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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bc8937
2016/4/3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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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쿠키뉴스] 2006년 12월 15일(금) 오후 05:50

 

[쿠키 문화]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미국인 여성 사학자에게 대한 헌사로 보인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 사학자로 서양인으로는 맨 처음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고,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시작으로 ‘코벨의 한국문화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조만간 나올 2권의 제목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이름도 낯선 서양 사학자를 뒤늦게 재조명하고 나선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코벨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한일고대사,한국미술,불교,도자기 등에 대한 1400여편의 칼럼을 썼고,‘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책을 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코벨만큼 정력적으로 한국문화를 연구한 서양 학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

그러나 코벨의 존재가 진정 빛나는 것은 연구의 양이 아니라 그 질 때문이다. 그녀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바로 한일 고대사 분야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되려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 미술사 분야의 거장을 꿈꾸던 코벨은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한국 땅에 뿌리를 두었다는 ‘고대사의 진실’을 눈치채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시선은 한국미술사에 집중되었고,일본의 고대유물에 남아있는 한국의 흔적들을 찾아내는데 매진하게 된다.

코벨은 1970년대 후반부터 매우 대담한 주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4세기경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을 주도했다”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다” “일본 왕실은 한국에서 말을 배에 싣고 건너간 모험가들이 건국한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등 그녀의 주장은 당시의 한국 사학계에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글 대부분이 영문으로 발표되는 바람에 대중에게 닿기 어려웠다. 코벨이라는 이름은 얼마 지나서 잊혀지고 만다.

죽은 코벨을 되살려낸 편역자는
김유경(59)씨다. 언론인 출신인 김씨는 1980년대 초반 문화부 기자로 코벨의 글을 받아 1년간 신문에 연재했던 인연이 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후에 코벨을 다시 기억해낸 이유가 뭘까? 김씨는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코벨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코벨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한국문화 해설자”라고 소개했다. 제3국 학자라는 객관적 위치,유물과 예술품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누구나 읽기 쉬운 칼럼 형식 등 코벨의 미덕이다. 김씨가 코벨의 글을 수집하고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1999년 출간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무속에서 신라 불교까지’

이번 책은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한 부여족과 가야에 대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부여족의 야마토 정벌 과정과 왕권 수립의 증거,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문화의 흔적,한국이 일본에 전한 영향,일본의 역사왜곡 등을 다룬 62편의 칼럼이 수록돼 있다.

코벨은 부여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수의 외국 학자들을 동원한다. 미국의 그리피스,페놀로사,게리 레저드 등이 코벨보다 앞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이라고 주장했고,일본인 학자 중에도 에가미 나미오,기다 사다기지 등이 기마민족 정벌론을 인정했다. 한국 사학자로는 북한의 김석형과 남한의 천관우,최태영의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김유경씨에 따르면 코벨의 연구에 대해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베푼 지원은 없었다고 한다. 코벨은 6개월마다 있었던 비자갱신 때 입출국을 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도움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코벨은 말년까지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책의 출간은 그녀에게 빚진 마음을 다소 덜어준다.
 
(부여기마족과 왜(倭)/존 카터 코벨/글을읽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 국민일보 쿠키뉴스(www.kukinews.com),

 

 

 

 

 

"일본인의 9할은 진짜 자기 역사 모른다"

[화제의 책] 美 학자가 본 '日 역사왜곡 1300년사'

프레시안 / 2006-12-15 오후 6:27:32

 

게르만 우월주의 강화를 위해서라면 역사왜곡도 마다치 않았던 아돌프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믿기 쉽다"고 했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히틀러의 신념은 한비자가 말한 '삼인성호(三人成虎)'와도 맥락이 닿는다. 세 사람이 연이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시장에 호랑이가 없어도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된다는 얘기다.
  
  이처럼 동서양에서 두루 검증받은 '반복된 말의 힘'은 꾸준히 반복돼 온 일본 역사왜곡의 장에서 다시 한번 그 위력을 인정받고 있다.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동해를 일본해라고 꾸준히 반복적으로 주장해 온 결과 세계 지도가 바뀌고 세계 학회가 고개를 끄덕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의 한국문화 연구 제1편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독도 영유권 분쟁이란 단편적인 사건으로만 대중에게 알려진 일본의 역사왜곡이 사실은 13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을 짚으며 "일본인의 9할은 모르고 있는 진짜 일본의 역사"를 그 초입에서부터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다.
  
  "'일 천황 혈통은 만세일계'? 조작"
  
  코벨은 왜곡된 일본 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도 어이없는 부분"으로 고대사를 꼽았다.
  
  근대 교육을 받은 일본 젊은이 대부분이 일본 지배자의 혈통이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져 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웠고 일제 강점기 교육을 받은 한국 학생들 역시 같은 사실을 주입 당해 왔지만 이는 8세기 당대 일왕을 합법화시키기 위해 '조작된 역사'라는 것.
  

▲ 부여기마족과 왜(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글을읽다)ⓒ프레시안


  "일본이 서기전 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 혈통이 한 가계로 이어져 왔다"는 주장은 712년과 720년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 두 역사서에 나왔다. 역사 편찬 당시 일본 왕가는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 된 집안이었을 뿐이고 그때까지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 년이나 더 길게 역사를 늘이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이 넘게 통치했다고 썼다."
  
  그러나 100년 역사를 1000년 이상으로 늘이는 과정에서 실수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8세기 일본의 사가들은 '일본 최초 왕조가 바다 건너 북쪽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기술을 지우지 않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 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를 휩쓸었던 부여족으로 3세기경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녔던 이들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를 점령하러 온 369년 무렵에는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왜 땅 남서부로 건너간 많은 한국인들이 수백 년 동안 정착해 있음을 알고 있다."
  
  코벨은 당시 역사학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범실에 혀를 차며 완벽할 수 없었던 일본 역사 조작의 시초에 묘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이러한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일왕네 조상들이 만든 것처럼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대였으면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한국학자들도 日 주입식 교육에 기죽어"
  
  이처럼 책에 실린 62편의 글을 통해 코벨은 일본의 고질적인 역사왜곡을 학문적으로 되짚었다.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일본은 전적으로 한국의 선진문화에 힘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를 숨기려고 하는지 그 근원을 밝히려는 고찰이 전 편을 관통하는 것이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3국 학자의 이 같은 객관적 성찰은 한국문화의 정립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코벨은 "일본학자들은 물론 한국학자들도 일본식 교육의 주입 아래 진실을 밝히는 데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벨은 특히 "한국을 대표한다는 역사학자나 미술사가들에게 자신의 주장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 광야에서 혼자 외치는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일본이 한국에 가한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라는, 항변에 가까운 아쉬움 토로 끝에는 10년 여간 한국에 머물며 한국을 연구해 온 학자로서의 씁쓸함마저 느껴졌다.
   
 
  이지윤/기자

 

 

 

 

[특별기획|역사 모독하는 일본]

서양 사학자가 본 한일관계 “한국은 부모, 일본은 부모 버린 불효자식”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978~86년엔 한국에 머물며 한국미술, 한국불교, 한일 고대사, 도자기 등에 대한 1000여 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 ‘조선호텔 70년사’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저서를 펴냈다.
그의 아들, 앨런 코벨 박사 역시 부여족을 연구하며 한일관계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다음의 글은 1982~83년 존(사진 왼쪽)과 앨런 코벨이 한국과 일본 역사적 진실에 대해 쓴 칼럼을 요약한 것이다(#6과 #7이 앨런 코벨의 글).
비록 20여 년 전 씌어진 글이지만 오늘날 일본의 행보를 정확하게 내다봤을 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제3국 학자의 냉철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①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 신라의 천마도. 일본의 스사노오노 역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② 백제 근초고왕 때 왕세자가 왜왕에게 하사한, 7개 곁가지가 있는 칼 ‘칠지도’.

[#1]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 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한다.

   

자민당 내 헌법조사위원회는 현행 헌법에 대한 다양한 개정안을 마련해놓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을 서슴지 않고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이 삭제된다는 것은, 1920년대 전후에 그러했듯이 군부 세력의 득세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로 현행 일본헌법 제4조를 삭제하려는 시도는 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결정적으로 말해준다. 현행 일본헌법 4조는 ‘천황은 국가적 문제에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신성한 日王’의 부활?

1920~30년대에 ‘신성 천황’ 개념은 일본 군부가 녹슨 칼 휘두르듯 내세우던 구호였다. 천황을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던 군부는 ‘만세일계의 현인신(現人神) 천황’의 이름으로 각종 군사조직을 강화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지금(1982년) 그런 것처럼, 교과서 내용을 왜곡했다.

