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61
이름: 박민우
2015/10/11(일)
빙하기 이후 태고시대 황궁씨 계족 천산주 이동 연구  

 

 빙하기 이후 태고시대 황궁씨 계족 천산주 이동 연구

 

 

 

경로(徑路)
기후(氣候)
지형(地形)
지물(地物)
신속(神俗)
산수(山水)

 

 

 환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제일 중요한 원전은 부도지라 할 수 있다. 부도지는 짧은 문장 속에 인류의 창세기를 담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책이다.

 

 第八章

 더구나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성 안에 마침내 젖이 마르니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여, 풀과 과일을 다투어 취하므로, 혼탁(混濁)이 지극하여, 청정(淸淨)을 보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황궁(黃穹)씨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곧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였다. 물러나와 제족(諸族)에게 고하기를

"오미의 재앙이 꺼꾸로 밀려오니, 이는 성을 나간 사람들이 이도(理道)를 알지 못하고, 다만 혹량(惑量)이 불어 났기 때문이다. 청정(淸淨)은 이미 없어지고, 대성(大城)이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이를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이 때에 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대성을 완전하게 본전하고자 하므로, 황궁씨가 곧 천부(天符)를 신표(信標)로 나누어 주고, 칡을 캐서 식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사방에 분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청궁(靑穹)씨는 권속(眷屬)을 이끌고 동쪽 사이의 문을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서쪽 사이의 문을 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권속을 이끌고 남쪽 사이의 문을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권속을 이끌고 북쪽 사이의 문을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가니, 천산주는 매우 춥고, 매우 위험한 땅이었다. 이는 황궁씨가 스스로 떠나 복본(復本)의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맹세였다.


경로(徑路)
기후(氣候)
지형(地形)
지물(地物)
신속(神俗)
산수(山水)

 

 

 성을 떠난 사람들

 

 약 1만 4천 년전, 이들은 아직 초기 단계의 인류이므로 몸이 성하지 않았다. 다리가 굽었거나 몰골이 짐승의 모습처럼 생겨 고립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부도지)

 성을 먼저 떠난 사람들은 천산으로 곤륜산으로 사막으로 나갔으나 결국 돈황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동 도중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태어났고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부족 단위로 이동하였다.(필자 추정)

 이들은 만리나 되는 길을 험준한 산을 타고 이동한 민족이다. 그것은 소수이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돈황에 도착한 이후 많은 가족들이 생겨 이제는 높은 산맥을 타면서 이동하기는 불가능해 졌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물길을 타고 이동하게 된다. 황하는 천산에서 시작되어 돈황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북쪽으로 꺽어 '오르도스'를 뺑돌아 남하하여 양자강까지 간다. '오르도스'의 북쪽은 내몽골과 접경한 곳으로 물과 수목 그리고 자원이 풍부하였다. 일단의 민족들은 돈황에서 남하하기도 했지만 황하의 물길은 북쪽으로 뻗어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先出城族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내몽골의 '우란찰포'까지 갔다. 우란찰포에서 다시 황하는 남쪽으로 꺽어지며 흐른다. 그곳은 물과 수목 그리고 사슴, 양, 소, 돼지, 닭 등이 뛰노는 낙원이었다. 낙원을 발견한 이상 더 이상 행군 할 필요가 없던 민족은 정착했고 그곳에서 기장, 조 등을 심고 수확하며 초기 형태의 농업을 시작하고 목축을 하며 살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에 옥이 풍부하게 널려져 있었다. 그것은 근처 화산에서 폭발되어 분출된 것으로 오랜 시간 동안 홍수에 떠밀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옥을 캐기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상당히 강한 재질의 경옥이기 때문에 가공하기 어려웠지만 그들은 일상의 무료함을 떨쳐버리고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식량을 움켜진 부족장이 일을 시키고 녹봉으로 식량을 나누어 주며 전 부족이 옥가공 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텰(鐵 Steel) 운석을 주워 공구로 만들어 사용했다. (추정)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의 거의 90%는 텰(鐵 Steel) 운석이다. 순도 100%에 가까울 정도로 양질의 텰(鐵 Steel)도 많다. 이것을 달구어서 두들기고 물에 담구어 급냉시키면 오늘날 금속 가공에 쓰이는 '바이트'나 초경공구 정도의 강력한 공구를 만들 수 있었다.(현대 과학 이론에 부합하나 증거 부족)

