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bc8937
2012/4/9(월)
조회: 2002
고려사 편찬 과정에 대해서  

 

죄송합니다.

고려사 편찬 과정에 대해서는 펌글로 대신하겠습니다.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열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

우왕

창왕


                               고려사(高麗史)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으로 되어 있다. 1392년(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정도전과 정총(鄭摠)이 책임을 지고 예문춘추관의 신하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우선 통사인 이제현(李齊賢)의 《사략》,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역대 고려실록과 고려 말의 사초(史草)를 기본자료로 삼았다. 이것은 그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하륜(河崙)·남재(南在)·이숙번(李叔蕃)·변계량(卞季良)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6년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 왕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고, 마침내 19년(세종 1) 9월 유관(柳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制勅)·태자(太子) 등을 교(敎)·세자(世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다가 23년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31년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42년 8월에 신개(申>)·권제(權)가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 이 책은 48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교감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배포가 곧 중지되었다. 세종은 다시 49년에 김종서·정인지·이선제(李先齊)·정창손(鄭昌孫)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최항(崔恒) 등이 열전, 노숙동(盧叔仝) 등이 기(紀)·지(志)·연표, 김종서·정인지 등이 교감을 맡았다. 열전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인쇄, 반포되었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에는, 본기(本紀)라 하지 않고 세가(世家)라 함으로써 명분이 중요함을 보이고, 거짓 왕인 신우(申禑) 부자를 열전에 내림으로써 분수 넘치는 것을 엄하게 처벌하고 충직하고 간사함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였으며, 제도를 나누고 문물을 헤아려서 비슷한 것끼리 모음으로써 계통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연대를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사적을 상세하게 하는 데 힘을 다하고,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고 바르게 하려 하였다는 편찬의 방침이 제시되고 있다. 이 방침은 다시 범례에서 각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세가에 관한 것을 보면, 왕기는 세가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넘는 칭호도 그대로 써서 사실을 보존하며, 일상적인 일은 처음과 왕이 직접 참여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하며, 고려세계는 실록에 있는 3대추증 사실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였다. 또한 우왕·창왕을 거짓 왕조로 규정하여 열전에 강등시켰으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제현 등의 평론을 그대로 실을 뿐, 따로 작성하지 않도록 하였다. 세가에서는 32왕의 왕기가 46권에 수록되어 전체 분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서술의 방식은 《원사(元史)》를 모방하여 첫머리에 왕의 출생, 즉위에 관한 것을 쓰고 끝부분에 사망, 장례 및 성품에 관한 것을 썼다. 왕의 연대는 실제로는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세가 다음에는 지(志)를 두었는데, 천문·역지·오행·지리·예·악·여복·선거·백관·식화·병·형법 등 총 12지 39권으로 되어 있다. 이 지(志)도 《원사》에 준하여 분류하였으며, 실록 등이 없어져서 빠진 곳은 《고금상정례》 《식목편수록》 및 여러 사람의 문집 등으로 보충하였다 한다. 그런데 실제 고려의 제도는 당나라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송나라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고유의 전통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원구(丘)·사직 등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토속적인 연등회·팔관회 의식이 중요시되었고, 중국의 아악(雅樂)과 당악(唐樂)을 사용하면서도 예로부터의 속악이 성행하였으며, 중국의 관제와 산관계(散官階)를 이용하였으나 또한 도병마사·식목도감 및 향직 등 독자적인 제도를 아울러 썼고, 당률을 채용하면서도 실제 고유의 관습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지의 맨 첫머리에는 편찬자의 서문이 놓여 있는데, 대개 일반론과 실제 사실에 대한 개설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설명의 큰 줄기는 태조 이후 문종 때까지의 고려 전기를 제도가 정비되고 국세가 번창한 시기로 보고, 무신란 이후 몽골 간섭기에 들어서는 제도가 문란하여 나라가 쇠망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먼저 연월일이 없는 일반 기사를 쓰고 그 뒤에 연대가 있는 구체적 사실을 열거하였다. 세가·지 다음으로 표가 들어 있는데, 실제 본문에서는 연표라 하여 하나의 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를 따랐다. 제일 위에 간지를 쓰고 그 아래 중국과 고려의 연호를 썼으며, 고려 난에는 왕의 사망과 즉위 및 중국과의 관계 등 중요한 일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표에 이어 마지막으로 열전을 두었는데, 후비전(后妃傳)·종실전(宗室傳)·제신전(諸臣傳)·양리전(良吏傳)·충의전·효우전·열녀전·방기전(方技傳)·환자전(宦者傳)·혹리전(酷吏傳)·폐행전(嬖幸傳)·간신전·반역전(叛逆傳) 등 총 50권, 1,009명으로 되어 있다. 열전의 구성은 역시 《원사》를 모방하였지만, 그 서문은 이제현이 쓴 제비전(諸妃傳)이나 종실전의 서문처럼 이미 있던 자료를 이용하였다. 그 내용 중 반역전에 우왕 부자를 넣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있고, 문신 위주, 과거 위주로 인물을 선정하여 조선 유학자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흥망사관에 입각하여 개국공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려고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종래의 편년체의 역사서술에서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는 첫째, 동양의 전통적인 왕조사 편찬방식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그 나름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사실을 있는 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러면서도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을 큰 원칙으로 하여 고려시대를 이해하고 있는데, 첫째, 흥망사관에 의해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둘째, 무인(武人)을 천하게 보는 관념과 왕실의 권리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셋째,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대명관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사 편찬자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기록된 고려사 속 사신(史臣)의 견해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여 있다. 넷째, 고려 말 개혁론자의 견해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에서 고려 당시의 사실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

(高麗史全文)

조선시대 세종의 명으로 찬진(撰進)된 편년체 고려시대사. 권초(權草)·홍의초(紅衣草)라고도 한다. 1438년(세종 20) 신개(申槪)·권제(權)·안지(安止) 등 춘추관의 사관에 의해 편찬작업이 이루어져, 42년 완성되고 48년 일단 인출되었으나, 일부의 인물평가가 공정하지 못하다 하여 반포가 중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편찬과 개찬을 거듭한 《고려국사》, 개찬 《고려국사》, 《수교(校)고려사》에 이어 네번째로 시도된 고려시대사이며, 직서주의(直書主義) 원칙에 입각하여 고려시대 당시 사용한 용어를 원래의 기록대로 직서하는 등 이 앞의 사서가 범한 오류를 시정하였다. 또 고려실록을 통해서 소략한 기사를 상세히 보충하여, 역시 앞서의 사서보다 충실을 기하였다. 그러나 편찬에 참가한 권제가 남의 청탁을 받고 내용을 고치고 자신의 조상에 대한 기술을 사실과 다르게 쓰는 등 불공정의 문제가 제기되어 반포가 중지되고, 편찬에 참여한 권제·안지·남수문(南秀文) 등은 처벌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고려시대사 편찬은 《고려사전문》이 반포 중단된 이듬해인 1449년(세종 31)에 착수되어 51년(문종 1)에야 마무리되었다.

(高麗史節要)

조선 전기에 편찬된 고려시대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책. 활자본. 35권 35책. 김종서(金宗瑞) 등이 왕명을 받고 찬수(纂修)하여 1452년(문종 2) 춘추관(春秋館)의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인멸된 《수교고려사(校高麗史)》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것인데, 《고려사》만큼 내용이 풍부하지 못하나 거기에 없는 사실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또 《고려사》에 누락된 연대가 밝혀져 있는 것이 많다. 기전체(紀傳體)인 《고려사》와 함께 고려에 관한 기본사료로 쌍벽을 이룬다. 초판본의 완질(完帙)은 일본 나고야[名古屋]의 호사문고[蓬左文庫]에 있으며, 서울대학교의 규장각도서는 11책이 낙질(落帙)된 것이다. 1932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규장각본을 영인하였는데, 이어 일본에 완질이 있음을 알자 1차 영인에 빠진 권1·권6·권18과 전(箋)·범례·수사관(修史官)·목록·발(跋) 등을 따로 영인하여 《고려사절요보간(高麗史節要補刊)》이라는 이름으로 38년에 간행하였다. 또한, 59년 동국문화사(東國文化社)에서 규장각본을 위주로 영인 간행하였고, 68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국역 출판하였다.

* 이곳에 실은 자료는 한국사료연구소 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힘. 이곳에는 <이조왕조실록>을 비롯한 귀중한 자료가 많이 있음.병(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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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高麗史)

고려시대의 역사서.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1451년(문종 1)에 완성되었는데
고려시대의 역사·문화 등의 내용을 기전체(紀傳體)로 정리한 책으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자료이다.

편찬과정
고려 국사의 편찬은 고려말기 이제현(李齊賢)·안축(安軸)·이인복(李仁復) 등이 시도한 《국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나,
완본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태조의 명에 따라 정도전(鄭道傳) 등이 편찬을 시작했고,
그 뒤 여러 차례 개수(改修)되어 1451년(문종 1)에 《고려사(高麗史)》가 간행되기까지 6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396년에 완성한 정도전의 《고려국사(高麗國史)》는 조선건국의 합리화 내지 논리적 근거를 찾기 위해
고려 말기의 사실(史實)에 많은 곡필을 가했으며, 또 사사롭게 자기의 정적(政敵)들을 깎아내렸다.
그리고 조선의 국시(國是)인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하여
고려의 주체적·자주적 사실과 그 왕실 외교 등의 용어까지 삭제하였다.
이 《고려국사》는 37권의 분량이지만 사서(史書)로는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게다가 단시일에 편찬되고, 찬자(撰者)인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태종이 즉위한 뒤로는, 조선 건국과정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다는 문제성이 제기되었다.
그 뒤 세종은 1419년(세종 1) 9월에 유관(柳寬)·변계량(卞季良) 등에게 개수를 명하였으나,
변계량은 고려 원종 이전의 여러 왕의 묘호(廟號)를 참칭(僭稱)이라 하여 삭제했고,
또 《고려실록(高麗實錄)》에 나타난 고려의 왕실용어 등을 개서(改書)하였다.
 이에 세종은 1423년(세종 5)에 유관과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제2차 개수작업에서 문제되었던 대로 직서(直敍)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윤회는 《수교고려사》를 완성하였는데, 이 책도 내용이 소홀함이 많아 다시 권제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의 간행을 보았다.
이것도 권제가 자기 조상에 대한 기술을 사실과 다르게 기록했고, 또 남의 청탁을 받고 고쳐쓰는 등 공정성이 결여되어
반포가 중지되었다.
1449년(세종 31) 세종은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에 명하여 다시 수정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때에는 전부터 논의되었던 사체(史體)의 문제가 제기되어 종래의 편년체(編年體)에서 기전체로 편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대대적인 편찬작업에 들어가 1451년(문종 1) 8월에 김종서 등에 의하여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139권의 《고려사》가 편찬되었다.
완성된 뒤 김종서·허후·박팽년(朴彭年)·유성원(柳誠源) 등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여 찬자의 이름에서 삭제되고
정인지만 남게 되었다.
《고려사》의 완성은 세종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내용
이 《고려사》는 139권의 기전체 사서로,
고려에 관한 사서 중 편년체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함께 가장 종합적이고도 기본적인 사료(史料)가 된다.
여러 번의 개찬과정을 통하여 《고려사》는 내용이 크게 보완되었는데,
고려시대의 실록자료가 빠짐없이 이용되었고,
《고려국사》 이래의 편찬과정에서 크게 문제되었던 인물평가에 대하여도 객관적인 서술로 개서되었다.
《고려사》는 각 편 중 <지(志)>와 <열전(列傳)>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지>는 12지로 분류되어 있고, 각 <지>에는 고려의 문물·제도·풍속이 상세하게 거의 망라, 정비되어 있는데
중앙집권적 체제에 대한 지배계급의 관료주의 제도도 잘 정비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 전부가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고, 단순히 자료나열·자료 수집에 그친 부분도 없지 않다.
 다음 이 책의 <열전> 50권에는
후비(后妃)·종실(宗室)·제신(諸臣)·양리(良吏)·충의(忠義)·효우(孝友)·열녀(烈女)·방기(方技)·환자(宦者)·혹리(酷吏)·폐행(嬖幸)·간신(姦臣)·반역(叛逆) 등의 항목으로 나누었는데,
이 <열전>을 가장 중시했고 여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열전> 전부가 공정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고,
곡필(曲筆)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편견은 사실 당시 인물평전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기는 하나, 의식적인 혹평은 정치현실에서 온 것이라 볼 수 있고,
어떤 인물의 행적 등을 미미하게 다룬 것은 유교적 평가에서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평가
《고려사》는 고려의 역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고려사》는 집대성과 망라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편찬에 참여한 사학자들이 유교주의에 젖어 있어 관념과잉(觀念過剩)에서 오는 냉정성을 잃은 대목들이 많으나,
이것은 조선초기 문화에 대한 비판이 정립되지 못한 데서 온 하나의 과오일 뿐이다.
《고려사》가 이러한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자료가 모두 인멸된 오늘날에 와서는 기본자료가 되고 있으며,
또한 시대를 전폭적으로 이해·정리하려 한 사관(史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등에 비할 바가 아니다.
139권 100책.