한국과 일본의 건국신화의 시대적 배경은 모두 청동기 문화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신화내용이 엇비슷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일본보다 더 일찍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석기시대 일본으로 이주해 가면서 우수한 무기와 건국신화도 따라서 이동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된 현상으로, 앞선 문화와 앞선 기술의 무기를 가진 민족은 늘 그보다 못한 민족을 정복했다.

역사왜곡 또한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나라에서 행해진 일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보다 정직한 미술사를 선호한다. 중국 역사가들이 남긴 전형에서 보듯, 새 왕조를 연 개국공신들은 언제나 전 왕조를 비난했다. 공산주의 국가는 역사를 아예 사상의 선전도구로 활용했는데, 옛 소련이나 북한이 책을 정직하게 기술하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에 비해 일본과 서독은 민주국가를 표방한다. 민주국가라는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이나 난징 대학살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한다면 독일이 히틀러를 영웅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일본의 왕에게 아무 권력도 없던 중세에는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됐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아시아를 침탈하는 팽창정책에 천황이 이용되면서, 일본의 교과서는 선전도구가 되고 말았다. 최근 자민당은 일왕을 상징적 존재 이상으로 만들려 노력하고 있어 그 실현은 시간문제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일본인들은 이를 ‘국내 문제’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선 그렇다. 불행하게도, 수백만명이 그것이 일본 내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임을 알고도 말할 수 없게 됐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한때 아시아 8개국에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고 여타 국가에도 말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친 ‘세계의 문제’였다.

악명 떨치던 일본 경찰

일본이 상대적으로 빈곤국가이던 1920년대에도 군국주의의 대두는 그처럼 심각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은 세계 제2의 부국이며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따라서 군국주의는 백배 더 가공할 사태를 불러올 것이다. 한때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 경찰을 두려워했다. 한낱 동네 경찰이라 해도 일본에서조차 1930년대의 양식 있는 시민에게는 막강한 군부세력의 말단조직원으로 진정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에 머물 때의 일이다. 나는 여행길에 배의 상갑판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 “천황의 초상화를 싣고 가는 배의 상갑판에 올라간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니 당장 내려오라”고 해서 억지로 내려서야 했다. 또 말이 날뛰는 바람에 위험에 처한 일왕비에게 뛰어들어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남자는 ‘신성한’ 왕비의 비단옷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일본은 정말 ‘신성’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히로히토 천황이 취미인 물고기 표본에 심취하는 팔순의 멋진 노인으로 남아 있기를 나는 바란다.

[#2]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교토의 선사찰 대덕사 진주암의 선정원.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진주암은 일본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100% 솔직했던 인물을 받드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개념을 특별히 더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독신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온갖 난잡한 일을 다 저지를 대신 승려 잇큐(一休)는 거리낌 없이 여자들과 즐겼고 그로 인해 계율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잇큐는 호벤, 혹은 ‘편의상의 거짓말’을 생의 방편으로 정당시하는 사찰에서 받드는 인물이 됐다.

진주암에서 이런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스님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옳소. 잇큐는 솔직한 사람이고 우리도 그래야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요. 잇큐처럼 정직한 건 미국에선 괜찮겠지만 일본에선 맞지 않아요”.

나는 일본에 있는 절이 모두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살아 있는’ 진주암에서 지냈다. 적어도 잇큐를 추모하는 사찰인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벽에는 섬세한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의 표준개념인 ‘살아 있는 거짓말’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

잇달아 2년간 한국식 솔직함과 일본식 편의(결과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거짓말하는 것)의 차이를 경험할 기회가 왔다. 하와이대에서 1975년 여름에는 일본 후류(風流) 연구여행을, 1976년에는 한국의 풍류 연구여행을 지원한 것이다. ‘후류’와 ‘풍류’ 모두 한자로 ‘風流’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풍류’라는 말을 격하시켰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 의미가 약간 다르긴 해도 지식인층에서 맥이 이어졌다.

미학적이며 심리적인 이 단어의 첫 글자는 ‘바람’이라는 뜻이고, 다음 글자는 ‘흐른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후류를 연구하는 동안 중국 시인 왕웨이(王維), 타오위안밍(陶淵明)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시를 읽었다. 그 시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떠나 매화나 달의 아름다움을 찾는 선승의 검박한 생활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속물적인 도락이었다.

또한 후류 연구를 위해 일본에서 가장 섬세하다는 음식점 몇 군데를 소개받았다. 모두 후류의 자부심을 뽐내는 곳이었는데, 아름다운 솔밭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가에 앉아 조그만 히바치(화로) 위에 끓여낸, 한입거리도 안 되게 적은 세 숟갈의 생선요리를 먹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답고 눈으로 즐기기 딱 좋았지만 허기를 달래기엔 너무도 적은 양이었다. 그들은 그것은 ‘대단한 후류’라고 설명했다.

다음해인 1976년 여름에 접한 한국의 풍류는 보다 명확해 보였다. 풍류는 엘리트를 위한 절묘한 음식맛이 아니라 시인 김삿갓이나 기생 황진이가 그런 것처럼 솔직하고 매인 데 없이 사물을 즐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류에는 ‘인생은 흘러가는 것, 머잖아 죽음이 올 테니 우리는 살아가야지’ 하는 실존적 느낌의 움직임이 가득했다.

서예에서도 한국적 무심함과 일본적 작의성은 차이가 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선승들의 붓글씨 어느 것이나 그러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한국의 서예는 글씨가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심한 경지를 보인다. 일본 서예에서는 작의성이 엿보인다.

   

이러한 작의성(Contrivance) 또는 호벤, 솔직함이 없고 자연스러움도 없는 이 기질은 일본인의 성격에 배어난다. 그러니 일본 교육부가 나서서 (교과서 왜곡을 두고) 사죄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떻게 해야 일본인들이 솔직해질까. 1300여 년에 이르는 한일관계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 어떻게 해야 그들이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솔직해질 것인가.

교과서 왜곡과 전쟁 징후

나는 일본이 절대 그럴 리 없다 확신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사이러스 피크 교수는 원자폭탄의 끔찍한 경험이 겨우 일본헌법의 전쟁금지 조항을 이끌어냈을 뿐이라고 썼다. 이후 신세대가 성장했고 국방비를 지출하지 않는 데 힘입어 일본의 1인당 소득수준은 엄청난 것이 되었다. 이제(1982년 현재) 세계인은 일본에서 군국주의 파워가 서서히 고개 드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이것이 일반 일본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 또한 일생을 이중적 얼굴로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한국인만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사회규범은 엄격하기 짝이 없고 거기서 헤어나올 방법이 없다. 자민당이 계속 집권한다면 신군국주의를 지속적으로 강화할 것이 뻔하다. 그것도 점점 더 대담하게 말이다.

아무도 고등학교 교과서 쓰인 몇 줄 글을 두고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배우는 청소년들은 곧 군인 적령기가 된다. 노골적으로 군을 미화하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일본 당국은 자기들이 저지른 침략과 전쟁의 흔적을 제거하는 데 나설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진상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 것인가.

[#3] 조지 샘슨에게 배운 일본사

영국 사학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영국에서 일본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조지 샘슨 경은 컬럼비아대학 재학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한 9명의 위원 중 한 사람이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오랜 기간 일본에서 살아온 조지 샘슨은 저서 ‘1334년까지의 일본사’에 ‘이즈모 후도키(出雲 風土記)에 전해지는 일본 고대사의 흥미로운 전설’에 대해 썼다.

‘이즈모 후도키’는 713년에 나온 책이다. 당시 겐메이(元明) 여왕은 각 현에 그 지방의 역사와 지리, 희귀한 일 등을 기록해놓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3군데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에서 온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던 이즈모(出雲)에 관한 것이다. 이즈모는 적어도 2~4세기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샘슨이 후도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신이 어느 날 살펴보니 한반도 남부에 땅이 아주 넓었다. 그래서 신라 땅을 조금 떼어내 바다 건너로 끌어다가 이즈모 자리에 붙였다.’

‘땅 끌어가기’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고 빙하시대의 지표이동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샘슨 경은 “이것은 남아돈 땅이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주한 것을 민간 설화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침입한 것이 아니라 이주해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신라 사람들이 대규모 이즈모로 이주해 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석기시대 일본에는 인구가 아주 적었으므로, 많은 한국인이 오늘날 미국 이민을 떠나듯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당시 일본으로 가 정착한 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오빠이며 일본의 역사서에 ‘맹렬한 남성’으로 기록된 스사노오노는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운데서도 아주 정력적인 남자였던 듯하다. ‘그는 김해에서 바다 건너로 금과 은을 보냈다’고 한다. 또 신라지역인들의 무속적 지도자로 흰말을 탔다고 전해진다.

