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bc8937
2006/9/9(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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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_걸고_상소한_정추와_이존오(鄭李上疏).gif (465KB, DN:294)
석탄집(石灘集)  

 

 
 석탄집 ( 石灘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石灘集
판심제  石灘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26年刊
권책  2권 1책
행자  10행 16자
규격  22.5×20.8(㎝)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811.96-이존오-석-판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6
 
 저자
성명  이존오(李存吾)
생년  1341년(고려 충혜왕 복위 2)
몰년  1371년(공민왕 20)
 順卿
 石灘, 孤山
본관  慶州
 
 가계도
 李孫寶
 掌令
 
 李吉祥
 司宰寺丞
 
 溫陽方氏
 大提學 方曙의 女
 
 李養吾
 
 李來(初名은 李安國)
 右諫議
 
 
 李存吾
 
 
 
 李存斯
 
 
 李存中
 
 


기사전거 : 榜目 및 文集ㆍ高麗史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충혜왕 복위 2 1341 신사 至正 1 1 태어나다.
충정왕 2 1350 경인 至正 10 10 十二徒에 입학하여 학업을 익히다. ○ 驪州에 있는 孤山을 유람하고 〈江漲〉 詩를 짓다.
공민왕 9 1360 경자 至正 20 20 國子進士로서 新京(江華)에서 실시한 東堂文科에 급제하여 水原書記가 되다.
공민왕 11 1362 임인 至正 22 22 史翰에 選補되어 정몽주ㆍ박상충ㆍ이숭인ㆍ정도전ㆍ김구용 등과 교유하며 강론하다.
공민왕 12 1363 계묘 至正 23 23 果川에서 松京으로 돌아오며 〈還朝〉 시를 짓다.
공민왕 13 1364 갑진 至正 24 24 監察糾正으로 옮기다. ○ 〈送李副令使浙江〉 시를 짓다.
공민왕 15 1366 병오 至正 26 26 右正言이 되다. ○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여 長沙(茂長)縣監務로 폄직되다.
공민왕 17 1368 무신 洪武 1 28 長沙에서 放還되어 공주 石灘에 우거하다. 이에 ‘石灘’으로 자호를 삼다. ○ 〈石灘行〉을 짓다.
공민왕 20 1371 신해 洪武 4 31 5월 12일, 신돈의 用事에 대한 울화로 병이 되어 寓舍에서 졸하다. ○ 開城 大德山 樂師院 북쪽에 장사 지내다.
조선조 ~ ~ ~ ~ ~ - 判三司 大司成 鷄林君에 추증되다.
선조 8 1572 을해 萬曆 3 - 顯義祠(부여)를 창건하다.(義烈祠로 宣額)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 忠賢祠(茂長)를 창건하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 孔巖書院(공주)을 창건하다.(忠賢書院으로 命額)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 驪州에 祠宇를 창건하다.(孤山書院으로 賜額)
경종 1 1721 신축 康熙 60 - 肅宗이 지은 〈先生忠節贊〉이 「列聖御製」에 포함되어 간행되다.
영조 2 1726 병오 雍正 4 - 10세손 李裕慶이 유고를 수집편차하여 蔚珍에서 문집을 초간하다.(李裕慶의 跋)
영조 10 1734 갑인 雍正 12 - 〈補遺〉 1편을 追刻하여 문집을 중간하다.(11세손 李行敏의 跋)


기사전거 : 年譜(10세손 李裕慶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사후에 모두 산실되어 임란이후로는 가문에서조차 隻字의 유고도 전해지지 못하였다. 이에 10세손 李裕慶이 守廬하는 여가에 널리 문헌을 조사하여 저자의 시문을 모아 「遺藁」를 편차하였다. 또한 저자의 年譜를 지어 붙이고, 諸人의 稱述 중에서 긴요한 사실을 뽑아 附錄을 엮었다. 이때 호남 督郵인 堂姪 李行敏에게 주어 간행하도록 하였으나 마침 蔚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곧 바로 간행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1726년 蔚珍 任所에서 堂弟 李行喆ㆍ李行百의 도움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그러나 이 초간본은 부록이 소략하였으므로 1734년(영조 10) 李行敏이 固城縣監으로 부임하여 〈補遺〉 1편을 증보하여 追刻後刷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澗松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34년에 간행된 추각후쇄본으로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다만 凡例와 御製贊의 경우는 초간시의 舊凡例와 御製贊이 함께 合編되어 중복되었으므로 제외하였고, 〈榜目〉과 〈孤山書院賜額祭文〉은 착간이 인정되므로 附錄目錄에 따라 順次를 바로잡았으며, 落張된 刊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장본(D3B-1322)에서 補完하였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上ㆍ下 2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상권에는 저자의 遺藁, 하권에는 〈附錄〉 및 〈附錄補遺〉가 실려 있다.
권수에는 肅宗이 지은 〈忠節贊〉, 凡例ㆍ世系ㆍ年譜(10세손 李裕慶 撰)가 실려 있다. 凡例에서는 本集의 체제와 편집방향을 밝혔고, 世系는 목차에만 편차되었을 뿐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상권은 저자의 遺藁로서 11題(12수)의 시와 1편의 상소문이 실려 있다. 시는 10세에 驪州를 유람하며 지은 〈江漲〉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東文選」에 실려 있다. 시체별로는 칠언율시 2제, 칠언절구 7제와, 28세 시에 長沙에서 放還된 후 공주 石灘에 우거하며 지은 〈石灘行〉 1제이다. 상소는 공민왕 15년 殿內에 설치한 文殊會에서의 신돈의 不敬을 탄핵하는 내용의 〈論辛旽疏〉이다. 그리고 상권 끝에는 肅宗大王御製贊과 再刊 시에 개정된 凡例가 실려 있으나, 어제찬과 초간 시의 범례는 중복되었으므로 제외하였다.
하권인 〈附錄〉에는 孤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던 저자의 傳記인 〈李長沙傳〉과 「麗史提綱」에서 뽑은 관계 기록 및 諸人이 稱述한 시, 그리고 〈榜目〉ㆍ〈賜額祭文〉이 실려 있다. 榜目은 공민왕 9년 강화에서 東堂급제 시의 것이며, 〈賜額祭文〉은 1708년 숙종이 孤山書院에 내린 제문이다.
〈附錄補遺〉는 본집이 초간되고 나서 8년 뒤인 1734년에 후손 李行敏이 固城현감 시에 補遺한 것으로서 李珥가 지은 〈 顯義祠記〉와 〈義烈祠賜額行移〉, 그리고 1679년 趙錫周가 지은 〈孤山祠上樑文〉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1726년 초간 시에 10세손 李裕慶이 쓴 後記와 11세손 李行敏의 跋文, 그리고 1734년 追刻하여 간행할 때에 쓴 李行敏의 附識가 첨부되어 있다. 이어 ‘丙午之冬蔚珍開刊’이란 초간시의 刊記가 함께 실려 있다.

필자 : 辛容南

 

 

 

 


 

한자가 어려우신 분을 위해 ...

 

저자의 시문은 사후에 모두 산실되어 임란이후로는 가문에서조차 척자의 유고도 전해지지 못하였다. 이에 10세손 이유경이 수려하는 여가에 널리 문헌을 조사하여 저자의 시문을 모아 「유고」를 편차하였다. 또한 저자의 연보를 지어 붙이고, 제인의 칭술 중에서 긴요한 사실을 뽑아 부록을 엮었다. 이때 호남 독우인 당질 이행민에게 주어 간행하도록 하였으나 마침 울진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곧 바로 간행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1726년 울진 임소에서 당제 이행철ㆍ이행백의 도움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그러나 이 초간본은 부록이 소략하였으므로 1734년(영조 10) 이행민이 고성현감으로 부임하여 〈보유〉 1편을 증보하여 추각후쇄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34년에 간행된 추각후쇄본으로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다만 범례와 어제찬의 경우는 초간시의 구범례와 어제찬이 함께 합편되어 중복되었으므로 제외하였고, 〈방목〉과 〈고산서원사액제문〉은 착간이 인정되므로 부록목록에 따라 순차를 바로잡았으며, 낙장된 간기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장본(D3B-1322)에서 보완하였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상ㆍ하 2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상권에는 저자의 유고, 하권에는 〈부록〉 및 〈부록보유〉가 실려 있다.
권수에는 숙종이 지은 〈충절찬〉, 범례ㆍ세계ㆍ연보(10세손 이유경 찬)가 실려 있다. 범례에서는 본집의 체제와 편집방향을 밝혔고, 세계는 목차에만 편차되었을 뿐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상권은 저자의 유고로서 11제(12수)의 시와 1편의 상소문이 실려 있다. 시는 10세에 여주를 유람하며 지은 〈강창〉 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문선」에 실려 있다. 시체별로는 칠언율시 2제, 칠언절구 7제와, 28세 시에 장사에서 방환된 후 공주 석탄에 우거하며 지은 〈석탄행〉 1제이다. 상소는 공민왕 15년 전내에 설치한 문수회에서의 신돈의 불경을 탄핵하는 내용의 〈논신돈소〉이다. 그리고 상권 끝에는 숙종대왕어제찬과 재간 시에 개정된 범례가 실려 있으나, 어제찬과 초간 시의 범례는 중복되었으므로 제외하였다.
하권인 〈부록〉에는 고산서원에 소장되어 있던 저자의 전기인 〈이장사전〉과 「여사제강」에서 뽑은 관계 기록 및 제인이 칭술한 시, 그리고 〈방목〉ㆍ〈사액제문〉이 실려 있다. 방목은 공민왕 9년 강화에서 동당급제 시의 것이며, 〈사액제문〉은 1708년 숙종이 고산서원에 내린 제문이다.
〈부록보유〉는 본집이 초간되고 나서 8년 뒤인 1734년에 후손 이행민이 고성현감 시에 보유한 것으로서 이이가 지은 〈 현의사기〉와 〈의열사사액행이〉, 그리고 1679년 조석주가 지은 〈고산사상량문〉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1726년 초간 시에 10세손 이유경이 쓴 후기와 11세손 이행민의 발문, 그리고 1734년 추각하여 간행할 때에 쓴 이행민의 부식가 첨부되어 있다. 이어 ‘병오지동울진개간’이란 초간시의 간기가 함께 실려 있다.

필자 : 신용남

 


 

石灘先生祀壇碑銘譯文(석탄선생 사단비명 역문) 
 
 
 
아! 선생은 뛰어난 기운을 타고난 인물이다.

평생의 志節(지절)을 보건대 烈日秋霜(열일 추상)보다도 凜凜(늠늠)하고 泰山喬嶽(태산교악)보다도 높으니, 하늘이 선생을 낳게 한 것이 우연치 않은 것이다.

