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서울객)
No, 59
이름: bc8937
2006/7/25(화) 23:48 (MSIE6.0,WindowsNT5.1,SV1) 221.139.160.61 1024x768
발해와 말갈  

 

 

 

금사본기 세기

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 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 部,曰安車骨部,曰拂 部 ,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鞨,而七部並 同 .唐初,有黑水靺鞨、粟末靺鞨,其五部無聞.

금 나라의 선조는 말갈씨이다. 말갈은 원래 물길이라고 불렀다. 물길은 옛 숙신의 땅이다. 북위 시대에는 물길에는 7부가 있었다. 속말부, 백돌부, 안차골부, 불녈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라고 한다. 수나라는 말갈이라고 불렀는데 7부가 같았다. 당나라 초에는 흑수 말갈, 속말 말갈이 있었고, 그 5부는 소식이 없다.

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勣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為渤海,稱王,傳十餘世.有文字、禮樂、官府、制度.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속말 말갈은 처음에 고려에 붙었는데, 성은 대씨였다. 이적이 고구려를 파하니, 속말 말갈은 동모산에 보전하였다. 뒤에 발해로 바꾸고, 왕을 칭하여 10여 세를 전하였다. 문자, 예악, 궁부, 제도가 있었다.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黑水靺鞨居肅慎地,東瀕海,南接高麗,亦附于高麗.嘗以兵十五萬#助高麗拒唐太宗,敗于安市.開元中,來朝,置黑水府,以部長為都督、刺史,置長史監之.賜都督姓李氏,名獻誠,領黑水經略使.其後渤海盛強,黑水役屬之,朝貢遂絕.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

흑수 말갈은 숙신의 땅에 살았다. 동에는 바다에 닿았고, 남으로는 고구려를 접하였는데, 또한 고구려에 붙었다. 일찌기 병사 15만으로 고구려를 도와 당태종에게 항거하다가 안시에서 패하였다. 개원 중에 조공을 왔으므로, 흑수부를 설치하고 부장으로 도독, 자사를 두게 하고, 장사를 두어 이를 감독하였다. 도독에게는 이씨 성과 헌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흑수경략사를 명하였으나, 그 뒤로 발해가 강성해져서 흑수는 투항하여 발해에 소속되었고, 마침내 조공이 끊겼다. 5대 시대에는 거란이 발해의 땅을 모두 취하니, 흑수말갈은 거란에 붙어서 소속되었다. 그 남쪽에 있는 자들은 거란에게 적을 올리니 숙여직이라 불렀고, 그 북쪽에 있는 자들은 거란의 호적에 오르지 않았으므로 생여직이라 불렀다. 생여진이 사는 땅은 혼동강, 장백산에 있었는데, 혼동강은 또한 흑룡강이라고도 불렀다. 이른바, 백산과 흑수가 이것이다.

 


말갈의 역사

북위 말갈 7부 --> 수나라 말갈 7부 --> 당나라 초 2부 (속말, 흑수) --> 속말이 발해가 되고 흑수는 이에 저항하다가 발해에 흡수됨. --> 발해가 오대시대 거란에게 멸망. --> 흑수 말갈 남부는 생여진이 되고, 흑수 말갈 북부는 생여진이 됨
--> 생여진이 금을 건국.


