만찬 석상에서  "스이코(推古 33대 592 ~ 628년 재위)일왕 이전 일왕의 역사는 아직 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일왕 중에는 한국과 관련이 있는 분이 일본에 도래하여 그 혈통이 일왕의 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라고 하여 '살아있는 신'으로 존재했던 일왕 스스로 일본의 왕통이 한반도인이라고 밝혔다. 일왕의 말을 잘 살펴보면 역사의 진실이 보인다.


  둘 째, 하니하라 가주로(埴原和郞)는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대륙인>에서 “인류학적 시작에서 고찰해 보면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주족(移住族)들과 일본 원주족(原住族)의 비율은 대략 85%대 15% 정도”라고 주장했다.

  또, “이주족들은 나라시대(奈良時代 - 제50대 칸무(桓武) 왕이 784년 헤이안(平安)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도 한복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한국말까지 사용했는데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 만엽집(万葉集) 등에 아직 조작되지 않은 부분은 한국어의 한국식 한자용어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셋 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절 도요토미가 만들어 놓은 ‘코무덤(鼻塚)’이라는 너무나도 잔인한 명칭에 고민하다가 ‘귀무덤(耳塚)’이라 조작시켰던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하야시 라산(林羅山)은  “천손(天孫)들은 모두 대륙(한반도)에서 건너 온 인물이다.“ 라고 주장했다.


  넷 째, 전 동경대학교 명예교수였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일본의 고대국가를 건설한 천황족(天皇族)은 대륙 및 한반도 방면으로부터 4 ~ 5세기에 일본 열도로 정복해 들어간 기마민족(騎馬民族)이다. 특히 미마키(美麻紀) 라는 별명을 가진 10대 스진왕(崇神王)은 가야에서 건너 온 황족이 틀림없으며 미마키란 스진왕이 살았던 옛 궁성의 이름인데 미마나(任那)를 일본 발음으로 미마키(みまき)라고 표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에가미 교수는 “일본서기의 강림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들이 일본땅 이즈모와 큐슈에 내려와 원주민인 땅의 신들을 무찌르고 지배하였다’에서 하늘의 신들이란 임나(가야)에서 건너온 사람들 즉, 임금의 땅에서 건너온 황족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다섯 째, 우에다 마사키(上田正昭) 교토대 명예교수의 제자이면서, 2004년 교토시 역사박물관장과 교토산업대 교수를 겸임하고 있는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씨는 “2004년 경남 창녕군 송현동 고분에서 발굴된 금제 귀고리와 장신구 같은 유물들은 일본 나라(奈良)의 후지노키(藤ノ木)고분 출토 유물과 아주 흡사하다. 이것은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본 고대문화의 원천이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들에게서 비롯됐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교토가 1천년 동안 일본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한반도의 선진 문화에 있었다. 일본고대 문헌에 기록된 하타씨(秦氏)는 도래인들로서 교토 서쪽 가도노가와(葛野川) 일대의 농업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타씨가 씨족사찰로 만든 것이 고류지(廣隆寺)이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광융사에는 한국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복사판이라는 일본국보 제1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광륭사 안내책자에는 “재목(材木)은 적송(赤松)이고 제작은 아스카 시대이지만 그 시대의 제작 기술로 어떻게 이처럼 인간적이고 또 인간의 순화(純化)된 모습이 신에 가까운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었을까‘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본 문자와 언어의 기원이 고대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는 중요한 사항들이다. 언어학적으로 살펴 본 일본은 분명 한반도인들이 건설한 한반도의 후국이다.

  또, 중국의 어떤 학자가 중국이 정보통신 강국이 되기 위해서 한글을 이용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kbs에서는 1996년 한글날 특집보도에서 세계언어학자들이 프랑스에 모인 학술회의에서 세계공통어로 한글 사용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한글의 우수성을 정작 우리자신은 잘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세종대왕은 수백 년 뒤를 내다본 시대를 앞서 간 정보통신대왕이 아니었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유네스코는 1997년 10월 1일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어 있는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하였다. 또 유네스코는 ‘세종대왕상’을 제정하여 세계 각국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를 매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맺음말


◆ 과거는 있으나 역사가 없는 땅

  1853년 미국 페리제독(m. c. perry)에 의한 일본의 개항은 극심한 대립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시대였다. 이에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 시절 오랫동안 핍박을 받아오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고토 쇼지로(後象二郞),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같은 하급무사들이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1868년 고오메이(孝明)일왕(메이지 일왕의 아버지)을 독살한 것을 시작으로 무력으로 집권하게 된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즉, 메이지 쿠데타였다. 정권을 찬탈한 이들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같이 상대방을 생각하고 칼등을 쓰는 문과 무를 겸비한 1급 사무라이가 아니라 권모술수와 잔인함을 무기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철학의 깊이가 없는 3류 사무라이들이었다.