高麗末期(고려말기)에 國政(국정)이 문란하여 요망한 辛旽(신돈)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니 선생과 같은 直道(직도)가 어찌 협박을 당하고 夭死(요사)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高麗 五百年 諫官(간관) 중에 제일가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고 알게 된 것이다.

先生(선생)은 慶州李氏(경주이씨)니 新羅(신라) 佐命大臣(좌명대신) 휘 謁平(알평)으로 始祖(시조)를 삼고 휘 淑眞(숙진)은 尙書中丞(상서중승)이요, 휘 芮(예)는 監察糾正(감찰규정)이요,

휘 孫寶(손보)는 掌令(장령)이요, 휘 吉祥(길상)은 司宰監丞(사재감승)이니, 이분들은 高祖(고조), 曾祖(증조) ,祖考(조고)와 및 先考(선고)이다.

婦(부)는 溫陽方氏(온양방씨) 이니 版圖判書(판도판서) 大提學(대제학) 曙(서)의 따님이다.

先生(선생)이 忠惠王(충혜왕) 2년 辛巳1341年(신사1341년)에 出生(출생)했으니  휘는 存吾(존오)요 字(자)는 順卿(순경), 號(호)는 石灘(석탄)이다.

자품이 단정하고 결백하며 간고하고 진중하였다.

어버이를 일찍 여의고 학문에 힘썼는데 어릴 때에 驪州孤山(여주고산:여주 山名)에 우거했다.

十二徒(도)에 나아가 강물이 붓는 시를 지었는데 「젋은 들판이  모두 물 속에 잠겼는데 고산만은 의연하게 홀로 우뚝 서있네」라는 글귀가 있으니 아는 이들이 훌륭하게 여기었다.

恭愍王(공민왕)9년 庚子1360年(경자1360년)에 國子進士(국자진사)로써 文科(문과)에 급제하고 史翰(사한)에 보직 되어 圃隱 鄭夢周(포은 정몽주),陶隱 李崇仁(도은 이숭인), 潘南 朴尙衷(반남 박상충) 제현으로 더불어 서로 좋아하여 강론 하기를 빈 날이 없으니 대개  圃隱(포은)은 선생보다  네살이 위이고 선생과 같은 과거에 급제했다.

병오년에 右正言(우정언)이 되었는데 이때에 辛旽(신돈)이 국권을 잡아 능멸하고 참람되어 괘도에 벗어났다.

恭愍王(공민왕)이 아들이 없어 德豊君 義(덕풍군 의)와 右常侍 安克仁(우상시 안극인)의 딸을 선택하여 王妃(왕비)를 삼고 辛旽(신돈과 함께 참관 하는데  辛旽(신돈)이 높은 의자에 버젓이 않아 있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은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드디어 상소문을 초잡아 서울에 올라가  同僚(동료)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요망 스런 물건이 나라를 그릇치고 있으니 제거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니 여러 郞官(낭관)들이 두려워 하고 움추리어 감히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선생이 그 인척 左司諫 鄭樞(좌사간 정추)에게 말하되 『형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하니 鄭樞(정추)가 따랐다.

上疎文(상소문)이 올라가자  王이 크게 성을내어 불사르라 명하고 선생을 불러 꾸짖는데 이때에 辛旽(신돈)이 왕으로 더불어 의자를 마주하여 앉아 있었다.

선생이 눈을 부릅뜨고 辛旽(신돈)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처럼 무례한고』 하니  辛旽(신돈)이 깜짝 놀래어 부지중에 의자에서 내려오니 왕은 더욱 성을내어 선생과 및 鄭樞(정추)를 巡軍獄(순군옥)에 가두고 贊成事 李春富(찬성사 이춘부), 密直副使 金蘭(밀직부사  김란),  簽書密直 李穡(첨서밀직 이색),  同知密直 金達祥(동지밀직 김달상)을 명하여 국문하라 하고 이에 좌우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그 성낸 눈이 두렵다.』 했다.

春富(춘부)등이 선생에게 이르기를『네가 이직 젓내나는 童子(동자)로 어찌 자발적으로 알았을까?  반드시 몰레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니 숨김없이 고백하라!』하니 선생이 말하기를『국가에서 무지한 동자로 諫官(간관)에 두지 않았으니 감히 말하지 않고서 국가를 저 버릴 수가 있으랴』하니 선생이 이때에 나이 26세였다.

이에 牧隱 李先生(목은 이선생)이  孝春富(효춘부)를 조절하여 극력 신구하므로 드디어 長沙監務(장사감무)로 폄직하니 나라 사람들이 말 하기를『참된 正言(정언)』이라 하였다.

戊申年(무신년)에 公州(공주)의 石灘(석탄)으로 퇴거하여 호를 삼고 石灘(석탄)의 노래를 지었다. 이로부터 言路(언로)가 막히고 辛旽(신돈)은 더욱 사납고 날뛰었다.

선생이 근심하고 분개하여 병환이 위독 하였다.  左右로 하여금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 하기를『辛旽(신돈)이 아직도 치열한가?  辛旽(신돈)이 망해야 나도 망한다.』하고 易簧(역황:스승이나 훌륭한 이가 죽음을 뜻함)에 이르니  이같이 하기를 두어번 하였다.

恭愍王(공민왕) 辛亥年(1371년) 5月 12日에 돌아가니  나이가 겨우 31세였다. 돌아간지 석달만에 辛旽(신돈)이 베임을 당했다.

王이 그 충성을 생각하여 成均館 大司成(성균관 대사성)을 증직하고  國朝[李朝](국조[이조])에 들어와서 자제 景節公(경절공)의 귀하므로  資憲大夫 鷄林君(자헌대부 계림군)을 추증 했다.

墓所(묘소)는 長湍 大德山 子坐原(장단 대덕산 자좌원)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 되었다.  書院(서원)과 祠宇(사우)에 배향된 곳으로는 扶餘(부여)에 義烈祠(의열사)와 公州 孔巖(공주 공암)에 忠賢書院 (충현서원) 茂長(무장)에 忠賢祠(충현사)와 驪州(여주)의 孤山書院(고산서원)이요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임군의 그롤 칭찬하며 사기에 大書特書와 名人(명인)들이 지은 詩(시)가  아 !  또한  성대 하도다.

아! 선생의 바른 학문과 곧은 기운, 곧은 충성,큰 절개는 진실로 千古(천고)에 등대할이가 드문데 운명이 곤궁하고 시대에 맞지 않았으며 하늘이 빼앗기를 빨리하여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세대를 의논하며 그 덕행을 상고하여 보면 거듭 탄식할 일이다.

高麗(고려)가 이미 망하고 太祖(태조)가 혁명하매 儒學(유학)을 숭상하고 佛敎(불교)를 배척하여 집집마다 忠義(충의)를 세우고 호호마다 節烈(절열)을 일삼아 빛나는 정치와 교화가 실상 선생이 의논한 바에 암합함이 잇으니 선생의 도가 비록 한때에는 굴했으나 萬代(만대)에 펴게된 것이다.

傳(中庸)에 이르기를『國家(국가)가 장차 흥왕하매 반드시 상서로운 일이 있다.』하였으니 선생을 일컬음인가? 

先生의 孝友(효우)가 천성에서 우러났는데 伯氏가 일찍이 도적에게 살해를 당했다. 뒤늦게 들어 알고 즉시 분상하여 장사를 지내려 하니  시체가 이미 백골이 되어서 알 수가 없는데 선생이 백씨의 손가락이여섯이므로 찾아 장사 지내고 드디어 관에 알리어 그 도적을 다 제거하였다.

배위는 驪興閔氏(여흥민씨)니 版圖判書 璿(판도판서 선)의 따님이고 묘소는 또한 전하지 못 하였다. 二男一女를 낳았으니 맏이는 즉,景節公 來(경절공 래)니 辛禑王(신우왕) 九年에 太宗(태종)으로 더불어 같은 과거에 급제 하였으며 뒤에 佐命功臣(좌명공신)에 참여하고 벼슬이 兵曹判書 藝文館大提學 集賢殿大提學 兼世子左寶客(병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집현전 대제학 겸세자좌보객)에 이르렀으며 太宗廟庭(태종묘정)에 배향했다.

다음자제 採(채)는 御史監丞(어사감승)인데 叔父 存中(숙부 존중)에게 出系(출계)했다.

딸은 權近(권근)에게 시집 갔다. 손자와 증손은 기록하지 않는다.

묘연한 나 후생이 동종의 후손으로 선생을 깊이 앙모 했더니 하루는 여러 후손들이 묘소를 실전함으로 한을 삼아 廣州(광주)의 景節公 墓山(경절공 묘산)에다 부인과 함께 단을 만들고 제향을 올리어 추모하는 정성을 펴니 실상 옛 사람의 묘소를 바라보고 설단하는 예를 따른 것이다. 

일을 이미 마무리 하매 종손 鍾岳(종악)이 그 아우 鍾岱(종대)와 族弟 鍾哲(족제 종철)로 하여금 나에게 비석에 기록할 것을 요구 하면서 이르기를『이런등의 문자를 지금 세상에 가히 더불어 상의할 곳이 없을뿐더러 자네는 文憲公 草盧先生(문헌공 초노선생)의 후손인즉 종족의 의가 자별하니 그대를 놓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 청함이 더욱 간곡함으로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그 사적이 文集(문집)과 國史 家牒(국사 가첩)에 기재된 것을 간추려 上과 같이 서술하고 銘(명)으로 이으니 銘(명)에 이르되  高麗 末(고려 말)에 忠賢(충현)은 선생이 우뚝 하였으니, 밝기는 日月과 같고 높기는 山岳(산악)과 같았네. 요망스런 중이 국권을 주름 잡으니 나라는 하나인데 임금은 둘이네. 선생이 통쾌하게 배척하니 상소로 항쟁하고 성낸 눈이로다.  買誼(매의)는 長沙(장사)에서 굴하였고 薺望之(제만지)는 감옥에 갇혔네. 물러와 감추었으니 여울 물소리 들리는 곳이었네.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니, 병은 이에 따라 위독 하였네. 辛旽(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는다 말 하였으니, 누구인들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요. 자자하게 口碑(구비)를 이루었고 빛나고 빛나게 사기에 실렸네. 정문을 세워 풍교를 심었고, 祠宇(사우)를 지어 제향을 올리었네. 굴하면 펴지고 가면 오는 것이니 이치가 어찌 어긋남이 있으리요  요소가 실전되었으니 세대는 요원하고 한은 극진 하였네.  단소를 모으고 비석을 세우니 武甲(무갑)의 기슭이네. 제수를 정성으로 받들어 千億年(천억년)을 내려가리라.


