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bc8937
2007/4/28(토)
조회: 1689
답변  

 

 

삼국사기 의자왕편 28권 김부식의 사론(史論)

 

출처 : 디지털한국학

 

" 신라 고사(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했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臣)이 역사서를 편찬함에 그 전승(傳承)이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 말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들으니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고, 

<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비(金庾信碑) 및 박거물(朴居勿)이 지었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보인다.>

고구려 역시 고신씨(高辛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고씨(高氏)라 했다.”고 한다.

<진서(晉書) 재기(載記)에 보인다.>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다.』고 하였으며 또 『진(秦)나라·한(漢)나라의 난리 때에 중국인이 해동(海東)으로 많이 도망하여 왔다.』고 하였으니 삼국의 선조가 어찌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어찌 국가를 향유함이 이렇게 장구하였는가!

백제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행하는 일이 도(道)에 어긋남이 많았으며,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는 계속 화호하여 [신라를] 침략하고, 이익을 따르고 편의에 좇아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鎭)을 빼앗아 가기를 마지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과 친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국가의 보배』라는 말과는 틀린다. 이에 당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서 그 원한을 풀도록 하였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명령을 어기어 대국에 죄를 얻었으니 그 망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도다. " 

 



위 글은 삼국사기 의자왕편 28권 김부식의 사론(史論) 이다.

김부식은 진서(晉書)에 있다고 하면서 고구려 역시 고신씨(高辛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고씨(高氏)라 했다. 그런데 한서 왕망전에 유씨(劉氏)의 시조는 요임금의 아버지 제곡 고신씨로 부터 비롯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漢나라와 고구려는 한뿌리에서 나온것이 아닌가!


한서(漢書) 주석에 의하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준(準)이라 하였다. 응소(應?), 복건(服虔), 이비(李斐), 문영(文穎), 진작(晋灼), 사고(師古) 등은 모두 준(準)이라고 했다. 특히 응소(應 )는 융고야(隆高也) 준협권준야(準頰權準也) 높이 솟아있다. 그리고 뺨이 고르고 평평하다.라고 적고있다.

그러므로 고조 유방은 죽은 후의 휘호(諱號)가 준(準)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고구려 이전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인데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 또한 준(準)이다. 준(準)은 애왕(哀王)이라고도 하며 도읍(都邑)은 평양(平壤)으로 41世라고 되어있다.(箕子朝鮮聖蹟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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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22卷 高句麗本紀 10-寶藏王 27年

...且 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고구려의 비밀기록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900년이 조금 못 된다. 이제 지금 80명의 대장이 죽었다. 그래서 멸망하였다. 고씨는 스스로 漢나라로 부터 유래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90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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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timg7.gif     안녕하세요. ^^

 

  고구려는 900년의 역사를 지켜왔다고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김부식이 그런 사실을 감추고 역사를 짜집기하듯 고쳐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잘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마도 역사를 고쳤다면 김부식 말고도 세종대왕 때 고려사를 완전히 뜯어고친 학자들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고려조에서 역사실록이 있었을 것인데 그런 책은 지금 전혀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후기 조선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박대하면서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의심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한반도에만 있었던 것으로 오인하였고 그런 바탕하에서 반도중심의 조선역사가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급기야 일본이 결정적으로 우리역사의 모가지를 댕캉 날려버렸던 것입니다.

결코 우리 단군조선민족은 이 좁은 한반도 안에서 오천년을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고려 때까지 분명히 중국대륙에 있었습니다.

더 이상 궁금한 사항이 있어도 지면관계상 자세히 말씀 드릴 수가 없네요. 이 홈페이지 곳곳에는 관련 글들이 80~90%로 꽉 채워져 있으므로 많이 많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고구려 900년 설에 대한 것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본 싸이트의 주장이 아닌 퍼온 글로도 설명이 가능하므로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아래글을 참고해 주십시오.

 


 

<출처불명>

 

고구려 900년설  

가. 고구려 900년설

삼국사기에 나온 기록을 거꾸로 계산하는 방법이다. 668년 당나라와 고구려가 싸우고 있을 때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이 "고구려의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900년이 안 되어 80세 된 대장이 이(나라)를 멸한다'고 하였습니다. 고씨(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었는데 지금 900년이 되었고 (당나라 고종)이세적(李世勣)의 나이가 80세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 , 그림참조)라고 한 기록이 있다. 가언충이 요동의 전장에 직접 참여했다가 사명을 받고 황제에게 돌아가 아뢴 말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와 정황에 대한 그의 말은 신빙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가언충의 말대로 고구려가 건국된지 900년이 되었다면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록 705년(서기전 37~668년)보다 거의 200년이나 길어진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 건국 시기는 서기전 3~2세기로 앞당겨져야 된다.

나. 고구려 800년설

     이 설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거꾸로 계산한 것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왕손인 (고)안승이 신라로 넘어와 망명정부를 세운다. 신라 문무왕은 (고)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봉하면서 내린 칙서(670년)에서 "공의 태조인 중모왕(추모왕)은 덕을 비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웠으며, 위풍을 청구에 떨치고 어진 교화는 현도를 덮었다. 자손이 대를 이어 본지가 끊어지지 않고 천리 땅을 개척하여 800년이 가까웠는데 남건 남산 형제에 이르러......"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 그림참조)라고 했다. 이것은 신라 사람들이 고구려 건국 연대를 당시로부터 800여 년 전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으로부터 800년을 소급하면 서기전 132년으로 서기전 2세기가 되는 것이다.

