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bc8937
2012/3/2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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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기획연재 " 高句驪 뿌리歷史 "  

 

고구려사 기획연재 " 高句驪 뿌리歷史 "를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먼저 '고구려뿌리역사'를 읽기 전에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를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태백일사>

                   고 구 려 국  본기

출 처 :  역사광복운동본부  http://bluecabin.com.ne.kr/handangoki/koguroy.htm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 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찌기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 백 여 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 단군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 오심은 임술(BC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의 8년이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찌기 서쪽 압록 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하였다. 때는 곧 임인(BC 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 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 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BC 27)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 성자이다. 유리명제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열제의 20년,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대,<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에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교화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이하생략

 


 한자가 어려우신 분은 스크롤 내려서 뒷 부분에 수정본을 읽으시기바랍니다. 

 

 

第一章  高句麗의 血統

 


     ① 高句麗의 建國說

 


㉮ 三國史記 편


  高句麗의 建國說은 대략 3가지로 볼 수 있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一卷에 보면 扶餘王 解夫婁는 늙어서 자식이 없어 山川에 祭祀를 지낼 때 대를 잇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어느날 말을 타고 扶餘王이 山川인 연못에 이르렀을 때 큰돌을 보는 순간 그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王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돌을 굴려 보았다.

그곳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금색 개구리 형상으로 있어 王은 매우 기뻐하면서 하늘이 내려준 씨앗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고 記錄하고 있다.

扶餘王 解夫婁가 죽자 金蛙는 王位에 올랐으며, 그후 都邑地를 옮기고 나라이름을 東扶餘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

金蛙가 王位에 오른 후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어느날 太白山 남쪽 발수(渤水)에서 河伯女인 柳花를 유인하여 鴨綠변에 있는 私宅에 가두어놓고 柳花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당시 柳花는 동생과 함께 놀러 나왔다가 자칭 天帝子인 解慕漱에 의해 감금당한 후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알이 어찌나 컸던지 닷 되(五升)나 되었다고 했다. 本文에서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라고 하는 것은 진짜 알이 아니라 庶子를 알로 비유한 文章이다.

  庶子가 태어나자 金蛙王은 개․돼지가 있는 곳에 아이를 버렸으나 먹지 아니했다.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해갔다. 그후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날개로 덮었다. 王은 화가 나 알(庶子)을 깨 버리려 했으나 깨지지 아니했다. 즉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는 수 없이 柳花인 어머니가 강보에 싸서 집으로 데리고 와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껍질을 깨고 남자아이가 나왔다고 되어있다.

  本文에서 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裏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이라고 하는 것은 庶子를 王이 죽이려고 갖은 手段을 다 썼으나 죽지 아니했다는 것을 뜻하는 文章이다.

  朱蒙이 일곱 살이 되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니 백발백중이었다. 扶餘의 속담에 따르면 명사수를 朱蒙이라 했다. 고로 이름하여 이르기를 金蛙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언제나 朱蒙은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 기능이 매우 우수하므로 朱蒙을 따르지 못했다.

  金蛙인 扶餘王의 큰아들 帶素가 王에게 말하기를 朱蒙은 사람의 所生이 아니라고 했다. 朱蒙의 사람됨이 너무나 용맹해서 일찍 손을 쓰지 아니하면 후환이 두려우므로 제거해야한다고 청했다. 그러나 王은 듣지 아니했다. 신하를 시켜 말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朱蒙이 워낙 뛰어남을 알고 아주 여윈 말을 기르도록 했다. 하지만 朱蒙은 여윈 말을 살찐 말로 잘 길렀다. 王이 살찐 말을 직접 타보고는 아직도 말이 여위었다고 朱蒙에게 말하였다. 후에 들에서 사냥을 하면서 朱蒙은 명사수가 되었다. 여윈 말을 살찌운 뒤 朱蒙이 들에서 사냥하는 무예를 닦은 결과 적은 화살로 많은 짐승을 잡았다.

그 당시 王子와 여러 臣下들은 朱蒙을 죽일 것을 모의했다. 이때 朱蒙의 어머니인 柳花가 이러한 事實을 엄밀히 탐지하고 말하였다. 나라사람들이 너(朱蒙)를 죽이려 하니 너는 재주껏 어디든지 가도록 당부하였다. 만약 지체하게 되면 엄청난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려면 적당히 먼 곳으로 가야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朱蒙은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 등 세 사람의 친구와 함께 이른 곳이 엄사수(淹水)였다. 엄사수는 일명 개사수(蓋斯水)라 했으며 압록(鴨淥)의 동북에 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개사수(蓋斯水)는 개마대산(蓋馬大山)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므로 玄菟郡에 속해있다. 玄菟郡은 지금의 陝西省 西安을 말한다. 後漢書 東沃沮 편에 高句驪가 있던 곳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이라 했다. 이곳은 개마현(蓋馬縣)의 이름이며 玄菟郡에 속해있고 개마대산이 있는 곳은 平壤城 서쪽으로, 平壤은 즉 요(堯)왕검이 있던 王儉城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朱蒙이 달아난 곳은 엄사수(淹水)라 했으므로 지금의 陝西省 西安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 주위에 있는 위하(渭河)의 동쪽 하남성(河南省) 西쪽 편인 듯하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129쪽 개마대산(蓋馬大山)의 記錄을 보면 東沃沮와 高句驪가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다고 되어있다. 朱蒙이烏伊․摩離․陜父 등 세 친구와 함께 엄사수(淹水)에 이르렀다고 했으므로, 陝西省 西安의 동쪽으로 黃河의 支流인 위하(渭河) 즉 渭水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朱蒙 一行은 엄사수(淹水)에 이르렀으나 다리가 없어 건널 수 없었다. 뒤에서는 扶餘兵이 쫓아오고 앞은 강물에 막혀 건널 수 없게 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朱蒙은 큰소리로 나는 天子의 아들이며 河伯의 外孫으로 금일 도망 오는 것이라고 외쳤다. 뒤에서 쫓아오는 자가 오면 큰일이라고 했을 때, 강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었다.

여기서 물고기와 자라는 실제 물고기와 자라가 아니라 강 건너에서 天子의 外孫으로 금일 도망 온다는 소리를 들은 河伯의 後裔들이 헤엄쳐 구출하러 왔던 것이다.

古代社會의 言語는 해학적이며 비유적이고 은유적이면서 풍자적인 언어였기에 강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나타나 다리를 놓아주어 건너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文章이다.

  朱蒙 一行이 강을 건너게되자 물고기와 자라는 흩어졌다고 했다. 뒤따라 오던 扶餘의 기마병(騎馬兵)은 건너지 못하고 朱蒙은 모둔곡(毛屯谷)까지 이르게 되었다. 魏書에 依하면 毛屯谷이 있는 곳은 普述水라고 되어있다.

  本文에서 毛屯谷이라 했으므로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찾아보았다. 毛라고 나라가 있던 곳은 河南省 宜陽縣이었다. 이곳에는 毛河라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河南省 洛陽市 바로 西南쪽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마의(麻衣) 즉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누더기처럼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풀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때 朱蒙은 말하기를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씨는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과 이름이 없었던지 朱蒙은 이름과 성을 말해 주었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을 재사(再思)라고 했고, 너덕너덕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의 이름은 무골(武骨)이라 했으며, 풀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의 이름은 묵거(黙居)라고 했다.

또한 성(姓)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므로 朱蒙은 再思의 姓을 극씨(克氏)라 했고, 武骨의 姓을 중실씨(仲室氏)라 했으며 黙居는 소실씨(少室氏)라고 姓氏를 하사했다. 이내 다시 이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로부터 빛나는 명을 이어받았으므로 이제부터 터전을 닦는데 인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우연한 때 세 사람의 어진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각자 능력을 헤아리고 각각 일의 임무를 맡기로 하였다.

  이들은 朱蒙과 함께 일행이 되어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魏書에 이르기를 卒本川은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했다. 여기서 卒本川은 흘승골성이라 했으며, 흘승골성(紇升骨城)은 玄菟郡에 속한다고 通典 高句麗편에 記錄하고 있다. 흘승골성을 周書 高句驪편에서, 高句麗는 본래 扶餘에서 나왔으며 平壤城에서 다스렸다고 되어있다.

  卒本川에 있는 紇升骨城은 보기에도 土質이 肥沃하고 경관이 좋았으나 한편 산과 강으로 되어있지만 산세가 험하다고 되어있다. 드디어 이곳에 都邑地를 定하기로 하고 궁실을 지었다.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위쪽으로 농막같은 풀집을 지어 살기로 했다. 本文에서 沸流水가 흐르는 곳이라 했으므로 中國古今地名大辭典 519쪽을 찾아보았다. 沸流水는 丸都城이 있는 丸都山 아래 沸流水가 東쪽에 있다고 記錄되어 있다.

다시 丸都城을 찾아보았다. 地名辭典 51쪽에, 丸都는 高句驪의 옛 都邑地라고 적고 있다. 通典에 의하면 城이 있는 곳은 丸都山 아래 沸流水의 동쪽이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後漢書 東沃沮편에 高句驪는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으며 蓋馬縣의 이름은 玄菟郡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蓋馬大山이 있는 곳은 平壤城 西쪽이며 平壤은 즉 王儉城이라고 했으므로 三國史記의 記錄과 일치하고 있다.

  朱蒙이 달아난 곳은 엄사수(淹水)였으며, 엄사수를 건너 毛屯谷까지 이르렀고 다시 찾아간 곳은 卒本川이 있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이었다. 흘승골성이 있는 곳은 비류수(沸流水)가 있는 곳으로 蓋馬大山의 동쪽이라 했다. 蓋馬大山에는 平壤城이 있으며 平壤城은 堯王儉 즉 요임금이 살던 王儉城이다. B.C. 2357년부터 堯王儉이 살던 王儉城은 高句麗가 都邑하면서 平壤城이라 했으며 高句麗 24代 陽原王 8년에는 平壤城을 改築하면서 長安城이라고 했다고 三國史記에 記錄되어 있다.