 

고려사(高麗史) 편찬사




세종 6년 갑진(1424, 영락 22)

8월 11일(계축)


동지춘추관사 윤회가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리다





교정하여 편찬한 《고려사》를 올렸는데, 그 서문(序文)에 말했다.

“역사의 법은 옛부터 있었다. 요(堯)의 당(唐)나라와 순(舜)의 우(虞)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했음을 여러 서책을 살펴보면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열국(列國)의 사관이 각기 그 때의 일을 기록하여, 뒤에 편찬 기술하는 자가 상고할 수 있게 되었다. 저 한고조(漢高祖) 같은 이는 관중(關中)에 들어가면서 소하(蕭何)를 시켜서 진(秦)나라의 문적(文籍)을 거두게 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위에 오르자 위징(魏徵)을 명하여 수(隋)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전 왕조의 쇠하고 흥한 연고를 거울삼아 뒷 임금의 착하고 악한 것을 본받고 반성하게 함이었다. 그러니 이른바 나라는 가히 멸망시켜도 역사는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어찌 참말이 아닌가? 공경히 생각하면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처음에 즉시로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과 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에게 명하시어 《고려국사》를 편찬하게 하셨다. 이에 각 왕의 《실록》과 검교 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侍中)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을 채집하여 모아서 편집하여, 좌씨(左氏)의 편년체(編年體)에 모방하여 3년 만에 37권이 성취되었다. 이에 살펴보건대, 그 역사가 잘못된 것이 꽤 많았으니 범례(凡例) 같은 데에 있어 원종(元宗) 이상은 일이 많이 참람되었다 하여 간간이 추후로 개정한 것이 있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시어 고전과 서적에 뜻을 두셨으므로, 이에 우의정 신(臣) 유관(柳觀)과 예문학 대제학 신 변계량과 신 윤회 등에게 명하시어 거듭 교정하고 개정하여 그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셨다.




영락 21년 11월 28일에 신 관(觀)이 말씀을 올렸습니다.

“‘전조(前朝)에 태조로부터 내려오면서 모두 종(宗)이라 칭한 것은 참람한 일이었으나, 혜종(惠宗)·정종(定宗)이 모두 묘호(廟號)였는데, 이제 새 역사에는 혜왕이라 정왕이라 개칭(改稱)하여 묘호로써 시호(諡號)인 것처럼 만들어 진실을 잃은 것 같사오니, 실록에 따라 태조는 신성왕(神聖王)이라 하고, 혜종은 의공왕(義恭王)이라 하고, 정종 이하도 모두 본래의 시호를 쓰게 하면 거의 사실(事實)을 속이지 않는 것이라 하겠나이다.’ 하였더니, 이 날에 신 회(淮)가 경연(經筵)에 입시하였을 때에 친히 옥음(玉音)을 받자왔으니, 말씀하기를, ‘공자의 《춘추(春秋)》는 남면(南面)하는 권리에 부탁하여 한 임금의 법칙을 이루려고 하였던 까닭으로, 오(吳)·초(楚)에 참람하여 왕이라 한 것을 깎아서 자(子)라 하고, 성풍(成風)을 봉(賵)으로 장사하게 한 것에는 왕을 말할 때 천왕이라 하지 아니하였으니, 붓으로 깎아내리고 빼앗는 것은 성인의 마음에서 재정(裁定)하였으나, 좌씨(左氏)가 전(傳)을 짓는데 이르러서는 오나라·초나라와 월나라에 한결같이 왕이라 자칭(自稱)한 것을 좇아 왕이라고 써서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고,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 같은 데에 이르러서는 비록 말하기는 《춘추》의 서법(書法)을 본받았다고 하나, 그 분주(分註)에는 참람하고 거짓된 나라이나 도적질하여 표절(剽竊)한 명호(名號)라도 모두 그 사실대로 좇아 기록하였으니, 어찌 기사(記事)의 범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가 한다. 이제 붓을 잡은 자가 성인(聖人)의 붓으로 깎는 본뜻을 엿보아 알지 못하였은즉, 다만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쓰면, 칭찬하고 깎아내린 것이 자연히 나타나 족히 후세에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반드시 전대(前代)의 임금을 위하여 그 사실을 엄폐하려고 경솔히 추후로 고쳐 그 진실을 잃게 할 수 없을지니, 그 종이라 한 것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가히 실록에 따라 묘호(廟號)와 시호(諡號)의 사실을 없애지 말라. 범례를 고친 것은 이것으로 표준을 삼으라.’ 하시니, 신 등이 공경하여 명철하신 명령을 받고 드디어 원종(元宗) 이상의 실록을 가지고 새 역사와 비교하여 종(宗)을 고쳐서 왕(王)이라 하였고, 절일(節日)을 생일(生日)이라 하였고,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라 하였고, 사(赦)를 유(宥)라 하였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라 말하였고, 태자를 세자라 말한 것 같은 유(類)는 다시 당시의 실록 옛 문귀를 좇았으니, 편찬하기를 이미 끝내매, 사적(事跡)이 대강 완전하여 책을 펴면 권(勸)하고 징계(懲戒)하는 것이 분명하게 여기에 있는지라,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자장(司馬子長)이 세상을 초월하는 기개로 석실(石室)의 글을 뒤져서 《사기(史記)》 1백 30편(篇)을 편찬하였는데, 누를 것은 누르고, 높일 것은 높이고, 버리고 취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반드시 저소손(褚少孫)이 그 빠진 것을 첨부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잘못된 것을 구(救)해 준 뒤에 그 역사가 완비되었으니, 자장(子長)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그 아래 되는 자로서 어찌 깎아 바르게 하고 잘못을 고칠 자에게 기대함이 없겠는가. 역사를 짓는 것의 어려움과 교열하고 교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전하의 생각하심이 깊으신지라, 면대(面對)하여 명령하심은 어의(御意)의 독단(獨斷)에서 나왔으니, 명백하고 정대(正大)함이 보통 천박한 소견(所見)으로는 그 가[涯]와 끝을 측량하지 못할 것이라. 삼가 손을 잡아 머리를 조아리고 붓을 들어 글로 써서 책머리에 실어서, 뒤의 군자로서 이것을 읽는 자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자세하게 생각하라.”

하였으니,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윤회(尹淮)가 지은 것이다.

【원전】 2 집 617 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주D-001]봉(賵) : 성풍(成風)은 노나라 희공(僖公)의 어머니인데, 정실(正室)이 아니었다. 그러나 희공이 오래 왕위에 있으면서 정사를 잘하였다 하여 정실(正室)의 예장(禮葬)인 봉(賵)으로 한 것은 종주국인 주나라 임금의 잘못이므로, 주나라의 임금을 천왕(天王)이라고 쓰지 아니하고 다만 왕이라 써서, 은근히 그의 잘못을 드러낸 것이다.


 

연려실기술 제3권 >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찬술(纂述)과 제작(制作)