 그들이 우란찰포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자급자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떠나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곳은 오지이다.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물이 풍부하고 짐승도 많았지만 지역을 벗어나면 끝없는 초원과 밀림 그리고 맹수들이 우글 거리므로 나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옥가공 기술을 점점 발전시켜 옥에 검은색 코팅하는 기술까지 익혔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玉을 통하여 神에 가까이 가려는 행동이 자칫하면 두번째 재앙을 맡게될까 두려워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神에 대한 禮를 표시한 것이다.

 

 옥가공 기술에 대한 요약

 옥을 불에 달구어 가공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대형 옥 가공품도 많은 것을 보면 그 방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옥을 불에 달구어서 달군 부분을 때리면 그 일부분만 떨어진다. 그리고 최고 높은 온도까지 도달한 옥을 초경공구로 긁으면 줄무늬를 새길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은 평생 동안 옥 가공만하던 장인들만 할 수 있는 고도의 방법으로 오늘날 재현하기 어렵다. 이들만의 도시는 초기 국가 형태를 지녔지만  어떻게 보면 오늘날  농업, 목축을 겸한 공업단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평생 동안 옥을 가공하는 노하우는 분업화 했을 것이다.

 


 신속(神俗)


 그들의 神은 麻姑 女神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족을 지켜주던 실질적 그들의 조상일 수도 있다. 그들의 몰골을 치료하기 위해 서방에서 파견나온 신선이면 또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들은 천산을 떠나 오면서 너무 고생을 많이하여 풍토병을 얻었거나 아니면 태생부터 꼽추, 난장이 등 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 인사를 초빙하여 치료에 힘 솟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일방적으로 웅녀나 마고 일 것이라고 지명하는 것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흑피옥 유물 가운데는 그들의 神에 해당하는 인물상이 딱 한 개 있는데 그 인물상은 현대인 가운데서도 체격이 건장하고 인물이 잘 생긴 스타일로 굳이 누구 닮았는가를 지목하면 영화배우 남궁원氏나 유인촌氏 정도 될 것 같다. 그 神人은 두루마기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흑피옥 유물에는 여신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여신상은 흑피옥으로부터 훨씬 오랜 세월이 지난 약 6천 내지 7천년 이나 지난 후에 생긴 것이다. 그 동안 인간 세상의 가치관은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밖에 유물을 직접보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연구한 부분과 중첩 될 것이므로 생략하는 것이 좋다.

 

 


  2차, 3차 등등 줄이어 마고성을 떠난 사람들


 황궁씨가 권속을 나누어 무리들을 출성시키기 전에도 사람들은 떠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리들은 멸종되거나 살아 남았어도 소수 부족 단위로 남아 지금의 동남아 일대와 중국의 오지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멀쩡한 神의 자식들이 오미의 재앙 이후 태어나는 자식마다 금수의 모양으로 태어나니 이 시기가 3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후 환인씨(1만 1천 년 전)때에 와서 地氣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第九章

옛날에 먼저 성을 나간 사람들의 자손이 각지(各地)에 잡거(雜居)하여,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거의가 그 근본을 잃고, 성질이 사나와져서, 새로 온 분거족을 보면, 무리를 지어 추격하여 그들을 해하였다. 분거족이 이미 정주(定注)하니, 바다와 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왕이 거의 없었다.