히로히토 천황도 1930년대 거동할 때 흰말을 탔다. 1973∼74년 천마총 고분에서 자작나무 말다래에 무속적 통치자의 흰말을 그린 5세기경 신라의 천마도가 발굴됐다. 영리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들어온 무속사상에 흰말, 곡옥, 왕관과 기타 등을 연계시켰다. 1920~30년 군국세력이 팽창할 때 통치자 숭배사상이 되살아났다.

내가 샘슨 경에게서 배운 일본사에는 ‘일본의 성스러운 통치자’로 불리던 일왕 중에도 15세기에는 너무 가난해서 그저 글씨를 써서 팔아 연명하던 사람도 있다. 어떤 왕은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몇 달 동안이나 매장되지 못했다. 군권을 장악한 권력자나 장군들이 왕위를 마음대로 세우고 찬탈했다. 14세기에는 차남이 장남계열을 밀어내고 왕권을 차지했다. 적통 장자의 후손은 지금(1982년 현재) 오사카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고, 차남으로 왕좌에 오른 사람의 후손은 지금 도쿄의 왕궁에서 지낸다.

  

 

판소리를 말살하려던 이유

 

그렇다. 내가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사 중 어떤 부분은 지금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아 출판된 역사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샘슨 경이 예술문화사 분야의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이 바로 도호쿠(東北)대학의 후쿠이 리키치로(深井陸次郞) 교수다. 후쿠이 교수는 “15세기 아시카가 막부시대의 뛰어난 수묵화가 대부분이 한국인이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으로 절이 핍박받자 더 이상 절에 의탁할 수 없게 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의 불교미술가들”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 학자다.

나는 이 영국인 일본사학자로부터 일본 역사의 매우 민감한 부분인 초기 고대사와 1910년 이후 전쟁을 포함한 현대사 과정을 배웠다. 현대사 부분은 아직도 그때를 증언할 사람들이 살아 있다. 그런데 초기 고대사는 1930년대 일본이 세계의 정복자를 꿈꾸며 군국주의를 팽창시킨 기저로 활용된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2차 세계대전사를 다시 쓰는 순간에도 자국의 건국 기초가 된 고대사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712년에 씌어진 ‘고사기’는 과거 문자기록이 불가능하던 때 역사 속 왕의 치적과 영웅담을 자자손손 내려가며 노래처럼 외워 부르던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한국의 판소리와 같은 유형이다. 일본이 과거 왜 한국의 판소리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역사는 620년 성덕태자와 그의 삼촌이자 권력가인 소가 우마코(蘇我馬子)의 합작으로 편찬됐다. 소가 우마코는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 내 최고 군사권력자가 된 사람이다. 그러나 645년 소가 가문이 권력을 잃게 되자 그가 쓴 역사서들도 불길 속에 던져졌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그 책의 일부가 불길 속에서 건져졌다고 한다.

두 번째 역사 편찬은 덴무(天武) 일왕 때 시도됐다. 당시 오랜 역사를 모두 기억하는 신하가 한 사람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옛이야기를 모두 글자로 기록하라는 임무가 학자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천황이 바로 죽고 다음 대에 넘어가도록 아무 진척이 없었다. 결국 712년에 와서야 구전 역사를 고사기로 편찬했고 이것이 실존하는 최고(最古)의 일본 역사서가 됐다.

이 책은 한눈에도 엉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한국인들의 놀라운 위력을 입증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기에 이를 완전히 감춰버리기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하 한 사람이 기억해서 풀어놓은 옛이야기는 아마 순수 일본어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29년의 작업 결과 나온 고사기는 순수 한문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또 얼마나 부정확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다.

[#4] “일본을 좋아하나 신뢰하진 않는다”

“매켄지. 그도 한때는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그가 쓴 장문의 글이 도쿄의 신문에 보도되고 그의 뛰어난 능력에 감사하는 사설이 실린 바 있다. 그런데 그가 조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깨닫게 된 이후 일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하루아침에 ‘황색 저널리스트’라는 경멸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랜슬럿 로슨의 ‘극동의 제국들’ 중에서)

“매켄지는 선교사가 아닌 외국인 중 유일하게 일본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서울에서 시골로 숨어들었는데,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저지르는 짓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됐다.” (E. J 해리슨)

매켄지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라고 글을 남겼던가. 그야말로 일본이 새로 내놓은 역사책이 거짓투성이임을 확신케 해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도우려고’ 저지른 한일강제합방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일본 교과서 논쟁이 한참인 오늘날(1982년)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여기 인용해 본다.

“일본은 한국인을 억누르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식민정치를 시작했다. 민(民)과 융합하지 않고는 훌륭한 행정을 도모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통치하고 모욕을 주는데 융화는 불가능하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국가적 이상을 파괴하고, 오래 전부터 내려온 관습과 양식을 뿌리뽑으며, 얼마든지 거저 부려먹을 수 있는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일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한국인을 과소평가했다. 외교와 사회분야에서 일본은 전세계를 마치 어린애인 양 취급했다. 일본인은 한껏 미화하고 한국인은 무능력한 인종으로 여기도록 세뇌했다.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일본 문명이 세계 제일이라고 믿게 됐다. 한국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그저 노동력 착취 대상인 열등인간으로 대했다.

그러다 일본은 조선을 전시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건축물을 공들여 세우고 철도를 부설해 국가 경제력은 무시한 채 시설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용할 수 없는 것들로, 오직 일본인만이 접근 가능하거나 외국인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한국인이 생각을 하고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잊었다. 미성년자들은 때리고, 성인들은 감옥에 보내고 엄벌을 내려 몰아세움으로써 황국신민이 되라고 충성을 강요했다.

1919년 3·1운동은 일본이 반역자들을 키워왔음을 자각하게 된 계기였다. 이에 한국문화를 깡그리 섬멸하고 일본어를 선뜻 배우려들지 않는 한국인들을 족쳤다.”

   

매켄지는 일본 순사가 어떤 집이든 멋대로 수색하고 누구든 재판 없이도 벌주는 데 대해 썼다. 그들은 사람의 몸이 견뎌낼 수 있는 물리적 고통의 한계가 ‘하루에 태형 30대(대나무 두 개를 묶어서)씩 사흘 연속 90대’이고 그 이상은 고통이 극에 달해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계산을 해냈다. 1916년의 공식 보고서에는 8만2121명이 그런 체형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후에는 이런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았다. 같은 해에 3만2830명이 감옥에 갇혔다.

불온사상, 코끼리 이야기

일본이 이른바 ‘불온사상’이라고 간주한 사례 중에는 영국 선교사 게일이 한글로 번역한 키플링의 유명한 코끼리 이야기도 있었다. ‘코끼리는 두 번째 주인을 따르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본 당국은 이것을 한국의 아이들에게 두 번째 주인인 천황을 받들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여겼다.

은행은 한국인의 토지를 강탈하는 도구였다. 조선은행은 모든 종류의 통화를 관장하면서 한국인의 토지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세금을 내려면 현금을 마련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땅을 파는 조선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은 자들에게 이전 가격의 20%밖에 안 되는 헐값에 땅을 넘겼다. 이렇게 땅의 원 경작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일본은 ‘농업을 개량’했다.

난징 대학살도 일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모양이다. 아마도 일본은 후손에게 일본인들이 갸륵한 이타심을 발휘해 황인종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사회 저변을 발전시킬 소명을 떠안았던 것이라고 가르치려나 보다.

몇 년 동안 나는 칼럼을 통해 일본의 미술사가들이 이미 극동의 예술사를 자기네 뜻대로 다시 썼으며, 그에 따라 한국인이 만든 예술품 다수가 일본 예술의 범주에 편입돼버렸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저지른 잘못 중에서도 최악의 것은 한국문화를 말살해서 한국인이 과거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자신을 비하하게 만든 점이다.

나는 1930년부터 일본어와 그 문화, 역사를 연구해왔기에 일본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안다. 나는 1930년 이래 일본예술사를 진작시킨 공로로 히로히토 천황의 동생 다카마쓰공이 주는 메달과 명예를 받았다. 그러나 시코쿠섬이 해군기지인 것을 모르고 카메라를 갖고 그곳에 갔다가 가택연금되면서 동전의 다른 면도 잘 알게 됐다.