 5년 계묘에 유관(柳觀)ㆍ윤회(尹淮)ㆍ변계량(卞季良)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高麗史)》를 고쳐 편찬하게 하였다. 애초에 정도전(鄭道傳)ㆍ정총(鄭摠) 등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이색(李穡)ㆍ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에 의거하여 편찬하였다. 도전이 원종(元宗) 이후의 일에는 중국의 황제를 모방한 참람된 것이 많다 하여, 종(宗)이라 일컫는 것은 왕(王)이라 쓰고, 절일(節日)은 생일(生日)로 짐(朕)은 여(予)로 쓰고, 또 조서(詔書)는 교서(敎書)라고 고쳐서 실상을 잃은 것이 많았고, 시비의 판정은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따라 하였다. 하륜(河崙)이 구사(舊史)를 상고하여 필삭하기로 의견을 드렸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유관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이 엮은 《고려사》를 고쳐 편찬하게 하였다. 사관(史官) 이선제(李先齊) 등이 아뢰기를, "당시의 제도가 비록 참람하였다 하나 실상을 없애버리고 고침은 불가합니다." 하였으나, 변계량은 그렇다고 하지 않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는데 있어서 천자의 권리에 의탁했으므로 붓질하고 깎아버리고 주고 빼앗는 것을 모두 성인의 마음으로 재량하였고, 《좌전(左傳)》에서는 제후이면서 왕이라 참칭한 자에게도 한결같이 그 스스로 일컬은 것을 따라서 왕이라 써주어 일찍이 고친 것이 없었으며, 주자의 《강목(綱目)》은 비록 춘추의 필법을 본받기는 하였으나 칭호를 참람히 쓴 자에게도 모두 실상에 의거하여 기록하였으니, 기사(記事)의 예(例)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사필(史筆)을 잡은 이는 이미 성인의 필삭(筆削)하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니,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그대로 쓴다면 포폄은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하고, 일체를 구사(舊史)에 의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국조보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첫 초본(草本)은 모두 남수문(南秀文)의 손에서 나왔다. 《필원잡기》
 ○ 10년 무신에 임금이, 진주(晋州)에 살고 있는 백성이 아비를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부덕한 소치이다. 허조(許稠)가 매양 나에게 상하의 분수를 엄격히 세우라고 권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였다. 변계량(卞季良)이, 《효행록(孝行錄)》과 같은 서적을 널리 반포하여 시골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평상시에 읽게 하여 점차로 효제와 예의를 숭상하는 습속을 이룩하게 하기를 청하니, 이에 설순(偰循)에게 명하여 효행록을 고쳐 편찬하게 하였다.
 ○ 17년 을묘에 윤회(尹淮)ㆍ권도(權蹈)ㆍ설순 등에게 명하여 문신(文臣) 사십여 명을 집현전에 모아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였다. 이때 임금이 친히 교정을 보았는데, 어떤 때는 밤이 깊을 때까지 하였다. 윤회에게 이르기를, "요즘 이책을 읽어서 글 읽는 것이 유익함을 깨달았다. 총명은 날마다 더해지고 졸음은 훨씬 감해졌다." 하였다. 곧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注)를 의거하고 또 다른 책을 참고로 해서 주석과 음과 구두를 정밀하고 상세하게 하여 《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資治通鑑綱目)》이라 이름하였다. 《국조보감》 《필원잡기》
 ○ 유신에게 명하여 고금의 충신ㆍ효자ㆍ열녀 중에서 특별히 후세에 모범이 될만한 일을 편집하게 하였는데, 일을 따라 기록하고 아울러 시와 찬(贊)도 짓되, 무식한 민간의 남녀들이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그려 붙이고는 《삼강행실(三綱行實)》이라 이름하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였고, 곧 정몽주를 충신전에 넣도록 명하였다.
 ○ 임금은 오방(五方)의 풍토가 같지 않아, 심을 곡식이 각기 마땅한 곳이 있고 옛글에 있는 것과 모두 같지 않을 것을 알고는 각 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노농(老農)에게 실제로 경험한 방법을 골고루 알아 올리게 하였다. 이어 정초(鄭招)에게 명하여 이를 순차로 정리해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 이름하여 중외에 반포하였다.
 ○ 임금이 이르기를, "옛 사람들이 당명황(唐明皇)과 양귀비(楊貴妃)의 일을 그림으로 그린 이가 제법 많았으나, 이것을 희롱 또는 구경의 자료로 삼은 것에 불과하였을 따름이다. 내 이제 개원(開元)ㆍ천보(天寶) 때의 성패(成敗)의 자취를 채집하여 그림으로 그려서 보고자 한다. 옛날 한 나라 때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에 두른 장막이나 병풍에 주왕(紂王)이 취해서 달기(姮己)를 베고 여러 날 동안 긴 밤 내내 잔치를 벌이는 그림을 그렸으니, 이는 세속 임금으로 하여금 지난 시대의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 경계하도록 함이 아니겠는가. 명황은 영주(英主)라 하였으나, 만년에 여색에 빠져 실패함에 이르렀으니 처음과 마지막의 차이가 이와 같은 이는 없었다. 심지어 월궁(月宮)에서 놀았다느니 용녀(龍女) 양통유(楊通幽)를 만났다느니 하는 일들은 극도로 허탄한 것이었으나, 주자의 《강목(綱目)》에도 명황제가 공중에서 나는 귀신의 말을 들었다는 구절을 써서 명황이 괴이한 것을 좋아하던 사실을 나타내었으니, 이러한 말들은 역시 임금으로서 깊이 경계할 바이다." 하고, 곧 유신에게 명하여 책을 편찬하되 그림을 그리고 선유(先儒)의 시와 논평을 붙여서 《명황계감(明皇誡鑑)》이라 이름하였다.
 ○ 임금이 정인지에게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전대(前代) 치란(治亂)의 자취를 살펴야 할 것이나, 서적이 너무 많아서 상고하기에 쉽지 않으니, 임금이 정치를 보살피는 여가에 어찌 널리 볼 수 있겠는가. 경은 사적을 상고하여 선과 악이 족히 후세에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거나 또는 우리 동방의 흥폐와 존망에 관한 것들을 엮어서 책을 만들라." 하고, 명하여 선비 몇십 명을 집현전에 모아 각기 분과(分科)를 맡아 이룩하게 하여 《치평요람(治平要覽)》이라고 이름하였다.
 ○ 권진(權軫)ㆍ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목조(穆祖) 이후에 나라의 기초를 잡은 사적으로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까지를 엮어서 기술하되, 먼저 옛 제왕의 사적을 서술하고 다음에 조선의 일을 써서 《용비어천가》라 이름하니, 모두 1백 25장이었다. 명하여 궁중에서 간행해서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어 조회ㆍ제전ㆍ잔치ㆍ향사 등에 쓰는 악사(樂辭)로 쓰게 하였다. 《국조보감》 《대동운옥(大東韻玉)》
 ○ 임금이 오례(五禮)가 미비한 것을 걱정하여 허조ㆍ강석덕(姜碩德) 등에게 명하여, 명 나라 태조가 정한 옛 제도와 우리나라의 의례를 채택하여 덜고 첨가하되, 성상의 재량에 따라서 하여 《오례의(五禮儀)》라 이름하였다. 《역대총목(歷代摠目)》
 ○ 집현전 유신을 모아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할 제 세조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 가 총재관(摠裁官)이 되었는데, 단종(端宗) 계유년(1453) 봄에 이르러 겨우 완성되었다. 《서애집(西厓集)》
 ○ 옛날 신라(新羅) 때에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서 관가나 민간에서 이제까지 써왔으나 모두 글자를 빌려 만들었기 때문에 더러는 난삽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하였으니, 비루하고 근거가 없을 뿐만이 아니었다. 임금이 생각하기를, "모든 나라가 각기 자기 나라의 글자를 만들어서 자기 나라의 말을 기록하는데, 유독 우리나라에만 그것이 없다." 하여 친히 자모(字母) 28자를 창제하여 '언문(諺文)'이라 이름하였으며, 궁중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ㆍ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편찬시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하였다.
 초종성(初終聲)이 여덟 글자이니, ㄱ ㄴ ㄷ ㄹ ㅁ ㅂ ㅅ ᅌ이요, 초성(初聲)이 아홉 글자이니, ㅈ ㅊ ㅌ ㅋ ㅍ ㅎ  ᅀ ㅇ이요, 중성(中聲)이 열한 자이니,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ㆍ이었다. 그 글자 체는 옛전자[古篆]와 범자(梵字 인도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그리하여 모든 말소리나 한문자로서 기록할 수 없는 것을 막힘없이 통달하게 하였고, 《홍무정운(洪武正韻)》에 실린 모든 글자 역시 모두 언문으로 쓰게 되었다. 드디어 오음(五音)으로 나누어 구별을 지었으니, 곧 아음(牙音)ㆍ설음(舌音)ㆍ순음(脣音)ㆍ치음(齒音)ㆍ후음(喉音)이었다. 순음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의 다름이 있고, 설음에는 정(正)과 반(反)의 구별이 있으며, 글자 중에서도 역시 전청(全淸)ㆍ차청(次淸)ㆍ전탁(全濁)ㆍ차탁(次濁)ㆍ불청(不淸)ㆍ불탁(不濁) 등의 차이가 있어, 비록 무식한 여인이라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중국 한림학사 황찬(黃瓚)이 때마침 요동에 귀양와 있었으므로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황찬을 찾아가 보고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질문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요동에 왕복하기를 무릇 열세 차례나 하였다. 《용재총화》《동각잡기》
 ○ 그때 임금이 처음으로 언문을 만들자 집현전의 모든 선비가 함께 불가함을 아뢰어, 심지어는 상소하여 극도로 논한 이까지 있었다. 임금이 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과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책을 지었다. 《사가집(四佳集)》
 ○ 예문관 제학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게 하였다. 《역법전고(曆法典故)》에 상세하다.
 ○ 임금이 경연에서 채씨(蔡氏)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강론하다가 법도(法度)가 매우 정하고 존비(尊卑)가 순서 있음에 감탄하여 율(律)을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황종(黃鍾)을 갑자기 얻기가 어려워서 곧 예문관 대제학 유사눌(柳思訥),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봉상시 판관 박연(朴堧), 경시서 주부(京市署主簿) 정양(鄭穰) 등에게 명하여 구악(舊樂)을 정리하게 하였다.
 또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고, 영의정 황희(黃喜), 우의정 맹사성(孟思誠), 찬성 허조(許稠), 총제(摠制) 정초(鄭招)ㆍ신상(申商)ㆍ권진(權軫) 등을 제조(提調)로 삼아 악률(樂律)을 의논하게 하였다.
 ○ 박연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성악(聲樂)이 잘 조화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옛 사람이 성음(聲音)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격경(擊磬)으로 주를 삼았고, 율관(律管)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누서(累黍)로 근본을 삼았는데, 이제 하늘에서 거서(秬黍 검은 기장)를 나게 하여서 지극히 조화될 징조를 보이고, 땅에서는 경석(磬石 경을 만드는 돌)이 생산되어 지극히 조화될 단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것은 율관이라 생각합니다. 옛 일을 상고하면, 주 나라에서는 유태(有邰)의 거서를 얻어 음악이 조화되었으나, 한(漢) 나라에서는 임성(任城)의 거서를 얻었고, 근고(近古)에 수(隋) 나라에서는 양두산(羊頭山)의 기장을 얻었으나 율관에 맞지 않았으며, 송 나라에서는 경성(京城)의 거서를 얻었으나 역시 맞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기장을 포개는 방법이 비록 글에 실려 있으나 알맞은 기장 낱알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신이 이제 동적전(東籍田)에서 길러낸 기장을 포개어 황종관(黃鍾管)을 만들어 불어 보았더니, 그 소리가 중국의 황종보다 일률(一律)이 더 높았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땅이 척박하고 해가 가물어 그 자란 것이 조화를 잃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신이 또 생각건대 같은 씨를 뿌려 자란 벼이건만 남방의 쌀은 윤기가 있고 통통하며, 경기의 쌀은 메마르고 가늘며, 동북지방에서 생산된 쌀은 더욱 가는 것을 보면 기장의 대소 역시 그런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신은 남방 여러 고을에서 가꾼 기장들을 모아 세 등급으로 뽑아서 포개어 관을 만들되, 그 가운데 중국의 소리와 같은 것이 있으면 곧 삼분(三分)으로 손익(損益)하여 열두 율관(律管)을 만들어 오성(五聲)을 조화시키기를 바라니, 그렇게 하면 도량형(度量衡)도 이것을 통해 분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역대 임금들이 음률을 지을 때에 기장이 한결같지 않았던 까닭으로 소리의 높고 낮음이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으니, 오늘날 중국의 음률이 참된 것이 아니요, 우리나라의 거서가 도리어 참된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음률과 도량형을 고르게 함은 곧 천자의 일이요, 제후국이 멋대로 할 바가 아니니, 만일 오늘의 거서가 끝내 중국의 황종에 맞지 않는다면 잠정적으로 편의를 써서 다른 기장을 포개어 율관을 만들어 중국의 황종에 맞도록 한 연후에 법에 의거하여 손익하여 성률(聲律)을 바로 잡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다.
 ○ 9년 정미에 임금이 이르기를, "거서(秬黍)로 율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 만든 황종(黃鍾)을 박연이 만든 율관을 가지고 그 소리를 살펴보면 맞고 아니 맞는 것을 누구든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신상(申商)이 아뢰기를, "이는 다만 박연이 혼자 알아낸 것이 아니요, 영악학(領樂學) 맹사성(孟思誠)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악기(樂器)를 박연에게 맡기면 성음이나 절주(節奏)를 알아낼 것이다." 하였다.
 고려 예종(睿宗) 때에 송 나라 휘종(徽宗)이 제악(祭樂)에 쓰는 종(鍾)과 경쇠 각 한 틀과 거문고ㆍ비파ㆍ생(笙)ㆍ우(竽)ㆍ소(簫)ㆍ관(管) 등 악기를 각각 한 부씩 보내 왔더니, 홍건적(紅巾賊)의 난리에 거의 다 흩어져 버리고, 늙은 악공(樂工)이 종과 경쇠 두 악기를 연못 속에 던져서 겨우 보존되었다. 명 나라 태조와 태종이 모두 악기를 보내왔으나 소리가 율도에 맞지 않았으므로 제악의 팔음(八音)이 갖추어지지 못해서 제전(祭典)을 행할 때 경쇠는 와경(瓦磬)으로 대용하고 종도 역시 섞어 달아서 그 수를 갖추지 못하였다.
 을사년(1425)에 거서가 해주(海州)에서 났고 병오년(1426) 봄에는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생산되자, 임금이 개연(慨然)히 묵은 것을 개혁하고 새것을 다시 만들 뜻이 있어, 곧 박연에게 명하여 편경(編磬)을 만들게 하였다. 박연이 해주의 거서를 취해서 푼(分)과 치[寸]를 포개어 황종(黃鍾) 한 관(管)을 만들어서 불어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의 음보다 조금 높았었다. 이로 인해 전현(前賢)의 의논을 상고해 보니, "땅에는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이 있고 기장도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어서 성음의 높고 낮은 것도 시대마다 각기 같지 않다." 하였고, 진양(陳暘)도 역시 말하기를, "대나무를 많이 끊어서 후기(候氣)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땅이 동방에 치우쳐 있어 중국과는 풍기(風氣)가 아주 달라 후기를 하기 어려웠다. 이에 해주에서 나온 거서를 가지고 낱알의 형체에 따라 납(蠟)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서 푼(分)을 포개어 관(管)을 만들되, 한 알이 한푼이 되고 열 알이 한 치가 되고 아홉 치가 황종(黃鍾) 길이가 되게 하고 삼분(三分)으로 손익(損益)하여 십이율(十二律)을 이룩하였다.
 한 달이 지난 뒤에 새로 만든 경쇠 두 틀을 드리며 아뢰기를, "이제 경쇠를 만들되 그 모양은 한결같이 중국의 것을 의거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음에 있어서 중국의 경쇠는 유빈(蕤賓)의 소리가 도리어 임종(林鍾)보다 높고 이칙(夷則)은 남려(南呂)와 같으며 응종(應鍾)은 무역(無射)보다 낮아서 마땅히 높아야 할 것이 도리어 낮고 마땅히 낮아야 할 것이 도리어 높았으니, 아마도 한 시대에 만들어진 악기가 아닌 듯합니다. 만일 이에 의거하여 만든다면 결코 조화될 리가 없겠기에, 삼가 중국 황종에 대한 설명에 의거하여 황종관을 만들고 그것으로 손익(損益)하여 십이율의 관(管)을 만들어 불어서 율(律)에 맞추어 이로써 결정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새로 만든 경쇠 두 틀, 명 나라에서 받은 경쇠 한 틀과 소(簫)ㆍ관(管)ㆍ방향(方響) 등 악기를 취하여 새로 만든 율관으로 맞추어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경쇠는 과연 음률에 맞지 않고 이제 새로 만든 경쇠가 옳게 되어 소리가 맑고 아름답다. 박연이 율관을 만들어 음성을 구별한 것이 뜻밖에 매우 훌륭하니, 내가 매우 기쁘다. 다만 이칙(夷則) 하나만이 소리가 맞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박연이 곧 살펴보고 아뢰기를, "갈 때에 한정으로 표시한 먹이 아직 남아 있어 다 갈리지 않았습니다." 하고, 곧 갈아서 먹이 다하자 소리가 저절로 맞게 되었다. 경쇠가 이룩된 뒤에 박연에게 명하여 그것을 전임하게 하니, 조회와 제전에 쓰는 음악이 비로소 갖추어지게 되었다. 《국조보감》
 ○ 박연이 임금의 인정을 받아 뽑혀 쓰이게 되어 관습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로서 오로지 음악에 관한 일만 맡았는데, 그는 앉아서나 누워서나 매양 손을 가슴 밑에 얹어서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 속으로는 율려 소리를 짓고 한 지 십여 년에 비로소 이룩하였다.
 일찍이 석경(石磬)을 만들 때 박연을 불러서 살피게 하였는데, 그가 어떤 율은 한 푼이 높고 어떤 율은 한 푼이 낮다 하였다. 다시 보게 하니, 높은 율은 찌꺼기가 붙었으므로 긁어 버리고 또 낮은 율에는 찌꺼기 한 푼을 붙이고는 아뢰기를, "이젠 율이 바로 잡혔습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신묘함을 탄복하였다. 《필원잡기》 《용재총화》