요사지리지 東京遼陽府조에 "太祖建國,攻渤海,拔忽汗城,俘其王大諲譔,以為東丹王國,立太子圖欲為人皇王以主之." 즉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을 뽑았을 때, 그 왕인 대인선을 띄워서 동란국왕으로 삼고, (야율아보기의) 태자인 도욕을 인황왕으로 삼아 써 그를 주관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즉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을 당한 뒤 발해 사람들은 동란국이라는 허수아비 정부에 의해 통치되었던 것이다. 동란국의 통치자는 사실상 야율아보기의 맏아들인 인황왕 배였는데, 발해 사람들이 거세게 부흥운동을 전개하자, 거란은 이를 무력 진압한 후, 동란국을 폐하고 발해 사람들은 오늘날의 요동반도로 강제 이주 시켜 버렸다. 즉 속말 말갈 중심의 말갈들은 이제 요동반도로 이주되고, 아주 오지에 살던 흑수말갈들은 그나마 자기 원거주지에 남게 되었는데, 흑수 말갈 중에서도 거란에 영향권 내에 있었던 남부의 흑수 말갈들은 숙여진이 되고, 북쪽 아주 오지에 살던 북부 흑수 말갈들은 생여진이 되었다. 이 가운데 생여진에서 나온 아구타가 금을 건국하였으며, 이들은 숙여진은 물론이고 요동에 이주해 있던 예전 발해 사람들, 즉 속말 말갈 사람들을 모두 합치게 되었다.

금사 본기에 따르면, 생여진은 혼동강(흑룡강)과 장백산이 있는 지역에 산다. 즉, 흑수 말갈의 흑수는 흑룡강이고, 백산 말갈의 백산은 장백산이다. 금을 세운 생여진이 살던 지역은 바로 북위와 수나라 시대의 말갈(물길) 7부가 살던 바로 그곳이다. 북위 시대의 말갈에 대한 북사 말갈전을 참고로 하면, 말갈 7부의 위치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중국의 후대 역사서는 전대의 역사서를 먼저 참고하여 발췌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당시의 사정과 옛날 사정이 혼동될 우려가 있다. 이런 점은 차차 보충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발해와 말갈

---  이상 도원 안상현 블로그  ---

 


bc8937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말갈(靺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靺鞨. 卽勿吉國. 在今松花江以東際海. 混同江以南抵長白山之地. 爲古肅愼. 漢魏 婁舊壤. 北魏始曰勿吉. 北史云. 一名靺鞨. 分七部. 其後互相兼幷. 至唐初僅存黑水粟末二部. 粟末靺鞨自萬世通天以後. 改稱渤海. 黑水靺鞨則女眞之所自出也.
 

말갈은 물길국이다. 지금의 송화강 이남 동해변에 있다. 혼동강 이남 장백산 일대가 그들의 근거지다. 옛 숙신이다. 한(漢), 위(魏) 때의 읍누의 옛 땅이다.

북사(北史)에는 말갈(靺鞨)이라 했다. 7부로 갈라져있었는데, 그후에 서로 합해졌다.

 7부는 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 部)·안차골부(安車骨部)·비황부(沸湟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백산부(白山部)를 말한다.

 당나라 초기에 근근히 흑수속말(黑水粟末) 2부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후 속말말갈은 만세통천(萬世通天:武則天, 695∼697년) 이후에 발해(渤海)로 칭하게 되었다. 흑수말갈에서 여진(女眞)이 생겨났다.  "

 



위키백과

만주어의 물(水)을 뜻하는 무케(muke)의 뜻은  "물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 이라고 한다.

남쪽의 부족은 반농경생활을 했으나 북쪽의 부족은 원시수렵과 어로생활을 했다.

수당(隋唐)시대에는 말갈 또는 흑수말갈, 송(宋)대에는 숙여진(熟女眞), 명(明)대에는 올량합(兀良哈), 명말청초(明末淸初)에는 구만주족(舊滿洲族)이라고 불리었다.

7개 부족이 있어 북으로 흑룡강(黑龍江)에서 남으로 두만강(豆滿江)까지 걸쳐 분포했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복속했다.

 


 


율곤

말갈은 제곡고신氏의 장남인 후직에서 뿌리가 내려져 직신(稷愼)이 되며, 직신은 백신(帛愼) 또는 식신(息愼)이라고도 했고 식신의 후손이 숙신국(肅愼國)을 세우게 된다. 숙신국은 일명 주신(珠申) 이라고도 불렀으며 주신은 만주라는 주자와 음이 같고, 신(愼)은 신(申)자와 같으므로, 만주에 숙신이 거대한 강역을 갖고 있었다고 하여 별칭으로 후일에 주신(珠申)이라는 말이 생겼다. 주신은 별칭일 뿐 나라이름은 아니다.