나는 시코쿠섬을 멀리 떨어진 연인들의 소풍지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인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그 섬에 발 디딘 나를 그들이 매우 수상쩍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일본 헌병은 내가 밥 먹을 때도 옆자리에 앉아 감시하고 심지어는 화장실 갈 때도 따라왔다(프라이버시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일본인을 아주 고위층부터 하류층까지 다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역사를 다시 쓴 일본은 그들의 본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5] 1930년대 군국주의로 되돌아가는가

1930년대에 나는 일본에 살면서 과거 컬럼비아대학에서 배운 일본어와 일본 예술, 문화를 더 공부했다. 일본사회에 나 자신을 투영해 일본을 더 깊이 이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일본학의 대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느라 기모노를 입고 다비와 조리를 신었다. 서양식으로 발달한 내 신체에 이런 차림으로 도쿄 요코하마간 급행열차를 타려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뛰던 시절은 악몽 같다.

일본에 있는 동안 두 분의 스승을 알게 됐다. 나보다 갑절로 연세가 많은 분들이지만 모두 영어가 유창하고 열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한 사람은 신문기자였는데 천조대신 신사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 해서 불경죄로 심한 처벌을 받고는 기자직을 버리고 ‘안전한 직업’인 사업가가 됐다. 그는 지금 다이마루백화점의 사장이 되어 이를 서구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다른 스승 후쿠이 리키시로 교수는 1920년대에 ‘15세기 일본의 유명한 수묵화가 중 몇 사람은 사실 한국인이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가 지방으로 쫓겨나 고통받고 있었다. 일본예술사에 박학한 그는 도쿄대학의 최고 교수직을 맡고 있었지만 그 발표 이후 이단으로 몰려 북동부 센다이의 도호쿠대학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의 연구발표는 일본학계에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때 그의 문하생 중 보수파 한 사람은 도쿄박물관장이 됐고, 서양인 문하생인 나는 그의 진보적 가르침을 좇는 미술사가가 되어 지금 서울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1983년 2월 한국을 찾은 나카소네 총리(왼쪽)가 전두환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일본 내엔 ‘좋은 것은 무조건 일본 것’이라는 사고가 아직(1982년)도 팽배해 있다. 일례로 그들은 진위 여부는 가리지 않고, 7세기 아스카 불교 미술품들도 단지 일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 것이 아닌 일본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나는 법륭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아스카시대 불교예술품이 한국에서 비롯된 것임을 역설하고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자 일본 태생의 한국인 학생 하나는 내 강의를 ‘아집’으로 간주했다.

예술사가인 나는 거만한 일본 미술사가들이 7세기 일본의 중요한 국보급 미술품들이 한국적 진수가 담긴, 한국인 손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나는 1930년대 일본에서 살았고 당시의 지배적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그때와 똑같은 정신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친군국주의, 또는 네오 군국주의라고 불러도 좋다. 본질은 같은 것이니까. 선량한 일본사람들은 1930년대의 그러한 군국주의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던 날 밤, 나는 일본공보관에서 다몬 마에다 관장과 얘기를 나눴다. 미국 FBI 관계자가 1시간 전쯤 그곳에 와 있다가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관장은 책상 유리판 위에서 무슨 서류를 태우고 있었다. 관장은 한마디로 충성스런 일본인이었다. 그는 사상이 자유로운 사람이어서 맥아더 장군은 일본 패전 후 유일하게 그가 도쿄시장으로 나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관장과 나 두 사람 모두 일본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았다.

“이건 무서운 실수요.”

그는 계속 그렇게 말했다.

“군부가 저 잘났다고 그러는 거요. 시민은 그 사람들을 말릴 수가 없어요.”

일본은 군국주의가 지배하던 1920~40년대의 정신을 되풀이하려는가.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은 과연 군부의 도전적인 움직임을 막을 수 없는 것인가.

극동문제의 중심축은 한국

처음에 나는 이번(1982년) 교과서 왜곡파동이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리라고 봤지만, 자세히 검토하면서 의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국 헌법에서 전쟁금지조항을 없애기 위해 홍보해왔다. 현행 일본헌법은 그 골자를 사이러스 피크 교수가 작성한 것으로 서구적 이념의 소산이다. 피크 교수는 자신이 전쟁금지 조항을 삽입하도록 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시 레이건은 할리우드 배우였을 뿐 아시아 문제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 레이건은 막강한 세계적 파워를 지닌 대통령으로, 아시아가 얼마나 복잡한 곳인지 알기 시작한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중동이 세계문제의 중심이라고 보지 않는다. 석유는 중요한 것이지만 세계는 지난 수천년간 석유 없이도 지내왔고 앞으로 대체연료를 찾아낼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극동문제야말로 중요한 것이며 한국은 거기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냐 마냐의 문제는 나이든 한국인들이 걱정하는 감정적 차원을 넘어선 세계적 문제거리다.

정직이 통하지 않고 계속 핍박당한다면 어떻게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단순히 교과서 왜곡이나 전쟁금지조항만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패전 이후 집권한 일본 자민당은 개헌위원회를 만들어 일본 천황이 상징적 존재가 아닌 국가기관이 될 것을 제의해놓은 상태다.

이는 바로 과거의 전쟁 주동자들이 했던 짓이다. 그들은 천황을 국가기관으로 이용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천황이 국가문제에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야심만만한 군부 인물들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역사상 일본 천황 혈통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 써놓은 것처럼 일본왕통이 서기전 660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4세기 들어 처음 생겨난 일본왕가는 바로 우수한 무기와 기마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한국 부여족이다.

505년에 일시적으로 교체됐으나 부여족은 계속 중요한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다가 6세기 후반에 가서는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제 와서 일왕이 권력주체로 나온다면 일본에 1930년대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내겐 ‘천황폐하’가 교토시내를 지나간다는 이유로 방문과 대문을 모두 걸어 잠가야 했던 기억이 있다. 1971년 자유시대에는 도쿄역 호텔에서 천황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일본은 어째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가. 일본은 군사비를 지출하지 않는 덕분에 이제 1인당 국민소득 대비 세계 제2의 부국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일본은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인들이 아직도 잊지 못하는 고통을 들쑤시는가. 일본은 또다시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있는가.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 전쟁을 금지한 일본헌법의 평화조항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군부를 그 옛날처럼 파괴적으로 강력하게 만드는 법안에 서명하는 것 같은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일본은 자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세력이 있어야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6]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 ‘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인들은 오직 백제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다.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먹는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곡을 일삼고 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방해 한국인을 노예로 부려먹었다. 또 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고려시대에는 특히 심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역사왜곡까지 새롭게 시도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거나 모욕을 한 귀로 흘려넘기는 한, 일본은 소리 없이 등뒤로 다가와 한국을 밟고 설 것이다.

[#7] 나카소네 총리는 한국계?

1983년 2월 신문은 전두환 대통령과 나란히,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일본 총리의 사진을 실어 보여주기 바빴다. 나는 수년간 한일 양국에서 생활하며 전형적인 한국인과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구별해 알아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총리의 사진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카소네 총리의 얼굴이 내가 생각하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다케오 후쿠다 전 일본총리는 대중 앞에서 그의 조상이 15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규슈로 이주해온 도래인(渡來人) 혈통임을 공표했다고 들었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가계 또한 후쿠다 전 총리처럼 먼 조상이 한반도에서 이민 온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문화사를 공부하는 내가 들은 나카소네의 만찬 연설 중 핵심은 “6, 7세기 일본의 역사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해준 기술과 문화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한 부분이다.

이제 일본의 지도자들이 그들이 진 빚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할 때다. 나카소네 총리는 그들이(한국에) 진 문화적·기술적 빚이 6, 7세기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 이전인 5세기 전체, 부여족의 혈통으로 일본 천황자리가 채워졌던 시대까지 걸쳐 있다고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카소네 총리의 우호적인 말들이 새로 씌어질 일본 교과서에 반영됐으면 한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나카소네 총리의 조상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궁금하다.   

 

글: 존 카터 코벨, 앨런 코벨
편역: 김유경
발행일: 2005 년 05 월 01 일 (통권 548 호)
쪽수: 324 ~ 339 쪽

 

 

 

 
[특별기획|역사 모독하는 일본]

일본인도 모르는 ‘진짜’ 일본 고대사
369년 부여족이 왜(倭) 정벌, 신도(神道)는 한국 무속신앙에서 유래
왜가 4세기 가야를 정벌했다? 일본의 지배자 혈통은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적 없이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다?
현재 일본 젊은이들이 배우는, 어이없을 정도로 왜곡된 고대사다.
4~7세기 고대 일본을 장악한 것이 한국계 혈통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1982년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 직후, 존 카터 코벨이 한·중·일 고대 역사서 연구를 통해 일본의 역사왜곡을 낱낱이 파헤친 미공개 논문을 최초로 소개한다.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갑옷으로 무장한 고구려 무사. 말에도 갑옷을 입혔다.