 ○ 10년 무신에 비로소 조회와 제사에 아악(雅樂)을 썼다. 한 책에는 15년 계축에 비로소 썼다고 되어 있다. 병오년(1426) 가을로부터 이해 여름에 이르기까지 악기가 모두 완성되었다.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의 헌가(軒架)에 편경(編磬)을 등가(登歌)하였는데, 경쇠가 모두 이백 스물 여덟 개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창제(創制)라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것이니, 임금이 하고자 하는 것을 혹 신하가 저지하기도 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것을 혹 임금이 듣지 않기도 하여, 또 임금과 신하가 모두 하고자 하더라도 시운(時運)이 불리한 수도 있는데, 이제 내 뜻이 먼저 정해졌고 국가에도 일이 없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할 것이다." 하고는 이내 명하여 조회에 쓸 경쇠는 남양(南陽)에서 만들게 하고, 조제(朝祭)에 쓸 종은 한강(漢江)에서 만들게 하되, 모두 박연으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하고 대호군(大護軍)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일을 돕게 하였으며, 또 조종(祖宗)의 공덕을 서술하여 '정대업(定大業)'과 '여민락(與民樂)' 등의 음악을 지었다.
 ○ 12년 경술에 세종이 《의례(儀禮)》와 《시경(詩經)》의 음악과 임우(林宇)의 《석전악보(釋奠樂譜)》를 부연하여 《조제아악보(朝祭雅樂譜)》를 만들었다. 문종조(文宗朝)에 간행하였다.
 ○ 13년 신해에 임금이 박연에게 이르기를, "내 몸이 편치 못하므로 세자가 대리로 칙서(勅書)를 맞이할 때 쓰는 음악에 황종궁(黃鍾宮)을 쓰는 것은 불가하지 않은가? 고선궁(姑洗宮)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더니, 박연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 14년 임자에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회례(會禮)에 쓰는 문무(文舞)와 무무(武舞) 두 악장(樂章)에 대하여 박연은 '마땅히 당세의 일을 노래해야 한다.' 하였다. 그러나 가사란 성공을 드러내어 그 덕을 찬송하는 것이니 당대의 일을 노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물며 나는 다만 대를 이었을 뿐이니, 무슨 공덕을 찬송할 것이 있겠는가. 태조께서는 전조(前朝)의 말기를 당하여 백번 싸워 백번 이기셔서 그의 공덕이 백성에게 흡족하게 미쳤고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새 왕업을 후세에 물려주셨으며, 태종께서는 예와 악을 제정하여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답게 되어 중외가 다스려지고 편안하였으니,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武舞)를 짓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文舞)를 지어서 만세토록 행해질 제도를 만들어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무가 문에 앞서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하니, 지난 역사 중에서도 역시 무가 문에 앞선 일이 있었던가. 박연ㆍ정양(鄭穰) 등과 의논하여 나에게 보고하라." 하였다.
 지신사 안숭선(安崇善), 좌대언 김종서(金宗瑞) 등은,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짓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야 하며, 겸하여 당대의 일을 노래할 것입니다." 하였고, 좌부대언 권맹손(權孟孫)은, "마땅히 전하의 말씀대로 할 것이며, 당대의 일은 후세에 가서 반드시 노래할 것입니다." 하였다.
 황희ㆍ맹사성ㆍ권진ㆍ허조 등이 의논하기를, "종묘의 음악에는 이미 문을 먼저 하고 무를 뒤에 함이 옳다 하였으니, 조회에서도 무를 먼저 하고 문을 뒤에 할 수 없습니다. 태조와 태종의 문덕을 함께 찬송하여 문무를 만들고 태조와 태종의 무공을 함께 서술하여 무무를 만들게 하소서. 만일 2대의 공덕을 함께 서술하는 것을 옛일에 비해 말한다면 《시경》 대무편(大武篇)의 수장(首章)에 이르기를, '아아, 거룩하신 무왕이여, 그지없는 그 공렬이시도다. 진실로 문덕이 있는 문왕이 후세를 잘 열어주시거늘 뒤를 이어 무왕이 이를 받으시어, 은 나라를 이겨 살육을 저지해서 그 공을 이룩하셨도다.' 하였으니, 이를 보아도 2대의 공덕을 함께 서술함이 어찌 의의가 없는 일이겠습니까." 하였고, 대제학 정초(鄭招)는 아뢰기를, "진씨(陳氏)의 악서(樂書)에 한무(漢舞)는 무덕을 먼저하고 문치를 뒤에 하였고, 당무(唐舞)는 칠덕(七德 문덕)을 먼저하고 구공(九功 무공)을 뒤에 하였으니, 무는 백성에게 위엄을 보여 난을 평정하는 뜻이고, 문은 백성을 따르게 하여 세워진 나라를 지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난을 평정하는 것을 먼저 하고 나라를 지키는 일을 나중에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황희 등의 의논을 따랐다.
 15년 계축 정월에, 임금이 근정전에 나와 회례(會禮)를 베풀었다. 3월에 임금이 권맹손(權孟孫)에게 이르기를, "지난 가을 예조에서 회례에 쓰는 악장을 의논하여 정하되, 첫째는 수보록(受寶籙)이요, 둘째는 근천정(覲天庭)이요, 셋째는 하황은(荷皇恩)이요, 넷째는 성택(聖澤)이요, 다섯째는 포구락(抛毬樂)이요, 여섯째는 아박(牙拍)이요, 일곱째는 무고(舞鼓)였다.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은 태종께서 일찍이 태조의 꿈에 나타난 일과 도참(圖讖 비결(秘訣))에서 나온 말이라 하여 노래하여 칭송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 하셨는데, 하륜(河崙)이 굳이 청하여 다만 수보록만 악부(樂府)에 올리고 몽금척은 일찍이 노래에 올리지 않았다. 기해년(1419)에 태종이 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몽금척이 꿈 속에 나타난 일이라 하여 폐기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주 무왕(周武王)도 역시 이르기를, 「나의 꿈이 나의 점에 맞는구나」하였다. 그러니 이제 몽금척도 악부에 올리도록 하라.' 하셨다. 태종의 말씀이 이러하셨다. 수명명(受明命)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새로 대를 이을 때에 항상 있는 것이라 하여 노래하지 않는다면 하황은도 역시 노래에 올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 때에는 중국으로부터 고명과 인장을 받은 임금이 적었는데, 우리 태종에 이르러서 받게 되었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기 때문에 수명명은 노래하지 않을 수 없겠고, 하황은은 비록 노래에 올리지 않더라도 가할 것이다." 하였다.
 맹손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이후로 두터운 황은(皇恩)을 입은 것은 옛 역사에 없었던 일이니 어찌 노래 불러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하황은을 폐할 수 없다면 수명명도 마땅히 악부(樂府)에 올려야 할 것이다. 지금 악부에 성택을 해서(海瑞)로 고친 것은 근래에 청낭간(靑琅玕)의 상서를 얻었기 때문인데, 이런 세세한 일을 어찌 악부에 올릴 수 있는가. 또 포구락(抛毬樂)은 잡기로서 역대에 모두 쓰긴 하였으나 곡절이 지나치게 길어 회례의 음악에는 합당하지 않으니 폐기함이 어떠한가. 정척으로 하여금 상정소(詳定所)에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맹손이 아뢰기를, "해서의 문제도 아울러 의논합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앞으로 대수가 무궁할텐데 이런 일을 모두 노래하기로 한다면 장차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울 것이니, 의논할 것 없이 폐기하라. 다만 몽금척(夢金尺)은 태조의 공덕을 노래한 것이고, 수명명(受明命)은 태종의 공덕을 노래한 것이니, 정척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 14년 임자에 세종이 경연에 나와서 역상(曆象)의 이치를 논할 때, 예문관 제학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기를, "우리 동방이 멀리 해외에 있으나 모든 제도를 한결같이 중국의 것을 따랐다. 다만 천문을 관측하는 기구가 없었는데, 경이 이미 역산(曆算)을 맡은 부서의 제조가 되었으니, 대제학 정초(鄭招)와 함께 옛법을 강구하여 의표(儀表)를 창조하여 천문 관측에 쓰게 하되, 그 요점은 북극(北極)이 땅 위에 솟은 높낮이를 정함에 있을 것이니,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정초ㆍ정인지 등은 옛글 상고하는 것을 맡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李蕆), 호군
장영실(英實)은 기술자의 감독을 맡아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만들어서 서울에서 북극의 땅 위에 38도가 솟은 것을 측정하니 원사(元史)에 실려 있는 바의 측정한 것과 다소 부합되었다. 드디어 구리를 녹여서 여러 가지의 의상(儀象)을 만들었는데, 7년이 지난 무오년(1438)에 이룩되었다. 첫째는 대소 간의(大小簡儀)요, 둘째는 혼의 혼상(渾儀渾象)이요, 셋째는 현주 천평 정남 앙부 일구(懸珠天平定南仰釜日晷)요, 넷째는 일성 정시의(日星定時儀)요, 다섯째는 자격루(自擊漏)였다. 모든 의상의 제도와 모든 신하들이 지은 명(銘)은 아울러 의상전고(儀象典故)에 자세히 실려있다.
 그때 임금이 여러 의상을 만들었으니, 대소 간의대(大小簡儀臺)ㆍ흠경각(欽敬閣)ㆍ혼상(渾象)ㆍ앙부 일구(仰釜日晷)ㆍ일성 정시 규표(日星定時圭表)ㆍ자격루(自擊漏) 등이 모두 극도로 정교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임금의 재량에서 나왔다. 여러 기술자 중에 임금의 뜻을 헤아리는 자가 없었는데, 다만 호군 장영실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서 기교한 방법을 운용하여 임금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종이 매우 중히 여겼다. 사람들은 모두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임금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난 인재라 하였다.
 ○ 김돈(金墩)ㆍ김조(金銚)에게 명하여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조그마한 정각 한 간을 짓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 자쯤 되게 하여 정각 가운데에 두고, 그 안에 옥루(玉漏)를 설치하고 바퀴를 달아 물로 돌게 하였다. 또 사신(四神)ㆍ십이신(十二神)ㆍ고인(鼓人)ㆍ종인(鍾人)ㆍ사신(司辰)ㆍ옥녀(玉女) 등을 만들어 모든 기관들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여 마치 신이 그렇게 하는 듯 하였다. 하늘과 해의 도수와 구(晷)와 누수(漏水)의 시각이 위로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기(欹器)를 만들었는데,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 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 산의 사방에는 빈풍(豳風) 칠월시(七月詩)에 의거하여 사시의 경치를 만들고 나무에 인물ㆍ새ㆍ짐승ㆍ초목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그 절후에 맞게 배포하여 민생의 농사짓기 어려움을 보였다. 그 이름은 흠경각(欽敬閣)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서경》의 '흠약호천(欽若昊天) 경수인시(敬授人時)'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국조보감》《필원잡기》《대동운옥》
 흠경각은 세종 갑인년(1434)에 창건되었으니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곁에 있었다. 뒤에 불탄 것을 명종(明宗) 갑인년(1554)에 그 옛터에 재건하였으나 또 임진왜란의 병화에 소실되었다. 광해군(光海君) 갑인년(1614)에 이르러 다시금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세웠으니,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번 갑인년을 만나서 세워졌었다. 세종조에 이룩된 정시의(定時儀)가 아직 완전히 남아 있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15년 계축에 임금이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그림을 그려서 돌을 새기고, 또 이순지(李純之)에게 명하여 선유들이 의논한 역대 제도를 수집하여 의상(儀象)ㆍ구루(晷漏)ㆍ천문(天文)ㆍ역법(曆法) 등의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 24년 임술에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었다. 《의상전고(儀象典故)》에 상세히 쓰여 있다.
 ○ 27년 을축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조회할 때에 아악(雅樂)을 속악(俗樂)과 섞어 연주해서는 안되니, 이제부터는 섞어 연주함을 허하지 마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의 명신(名臣)