숙신의 뒤를 이은 것이 읍누( 婁)이며 또한 숙신의 뿌리는 부여(扶餘)로도 갈라지게 되었다. 읍누 다음이 물길(勿吉)이며, 흑수말갈(黑水靺鞨)로 이어지고 말갈이 되며, 여진(女眞)으로 뿌리가 갈라지게된다.

흑수말갈은 해(奚)를 격파한 후, 대조영(大祚榮)에 의해 발해(渤海)를 건국하게 되었다. 숙신의 후예가 부여로 갈라지고, 고구려도 부여에서 갈라져나왔으므로, 따지고보면 고구려도 숙신의 후예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中 만주족


만주족의 조상은 2천여년 전의 숙신(肅愼) 및 이후의 읍루(相婁) · 물길(勿吉) · 말갈(靺鞨)과 여진 등의 고대 민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북조 · 수당 시기에(4~7세기) 숙신 · 읍루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민족 명칭을 물길 · 말갈이라 했다. 물길은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도 신속히 증가하여 수십개의 부락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속말(粟末) · 흑수(黑水) · 백산(白山) 등 7개의 큰 부락연맹이 있었다. 그 후 사서에서는 물길을 다시 말갈이라 불렀다.

7세기 말에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속말 · 말갈을 중심으로 송화강(松花江) 상류,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 '진국(震國)'을 건국한 후 713년에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즉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당왕조는 흑수(黑水: 흑룡강) 말갈 지역에 흑수군(黑水軍)을 조직하고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여, 흑수 말갈 각 부의 수령들에게 도독(都督) ·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 집권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728년에 다시 그 도독들에게 황족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 겸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에 제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된 흑수부는 흑룡강 유역에 세워진 당왕조의 직속 지방기구가 되었다.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 흥성을 거듭하던 흑수 말갈부도 그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발해를 뒤이어 번성을 누린 흑수 말갈을 거란인들이 '여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 이 명칭은 점점 말갈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세기 초엽에 유명한 아골타(阿骨打)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요나라를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들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요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과 대치하였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원(元)을 세우자 여진인들은 원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왕조는 흑룡강성 의란(依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하류 및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풍속으로 다스리는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5만호부(五萬戶府)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뒤에는 흑룡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를 설치하고 계속하여 두 개의 천호부(千戶府)와 한 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하였다.

15세기 초에는 명왕조가 동북지구를 관할하면서 여진의 각 부도 모두 명왕조에 귀속되었다. 명왕조는 여진인의 분포 지역 내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여진 각 부의 수령들을 각각 도독 · 도지휘사(都指揮使) · 지휘첨사(指揮僉使) · 천호(千戶) · 백호(百戶) · 진무(鎭撫) 등의 관직에 임명하고 칙서(勅書) · 인신(印信) · 의관 · 금전을 하사하였으며, 조공과 마시장의 시간과 대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노아간위(奴兒干衛)의 여진 수령 홀자동노(忽刺冬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흑룡강과 항곤하(恒滾河)가 합류하는 특림(特林) 지방에 중앙 왕조 직속의 지방행정과 군사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 한족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명대에 여진인들은 점점 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이동의 과정 중에 그들은 건주(建州) · 해서(海西) · 동해의 3부로 나누었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해서여진은 이주한 후에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살면서 북으로 송화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동해여진(명나라에서는 그들을 야인여진 野人女眞이라고도 불렀음)은 건주 · 해서 이동과 이북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정착한 후에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동해여진은 그러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완만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제 문화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그들 부락 사이의 빈번한 전쟁으로 서로를 침탈하고 살육하는 참혹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였다. 건주여진 좌위(左衛)의 수령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역사적 조류에 부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여진의 각 부를 점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통일 과정 중에 누르하치는 군사적 · 정치적  · 생산적 기능을 갖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은 청대의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되었다.