  그리하여 朱蒙은 國號를 高句麗라 했으며 그로 인해 高爲氏 즉 高氏의 姓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朱蒙의 그때 나이는 22세라고 했으며 본래 扶餘王이 아들이 없어 朱蒙의 사람됨이 비상하므로 扶餘王이 죽은 후 朱蒙이 王位에 오른 것으로 記錄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一卷 始祖편은 朱蒙의 高句麗 建國說을 기록하고 있다.

 

㉯ 通典 편


  通典 高句麗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高句麗는 後漢의 朝貢을 받은 바에 의하면 본래 扶餘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 先祖는 朱蒙이며 朱蒙의 어머니는 河伯女로서 扶餘王의 처라고 되어있다. 어느날 햇빛이 들더니 드디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의 이름을 朱蒙이라 했다.

여기서 本文을 보면 爲日所照, 遂有孕而生, 及長名曰朱蒙이라고 되어있다. 햇볕이 비추는 곳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것은 扶餘王을 본후 잠자리를 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임신 후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속언에 따르면 朱蒙은 명사수로서 활을 잘 쏘았으므로 인해 나라사람들이 죽이려 했다. 그때 扶餘王은 朱蒙을 버리기로 했다. 朱蒙은 東南쪽으로 달아나 보술수(普述水)에 다다르고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라이름을 句麗라 하고 高爲氏라 姓을 갖게 되었다. 漢武帝(B.C.140~135년)가 朝鮮을 멸한 후 高句麗는 고을(縣)을 두게 되었는데 그곳은 玄菟郡이라 했다. 이곳은 東晉(A.D.317~318년) 이후 高句麗 王이 살던 곳은 平壤城이라고 되어있다. 즉 漢나라 때의 樂浪郡이었으며 王儉城이라고 했다.

모용황(慕容皝)의 침공으로 인해 나라 안에 있는 城으로 都邑地를 옮긴 곳이 역시 長安城이라고 記錄하고 있다.

  本文에서 보면 朱蒙은 처음부터 高句麗란 나라이름을 쓴 것이 아니라 처음 都邑을 할 때 句驪라고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通典 本文에서 구루(溝漊)는 句麗이며 이름은 城이라 되어있다. 여기서 구루(溝漊)는 도랑을 말하여 句麗가 河川의 주변에서 諸侯國으로 成長했음을 意味하고 있다.

  그 당시 왕망(王莽)은 句麗兵을 動員하여 匈奴를 벌했다고 한다. 王莽은 아무 욕심없이 匈奴를 물리치고 句麗를 지키려고 나아갔다고 되어있다. 그때의 社會는 어지러워 모든 나라들이 망할 즈음에 이르자 도적떼들이 창궐했으므로 王莽은 句麗兵을 일으켜 漢나라를 격파한 후 高句麗라고 이름을 고치고 天下에 반포했다고 記錄하고 있다. 그리고 高句麗의 밑에는 諸侯國으로 句驪를 두기로 했다고 되어있다.

  通典의 本文을 보면 朱蒙이 高句麗를 세운 것이 아니라 王莽이 高句麗를 建國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렇다면 朱蒙과 王莽은 어떤 관계이며 高句麗의 脈은 어떻게 된 것인지 本文 第一章 高陽氏와 高辛氏편에서 高句麗의 뿌리를 밝히기로 하겠다.


  朱蒙의 이름을 보면 추모(鄒牟)라고 했고 또한 중해(衆解)라고도 했다. 한편 王의 호(號)로는 東明聖王 그리고 추모왕(鄒牟王)이라고 했다. 朱蒙은 22세 때 비류수(沸流水) 위쪽에 터전을 잡고 고구려(高句麗)라고 한 후 18년 뒤 40세에 승하(昇遐)했는데 龍山에 장사지낸 후 東明聖王이라 했다고 三國史記에는 적고 있다.

  通典과 三國史記를 보면 高句麗의 建國이 엇갈리고 있다. 三國史記에는 朱蒙이 高句麗라고 했다면, 通典과 後漢書 句驪傳에서는 王莽이 高句麗라고 天下에 이름을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다.

  高句麗는 後漢 광무제(光武帝.A.D.25~56년) 8年에 파견사를 조공을 바쳤다고 되어있다. 그리하여 왕호(王號)를 받아 제왕(帝王)으로 불리었다고 通典에는 적고 있다. 高句麗國은 주로 요동(遼東)의 동쪽으로 千里나 되었다. 이때 南쪽으로는 朝鮮이며 예맥(濊貊)과 동으로는 옥저(沃沮)가 있었고 北으로는 扶餘가 인접해 있었다. 高句麗의 강역(彊域)으로는 사방 2千里이며 많은 산들과 깊은 계곡이 있었고 들은 별로 없고 연못과 산과 골짜기 같은 곳에 살았다. 농사로는 작은 밭을 힘으로 일구고 부족함이 없이 스스로 자산을 갖고 살았다. 풍속으로는 절기마다 음식을 해먹고 좋은 宮室을 수리하였다. 하지만 高句麗는 扶餘와는 다른 종족이라고 적고 있다.

  通典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高句麗는 玄菟郡에 속해있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都邑을 定하고 建國했음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누누히 說明한 바와 같이 玄菟郡은 지금의 西安 一帶이며 漢나라 무제(武帝.B.C.140~135년)가 朝鮮을 滅할 때 高句麗縣을 두었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高句驪縣은 漢나라 武帝 때 있었으므로 그보다 훨씬 100년 前에는 句麗國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史記와 다른 史書들은 高句麗 建國을 B.C.37年으로 보고 있으나 高句麗 28代 보장왕(寶藏王.A.D.634~668년) 27年 記錄을 보면 高句麗는 今九百年으로서 高氏自漢有國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今九百年이라 하는 것은 高句麗가 900년 간 이어왔음을 말한다.

앞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漢나라 무제(武帝.B.C.140~135년) 때 이미 高句麗縣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建國時期는 B.C.37년에서 195년의 差異가 있으므로 B.C. 232年으로 보아야한다. 그러므로 高句麗의 建國年代는 句麗로부터 始作되어야한다는 것이다.

  高句麗의 建國說은 三國史記에서 魏書를 引用한 흘승골성(紇升骨城)과 通典을 引用한 흘승골성, 그리고 北史에서 引用한 흘승골성 등은 같은 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三國史記에서 卒本川에 이르러 都邑을 定하고 宮室을 지은 곳은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위 땅에서 高句麗를 建國한 것으로 되어있다.

앞에서 말한 卒本川과 紇升骨城 그리고 沸流水의 地域은 모두 玄菟郡에 속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朱蒙은 처음부터 高句麗를 建國할 당시 지금의 西安 동쪽인 蓋馬大山의 동쪽인 玄菟郡에서 都邑을 定하고 建國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後漢書 東沃沮 편에는 분명히 高句麗가 蓋馬大山의 동쪽인 蓋馬縣이며 이곳은 玄菟郡에 속해있고 平壤城 서쪽이라고 적고 있다. 平壤은 古代 堯임금이 살았던 王儉城이라 했다. 이 記錄은 三國遺事 古朝鮮 편에도 記錄되어 있다.

  以上과 같은 점으로 보아서 朱蒙은 通典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玄菟郡에 속하는 紇升骨城에 都邑地를 定한 후 建國한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 梁書 편

 


  高句麗의 선조는 東明이며 東明은 본래 북쪽 고리국(櫜離國)의 王子라고 했다. 고리국 왕이 출행한 후 고리국 왕의 시녀(侍女)는 후에 임신을 하였다. 본문을 보면 高句麗者, 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櫜離王之子, 離王出行, 其侍兒於後任娠이라고 적고 있다.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東明은 본래 北夷였던 고리국의 王子라고 되어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201卷 唐紀17卷 1938쪽 唐高宗 때의 다음과 같은 記錄을 볼 수 있다. 高麗百濟河北之民이라고 되어있다. 즉 高句麗와 百濟는 河北省 백성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선조가 있던 고리국(櫜離國)은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305쪽에는 韓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韓이란 韓國이며 고리국(櫜離國)의 後孫이므로 韓의 記錄을 보면 고리국의 位置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韓은 옛 나라 이름이다. 이곳은 지금의 河北省 固安縣 東南이며 漢나라 때 三韓의 땅이라고 되어있다. 韓나라는 본래 晉唐叔虞와 兄弟間이다. 즉 大夫韓万은 周(B.C.1134~1116년) 무왕(武王)의 큰아들이며 진당숙우(晉唐叔虞)은 셋째 아들이다.

周武王의 王位를 이어받은 사람은 둘째 아들인 成王이다. 큰아들 大夫韓万과 晉唐叔虞는 각각 地方의 諸侯王으로 있다가 周나라 위열왕(威烈王.B.C.425~402년) 23년에 晋나라에서 분리된 韓나라 . 魏나라 . 趙나라가 갈라져 나온 것이 三韓이다.

三韓이 떨어져 나오기 이전의 韓나라는 전술한 바와 같이 河北省 固安縣 東南에 있었다. 다시말해 韓나라의 祖上은 고리국(櫜離國)으로 句驪와 扶餘國은 바로 고리국에서 갈라져 나온 後裔이다. 梁書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리국 王의 아들이 東明이라면 朱蒙과는 年代差異가 약 195년이다.