  이들은 일본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역사조작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한국의 후국이었다는 것을 없애기 위해 일본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한반도와 관련된 지명, 단어 등을 일본식발음으로 강제 개칭, 조작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가야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오사카시와 나라현 동대사에 있는 가라쿠니신사(韓國神社)는 똑 같은 일본식 발음인 신국신사(辛國神社)로, 고마(高麗)와 관련된 수많은 지명은 짐승 박 또는 거마(巨摩)로, 한국동자들이 추었다는 전통무용 가라코오도리(韓子踊り)는 당자용(唐子踊り)로 변경시켰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라기(新羅)와 연관된 신라촌(新羅村), 신라신사(新羅神社) 등은 백목(白木)으로 개칭 당하거나 다른 신사에 합사 당하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이때 합사 당한 신라신사가 무려 2,700여 신사에 이른다고 김향수의 저서 <일본은 한국이더라> 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어는 일본 자체에서 개발한 언어라고 조작했다. 한반도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본왕을 외부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고 하는 만세일계(萬歲一系)로 조작했다. 일본국민들은 정통적인 토착민으로 조작하여 한반도와 연관성을 부인하는데 안간힘을 다했다. 국민의 위해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이 일본을 과거는 있으나 역사가 없는 무지몽매한 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날 일본은 역사조작과 우익을 표방하면 단시간에 유명해지는 곳으로 변질되었다. 일본인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보는 이중성에 물들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예에서 찾을 수 있다. 시바는 “역사를 왜곡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 에서 러일전쟁을 “조선반도를 보호하고 일본을 방어한 자위전쟁이었다”라고 이중적인 말을 하였다. 일본국민들은 이 책을 1천만 부 이상 구독하여 대리만족을 즐겼다. 그리고 이 자를 일본 국민작가로 추앙한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사고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잘 입증해주고 있다.

 

◆ 꽃을 전달한 손에는 향기가 묻어 있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으로 유명한 독일 실존철학을 대표하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말)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언어(말)가 없다면, 그 민족은 물론이고 고유문화도 보존할 집이 없다"라는 말이다. 이를 다시 역으로 말하면 ‘문자는 말의 집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3천여 년이나 유랑 생활을 하면서도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들의 존재를 세계에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호령했던 만주족은 그들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림으로써 지구상에서 그들의 존재가 사라졌다. <대학살자> 라는 작품에서 ‘언어는 무엇보다 탁월한 무기이며 원자폭탄보다 무섭다’고 말했던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c.v gheorghiu)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이렇듯 모든 존재는 언어화, 문자화함으로써 실체가 드러나고 인식 가능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문자와 언어는 그 민족의 모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의 힘은 총칼에서 나오는 군사력보다 강력하다. 세계화, 지식정보화시대라는 21세기에는 더더욱 언어의 위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언어 자체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문화자원이기 때문이다. 국력이 클수록 그 나라 말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어떤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나라의 국력이 커지기 마련이다.

  고바야시 교수와 시미즈 교수가 일본 가나의 원류가 한반도라고 밝힌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일본이 아무리 역사조작을 한다 하더라도 일본이 한반도의 속국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필리핀과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본래의 언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라틴어로 바뀌었다는 것은 강대국의 지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영어를 언어로 사용하던 영국인들이 도래하여 지배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이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문자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3가지 사유 중 하나일 것이다. 즉, 일본열도가 한반도에서 건너 간 도래인들로 채워져 있던지, 고대 일본이 한반도 속국이었던지, 아니면 일본이 문화수준이 낮아 한반도의 문자와 언어를 차용할 수밖에 없었던지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유가사지론에서 발견된 구결이 그 동안 한문의 획을 줄여 만들었다고 주장하던 히라가나와 똑 같은 방식이라고 말하면서도 일본어는 한반도의 구결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만 방송했다. 이는 한반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조작을 통하여 일본우월주의가 일본 국민들의 평균적인 사고로 자리잡고 있어 진실된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미국은 pax americana를 구가하고 있지만 그들의 조상이 영국이었다는 것을 일본과 같이 숨기지 않는다. 영국인들이 사용하던 언어라 하여 일본과 같이 조작하지도 않는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침공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일본과 같이 그들의 선조국 영국을 침탈하지도 않았다.