1616년에 누르하치는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고 금나라(즉 후금 後金)를 세웠다. 여진 각 부의 완전한 통일을 따라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바탕으로 일부의 동해여진과 다른 민족을 흡수한 사람들은 오랜 공동생활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635년에 황태극(皇太極)은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버리고 만주(滿洲)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만족'(滿族: 만주족)이라 칭하게 되었다.
 
 
1635년 황태극은 여진이라는 이름을 '만주'로 고쳤는데, 이것은 만주족의 민족공동체가 정식으로 형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듬해에 황태극은 황제라 칭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만주족 정권인 대청(大淸)을 세웠다.

1644년 청나라는 군대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와 단시간내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청왕조 통치자들은 명나라의 패인을 교훈으로 받아들여 일련의 행정개혁 조치를 취하고 계층간 · 민족간의 갈등을 완화함으로써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1667년 강희제(康熙帝)는 권지(圈地: 공신들이 하사받은 토지)를 폐지하였으며, 부역을 정돈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켜 농업을 장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는 다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의 인구 · 경지면적 · 농업과 수공업은 모두 현저하게 증가되거나 향상되어 자본주의의 기틀이 더욱 많이 다져졌다.

강희제의 집권 중반기에는 대내외적으로 반정부 세력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다. 이에 만주족도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국토수호 전쟁에 참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강희제는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삼번(三藩)'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만주족 중심의 팔기군(八旗軍)을 친히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정러시아와 연합하여 내외몽고를 침공한 갈단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옹정제(雍正帝) · 건륭제(乾隆帝)에 이르기까지 70여년간의 분쟁을 거쳐 즁갈지역을 안정시켰다.

일찍이 17세기 중엽에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흑룡강 유역을 끊임없이 침입하였다. 1685년 강희제는 만주족 도통(都統) 팽춘(彭春)을 파견하여 팔기군과 수군을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였으며, 그 후 1689년 중 · 러 쌍방은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네르친스크(Nerchinsk)조약을 체결하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8세기에 대영제국은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한 후 네팔을 앞세워 티벳 중부지방을 침공하였다. 건륭제는 만주족 대학사 복강안(福康安)을 파견하여 그들을 진압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에 복강안은 티벳지역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네팔군을 격파하고 그곳을 안정시켰다. 19세기 초에 영국은 다시 장격이(張格爾)를 앞세워 여러 차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을 침공하였다. 이에 도광제(道光帝)는 만주족 대학사 장령(張齡)에게 신강 경내의 만주족 · 한족 군대와 동북 팔기군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진압토록 하였다. 이에 장령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장격이를 생포하여 영국의 야욕을 분쇄하였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서구열강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청왕조를 마음대로 유린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이에 중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만주족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2차아편전쟁 중에 제정러시아는 청왕조의 통치력이 북방에까지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100㎢에 달하는 동북변경 지역을 강제점령하였다. 이에 분개한 만주족 주민들은 한족 주민들과 합세하여 제정러시아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용감하게 맞섰다.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일제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였다. 일제가 요동지역을 점령하여 그 세력을 신속히 확장시켜 나가자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주족 · 한족 · 조선족 백성들은 함께 들고 일어나 민간자위단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요양(遼陽) 방어전쟁에서는 만주족과 한족 백성들의 합동작전으로 한달 동안에 일본군의 침공을 네 번이나 물리치고 일제의 봉천성(奉天城) 진입 계획을 무산시켰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 정부였던 청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종말을 고하였다. 1931년 '9 · 18사변'으로 동북지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는데, 이때 청왕조의 마지막황제 부의(溥儀)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에 올라 청왕조와 만주족의 영화를 계승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만주족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사회주의 중국의 민족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



서병국

 

발해국은 고구려의 멸망 후 우리 민족사상 만주대륙에서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해 왔는데도 한동안 잊혀져 왔다. 배타적·독선적인 화이사상(華夷思想)을 맹종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런 화이사상에 대한 맹종을 민족사적 입장에서 비판한 조선의 실학자들은 발해국의 멸망 이래 발해사를 처음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우리의 역사로 복원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후 발해사 연구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가 국권을 일제에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발해사 연구는 일제 어용사가의 몫이었다. 물론 연구 결과는 우리의 기대 밖에 있었다.