일본인들의 9할은 제 나라의 진짜 역사를 모른다. 진실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일본 교육부는 국가적 자신감을 얻기 위해 고대 이래 현대까지 역사적 사실을 위조하고, 가미카제식의 맹목적 충성을 요구했다. 이는 역사를 들춰보면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외국 역사가들에겐 잘 알려진 반면 일본인에게는 대부분 은폐되어왔다. 이 글은 왜곡된 일본역사 중에서도 가장 분명하고 어이없기까지 한 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그간 연구해온 것이 바탕이 되었다.

근대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본의 지배자 혈통이 ‘서기전 660년부터 한번도 단절된 일 없이 백수십대를 이어온 만세일계의 왕가’라고 배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교사는 한국 학생들에게도 이런 내용을 주입했다.

‘진무왕은 서기전 660년 신의 계보에서 나온 1대조이고 일본 열도 전체를 통일한 개국자’라고 이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신화는 보편적인 것이 되고, 1930년대 군부는 이를 더욱 강조하면서 이를 믿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다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건국 2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전세계 37개국에서 일본문화를 주제로 한 에세이 공모가 있었다. 필자도 젊은 시절 이에 응모해 ‘일본의 미(美), 시부미’라는 글로 상을 받았다. 이후 내가 일본의 미학이 사실은 한국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를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일본이 서기전 660년에 나라를 세우고 천황혈통이 한 줄로 이어져 왔다는 기록이 712년과 720년에 각각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 두 역사서에 나와 있다. 두 책에는 ‘천황가문은 서기전 660년 건국한 1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온 혈통’이라고 씌어 있다. 이는 8세기 당대의 일왕을 합법화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다. 역사 편찬 당시의 일본 왕가는 왕위에 오른 지 겨우 100년 정도 된 집안이었을 뿐이고, 그때도 일본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문자로 기록된 역사서가 없었다. 앞서 7세기에 역사서가 편찬됐으나 왕권 다툼의 전란 속에 불타버렸다.

망명 사관들이 날조한 ‘일본서기’

일본 천황은 백제에서 망명한 학자들에게 ‘일본서기’ 편찬을 맡겼다. 조국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원한을 품은 이들은 새로 섬기는 일본 임금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손에서 만들어진 일본 역사서는 엄청난 모순과 날조로 가득 차게 됐다. 그들이 알고 있는 실제 역사는 오직 300년 전부터였지만, 1000여 년이나 길게 역사를 늘리기 위해 어떤 일왕은 100년도 넘게 통치했다고 썼다.

그 전에는 오랜 가계를 노래처럼 외우던 가다리베(語部)들이 역사서 구실을 했다. 가다리베는 일본말로 가계를 외워 불렀다. 그에 비해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한문으로 씌어 있는데 어떤 경우는 음을 따서 쓰고 어떤 것은 뜻을 차용해 썼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신생 왕가의 역사를 오래된 것으로 탈바꿈시켜야 했고, 신라에 대한 증오에 불타면서 일본어로 들은 것을 한자로 옮겨야 했던 역사학자들의 어려움을 헤아린다면, ‘일본서기’에 수없이 나타나는 모순이나 오류는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그중 대표적인 실수는 없애야 할 사실 하나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그대로 뒀다는 것이다. 즉 일본 최초의 왕조는 4세기경 일본에 온 일부 학자들이 ‘기마족’이라고 일컫는 부족으로, 바다 건너 북쪽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시해버려도 좋을 일개 유목민집단이 아니라 한 세기에 걸쳐 한국의 북쪽 끝에서 남쪽까지 휩쓴 부여족으로 3세기에 북쪽에서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왔다. 선진기술을 지닌 부여족이 가야와 백제에 둘러막힌 지역을 버리고 부산에서 바다 건너 새로운 땅 왜(倭)를 점령하러 온 것이 369년 무렵. 이들은 가야와 백제에 많은 ‘사촌’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들은 바다 건너 일본땅 남서부에 많은 한국인이 수백년 동안 정착해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부여족은 야심만만한 부족이었다. 그들은 일본에 최초의 실제 왕조를 건국하고 척박한 그곳에 중앙집권화된 정부체제와 기마병술을 전수했다. 8세기 역사학자들의 첫 임무는 이런 부여족의 일본 정복을 은폐하고 부여족이 이룩한 중앙집권 국가를 당대 천황네 조상들이 만든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었다. 글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였으므로 이런 작업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서기전 660년의 일본은 구석기 혹은 신석기시대였으며 금속문명은 그때까지 도래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최초의 거주민은 아니다. 10만년 전 일본땅에도 인간이 거주해 돌도끼, 돌칼 같은 물건을 남겼다고 한다.

   

 

조몬(繩文)인과 야요이인 유적

 

① ‘일본서기’ 영문판 표지 그림. 동굴 밖으로 나오는 천조대신이 한국 무당의 차림을 하고 있다.
② 가야 말머리 갑옷.

그들이 누구인지, 원시도구를 만들어 쓴 호모 사피엔스가 그대로 멸족했는지, 아니면 그 다음 신석기시대 조몬(繩文)인과 연결됐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구석기시대 인류와 일본의 신석기 조몬시대 인류는 모두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 시작해 한반도와 알래스카까지 뻗어나간 북방족에 속한다는 것이다. 방사성 탄소 측정 결과 조몬 토기는 서기전 1만년에서 서기전 3000년대와 그보다 조금 늦게까지 분포한다.

일본 홋카이도 섬 최북단에 일부 남아 있는 아이누족은 오랫동안 조몬인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일본 정부가 종족외혼을 장려한 결과 순수 아이누는 지금 100여 명밖에 없지만 이들은 현재 일본인들보다 몸에 털이 많고 얇은 입술과 잘 발달된 턱을 지녔으며 몽골형 눈꺼풀이 없다. 백인인 코카서스 인종이 분명한 이들의 먼 조상은 아시아 북서부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조몬인은 수천년 동안 사냥으로 먹고 산 종족으로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서기전 3세기경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으로 오가는 관문인 규슈 북부에서부터 나타났다. 논농사법과 금속지식을 지닌 완전히 다른 혈통의 야요이(彌生)종족이 나타나 조몬인을 밀어내고 규슈에 정착했다. 이들의 신기술은 일본땅 절반을 넘어 동부까지 퍼져갔다. 규슈에서 발굴된 야요이인의 두개골은 한반도 남부 사람의 것과 유사하다.

③ 김해 퇴래리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 갑옷.
④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 갑옷.

야요이인은 조몬인과도 결혼해 논농사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농토를 빼앗기 위해 원주민을 토벌하기도 했다. 몇몇 고분에서는 조몬과 야요이 유물이 섞여 나오기도 하는데, 이때 토기의 생산이라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서기 57년 씌어진 중국역사서는 이 당시 왜에 100여 개가 넘는 부족집단이 청동기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보다 700년 전 신인(神人) 진무천황이 나타나 통일국가를 건국했다”는 주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온 야요이인은 대부분 농부였다. 한국인들이 엄청난 학식과 신기술을 가지고 이주해온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고분시대 이후의 일이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집단 정착지를 이루고 군림했으며 조몬인은 피지배계층이 됐다.

위의 상황으로 미뤄보건대, 일본 외무성이 내놓은 ‘일본약사(日本略史)’에서 “일본에 논농사와 금속문화가 들어온 것이 서기전 9세기”라고 한 것은 실제보다 500여 년이나 앞당겨 쓴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또 “야마토 정부는 서기전 5세기경 일어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여전히 구석기 조몬시대라 철로 된 창칼도 없었고 논농사도 짓지 않았고 대단위 정부조직도 없었다. 고고학은 일본 외무성의 이런 역사기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고고학은 구석기 인간인 조몬과 아이누족이 정벌당했거나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과 섞여버렸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에 바다를 건너온 한국인 집단은 일본 열도 여러 군데에서 한국문화를 발달시켰는데 그중 세 군데가 발달의 본산이 됐다. 규슈지방, 북쪽 해안의 이즈모 지방, 그리고 야마토로 알려진 오사카 나라평원이 그곳이다.

3세기에 중국 한나라가 망하자 난징과 산둥 부근에서 ‘진인(秦人)’이라 불리는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을 거쳐야만 일본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그중 일부는 한국땅에서 몇 대를 살다가 한국인이 됐다.