  한반도는 언어, 문자, 도자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주었다. 때문에 일본의 영혼은 한반도에 근간을 이루고 있다. 꽃을 전달한 손에는 향기가 묻어 있듯이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땅에서 꽃피우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장구(長久)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고,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윽한 향기를 내뿜으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일본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출처 : 본인의 글입니다 일촌 및 팬들에게 공감한 내용이 전달됩니다. 싸이월드 공감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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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11 20:19 답변공감  답변 내용
권해조 (육군준장(예), 육사초빙교수)

일본은 한국과 가까운 이웃국가로 옛날부터 왕래가 많았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일본 건국과 문화의 뿌리가 한국이라고 말하는 자도 많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인은 기마 민족(騎馬民族)으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주장하고 있듯이 일본인은 우리와 같이 우랄 알타이계로 얼굴 생김새나 말의 어순도 비슷하다.

지금도 도쿄 아카사카(赤坂)나 우에노 아메요코(橫)시장의 김치골목에 가면 한국으로 착각할 정도로 한국 이름의 상점이 많다. 또한 최근에 일본 동북부 최고 두메산골인 야마가다(山形) 도자와무라(戶澤村)란 작은 마을에도 한인촌을 형성하여 고려관(高麗館)을 세우고 도자와류 김치로 유명해 지고있다.

필자는 일본에서 근무할 때 일본의 언어, 지명, 성씨, 도예 등 여러 곳에서 우리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은 필자가 일본 속에서 찾아본 한국의 뿌리 가운데 일부분을 소개하는 것인데 일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일본어 속의 韓國語

 

옛날에는 글(文字)이 있기 전에 말이 먼저 있었다. 우리나라도 한글이 있기 전에 이두(吏讀)문자가 있었고 일본도 9세기경 한자의 한 부분을 따서 표음문자로 만든 가나(伽名)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물론 일본역사책에도 4세기경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가서 한자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듯이 삼국시대에 많은 문물이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사실이다.

 

필자가 일본에 처음 가서 하늘이 ‘구모리(曇)’하여 비가 올 것 같다는 일본말이 우리말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어 속에 한국어를 찾아보았으며, 현재 쓰이고 있는 일본어에 경상도 전라도의 옛 방언이 많이 쓰이고 있었다.

일본에서 우리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구마모토 지역에서는 우리말 네(yes)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규수 사쓰마(薩摩)반도에서는 가루를 치는 ‘체(sieve)’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접속사 ‘~가, 어미 ~다, 의문문 ~까?’ 등도 우리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의태어(擬態語)와 의성어(擬聲語)에는 비슷한 것이 많았다. 키가 ‘쑥쑥’ 자라다를 ‘수구수구’로, ‘슬슬’ 걸어가다를 ‘소로소로’로, 얼굴이 ‘까칠까칠’하다를 ‘까사까사’로, ‘깔깔’웃다를 ‘까루까루’로 크게 우는 소리 ‘어이어이’를 ‘오이오이’로 가마귀 우는소리를 ‘가아 가아’로 닭우는 소리를 ‘고께고꼬’로 매미 우는 소리를 ‘민민’ 등 대동소이한 것이 많았다.

학자들에 의하면 일본어 시마(島)는 경상도 방언 서마에서, 무라(村)는 우리나라 마을에서, 고호리(郡)은 고을에서 유래되었으며, 구다라(百濟)는 원래 큰나라(大國)에서 군나라- 구다라로 변천하였고, 규수지방 방언인 오도무이(무섭다)는 우리말 무덤(墓)이 무더무- 오도무로, 히(日)는 해에서, 히카리(光)은 빛깔에서, 우에(上)는 위에서, 쫀가(總角)는 총각에서, 도무다치(友)는 동무들에서 변했다고 보고있다.