한편 중국인은 송나라시대에도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견지하다 보니 그 계승국인 발해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였다. 명나라 역시 별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북방민족(거란·여진·몽골)은 반중국적인 발해국을 문명의 대국으로 평가하면서 그 유민을 대거 관료로 기용했다.

반중국적인 북방민족국가들은 고도의 지식과 교양이 풍부한 발해유민의 협력이 자국의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북방민족국가들이 이들 유민을 기용하지 않았다면 유민사는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유민관련 문헌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이들 문헌은 발해국을 이끈 종족이 누구였는지 미해결 상태의 난제를 푸는데 매우 긴요하다.

발해국이란 국호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발해’란 작은
규모의 바다를 말하는 보통명사이다. 발해국의 중심지인 만주의 동북지방에는 여러 큰 강외에 큰 호수도 있다.

홀한해(경박호), 미타호(지금의 흥개호)가 발해국의 대표적 호수이다.

이 두 호수는 바다처럼 크다보니 당시 사람들은 소규모의 바다를 말하는 발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발해국이란 국호의 의미는‘호수의 국가’라고 해야 맞다.

국호를 이렇게 정한 것은 발해국이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공조로 세워진 관계로 한 특정 종족만의 국가란 인상을 지우려는데서 착안된 것이다.

발해국이란 국호의 의미를 통해 발해국은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공조로 세워진 연합국가였음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이 발해국은 동이인(東夷人)의 국가였음을 지적해 둔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이족·동이지인을 민족 패배적으로 인식해 왔다. 즉 동이족은 동쪽 오랑캐, 동이지인은 동쪽의 오랑캐 사람이라고 이해해왔다.

중국 측의 여러 문헌에도 동이는 동쪽 방면을 말하는 보통명사로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동이족은 동방의 종족이며 동이지인은 동방의 사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발해국의 멸망으로 고구려계 유민은 거란에 의해 요양지방으로강제 이주당했으나 이용가치가 없는 말갈계 사람은 원주지에 그대로 살았다.

그리하여 말갈의 후손인 여진족은 원주지에 그들 민족국가인 금과 청나라를 세웠다.

중국본토를 지배한 청나라의 멸망으로 지금 중국인들은 여진족의 원주지인 만주에서 살고 있다.

고구려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만주의 살아 있는 민족혼의 뿌리가 고구려였음을 아는 지금의 중국인은 만주의 유구한 정신사적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착수한 것이 발해국을 세운 주된 종족을 말갈계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신당서』는 고구려와 그 계승국인 발해국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품었던 송나라 시대에 편찬된 책이다.

송나라 시대에도 강하게 분출된 고구려와 발해국에 대한적대 감정은 지금도 중국인의 혈관을 흐르고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군주가 선두에서 발해국을 배척했듯이 현재는 중국 정부가 언론과 사상의 통제를 통해 역시 발해국을 배척하고 있다. 즉 발해국이 말갈족의 국가라는 것이다.

발해사에 대한 언론 통제의 한 단면을 보면 중국 내의 조선족 역사학자도 정해진 틀 안에서만 발해사를 연구, 발표할 수 있는 암울한 실정이다.

한족 역사가의 배타적 일면을 보면 발해국과 일본의 사신 왕래로 일본에 많이 남아 있는 발해관련 기사는 모두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도 그 기사는 모두 일본이 조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족 역사가의 발해사 연구는 각본을 짜놓고 맞추기식의 연구이므로 참다운 연구가 못된다.