  三國史記 高句麗 마지막 王이었던 보장왕(寶藏王.A.D.634~668년) 27년의 記錄을 보면 高句麗는 900년의 歷史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고리국(櫜離國)에서 갈라져 나온 扶餘에서 195년 후에 朱蒙이 河伯女인 柳花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朱蒙의 建國時期는 B.C.37년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한편 後漢書 扶餘傳에도 고리국(櫜離國)의 王子로 記錄되어 있는 것을 보면 扶餘의 王子가 朱蒙이 아닐 可能性이 있기 때문이다

  魏書 . 隋書 . 周書 . 北史에서는 본래 高句麗는 扶餘로부터 나왔다고 되어있다. 즉 高句麗의 先祖는 扶餘임을 記錄하고 있다. 그러나 唐書와 舊唐書에는 高句麗가 생기게 된 것은 扶餘와는 다른 種族이라고 적고 있다.

  梁書 本文을 解說해 보기로 한다.


  高句麗者, 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櫜離王之子, 離王出行, 其侍兒於後任娠, 離王還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 如大雞子, 來降我, 因以有娠, 王囚之, 後遂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王以爲神, 乃聽收養, 長而善射, 王忌其猛, 後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浮爲橋, 東明乘之得渡, 至扶餘而王焉, 其後支別爲句驪種也, 其國漢之玄菟郡也.

  고구려의 선조는 東明으로부터 나왔다. 東明은 본래 北夷 즉 북쪽의 동이인 고리국의 왕자이다. 고리국왕이 출타한 후 그 시녀가 후에 임신을 하였다. 고리왕이 돌아와 죽이려고 했다.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天上의 기운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큰 닭같은 자식이 나에게 내려왔다. 그로인해 임신을 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고리왕은 듣지않고 가두어 버렸다. 여기서 큰닭이란 여자를 뜻한다. 즉 女子가 아들을 낳았다는 뜻이다.

그후 아들을 낳았다. 왕은 그 아들을 돼지우리에 두게 했으나 돼지는 입으로 기(氣)를 불기만하고 죽이지 아니했다. 고리왕은 이상히 여겨 神이 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이내 그 소식을 듣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성장하면서 명사수가 되었다. 왕은 용맹스러움에 두려워 다시 죽이려 했다.

  그때 東明은 달아나 남쪽인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렀다. 군사들이 뒤쫓아와 활을 쏘았으나 물에 떨어졌다. 물고기와 자라 등 모두 떠올라 다리를 놓았으므로 東明은 물고기와 자라 등을 타고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夫餘王이 되었다.

그후 가지처럼 떨어져나가 句驪가 되었는데 扶餘와는 같은 種族이었다. 東明王이 세운 扶餘國은 漢나라가 있던 玄菟郡이다라고 記錄하고 있다.

  앞의 本文에서 以弓擊水의 文章이 상세하지 못한 것이 결점이다. 東明이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나는 河伯의 外孫인 天帝의 아들이라고 외쳤다는 記錄이 魏書와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와 똑 같음을 볼 수 있다.

魏書와 三國史記에는 朱蒙이 도망간 곳이 엄사수(淹水)라고 했다. 엄사수와 엄체수(淹滯水)는 같은 것으로 일명 개사수(蓋斯水)라 했으며 압록(鴨淥)이 있는 동북이라 했다. 한편 三國史記에서는 朱蒙이 그후 이른 곳은 모둔곡(毛屯谷)이며 이곳은 보술수(普述水)라고 적고 있다.

  그후 또다시 이른 곳은 卒本川이며 이곳은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되어있다. 한편 漢書 東沃沮 편에서는 서개마(西蓋馬)에서 高句麗가 都邑한 것으로 되어있다. 三國志와 南史에서는 丸都山 아래로 되어있다. 그리고 後漢書에는 蓋馬大山의 동쪽에 高句麗가 都邑한 것으로 적고 있다. 또한 通典과 梁書 그리고 後漢書 東沃沮 편에는 玄菟郡에 高句麗가 都邑한 것으로 記錄되어 있다.

魏書와 唐書, 舊唐書, 그리고 隋書와 周書에는 高句麗의 都邑地가 平壤城이라고 적고 있다. 흘승골성(紇升骨城)에서 高句麗가 都邑한 것으로 되어있는 史書는 通典과 北史, 그리고 周書이다.


  以上에서 보는바와 같이 蓋馬大山의 동쪽이나 흘승골성(紇升骨城) 그리고 平壤城에서 高句麗가 都邑을 定하고 建國했다는 곳은 玄菟郡에 속하는 것으로 史書와 中國古今地名大辭典 등에서 考證하고 있다.

  앞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高句麗의 建國說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가 아니라 大陸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요즘 한국의 史學者들은 卒本水와 丸都城이 滿洲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平壤城은 北韓의 平壤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北韓의 平壤에는 平壤城이 없으며 본래 平壤城은 모든 正史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王儉城이다. 王儉城은 堯임금이 살던 城으로 후일 平壤城이다.

  高句麗의 建國說은 고리국(櫜離國)에서 파생된 句驪와 扶餘에서 發生되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하간 高句麗의 建國은 句驪와 扶餘의 뿌리인 韓이며 韓의 뿌리는 고리국(櫜離國)이다. 고로 高句麗의 建國은 고리국에서 起源되었음을 正史에서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

 

② 高陽氏와 高辛氏


   高句麗의 祖上은 高陽氏라는 記錄이 三國史記에 있다. 요즘 中國에서는 一萬年의 歷史를 만들기 위해 高陽氏를 내세우고 있으나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이다.

  高陽氏는 헌원황제(軒轅黃帝.BC.2679년)의 孫子이다. 黃帝의 年代가 BC.2679년이면 지금으로부터 4683년 전에 불과하다. 더구나 黃帝의 孫子인 高陽氏의 年代는 黃帝보다 125년이나 아래인 BC.2554년에 불과하다. 다시말해 고양씨(高陽氏.BC.2554년)는 지금으로부터 4558년 전이다. 中國에서 一萬年 歷史를 내세운다고 하면서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를 내세워 一萬年의 歷史를 만들겠다고 하니 한마디로 가당찮은 말이다.

  歷史는 干支法으로 記錄하고 있다. 干支法을 모르면 歷史年代를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中國에서는 干支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一萬年의 歷史를 내세운다고 하면서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高陽氏를 앞세워 一萬年의 歷史를 꾸미겠다는 것은 中國에는 干支法을 아는 歷史學者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부터 孫文에 의해 中華人民共和國이 들어서면서부터 歷史를 政策的으로 抹殺해 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 中國은 共産國家로서 毛澤東 政府에서는 歷史를 國法으로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1958년부터 中國은 文化革命이 始作되어 부르조아적인 것을 철저히 통제시켜 왔다. 共産國家의 一人獨裁下에서 歷史敎育은 있을 수 없다. 만약 歷史를 제 마음대로 記錄하거나 말하는 자는 國法으로 처단했기 때문에 學者들은 입을 봉하고 살았다.

1992년부터 韓中間 國交가 수립되고 中國이 社會主義 政策으로 전환하면서 市場經濟 체제로 바뀌어갔다. 그때부터 鄧少平 政權은 歷史認識을 갖게 되어 서서히 開放의 물꼬를 트기 始作했다.

물론 1987년 이후부터 조금씩 門戶가 개방되고 있었지만 本格的으로 歷史의 重要性을 認知하게 된 것은 江澤民 主席 때이다. 이때부터 中國은 李鵬 總理의 主導아래 古籍硏究所를 中國 大學內에 18個所를 設置하고 本格的으로 古代史와 歷史에 눈뜨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1996년 초부터 18개 大學에서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硏究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始作했다.


  筆者가 中國 延邊大學校 朴文一 總長의 招請으로 1996年 3月에 갔을 때 이미 古籍硏究所 所長으로 任命된 崔文植 敎授가 있었다. 그때 筆者는 三國志東夷傳이나 後漢書東夷傳 中에서 講義해 달라는 朴文一 總長의 부탁을 받고 古籍硏究所를 찾아갔을 때 二十五史 중 二卷과 古代姓氏辭典 一卷밖에 없었다. 다시말해 96년도만 하더라도 歷史 책은 거의 全無한 상태였다.

  筆者는 한달 동안 後漢書東夷傳 原文으로 歷史學科 大學院生들에게 講義한 후 韓國으로 돌아와 明文堂을 통해 數百卷의 책을 延邊大學에 무료로 發送하였다. 물론 筆者가 著書한 책 전질을 古籍硏究所와 圖書館 그리고 朴文一 總長과 崔文植 所長에게도 기증하였다.

  中國은 歷史에 눈뜬 지가 불과 10년 남짓하다. 물론 中國學者들은 漢字原典을 熟讀할 수 있는 能力을 갖고있기 때문에 歷史原典으로 된 것은 韓國學者에 비하면 훨씬 빠른 편이다. 약 10년 동안 中國學者들은 많은 著述과 論文도 發表하였다. 하지만 歷史의 脈이라 할 수 있는 干支法은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事實이다. 왜냐하면 干支法은 한民族의 自然哲學思想으로 엮어진 것이므로 中國學者들은 단지 60甲子만 다시 되돌아 오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 干支의 年代法은 正確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言及했듯이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BC.2554년)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人物을 내세워 一萬年의 歷史를 만들겠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發想이기 때문이다. 

  干支는 天地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干支의 두 글자는 天地이지만 干支 속에 人이 있기에, 干支는 天 . 人 . 地 三源一體 思想으로 되어있는 것을 中國大陸 學者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中國社會科學院에 근무하고 있는 歷史學者는 歷史를 깊이 있게 硏究한 事實이 없고 年輪 또한 짧다. 그러기에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黃帝의 孫子를 내세워 一萬年의 歷史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干支法을 모르고 있다는 證據이다.


  干支는 自然法으로 엮어진 律法이다. 고로 一乾天幹의 약자가 干이다. 支는 三坤地枝의 약자이다. 그러기에 干은 一이자 하늘에 속하며 支는 三이자 땅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二가 빠져있다. 二는 氣人中에 해당하므로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天地인 干支만 있고 사람인 마음이 빠져있는 것이다. 즉 一天 . 二人 . 三地로 形成되어 天 . 人 . 地 三源一體로 自然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中國學者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4558년밖에 되지않은 顓頊高陽氏를 一萬年 前의 人物로 登場시키겠다고 대대적으로 言論에 報道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04년 8月 20日字 朝鮮日報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發表한 것이 證據이다.