 
石灘公 李存吾(석탄공 이존오)선생소개

이존오 선생은 경주 이씨요,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라 한다. 선생은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성격이 곧고 지조가 강한 분으로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 하였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정은 가난하여 고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나이 열살때에는 한시를 지어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가장 젊은 나이로 당시 유명한 학자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정도전. 김구용. 김제안 선생들과 친교가 두텁고 학문이 장하여 여러 차례 강론을 거듭하여 세상 사람들은 선생의 학문이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다.

선생은 1360년 공민황 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수원서기를 거쳐 사한(史翰)에 보직되고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오르며, 서기 1366년 공민왕 15년 25세 때에는 사간원 우정언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은 옥천사에 사는 중 신 돈을 가장 높은 벼슬에 기용하였다. 신 돈은 왕에게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고 한 사람의 독재로 정치를 제멋대로 행하였다.

그 후 갖은 학정을 다하여 세상은 어지럽고 나라는 점차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돈의 횡포와 세도에 눌려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선생만이 일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귀중한 생명을 초개와 같이 여겨 죽음을 각오하고, 정 추라는 사람과 더불어 신 돈은 요물이라 나라를 망치니 그냥 두어서는 아니되므로 이를 당장에 파면하고 그의 일당을 모조리 엄중히 처단하라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를 받아 본 공민왕은 대노하고 상소문을 다 보지도 않은 채 불사르고 서생을 극형에 처하려고 즉시 문책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왕이 불러서 애궐에 들어가 보니 신 돈은 여전히 신하로서 예절을 무시하고 오만하게 왕과 같이 앉아 친구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선생은 의분심에 노기가 충천하여 왕 앞에서 당당하게 [이 늙은 중놈아! 어찌 이 같은 망령된 일을 하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신돈은 그 순간 놀라서 겁을 먹고 왕과 같이 앉은 자리에서 내려 앉을 것도 잊은 채 정신 없이고개를 돌렸다 한다. 왕은 곧 선생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왕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이존오의 눈씨가 몹시 무섭다.]고 하였다 한다. 왕은 선생을 극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한산 이씨 이목은 (李牧隱)선생께서 극구 변론하기를, 고려 나라는 창건한지 500년이 넘어도 한 사람도 간관(諫官)을 죽인 일은 없다. 만일 죽이면 왕의 악평이 나라 안에 퍼지리라 하였다.

왕은 할 수 없이 선생을 장사감무(長沙監務)라는 벼슬에 좌천시켰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진정 나라의 정언(正言)이라 칭송하였다.

그후 선생은 왕이 끝까지 신 돈을 파면하지 않고, 여전히 정계에서 포악한 정치를 계속하여 나라는 날로 쇠퇴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유리방황하니, 심히 개탄한 나머지 용감하게 퇴관하고 지금의 부여읍 저석리에 내려와 은거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신 돈의 포악한 정치를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마침내 원통하고 울분하여 병이 났다. 병은 날로 더욱 심하여 위독한데, 하루는 선생이 묻기를 [군자에도 신 돈의 세력은 여전하냐?]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과연 그렇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선생은 노기 띤 어조로 [신 돈이가 죽어야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다시 자리에 편안하게 눕기도 전에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선생의 나이 31세이다. 그 후 나라에서는 선생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성균관 대사성을 추증 하였고, 선생의 아들 내(來)가 열살 이었을 때 공민왕(恭愍王)이 친필로 "간신(諫臣)의 아들 안국"이라 크게 써서 장차직장 (掌車直長)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한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넉 달만에 신 돈은 갖은 음탕과 포악한 정치를 계속하고 나중에는 왕에게반역하려 하다가 공민왕이 이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선생은 천하에 드문 수재로서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한 몸에 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채 당당하게 싸우며 끝까지 절개를 지켰으니 몸은가셨으나 이름은 천추에 빛나리니 후세의 귀감이 되기에 넉넉하다.

선생은 여주(驪州)의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무장(茂長)의 충현사(忠顯祠), 공주의 공암서원 (孔岩書院)에 모시어 고이 잠들었다.

 

선생의 시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이 무심하단 말이 아마도 허황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조선왕조실록

중종 13년 무인(1518, 정덕 13)
6월 6일(갑술) 
고려 말 이존오의 절의를 포장하는 충청도 관찰사 이세응의 장계

충청도 관찰사 이세응(李世應)이 장계(狀啓)하기를,
“신이 생각하옵건대, 전조(前朝) 고려(高麗)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는 천성이 충의(忠義)를 타고났고 마음이 맑고 곧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고려 말기를 만났을 때는 요승(妖僧) 신돈(辛旽)이 임금의 권세를 빙자하여 제멋대로 방자한 짓을 하는데도 상하 모두 두려워하며 감히 어떻게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이존오가 능히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죽기로써 항쟁하여 눈을 부릅뜨고 신돈을 질책하였습니다. 존오의 이러한 정의(精義)에 격동되어 신돈은 그만 기가 꺾이어 자기도 모르게 평상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현릉(玄陵)이 살피지 못하여 그는 결국 찬축을 당하였는데, 얼마 후에 용서를 받고 석탄(石灘)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와 지냈습니다. 석탄은 지금 공주(公州) 주치(州治)의 서쪽, 부여(扶餘) 동쪽 경계에 있는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도 실려 있습니다.
그가 임종할 때에는 분을 이기지 못해 병이 되었고, 그리하여 걸핏하면 일어나서 외치기를 ‘돈(旽)이 아직도 날뛰고 있는가?’ 하였습니다. 시자(侍者)가 답하기를 ‘아직도 날뛰고 있다.’ 하니, 그는 ‘돈이 죽어야 내가 죽는다. 나는 죽은 뒤라야 그만두겠다.’ 하였는데, 그의 뜻은 대개 공민왕(恭愍王)이 역적 신돈에게 고혹(蠱惑)되어 나라가 장차 위태롭게 되었으므로, 그는 자기 한 몸의 사생(死生)을 나라의 존망(存亡)과 같은 것으로 보고, 돈이 죽어야 나라가 사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충성과 의열(義烈)은 참으로 천고에 우뚝솟아, 위로는 일월(日月)과 겨룰 만하였고 아래로는 족히 만세(萬世) 신자(臣子)의 의열(義烈)을 격발(激發)할 만하였습니다. 공민왕도 뒤에 깨달아서 그에게 벼슬을 증직(贈職)하고 포상을 하였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특별히 포창하여 절의를 장려해야 할 것인데, 아직도 그것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입니다. 이존오(李存吾)의 유허(遺墟)는 지금도 석탄(石灘) 옆에 있으나 형적이 없어지고 잡풀이 우거져서 찾아볼 만한 자취가 없습니다. 밭가는 농부들도 ‘저기가 아무개의 유허이다.’ 하고 지껄이며, 식자들이 자나갈 때는 그쪽을 바라보고 탄식하다가 차마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이와 같이 오랠수록 더욱 격발되고 있습니다.
또 이존오는 또 어릴 때에 ‘큰 들판 모두 다 묻혀 버려도 높은 산은 여전히 우뚝하구나. [大野皆爲沒 高山獨不降]’라는 절구(絶句)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보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결국에 가서는 큰 절의를 세울 참언(讖言)이다.’ 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석탄 근방에 조그만 비석을 세우고 그의 구거(舊居)임을 표시하되, 전면에 ‘고려 정언 이 선생 존오 우거지소(高麗正言李先生存吾寓居之所)’라 쓰고, 양옆에는, ‘대야개위몰(大野皆爲沒)’과 ‘고산독불강(高山獨不降)’ 두 귀를 나누어 쓰고, 뒷면에는 그의 평생 행적의 대략을 쓰고, 주위에는 얕은 담을 두른 다음,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수호하게 함이 어떨까 싶습니다. 이렇게 하면 영원토록 표창하는 뜻을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땅을 보고서 그 사람을 생각하며, 또 저절로 감동하고 분발하는 생각이 일어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무왕(武王)은 은(殷)을 치고 나서, 비간(比干)의 묘(墓)를 봉(封)하고 상용(商容)의 집에 경의를 표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의거(義擧)를 하고 첫 번째로 한 일이었거니와, 이번의 이 일 역시 국가의 성전(盛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 가운데 공주에 사는 자는 5인이요, 면천(沔川)에 사는 자가 5인이니, 그들의 성명(姓名)을 열거해서 계문(啓聞)한 뒤에 기록해 두었다가, 그 중에서 벼슬을 할 만한 자는 골라서 녹용(錄用)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물품을 내리고 복호(復戶)하소서. 죽은 이를 표창하고 산 사람을 권면하는 것은 한 도(道)의 사기(士氣)를 진작할 뿐만 아니라, 일세(一世)의 기틀을 회복함에 있어 어찌 크게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것은 세응(世應) 자신의 뜻으로 올린 것이 아니요, 도사(都事) 박세희(朴世憙)가 하고 싶어하던 일이었는데, 세응이 이를 거부하지 못하여 감히 계청하였던 것이다.
【원전】 15 집 451 면
【분류】 *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역사-전사(前史) / *역사-고사(故事)


[주D-001]현릉(玄陵) : 공민왕의 능호.
[주D-002]비간(比干) : 비간은 은(殷)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제부(諸父)로서, 주왕의 황음무도함을 간(諫)하다가 그의 노여움을 사서 마침내 주륙을 당하였다. 기자(箕子)·미자(微子)와 함께 은의 삼인(三仁)으로 불리는데, 주나라가 선 뒤에 무왕은 전 왕조의 충신에 대한 은전(恩典)과 함께 절의를 포장하기 위해 비간의 묘를 봉한 일이 있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성(武成).
[주D-003]상용(商容) : 상용은 주왕(紂王) 때의 대부(大夫)로서, 주왕에게 직간하다가 폄출(貶黜)되었던 인물이다. 《서경(書經)》 무성(武成), 《예기(禮記)》 악기(樂記).
[주D-004]복호(復戶) :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것.

 


 

목숨을 걸고 상소한 정추와 이존오(鄭李上疏) 그러나 상소는 불태워지고...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문신이다.
1366년(공민왕 15년)에 신돈(辛頓)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자, 정추와 이존오가 상소하여 신돈을 탄핵(彈劾)하였다.
신돈을 지지하는 공민왕이 크게 노하여 이들을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으나, 이색 등의 만류(挽留)로 정추와 이존오는 극형을 면하고 지방으로 좌천(左遷)되었다.

 

석탄(石灘)이란?


암초가 많아서 배나 뗏목들이 다니기 어려운 곳의 강가, 혹은 바닷가를 말한다.