특히 후쿠오까 지역에는 지금도 줄다리기를 할 때 ‘영사 영사’를 외치고 있고, 오사카시의 조선통신사 재현 축제에는 ‘왔쇼이 왔쇼이 꼬랴 삿토 왔쇼이’를 외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어 어원이 상당부분 우리말에서 전래된 것은 사실이며 아직도 여러 곳에서 우리말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속의 韓國 地名. 寺刹名

 

우리는 일본의 나라(奈良)가 우리말 나라(國家)에서 유래되었다고 들어왔다. 백제가 망하자 일본에 망명자들이 나라(國)를 그리워하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기분으로 살자는 뜻에서 ‘나라(奈良)’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일본 속에서 고대 우리나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 삼한시대 한국의 이름과 같은 지명(地名), 사찰명(寺刹名)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 우리나라 문화가 일본으로 많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우선 고구려와 관련있는 이름을 찾아보면 사이타마 현 이루마(入間)군에 있는 고려향(高麗鄕)을 들 수 있다. 이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 직전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사신으로 갔던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장군 일행이 귀국하지 못하고 주위에 고려향(高麗鄕)을 만들어 오늘까지 1300여년간 살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고려진자(高麗神社)가 있는데 현재 약광 59대손 고마스미오(高麗澄雄)가 궁사(宮司)로 있다. 그 주위 산을 고마산(高麗山), 강을 고마센(高麗川), 기차역을 고마에끼(高麗驛)로 부르고 있다. 나라, 교도, 오사까 지역에도 고마마치(高麗町), 고마바시(高麗橋), 나라의 아스카(明日香)에 도다이지(東大寺), 규수지방에도 고마마치(高麗町), 고마바시(高麗橋), 고마도리(高麗通) 등이 있다.

 

신라와 관계되는 지명은 일본 서부 니가타(新瀉), 도야마(富山), 이시까와(石川), 후꾸이(福井) 지역에 많다. 신라는 3국중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으며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살았다. 니가타(新瀉) 현의 사도시마(佐渡島) 오끼마치(小木町)에는 신라인이 모여사는 신라촌(新羅村)이 있고 지금도 신라 시조 박헉거세왕을 조상으로 모시고 장자상속(長子相續)의 전통을 이어가며 15여 가족이 살고 있다. 또한 니카타에는 시라기진쟈(新羅神社), 신라왕비(新羅王碑), 시라키진쟈(白木神社) 등이 있고, 교도 나라지역에도 시라키진쟈(新羅神社), 사라키지(新羅社), 지금은 이름을 바꾸었지만 오사카의 도돈보리(道頓堀) 하천에 시라키바시(新羅橋) 등이 있다.

그리고 시가(滋賀)현 오쓰시(大津)시에 신라사(新羅寺)과 장보고 장군을 모신 사당인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시마네(島根)현 오타(大田)시에는 한신신라신사(韓神新羅神社), 규수 가고시마현 다루미즈(垂水)시에는 박혁거세왕을 제신으로 모시는 거세신사(居世神社)가 있다.

 

백제와 관련되는 지명은 교도 나라 오사카 지역과 규수지역에 많다. 오사카와 교도사이 마이반(枚方)에 왕인공원, 백제사적공원, 쿠다라지(百濟寺), 쿠다라진쟈(百濟神社) 등이 있고, 나라 지역에 쿠다라에키(百濟驛), 쿠다라무라(百濟村), 쿠타라가와(百濟川), 쿠다라바시(百濟橋), 아스카(明日香村)에 아스카지(飛鳥寺), 백제소학교 (小學校)가 있고. 오사카 지역에는 4대왕사(四大王寺)가 있다. 규수 휴가(日向)시에서 40키로 떨어진 남향촌(南向村)에 쿠다라 사토(百濟里)란 백제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백제 정가왕(禎嘉王)을 모신 신문신사(神門神社)가 있다. 그리고 최근 부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미야자키(宮埼)시에 조성된 백제마을에는 국립 부여박물관과 같은 한국 전통 건축양식으로 백제관(百濟館)과 언덕에는 낙화암 백화정(百花亭)을 모방한 백화정(白花亭)을 건립하였다.