‘일본서기’ 이전 후한의 공식 사서인 ‘한서(漢書)’나 ‘위지(魏志)’ 등 3세기 의 중국책에 따르면 왜에서 부족간 권력투쟁에 의한 내전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왜구’ ‘난쟁이 족속’이라 일컫고 있었다. 몇 구절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왜인들은 새해도 모르고 사계절도 모른다. 그저 봄에 밭을 갈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으로 한 해를 가늠한다. 한 족장이 다른 부족장들보다 강력해 보인다. 규슈에 그 족장의 부(副)족장이 있다. 여자들은 몸에 분홍과 붉은 물감을 칠하고 맨발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길은 날짐승의 통로나 다름없고 좋은 논이 없다.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아 나무그릇에 담아서 맨손으로 집어먹는다. 독한 술을 많이 마신다.’

   

적어도 중국인 기록자의 판단에 따르면 3세기 후반 일본문명은 거의 원시시대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상류층은 조그만 봉분형 무덤을 만들고 청동거울이나 동검, 동탁을 부장했다. 청동방울을 쓰는 한국인의 도래로 청동과 더불어 철기를 사용하며 지석(支石)을 세우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처럼 연달아 일본땅에 들어온 이주자는 뒤떨어진 왜국에 와서 쉽사리 지배층이 되어 더 낳은 삶을 구가하려는 한국인들이었다. 이 시대에는 민족주의란 개념도 없고 한국과 왜국에 대한 충성심이 대립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는 주요 수송통로이고 소통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한반도의 같은 지역에서 떠나온 한국인들은 왜국에 와서도 같은 지역에 모여 살았다.

첫 번째 신라인 개척자, 스사노오노

신라인은 그중에서도 활동적인 이주집단이었다. 북쪽 해안의 이즈모(현재 시마네현 마쓰에)가 그들의 주된 거주지였다. 오늘날에도 이즈모에는 신도(神道)에 나오는 천조대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오빠로 알려진 맹렬한 남성 스사노오노 미코도(素?鳴尊 또는 須佐之男)를 받드는 신사가 있다.

스사노오노는 실존인물로 신라에서 온 첫 번째 개척자인 듯하다. 그의 아들은 신라에서 옷감을 취급하는 상인이라는 암시가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 이즈모 신사는 천조대신을 받드는 이세 신사보다 오래된 곳이며 한때는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었다. 지금도 ‘이즈모 신사에서 결혼하면 복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성스러운 백마 모형을 안치한 마구간 건물도 있다.

이로 미루어 초기에 신라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을 이끈 스사노오노 같은 무속적인 지도자는, 그보다 늦은 시기 경주 천마총을 만든 사람들과 같은 일파임을 알 수 있다. 스사노오노를 상징하는 신칼은 그가 머리를 베어 죽인 용의 꼬리에서 뽑아낸 것이라 한다. 이 칼은 ‘오로시노 가라스키’, 다시 말해 ‘한국의 용검(龍劍)’이라고 불린다. 이 칼은 일본 왕권을 상징하는 삼종신기(三種神器)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한반도에 삼국이 있던 것처럼 일본에도 세 곳의 새로운 한인 정착지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이즈모에, 고구려에서 건너간 이주민들은 규슈 북쪽에 자리잡았다. 부산-가야-백제 지역에서 건너간 사람들은 동쪽 깊숙이 야마토 또는 나라라고 불리는 땅으로 모였다.

기운 찬 한국인들이 일본땅으로 건너가면서 시베리아 지방에 성행한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무속신앙도 옮겨갔다. 따라서 이들은 신의 경지에 들어가 영혼세계와 소통하면서 무리를 재난에서 막아줄 사람을 지도자로 받들었다.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이 당시 모든 한국인은 무속신앙을 갖고 있었고, 일본의 무속은 한국에서 유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세계 여러 나라가 샤머니즘 형태의 신앙을 받들었다.

이즈모·규슈·야마토가 한인 정착지

북방 전역에서 태양은 소중한 존재였다. 곡식을 여물게 하는 태양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었다. 뱃사람의 삶에 중요한 바람도 숭상되긴 마찬가지였다. 또한 지방마다 특수한 신을 모셨다.

논농사에는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대가족이 필요하다. 풍년을 기원하는 온갖 행사가 치러졌다. 다산과 풍년은 매우 중요하게 간주되어 오늘날에도 신도 신앙에는 풍년과 다산의 성적 상징이 가득하다.

애초에 존재하던 수천 개의 조그만 마을은 야요이 시대에 와서 점차 통합되고, 가미신도 넓은 지역을 부여받으면서 줄어들었다. 지도자가 나타나 지배영역을 확보하면서 조상신 가미도 더욱 숭상됐다. 이에 따라 지도자인 왕의 조상신은 훨씬 우월한 것이 됐다.

일찍이 신라에서 건너와 이즈모에 모여 사는 집단과 그보다 늦게 건너와 천조대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를 수호신으로 받드는 집단 사이에는 모호하게나마 권력분배가 이뤄진 듯하다. 당시 중국의 기록에는 여왕 히미코(卑彌呼)가 3세기 말 실제로 일본의 일부 지방을 다스린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대 일본사에는 이런 여걸이 많이 등장한다.

일본 천황 혈통이 천조대신과 태풍의 남신(男神) 스사노오노 미코도의 결합으로 비롯됐다는 설정은 그때 일종의 타협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남신이 아마데라스 여신의 목걸이인 곡옥 500개를 씹어먹은 후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즈모의 신라인 집단은 시간적으로 먼저 일본에 건너왔다. 그런데 뒤늦게 김해에서 떠나온 부여 기마족 또는 가야 백제인 집단은 성능이 뛰어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규슈에서 오사카 나라지역으로 이동했는데, 본질적으로 같은 한국인인 두 집단은 평화협정을 맺어 이즈모 그룹이 해의 여신에게 첫째 자리를 내주며 항복했다(이것이 일본역사에서 말하는 ‘국양(國讓)’이다). 이리하여 천조대신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와 있는 대로 초대 일왕의 거룩한 조상이 됐다.

   

이즈모에 모인 집단은 아마도 뱃사람과 어부들이었기에 바람신을 숭상하다가 논밭을 지닌 아마데라스 여신 그룹에게 제압당했을 것이다. 이즈모 주변 땅은 벼농사에 적당하지 않았다.

같은 한국인인 두 개척자 집단은 결국 경쟁보다는 타협 쪽으로 뜻을 모았는데, 그 방법은 혼인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아마데라스의 자손인 1~3대 천황은 모두 스사노오노 쪽의 여자들과 결혼한 것이다. 스사노오노, 즉 이즈모 바람신의 후손인 이 여자들은 조상으로부터 신통력과 점성술을 이어받은 무당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초기 천황들의 이름과 가계를 살펴보면 이즈모에 정착한 신라인의 자취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역사를 암기하던 7~8세기 직업 사관들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가야를 정복했다고?

4세기 후반 왜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변화는 아주 급격한 것이었다. 3세기의 중국사서에는 ‘일본에 말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말의 존재가 입증된 것이다. 이 말들은 배에 실려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고구려 이웃 북방지역의 부여족이 길들여 사용하던 작달막한 몽고말인데, 부여족이 한반도 서부지역(백제로 알려진 곳)을 점령하고 부산 근처 가야지역으로 퍼지던 때에도 부여족이 대동하고 다녔다. 한국 고대사에 ‘동부여가 바다로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사는 이를 회피한다.

백제지역을 정복한 부여족은 그대로 남아 살기도 하고 일부는 나아가 가야족을 정벌, 그곳에서 입지를 굳건히 다진 뒤 더 용감한 일부는 369년 바다 건너 일본땅으로 갔다. 대담하게도 말이 동승할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간 이들은 4세기의 가장 큰 선단부대였으며 작전은 성공했다.

일본의 어용 사학자들은 물론 이를 ‘부여족의 일본 정벌’로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공왕후, 진무 및 여러 왕대의 기록에는 이 사실이 수없이 반영돼 있다.

8세기 당대 지배자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역사 쓰기에서 사실은 왜곡되고 180도 뒤집어져 ‘일본이 가야(미마나)를 정벌했다’고 기록됐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가야가 일본을 정벌한 것인데 말이다!

서기전 18년 백제 건국에서 6갑자, 즉 360년 이후를 보면 당시 부여 기마족의 이런 움직임과 대략 부합한다. 중국 한나라 멸망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서 역사 개편의 소요가 지속되던 때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진나라와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부여족은 남하하면서 멸망한 낙랑족과 합류하며 세를 불렸을지 모른다.