발해국의 종족구성 문제를 다룬 중국의 관찬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구당서』이다.

여기서는 고구려계가 주된 종족으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신당서』가 왜 또 편찬된 것일까?

고구려와 발해국을 북방민족국가로 보는 시대적 판단에 따라 화이사상을 바닥에 깔고서 편찬한 것이『신당서』였다. 그러므로 발해사에 관한 한『신당서』는 어차피『구당서』와 내용상 판이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25사(史)가 관찬사서이므로 군주의 입김이 배제될 수 없다. 더군다나『신당서』는 고구려와 발해국에 대해 중국인이 배타적 태도를 갖도록 만든 문제의 역사서이다.

중국의 역사가는 발해사의 한·중 공동연구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절대 물러서려고 하지 않는 대목은 말갈계가 발해국의 주종족이라는 것이다.

발해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건국의 주종족 문제를 피하고 다른 문제를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주종족 문제를 놓고 정면 대결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렇다고 해서 대결을 피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회방법을 쓰자는 것이다.

발해국의 유민사를 통해 미해결상태의 주종족 문제를 구체적으로 들고 나와야 한다. 『요사(遼史)』와『금사(金史)』를 보면 유민의 모습이 생생하다. 이들은 한결같이 고구려계 또는 동명왕계의 사람으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가는 이들 유민의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 이를 들여다보면 그들로서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 정면 대결함으로써 중국 역사가와의 논쟁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종족문제의 장벽이 높다는 것만 확인했을 따름이 아닌가.

발해국의 유민사 연구는 유민의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면에서 소중할 뿐 아니라 종족문제까지 풀어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종족문제를 시원하게 푸는데 더 이상 좋은 자료는 없다.

고구려사에 이어 발해사까지 중국의 역사로 끌어들이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력화시키는데 기대를 걸 수 있는 마지막 보루는 유민사의 연구방법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이상 발해와 말갈에 관하여 조사해 보았습니다.

말갈이 고구려를 도와 신라를 공격한 것은 연개소문의 용병술과 외교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생각이 들구요. 수 . 당 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지 않고 자주 쳐들어 왔습니다.

 

율곤학회

 

 말갈(靺鞨)과 백제와의 관계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의 북쪽 경계에는 말갈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갈의 전(남북조시대) 이름은 물길이다.
 
삼국사기에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 
기존 역사서 대로라면, 낙랑은 당연히
백제의 북쪽에…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말갈이 백제의 북쪽 국경선과 맞물려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 온조왕 2년의 기록을 보자.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에 맞닿아 있다.
          그들은 용맹하고 속임수가 많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역시, 북쪽 국경선과 접한 말갈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 백제 의자왕 15년의 기록을 보자.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백제와 고구려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 신라본기의,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14년의 기록을 보자.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말갈이 북쪽 경계에 크게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 그런데 수(隋), 당(唐) 시의 지도를 보면, 말갈은 요동 흑수(黑水)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 그리고 각종 정사(正史)에는 고구려의 북쪽에 말갈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살펴보자.

      ★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蓋肅愼之地. 中略. 東至於海. 西接突厥. 南界高麗.』

          말갈은 숙신의 땅에 있다. 중략.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서쪽으로는 돌궐과 접해 있다.
          남쪽 경계에는 고구려가 있다.

      ★ 수서(隋書) 말갈(靺鞨)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靺鞨在高麗之北』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다.

      ※ 그런데 정작 삼국사기 고구려 편에는 말갈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말갈에 대한 기록】

      ▼ 1대 온조왕(溫祚王)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三年秋九月. 靺鞨侵北境.
         八年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十一年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十三年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十八年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二十二年秋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四十年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선에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용맹스럽고 속임수가 많아..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에 침입했다.
         8년 봄 2월. 말갈의 적 3천 명이 위례성을 포위했다.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부수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땅을 침범하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존 역사서에 보면, 낙랑은 평양, 황해도 일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존 역사서 대로라면, 낙랑은 당연히 백제의 북쪽에 있어야할 것이다.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했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웠다.
        22년 가을 9월. 왕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부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갈의 적과 마주쳤다.
        한번 싸워 물리쳤다.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했다. 동 11월에 또다시 부현성을 습격했다.