 


  2차, 3차 등등 줄이어 마고성을 떠난 사람들과 후기 황궁씨 일족도 차례로 흑피옥 부족들이 사는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속력은 너무나 강하여 외부인을 보면 죽이려 달려들었다. 그후에 도착한 이주민들은 하는 수 없이 다른 곳에가서 정착하게 된다. 그들 중 태행산맥을 넘어 간 사람도 있었고 태행산맥 서쪽 아래에서 정착한 사람도 있었다. 아예 베링해를 넘어 아메리카까지 간 사람도 있었다. 後期出城族들의 일부는 요하 일대에 자리잡고 흑피옥부족과 1천년 동안 이웃해서 살다보니 玉가공 기술이 전파되고 서로 무역을 하는 등 제법 왕래가 많았다. 그러나 생긴 모습이 많이 달랐다. 흑피옥부족은 '난장이'들이 모여 사는 나라였고 요하 일대는 그래도 정상인들이 살았다. 요하를 넘고 태행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간 사람들은 멀리 일본까지 갔다. 그리고 청구와 한반도에도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황궁씨의 후예는 천산을 출발하여 태행산맥을 넘고 부상국에 당도하니 장차 이곳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길지 였으므로 요녕성 일대에 아사달을 짓고 영주 봉래 방장 지리 한라 백두 등지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사람이 많지 않았던 시대라 신선이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황궁씨의 무리들은 부상국의 좋은 땅에서 풍요하게 살았다. 특히 쌀과 콩, 조, 기장 그리고 해산물, 범피, 호피, 원숭이, 코끼리, 물개가죽, 압록강에서 나는 수암玉 등 많은 교역 물품을 요하 일대에 무역상들에게 공급하였다. 

 당시 환인씨의 나라는 천제울국으로 이전원에 그대로 있으면서 전 세계에 파견사를 보내 다스렸다. 황궁씨 일족들이 청구에 먼저 들어와 발판을 마련하여 후일 지금으로부터 약 6천 5백년 전에 서방 천제울국에서 환웅씨가 무리 3천을 이끌고 부상국으로 오게 된다.

 이른바 서자(庶子)는 神의 아이들을 가리킨다.  서자(庶子)의 올바른 뜻은 시바(Siva) 神이 보낸 사자이다. (아래 논문 '서자(庶子), 神의 아이들' 참조)

           

 1만 2천 년 전 대홍수 시기가 도래 되었다. 그것은 몇백만 년 간 지속되어 오던 빙하기가 갑자기 멈추고 전세계적으로 해빙이 시작된 것이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융기하고 갈라지고 폭우가 쏟아지고 해일이 일고 지구는 총체적 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1천 년이 지난 후 북방 시베리아 트랩에서 강력한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폭발은 간헐적으로 일백년 동안 폭발하여 전체 지구의 기온이 올라갔다. 화산이 폭발하여 내뿜은 이산화탄소가 그 원인이다. 지구 온난화는 약 2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홍수에 떠서 밀려온 옥조각들이 지천에 널어지니 흑피옥부족들은 신나게 더 많은 조각품을 만들고 요하 일대로 보내 식량과 맞 바꾸며 교역과 왕권력을 강화 시키고 아주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영거드라이아스 기간 동안 흑피옥 부족은 갑자기 멸종했다. 그들은 추위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가 끝나고 약 2백 년간 지구는 얼어붙었다. 이 기간 동안 요하 일대로 피신한 사람들은 평생을 '난장이' 취급 받으면서 공방에 쳐박혀 옥기 가공만 하다가 죽었다. 결국 적자 생존 법칙에 의하여 멸종했다.

 이제 옥문화는 요하 일대에서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흑피옥 기술이 100% 전수되지 않았으므로 옥을 가공하는 모양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옥이 귀해 졌으므로 조각품의 크기도 줄었다. 검은색 코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옥은 전부 수암옥으로 대체 되었다. 구하기 어려운 경옥은 이미 화산재로 덮혀서 땅속 깊은 곳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가끔 곤륜산 쪽에서 오는 무역상들이 곤륜옥을 가지고 와서 교역했다.