일본에서 말하는 이른바 ‘역사’에 따를 것 같으면 중애천황은 362년 죽었다. 그의 통치 이후 신공왕후(오키나지 다라시 공주)의 섭정이 이어졌다. 신공은 한국에서 출생한 왕녀다. 신공과 그녀의 아들 오진왕(호무다 와게 또는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 왕자로도 불린다)의 출연은 일본의 역사서에서 그 연대가 정확히 두 갑자인 120년 전으로 앞당겨졌다.

그러나 전체적인 왜곡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다. 그들에 따르면 신공이 가야(미마나)를 정복하고 이곳을 ‘일본(일본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에)’이 지배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369년에 가야에 기반을 둔 부여족이 바다 건너 규슈로 건너가 왜를 정벌했다.

부여족 선단의 항해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은 사실을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 일본역사서는 ‘신공왕후가 대구까지 올라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했으며 신라왕은 자발적으로 항복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는 모두 날조다. 왜는 한반도에 침입해 대구까지 올라갔다가 방향을 틀어 다시 남하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정복한 일이 없다.

진무천황 = 이와레 왕자 = 오진천황

8세기 일본 사가들은 ‘구다라기(백제기)’를 참고했을 것이다. 부여족은 대구를 정복하고 계속 남하했다. 그들은 만주의 본거지를 떠난 이래 계속 몽고말을 타고 이동했다. 부여는 남쪽에 퍼져 있던 마한 원주민을 제압하고 백제 지역에서 전리품을 얻어낸 뒤 낙동강 유역의 근거지나 부산으로 떠났다.

이러한 부여족의 정복활동 전체가 일본사서에는 ‘이와레 왕자의 야마토 동정(東征)’으로 기록돼 있다. 이와레 왕자는 후일 진무(神武)천황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이와레의 ‘이와’는 지금도 바위(岩)를 뜻하며 ‘레(余, 餘)’는 족속이란 의미의 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무천황이란 이름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편찬된 이후인 800년경에 와서야 처음 등장한다. 이와레, 즉 부여 바위왕자가 지나간 길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는 규슈에서 출발해 일본 내해를 따라 동쪽으로 400km 넘게 떨어진 나라의 야마토 평원으로 항해한 것이다. 지름길인 시고쿠섬의 남쪽 태평양 바다로 들어올 수 있지만 당시 배의 성능상 내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이 훨씬 안전했다.

   

이와레 왕자의 동정 속도는 느렸다. 곳곳에서 원주민의 저항에 부딪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와레 왕자의 동정은 4년, ‘고사기’에 따르면 16년이 걸렸다. 마침내 그의 부대는 오사카와 요도강에 상륙했지만 여기서 오랜 원주민(아마 야요이족일 것이다)의 저항을 받아 패했다.

이에 그들이 받드는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가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진군해온 것을 노여워해 패했다고 생각하고 이즈(紀伊)반도로 배를 돌려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부터 상륙했다. 후쿠오카현 동굴 고분벽화에 아마도 진무와 야다노 가라스(八咫烏)의 전설을 묘사한,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진무의 배를 인도하는 그림이 있다. 이때 이와레 왕자의 두 형제가 폭풍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의 어머니는 용왕의 딸이었다고 한다.

시련이 많아지만 마침내 그릇에 제물을 담아 제사를 지내게 됐다. 이와레 왕자도 토기를 직접 빚었다. 또다시 치른 전투가 패색이 짙어졌을 때 금빛 깃털이 달린 연(매를 말한다)이 이와레 왕자의 활에 내려앉아 적들을 눈부시게 만든 덕분에 이겼다. 오늘날 일본군부의 최고 휘장은 금빛 연 훈장이다. 이와레 히코노 수메라 미코도(磐餘(余)彦) 왕자, 즉 진무천황은 오진천황을 말한다. 일본사를 늘리기 위해 오진천황의 활동을 진무라는 가상 인물에 갖다붙여 기록한 것이다.

이와레 왕자(오진천황)는 우네비산에 안장됐다. 지금도 매년 4월 초사흗날 왕실의 제관이 나와 산과 강, 바다에서 나는 제물로 제사를 지낸다. 제관들은 그 제사가 현재의 일본 천황가문이 큰 덕을 입은 외국인 정복자에게 올리는 것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첫 역사책에 그의 동정(東征)에 관한 기록은 대단히 세밀하게 기록된 반면, 그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하지만 그의 아들 닌도쿠(仁德)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많이 기록돼 있다. 닌도쿠왕은 가장 큰 능묘를 축조했다. 이 능묘는 경주고분의 것보다 크다. 일본에는 규모가 다른 2000여 기의 고분이 있는데 한반도에 가까운 규슈 북부의 후기 야요이 시대 무덤은 자그마하다. 그러나 5세기가 되면서 고분은 갑자기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 이 대형 고분틀이 모두 오사카 나라지역에 분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닌도쿠 왕릉 발굴이 금지된 이유

또한 이들 고분에는 수많은 부장품이 매장돼 있다. 3세기 중국의 책 ‘위지’는 “왜에는 말이 없다”고 했으나 대형 고분에는 한국식 마구와 무기류가 부장돼 있었다. 부여족이 전투에 쓰던 말과 마구, 당시의 최신무기인 철제무기들로 보인다.

옛 천황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군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발굴이 금지된 상태다. 그런데 1872년 폭풍으로 닌도쿠 왕릉이 무너져 이를 복원할 때 내부를 본 컬럼비아대학의 쓰노다 류사쿠(須田龍作) 일본사 교수는 부장된 유물이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이었다”고 했다. 일본 당국이 부여 기마족의 야마토 정벌을 논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닌도쿠 왕릉을 발굴해야 한다.

부여족 혈통의 두 번째 왕이 되는 닌도쿠 천황(‘일본서기’에는 16대 왕으로 기재되어 있다)은 능의 규모로 보아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듯하다. 그의 통치형식은 봉건제이지만 장관이나 봉건영주와 같은 4개의 우지(氏)가 있어 왕명은 모두 그들을 통해 전달됐다. 4명의 우지 중 3인은 부여 기마족 건국자 오진왕을 보좌하는 무장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옛 야요이족 출신으로 무속의례를 주관하는 모노노베(物部) 가문이었다.

후일 모노노베 가문은 임금이 되는 근거가 무속신앙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무속과 대치될 불교가 왜에 유입되는 것을 반대했다. 나카도미 가문도 오래전 왜에 자리잡은 집안으로 여러 신에게 종교의례를 집전하며 사슴뿔을 갖고 점술을 행하였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일본 전역에서는 무속을 믿었지만 군사권력이나 종교권력은 모두 세습되고 있어서 혈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 역사가들이 당대 주요 가문의 역사를 모두 신의 시대라는 고대와 연관시키고 조상을 모두 신으로 설정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삼종신기가 가리키는 것은 한국

일본 왕권의 상징으로, 이를 소유한 사람이 왕이 된다는 삼종신기(三種神器)는 4세기부터 전해 내려왔다. 그러한 전통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에 따른 것이다.

그중 하나인 동경(銅鏡)은 처음엔 중국에서 제작됐는데 이것은 신통력을 지닌 것이라 하여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채 사후세계를 위해 부장되었다. 동경의 번쩍이는 기능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일반화한 태양숭배와 통했다. 6세기 초 신라금관에 달려 있는 조그맣고 둥근 금판도 태양을 뜻한다.

삼종신기의 둘째 물건인 칼은 왕권의 상징으로 일찍이 신라에서 이즈모로 이주한 한국인의 권세를 말해준다. 이 특별한 칼은 맹렬남 바람신 스사노오노가 머리 8개 달린 용을 쳐부수고 얻어냈다.

   

① 왕권의 상징, 곡옥이 장식된 신라 미추왕릉 출토 금제장식.
②5세기경 일본의 하니와 토용 무사(프랑스 기메 박물관 소장).

셋째 신기는 곡옥 또는 곡옥목걸이다. 곡옥은 일본에서 나지 않고 한반도 북부에서 나는 연옥이나 경옥을 깎아 만들었다. 고대에는 다른 신기보다 이 곡옥(일본에서 마가타마라고 부른다)이 진정한 왕권의 상징이었다. 경주 고분에는 이런 곡옥이 수십 개씩 장식된 금관이 많이 부장됐다.

곡옥은 태아나 올챙이와 비슷한 모습이다. 물고기는 아시아 전체에서 부의 상징이다. 그 위에 한국 무속에서 호랑이는 산신의 전령으로 중요한 존재이며 벽사(?邪·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침)용으로 지니는 호랑이 발톱은 곡옥과 생김새가 같다. 그러나 곡옥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며 그중에는 곰의 발톱도 있다. 단군은 웅녀(곰 토템 부족의 여인)의 아들이며 아이누족은 곰을 신으로 받든다.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은 지금도 곰 축제를 연다. 곡옥은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발굴된다. 이 물건의 이동경로는 북에서 남으로 향한 것이지 절대 그 반대방향으로 역류해온 것이 아니다.