      
       ▼ 2대 다루왕(多婁王)

          三年冬十月.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四年秋八月. 古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七年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二十八年秋八月. 靺鞨侵北鄙
.

          3년 겨울 10월. 말갈과 마수산 서쪽에서 싸워 이겼다.
          4년 가을 8월. 고목성의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7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공격하여 함락 당했다.
          28년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방을 침입했다.

       ▼ 3대 이루왕(已婁王).

       ★국사 교과서와 국사대사전에는 기루왕(己婁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원본에 의하면, 기(己)자가 아닌 이(已)자였다.

          三十二年 秋七月. 靺鞨入牛谷.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32년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성에 침입했다.
          49년.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아, 글을 보내어 병사를 청하므로,
          왕은 다섯 장군을 보내어 구원하게 했다.

       ▼ 5대 초고왕(肖古王)

          四十五年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 不克.
          四十九年.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45년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을 침공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49년.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날랜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와
          술천성까지 이르렀다.
 
      ▼ 6대 구수왕(仇首王)

          三年秋八月. 靺鞨來圍赤峴城
          七年冬十月. 靺鞨寇北邊. 遣兵拒之.
          十六年十一月. 靺鞨入牛谷界.

          3년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을 포위했다.
          7년 겨울 10월. 말갈의 도적이 북쪽 변방에 침입하므로, 병사를 보내어 방어했다.
          16년 11월. 말갈이 우곡성 경계에 침입했다.
  
       ▼ 8대 고이왕(古爾王)

          二十五年春. 靺鞨長羅渴. 獻良馬十匹
        
          25년 봄. 말갈의 추장 나갈이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 16대 진사왕(辰斯王)

         三年秋九月. 與靺鞨關彌嶺. 不捷
         七年夏四月. 靺鞨攻陷北鄙 赤峴城.

        
         3년 가을 9월.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7년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경계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 25대 무령왕(武寧王)

          三年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古木城.
          六年秋七月.靺鞨來侵. 破古木城.
          七年夏五月. 立二柵於古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
          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戰退之.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불사르고, 진격하여 고목성을 공격했다.
         6년 가을 7월.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쳤다.
         7년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2개의 성책을 세우고, 장령성을 쌓아 말갈을 방비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모의하여 한성을 치려고 진격하여 횡악 하에 주둔했다.
         왕이 병사를 출전시켜 물리쳤다.

       ▼ 31대 의자왕(義慈王)

         十五年 八月. 王與高句麗靺鞨侵攻破新羅三十餘城.

         15년 8월. 의자왕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다.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侵我北界. 沒三十餘城.

         신라왕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리기를,
         백제와 고구려 말갈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노성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존속기간 동안 부단없이 말갈의 침입을 받게 된다.

 


  백제 온조왕(溫祚王) 때의 기록을 보자.

    

    二年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三年秋九月. 靺鞨侵北境.

    八年春二月. 靺鞨賊三千 來圍慰禮城

    十一年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十三年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十八年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二十二年秋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四十年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말갈은 우리의 북쪽 경계선에 연이어 있는데,

사람들이 용맹스럽고 속임수가 많아...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에 침입했다.

  8년 봄 2월. 말갈의 적 3천 명이 위례성을 포위했다.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을 습격하여 부수었다.

  13년 여름 5월. 왕이 신하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번갈아 우리 땅을 침범하므로...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엄습했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칠중하에서 맞아 싸웠다.

  22년 가을 9월. 왕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부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말갈의 적과 마주쳤다. 한번 싸워 물리쳤다.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했다. 동 11월에 또다시 부현성을 습격했다.