 요하 일대도 흑피옥과 마찬가지로 옥공업단지화 되었다. 사람들이 옥에만 집착하고 교역으로 먹고 살았으며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처럼 물이 풍부하고 나무도 많으며 초원이 있고 호랑이 곰 늑대 여우 돼지 닭 사슴 등 온난한 곳에 사는 동물과 추운 곳에 사는 동물들 모두가 집합해 있었다. 이곳의 기온은 여름에 30도 이상으로 올라갔고 겨울에는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스텝형 기후였다. 그러나 물이 풍부하여 농업, 목축 등으로 살 수 있었으므로 이곳도 자급자족이 되어 외부세계로의 진출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중원문화는 군사력이 강해지고 진취적으로 성장했지만 군대 자체가 없었던 홍산문화 세력은 점차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요하문명의 태동은 약 1만 2천 년 전부터 시작되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한 유물의 기록으로는 약 9천 년 전부터 시작 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유물을 연구한 사례는 너무 많으므로 생략한다.

 

 

 

 요하문명의 멸망

 

 요하문명은 곰토템을 가진 문명이었으므로 우리 고조선의 실체를 증명해주었다. 요하문명은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파형청동검, 옥 귀걸이 고인돌 등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다. 요하문명은 부상국에서 많은 수산물과 농산물 그리고 옷감, 범피, 호피, 물개가죽 등을 공급 받았으며 곰과 호랑이 토템 사상을 전파했다. 웅녀와 환웅 등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요하문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환웅은 천산에서 삼천의 무리들과 함께 부상국으로 곧장 온 선진 세력이었다. 환웅은 요하문명의 부족들과 융합하여 후손을 일구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배달 환국은 요하에서 발전과 진화를 거듭하며 한반도로 온 것은 아니다. 배달환국은 천산에서 직파한 선진 세력이고 비, 구름, 바람을 거느리고 인간사 360여 가지 일을 펼치는 문화와 문명을 겸비한 초능력자 집단 이었다.

 요하문명에서 최고(最古)로 오래된 유적은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BC7000-BC6500)이다.

 "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 (우실하 교수)
 
 홍산에서 약 400KM 떨어진 곳에 'Dalinur'호수가 있다. 지금 이 호수의 물줄기를 살펴보면 큰 지류만 5개가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홍산 일대에 물을 공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물이 끓기고 호수만 남아 있다. 물이 끓어진 이유는 사막화가 진행되기 때문이지만 왜 사막화가 촉발되었는 지는 잘 모른다. 그 이유는 지반 붕괴에 있었다. 북경대 교수 리산해의 말에 於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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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표의 역사탐험 - 잃어버린 문명을 찾아서 《동이족의 요하 문명》

 

 " 홍산문화 시기 후기에 대흥안령산맥이 단층작용으로 끓어졌습니다. 남쪽의 강소성 부분과 북쪽의 심양(요녕성 성도)에서도 역시 단층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이 두 지역의 단층작용으로 중국 중원의 평원이 상대적으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서부는 끓어진 부분으로 인하여 높아졌고 대릉하(大凌河) 유역과 요녕성 서부 즉 홍산문화지역도 상대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이런 지각운동으로 결국 대릉하(大凌河) 골짜기의 물도 강물도 계속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물이 마르면 지하수도 감소하게 되고 지하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면 식물도 자라지 못합니다. 식물이 자라지 못하면 황사도 심해집니다. 이런 지각운동 이후에 사람들도 점점 물이 많고 식물도 많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지요."


 당시 비옥한 땅에서 뛰놀던 동물들은 모두 온난한 초원지대에서 자라던 것들이다. 신수안토기에 그려진 문양은 돼지, 사슴, 새, 곰, 호랑이, 닭(봉황) 등이있는데 이들 중 특히 돼지와 닭은 따뜻한 곳에서 키우는 동물이다. 돼지야 말로 사람과 똑같은 식성을 가진 동물인데 당시 동물들만 보아도 기온이 따뜻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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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가점 하층 유물의 특징 :  곰 이빨 . 턱뼈, 개, 호랑이 유적에서 발견 이것은 사람이 살기가 좋았던 시절에 나오는 것이다.