  干支法에는 上元甲子年부터 始作된다. 上元甲子源 속에 上元甲子 . 中元甲子 . 下元甲子가 60번을 반복하므로 총체적 上元甲子 廻路가 한바퀴 도는 데는 3,600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中元甲子源 속에 上元甲子 . 中元甲子 . 下元甲子 역시 60번을 한바퀴 도는 데는 총체적으로 3,600년이란 세월이 必要하다.

또한 下元甲子源 속에도 上元甲子 . 中元甲子 . 下元甲子가 역시 한바퀴 도는 데 총체적 3,600년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10,800년이 지나므로 上元甲子源이 60번, 中元甲子源이 60번, 下元甲子源이 60번을 廻轉하므로 인해 完全하게 生命의 한 주기(一周期)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고로 歷史學者가 干支法을 모르면 歷史學者로서의 資質이 없는 것이다.


  한民族의 先祖들은 偉大한 自然思想인 干支의 律呂法을 年代로 使用해 왔다. 다시말해 干支의 年代가 歷史이다. 고로 祖上任들은 干支法으로 歷史를 記錄했으므로 한치의 年代 착오가 없었던 것이다.

  高句麗가 高氏의 姓을 使用하게 된 것은 高陽氏로부터라는 說이 있고 또한 高辛氏라는 說이 있다. 三國史記의 高句麗 19대 廣開土王 17年 3月의 記錄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敍宗族, 北燕王雲遣侍御史李拔之, 雲祖父高和句麗之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本文을 解說해 보기로 한다. 17년 봄 3월에 北燕에 使臣이 파견되었다. 宗族에 대하여 공손하게 차례를 펴는 과정에서 北燕王이었던 雲은 王을 모시던 어사 이발(李拔)을 맞이한 자리에서 高句麗의 먼 祖上의 아버지로부터 高氏는 句麗에 화합하여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高陽氏의 후손이 스스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BC.2554년)는 전술한 바와 같이 黃帝의 손자로부터 高句麗가 起源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한편 三國史記 百濟 마지막 王이었던 義慈王 第六卷에는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다.

  高句麗亦以高辛氏後姓高氏라고 적고 있다. 즉 高句麗 역시 고신씨(高辛氏.BC.2476년) 후로부터 姓을 高氏라고 되어있다. 다시말해 高句麗의 祖上은 黃帝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로부터 始作되었다고 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高句麗의 운조(雲祖:먼 조상)는 高陽氏가 되었건 高辛氏가 되었건 高句麗의 祖上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黃帝로부터 後孫으로 뿌리가 내려오고 있는 것만은 否認할 수 없다.

  黃帝는 4명의 王后로부터 25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머리가 나쁜 11명은 姓을 하사받지 못했다. 그중 14명만 姓을 하사받았는데 史書에 記錄되어 있는 이름은 다섯 명이 고작이다.

  黃帝의 아들 昌意는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를 낳았다. 고로 黃帝의 孫子인 高陽氏로부터 句驪 또는 高句麗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黃帝의 아들 현효(玄囂)는 교극(蟜極)을 낳았는데, 교극의 아들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이다. 이는 山海經과 史記 五帝本紀에 記錄하고 있다.

高氏의 뿌리가 이어져내려 온 것은 문헌상으로 보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76년)이다. 고신씨의 뒤를 이은 사람은 요단군왕검(堯檀君王儉.BC.2357년)이다.

三國遺事 古朝鮮편에는 분명히 堯임금을 堯壇君王儉으로 記錄하고 있다. 堯王儉의 뒤를 이은 사람은 순(舜.BC.2284년)임금이며, 다음은 夏, 殷, 周로부터 三韓으로 이어져 고리국(櫜離國) 후로 句驪, 扶餘를 거쳐 후에 高句麗로 내려옴을 볼 수 있다. 고로 高陽氏가 黃帝의 直系 孫子라면 高辛氏는 直系 증손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高陽氏로 본다면 親四寸 조카벌이 高辛氏이고 高辛氏의 입장에서 보면 큰아버지뻘이 된다. 여하간 高句麗의 雲祖는 黃帝의 後孫임을 正史가 잘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③ 句驪와 櫜離國


  앞에서도 누누히 强調한 바 있으나 고리국에 대하여 系統을 확실히 하는 것이 高句麗에 대한 理解가 보다 용이할 것같다.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76년)가 都邑한 곳은 호(毫)라는 곳이다. 毫는 지금의 河南省 洛陽이다. 洛陽古都史는 1987년 蘇健의 著述로 洛陽博物館 소장으로 되어있다.

  第三章 河圖洛書편에 보면 복희씨 이후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BC.3071년)를 거쳐 黃帝와 더불어 山東省 曲阜에 都邑을 定하고 번영해 갔다. 世界 4代 文明의 發祥地인 洛陽에서 黃帝와 孫子인 전욱고양씨, 堯, 舜 등이 洛水에서 물놀이를 하던 때부터 黃河文明은 發展하게 된 動機이다. 바로 그곳이 지금의 河南省 洛陽이다.

  黃帝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씨가 전욱고양씨에 이어 都邑한 곳은 호(毫)이며, 이곳이 바로 洛陽이다. 제곡고신씨 이후 堯, 舜 때 河北省 옛 영주(瀛州)인 지금의 固安縣에서 黃帝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씨의 후손으로 諸侯國에서 일어선 나라가 바로 고리국(櫜離國)이다. 櫜離國이 생긴 것은 BC.260년 전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列國인 七雄時代 以前으로 보는 것이 史家들의 見解이다.

  여기서 七雄時代란 秦 . 韓 . 魏 . 趙 . 燕 . 齊 . 楚 나라를 말한다. 즉 周나라 末期에는 大陸에 약 2천 개 이상의 諸侯國이 亂立하기 이전에 고리국이 河北省 固安縣에 都邑을 定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列國時代는 점차 春秋戰國時代로 접어드는 初期 단계로서 戰運이 감도는 조짐이 나타나는 단계였기 때문이다.

특히 고리국은 天子였던 炎帝神農氏와 黃帝가 都邑했던 山東省 曲阜에서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곳에서는 수많은 나라들이 雨後竹筍처럼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黃帝의 아들격인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BC.2578~2512년)까지 山東省 曲阜에서 66년간 執權하는 동안 全國은 점점 허물어지는 情勢였다. 이를 지켜보던 고양씨(高陽氏.BC.2491~2435년)는 天子에 등극하자마자 都邑地를 中國大陸의 中央地인 河南省 東北部인 복양현(濮陽縣)으로 옮겼다. 그후 바로 天子의 뒤를 이은 黃帝의 증손인 제곡고신씨는 전술한 바와 같이 河南省 洛陽으로 都邑地를 定한 후 社會는 125년간 安定되어 갔다.

  BC.2357년 高辛氏의 셋째 아들인 堯王儉이 天子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다시 都邑地를 平壤으로 定한다. 여기서 平壤은 감숙성(甘肅省) 통위현(通渭縣)과 섬서성(陝西省) 平壤, 그리고 섬서성 西京인 西安의 동쪽이다.

  中國에서는 平壤이라는 地名을 그대로 두었을 경우 高句麗뿐만 아니라 古朝鮮과 三韓, 그리고 新羅 . 百濟 . 高麗의 역사까지도 完全히 들통날 것이 두려워 歷史的으로 有名한 地名은 모두 옮기거나 없애고 경우에는 비슷한 音으로 글자를 바꾸어버렸다.


  1931년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저술한 장려화(臧勵龢)는 지명(地名)이 바뀌어진 過程을 적으면서도 일부분 有名한 歷史의 흔적이나 나라이름 등은 자국을 남기고 있다.

平壤을 平襄이라고 약자를 쓴 곳도 있고, 平壤이라는 글자를 아예 平陽城 또는 平陽府, 平陽郡, 平陽縣으로 바꾸었다. 平襄縣을 보면 中國古今地名大辭典 217쪽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漢나라 때 두었는데 後魏 때 폐하였다. 옛 古城이 있던 곳은 지금의 甘肅省 通渭縣 西南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平陽府를 보면 옛날 堯임금이 都邑했던 곳으로 三國時 魏나라가 둔 곳이 平陽郡이다. 이곳을 예로부터 다스려 오던 곳은 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西南으로 되어있다.

여하간 平壤城의 본 位置는 三國遺事 古朝鮮편에 있는 것처럼 堯임금이 都邑한 王儉城이며 후일 平壤城으로 지금의 西安임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言及한바와 같이 고리국은 黃帝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싸의 後裔로서 河北省 河間縣에 都邑을 定하고 다스려 온 것만은 否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치통감(資治通鑑) 201卷 唐紀17 高宗 때의 記錄에는 高麗, 百濟는 河北省의 백성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高麗라고 적은 것은 百濟가 있을 당시이므로 高句麗를 뜻한다.

  고리국의 後孫인 高句麗와 百濟의 백성이 中國 北京에 있는 河北省 사람이라고 했으므로 高句麗 . 百濟는 한반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高句麗 . 百濟의 백성이 河北省 사람들임이 資治通鑑 唐나라 記錄에 있다는 것은 三韓의 母國인 고리국(櫜離國)은 中國의 心臟部인 河北省 河間縣임을 立證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고리국(櫜離國.BC.260~230년)에서 파생된 句驪는 獨立하여 나라를 세우고 大陸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後漢書 句驪편을 보면 句驪는 一名 맥이(貊耳)라 했으며 河伯의 後裔로서 강물을 위주로 살았다고 했다. 그로 인해 소수맥(小水貊)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句驪人들은 활을 가지고 다니기를 좋아했으므로 맥궁(貊弓)이라고도 했다고 적고 있다.