김담(金淡)

김담은, 자는 거원(巨源)이며,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을묘년(14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절공(文節公)이다.
○ 공은 역수(曆數)와 관상(觀象)에 밝았으므로 일영대(日影臺)와 천문지(天文誌)ㆍ전세(田稅)ㆍ구등(九等)에 관한 법을 모두 어명을 받아 찬정(撰定)하였다. 《영천지(榮川誌)》
○ 공이 기사년(1449)에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명하여 기복(起復)시켜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삼고 천담복(淺淡服)을 내렸다. 공은 여섯 차례나 소를 올려서 사직하였고, 사간원에서도 역시 기복하여 벼슬을 줌이 타당치 않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집에 있을 때에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는 담복(淡服)을 입는 것이 어찌 자식의 애통한 정을 아주 빼앗아 기복시키는 예와 같으리요. 하물며 김담과 같은 재주는 세상에 드물기 때문에 위에서 쓰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하리요.” 하였다. 《김문절유고(金文節遺稿)》ㆍ《기복전고(起復典故)》에 상세하다.

김조(金銚)

김조는 호는 졸재(拙齋)이며, 처음 이름은 빈(鑌)이고,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태종 신묘년(141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간공(恭簡公)이다.
○ 공은 일찍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세종이 어느날 잔치를 베풀었을 때 신하가 모두 취하자 세종이 이르기를, “오늘 제군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진술하라.”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하고 부복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이르기를, “신들의 소원도 김조의 것에 넘지 않습니다.” 하여 세종이 웃었다. 《필원잡기》

김돈(金墩)

김돈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참의 김후(金厚)의 손자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인순 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 공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힘을 썼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그의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문과에 오르니 세종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젠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였다.
○ 공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외직을 구하였고, 특별히 역말을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서 봉양에 편하게 하니, 선비들이 그를 영광으로 여겼다.
○ 공은 의상(儀象)에 정통하여 세종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 참여하였다.
○ 공은 오랫 동안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말로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승지의 직에 7년이나 있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첨성(瞻星)
 
세종(世宗) 2년 경자 3월에 임금이 내관상감(內觀象監)을 설치하여 첨성대(瞻星臺) 세우기를 명하고, 또 천문(天文)에 밝고 산수(算數)에 지극히 정밀한 사람을 뽑아 천문을 맡기려 하였다. 그런데 전 관상감 정(前觀象監正) 이무림(李茂林)이 정영국(鄭榮國)ㆍ최천구(崔天衢)ㆍ박유신(朴惟新)ㆍ김흥국(金興國)ㆍ이대정(李大禎)ㆍ정강(鄭剛) 등의 이름을 뽑아서 들이었다. 전 관상감 정 윤사웅(尹士雄)이 장흥(長興)으로 물러나 살았는데, 불러서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게 하였다. 임금이 때때로 혼자 미행으로 친히 첨성대에 임하여 사웅에게 명하여 천도를 논란하다가 술을 내려주고 파하였다.
○ 10월 보름날에 지진이 크게 일어나고, 20일에 혜성(彗星)이 동쪽에 나타났다. 곧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크게 놀라 몸소 첨성대에 올라가 관측하였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며, 음악을 중지하고 형벌을 줄여 옥문을 활짝 열며, 중외에 크게 사면하는 명을 내려, 두려워하고 삼가 반성함으로써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니, 7일 만에 혜성이 없어졌다.
○ 임금이 이르기를, “천문관의 수고로움을 오늘 목격하게 되었다. 천문관에게 벼슬을 설치하여 직책을 맡겼던 본래의 의도가 진실로 가벼운 것이 아니로다.” 하였다. 윤사웅을 가자하여 남양(南陽)을 제수하며, 이무림에게 광주(廣州)를, 최천구에게 부평(富平)을, 정영국에게 인천(仁川)을 제수하였다. 모두 서울 부근에 임명하는 것은 혹 천재지변이 뜻밖에 일어나면 자주 불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박유신이 때마침 당번을 궐(闕)하였으므로 곧 명하여 옥에 가두고, 여러 번 형벌을 주어 거제도로 귀양보냈는데 마침내 풀려 돌아오지 못하였다.
○ 이로부터 비로소 천지성신(天地星辰)에 제사하는 예를 시행하였으니, 제단을 소격서(昭格署)에 쌓아 사웅 등을 시켜 택일하여 예를 시행하도록 했다.
○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미관(微官)의 무리들에게 하루 동안에 특명으로 네 큰 고을 수령의 책임을 제수하오니 듣는 사람 중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연일 두 번씩 아뢰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고 비답하기를, “나는 덕 없는 사람으로 참람히 임금자리에 올라 삼가고 부지런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늘로부터 꾸지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조야의 여러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하늘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이 무리들만이 여러 날 밤낮으로 몸에서 띠를 풀지 못하고, 눈을 붙이지 못하면서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였다. 혹시 이 무리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결단코 천상(天象)에 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희들의 편안히 앉아 잘 먹는 것에 비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방해하지 말고 빨리 이들을 부임케 하라.” 하였다. 또 상의원에 명하여, 각각 겨울 갖옷 한 벌씩을 식년마다 새로 만들어 주게 하고, 내의원에서 날마다 술 5병씩 주게 하였다.
○ 3년 신축에 남양 부사 윤사웅, 부평 부사 최천구, 동래(東萊) 관노(官奴) 장영실(蔣永實)을 내감(內監)으로 불러서 선기옥형(璇璣玉衡) 제도를 토론하여 연구하게 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 무리를 중국에 들여보낼 때에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조력학산(造曆學算)》과 각종 천문 서책을 무역(貿易)하고 보루각(報漏閣)ㆍ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식을 견양(見樣)하여 가져오게 하라.” 하고, 은냥(銀兩)ㆍ물산(物産)을 많이 주었다.
○ 4년 임인에 사웅 등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천문에 대한 여러 가지 서책을 사오고, 양각(兩閣)의 제도를 알아 왔으므로 곧 양각 혼의 성상도감(兩閣渾儀成象都監)을 설치하여 사웅 등에게 감조(監造)하게 하였다.
○ 7년 을사 10월에 양각을 준공하여 임금이 친히 내감(內監)에 가서 두루 보고 이르기를, “기이하다. 훌륭한 장영실이 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 하였다. 곧 면천(免賤)시키고 가자하며 실첨지(實僉知)를 제수하고 겸하여 보루사(報漏事)를 살피게 하여 서울을 떠나지 않게 하며, 감조관(監造官) 윤사웅 등 세 사람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 5월 7일 밤에 임금이 친히 첨성대에 가서 관(管)을 들여다 보고 측후하면서 이르기를, “노인성이 어디에 있느냐.” 하니, 윤사웅 등이 남쪽 하늘을 가리키며 아뢰기를, “남극 노인성이 저기에 있사온데 시력이 모자라 보이지 않습니다. 남극에 가깝고 높이 있사온데 제주(濟州) 한라산과 서북은 백두산ㆍ설한점(雪漢岾) 상봉에 올라가면 보인다 하오나, 살펴볼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웅에게 명하여 제주도로 가게 하고, 무림과 천구는 백두산과 설한점으로 나누어 보내어, 금년 추분으로부터 명년 춘분까지 남극 노인성을 보고 오라 하여 명일내로 가게 하였다.
○ 8월 병오에 한라산에서 관측하던 윤사웅, 백두산에서 관측하던 이무림, 설한점에서 관측하던 최천구 등이 모두 구름이 끼었기 때문에 보지 못하였다고 장계를 올리고 헛되이 돌아왔다.
○ 12년 경술 정월에 또 명하여 세 사람을 각각 관측하러 가게 하였다. 10월에 무림ㆍ천구는 바다가 어두워 남극성을 바라보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12월에 사웅은 춘분에는 보지 못했으나 추분에 바다가 맑고 하늘이 개어 남극성을 밝히 보고 도형을 올렸다. 임금이 친히 첨성대에 와서 자세히 묻고 술을 주고 그리하여 사웅을 가자하였다. 《서운등록(書雲騰錄)》

 

의상(儀象)