다. 광개토태왕비에 나타난 17세손의 비밀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19대 왕이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비에는 동명성왕 이후 17세손(世孫)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림참조).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세운 비에 자기 왕의 대수를 틀리게 할 리는 없고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비밀이 있다며 찾아낸 것이 '대(代)와 세손(世孫)은 다르다'는 것이다. '19대'라는 것은 열아홉 번째 왕이라는 뜻이고, 17세손이라는 것은 열일곱 번째 세대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왕대를 보면 왕위를 태자가 잇지 않고 형제가 잇는 경우가 있다.

  4대  민 중 왕  =  3대 대무신왕의 동생

  6대  태조대왕 =  2대 유리왕의 손자

  7대  차 대 왕  =  6대 태조대왕의 동생

  8대  신 대 왕  =  7대 차대왕의 동생

10대  산 상 왕  =  9대 고국천왕의 동생

18대  고국양왕 = 17대 소수림왕의 동생

     김일출은 이 경우의 6세대는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계보에는 6세대가 삭제되었으며, 삭제된 6대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한 세대당 30년씩 계산해 180년을 더하면 고구려 건국은 서기전 217년이 된다는 것이다.

라. 그 외

     1) 서기전 108년 현도군의 고구려현

     漢書 권28하 지리지 제8하에 있는 기록은 고구려가 서기전 37년 이전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신빙성 있게 증명해 주는 자료이다 (그림참조).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현도군을 설치할 때 세 개의 현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려현이다. 당시 세 현은 이미 존재했던 현지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적어도 위만조선이 망한 서기전 108년(한 무제 원봉 3년) 이전에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1976년 북한의 리지린.강인숙은 '고구려사연구'에서 이 문제를 상기시키고 고구려 건국 연대를 서기전 108년 이전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2) 고구려 진한(秦漢)이후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끝에 김부식이 결론을 내린 부분에 "고구려는 진한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끼여 있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림참조), 여기서 '진나라'가 문제의 핵심이다. 이 기록을 이용해 손영종이 서기전 277년설을 들고 나오면서 건국 연대에 관한 논의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즉 시황제가 진나라를 세운 서기전 221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것이고, 거기에 더하여 광개토태왕비를 재해석하여 주몽이 즉위한 갑신년에 맞추면 서기전 277년이 된다는 것이다.

      3) 연변대학의 강맹산 교수의 주장 (고구려족의 기원과 초기의 국가형태)

- 진(秦)나라 이전에 나온 일주서 왕희편에 "북방 동쪽에 고이가 있다(北方臺正東高夷)"고 했는데 후세 사람 공영달이 "고이"라는 것은 동북의 이족 고구려다"라고 했으니 진나라 이전에 고이, 즉 고구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 예기 왕제편에 "동방에 있는 종족들은 이족(夷族)이라 한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순이란 사람이 주해를 단 '이아'라는 책에서 "이족은 모두 아홉인데 그 세 번째가 고구려다"라고 되어 있다.

- 옛 고구려에는 5부가 있었는데, 계루부.절노부.순노부.권노부.소노부 였다.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운 홀본은 고구려 5부 가운데서 계루부였고, 나라를 세운 뒤 처음 정복한 비류국은 연노부이다. 비류국이 고구려에 귀속될 당시 비류국 국왕 송양(松讓)이 "왕 노릇을 여러 대 해 왔다"고 한 것은 이미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여러 대가 지났다는 것을 뜻 한다.

- 삼국사기에 "일설에 따르면 주몽이 홀본 부여에 다다랐을 때 왕이 자식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딸을 주어 부인으로 삼도록 하였는데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 것이 "아무 사람도 없는 강가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으므로 홀본에 이미 국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북한의 연구 결과는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지만,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관해서는 우리 나라 학계에서도 새롭고 진지한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북한의 리지린.강인숙은 '고구려사연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많은 어용사가들과 남조선의 반동사가들은 전설적인 건국 연대를 반드시 내려잡는 것만이 과학적인 것처럼 떠벌이면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보다 100여 년 또는 수백 년이나 내려잡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표현 방식이 약간 걸리지만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우리 나라 사학자들은 그 동안 실증사학이라는 이름 아래 삼국사기 초반의 기사조차 인정하지 않고 3국의 국가 형성을 3세기 이후로 보았는데, 이러한 논리는 일본의 어용학자들이 내세운 식민사관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끝>

 


 

 

그리고 나제동맹에 대해서....

과거 전란이 심각하게 일어났던 시기는 고대 황제와 치우간의 격전 이후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 부터 입니다.

전국시대는 온통나라안이 전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시기를 말합니다.

전쟁이 많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동맹관계도 발전하는 것이며 강자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약자의 유일한 방법이 서로 힘이 약한자들 끼리 힘을 뭉쳐서 강자에게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 전쟁상황에 대해서 삼국사기에 기술한 내용을 해설한 논문을 상고사1 게시판에 실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비단 장수왕 때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서로가 빼앗고 빼앗기는 격동의 동아시아정세에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高句麗는 百濟와 같은 혈통이면서도 원수처럼 수십 차례의 전쟁을 하였고 新羅와 百濟 간에는 직계 혈통은 다르지만(먼 조상의 혈통은 같음) 서로 약자의 입장에서 서로 돕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장수왕이 나제동맹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아니라 백제와 신라가 힘이 빠지니까 발악을 한 것으로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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