 

 

다음은 신라 6대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때의 기록이다.

 

  十四年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拉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14년 봄 정월. 말갈이 대거 북쪽 경계로 쳐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또다시 대령책을 습격하고 이하(泥河)를 지났다. 왕이 백제에 글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가 말갈의 침입을 받았던 이하(泥河), 그리고 백제 초기 도읍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 있던 산서성 안읍과 하현의 북쪽 일대.

안읍(安邑)의 위쪽으로 말갈이 자주 침입했던 신라의 하슬라(명주) 지방이었던 임분(臨汾)이 위치하고 있다.

 

 

  그럼 말갈(靺鞨)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제곡고신씨(帝 高辛氏)의 장남이 후직(后稷)이다. 후직은 요왕검(堯王儉, B.C.2357년)의 큰 형님이다.  후직에서 뿌리가 내려져 직신(稷愼)이 되며,  직신은 백신(帛愼) 또는 식신(息愼)이라고도 했다. 식신의 후손이 숙신국(肅愼國)을 세운다. 숙신국은 일명 주신(珠申)이라고도 불렀다. 주신은 만주라는 주자와 음이 같고, 신(愼)은 신(申)자와 같으므로, 만주에 숙신이 거대한 강역을 갖고 있었다고 하여 별칭으로 후일에 주신(珠申)이라는 말이 생겼다. 주신은 별칭일 뿐 나라이름은 아니다.

 숙신의 뒤를 이은 것이 읍누( 婁)이다. 또한 숙신의 뿌리는 부여(扶餘)로도 갈라지게 된다.

 읍누 다음이 물길(勿吉)이며, 흑수말갈(黑水靺鞨)로 이어진다. 후일 말갈이 되며, 여진(女眞)으로 뿌리가 갈라진다.

흑수말갈은 해(奚)를 격파한 후, 대조영(大祚榮)에 발해(渤海)를 건국하게 된다.  숙신의 후예가 부여로 갈라지고, 고구려도 부여에서 갈라져나왔으므로, 따지고보면 고구려도 숙신의 후예다.

 

  복초최인(伏草崔仁)의 저서「韓國의 再發見」이란 책에 의하면, 숙신(肅愼)은 한(漢)나라 때 삼한(三韓)이 되고, 위(魏)나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국시대(B.C.291년경) 무렵에는 대륙의 중심부, 서안과 낙양 일대 즉 한수(漢水)유역을 삼한(三韓)과 위(魏)가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말갈(靺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靺鞨. 卽勿吉國. 在今松花江以東際海. 混同江以南抵長白山之地. 爲古肅愼. 漢魏 婁舊壤. 北魏始曰勿吉. 北史云. 一名靺鞨. 分七部. 其後互相兼幷. 至唐初僅存黑水粟末二部. 粟末靺鞨自萬世通天以後. 改稱渤海. 黑水靺鞨則女眞之所自出也.

 

말갈은 물길국이다. 지금의 송화강 이남 동해변에 있다. 혼동강 이남 장백산 일대가 그들의 근거지다. 옛 숙신이다. 한(漢), 위(魏) 때의 읍누의 옛 땅이다.

북사(北史)에는 말갈(靺鞨)이라 했다. 7부로 갈라져있었는데, 그후에 서로 합해졌다.

 7부는 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 部)·안차골부(安車骨部)·비황부(沸湟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백산부(白山部)를 말한다.

 당나라 초기에 근근히 흑수속말(黑水粟末) 2부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후 속말말갈은 만세통천(萬世通天:武則天, 695∼697년) 이후에 발해(渤海)로 칭해지게 되었다. 흑수말갈에서 여진(女眞)이 생겨났다.


당나라 초기의 말갈 위치.

흑수속말(黑水粟末) 2부로 명맥을 유지하며, 지금의 위치로 밀려나게 되었다.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