장사(長沙)에서 방환되어 부여 석탄(石灘)에 우거(寓舍)했다는 말은 당시 부여 지역의 어느곳이 강이나 바닷가 이고 백제의 전적지이며 바위나 암초들이 많았다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bc8937 주) 

장사(長沙)는 현재 호남성(湖南城)의 성도(城都) 이다.

 


 

관련글

 

정몽주(鄭夢周)

봄바람에 괴로이 이장사를 생각하며 / 春風苦憶李長沙
남루에 기대니 해가 기울려 하네 / 徏倚南樓日欲斜
선실(宣室)에서 은혜 받들기 멀지 않았으리니 / 宣室承恩應未遠
석탄(石灘)의 밝은 달을 자랑할 것이 없다 / 石灘明月不須誇


[주C-001]기 이정언(寄李正言) : 고려 공민왕(恭愍王)에게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을 탄핵하는 바른 말을 하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쫓겨 나갔다.
[주D-001]선실(宣室) : 임금이 제사지내기 위하여 재계(齋戒)하는 집인데, 한문제(漢文帝)가 장사(長沙)에 귀양갔던 가의(賈誼)를 불러 와서 선실에서 인견(引見)한 말이 있었다.
[주D-002]석탄(石灘) : 이존오가 석탄(石灘)에 살았기 때문에 호(號)가 석탄이었는데, 여기서는 그가 장차 다시 임금에게 불려 올 것이므로, 석탄의 밝은 달을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별 정언 이존오(別定言李存吾)
 


윤소종(尹紹宗)

맑은 날 대궐 뜰에서 천둥 친 뒤에 / 大廷白日雷霆後
남북으로 〈귀양간〉 삼년 동안 몇 번이나 꿈꾸고 생각했던고 / 南北三年幾夢思
다시 이정에 올라 거듭 머리 돌리나니 / 復上離亭重回首
가을 높은 산에 슬픔이 생기기 쉬워라 / 秋高喬嶽易生悲

 

[주C-001]이존오 : “병오년에 정추간의(鄭樞諫議)와 함께 신돈(辛旽)을 논란하다가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다.”라는 제주(題註)가 있다.

 


 

삼봉집 제1권


정도전
 
 
석탄(石灘)
 


【안】 정언(正言)이존오(李存吾)가 상소하여 신돈(辛旽)을 논하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부여(扶餘) 석탄에 살면서 여울 위에 정자를 짓고 우유소영(優遊嘯咏)하여 일생을 마쳤으므로 공은 이 시를 지었다.
돌 면은 쇠를 깎아 세운 듯하고 / 石面立削鐵
여울물은 긴 무지개에 닫는 것 같네 / 灘流奔長虹
여울머리 낚싯배 빗겨 있고 / 灘頭橫漁艇
여울 위 모궁이 우뚝하여라 / 灘上起茅宮
높은 선비 깨끗하다 못해 병이 들어 / 高人抱淸疾
돌아와 그 가운데 누워 있다오 / 歸來臥其中
아침나절 노닐면 콸콸 흐르고, 어떤 본에는 호탕(浩蕩)이 탕마(蕩磨)로 되어 있음. / 朝遊欣浩蕩
저녁에 바라보면 밝을락 말락 / 夕眺驚明滅
날 더우면 상쾌한 기운 감돌고 / 天炎挹孤爽
흐린 물 그치면 달이 흐른다 / 潦盡流皓月
봄물은 쪽빛보다 더욱 푸르러 / 春水碧於藍
하얀 눈이 날릴 때와 어떠하더냐 / 何如飄朔雪
편히 앉아 기변을 구경하노라니 / 燕坐玩奇變
【안】 뒷사람의 평에 위의 여섯 구절은 아침ㆍ저녁ㆍ춘ㆍ하ㆍ추ㆍ동의 광경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였다.
가고 가서 머무를 때가 없구려 / 逝者無停時
저기 쌍쌍 노니는 갈매기만이 / 獨有雙白鷗
날아와 언제나 여기에 있네 / 飛來長在玆
【안】 뒷사람의 평에 기심(機心)을 잊었기 때문에 갈매기와 해오리가 와서 가깝게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어허 이내 신세는 새만 못해 / 嗟我不如鳥
가지 못해 부질없이 서로 생각만 하네 / 未去空相思

 


 


 
 동문선 제5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석탄-정언 이존오를 위해 짓다[石灘爲李正言存吾作]
 


정도전(鄭道傳)

돌 낯은 깎은 쇠를 세운 듯하고 / 石面立削銕
여울 흐름은 긴 무지개가 달아나는 것 같다 / 灘流奔長虹
여울 머리에는 고기잡이 배가 비껴 있고 / 灘頭橫漁艇
여울 위에는 초가집이 서 있다 / 灘上寄茅宮
높은 사람이 맑은 병을 안고 / 高人抱淸疾
돌아와 그 속에 누워 있다 / 歸來臥其中
아침에 놀 적에는 밀치고 갈고 하는 물결을 즐겨하며 / 朝遊欣蕩磨
저녁 조망에는 밝았다 꺼졌다하는 것에 놀랜다 / 夕眺驚明滅
하늘이 더울 때면 서늘한 것을 끌어 당기고(여름) / 天炎挹孤爽
다하면 흰 달이 흐른다(가을) / 潦盡流皓月
봄 물이 쪽보다 푸르니(봄) / 春水碧於藍
북풍에 나부끼는 눈과(겨울) 어떠한가 / 何如飄朔雪
조용히 앉아 기이하게 변화하는 경치를 구경하니 / 燕坐玩奇變
가는 것이 멈출 때가 없도다 / 逝者無停時
홀로 있으니 쌍쌍의 백구가 / 獨有雙白鷗
날아와 오래오래 여기에 있다 / 飛來長在玆
슬프다, 나는 새만도 못하여 / 嗟我不如鳥
가지는 못하고 부질없이 서로 생각만 한다 / 未去空相思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 제17권
 
 기(記)
 
 
의열사기(義烈祠記)

 


부여는 옛 백제가 도읍한 터이다. 그 신하들 중에 죽음으로써 직간한 사람은 좌평 성충(成忠)이요, 재앙을 치르면서도 원망함이 없이 위험을 무릅쓰며 충성을 다한 사람은 좌평 흥수(興首)요, 생명을 버리고 충절로써 나라를 지킨 사람은 장군 계백(階伯)이었다.


그 뒤로 7백 년이 흐른 고려 말엽에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간사한 무리를 배척하자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폄직되었다. 현의 북쪽 10리에 있는 석탄(石灘)은 실로 이씨가 예전에 살던 곳으로 정문(旌門)이 남아 있다. 지금도 유민(遺民)과 고로(故老)들이 종종 그 풍채와 덕업을 일러 오면서 제사는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아 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크게 수치로 여겨 오던 터였다.


만력(萬曆) 을해년(1575, 선조8)에 나의 벗 홍흥도(洪興道)가 명을 받아 이 읍에 부임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서 부서(簿書)와 문안(文案)을 정리하는 여가에 지도를 참고하고 역사를 열람하다가 네 사람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는 길이 감탄하면서 “아, 이것이 어찌 원[守]된 사람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말하였다. 이에 현의 부로들과 상의한 결과 사당 건립을 도모하게 되었다.
망월산(望月山)ㆍ경룡산(敬龍山) 북쪽에 자리 잡은 사당은 산에 서리었고 강물이 둘러 안았다. 그 경계가 높아 형세가 활짝 틔었으니, 참으로 신령을 모시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에 홍흥도는 자기 봉록에서 덜어 내고 물자를 절약하여 일 없는 사람을 불러 모아 일을 시키니 농민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수개월 만에 일을 마치게 되었다. 사당이 완성되자 관리들과 고을 백성들을 거느리고 제사를 모셨다. 얼마 후에 이 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상께서 가상히 여기고 명하여 의열사(義烈祠)라는 편액을 하사하시니, 나라 안에 좋은 풍속을 심어서 후대에 길이 모범을 드리우고자 함이었다.


생각건대, 백제는 두 나라 틈바구니에서 부강하다고 일컬어지더니, 말엽 저 어둡고 용렬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릴 적에는 목 베고 코 베고 칼 씌워 하옥함을 일삼아 온 조정의 입을 봉해 버렸다. 그러나 성공(成公)만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가 두 다리를 묶인 채 감금당한 처지에서 절명시를 읊기까지 하면서 능히 국가의 대계를 진술하여 왕의 한번 깨달음을 시도하되 조금도 원망하는 말이 없었으니, 그 충성은 거룩하였다.


그 뒤에 흥공(興公)은 국사가 이미 허물어져 감을 답답하게 여겨 배척당함을 꺼리지 않으며 정성스럽게 그치지 않으니, 꾸준히 간한 말은 곧 전일의 성공(成公)의 말이요, 마음 역시 전일 성공의 그 마음이었다.


이미 강산이 무너져 의지할 곳을 잃고 대군이 바야흐로 쳐들어오자, 계공(階公)이 또한 5천 약졸을 거느리고 비분강개하여 적진에 나갈 때 먼저 그 처자를 죽이고 필사적으로 싸울 마음을 먹고 마침내 적의 칼날을 밟아도 후회가 없었으니, 비록 옛 열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장할 수 있었으랴.


고려 말 공민왕 때에 나라가 혼란해지자 늙은 중(신돈)이 국정을 담당하여 비록 유종(儒宗)이나 명상들을 턱과 손가락질로 부리지 못한 이가 없었으나, 이공(李公)만은 신진 관리의 낮은 신분으로서 조정에서 간사한 무리들을 꾸짖되 조금도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충의를 지키는 분분한 뜻이 죽음에 임하여서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저 몇 분의 충절이 세대를 달리하기는 하나 서로 바라보는 것이 간과 쓸개가 조응하듯 비추고 전해 내려와 덕화의 향기로운 땅이 지금까지 뭇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으니 한 사당을 건립하는 일이 백성의 교화에 관계됨이 크다.


대개 하늘이 백성을 낼 때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니, 백성이 타고난 떳떳한 성품은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평소에는 자기 힘대로 충성을 다하며 불행히 나라가 위태로운 때를 만나서는 제 몸이 부서지고 멸족되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하였으리요. 실로 하늘로부터 받은 떳떳한 성품이 저절로 그칠 수 없는 양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저 백제로부터 고려의 시대까지는 모두 천 년이 넘으니, 당시 공경대부들로 찬란히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뒤에는 빛이 흐려지고 명성이 끊어져 초목과 더불어 썩으니, 그 마을 앞을 지나는 자들이 팔을 흔들고 지나가며 누가 있었던 마을인지 묻지도 않는다. 유독 이 몇 분들에게는 북받치는 슬픈 마음으로 사당을 지어 제사하는 데까지 이르니, 이는 과연 어찌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되었겠는가. 또한 떳떳한 성품과 덕을 좋아하여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양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서 보고 또 취사하여 스스로 권장할 바를 알 수 있으리라.