句驪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句驪兵들을 動員하여 王莽이 흉노(匈奴)를 정벌하였다고 되어있다.

  앞장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리국의 雲祖는 제곡고신씨이며 句驪의 祖上은 고리국이다.

後漢書 扶餘國과 梁書에 의하면 고리국(櫜離國)에서 高句麗의 뿌리인 句驪가 생겨났음을 볼 수 있다. 고로 고리국과 句驪 그리고 高句麗는 黃帝의 증손자인 高辛氏에서 뿌리로 이어왔다는 것이 正史에는 잘 나타나 있다. 그러기에 三國史記 百濟 마지막 義慈王편에 高句麗의 祖上이 제곡고신씨에서 연유되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魏書 . 隋書 . 周書에는 扶餘에서 朱蒙이 나온 것으로 되어있으나 唐書 . 舊唐書 . 通典에는 扶餘와 다른 宗族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後漢書 . 梁書에는 분명히 고리국(櫜離國)의 王子로 태어난 것으로 記錄한 것으로 보아서 周나라 末期에 고리국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고리국과 句驪는 같은 血統으로 이어져왔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리국에서 扶餘도 함께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아서 고리국과 구려 그리고 扶餘는 같은 同族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나라를 세울 때 國號를 다르게 했을 뿐 고리국과 구려는 같은 뿌리로서 후일 王莽에 의해 高句麗가 建國되었음을 正史에는 記錄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한자를 우리글로 바꾸었습니다. 읽기가 어려우신 분만 참고하세요. 

 

 

 

제일장  고구려의 혈통

 


     ① 고구려의 건국설

 


㉮ 삼국사기 편


  高句麗의 건국설은 대략 3가지로 볼 수 있다. 三國史記 고구려본기 제일권에 보면 부여왕 해부루는 늙어서 자식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낼 때 대를 잇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어느날 말을 타고 부여왕이 산천인 연못에 이르렀을 때 큰돌을 보는 순간 그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王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돌을 굴려 보았다.

그곳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금색 개구리 형상으로 있어 王은 매우 기뻐하면서 하늘이 내려준 씨앗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여왕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왕위에 올랐으며, 그후 도읍지를 옮기고 나라이름을 동부여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

금와가 왕위에 오른 후 일곱 아들을 두었는데, 어느날 태백산 남쪽 발수(渤水)에서 하백녀인 유화를 유인하여 압록변에 있는 사택에 가두어놓고 유화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당시 유화는 동생과 함께 놀러 나왔다가 자칭 천제자인 해모수에 의해 감금당한 후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알이 어찌나 컸던지 닷 되(五升)나 되었다고 했다. 본문에서 인이유잉 생일란 대여오승허라고 하는 것은 진짜 알이 아니라 서자를 알로 비유한 문장이다.

  서자가 태어나자 금와왕은 개․돼지가 있는 곳에 아이를 버렸으나 먹지 아니했다.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해갔다. 그후  들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날개로 덮었다. 王은 화가 나 알(庶子)을 깨 버리려 했으나 깨지지 아니했다. 즉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는 수 없이 柳花인 어머니가 강보에 싸서 집으로 데리고 와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껍질을 깨고 남자아이가 나왔다고 되어있다.

  본문에서 기지여견시, 개불식, 우기지노중, 우마피지, 후기지야, 조복익지, 왕욕부지, 불능파, 수환기모, 기모이물이지, 치어난처, 유일남아, 파각이출이라고 하는 것은 서자를 왕이 죽이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으나 죽지 아니했다는 것을 뜻하는 문장이다.

  주몽이 일곱 살이 되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니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담에 따르면 명사수를 주몽이라 했다. 고로 이름하여 이르기를 금와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언제나 주몽은 놀기를 좋아했는데 그 기능이 매우 우수하므로 주몽을 따르지 못했다.

  금와인 부여王의 큰아들 대소가 王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라고 했다. 주몽의 사람됨이 너무나 용맹해서 일찍 손을 쓰지 아니하면 후환이 두려우므로 제거해야한다고 청했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아니했다. 신하를 시켜 말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주몽이 워낙 뛰어남을 알고 아주 여윈 말을 기르도록 했다. 하지만 주몽은 여윈 말을 살찐 말로 잘 길렀다. 왕이 살찐 말을 직접 타보고는 아직도 말이 여위었다고 주몽에게 말하였다. 후에 들에서 사냥을 하면서 주몽은 명사수가 되었다. 여윈 말을 살찌운 뒤 주몽이 들에서 사냥하는 무예를 닦은 결과 적은 화살로 많은 짐승을 잡았다.

그 당시 왕자와 여러 臣下들은 주몽을 죽일 것을 모의했다. 이때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가 이러한 사실을 엄밀히 탐지하고 말하였다. 나라사람들이 너(朱蒙)를 죽이려 하니 너는 재주껏 어디든지 가도록 당부하였다. 만약 지체하게 되면 엄청난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려면 적당히 먼 곳으로 가야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朱蒙은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 등 세 사람의 친구와 함께 이른 곳이 엄사수(淹水)였다. 엄사수는 일명 개사수(蓋斯水)라 했으며 압록(鴨淥)의 동북에 있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개사수(蓋斯水)는 개마대산(蓋馬大山)에서 흘러내리는 물이므로 현토군에 속해있다. 현토군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을 말한다. 후한서 동옥저 편에 고구려가 있던 곳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이라 했다. 이곳은 개마현(蓋馬縣)의 이름이며 현토군에 속해있고 개마대산이 있는 곳은 평양성 서쪽으로, 평양은 즉 요(堯)왕검이 있던 왕검성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주몽이 달아난 곳은 엄사수(淹水)라 했으므로 지금의 섬서성 서안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 주위에 있는 위하(渭河)의 동쪽 하남성(河南省) 西쪽 편인 듯하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29쪽 개마대산(蓋馬大山)의 기록을 보면 동옥저와 고구려가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었다고 되어있다. 주몽이오이․마리․합부 등 세 친구와 함께 엄사수(淹水)에 이르렀다고 했으므로, 섬서성 서안의 동쪽으로 황하의 지류인 위하(渭河) 즉 위수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주몽 일행은 엄사수(淹水)에 이르렀으나 다리가 없어 건널 수 없었다. 뒤에서는 부여병이 쫓아오고 앞은 강물에 막혀 건널 수 없게 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주몽은 큰소리로 나는 천자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으로 금일 도망 오는 것이라고 외쳤다. 뒤에서 쫓아오는 자가 오면 큰일이라고 했을 때, 강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었다.

여기서 물고기와 자라는 실제 물고기와 자라가 아니라 강 건너에서 천자의 외손으로 금일 도망 온다는 소리를 들은 하백의 후예들이 헤엄쳐 구출하러 왔던 것이다.

고대사회의 언어는 해학적이며 비유적이고 은유적이면서 풍자적인 언어였기에 강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나타나 다리를 놓아주어 건너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문장이다.

  주몽 일행이 강을 건너게되자 물고기와 자라는 흩어졌다고 했다. 뒤따라 오던 扶餘의 기마병(騎馬兵)은 건너지 못하고 주몽은 모둔곡(毛屯谷)까지 이르게 되었다. 위서에 의하면 모둔곡이 있는 곳은 보술수라고 되어있다.

  本文에서 모둔곡이라 했으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찾아보았다. 모라고 나라가 있던 곳은 하남성 의양현이었다. 이곳에는 모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하남성 낙양시 바로 서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마의(麻衣) 즉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누더기처럼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풀잎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때 주몽은 말하기를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씨는 무엇이며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이들은 성과 이름이 없었던지 주몽은 이름과 성을 말해 주었다. 삼베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을 재사(再思)라고 했고, 너덕너덕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의 이름은 무골(武骨)이라 했으며, 풀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의 이름은 묵거(黙居)라고 했다.

또한 성(姓)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므로 朱蒙은 再思의 姓을 극씨(克氏)라 했고, 武骨의 姓을 중실씨(仲室氏)라 했으며 黙居는 소실씨(少室氏)라고 姓氏를 하사했다. 이내 다시 이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로부터 빛나는 명을 이어받았으므로 이제부터 터전을 닦는데 인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우연한 때 세 사람의 어진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각자 능력을 헤아리고 각각 일의 임무를 맡기로 하였다.

  이들은 朱蒙과 함께 일행이 되어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위서에 이르기를 卒本川은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 했다. 여기서 졸본천은 흘승골성이라 했으며, 흘승골성(紇升骨城)은 玄菟郡에 속한다고 통전 고구려편에 기록하고 있다. 흘승골성을 주서 고구려편에서, 고구려는 본래 扶餘에서 나왔으며 평양성에서 다스렸다고 되어있다.

  졸본천에 있는 흘승골성은 보기에도 토질이 비옥하고 경관이 좋았으나 한편 산과 강으로 되어있지만 산세가 험하다고 되어있다. 드디어 이곳에 도읍지를 定하기로 하고 궁실을 지었다.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위쪽으로 농막같은 풀집을 지어 살기로 했다. 본문에서 비류수가 흐르는 곳이라 했으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19쪽을 찾아보았다. 비류수는 환도성이 있는 환도산 아래 비류수가 東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환도성을 찾아보았다. 지명사전 51쪽에, 환도는 고구려의 옛 도읍지라고 적고 있다. 통전에 의하면 성이 있는 곳은 환도산 아래 비류수의 동쪽이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후한서 동옥저편에 고구려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개마현의 이름은 현토군에 속한다고 적고 있다. 개마대산이 있는 곳은 평양성 서쪽이며 평양은 즉 왕검성이라고 했으므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주몽이 달아난 곳은 엄사수(淹水)였으며, 엄사수를 건너 모둔곡까지 이르렀고 다시 찾아간 곳은 졸본천이 있는 흘승골성(紇升骨城)이었다. 흘승골성이 있는 곳은 비류수(沸流水)가 있는 곳으로 개마대산의 동쪽이라 했다. 개마대산에는 평양성이 있으며 평양성은 요왕검 즉 요임금이 살던 왕검성이다. B.C. 2357년부터 요왕검이 살던 왕검성은 고구려가 도읍하면서 평양성이라 했으며 고구려 24代 양원왕 8년에는 평양성을 개축하면서 장안성이라고 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며 그로 인해 고위씨 즉 고씨의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주몽의 그때 나이는 22세라고 했으며 본래 부여왕이 아들이 없어 주몽의 사람됨이 비상하므로 부여왕이 죽은 후 주몽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일권 시조편은 주몽의 고구려 건국설을 기록하고 있다.