 

그밖에 가야 삼한과 관련있는 지명으로는 나라, 오사카지역에 가라쿠니신사(辛國神社:종전 韓國神社)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규수지역과 대마도 지역에서 많다. 규수지역 가고시마현에는 환웅과 단군을 제신으로 모시는 환단신사(桓檀神社),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 유적(七王子 遺跡), 카라구니다케(韓國岳) 등이 있다. 규수 사스마(薩摩)반도 가세다(加世田)시의 니니기노 미코도(藝名) 유적은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가 일본에 도래하여 다가치호미네(高千穗峰)에 강림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어 나라를 다스렸다는 전설과 일본 사기, 고사기를 토대로 ‘일본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다가치호미네 인근 가라쿠니다케(韓國岳)는 해발 1,700미터로 일본 진무천황(神武天皇)의 증조부인 니니기노미코토가 산 정상에 올라가서 고국 출생국인 가야(伽倻)를 바라보며 “여기가 가라쿠니(駕洛國)을 향하고 있으니 좋은 곳이다” 라고한 조칙(詔勅)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구마소성(熊襲城) 근처에는 가야신을 모시는 가라쿠니우도우미네 신사(韓國宇豆峯 神社)가 있다.

또한 일본의 산 이름도 보통 야마(山)로 부르지만 후지산(富士山), 아소산(阿蘇山), 아오카키산(靑垣山) 등 우리나라와 같이 산(山)으로 부르는 것이 많이 있다. 하천도 보통 가와로 부르지만 에노센(可愛川), 가수노센(葛野川), 누다센(沼田川) 등 한국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사찰도 통상 테라(寺)로 부르고 있으나 호류우지(法隆寺), 도다이지(東大寺), 고류지(光隆寺) 등 우리와 같이 절(寺)로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고대 한국의 문물이 일본으로 유입됨에 따라 한국의 지명이 지금도 일본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속의 韓國姓氏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에 이미 성씨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의 흑지상지(黑齒常之), 부여충성(扶餘忠勝),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성씨는 단일(單一) 성씨보다 복수(復數) 성씨가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왕실과 귀족들은 한국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성명을 가졌으나 대부분 서민들은 19세기 후반에야 성명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의 고대사에는 수많은 한국 고관 명사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 의하면 일본 역사에서 가장 먼저 복성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도 백제사람 수수허리(須須許里)이다. 일본의 고대 씨족을 기록한 사서(史書)로 주목되는 것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다. 이 성씨록에 등장하고 있는 고대 선조들은 신라, 백제, 고구려 왕족과 고관들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기록된 성씨는 약 300여 개인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그중 백제 왕족의 성씨로는 일본어로 쿠다라(百濟), 이와노(石野), 오오카(大丘), 마쓰다(沙田), 스가노(菅野), 오카야(岡屋), 하루노(春野), 오하라(大原), 나카노(中野), 쿠니모토(國本), 나가다(長田)등의 복성과, 하야시(林), 후미(文)씨 등 단성이 있다.

신라 후에 성씨들은 야마무라(山村), 미야께(三宅), 우나바라(海原), 오이치(大市), 다께하라(竹原), 야마다(山田), 토요하라(豊原) 등의 복성과 이토(系)시 등 단성이 있다. 고구려 성씨는 고마(高麗), 나가세(長背), 나니와(難波), 고부(後部), 다카이(高井), 다카다(高田), 쿠와하라(桑原), 아사케(朝明), 요시이(吉井) 등의 복성과 고(高), 오(王), 시마(島)씨 등의 단성이 있다.

그리고 괄목할 것은 고대 일본의 벼슬한 사람의 관명과 성명을 “중부덕솔 목협금돈(中部德率 木傀今敦)” 등과 같이 백제와 똑같이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즉 관직 명칭과 성씨와 이름의 3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고대 나라(奈良)시대 직제 등이 일본 조정의 실권을 가진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책 의하면 1603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명자대도 금(命字帶刀 禁)”이란 법령을 만들어 평민이 성을 갖고 허리에 칼을 차고 무사 귀족 행사를 못하게 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엄벌을 내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870년 9월 19일 일본정부에서 모든 사람이 성씨를 지어서 사용하도록 포고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평민도 묘오지(苗字: 名字)를 지어 쓰도록 허락하노라”하였으니 그전까지 일본 평민들은 성명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당시 일본정부는 호적을 확실히 하여 징병목적에 두고 있었으나 오랜 봉건사회에서 지내온 평민들은 성명을 짓지 않고 신고를 기피하였다. 일본정부는 1871년 일본내각의 최고 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이 천민들도 평민으로 신분을 올려주는 “태정과포고”라는 “신분해방령(身分解放令)”을 내려 사회 계급을 화족(華族), 사족(士族), 졸(卒), 평민(平民)의 4민(四民)으로 분류하였다. 그후 1873년 태정관은 다시 징병령을 내려 만 20세 이상 남자는 3년간 군 복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간혹 좋은 성씨를 선호하여 막부관가에 돈을 바쳐 성씨를 사는 자도 있었으나 많은 평민들은 세금과 군대 가기를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에 태정관은 1875년 2월에 “명자필칭 의무령(命字必稱義務令)”을 내려 성씨를 짓지 않으면 엄벌하도록 하였다.