의열사가 일어난 것과 조정이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은 비록 아득히 크다고 하지만 네 분의 충절이 이와 같이 뛰어남에도 사묘의 건립이 금일에야 이루어졌으니, 어찌 때를 기다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들으니 홍흥도가 이미 자상하고 온화하게 정치하여 민심을 얻고 더욱 백성을 깨우치고 교화하는 데 마음을 두었고, 마침내 숨겨진 일을 밝게 들춰내며 경박하고 게으른 것은 일깨워 독려하므로써 한 고을의 이목을 일신하니, 그 일이 더욱 우러러보인다.


홍흥도를 계승하는 사람이 능히 홍흥도의 마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삼아 사우가 황폐하지 않고 길이 보전될지 여부는 알지 못하겠거니와, 게다가 부여의 백성들이 네 분들의 충절을 마음의 숫돌로 삼아 힘써 갈아 뒷날 성하게 국가에 등용됨으로써 홍흥도가 격려하고 권장하던 뜻을 저버림이 없겠는가? 자기에게 있는 책임은 홍흥도가 이미 다하였지마는 남에게 있는 것은 홍흥도가 알 바가 아니다.


사묘의 구조는 3칸인데, 재실과 부엌이 함께 갖추어졌다. 또한 그 옆에 관선당(觀善堂)을 지어 선비들이 학문하고 수양하는 곳으로 삼았고, 관전(官田)을 나누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주민을 모집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 공사의 감독 맡은 이는 읍 사람 서귀수(徐龜壽)라고 한다.

만력 신사년(1581, 선조14) 초여름에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유성룡은 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충청도(忠淸道)
 
 
부여현(扶餘縣)
 


동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24리,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37리,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으로는 정산현(定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 사자(泗泚)라고도 한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웅천(熊川)으로부터 여기에 와서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 이름하였다. 의자왕(義慈王) 때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가고 나서는 신라에서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문무왕(文武王) 12년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소부리(所夫里)ㆍ남부여(南扶餘)ㆍ반월(半月)ㆍ사자(泗泚) 자(泚)는 혹 비(沘)로도 쓴다. 여주(餘州)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와 있다.

【성씨】본현 심(沈)ㆍ이(李)ㆍ서(徐)ㆍ전(全)ㆍ형(邢)ㆍ조(曹)ㆍ고(高)ㆍ표(表)가 있으며 백(白) 속성(續姓)이다.

【형승】 탄현(炭峴)ㆍ백강(白江) 성충(成忠)이 의자왕을 간(諫)한 글에 있으며, 인물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산천】 부소산(扶蘇山) 현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 작은 봉에 비스듬히 올라간 곳을 영월대(迎月臺)라 부르고, 서쪽 봉을 송월대(送月臺)라 이른다. 탄현(炭峴) 현 동쪽 14리에 있는데 공주와의 경계이다. 부산(浮山) 고성진(古省津)의 북쪽 언덕에 있다. 망월산(望月山) 현 동쪽 15리에 있으며, 또 석성현(石城縣) 편에도 나와 있다. 취령산(鷲靈山) 현 서쪽 20리에 있다. 오산(烏山) 현 남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 현 서쪽 30리에 있다. 백마강(白馬江) 현 서쪽 5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및 금강천(金剛川)이 공주의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이 강이 된 것인데, 임천군(林川郡) 경계로 들어가서는 고다진(古多津)이 된다. 고성진(古省津) 바로 사자하(泗泚河)인데, 부소산 아래에 있다. ○ 백제의 의자왕 때 물고기가 죽어 물 위에 떴는데, 그 길이가 3장(丈)이나 되었다. 이를 먹은 자는 죽었고, 또 물빛이 붉게 변하여 핏빛과 같았다. 대왕포(大王浦) 현 남쪽 7리에 있는데, 오산(烏山) 서쪽에서 발원하여 백마강(白馬江)으로 들어간다. ○ 백제의 무왕(武王)이 매양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자하(泗泚河) 북쪽 물가에서 놀면서, 술마시며 즐기고 술이 취해서는 반드시 거문고를 뜯으면서 스스로 노래하고, 시종하는 자들을 일어나 춤추게 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대왕포(大王浦)’라 일컬었다 한다. 광지포(光之浦) 현 동북쪽 7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현 서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에서 발원한다. 금강천(金剛川) 현 북쪽 23리에 있다. 석탄(石灘): (부여)현 동쪽 12리에 있으며, 백마강의 상류이다. ○ 고려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신돈(辛旽)을 탄핵하였다가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이곳에 살면서 여울 위에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시를 읊으면서 그 몸을 마쳤는데, 일찍이 시를 짓기를, “백제 옛 나라 장강(長江) 굽이에, 석탄(石灘)의 풍월이 주인 없는 지 몇 해이런가. 들불이 언덕을 사르니 평탄하기 손바닥 같은데, 때때로 소가 묵은 밭을 가네. 내가 와 정자 짓고 승경(勝景)을 더듬으니, 온갖 경치 아름답게 앞으로 몰려드네. 구름과 연기는 교사(蛟蛇)의 굴에 끼었다간 사라지고, 산 아지랑이 아물거리며 먼 하늘에 떠 있다. 흰 모래 언덕 뚝 끊기매 갯물이 들어오고, 큰 암석이 연달아 물가에 비꼈구나. 조각배 저어 남으로 올효조(兀梟窕)로 돌면, 돌 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물을 굽어본다. 돌부처여, 그대는 의자왕 시대의 일을 목격하였으리라. 오직 들 두루미 와서 참선(參禪)하고 있구나. 상상해 보니 옛날 당 나라 장수가 바다를 건너왔을 때, 웅병(雄兵) 10만에 북소리 둥둥 울렸으리. 도문(都門) 밖 한 번 싸움에 나라 힘을 다했으나, 임금이 두 손 모아 결박을 당하였다. 신물(神物 용(龍))도 빛을 잃고 제자리 못 지켰나. 돌 위에 남긴 자취 아직도 완연하다. 낙화암(落花巖) 아래에는 물결만 출렁대고, 흰 구름 천년 동안 속절없이 유연(悠然)하다.” 하였다.

참고 :  백마강은 장강(陽子江)의 지류

 백제 류민의 노래 산유화가(山有花歌)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석벽은 쇠를 깎아 세운 듯, 여울 흐름은 긴 무지개가 달아나는 듯. 여울 머리에 고기잡이배 비꼈고, 여울 위에는 초가집을 세웠다. 고상한 사람이 깨끗한 병(病)을 안고서, 벼슬 버리고 돌아와 그 가운데 누워 있다. 아침나절 놀이에는 호탕(浩蕩)한 물결 즐기고, 저녁 조망(眺望)에는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데 놀란다. 날씨가 더울 때엔 시원함을 끌어 당기고, 장마가 다 지나면 흰 달이 흐른다. 봄 강물이 쪽[藍]보다 푸르거니, 북풍에 나부끼는 백설과 어떠하랴. 조용히 앉아 기이하게 변해 가는 사시를 구경하니, 저 흘러가는 것은 멈출 때가 없구나. 홀로 한 쌍의 저 흰 갈매기, 날아와서 이곳에 길이 있구나. 슬프다, 나는 저 새보다도 못하여, 가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서로 생각만 한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봄 바람에 마음 아프게 이 장사(李長沙 이때 이존오(李存吾)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어 있었다)를 생각하고, 남쪽 누각에 방황하니 해가 비끼려 한다. 선실(宣室)의 은명(恩命) 받을 날이 응당 멀지 않을 것이니, 석탄(石灘 이존오의 호) 위의 밝은 달을 자랑하지 말라.” 하였다.


○ 이직(李稷)의 시에, “이씨(李氏)는 신라 대성(大姓)의 후예(後裔)로, 선생의 절의(節義)가 또 남다르네. 간신(奸臣)을 때린 수실(秀實)이 필경 시대와 맞지 않고, 세상 도피한 엄자릉(嚴子陵)은 곧 낚싯대 드리웠다. 일은 지났어도 그 높은 이름 해ㆍ별과 함께 빛을 다투고, 성탄(星灘)은 비었는데 양쪽 언덕에는 쑥ㆍ명홧대뿐이로다. 충효(忠孝)로 집을 이은 계성군(鷄城君 이존오의 아들)이 있으니, 남은 경사 무궁함을 어찌 헤아리랴.” 하였다.