 

㉯ 通典 편


  통전 고구려사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구려는 후한의 조공을 받은 바에 의하면 본래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 선조는 주몽이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녀로서 부여왕의 처라고 되어있다. 어느날 햇빛이 들더니 드디어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의 이름을 주몽이라 했다.

여기서 본문을 보면 위일소조, 수유잉이생, 급장명왈주몽이라고 되어있다. 햇볕이 비추는 곳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것은 부여왕을 본후 잠자리를 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임신 후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속언에 따르면 주몽은 명사수로서 활을 잘 쏘았으므로 인해 나라사람들이 죽이려 했다. 그때 부여王은 주몽을 버리기로 했다. 주몽은 동남쪽으로 달아나 보술수(普述水)에 다다르고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라이름을 구려라 하고 고위씨라 姓을 갖게 되었다. 한무제(B.C.140~135년)가 조선을 멸한 후 고구려는 고을(縣)을 두게 되었는데 그곳은 현토군이라 했다. 이곳은 동진(A.D.317~318년) 이후 고구려 王이 살던 곳은 평양성이라고 되어있다. 즉 漢나라 때의 락랑군이었으며 왕검성이라고 했다.

모용황(慕容皝)의 침공으로 인해 나라 안에 있는 城으로 도읍지를 옮긴 곳이 역시 장안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本文에서 보면 朱蒙은 처음부터 고구려란 나라이름을 쓴 것이 아니라 처음 도읍을 할 때 구려라고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통전 본문에서 구루(溝漊)는 구려이며 이름은 성이라 되어있다. 여기서 구루(溝漊)는 도랑을 말하여 구려가 하천의 주변에서 제후국으로 성장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당시 왕망(王莽)은 구려병을 동원하여 흉노를 벌했다고 한다. 왕망은 아무 욕심없이 흉노를 물리치고 구려를 지키려고 나아갔다고 되어있다. 그때의 사회는 어지러워 모든 나라들이 망할 즈음에 이르자 도적떼들이 창궐했으므로 왕망은 구려병을 일으켜 한나라를 격파한 후 고구려라고 이름을 고치고 천하에 반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밑에는 제후국으로 구려를 두기로 했다고 되어있다.

  통전의 본문을 보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것이 아니라 왕망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렇다면 주몽과 왕망은 어떤 관계이며 고구려의 맥은 어떻게 된 것인지 본문 제일장 고양씨와 고신씨편에서 고구려의 뿌리를 밝히기로 하겠다.


  주몽의 이름을 보면 추모(鄒牟)라고 했고 또한 중해(衆解)라고도 했다. 한편 王의 호(號)로는 동명성왕 그리고 추모왕(鄒牟王)이라고 했다. 주몽은 22세 때 비류수(沸流水) 위쪽에 터전을 잡고 고구려(高句麗)라고 한 후 18년 뒤 40세에 승하(昇遐)했는데 龍山에 장사지낸 후 동명성왕이라 했다고 삼국사기에는 적고 있다.

  통전과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의 건국이 엇갈리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고구려라고 했다면, 통전과 후한서 구려전에서는 왕망이 고구려라고 천하에 이름을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다.

  고구려는 후한 광무제(光武帝.A.D.25~56년) 8年에 파견사를 조공을 바쳤다고 되어있다. 그리하여 왕호(王號)를 받아 제왕(帝王)으로 불리었다고 통전에는 적고 있다. 고구려국은 주로 요동(遼東)의 동쪽으로 천리나 되었다. 이때 南쪽으로는 조선이며 예맥(濊貊)과 동으로는 옥저(沃沮)가 있었고 北으로는 부여가 인접해 있었다. 고구려의 강역(彊域)으로는 사방 2천리이며 많은 산들과 깊은 계곡이 있었고 들은 별로 없고 연못과 산과 골짜기 같은 곳에 살았다. 농사로는 작은 밭을 힘으로 일구고 부족함이 없이 스스로 자산을 갖고 살았다. 풍속으로는 절기마다 음식을 해먹고 좋은 궁실을 수리하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부여와는 다른 종족이라고 적고 있다.

  통전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구려는 현토군에 속해있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했음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누누히 설명한 바와 같이 현토군은 지금의 서안 일대이며 漢나라 무제(武帝.B.C.140~135년)가 조선을 멸할 때 고구려현을 두었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고구려현은 한나라 무제 때 있었으므로 그보다 훨씬 100년 전에는 구려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와 다른 사서들은 고구려 건국을 B.C.37년으로 보고 있으나 고구려 28대 보장왕(寶藏王.A.D.634~668년) 27年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금구백년으로서 고씨자한유국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금구백년이라 하는 것은 고구려가 900년 간 이어왔음을 말한다.

앞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한나라 무제(武帝.B.C.140~135년) 때 이미 고구려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건국시기는 B.C.37년에서 195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B.C. 232年으로 보아야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구려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건국설은 삼국사기에서 위서를 인용한 흘승골성(紇升骨城)과 통전을 인용한 흘승골성, 그리고 북사에서 인용한 흘승골성 등은 같은 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삼국사기에서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은 곳은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위 땅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있다.

앞에서 말한 졸본천과 흘승골성 그리고 비류수의 지역은 모두 현토군에 속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주몽은 처음부터 고구려를 건국할 당시 지금의 서안 동쪽인 개마대산의 동쪽인 현토군에서 도읍을 정하고 건국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후한서 동옥저 편에는 분명히 고구려가 개마대산의 동쪽인 개마현이며 이곳은 현토군에 속해있고 평양성 서쪽이라고 적고 있다. 평양은 고대 요임금이 살았던 왕검성이라 했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보아서 주몽은 통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현토군에 속하는 흘승골성에 도읍지를 정한 후 건국한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 양서 편

 


  고구려의 선조는 동명이며 동명은 본래 북쪽 고리국(櫜離國)의 왕자라고 했다. 고리국 왕이 출행한 후 고리국 왕의 시녀(侍女)는 후에 임신을 하였다. 본문을 보면 고구려자, 기선출자동명, 동명본북이고리왕지자, 이왕출행, 기시아어후임신이라고 적고 있다.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東明은 본래 北夷였던 고리국의 王子라고 되어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201卷 당기17권 1938쪽 당고종 때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백제하북지민이라고 되어있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하북성 백성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선조가 있던 고리국(櫜離國)은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05쪽에는 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韓이란 韓國이며 고리국(櫜離國)의 후손이므로 한의 기록을 보면 고리국의 위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韓은 옛 나라 이름이다. 이곳은 지금의 하북성 고안현 동남이며 漢나라 때 삼한의 땅이라고 되어있다. 韓나라는 본래 진당숙우와 형제간이다. 즉 대부한만은 周(B.C.1134~1116년) 무왕(武王)의 큰아들이며 진당숙우(晉唐叔虞)은 셋째 아들이다.

주무왕의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은 둘째 아들인 성왕이다. 큰아들 대부한만과 진당숙우는 각각 지방의 제후왕으로 있다가 周나라 위열왕(威烈王.B.C.425~402년) 23년에 晋나라에서 분리된 韓나라 . 魏나라 . 趙나라가 갈라져 나온 것이 三韓이다.

三韓이 떨어져 나오기 이전의 韓나라는 전술한 바와 같이 河北省 固安縣 東南에 있었다. 다시말해 韓나라의 祖上은 고리국(櫜離國)으로 句驪와 扶餘國은 바로 고리국에서 갈라져 나온 後裔이다. 梁書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리국 王의 아들이 東明이라면 朱蒙과는 年代差異가 약 195년이다.

  三國史記 高句麗 마지막 王이었던 보장왕(寶藏王.A.D.634~668년) 27년의 記錄을 보면 高句麗는 900년의 歷史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고리국(櫜離國)에서 갈라져 나온 扶餘에서 195년 후에 朱蒙이 河伯女인 柳花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朱蒙의 建國時期는 B.C.37년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한편 後漢書 扶餘傳에도 고리국(櫜離國)의 王子로 記錄되어 있는 것을 보면 扶餘의 王子가 朱蒙이 아닐 可能性이 있기 때문이다

  魏書 . 隋書 . 周書 . 北史에서는 본래 高句麗는 扶餘로부터 나왔다고 되어있다. 즉 高句麗의 先祖는 扶餘임을 記錄하고 있다. 그러나 唐書와 舊唐書에는 高句麗가 생기게 된 것은 扶餘와는 다른 種族이라고 적고 있다.

  梁書 本文을 解說해 보기로 한다.


  高句麗者, 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櫜離王之子, 離王出行, 其侍兒於後任娠, 離王還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 如大雞子, 來降我, 因以有娠, 王囚之, 後遂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王以爲神, 乃聽收養, 長而善射, 王忌其猛, 後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浮爲橋, 東明乘之得渡, 至扶餘而王焉, 其後支別爲句驪種也, 其國漢之玄菟郡也.