 하가점 상층 유물의 특징 : 양, 염소가 나온다. 그것은 기후가 척박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홍산. 요하문명은 맥이 끓겼다.

 하가점 상층 . 하층 문화라는 것은 하가점 지역의 땅을 파고 보니 깊은 곳에서 발견된 문화와 얕은 곳에서 발견된 문화가 많은 차이를 보인 것을 말한다. 

하가점 하층 문화는 기원전 (2000년~1500) 시대로 본격적인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다. 그리고 하가점 상층 문화는 하층 이후의 것인데 이 시기를 끝으로 요하문명이 사라졌다. 그 때는 상나라가 흥했던 시기인데 이미 요녕성 지역에 고조선도 있었다. 


 결론하면 요하문명의 마지막 세대인 하가점 문화는 사막화로 인하여 수원 확보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그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상나라나 고조선으로 이주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빗살무늬 토기는 요하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인데 빗살무늬보다 발전된 형태의 채도 토기는 상나라에서 발견된다. 채도는 빗살이 없기 때문에 빗살무늬토기 보다 더 구워내기 어렵다는 사실로 보면 빗살무늬토기를 제작하던 사람들이 상나라로 옮겨갔을 가능성을 한번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상나라의 옥기모양과 홍산문화의 옥기 모양이 똑 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끝


2015.10.11 


朴 民宇

 


아래는 우실하교수님 자료    

 

 

우실하 교수(사진)는=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교수. 중국 요녕대학 한국학과 교수 역임. 문화사와 사상사, 문화종속론, 문화이론, 동양사회사상 전공. 주요 저서로 ‘오리엔탈리즘의 해체와 우리 문화 바로 읽기’(1997), ‘전통문화의 구성원리’(1998), ‘동북공정의 선행 작업과 중국의 국가전략’(2004) , ‘전통음악의 구조와 원리’(2004),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 등 7권의 단독 저서와 ‘고대 동북아 연구’(2008), ‘동북공정과 한국학계의 대응논리’(2008) 등 8권의 공저가 있다. 우리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원류를 밝히는 연구를 하고 있고, 상고사를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남다르다. 홈페이지 www.gaonnuri.co.kr 
 

[한민족 시원, 만주]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용 옥 토기 주거지 등 중국문화 최초 상징 뿌리
BC 6천년 한반도-요하 단일 문화권, 유물 증거


최근에 요하문명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년 8월29일 방영)이 방송된 뒤에 많은 사람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떤 역사 교사가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되느냐”고 묻더라. 아직 역사 교과서에는 단군이 신화로만 나오는데, 단군의 실체에 대해 학생들이 물어보고, “요하문명이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혼란스럽다고 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모르고 어떤 기록에도 없는 새로운 문명이 발견되었으니까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500년 앞선 하모도문화 발견에 중국이 난리 나 기원론 수정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하류에서 하모도문화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문화(황하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모도문화권에서 어떤 유적들이 발굴됐을까?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모를 길러서 심는 이양법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유적이 대규모로 나온다. 그것이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다. 이것은 황하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다.

 

‘오랑캐 땅’의 앞선 문명인 옥기시대에 중국 더 큰 혼란…세계도 깜짝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 요서, 만주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 생각나고, 수렵·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단계에 오면 이미 초기 문명단계,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문명단계가 성립할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동기가 나오든지, 문자가 나오든지, 권력분립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징표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문화 시기에서는 청동기나 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나 문자가 없는 문명단계, 국가단계는 세계 역사에서 많다. 단적인 예로 몽골제국은 전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제국 형성 이후에 필요에 의해서 새롭게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했던 타제석기, 마제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 구분은 동북아시아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시아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마제석기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간에 옥기시대를 새롭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순에 빠진 중국이 역사 재편 작업 들어간 것이 동북공정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은데,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소수 민족은 모두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일부 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논문들이 요하문명을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와 연결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한 동북공정 때문에 말이 많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공정이 아니다. 동북공정의 진짜 의도는 동북지역의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전부 중국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화부터 시작해서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 단군, 해모수, 주몽 전부 다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의 후예인가? 단군의 후예인가? ‘그래 너희는 단군의 후예인데, 단군이 바로 황제의 후예다.’ 이런 논리로 가고 있다. 지금, 요하문명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요하문명 세력이 진짜 중국 황제의 후손이었나?