○ 안노생(安魯生)의 석탄정기(石灘亭記)에, “내가 이미 관례(冠禮)를 하고 서울 가서 배울 때에, 살던 곳이 선생의 집과 수리(數里)도 못 되었다. 당시 선생은 아직 총각으로 유희(遊戲)를 일삼지 않고 성품이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한 번 나를 보고는 곧 흔연히 옛 친구같이 대하였다. 나도 또한 그가 장차 영특한 인물이 될 것을 알고서 서로 벗이 되어 좋아하였더니, 다음 해 봄에 똑같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석탄(石灘)은 나의 선자(先子 돌아가신 아버지)의 별장[別業]이다. 공산(公山 공주) 금강(錦江)의 서쪽이자, 부여(扶餘) 반월성(半月城)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공산의 남쪽을 경유하여, 다시 서쪽으로 꺾여서 드디어 금강과 합류하여 역류(逆流)로 돌아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 내 선자께서 간관(諫官)으로 계시다가, 물러나와 이곳에 사시면서 그 위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올라가서 푸른 산을 대하고 흐르는 물을 굽어보시면서, 그윽한 심정을 마음껏 푸셨던 곳이다. 미약한 나 소자(小子)는 아무 재능도 없는 사람으로 또한 간대부(諫大夫)가 되었다가, 일을 논한 것이 잘못되어 드디어 이곳에 돌아와서 선자의 뜻을 이어 장차 이 몸을 마치려고 했더니, 성명(聖明)하신 임금을 만나 신(臣)을 석탄 가운데서 끌어올려, 정부에 두시고 훈신(勳臣)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시어 계림군의 봉작(封爵)을 내리시고, 능연각(陵煙閣) 위에 형모를 그렸으니, 아름다운 벼슬과 후한 녹봉의 영광이 조상에게 빛나는지라 어찌 마음속에 부끄럽지 않으리오. 같은 석탄인데 선자의 어짊으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끝내 폐해졌거늘, 어리석고 졸렬한 내가 특별히 그 사이에서 기용되어 이에 이르렀으니, 나 혼자서 은근히 이를 괴상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 사실을 쓰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일찌기 조정의 공의(公議)를 들으니, 모(某 이존오(李存吾))는 동국의 간신(諫臣)이다. 전조(前朝)를 섬기던 날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역적 신돈(辛旽)에게 미혹하여, 나라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서 만일 배척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매양 그를 중상(中傷)하기 때문에 비록 의사(義士)라고 불리는 사람도 모두 화(禍)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모(某)가 정언(正言)으로서 분연히 대의(大義)를 창(倡)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글을 올려 그를 탄핵하니, 간하는 말이 간절하고 정직하였는데 과연 거슬림을 당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얼마 안 되어 석탄으로 놓여 돌아와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다가, 그 종말에 이르러 분함으로 인하여 병이 되어 누웠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치기를, 「돈이 멸망하였는냐.」 하므로, 모시고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아직도 기세가 치열합니다.」하니, 도로 누우며 말하기를, 「돈이 멸망해야 내가 죽으리라.」하였는데, 처음 병이 시작할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이와 같이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하니, 그렇다면 그의 충성과 의기(義氣)는 죽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요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신돈이 죽음을 받으매, 현릉도 뉘우치고 깨달아 즉시 간의대부(諫議大夫)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또 어필(御筆)로 특별히 쓰기를, 「간신(諫臣)의 아들 아무를 장복 직장(掌服直長)으로 삼는다.」하였다. 현릉이 비록 즉시 간하는 말을 좇지는 못했으나 악의 괴수를 베어 없애고, 뒤에 뉘우치고 깨달아서 그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 아들에게 은총을 베풀었으니, 또한 현명한 임금일진저. 사람들의 말에, 「박옥(璞玉)의 아름다움을 비록 보지 못한 자라도 모두 그 온윤(溫潤)의 미(美)를 알며, 성현(聖賢)의 높은 것을 말하면 비록 미혹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또한 도덕의 귀함이 있는 것을 안다.」한다. 그러기 때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는 서산(西山)에서 주려서 죽은 한 필부(匹夫)이지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하고 있는 것인데, 공의 선자가 비록 석탄 위에서 세상을 마쳤으나, 당시에 직접 보고 아는 자와 지금 이를 듣고 아는 자가 모두 그 의기에 탄복하면서 칭송을 마지 않는 것은, 그 백이(伯夷)의 풍(風)이 있기 때문이다. 또 굽혔다간 피고, 갔다간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가지 않으면 어찌 오며, 굽히지 않으면 어찌 펴겠는가. 더욱이 아버지와 아들은 한 기운이 나뉜 것이지만, 어찌 부자 사이의 굽히고 펴진 것을 둘로 볼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보아 선자가 전일 억울하였던 것은, 오늘의 펴짐을 가져 오려는 것이었음을 알 것이니, 선생은 무엇을 괴상하게 여기리요. 선생의 충의는 안으로는 가업(家業)을 이어나갈 것이오, 위로는 임금의 명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왕좌(王佐)의 인재가 되어 유풍(流風)과 여경(餘慶)이 반드시 저 석탄과 함께 흘러서 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선생에게 어찌 구차스럽게 환심을 사려 함이겠는가. 이미 그 사실을 쓰고 또 바라는 바가 있어 쓰는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토산】 모시ㆍ웅어[葦魚]ㆍ농어[鱸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뱅어[白魚]ㆍ복령[茯苓]ㆍ붕어[鯽魚].
【학교】 향교 현 서쪽 1 리에 있다.
【역원】 은산역(恩山驛) 현 서쪽 15리에 있다. 용전역(龍田驛) 현 동쪽 8리에 있다. 고성원(古省院) 고성진(古省津) 언덕에 있다. 복천원(福泉院) 현 북쪽 30리에 있다. 금강원(金剛院) 금강천(金剛川) 언덕에 있다.
【교량】 양단진교(良丹津橋)ㆍ금강천교(金剛川橋).
【불우】 숭각사(崇角寺)ㆍ도천사(道泉寺) 모두 취령산(鷲靈山)에 있다. 경룡사(驚龍寺)ㆍ보각사(普覺寺)ㆍ망월사(望月寺) 모두 망월산(望月山)에 있다. 호암사(虎巖寺) 호암산(虎巖山) 천정대(天政臺) 아래에 있는데,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위에 호랑이의 자취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다 한다. 고란사(高蘭寺) 부소산(扶蘇山)에 있다. 망심사(望心寺) 취령산에 있다.
【사묘】 사직당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소산 마루턱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반월성(半月城) 돌로 쌓았다. 주위가 1만 3천 6척이니 이것이 곧 옛 백제의 도성(都城)이다. 부소산을 쌓아 안고 두 머리가 백마강(白馬江)에 닿았는데, 그 형상이 반달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지금의 아문(衙門)이 그 안에 있다. 증산성(甑山城) 현 서쪽 1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69척에 높이가 10척이다.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청산성(靑山城) 현 동쪽 1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8백 척에, 높이가 5척이며, 그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천정대(天政臺) 현 북쪽 10리쯤에 있다. 강 북쪽에 절벽으로 된 봉우리에 큰 암석이 대(臺)같이 되어 강물을 굽어 보고 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백제 때에 재상(宰相)을 임명하려 하면, 뽑힐 만한 자의 이름을 써서 함(函) 속에 넣고 봉한 다음, 바위 위에 놓았다가 조금 뒤에 이를 취하여 보고, 이름 위에 도장 흔적이 있는 것으로 재상을 삼았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했다 한다. 혹은 정사암(政事巖)이라고도 일컫는다. 조룡대(釣龍臺) 호암(虎巖)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扶蘇山)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龍)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 한다. 낙화암(落花巖) 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義慈王)이 당 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宮女)들이 달아나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했다.” 한다. 자온대(自溫臺) 현 서쪽 5리에 있다. 낙화암에서 물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괴상한 바위가 물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백제의 왕이 이 바위에서 놀면 그 바위가 자연히 따뜻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했다.” 한다. 의염창고기(義鹽倉古基) 현 동쪽 10리에 있다. 옛날에 연해에 있는 각 고을의 소금을 수납하여 적곡(糴穀 양곡매입(糧穀買入))과 대납하였다.” 한다. 석전부곡(石田部曲) 현 서쪽 10리에 있다. 지금은 내복지촌(乃卜只村)이라 부른다. 풍지소(楓枝所) 현 남쪽 10리에 있다.


『신증』 소정방 비(蘇定方碑) 현 서쪽 2리에 있다. 당 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을 보내어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과 더불어 백제를 쳐서 이를 멸망시키고, 이곳에 돌을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하였다.