  고구려의 선조는 東明으로부터 나왔다. 東明은 본래 北夷 즉 북쪽의 동이인 고리국의 왕자이다. 고리국왕이 출타한 후 그 시녀가 후에 임신을 하였다. 고리왕이 돌아와 죽이려고 했다. 시녀가 말하기를 전에 天上의 기운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큰 닭같은 자식이 나에게 내려왔다. 그로인해 임신을 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고리왕은 듣지않고 가두어 버렸다. 여기서 큰닭이란 여자를 뜻한다. 즉 女子가 아들을 낳았다는 뜻이다.

그후 아들을 낳았다. 왕은 그 아들을 돼지우리에 두게 했으나 돼지는 입으로 기(氣)를 불기만하고 죽이지 아니했다. 고리왕은 이상히 여겨 神이 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이내 그 소식을 듣고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점점 성장하면서 명사수가 되었다. 왕은 용맹스러움에 두려워 다시 죽이려 했다.

  그때 東明은 달아나 남쪽인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렀다. 군사들이 뒤쫓아와 활을 쏘았으나 물에 떨어졌다. 물고기와 자라 등 모두 떠올라 다리를 놓았으므로 東明은 물고기와 자라 등을 타고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夫餘王이 되었다.

그후 가지처럼 떨어져나가 구려가 되었는데 부여와는 같은 종족이었다. 동명왕이 세운 부여국은 漢나라가 있던 현토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앞의 本文에서 이궁격수의 문장이 상세하지 못한 것이 결점이다. 동명이 엄체수(淹滯水)에 이르러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나는 河伯의 外孫인 天帝의 아들이라고 외쳤다는 記錄이 위서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똑 같음을 볼 수 있다.

魏書와 三國史記에는 朱蒙이 도망간 곳이 엄사수(淹水)라고 했다. 엄사수와 엄체수(淹滯水)는 같은 것으로 일명 개사수(蓋斯水)라 했으며 압록(鴨淥)이 있는 동북이라 했다. 한편 三國史記에서는 朱蒙이 그후 이른 곳은 모둔곡(毛屯谷)이며 이곳은 보술수(普述水)라고 적고 있다.

  그후 또다시 이른 곳은 卒本川이며 이곳은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되어있다. 한편 漢書 東沃沮 편에서는 서개마(西蓋馬)에서 高句麗가 도읍한 것으로 되어있다. 삼국지와 남사에서는 丸都山 아래로 되어있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고구려가 도읍한 것으로 적고 있다. 또한 通典과 梁書 그리고 후한서 동옥저 편에는 玄菟郡에 高句麗가 都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魏書와 唐書, 舊唐書, 그리고 隋書와 周書에는 高句麗의 都邑地가 平壤城이라고 적고 있다. 흘승골성(紇升骨城)에서 高句麗가 都邑한 것으로 되어있는 史書는 通典과 北史, 그리고 周書이다.


  以上에서 보는바와 같이 개마대산의 동쪽이나 흘승골성(紇升骨城) 그리고 平壤城에서 고구려가 도邑을 정하고 건국했다는 곳은 현토군에 속하는 것으로 사서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등에서 고증하고 있다.

  앞에서 言及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건국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가 아니라 大陸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요즘 한국의 史學者들은 卒本水와 丸都城이 滿洲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平壤城은 北韓의 平壤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北韓의 平壤에는 平壤城이 없으며 본래 平壤城은 모든 正史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王儉城이다. 王儉城은 堯임금이 살던 城으로 후일 平壤城이다.

  高句麗의 建國說은 고리국(櫜離國)에서 파생된 句驪와 扶餘에서 發生되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하간 高句麗의 建國은 句驪와 扶餘의 뿌리인 韓이며 韓의 뿌리는 고리국(櫜離國)이다. 고로 高句麗의 建國은 고리국에서 起源되었음을 正史에서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

 

② 고양씨와 고신씨


   고구려의 조상은 고양씨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요즘 중국에서는 일만년의 력사를 만들기 위해 고양씨를 내세우고 있으나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이다.

  고양씨는 헌원황제(軒轅黃帝.BC.2679년)의 손자이다. 황제의 연대가 BC.2679년이면 지금으로부터 4683년 전에 불과하다. 더구나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의 연대는 황제보다 125년이나 아래인 BC.2554년에 불과하다. 다시말해 고양씨(高陽氏.BC.2554년)는 지금으로부터 4558년 전이다. 中國에서 一萬年 歷史를 내세운다고 하면서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를 내세워 一萬年의 歷史를 만들겠다고 하니 한마디로 가당찮은 말이다.

  歷史는 간지법으로 기록하고 있다. 간지법을 모르면 력사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中國에서는 干支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一萬年의 歷史를 내세운다고 하면서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고양씨를 앞세워 일만년의 력사를 꾸미겠다는 것은 中國에는 干支法을 아는 력사학자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부터 손문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 歷史를 政策的으로 말살해 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 中國은 공산국가로서 모택동 정부에서는 歷史를 國法으로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1958년부터 中國은 文化革命이 始作되어 부르조아적인 것을 철저히 통제시켜 왔다. 공산국가의 일인독재하에서 歷史敎育은 있을 수 없다. 만약 歷史를 제 마음대로 기록하거나 말하는 자는 國法으로 처단했기 때문에 學者들은 입을 봉하고 살았다.

1992년부터 한중간 국교가 수립되고 중국이 사회주의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시장경제 체제로 바뀌어갔다. 그때부터 등소평 정권은 력사인식을 갖게 되어 서서히 개방의 물꼬를 트기 始作했다.

물론 1987년 이후부터 조금씩 문호가 개방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력사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된 것은 강택민 주석 때이다. 이때부터 中國은 李鵬 총리의 主導아래 고적연구소를 中國 대학내에 18個所를 설치하고 本格的으로 古代史와 歷史에 눈뜨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1996년 초부터 18개 大學에서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硏究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기 始作했다.


  筆者가 中國 연변대학교 박문일 총장의 초청으로 1996年 3月에 갔을 때 이미 고적연구소 소장으로 임명된 최문식 교수가 있었다. 그때 필자는 삼국지동이전이나 후한서동이전 中에서 강의해 달라는 朴文一 총장의 부탁을 받고 고적연구소를 찾아갔을 때 二十五史 중 二卷과 고대성씨사전 일권밖에 없었다. 다시말해 96년도만 하더라도 력사 책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筆者는 한달 동안 후한서동이전 原文으로 력사학과 대학원생들에게 강의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명문당을 통해 수백권의 책을 연변대학에 무료로 발송하였다. 물론 필자가 저서한 책 전질을 고적연구소와 도서관 그리고 朴文一 총장과 최문식 소장에게도 기증하였다.

  中國은 歷史에 눈뜬 지가 불과 10년 남짓하다. 물론 中國學者들은 한자원전을 숙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있기 때문에 력사원전으로 된 것은 한국학자에 비하면 훨씬 빠른 편이다. 약 10년 동안 中國學者들은 많은 저술과 論文도 발표하였다. 하지만 歷史의 맥이라 할 수 있는 干支法은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事實이다. 왜냐하면 干支法은 한民族의 자연철학사상으로 엮어진 것이므로 중국학자들은 단지 60甲子만 다시 되돌아 오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 干支의 年代法은 正確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言及했듯이 전욱고양씨(전욱고양씨.BC.2554년)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人物을 내세워 一萬年의 歷史를 만들겠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발상이기 때문이다. 

  干支는 天地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干支의 두 글자는 天地이지만 干支 속에 人이 있기에, 干支는 天 . 人 . 地 삼원일체 사상으로 되어있는 것을 中國大陸 學者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사회과학원에 근무하고 있는 력사학자는 歷史를 깊이 있게 硏究한 事實이 없고 年輪 또한 짧다. 그러기에 불과 4558년밖에 되지않은 黃帝의 孫子를 내세워 一萬年의 歷史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이며 干支法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干支는 자연법으로 엮어진 律法이다. 고로 일건천간의 약자가 干이다. 支는 삼곤지지의 약자이다. 그러기에 干은 一이자 하늘에 속하며 支는 三이자 땅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二가 빠져있다. 二는 氣人中에 해당하므로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天地인 干支만 있고 사람인 마음이 빠져있는 것이다. 즉 一天 . 二人 . 三地로 形成되어 天 . 人 . 地 三源一體로 自然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中國學者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4558년밖에 되지않은 顓頊高陽氏를 一萬年 前의 人物로 登場시키겠다고 대대적으로 言論에 報道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2004년 8月 20日字 朝鮮日報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發表한 것이 證據이다.


  干支法에는 上元甲子年부터 始作된다. 上元甲子源 속에 上元甲子 . 中元甲子 . 下元甲子가 60번을 반복하므로 총체적 上元甲子 廻路가 한바퀴 도는 데는 3,600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中元甲子源 속에 上元甲子 . 中元甲子 . 下元甲子 역시 60번을 한바퀴 도는 데는 총체적으로 3,600년이란 세월이 必要하다.

또한 下元甲子源 속에도 上元甲子 . 中元甲子 . 下元甲子가 역시 한바퀴 도는 데 총체적 3,600년이 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10,800년이 지나므로 上元甲子源이 60번, 中元甲子源이 60번, 下元甲子源이 60번을 廻轉하므로 인해 完全하게 生命의 한 주기(一周期)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고로 歷史學者가 干支法을 모르면 歷史學者로서의 資質이 없는 것이다.


  한民族의 先祖들은 偉大한 自然思想인 干支의 律呂法을 年代로 使用해 왔다. 다시말해 干支의 年代가 歷史이다. 고로 祖上任들은 干支法으로 歷史를 記錄했으므로 한치의 年代 착오가 없었던 것이다.