신라(新羅) 효소왕(孝昭王) 때에 중 도증(道證)이 당 나라로부터 돌아와서 천문도(天文圖)를 올리었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누각(漏刻)을 만들었다. 《문헌비고》
○ 태조(太祖) 무인년에 물시계를 종가(鐘街)에 두었다.
○ 을해년에 천문도를 돌에 새겼다.
○ 세종 임자년에 대제학 정인지ㆍ정초(鄭招)에게 명하여 간의대(簡儀臺)를 짓게 하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李蕆), 호군(護軍) 장영실에게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만들고, 드디어 구리를 녹여 모든 의상(儀象)을 만들었다. 첫째는 대소간의(大小簡儀), 둘째는 혼의(渾儀)ㆍ혼상(渾象), 셋째는 현주 천평 정남 앙부일귀(懸珠天平定南仰釜日晷), 넷째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다섯째는 자격루(自擊漏)인데 무오년에 준공되었다. 세종조(世宗朝) 조에 상세하다.
○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돌을 쌓아서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는 31척, 길이는 47척, 넓이는 32척으로 하여 돌난간으로 둘렀다. 그 꼭대기에는 간의를 두고, 간의 남쪽에는 정방형의 안(案)을 두었다. 대의 서쪽에 동표(銅表)를 세웠는데 높이 5배(倍) 8척의 얼(臬)에다 푸른 돌을 깎아 규(圭)를 만들고, 규면(圭面)에 장(丈)ㆍ척(尺)ㆍ촌(寸)ㆍ분(分)을 새기어 경부(景符)를 써서 일중영(日中影)을 취하고 이기(二氣)의 영(盈)ㆍ축(縮)을 추측하였다.
○ 간의의 제도는 대간의는 《원사(元史)》에 기재한 곽수경(郭守敬)의 법에 의거하였다. 소간의는 정(精)한 동(銅)으로 부(趺)를 만들며 수거(水渠)로써 빙 둘려서 자오(子午)를 표준하고, 지평(地平)을 정한다. 적도환(赤道環)의 면(面)에 주천도(周天度) 3백 65도 4분도의 1을 나누어서 동서로 운전하여 칠정 중외관 입숙도분(七政中外官入宿度分)을 측정하고, 백각환(百刻環)은 적도환(赤道環) 안에 있는데, 면(面)에 12시 백각(百刻)을 나누어 낮이면 해 그림자로 알고, 밤이면 중성(中星)으로 헤아린다.사유환(四游環)은 규형(窺衡)을 받아서 동서로 운전하고 남북으로 낮추었다 높였다 하여 규측(窺測)하기를 기다리며, 이에 기둥을 세워서 3환(環)을 관통하게 하여 기울이면 사유(四游)가 북극을 표준하고 적도는 하늘의 중심을 표준하며, 곧게 서면 사유가 입운(立運)이 되고, 백각이 음위(陰緯)가 된다.
○ 정초가 소간의에 명(銘)을 짓기를, “천도가 한정이 없으므로 기계도 역시 간편함을 숭상한다. 옛날 간의는 층층으로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 이 기계는 가지고 다닐 만하다. 그 사용법은 간의와 같으니 대개 간편한 중에도 또 간편한 것이다.” 하였다.
○ 혼의(渾儀)ㆍ혼상(渾象)의 제도는, 혼의는 원 나라 선비 오징(吳澄)이 지은《찬언(纂言)》에 기록한 것과 같이 하여 칠목(漆木)으로 하고, 혼상은 베에 칠하여 만들었는데 둥글기가 탄환 같다. 둥글기는 10척 8촌 6분이다.종횡으로 주천(周天) 도분(度分)을 그어 적도가 가운데 있고, 황도는 적도 안팎 출입이 각각 24도 약(弱)이다. 중외관성(中外官星)을 벌여 놓아 하루에 한 번 돌아서 한 도수를 지나게 하고, 해를 황도에 달아 놓아 매일 꼭 1도씩 퇴행하여 하늘의 운행과 합하게 하며, 격수(激水)하는 기륜(機輪)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게 하였다.
○ 일귀(日晷 해시계)의 제도는, 현주(懸珠)는 방부(方趺)의 길이를 6촌 3분으로 기둥을 부(趺)의 북쪽에 세우고, 못을 부의 남쪽에 파고 십자(十字)를 부의 북쪽에 긋고 추를 기둥머리에 달아 십자와 서로 맞보게 하여 수준(水準)을 기다릴 필요없이 자연히 평정된다. 백각(百刻)을 작은 바퀴에 새겼는데, 바퀴는 직경이 3촌 2분이고, 자루를 만들어 기둥에 비스듬히 꽂았으며, 바퀴 가운데에 구멍이 있어 한 개의 가느다란 줄을 꿰어 위로 기둥 머리에 매고, 아래로는 부(趺) 남쪽에 매어 줄의 그림자 있는 곳으로써 시각을 알게 한다.천평(天平)은 그 제도가 현주와 대개 같으나 오직 못을 남북쪽에 파고 기둥을 부 가운데 세우고 노끈은 기둥 머리에 꿰었는데, 들어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다르다. 정남(定南)은 부의 길이가 1척 2촌 5분이 되고, 두 머리의 넓이는 4촌이요, 길이는 2촌이 되고, 허리의 넓이는 1촌이요, 길이는 8촌 5분이 된다. 가운데에 둥근 못이 있어 직경이 2촌 6분이요, 물도랑을 두어 두 머리를 통해서 기둥 곁에 둘렀으며, 북쪽 기둥은 길이 1척 1촌이고, 남쪽 기둥은 길이 5촌 9분이요, 북쪽 기둥이 1촌 1분으로 남쪽 기둥보다 3촌 8분이 낮다. 아래에 각각 바퀴가 있어서 사유환(四游環)을 받았으며, 환은 동서로 운전하는데 반주천도수(半周天度數)를 새겨 도마다 4분하여 북쪽 16도로부터 1백 67도까지 이른다.가운데가 비어 쌍환(雙環) 모양 같고, 나머지는 전환(全環)이 되어 안에는 한 금을 중심에 긋고 밑에 모난 구멍이 있는데, 직거(直距)를 가로 걸쳤으니 거(距)의 가운데가 6촌 7분이다. 비어서 규형(窺衡)을 받았으며, 규형은 위로 쌍환을 꿰고 아래로는 전환에 임하여 남북으로 저앙(低昻)하고 평평하게 지평환(地平環)을 설치하되 남쪽 기둥 머리와 같이 하여 하지의 해 출몰 시각을 표준하며, 반환(半環)을 지평 아래 가로 설치하여 안에 백각(百刻)을 나누어 모난 구멍에 맞보게 하고, 부(趺) 북쪽에 십자(十字)를 그어 추(錘)를 북쪽 바퀴 끝에 달아서 십자와 서로 맞보게 하니, 역시 평형(平衡)을 취하는 데 쓰는 것이다.규형(窺衡)은 매일 태양이 극도(極度) 분(分)에 투입되어 해 그림자가 정원(正圓)이 될 때에 모난 구멍으로부터 반환(半環)의 시각을 내려다보면 비록 정남침(定南針)을 쓰지 아니하여도 남쪽을 정하고 시각을 알 수 있다. 앙부(仰釜)는《원사(元史)》에 기록한 곽수경의 법을 따른다.
○ 김돈(金墩)이 앙부일귀(仰釜日晷)에 명을 짓기를, “무릇 베풀어 시행하는 것으로 시간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들었으니 그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원거(圓距)를 가로 설치하였으니 자(子)와 오(午)가 상대되고, 구멍이 굽이를 따라서 도니 점이 개자(芥子)씨 놓은 것만하다. 낮의 도수는 안에 있으니 주천(周天)의 반이다.신의 형상을 그린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함이다. 각(刻)과 분(分)이 또렷하니 해가 투영됨이 분명하다. 길가에 두는 것은 보는 이가 모이기 때문이니, 앞으로는 백성들이 지을 때를 알겠구나.” 하였다.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제도는 구리로 바퀴를 만들어 적도를 표준하였는데 자루가 있고, 바퀴의 직경은 2척이며, 두께는 4분이고, 넓이는 3촌이다. 가운데에 십자(十字)의 거(距)가 있어 넓이가 1촌 5분이고, 두께는 바퀴와 같고 십자 중에 축이 있는데 길이는 5분 반이며, 직경이 2촌이고, 북쪽편에 중심을 깎아 파서 일리(一釐)의 두께만 남겨 가운데 개자씨만한 둥근 구멍이 있다.
축으로는 계형(界衡)을 꿰고 구멍으로는 별을 본다. 아래에는 서려 있는 용이 있어 바퀴 자루를 머금었으니, 자루 두께는 1촌 8분인데, 용의 입에 1척 1촌이 들어가고 밖에 3촌 6분이 나왔다. 용 아래에 대가 있어 넓이 2척이고, 길이 3척 2촌이며, 도랑이 있고, 못이 있으니 평(平)함을 취한 것이다. 바퀴 윗면에 세 환(環)을 두었으니,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ㆍ‘일귀백각환(日晷百刻環)’ㆍ‘성귀백각환(星晷百刻環)’이다. 주천도분환은 밖에서 운전하는데 밖에 두 귀가 있어 직경이 2척이며, 두께는 3분이고, 넓이는 8분이다.
일귀백각환은 가운데 있어 들지 아니하는데 직경이 1척 8촌 4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외환(外環)과 같다. 성귀백각환은 안에서 운전하는데, 안에 두 귀가 있으며 직경이 1척 6촌 7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중환ㆍ외환과 같다. 귀가 있는 것은 운전하기 위한 것이다. 3환 위에 계형(界衡)이 있는데 길이는 2척 1촌이고, 두께는 5분이며, 넓이는 3촌이다. 두 머리 가운데가 비어 길이가 2촌 2분이며, 넓이는 1촌 8분이다. □은 3환의 그은 것을 가리는 것이다.
허리의 중간 좌우에 각각 한 용이 있어서 길이가 1척인데 모두 정극환(定極環)을 받치고 있다. 두 환이 있으니 외환ㆍ내환 사이에는 구진대성(勾陳大星)이 보이고, 내환 안에는 천추성(天樞星)이 보이는데, 남북 적도를 정한 것이다. 외환은 직경이 2촌 3분이고, 넓이는 3분이며, 내환은 직경이 1촌 4분 반이고, 넓이는 4리며, 두께는 모두 2분이 조금 작은데 서로 십자(十字)로 접속하였다. 계형 두 끝 빈 곳의 안팎에 각각 작은 구멍이 있고, 정극외환(定極外環) 양변에 역시 작은 구멍이 있는데, 가는 노끈으로 여섯 구멍을 꿰어서 계형 두 끝에 매단 것은 위로 일성을 측후하고 아래로 시각을 고찰하려는 것이다.
주천환(周天環)에는 주천도(周天度)를 새겨 매도에 4분을 만들고, 일귀환(日晷環)에는 백각을 새겨 각마다 6분을 만들며, 성귀환(星晷環)에도 역시 일귀환과 같이 새겼는데, 다만 자정이 새벽 전 자정을 지나는 것이 주천의 1도 지내는 것과 같이 된 것이 일귀환과 다르다. 주천환을 쓰는 방법은 먼저 수루(水漏)를 내리어 동지에 새벽 전 자정이 되면 계형으로 북극 제이성(第二星) 있는 곳을 측후해서 바퀴 가에 기록하여 주천 초도(初度)의 시초에 해당하게 한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면 천세(天歲)는 반드시 □하니 《수시력(授時曆)》으로써 고찰하면 16년이 조금 지나면 1분이 퇴보하고, 66년이 조금 지나면 1도가 퇴보하였다. 이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다시 측후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북극 제2성은 북신(北宸)에 가까워 붉게 반짝이어 뭇사람이 보기 쉬운 까닭에 그것으로써 측후하였다. 일귀환 쓰는 법은 간의(簡儀)에 성귀환 쓰는 법과 같다.
첫해의 동짓날 새벽 전 야반(夜半) 자정을 기하여 하늘 초도(初度)를 시초로 삼아서, 1일 1도, 2일 2도, 3일 3도로 3백 64일에 이르면 3백 64도가 된다. 다음해 동짓날 자정에 3백 65도가 되는데, 1일에는 영도(零度) 3분, 2일에는 1도 3분이 된다. 또 다음해 동짓날에 3백 64도 3분이 되며, 1일에는 영도 2분, 2일에는 1도 2분으로 3백 64일에 이르면 3백 63도 2분이 된다. 또 다음해의 동짓날에 3백 64도 2분이 되고 1일에는 영도 1분, 2일에는 1도 1분이니, 3백 65일에 이르러 이에 3백 64도 1분이 된다. 이것을 일진(一盡)이라 하는데 한 바퀴가 다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 소간의(小簡儀)는 두 벌인데, 하나는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었다. 앙부일귀는 두 벌인데 안에 시신(時神 짐승 그림으로 12시를 나타낸 것)을 그린 것은 대개 어리석은 백성들이 꾸부려 들여다보고 시각을 알게 함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두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두었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네 벌을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에 주며, 둘은 동계ㆍ서계 원수영(元帥營)에 나눠 주었다.
○ 김돈(金墩)이 일성정시의에 명을 짓기를, “요임금이 역상(曆象)을 흠정(欽定)하고, 순임금은 기형(璣衡)을 쓰니, 역대로 서로 전해 가며 제작이 더욱 정밀해졌으며, 의(儀)니 상(象)이니 하여 명칭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백성에게 역서(曆書)를 주었으나 시대가 더욱 내려오자 제도가 폐하여졌다.