 

일본 교민들에 의하면 그 당시 한꺼번에 그 많은 창씨를 하려니 갖가지 애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갑자기 성씨를 짓기 위해 유식자들의 행패로 별개별 성씨가 생겨난 것이다. 예컨데 큰뱀(大蛇), 여우코(狐鼻), 메도키(百目鬼), 히토카베(人首), 우키(浮氣:바람끼), 시나씨(尻無:엉덩이가 없다), 쇼오유(醬酒: 간장), 와쇼쿠(華食), 후로(風呂: 목욕탕), 호즈미(8월1일), 토우지(冬至), 누쿠이(明日), 시토(刺刀: 날카로운 칼), 도께(時計), 이에데(家出), 나나시(名無), 반치(番地) 등이다.

따라서 필자는 일본의 성씨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 인구의 95퍼센트가 동시에 새로운 성씨를 만들려니 수 만개의 성씨중 이상한 성씨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와타나베 미치오(渡邊三男)교수는 그의 저서 ‘일본의 성자(姓字)’에서 일본성의 28퍼센트가 백제, 신라, 고구려인의 기본성이며, 하라지마 레이지(原島 禮二)교수도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성씨 가운데 32퍼센트가 한국에서 온 성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성씨의 30퍼센트 이상이 한국에서 건너간 성이며, 1875년 이후 지어진 대부분 성씨도 한국 고대 성씨를 모방하였다고 보여진다. 특히 현재 일본의 성씨 가운데 신라에서 건너간 야마다(山田), 시미즈씨(淸水), 백제에서 건너간 하야시(林), 야마쿠지(山口) 등은 일본에서 20대 안에 들어가는 대성(大姓)이다. 또한 쿠다라(百濟), 쿠다라키(久多良木), 시리기(新羅), 시라키(白木), 고마(高麗), 코마(駒)씨 등의 삼한시대 국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의 후예들도 아직도 여러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일본속의 韓國陶瓷器

 

일본 도자기의 주요 생산지는 대부분 규수(九州)에 위치하고 있다. 규수의 가고시마(鹿兒島), 사카(佐賀), 나가사끼(長埼), 구마모토(熊本), 후꾸오까(福岡), 인접 야마구치(山口) 등에 산재하고 있다. 이들 도자기의 시작은 대부분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끌려온 우리 선조 도공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소위 일본도예의 3대 거봉(巨峰)이라고 일컷는 사스마야키(薩摩燒), 가라스야키(唐津燒), 아리다야키(有田燒)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이름있는 하기야키(萩燒), 아가노야키(上野燒)등 모두가 우리나라 선조들에 의해 전래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도예의 뿌리는 우리나라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가고시마 사쓰마야키(薩摩燒)이다. 이는 자기와 도기를 동시에 구워내는 것이 특징이며 초기에는 질그릇, 다기(茶器)가 주산이었으나 지금은 우리나라 인간문화재들이 만들어 내는 고급 도예품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쓰마야키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은 심수관가(沈壽官家)다. 1598년 정유재란때 전라도 남원 전투에서 패한 후 약 70여명의 도공이 3척의 배에 실려 끌려갔다. 그 가운데 박의평(朴平意) 심당길(沈當吉) 등 43명이 탄 배가 규수(九州) 가고시마(鹿兒島) 시마비라(島平) 해변가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5년간 살다가 1603년 12월 현재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의 미야마(美山) 마을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미야마는 200호의 세대중 100호 정도가 도공의 후손으로 조상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그 가운데 400여 년간 14대째 유업을 이어온 심수관(沈壽官)가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필자가 심수관씨를 만나 오늘의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만들어 낸 심수관가의 경험담을 듣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초대 심당길(본명은 讚)이 일본에 끌려와서 말도 통하지 않고 물건을 만드는 도구로 천대받으면서 굶주리고 고생하던 쓰라린 경험과, 일본 도착 16년후에야 백토를 찾아 백자를 만드는데 성공한 끈질긴 장인정신으로 오늘의 사쓰마 야키(薩摩燒)를 일구어낸 도공들의 애환(哀歡)어린 이야기는 정말 한편의 역사책이었다. 수관(壽官)이란 예명은 12대 조부때부터 사용했으며, 13대 부친도 교도(京都)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세계적인 도예가였다. 본인도 마을에 의사가 없어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후 “정치학을 공부하여 마을을 대변할 수 있도록 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와세대(早稻田)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부친의 업을 이어받았다고 했다. 특히 부친께서는 “인생이란 긴 사슬 가운데 한 개의 고리에 불과하다. 너도 그 사슬에 한 개의 고리를 걸면 된다”고 말씀하신 부친의 철학적인 말씀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필자가 본 심수관은 일본의 최대의 도예가 뿐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부친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직도 한국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항상 고국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애국자가 틀림없었다.