  高句麗가 高氏의 姓을 使用하게 된 것은 高陽氏로부터라는 說이 있고 또한 高辛氏라는 說이 있다. 三國史記의 高句麗 19대 廣開土王 17年 3月의 記錄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敍宗族, 北燕王雲遣侍御史李拔之, 雲祖父高和句麗之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本文을 解說해 보기로 한다. 17년 봄 3월에 北燕에 使臣이 파견되었다. 宗族에 대하여 공손하게 차례를 펴는 과정에서 北燕王이었던 雲은 王을 모시던 어사 이발(李拔)을 맞이한 자리에서 高句麗의 먼 祖上의 아버지로부터 高氏는 句麗에 화합하여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高陽氏의 후손이 스스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BC.2554년)는 전술한 바와 같이 黃帝의 손자로부터 高句麗가 起源된 것으로 보아야한다. 한편 三國史記 百濟 마지막 王이었던 義慈王 第六卷에는 다음과 같이 記錄하고 있다.

  고구려역이고신씨후성고씨(高句麗亦以高辛氏後姓高氏)라고 적고 있다. 즉 高句麗 역시 고신씨(高辛氏.BC.2476년) 후로부터 姓을 高氏라고 되어있다. 다시말해 高句麗의 祖上은 黃帝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로부터 始作되었다고 했다. 어찌 되었던 간에 高句麗의 운조(雲祖:먼 조상)는 高陽氏가 되었건 高辛氏가 되었건 高句麗의 祖上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黃帝로부터 後孫으로 뿌리가 내려오고 있는 것만은 否認할 수 없다.

  黃帝는 4명의 王后로부터 25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머리가 나쁜 11명은 姓을 하사받지 못했다. 그중 14명만 姓을 하사받았는데 史書에 記錄되어 있는 이름은 다섯 명이 고작이다.

  黃帝의 아들 昌意는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를 낳았다. 고로 黃帝의 孫子인 高陽氏로부터 句驪 또는 高句麗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黃帝의 아들 현효(玄囂)는 교극(蟜極)을 낳았는데, 교극의 아들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이다. 이는 山海經과 史記 五帝本紀에 記錄하고 있다.

高氏의 뿌리가 이어져내려 온 것은 문헌상으로 보면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76년)이다. 고신씨의 뒤를 이은 사람은 요단군왕검(堯檀君王儉.BC.2357년)이다.

三國遺事 古朝鮮편에는 분명히 堯임금을 堯壇君王儉으로 記錄하고 있다. 堯王儉의 뒤를 이은 사람은 순(舜.BC.2284년)임금이며, 다음은 夏, 殷, 周로부터 三韓으로 이어져 고리국(櫜離國) 후로 句驪, 扶餘를 거쳐 후에 高句麗로 내려옴을 볼 수 있다. 고로 高陽氏가 黃帝의 直系 孫子라면 高辛氏는 直系 증손자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高陽氏로 본다면 親四寸 조카벌이 高辛氏이고 高辛氏의 입장에서 보면 큰아버지뻘이 된다. 여하간 高句麗의 雲祖는 黃帝의 後孫임을 正史가 잘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③ 句驪와 櫜離國


  앞에서도 누누히 强調한 바 있으나 고리국에 대하여 系統을 확실히 하는 것이 高句麗에 대한 理解가 보다 용이할 것같다.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BC.2476년)가 都邑한 곳은 호(毫)라는 곳이다. 毫는 지금의 河南省 洛陽이다. 洛陽古都史는 1987년 蘇健의 著述로 洛陽博物館 소장으로 되어있다.

  第三章 河圖洛書편에 보면 복희씨 이후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BC.3071년)를 거쳐 黃帝와 더불어 山東省 曲阜에 都邑을 定하고 번영해 갔다. 世界 4代 文明의 發祥地인 洛陽에서 黃帝와 孫子인 전욱고양씨, 堯, 舜 등이 洛水에서 물놀이를 하던 때부터 黃河文明은 發展하게 된 動機이다. 바로 그곳이 지금의 河南省 洛陽이다.

  黃帝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씨가 전욱고양씨에 이어 都邑한 곳은 호(毫)이며, 이곳이 바로 洛陽이다. 제곡고신씨 이후 堯, 舜 때 河北省 옛 영주(瀛州)인 지금의 固安縣에서 黃帝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씨의 후손으로 諸侯國에서 일어선 나라가 바로 고리국(櫜離國)이다. 櫜離國이 생긴 것은 BC.260년 전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列國인 七雄時代 以前으로 보는 것이 史家들의 見解이다.

  여기서 七雄時代란 秦 . 韓 . 魏 . 趙 . 燕 . 齊 . 楚 나라를 말한다. 즉 周나라 末期에는 大陸에 약 2천 개 이상의 諸侯國이 亂立하기 이전에 고리국이 河北省 固安縣에 都邑을 定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列國時代는 점차 春秋戰國時代로 접어드는 初期 단계로서 戰運이 감도는 조짐이 나타나는 단계였기 때문이다.

특히 고리국은 天子였던 炎帝神農氏와 黃帝가 都邑했던 山東省 曲阜에서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곳에서는 수많은 나라들이 雨後竹筍처럼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黃帝의 아들격인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BC.2578~2512년)까지 山東省 曲阜에서 66년간 執權하는 동안 全國은 점점 허물어지는 情勢였다. 이를 지켜보던 고양씨(高陽氏.BC.2491~2435년)는 天子에 등극하자마자 都邑地를 中國大陸의 中央地인 河南省 東北部인 복양현(濮陽縣)으로 옮겼다. 그후 바로 天子의 뒤를 이은 黃帝의 증손인 제곡고신씨는 전술한 바와 같이 河南省 洛陽으로 都邑地를 定한 후 社會는 125년간 安定되어 갔다.

  BC.2357년 高辛氏의 셋째 아들인 堯王儉이 天子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다시 都邑地를 平壤으로 定한다. 여기서 平壤은 감숙성(甘肅省) 통위현(通渭縣)과 섬서성(陝西省) 平壤, 그리고 섬서성 西京인 西安의 동쪽이다.

  中國에서는 平壤이라는 地名을 그대로 두었을 경우 高句麗뿐만 아니라 古朝鮮과 三韓, 그리고 新羅 . 百濟 . 高麗의 역사까지도 完全히 들통날 것이 두려워 歷史的으로 有名한 地名은 모두 옮기거나 없애고 경우에는 비슷한 音으로 글자를 바꾸어버렸다.


  1931년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저술한 장려화(臧勵龢)는 지명(地名)이 바뀌어진 過程을 적으면서도 일부분 有名한 歷史의 흔적이나 나라이름 등은 자국을 남기고 있다.

平壤을 平襄이라고 약자를 쓴 곳도 있고, 平壤이라는 글자를 아예 平陽城 또는 平陽府, 平陽郡, 平陽縣으로 바꾸었다. 平襄縣을 보면 中國古今地名大辭典 217쪽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漢나라 때 두었는데 後魏 때 폐하였다. 옛 古城이 있던 곳은 지금의 甘肅省 通渭縣 西南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平陽府를 보면 옛날 堯임금이 都邑했던 곳으로 三國時 魏나라가 둔 곳이 平陽郡이다. 이곳을 예로부터 다스려 오던 곳은 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西南으로 되어있다.

여하간 平壤城의 본 位置는 三國遺事 古朝鮮편에 있는 것처럼 堯임금이 都邑한 王儉城이며 후일 平壤城으로 지금의 西安임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言及한바와 같이 고리국은 黃帝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싸의 後裔로서 河北省 河間縣에 都邑을 定하고 다스려 온 것만은 否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치통감(資治通鑑) 201卷 唐紀17 高宗 때의 記錄에는 高麗, 百濟는 河北省의 백성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高麗라고 적은 것은 百濟가 있을 당시이므로 高句麗를 뜻한다.

  고리국의 後孫인 高句麗와 百濟의 백성이 中國 北京에 있는 河北省 사람이라고 했으므로 高句麗 . 百濟는 한반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高句麗 . 百濟의 백성이 河北省 사람들임이 資治通鑑 唐나라 記錄에 있다는 것은 三韓의 母國인 고리국(櫜離國)은 中國의 心臟部인 河北省 河間縣임을 立證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고리국(櫜離國.BC.260~230년)에서 파생된 句驪는 獨立하여 나라를 세우고 大陸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後漢書 句驪편을 보면 句驪는 一名 맥이(貊耳)라 했으며 河伯의 後裔로서 강물을 위주로 살았다고 했다. 그로 인해 소수맥(小水貊)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했다. 句驪人들은 활을 가지고 다니기를 좋아했으므로 맥궁(貊弓)이라고도 했다고 적고 있다.

句驪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句驪兵들을 動員하여 王莽이 흉노(匈奴)를 정벌하였다고 되어있다.

  앞장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리국의 雲祖는 제곡고신씨이며 句驪의 祖上은 고리국이다.

後漢書 扶餘國과 梁書에 의하면 고리국(櫜離國)에서 高句麗의 뿌리인 句驪가 생겨났음을 볼 수 있다. 고로 고리국과 句驪 그리고 高句麗는 黃帝의 증손자인 高辛氏에서 뿌리로 이어왔다는 것이 正史에는 잘 나타나 있다. 그러기에 三國史記 百濟 마지막 義慈王편에 高句麗의 祖上이 제곡고신씨에서 연유되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魏書 . 隋書 . 周書에는 扶餘에서 朱蒙이 나온 것으로 되어있으나 唐書 . 舊唐書 . 通典에는 扶餘와 다른 宗族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後漢書 . 梁書에는 분명히 고리국(櫜離國)의 王子로 태어난 것으로 記錄한 것으로 보아서 周나라 末期에 고리국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고리국과 句驪는 같은 血統으로 이어져왔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리국에서 扶餘도 함께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아서 고리국과 구려 그리고 扶餘는 같은 同族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나라를 세울 때 國號를 다르게 했을 뿐 고리국과 구려는 같은 뿌리로서 후일 王莽에 의해 高句麗가 建國되었음을 正史에는 記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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