자 그럼 이 지역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사진 자료 중심으로 보여주겠다. 그 문명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 진짜 황제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요하문명은 요하를 끼고 형성된 문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하 상류는 내몽고자치구의 동북쪽에서 랴오닝성 발해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수많은 지류를 지니고 있고, 이게 발해만으로 흐르는데 ‘ㄱ’자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요하를 중심으로 신석기 문화인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 분포도(출처: 우실하 ‘고조선의 강역과 요하문명’)

동석병용시대는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동검, 한반도에선 무더기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다.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문화가 요하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자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자.

 

세계 최초 요하 옥기와 비슷한 유물 전남 여수에서도 발굴


흥륭와문화의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 발굴 모습.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 문암리유적에서 나온 옥 귀걸이(사적 426호). 기원전 6,000년 이상으로 연대가 추정된다. 우실하 교수 제공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다. 그의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전남 여수시 안도패총유적에서 나온 귀걸이와 발굴 당시 사진. 안도패총의 귀걸이는 화산지역에서 나오는 흑요석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장강하류를 통해서 보다는 백두산 지역에서 백두대간 동쪽 동해안을 통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남해안의 흑요석은 일본 화산지대의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성분 분석이 필요하다.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

흥륭와문화지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 아래 부분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곳이 해자 혹은 환호이다. 우실하 교수 제공


흥륭와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 우실하 교수 제공. 그래픽 문석진

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위 사진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5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2,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사해문화시대 집단 주거지인 요하제일촌(사진 위)와 마을 한가운데 돌로 쌓은 용 형상물(사진 아래). 중국 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우실하 교수 제공

사해문화는 흥륭와문화 보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두 문화가 비슷해서 보통 사해-흥륭와문화 또는 흥륭와-사해문화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사해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요하제일촌이다. 이 집단 주거지가 발견돼 사해문화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여기도 해자 혹은 환호가 있고, 100여 가구가 살았다.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 모양의 조형물이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쌓아서 용 형상물을 만들었다. 길이가 19.7m, 폭이 넓은 곳은 2m, 좁은 곳은 1m다. 중국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사해유적에서는 용문 도편도 나온다. 뱀이 똬리를 튼 그림이 새겨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게 용에 대한 최초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조보구문화 시대에는 최초의 봉황이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께 새 형상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화제일봉’이라고 부른다.


채색 토기, 황하문명은 서역 전래설…요하문명은 독자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보구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다. 그릇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앙소문화에서 채도는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기원전 4,500년인데, 조보구의 채도는 앙소문화보다 최소한 500년이 더 앞선 것이다.

앙소문화의 채도는 단순 기하문이거나 고기나 사람 얼굴을 그렸다면 조보구의 채도는 디자인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채도를 평면으로 펴보면 현대적 디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사슴, 돼지, 새 등의 머리를 한 용이 그려져 있다. 녹수룡, 저수룡, 조수룡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보구문화 시대에 신성시 했던 주요 토템 동물들일 것이다.


조보구문화 소산유적 존형기의 신령도안. 우실하 교수 제공

채도 존형기가 의미하는 것은 요하문명이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하문명을 대표하는 앙소문화의 채도가 서방에서 전래했을 것이라는 ‘채도서역전래설’이 세계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앙소문화 채도와 거의 똑같은 것이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발견된다. 지금까지는 채도가 서방에서 들어와 앙소문화 지역을 거처서 요서 지방 일대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보구 채도가 그릇의 모양도 다르고 5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유입 루트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최초의 옥, 최초의 용, 최초의 주거지, 최초의 토기, 최초의 치아 수술 흔적 등이 모두 요하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실하 교수, 정리=박종찬 기자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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