책(策)이 비록 있으나 누가 그 뜻을 알 것이냐. 성신(聖神) 세종대왕이 때맞춰 나시어 요순의 제도를 계승하시니, 표(表)ㆍ누(漏)ㆍ의(儀)ㆍ상(象)이 모두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시(時)가 백각(百刻)이 있어 낮과 밤이 다르니, 해를 측후하는 데는 기계가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밤을 겸해서 측후하고자 새로 의(儀)를 만들었다. 그 이름이 무엇인고, ‘일성정시(日星定時)’라 하며, 그 사용함이 어떠한고. 별을 보며 해 그림자를 측정한다.
그 바탕은 구리로 만들었는데 제작은 비할 데가 없다. 먼저 둥근 바퀴를 설치하고 거(距)를 가로 설치하니, 남쪽과 북쪽이 낮고 높은 것은 적도의 규모를 모방한 것이다. 대(臺)에 용(龍)이 서리어 입에 바퀴 자루를 머금었으며, 도랑이 있어 못에 연(連)함으로써 수평을 이루게 된다. 바퀴 위에 3환(環)이 스스로 서로 의지해 붙었으니, 바깥 것을 ‘주천(周天)’이라 하여 도(度)와 분(分)이 벌여 있고, 안으로 2환이 있어 일환(日環)과 성환(星環)이 길을 나누었다.
성환의 각(刻)은 하늘 도수와 같이 하였는데, 안팎은 구름이요, 가운데만은 단단하게 굳었다. 형(衡)은 전면을 가로질렀고, 축(軸)은 그 가운데를 꿰었으며, 축을 파서 구멍을 만들었는데 겨자씨 같고 바늘 같다.
형(衡)의 끝을 비워서 도(度)ㆍ각(刻)을 분명히 표시하였고, 두 용이 축을 끼고 정극환(定極環)을 받들었다. 환이 안팎이 있어 별이 둘 사이에 보이는데, 그 별이 무슨 별이냐. 구진(勾陳)ㆍ천추(天樞)로다. 남쪽ㆍ북쪽이 정하여졌고 동쪽ㆍ서쪽이 서로 기다린다. 측후를 하는 데는 줄을 사용하여 관찰하니 바로 환 위에 걸쳐서 아래로 형 끝에 꿰었다.
해 측후에는 둘을 쓰고, 별 측후에는 하나로 한다. 제좌(帝座)는 붉고 밝아서 북극에 가깝다. 줄을 사용하여 엿보니 가히 시각을 알겠다. 먼저 누수(漏水)를 내리니 이에 자정(子正)을 알겠다. 윤(輪)과 환(環)을 표지(表誌)하였음은 천주(天周)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밤마다 주천(周天)하여 도(度)와 분(分)이 시종(始終)한다. 그릇이 간이하고 정미하여 사용함이 주밀하다. 몇 번이나 선철(先哲)을 겪었어도 이 제작이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우리 임금께서 하늘을 예측하여 이 의(儀)를 비로소 만드셨네. 희화(羲和 벼슬 이름)에게 주셨으니 만대에 보배될 것이다.” 하였다.
○ 자격루(自擊漏)의 제도는 파수호(播水壺)가 네 개인데,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수수호(受水壺)는 두 개인데 물을 갈 때에 번갈아 쓴다. 길이는 11척 2촌이며, 원(圓)의 직경은 1척 8촌이고, 살 두 개는 길이가 10척 2촌이다. 면(面)에 12시를 표시하고, 매시마다 8각을 나누어 초정(初正) 나머지 분(分)을 모두 백각으로 하여 각마다 12분을 만들었다.
야전(夜箭)은 옛날에는 21개였던 것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 복잡하여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거하여 밤과 낮에 승강(升降)을 나누어 비율이 대략 이기(二氣)에 1전(箭)이 해당되니 무릇 12전이다. 이에 사신목인(司晨木人)을 만들어 시각을 따라 스스로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집 세 채를 지어서 동쪽채 안에는 2층을 설치하여 윗층에는 3신(三神)을 세워 하나는 시(時)를 맡아 종을 치게 하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치게 하며, 가운데 층 아래에는 평륜(平輪)을 설치하여 12신(神)을 벌여 각각 철조(鐵條)로 간(幹)을 삼아 오르내릴 수 있게 하고, 각각 시패(時牌)를 잡아 번갈아 시를 알리도록 한다.
그 기계를 운전하는 방법은 가운데 집채 사이에 다락을 만들어 위에 파수호를 벌였고, 아래는 수수호를 두며, 호 위에 모난 나무를 세웠다. 가운데는 공(空)하고 면(面)은 허(虛)한데 길이가 11척 4촌이며, 넓이는 6촌이고, 두께는 8분이요, 깊이가 4촌이다.
공(空)한 가운데에 격(隔)이 있어 면에서 1촌쯤 들어가고, 왼쪽에 구리 판자를 설치하여 길이는 살[箭]을 표준하고 넓이는 2촌이다. 판자 면에 12구멍을 뚫어 작은 구리 환(丸)을 받게 하니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구멍에 모두 기계가 있어 열고 닫게 하여 12시를 주장하고, 오른쪽에도 구리 판자를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살을 표준하고 넓이는 2촌 5분이며, 판자 면에 25구멍을 뚫어 역시 작은 구리 환을 받기를 왼쪽 판자와 같이 하고, 12살을 표준하니 무릇 12판자이다.
절기를 따라 번갈아 쓰여 경(更)ㆍ점(點)을 주장하고, 수수호에는 살을 띄워 살 머리에 가로쇠를 받쳐 젓가락같이 하니, 길이는 4촌 5분이고, 병(壺) 앞에 함(陷)이 있다. 함 가운데 비스듬히 넓은 판자를 설치하여 모가 난 머리는 속 빈 나무 밑에 접속하고, 꼬리는 동쪽 집채 자리 아래 달하였다. 격(隔) 넷을 설치하여 각도상(角道狀)같이 하고, 격 위에 큰 쇠 철환을 안치하였는데 크기는 달걀만하였다.
왼쪽 12는 시(時)를 주장하고, 가운데 5는 경(更)과 경마다 초점(初點)을 주장하고, 오른쪽 12는 점(點)을 주장하니, 그 탄자[丸]를 안치한 곳에는 모두 환(環)이 있어 열고 닫는 것이 있다. 또 횡기(橫機)를 설치하여 그 기(機)의 모양이 숟가락 같아서 한 끝은 굽어서 환(環)을 걸 수 있으며, 한 끝은 둥글어 탄자를 받게 한다. 중간 허리에는 모두 둥근 축(軸)이 있어 저앙(低仰)하게 하고, 그 둥근 끝이 구리통의 구멍에 당(當)하게 하였다.
구리통이 두 개가 있어 비스듬히 격(隔) 위에 설치하였는데, 왼쪽은 길이가 4척 5촌으로, 원(圓)의 직경은 1촌 5분이며, 시(時)를 중심하여 아랫면에 12구멍을 뚫었다. 오른쪽은 길이가 8척으로, 원의 직경은 좌통(左筒)과 같은데 경점(更點)을 주장하여 아랫면에 25구멍을 뚫었다. 구멍마다 모두 기계가 있어 처음에는 구멍이 모두 열려서 구리 판자에 작은 탄자가 떨어져 기계에 닿으면 기계가 스스로 구멍을 가리어, 다음 환(環)이 굴러 지나가는 길이 되어 차례차례로 모두 그러하다.
동쪽 집채 자리 윗층 아래 왼쪽에 짧은 통 2개가 달려 있는데, 한 개는 탄자를 받고, 한 개는 안에 기계 숟가락을 설치하여 숟가락의 둥근 끝이 반만 나와 탄자를 받게 하며, 통 밑 오른쪽에 둥근 기둥과 모난 기둥을 각각 둘씩 세웠다. 둥근 기둥은 가운데가 공(空)하여 안에 기계를 설치하였는데 모양은 역시 숟가락 같고 반은 나가고 반만 들어 있으며, 왼쪽 기둥에는 다섯이고, 오른쪽 기둥에는 열이다.
모난 기둥에는 비스듬히 작은 통을 꿰어 기둥마다 각각 넷씩 설치하였는데 한 끝은 연꽃잎 모양을 하고, 한 끝은 용의 입모양을 하였다. 연꽃잎은 탄자를 받고, 용입은 탄자를 토하게 하였으니 용입과 연꽃잎은 위와 아래에 서로 마주본다. 그 위에 따로 달린 짧은 통 두개가 있어 한 개는 경탄자[更丸]를 받고, 한 개는 점탄자[點丸]를 받게 한다. 오른쪽 모난 기둥 연꽃잎 아래마다 각각 세로로 짧은 통 둘과 가로로 짧은 통 한 개를 붙이는데, 그 가로된 짧은 통 한 개는 왼쪽 모난 기둥 연꽃잎 아래에 접속한다.
왼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과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각각 용입에 해당하며, 연꽃잎 사이의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반만 곧은 통 안에 들어간다. 누수(漏水)가 아래로 수수호(受水壺)에 닿으면 뜬 살[浮箭]이 점점 올라가서 왼쪽 구리 판자 구멍의 기계를 건드리며, 작은 탄자가 떨어져 내려 굴러 구리통에 들어가 구멍을 따라 떨어지고, 그 기계를 건드리면 기계가 열리어 큰 탄자가 떨어져 굴러, 자리 아래 달린 짧은 통에 들어가서 떨어져 기계 숟가락을 움직이며, 곧 기계 한 끝이 통 안으로부터 위로 사시신(司時神)의 팔목에 닿아 곧 종을 친다.
경점(更點)도 역시 그러하다. 다만 경탄자는 달린 짧은 통에 들어가서 떨어져 기계 숟가락을 건드려 왼쪽 둥근 기둥 가운데로부터 위로 사경신(司更神) 팔목에 닿아 북을 치고 굴러 점통(點筒)에 들어가 다시 초점 기계를 건드려, 오른쪽 기둥 가운데로부터 위로 사점신(司點神)에 닿아 징을 쳐서 연꽃잎 아래 있는 곧고 작은 통에 멎는데, 그 굴러들어가는 곳에 기계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경탄자의 길을 막고 경탄자가 굴러 들어감에 의하여 막히었던 경탄자의 길이 열리게 되며 나머지 경(更)도 모두 그러하다. 오경이 끝남을 기다려 빗장을 빼고 낸다. 매경(更) 2점 이하의 탄자는 아래 달린 짧은 통에 닿아 굴러 연꽃잎에 들어가서 그 점(點)의 기계를 건드리고, 다음 점의 탄자가 굴러서 역시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 멈춘다.
그 탄자를 멈추는 통에 구멍이 있어 빗장을 걸쳐 닫게 하고, 다섯 개의 탄자가 떨어져 맨 아랫 기계를 움직이면 기계에 연결된 쇠줄이 차례차례로 모든 빗장이 빠져 잎쪽의 3개의 탄자가 일시에 한결같이 떨어진다. 시(時)를 주장하는 큰 탄자가 굴러 떨어져 짧은 통에 닿아 굴러서, 둥근 기둥 통에 굴러들어가 떨어지면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을 누른다.
나무 길이는 6척 6촌이요, 넓이는 1촌 5분이며, 두께는 1촌 7분이다. 가로 지른 나무 가운데에 중심을 맞추어 짧은 기둥을 세우고, 가로지른 나무를 끼고 둥근 축(軸)으로 받아 아래 위로 저앙하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 남쪽 끝에 손가락만한 둥근 나무를 세웠는데, 길이가 2척 2촌으로 시신(時神)의 발 아래에 당한다. 발 끝에 작은 윤축(輪軸)이 있어서 큰 탄자가 떨어져 북쪽 끝을 누르면, 남쪽 끝이 올라가서 신(神)의 발을 받들어 자리 중간층 위에 오르게 하고, 가로지른 나무 북쪽 끝의 북쪽에 작은 판자를 세워서 열고 닫을 수 있게 한다.
판자에 쇠줄이 있어서 위로 시(時)를 주장하는 매달린 통의 기계 숟가락에 연결되었는데, 숟가락이 움직이면 판자가 열려서 앞의 탄자를 나오게 하고, 가로지른 나무 남쪽 끝이 낮아지면 시신(時神)이 바퀴면에 돌아오고 다음 시신이 즉시 대신 올라온다. 그 바퀴를 굴리는 방법은 바퀴 바깥쪽에 길이 한 자 가량 되는 작은 판자를 가로지르고 그 가운데를 4, 5촌 가량 파고 구리 판자를 그 위에 가로 걸쳐 비스듬히 기울인 모양으로 하여 한 끝에 추(軸)를 설치하여 열리고 닫히게 한다.시(時)가 끝나서 바퀴면에 돌아오면 발끝의 쇠바퀴가 구리 판자에 순조롭게 굴러 내려와서 잠깐도 머물지 않게 하며, 다음의 시신(時神)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기계가 다 감추어져 보이지 아니하고 바깥에 보이는 것은 갓[冠] 쓰고 띠를 맨 나무로 만든 사람뿐인데, 이것이 자격루 제작의 대략이다. 그 기계를 설치한 집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고, 또 천추전(千秋殿) 서쪽에는 작은 집을 짓고 종이를 발라서 높이 7척 가량이나 되는 산(山)을 만들어 그 집 가운데에 넣어 둔다. 또 그 집 안에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하여 물의 힘으로 움직이게 하고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해가 오색 구름에 둘리어 산중턱으로 다니는데, 하루 한 번 산을 돌아 낮에는 산 밖에 보이고, 밤에는 산 가운데로 비스듬한 모양이 하늘의 운행하는 도수의 극(極)에 대한 원근(遠近)ㆍ출입(出入)의 등분을 표준하여 각각 절기(節氣)를 따라 천일(天日)과 맞게 한다.
해 아래 4명의 선녀(仙女)가 금목탁(金木鐸)을 들고 구름을 타고 사방에 서 있는데, 인(寅)ㆍ묘(卯)ㆍ진(辰)의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서 있는 선녀가 항상 진동(振動)하고, 사(巳)ㆍ오(午)ㆍ미시(未時)의 초정에는 남쪽에 서 있는 선녀가 항상 진동하는데, 서북 양쪽도 모두 그러하다. 아래로는 4신(神)이 각각 그 방위에 서서 모두 산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청룡(靑龍)이 인시(寅時)에는 북쪽으로, 묘시에는 동쪽으로,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도로 서쪽으로 돌아보고, 주작(朱雀)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차례차례로 향하는 방위를 청룡처럼 한다. 다른 것도 이와 같았다.