【인물】백제 성충(成忠) 의자왕(義慈王)이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하게 연락(宴樂)에 빠져 술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극력 간하였더니, 왕이 노하여 옥(獄)에 가두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병이 나서 죽을 때에 글을 올려 간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오니 원하건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나이다. 신이 시변(時變)을 관찰하오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쓰려면 그 땅을 살펴 선택하여 상류(上流)에 처하여 적군을 맞이한 뒤에야 보전할 것이니, 만약 다른 나라의 군병이 공격해 올 경우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며, 수군(水軍)은 백강(白江 기벌포(伎伐浦)라고도 이른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험준하고 막힌 지리(地利)를 점거하여 방어한 뒤에야 가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그 말에 유의하지 아니하였다가 당 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탄현과 백강을 통과한 승세(勝勢)를 타고 도성에 임박하니 왕이 패배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이 지경이 되었음을 후회하노라.” 하였다. 계백(階伯) 계백이 백제에 벼슬하여 달솔(達率)이 되었는데, 당 나라 소정방이 신라의 군사와 합세해 와서 치므로 계백이 장군이 되어 황산(黃山)의 벌판에 이르러 세 영(營)을 배설하고는 신라 군사를 만나 싸우려 할 즈음에, 군중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월(越) 나라 구천(句踐)이 5천 명의 적은 병력으로 능히 오 (吳)나라의 70만 대병을 격파한 바 있다. 오늘 마땅히 각기 분발하여 기필코 승리하여 국은(國恩)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무찔러 싸우는데 하나가 천 명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어 신라의 군사가 이에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진퇴(進退)를 거듭하기를 네 번이나 하고 힘이 다 되어 죽었다. 흥수(興首) 의자왕 때에 좌평(佐平)이 되었는데 죄로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으로 유배되었었다. 당 나라 군사가 덕물도(德物島)에 이르자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전수(戰守)의 방책을 물으니, 흥수가 말하기를,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한 군사가 단창(單槍)으로 지키고 있으면 만 명도 이를 당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용맹있는 군사를 가려서 가서 지키도록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신라 병사로 하여금 탄현을 지나오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성문을 단단히 닫고 굳게 지키시면서 그들의 군량이 다하고 병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뒤에 분발하여 치면 필연코 적을 멸할 것입니다.” 하니, 대신들이 말하기를, “흥수가 오랫동안 옥중에 있어 대왕을 원망하였을 것이니 그 말을 쓸 수 없습니다.” 하자, 왕이 그렇게 여겨 흥수의 말을 쓰지 않았다가 드디어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복신(福信) 무왕(武王)의 조카이다. 의자왕이 이미 항복하니, 복신이 승려 도침(道琛)과 더불어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여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웠다. 병졸을 이끌고 당 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을 도성에 포위하였는데, 유인궤(劉仁軌)와 신라가 합력 공격하여 그 포위를 풀자 복신이 임존성(任存城)으로 물러가 지키면서 자칭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하였는데, 뒤에 부여풍에게 피살되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서부(西部) 사람으로 신장이 7척이 넘었으며, 용력과 지략이 있었다. 의자왕 때에 달솔 겸 풍달군장(達率兼風達郡將)이 되었는데, 소정방이 의자왕을 잡고는 이내 군병을 놓아 크게 노략하니, 상지가 10여 명과 더불어 빠져 나가서 도망한 자를 불러모아 임존성산(任存城山)에 의거하여 굳게 지키니 10일이 못 되어 귀의(歸依)하는 자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소정방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마침내 2백여 개의 성(城)을 회복하고,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더불어 복신(福信)과 호응하였는데, 용삭(龍朔) 연간에 당 나라 고종이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드디어 유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지수신(遲受信) 유인궤가 백강(白江)에 이르러 부여풍(扶餘豐)을 구원하는 왜병(倭兵)과 만나 네 번 싸움에 모두 이기니, 부여풍은 몸을 빼 달아나고,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ㆍ충지(忠志) 등은 왜인과 모두 항복하였는데, 유독 지수신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였다. 지대가 험하고 성곽이 견고한데다가 저축한 군량이 많아서 30일을 공격하여도 항복하지 않다가 성이 함락하게 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高句麗)로 망명하였다.【우거】고려 이존오(李存吾) 석탄(石灘)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효자】고려 서공(徐恭) 아버지가 광질(狂疾)을 앓으매, 공이 손가락을 베어 약에 타서 바쳤더니 병이 나았다. 정문을 세웠다.
『신증』【열녀】본조 이씨(李氏) 갑사(甲士) 박원형(朴元亨)의 아내이다. 남편이 악질(惡疾)을 앓으니, 손가락을 끊어서 약에 타서 먹여 병이 나았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대왕포월공추야(大王浦月空秋夜)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대왕포의 달은 속절 없이 가을 밤이요, 정사암(政事巖)의 꽃은 몇 봄인고. 오늘은 두서너 집 삭막(索寞)하지만, 당시에 10만 호가 태평을 즐겼네.” 하였다. 조룡대하강자파(釣龍臺下江自波) 이곡(李穀)의 시에, “청구(靑丘) 정기모여 황하(黃河)에 응하니, 온왕(溫王)이 동명(東明)의 집에 태어났네. 부소산(扶蘇山) 아래로 옮겨 나라 세우니, 기이한 상서 이적(異跡)이 어찌 그리 많았는고. 문무의 인물 문물(文物)도 성해, 틈 보아 신라 삼키려고 도모했다. 후대의 미약한 자손들이 덕을 계승 못하고, 화려한 궁궐에 사치만 일삼았네. 견고한 성곽이 하루아침에 와해(瓦解)되니, 천척 높은 바위 낙화(落花)로 이름짓다. 공후(公侯)들의 동산에 농부 씨뿌려 밭갈고, 쓰러져 가는 비(碑) 곁에 동타(銅駝)가 묻혀 있네. 내가 와서 고적 찾고 문득 눈물 닦노라. 옛일이 모두 어부(漁父) 초동(樵童)의 노래 속에 붙였구나. 천년의 아름다운 왕기(王氣) 쓸어간 듯 없어지고, 조룡대 아래에 강물만이 출렁대네.” 하였다. 가루무전수연비(歌樓舞殿隨煙飛)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해동(海東)의 안팎 산하(山河) 웅장도 하여, 삼방(三方)으로 할거해 나라 세웠네. 보거(輔車) 서로 의지하는 것을 생각지 않고, 군사 몰아 나날이 싸움도 많았다. 금성탕지(金城湯池) 하루아침에 소용없으니, 성벽(城壁) 위에 꽂힌 기치(旗幟) 모두가 신라와 당 나라. 노래하던 누각 춤추던 궁전이 연기 따라 사라지니, 주옥(珠玉)이며 비취가 다시 화려함을 자랑하지 못하네. 가련하다 물고기 뱃속에 묻힌 향기로운 그 넋, 화하여 봄바람 강위에 꽃이 되었겠지. 그 당시 성충(成忠)의 계책을 쓰지 않았으니, 아마도 한을 품고 동타(銅駝) 어루만졌으리. 만고흥망(萬古興亡)에 외로운 성만이 있는데, 태평세상 오늘날에 현가(絃歌)를 듣누나. 백마강 위에 달이 비단 같은데, 고기잡이배 점점(點點)이 연파(煙波) 따라 뜨는구나.” 하였다.『신증』 흥망이공여동타(興亡已空餘銅駝)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부소산 아래에 큰 강하(江河), 형승(形勝)이 모두 농부들 집에 속했네. 당시 화려한 갑제(甲第) 구름에 연했던 곳에, 해마다 밭갈이에 주옥(珠玉)들 많이 나온다네. 용호(龍虎)가 서로 싸워 삼키지를 못했는데, 지금도 풍경(風景)만은 아직도 삼라(森羅)하다. 여산궁(驪山宮) 속의 양태진(楊太眞)이요, 임춘각(臨春閣) 위의 장려화(張麗華)라. 미색(美色)이 필경 망국의 씨가 되어. 향기로운 그 넋마저 광풍(狂風) 앞의 꽃 되었네. 한덩이 바윗돌이 또한 은감(殷鑑)이라. 흥망은 이미 사라지고 동타(銅駝)만 남았구나. 느지막이 배를 놓아 옛시를 가득 싣고, 강 건너 상녀(商女)의 노래 끝내 듣는구나. 영월대(迎月臺) 앞에 뜬 둥근 달은, 밤이 오면 예와 같이 금물결 펼치누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 (縣內) 끝이 15리이다. 몽도(蒙道)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초촌(草村)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대방(大方)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공동(公洞)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가좌동(加佐洞)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방초(方草)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도성(道城) 서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천을(淺乙) 서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송원당(松元堂)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인데, 우측으로 6개 면(面)이 모두 백마강(白馬江)의 서쪽에 있다.
【진도】 고자진(古者津) 서쪽 5리에 있는데, 서쪽 6면으로 통한다. 왕진(王津) 북쪽 15리에 있는데, 정산(定山)으로 통한다.
【토산】 감[枾].
【사원】 부산서원(浮山書院) 숙종(肅宗) 을해년에 세웠고, 같은 해 사액되었다. 김집(金集) 태묘(太廟)에 보임. 이경여(李敬輿) 자는 진부(眞夫), 호는 백강(白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 ○ 의열사(義烈祠) 동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선조(宣祖) 병자년에 세웠고, 무인(戊寅)년에 사액되었다. 성충(成忠) 백제(百濟) 때 벼슬은 좌평(佐平)이었는데, 의자왕 16년에 극간(極諫)하다 하옥(下獄)되어 죽었다. 흥수(興首) 백제 때 벼슬은 좌평(佐平)이었으며 의자왕 20년에 직간하였다. 계백(階伯) 이름은 승(升). 백제와 동성(同姓)이었으며, 벼슬은 달솔(達率), 의자왕 20년에 전사하였다. 이존오(李存吾) 여주(驪州)에 보임. 정택뢰(鄭澤雷) 자는 휴길(休吉), 호는 화강(花剛),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광해주 5년에 상소하여 대의(大義)를 밝히려다 남해(南海)로 귀양가 11년에 죽었다. 지평(持平)으로 추증되었다. 황일호(黃一皓) 강화(江華)에 보임.

 

[주D-001]선실(宣室)의 은명(恩命) : 한 나라 문제(文帝) 때에 문제가 가의(賈誼)라는 젊은 선비를 선실(宣室)이라는 방에서 불러 보았으므로 이 사람도 멀지 않아서 임금이 선실에 불러 볼 것이라는 말이다.
[주D-002]간신(奸臣)을 때린 수실(秀實) : 당 나라 덕종(德宗) 때에 주자(朱泚)라는 자가 군사를 일으키어 반역하여서 덕종은 먼 곳으로 피난가고, 주자는 궁중에 들어가서 백관을 불러 모으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고 선언하였는데, 그때에 대사농(大司農)이던 단수실(段秀實)이라는 사람의 손에 들었던 홀(笏)로 그의 얼굴을 때려서 이마가 깨어졌다. 그러나 단수실은 주자의 당류에게 잡혀서 죽었다.
[주D-003]능연각(陵煙閣) : 당 나라를 건국할 당시의 공신들의 화상을 그려서 두었던 곳의 이름이 능연각(凌煙閣)이다. 그러므로 후세에서도 능연각이라 하면 공신을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은 이존오(李存吾)의 아들 이래(李來)가 조선조에 공신이 되어 계성군(鷄城君)에 봉작된 뒤에 이래의 청으로 지은 글이다.
[주D-004]청구(靑丘)……응하니 : 중국의 황하(黃河)는 물이 누렇게 탁하므로 황하라 한다. 그러나 천 년에 한 번 맑아질 때가 있는데, 그 맑을 때는 성인이 나서 천하가 태평하여진다 한다.
[주D-005]동타(銅駝)가 묻혀 있네 : 구리로 만든 낙타인데, 예전에는 서울 거리에 그런 낙타를 만들어 세웠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면 그 번화한 거리가 깨어진 기왓장만이 남았고 그 옆에 그 구리낙타가 아직도 남아서 서 있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06]보거(輔車) : 수레는 바퀴 넷이 있어야 설 수 있다. 그 네 바퀴를 서로 돕는 것이라 하여 보거라는 말이 있다.
[주D-007]은감(殷鑑) : 주(周) 나라가 은(殷)나라의 주(紂)가 포악하다 하여 쳐서 이기고 나라를 빼앗었다. 그런 후에 그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아무리 천자가 되더라도 포악하면 나라도 빼앗기고 몸도 망친다. 멀리 말할 것이 없이 저 은 나라를 거울로 삼아라.” 하였다.
[주D-008]강 건너……듣는구나 : 중국 남경(南京)은 남북조 시대에 300년 동안 남조(南朝)의 수부였다. 그러던 것이 말년 진(陳) 나라 후주(後主) 때에 수(隋) 나라에게 정복되어 망하고 남북이 통일되었다. 그러나 진후주가 지어서 부르던 노래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것은 오래 유행되었다. 그래서 당 나라도 말년인 목종(穆宗) 때에 두목(杜牧)이라는 시인이, “장사하는 계집은 망국의 한도 알지 못하고, 강을 격해서 지금도 후정화를 부른다.” [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하여 남경에서 읊었다.
 
 
 

 

 


 

본 홈페이지 자유기고가 노성매님의 글

 

 

백제의 웅진(熊津:熊川) ③  


  사천성(四川省)의 익주(益州) 지방을 백제의 고도(古都)로 비정하자면,  웅진, 사비(泗 ), 그리고 백제 익주(益州)의 위치는 어디냐는 것이다. 

  그러나 대륙의  백제를 이야기한다면, 그 일대가 아니면 설명이 될 수 없다.

 두 발과 말(馬), 그리고 강을 이용해 강역을 확장하던 시절이었다.
  강역을 점점이 흩뿌려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흔히 백제의 요서진출을 설명할 때, 백제의 본토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서해(西海) 사이에 가로놓인 대양을 건넜다고도 하나,   주변정리(신라·고구려)도 하지 않은 채, 망망대해 너머의 땅을 다스린다는 것에는 억지가 따른다.

    지도를 보면 가까워 쉽게 건널 수 있다고 여기지만, 고속 페리선으로 3시간이 걸린다면 바람에 의지할 때는 어마어마한 거리다. 

 더구나 태평양의 더 센 파도에 노출된 곳이다. 중간 기항지도 없다. 
  피난처도 없고, 위치파악도 힘든 망망대해를 며칠 이상 항해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을 건조할만큼 당시 문명화 되었던가도 의문이지만, 바다에 목숨 걸고 살던 민족도 아니었다.