또한 사쓰마(薩摩)야키에는 김해(金海)를 중심으로 번주(藩主)의 보호아래 1601년 가마를 연 가고시마현 다테노(堅野)계가 있고, 다음은 1608년 방중(芳仲)이 중심이 되어 연 가마가 있다. 이 가운데 김해는 29세의 나이로 도평에서 4키로 남방 가미노가와(神之川) 부근에 10여명 일행과 도착하여, 번주(藩主)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사쓰마야키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기고 52세에 세상을 떠난 인물로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우선 본명이 불명하며 일본 번주의 허락 하에 호시야마 나카지(星山 仲次)란 일본 이름을 사용하면서 호를 김해로 사용하였다. 그는 경북 성산 사람으로 가마가 있던 산도 성산이라 불렀고 김해가 고향이라 호를 김해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두 번째로 사카현(佐賀縣) 가라스야키(唐津燒)다. 특징은 고회유(藁灰釉)를 많이 사용는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때 끌려간 도공과 일찍 왜구 일당인 마쓰우라(松浦)도당들에게 잡혀갔거나 그들의 유혹에 끌려간 도공들에 의해 이루어진 도자기이다. 특히 한강 이북출신 도공들이 이곳에서 일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이며, 이중 나가사토다로 우에몬(中里太郞 石衛門)은 일본을 대표하는 도예가이며 그의 부친은 국보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세 번째인 사카현의 아리다 야키(有田燒)다. 이는 우리나라 행남도자기, 한국도자기와 같은 대중 사기그릇 도자기가 주종이다. 정유재란때 공주에서 끌려와 사카현(佐賀縣) 아리타(有田)지방에서 문을 연 이참평(李參平)이 시조다. 그는 오랜 고행 끝에 1616년 석영분이 많은 도석(陶石)을 발견하여 일본 백자 아리다 야키의 도조(陶祖)로 숭상받았으며, 가네가에 산베어(金江三兵衛)란 일본이름으로 바꾸고 1655년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아리다시는 매년 4.29 - 5.6일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아리다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마을 뒷편 도산(陶山)공원에는 조그만 돌비석과 묘소가 있다. 그리고 아리다에는 현재 700여개의 도자기 상점이 줄지어 있고 이참평 13대 손도 도공으로 일하고 있으나 미미한 존재이다.

그밖에도 1604년 한국 도공 이작광(李勺光), 이경(李敬) 형제가 야마구치(山口)현의 마스모토야키(松本燒)에서 시작한 하기야키(萩燒), 조선도공 팔산(八山)에 의해 시작된 후꾸오카의 다가도리야키(高取燒), 조선도공 존해(尊楷)에 의해 시작된 구마모토현 아가노야키(上野燒), 조선인 웅천(熊川) 출신 거간(巨關)에 의해 시작한 백자세공이 특징인 나가사끼현의 미가와우치야키(三川內燒) 등이 있는데 대부분이 우리 선조들이 전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 도자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혼이 스며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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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썼다는게 대단합니다.출처 : 본인의 글입니다

 


 

★ 어원(語源)으로 살펴보아도, 독도는 우리땅 ~~★
독도 동쪽 끝 땅 2005/07/25 07:10 초하(初夏)|sophiako 

 


 다음은  봉파리님의 우리말 사랑(http://blog.nate.com/bongfly)에서 그대로 옮겨 실었습니다.