산 남쪽 비탈에 높은 대(臺)가 있어서 사신(司辰) 1명이 붉은 비단 공복(公服)을 입고 산을 등져 서 있고, 무사(武士) 3명이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었는데, 1명은 종 치는 방망이를 쥐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서 있으며, 1명은 북채를 잡고 북쪽에 가까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고 서 있고, 1명은 징채를 쥐고 역시 남쪽에 가까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시(時)가 될 때마다 사신(司辰)이 종 맡은 자를 돌아보고, 종 맡은 자는 역시 사신을 돌아보며 종을 치며, 경(更)마다 북 맡은 자가 북을 치고, 점(點)마다 징 맡은 자가 징을 친다. 서로 돌아보는 그 모양은 역시 같고, 경ㆍ점과 징ㆍ북의 수(數)는 항상 같은 법칙이다. 또 그 밑 평지 위에는 12신(神)이 각각 그 자리에 엎드리고, 12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어서 항상 닫혔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쥐 뒤의 구멍이 스스로 열려 옥녀(玉女)가 시패(時牌)를 쥐고 나오며 쥐가 앞에서 일어나고, 자시가 지나면 옥녀가 도로 들어가고 그 구멍이 다시 스스로 닫혀지며 쥐는 도로 엎드린다.
축시(丑時)가 되면 소 뒤의 구멍이 스스로 열려 역시 옥녀가 나오고 소가 역시 일어난다. 12시가 모두 그러한데, 또 오위(午位) 앞에는 대(臺)가 있고, 대 위에는 의기(欹器)가 있으며, 그 북쪽에 관인(官人)이 금병을 쥐고 물을 붓는데, 물시계의 남는 물을 써서 줄줄 계속 흘러 내리게 되어 있다. 의기가 비었을 때엔 기울어지고, 물이 알맞게 차면 반듯하고, 가득차면 엎어져서 모두 옛 사람의 교훈과 같다. 이것의 운용은 오로지 기계가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종을 쳐서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니 그 이름을 ‘흠경(欽敬)’이라 하였다.
○ 흠경각(欽敬閣)이 준공된 것은 무오년 정월 1일 병술이었고, 보루각(報漏閣)은 그보다 앞서 갑인년에 이미 준공되었으므로, 그해 7월 1일 병자부터 비로소 새 물시계를 사용하고, 서운관생(書雲觀生)들에게 번갈아 숙직하고 감독하게 하였다.
○ 김빈(金鑌)이 지은 보루각의 명(銘)에, “음양(陰陽)이 차례로 교대하여 낮과 밤이 엇갈리도다. 천도(天道)는 묵묵히 돌아가고, 지공(地功)은 자취가 없도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도와서 이룩하여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황제(黃帝) 때로부터 창조(創造)하여 시대마다 제도가 달랐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제도가 서툴다가 비로소 큰 제도를 만들었으니 우리 임금의 깊고 총명하심이로다. 옛날에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사용하였고 또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파수호(播水壺)가 네 개이고, 수수호(受水壺)가 두 개이다. 낮과 밤의 교대는 각차(刻差)에 의하여 시작되도다.
여기에 셈대[籌]를 세워 이륙(二六)으로 나타내고, 목탁을 치고 징을 치는 것은 혹 측후가 어긋날까 함이로다. 나무로 신인(神人)을 새겨 만들어 지켜보는 관리가 필요 없도다. 신인을 안치하여 물시계를 살피게 하고, 높은 집을 지었도다. 동쪽 채에는 상하로 자리를 설치하였는데, 위쪽에 3신(神)이 있어 종ㆍ북ㆍ징을 나누어 쥐었네. 닭 대신(代身)으로 신인이 부르짖는데 그 소리가 질서 있도다. 아래 12신은 신패(辰牌)를 가졌는데 편편한 바퀴 면에 둘러서서 차례로 올라오며 시를 알리도다. 그 기계의 움직임은 가운데 집에 징험하도다.
층루로 간격(間隔)을 하여 호(壺)를 서로 연결하였도다. 구리 판자 2개를 만들어서 구멍을 뚫어 살[箭]을 맞추었도다. 기계를 더하여서 탄자를 받게 하여 호 앞에 세웠도다. 살이 올라가서 기계를 움직이니 탄자가 떨어져 구르도다. 신인의 아랫쪽에 탄자 구르는 길이 가로로 비스듬하도다. 두 갈래가 넷이 되니 길이 통한 듯하도다. 통을 좌우로 이어서 탄자가 들어가는 것을 받도다. 통에 기계 구멍이 있어 통ㆍ판자의 수효와 맞추었도다. 특별히 큰 탄자가 있어 통가에 벌였도다. 번갈아 기계를 건드리니 번개처럼 빠르도다. 기계가 닿는 곳에 사신(司辰)이 제 구실을 다하도다. 귀신과도 같으니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도다. 위대하다.
이 넓은 규모여, 하늘에 순응하여 만들었도다. 제도가 조화와 같으니 규모가 틀리지 아니하도다. 이에 짧은 시간도 아껴 써서 여러 가지 공적을 빛내도다.
버드나무를 꺾어 울타리를 만들어도백성이 스스로 의혹하지 아니하도다. 이리하여 표준을 세워 영원히 보여 주도다.” 하였다.
○ 15년에 새 제도의 천문도(天文圖)를 새기었다. ○ 임금이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28수의 거리ㆍ도수 및 12부위(部位)의 궁(宮)에 드나드는 별의 도수를 일일이 《수시력(授時曆)》으로 측후한 바에 의하여 부지런히 새 천문도를 만들어 돌에 새기고, 또 이순지(李純之)에게 명하여 선유(先儒)의 의논과 역대의 제도를 모아 의상(儀象)ㆍ해시계ㆍ물시계ㆍ천문ㆍ역법 등 모든 글을 편찬하게 하였다.
○ 24년에 측우기를 만들었다. ○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들어 ‘측우(測雨)’라 이름하였는데, 길이는 1척 5촌이며, 둘레는 7촌이었다. 대(臺)를 서운관(書雲觀)에 쌓아 놓고 그릇을 그 위에 설치하여 비 온 뒤에는 항상 서운관의 관원들로 하여금 주척(周尺)으로 물 깊이의 분촌을 측량하여 알리게 하고, 측우기 제도와 주척의 양식을 모든 도(道)에 발표하여 여러 읍에 각각 하나씩 만들게 하여 객사(客舍)의 뜰 가운데 두고, 비 온 뒤에는 항상 고을 원이 친히 물 깊이의 분촌을 관찰하여 아뢰게 하였다.
영종조에 세종조의 옛 제도에 의하여 측우기를 만들었다.○ 성종(成宗) 22년에 규표(窺標)를 만들었다. 전교하기를, “요사이 관상감(觀象監) 관원이 경(更)ㆍ점(點)의 시(時)를 실수하여 간혹 사경(四更)에 3번, 삼경에 4번 북을 치니 매우 불가하다. 옛글을 상고하여 보면, ‘아무 시에는 아무 별이 보이고, 아무 별이 아무 곳에 보이면 날이 밝는다.’ 하였으니, 천시(天時)는 자연적으로 그 도수가 있는 것이니, 관상감 제조(提調)와 김응기(金應箕) 등을 시켜 하늘의 운행하는 도수를 참고하여 규표 3개를 만들어 1개는 대궐 안에 들여 놓고, 1개는 승정원에 두고 1개는 홍문관에 두어서, 천시를 측후하여 물시계의 착오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
○ 25년에 영의정 이극배(李克培)에게 명하여 구리를 녹여 소간의(小簡儀)를 만들게 하였는데, 세종조의 소간의에 의거하여 적도단환(赤道單環)과 사유쌍환(四遊雙環)의 직경이 모두 2척이었다.
○ 중종 21년에 관상감이 아뢰기를, “오늘날 모든 의상(儀象)의 기구가 모두 세종조 때에 설치한 것이온데, 별의 위치가 간혹 깎여서 떨어진 데가 있사오니, 수리하기를 바라옵니다. 모든 의상이 모두 단벌이므로 만약 수리하게 될 때에는 다른 측후할 기구가 없사오니 다시 여벌을 만드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윤허하고 명하여 여벌을 만들어 내관상감(內觀象監)에 두게 하였다.
○ 명종 3년에 관상감에 명하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홍문관에 두게 하였다.
○ 임진왜란 때, 서운관에 있는 의상(儀象)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로부터 10년 뒤 신축년에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본국(本局)에 겸임하였을 때에 오래되면 그 제도가 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더니, 우연히 옛 간의(簡儀) 방법을 적은 글과 늙은 공인 2명을 구하여 사각(史閣)의 기록을 참고하여 옛 제도의 회복을 아룄더니 임금이 특히 윤허하였다. 때가 난리 뒤였기 때문에 공사는 크고 힘은 약하여 우선 그 정밀하여 만들기 어려운 누기(漏器)ㆍ간의(簡儀)ㆍ혼상(渾象) 같은 것을 만들어서 뒷사람으로 하여금 제도를 알게 하고, 기타 규표(圭表)ㆍ혼의(渾儀)ㆍ앙부(仰釜)ㆍ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 기구는 함께 만들 겨를이 없었다. 백사중수(白沙重修) 의상(儀象) 서문(序文)
○ 흠경각은 일찍이 선덕(宣德) 갑인년에 경복궁 강녕전 옆에 창건하였었는데, 중도에 불이 나서 타버리고 가정 갑인년에 옛터에 재건하였더니 또다시 병화를 만나고, 만력 갑인년에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다시 지었다. 세종조 때에 만든 일성정시의는 그대로 보존되었었다. 효종 병신년에 흠경각을 헐어버리고 만수전(萬壽殿)을 지었다. 《잠곡집(潛谷集)》
○ 만력 갑인년에 이충(李沖)이 역사를 감독하여 흠경ㆍ보루 두 각을 창덕궁에 세웠다가 뒤에 흠경각은 철폐하여 만수전 터가 되고, 보루각은 지금까지 시강원 동쪽에 있는데, 물시계와 사신목인(司辰木人)이 남아 있으며, 또 지금 관상감은 성종조 때에 지은 것으로 소간의가 남아 있다.
○ 현종(顯宗) 10년에 좨주(祭酒) 송준길(宋浚吉)이 흠경각의 옛 제도를 회복할 것을 아뢰었더니, 임금이 이민철(李敏哲)에게 명하여 《채씨순전주(蔡氏舜典註)》에 의하여 구리를 녹여 혼천의를 만들게 하였다. 혼천의를 만들었으나 내리고 올릴 수가 없어서 실제로 사용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대로 여러 번 수리하여 제정각(齊政閣) 가운데 안치해 놓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부지런하게.” 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정종(正宗) 때 또 서운관 제조 서호수(徐浩修)에게 명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 숙종(肅宗) 13년에 이민철에게 명하여 현종조의 옛 혼천의를 중수해서, 제정각을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세워 안치하게 하였다.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 감독하였다.
○ 34년에 안중태(安重泰)ㆍ이시화(李時華) 등에게 명하여 혼천의의 여벌을 만들게 하였다.
○ 34년에 관상감에서 탕약망(湯若望)의《적도 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올리었다.
○ 영종(英宗) 임자년에, 숙종조 때에 만든 혼천의의 여벌이 오래되어 어긋나므로 임금이 안중태에게 명하여 중수하게 하고, 규정각(揆政閣)을 경희궁(慶熙宮) 옛 경덕궁 흥정당(興政堂) 동쪽에 세워 안치하게 하였다.
○ 태조 을해년에 천문도를 돌에 새겨 경복궁에 두었더니, 오래되어 닳아버렸으므로 숙종 때에 인본(印本)을 구하여 다른 돌에 고쳐 새겨 관상감에 두고 작은 집을 지어 보호하였다. 영종 경인년에 태조 을해년의 구판(舊板)이 경복궁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명하여 관상감에 옮기게 하고, 각을 세워 신판(新板)과 함께 넣어두고 임금이 손수 각 이름을 ‘흠경각’이라 쓰고 또 기문을 지었다.

[주D-001]버드나무를 …… 만들어도 : 《시경(詩經)》동방미명편(東方未明篇)에, “버들을 꺾어 동산에 울타리를 하였다.”는 글귀가 있는데, 이것은 누수(漏水)를 맡은 관리가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풍자하여 변변치 못한 버드나무 울타리에 비유한 것이다.

Cyber World ASANJANG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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