  항해로가 삼국시대에 벌써 열렸다면, 조선시대에 육로를 통해 북경까지 힘들게 왕래했을 지가 의문스럽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서구인들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으로 항해를 시작한 것은, 1453년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였다.

  바다의 탐험가들이 줄줄이 거론되는 것은 15세기 이후가 되어서였다.

  그 이전의 지중해 항해로를 보면, 베네치아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기 위해서는 다도해라는 에게해의 섬을 따라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기서 아침 저기서 점심 하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의 고대 역사에는 벌써 가야국 시절부터 대양의 항해가 보통으로 나온다.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까지 왔다고 한다.

  지금도 항구로서는 별볼일없는 저 남해 한 귀퉁이의 완도가 신라 장보고에 의한 국제무역항이었다고도 한다.

  
  당나라를 보자.
 당시 당나라는 돌궐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唐) 초기에는 당시 당의 수도였던 태원(太原)까지 돌궐이 진격했고, 당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웠던 시기였다.
  그런 형편의 당나라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기 위해 왔다는 것 또한 엄청난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에는 소위 중원인들이 탐낼만한 무엇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동력의 최우선 순위였던 좋은 말(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말이 마음껏 질주할 수 있는, 목축의 최적지인 초원지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천성의 익주처럼 옥야천리의 비옥한 토지가 끝없이 펼쳐진 곳도 아니다.
  부의 가치였던 금과 무기의 재료인 철이 풍부하게 나는 곳도 아니다.
 위치상 변두리에 놓여있어 중계무역지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얻어야될 땅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역사를 보면 한반도가 황금의 땅이라도 되는양, 중원에 새로이 국가가 세워졌다하면 반드시 한반도로 밀려온다.
  무엇을 얻기 위해. 

  뒤집어 말하자면, 그러한 땅을 우리민족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국가의 존망을 우리민족에게 걸었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천년의 도읍지는 공격해도 공격해도 끄덕없는 배후지(강역)가 그만큼 넓고 깊었다는 얘기이다.
  

한 집이 기틀을 잡기 위해서도 3대를 거쳐야만 한다.
  고작 1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강국으로 자리매김 된 것은, 후세 역사가들의 필법(筆法) 덕분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이야기 12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현대의 개념으로 과거까지 재단해서는 역사는 배우는 의미가 없다.
  역사를 접할 때 가장 명심해야 할 태도는 안이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익주의 말(馬)'이라는 법어(法語)가 있다.

  회주의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익주의 말이 배가 터졌으니…
  (懷州牛喫禾 益州馬腹漲…)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생명은 서로 이어져 있다는 말인데, 당시 말(馬)은 지금의 자동차처럼 어느 민족에게나 중요수단이었지만, 삼국사기의 백제조를 보면 유독 백제에 말(馬)과 연관된 지명이 많다.

  그리고 백제의 노래도 말(馬)에서 시작되어 말(馬)로 끝나고 있다.

   금마산(金馬山)에 도읍했다(삼국유사)로 시작되어, 백마강(白馬江)의 슬픈 전설로 막을 내린다.


    백마강(白馬江)을 사비하(泗 河)라고도 한다. 부여(扶餘)의 강(江)이다.


   그런데 16세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을 보면, 백마강에 대한 두 어긋난 기록을 볼 수 있다.

  白馬江. 在縣西五里良舟浦及金剛川與公州之錦江合流爲此江入林川郡界…

  백마강은 부여의 서쪽 5리에 있다. 양주포와 금강천과 공주의 금강이 합류되어 백마강이 된다.…

  그 뒤를 이어 인용한 안노생(安魯生)의 석탄정기(石灘亭記)를 읽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안노생은 생몰년 미상인데,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1391년 공양왕 때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石灘. 在縣東十二里白馬江上流.

安魯生石灘亭記…在公山錦江之西扶餘半月之東.
其源出自鷄龍經公山南折而西乃與錦江合 洑而南入于海.


석탄은 부여 동쪽 12리에 있다.  백마강의 상류다.

안노생의 석탄정기에 따르면…공산 금강의 서쪽, 부여 반월성의 동쪽에 있다. 원 물줄기는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공산의 남쪽에서 꺾여 서쪽으로 간다. 그리고  금강과 합류하여 거슬러 휘돌아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위의 기록으로 보자면, 백마강은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공주의 공산 남쪽에서 공산의 서쪽으로 꺾이고 있다.
공산의 서쪽이 곧 부여 반월성의 동쪽이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역시 부여의 동쪽 20리에 공주가 있는걸로 되어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보자면, 공주의 공산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고, 부여의 반월성에서도 역시 반월성 동쪽이 아닌 북서 방향으로 백마강이 흐른다.

  한반도에는 부여의 동쪽 12리에 석탄정이 있을 리도 없다. 백마강이 그쪽으로 흐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탄(石灘)을 노래한 방대한 기록이 있는데, 부여와 공주의 명소에는 누락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 때의 이존오가 은둔해 살았다는 부여의 석탄을, 하나같이 공주의 석탄으로 소개하고 있다.
  부여의 반월성 인근에 있는 석탄이 어떻게 공주로 옮겨갔는지 그것도 궁금할뿐더러, 공주관련 명소에는 석탄(石灘)의 위치조차 찾을 길 없다.

 

  이병도 번역의 삼국사기를 읽다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武王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무왕 35년 2월에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왕흥사는 강수에 임하고 채식이 장려하였는데, 왕이 매양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행향하였다.

  그렇게 되어있는데, 강수(江水)를 금강(錦江)의 지류로 토를 달아놓았다.

  원문의 水자를 江水로 새긴 것도 이상하여, 다른 삼국사기를 뒤졌다.
이재호 번역본에는 그냥 江으로 새겨놓고 있었다.


  왕흥사지의 소재는 현재 부여군 규암면 신리로 되어있는데,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부소산과 마주하고 있다.
  강변에서 제법 들어간 곳인데, 백제시대 때에는 강물이 지금보다 많았다고 치더라도 물가는 아니다. 그리고 강수(江水)라는 지류를 낄만한 곳도 아니다.

  이병도의 번역이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는데…무엇이 무엇인지, 우리역사만큼 혼란스러운 번역들이다.

  문제는 사천성의 강수(江水) 상류에 백마(白馬)가 들어간 지명(地名)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水經注疏
  大江出汶山…小水百數…東南下百餘里, 至白馬嶺(…龍 北四十里有白馬關, 關甚 峻…白馬嶺在松潘廳西北, 古白馬羌地, 今白馬夷地…)…

…《益州記》曰..自白馬嶺回行, 二十餘里至龍 

  장강은 문산에서 발원하는데, 작은 물줄기가 1백을 헤아린다.…
동남으로 1백리를 가면 백마령에 이른다.
(용학의 북쪽  40리에 백마관이 있는데, 아주 험준하다.…백마령은 송반청 서북에 있다. 옛날 백마강의 땅으로 지금은 백마이의 땅이다.)

  익주기에 이르기를, 백마령에서 빙돌아 20여리를 가면 용학에 이른다.   


  백마(白馬)라는 지명이 혼란스러운 곳에 백마(白馬)가 붙은 강이 없을 수 없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뒤져보니, 감숙성 경계, 즉 백마이(白馬夷)의 땅에서 발원하는 백마수(白馬水)가 있고, 또 사천성에도 있었다.

 ① 白馬水. 源出甘肅文縣西南境. 東北流入白水河. (水經注)水出長松縣西南白馬溪. 東北往白水. ( 宇記) 水中有石如馬

  감숙성 문현 서남의 경계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동북으로 흘러 백수하로 들어간다.
  (수경주) 장송현 서남 백마계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동북으로 백수로 들어간다.
  (환우기) 물 속에 돌이 있는데, 말의 형상이다.

② 在四川境. 見沙溝河條

  沙溝河. 自四川灌縣分岷江南流. 爲수江之西支. 南流又分爲二支. 一經崇慶縣東爲白馬河. 一慶崇慶縣西爲西河. 又南合流爲白西河…南與岷江會.

  사천성 경계에 있다. 사구하를 보라.
  사천성 관현에서 민강과 나누어져 남쪽으로 흐른다. 수강의 서쪽 지류가 된다. 남쪽으로 흘러 다시 두 지류로 나누어지는데, 그 한쪽 지류가 숭경현 동쪽으로 흐르는데 백마하가 된다.…남쪽에서 민강과 합류한다.

   사천성의 성도(익주) 일대에도 역시 관현(灌縣)을 기점으로 금강(錦江)과 백마강(白馬江)이 서로 맞물려 휘돌고 있다.

 

http://www.bc8937.pe.ne.kr/technote/read.cgi?board=free&x_number=1123849633

 

 

 


58.226.233.138 차이나야후:

에서 長沙石灘으로 검색하니 어떤 게시판에 올린 일기가 검색되어서...

그런데 해석이 영 안됩니다.

長沙에서 애인하고 산뽀를 즐기며 놀았는데, 

와! 돌도 많고 좋다. 큰 바위, 작은바위 오밀조밀 따닥따닥....

밥은 뭘 먹지? 면 아니면 분식 어쩌구조쪼구...

그래저래 재밋게 놀다가 집에가게 되었는데...

부모님 야단맞을까봐 걱정이 된단 말이야...

대충 그런 내용같습니다.

그런데 長沙에 石灘이라는 바다 처럼 큰 물가(江邊)가 있다는게 흥미롭지 않습니까!!!!!!!!!!!!!!!   (^^) 

 

長沙石灘 (2006-07-21下午)


今日同豪,木,ken 去左長沙游水(平時去開個度)

一去度~~面目全非!!!!!!!石灘也!!!下次唔去e 度

好多石,大石細石都好多!!!

又廢事行去塘福同想食游小姐,so 留返係度過!!

游呀游~~~正~~!!!d水時凍時暖,好好feel^^

阿ken 今日有態,大放笑料~
豪話:唔食麵仲有咩食?(佢意思係話除左公仔麵仲有冇其他例如米粉食)
阿ken 話:有餐蛋麵食呀
攞命!!!

游到4點度食游水~~好味^^特別唔同嫁個味~~特別有風味,正~~

食完,沖涼~~走lu~~

見到個燒烤場,真係好想燒野食呀!!!唔得!!下個星期一定要燒野食呀!!!!!

有個壞消息,聽日要返工>..<


p.s.好討厭e 種人 恐怖





http://72.14.253.104/search?q=cache:bzwkE-3HQrUJ:www.ktzhk.com/archiver/diary/uid-239677-page-5.html+%E9%95%B7%E6%B2%99+ %E7%9F%B3%E7%81+ %E7%9F%B3%E7%81

-[09/10-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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