 

※ 이 글의 어원(語源) 연구의 방법론과 한국어와 일본어 대응 예들은 현재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인 국어학자 서정범 교수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문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서정범(1989/1996), "우리말의 뿌리", 고려원.
서정범(2000), "國語語源辭典", 보고사.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를 논할 때, 고대 한국어가 일본의 큐슈(九州)지방으로 건너가 일본어의 골격을 이루었다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 학계에서도 인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기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비교할 때 중요한 것은,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를 바로 일대일 대응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어도 이미 많은 변화 과정을 거쳤고, 일본어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물론 현대어의 자료로도 비교 연구가 가능한 경우도 다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어는 줄곧 남방계 언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단순 비교로는 그 면면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두 언어의 가장 큰 차이는 한국어는 폐음절어(閉音節語; 받침이 있는 글자)어의 특성을 보이고, 일본어는 개음절어(開音節語; 받침이 없는 글자) 체계라는 점입니다. 폐음절어인 고대 한국어가 일본으로 건너가 개음절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원 연구의 방법론 전반을 자세하게 살필 수는 없으나 비교 가능한 한국어와 일본어의 어휘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름 : kumo(雲)
씨름 : sumo(相撲)
붓(筆 < 붇) : hude(筆 < bude) 현대 일본어의 'h'는 'b'에서 변한 것)
물(水), 못(池 < 몯) : midu(水)
돌(年) : tosi(年)
살(肉) : sasi(肉)
살(矢) : satsi(矢)

  이는 단지 몇몇 예에 불과합니다. 이론적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본다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 기회가 되시는 분들은 위의 참고문헌을 보세요.

  여기서 "독도"에 대한 어원(語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정범 교수는 현재의 'ㄱ' 받침은 원래 'ㄹ' 받침이 쓰인 말에 'ㄱ'이 들어가서 오히려 'ㄹ'을 밀어내고 생긴 예가 많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과정의 예는 "닭(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달'이라고 하고, 제주도에서는 '닥'이라고 합니다. 현재 표준어는 '닭'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실제 발음에서는 [닥]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볼 때 종성의 'ㄱ'은 "달 > 닭 > 닥"과 같이 본래 'ㄹ'이 있던 곳에 'ㄱ'이 삽입되어 'ㄹ'을 밀어내고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일본어와의 대응을 살피면 한국어가 'ㄹ'을 유지하는 반면 일본어에서는 'ㄹ'이 탈락되고 'ㄱ'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술(酒) : sake(酒)
달(月) : tsuki(月)
밀(小麥) : mugi(麥)
그리메(影) : kage(影)

  호남방언에서는 돌(石)을 '독'이라고 합니다. 이를 볼 때 "돌 > 돍 > 독"와 같은 변화 과정을 상정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 독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독도는 온통 돌 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돌섬"이라는 뜻에서 '독섬'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의 독도(獨島)가 된 것뿐입니다. 독도는 외로운 섬이 아니라 "돌섬"인 것입니다.

  그럼 일본이 죽도(竹島)라고 우기는 'take-sima'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sima는 한국어의 '섬'이 일본으로 건너가 개음절화한 것입니다. 바로 대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ake는 위의 예와 같이 "tal > talk > take"와 같은 변화를 입은 것입니다. 즉 현재 일본어 takesima표기를 보더라도 독도는 "돌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나무섬"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사실 그들의 어원 연구 수준은 서정범 교수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일본인들은 일본어의 어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어가 고대 한국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영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저는 서정범 교수님으로부터 학부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강의도 듣고, 이 이론에 대한 책도 여러 번 읽었기 때문에 익숙하지만 아마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어리둥절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글로 하는 설명은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음에도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는 분들은 서두에 언급한 책을 꼭 읽어보세요. 참 재미있습니다.

  독도 망언에 너무 분개한 나머지 글을 올리고 싶싶었는데, 부족하게나마 이렇게 어원을 살피는 것으로 분을 삭이고자 합니다. 독도는 명백히 우리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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