‘고사기’, 특히 ‘일본서기’에선 왕가의 분열상을 감추려는 끊임없는 조작이 행해졌지만, 14대 중애대(代)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었다. 중애 이전 13명의 왕들은 모두 야마토에 거주했다는데, 중애왕만은 규슈에서 살았던 것이다. 중애왕은 10척 장신이라는 식의 특징적인 묘사가 많다. 그는 마지막 야요이 종족인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중애왕비 신공왕후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의 왕녀 신공왕후

‘일본서기’에 따르면 신공은 신라에서 온 것이 분명한 한국 왕자 아마노 히코코의 딸이지만 가야에서 왔을 확률이 더 높다. 중애왕은 신공과 결혼했다. 그는 이미 두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 둘을 두고 있었다. 새롭게 왕비가 된 신공은 매우 명석하고 영리했으며 얼굴은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워 아버지가 그를 매우 특별히 여겼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신공은 야심이 대단하고 수완도 비범한 한국 왕녀였던 듯하다. 그녀가 한국을 원정했다는 일본의 주장은 정반대의 것일 수 있다. 그녀의 전설적인 행적은 369년 한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일본을 정벌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외국인 왕족 신공의 개인적 거사(擧事)인 이 원정이 일본사에는 이와레 왕자의 무공에 가려 기록되지 않았다. 일본사가들은 부여족의 일본 원정 중 일부를 따서 이 두 인물의 전설적인 무공으로 돌려놓은 듯하다.

한반도가 이들에게 점령당해 왜땅으로 편입되고 신라왕이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남녀가 신무기를 들고 바다를 건너와 왜를 정복한 것이다. 또다시 ‘바위’가 저변에 드러난다. 신공은 중애왕의 아이인 태아(이와레 왕자, 즉 오진왕을 말한다)를 한국이 아닌 왜땅에서 낳으려고 자궁에 돌을 끼워 막아 출산을 지연시켰다. 부여족의 일본 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왜땅에서 태어난 자주적 왕가라는 해석이 가능하게끔 한바탕 작전이 연출된 것이다. 이로부터 350년 뒤 일본사를 처음 편찬할 때 한국과의 혈연관계를 덮어버리기 위해 역사기록의 전후좌우를 뒤바꾼 것이다.

신성시되나 실권 없는 日王

5세기는 신라와 야마토 두 나라 모두 무당이자 제관인 지배자의 힘이 정점에 달했다. 527년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무속의 색채는 많이 사라졌지만 일본에서는 계속 무속이 힘을 발휘했다. 이 원시 민중종교, 신도는 9세기에 불교와 대치되는 종교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신도는 점차 일왕 숭배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 반면, 한국 무속에는 그러한 요소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왕권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처음에는 불교가, 나중에는 유교가 작용했지만 그것은 신비한 주술적 힘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군사권이 무속과 결부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또는 ‘신성한 천황’을 위해 싸우는 일이 점점 중요하게 부각되고 정책상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고다이고(後醍歸) 천황조와 메이지 유신 이후 19세기에 이러한 풍조는 극에 달했다.

일본 역사 초기의 무속신앙은 한국에서와 비슷한 것이었다.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인 산신(山神)은 일본 무속신앙에 전적으로 흡수됐다. 즉 천조대신 아마데라스의 손자 니니기는 규슈에 하강하여 산신의 딸을 만나 사랑하면서 그녀가 그날 밤 잉태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단군설화와도 비슷하다(이 부분에 관해서는 최태영이 쓴 ‘인간 단군을 찾아서’의 가야 지명연구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산신으로 소개된 고황산령신(高皇産靈尊)이 고령가야의 한국인이었다는 연구가 가야지명 연구자인 다카모도(高本政俊)와 최태영의 연구로 나와 있다).

   

성군이 나오면 받들지만 패륜 군주가 나오면 제거한다는 것이 중국의 천명 개념이다. 중국에서는 천명을 내세워 왕조를 바꾸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결코 일본에는 도입되지 않았다. 그 대신 권력가문이 내세운 총리나 장군이 권력을 행사했으며 천황은 신성시되긴 했지만 실권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은 한적(漢籍)을 옆에 두고 이를 표절한 것이 분명하다. 한 예가 닌도쿠 천황은 거대한 묘 규모로 보아 일단의 강제노역을 동원한 왕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민가에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다 하여 3년간 세금을 면제해준 매우 인자한 군주로 기술했다. 중국 사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닌도쿠왕대(代)에 부여 기마족이 들여온 오락거리, 매사냥이 유행했다.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쓰기도 했다. 경주 석빙고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를 통해 비단과 무명을 비롯해 금, 은, 철, 한문책 등이 들어오고 교역량이 늘었다. 이때도 불교는 유입되지 않았다.

흔들리는 부여왕통

8세기 역사기술의 방편 중 하나는 유명 가문 우지(氏)의 조상을 일본 건국자 이와레 왕자의 원정에 동참한 신(神)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대표 우지는 가문 전체에 군림했다. 왕의 명령은 대표 우지나 장관을 통해 하부로 전달되고 농민과 장인이 여러 우지에 종속되어 노역을 하면서 살았다.

우지는 외국, 특히 한국이나 중국 진나라에서 비단옷 재봉, 직조 같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일본에 들어온 장인들이 형성한 것으로, 외래 예술과 기술을 망라한 이런 전문 우지가 700여 개나 됐다. 노예도 있었다. 남부 규슈가 전쟁에 패하며 생겨난 구마소족 같은 전쟁포로나 동부 혼슈에 굴종한 에미시족이 그러했다.

우지들의 존재로 왕권은 일정 부분 제한됐지만 천황이 군부의 손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면서 누가 천황이 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황은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시나 짓고 꽃밭이나 산책하고 제사나 지내고 빈둥거리면 그만이었다. 대신 국가의 정무는 민간 출신의 권력자가 집행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거나 천황가와 혼사를 맺는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한국 출신 가문이 번성하여 부여 지배계급과 혼사를 맺었다. 이 가문에서는 몇 대에 걸쳐 딸을 왕위 상속할 만한 자들에게 비로 들여보내고는 뒤에서 조종 하여 사위를 왕위에 올려놓았다. 후일 후지와라(藤原) 가문 같은 총리대신급 집안에서도 딸과 손녀를 줄줄이 왕비로 들여보냄으로써 일본의 왕권을 자기 뜻대로 조종했다.

5세기를 통틀어 왜국의 왕위는 부여 기마족의 후손이 차지했다. 닌도쿠왕의 비 바위 공주, 즉 이와노히메(磐之媛)는 가야 출신 가쓰라기 우지의 선조인 가쓰라기노 소츠의 딸이었고 그의 손녀딸 하에는 부여왕족 혈통의 두 임금 겐조(顯宗)와 닌켄(仁賢)의 어머니다. 겐조 왕대에는 경주 포석정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잔치를 벌인 것처럼 그도 닷새씩이나 연회를 계속하며 곡수연을 즐겼다.

그러는 동안 부여왕통은 차츰 유약해지고 혈통과 파벌 간에 왕권 다툼이 생겼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26대 왕인 게이타이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변방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527년 북규슈에서 일어난 이와이(岩井)의 난은 왕권교체에 반발하는 부여 기마족 후손들의 저항으로 보인다. 이즈음에 백제가 가야땅을 조금씩 먹어들어가고 있었으므로 부여 기마족의 한반도 내 지지기반도 전과 같지 않았다. 얼마 뒤 532년에는 신라가 가야의 북부를, 이어서 562년 남부 가야를 정복함으로써 가야는 끝났다.

6세기 말에는 불교 도입을 놓고 가야출신 신진세력과 화족 사이에 큰 대립이 생겼다. 한국인 후손으로 일본에 불교를 받아들이자는 소가(蘇我)와 오래된 무속을 그대로 받들자는 모노노베 두 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여기에선 친불교파가 승리했다. 이후 50여 년간 한국인 후손 소가 가문이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어 딸들을 계속 왕비로 만들었던 만큼 일본 왕의 혈통에는 한국인 소가파의 피가 많이 스며들어 있다.

비단 직조술 전파한 하타 가문

점차 한국의 상류층이 전문기술을 가지고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한 예로 300년경 백제에서는 가께쯔(眞毛津)라는 이름의 옷 만드는 여성을 보냈다. 그 후손들은 기누누이(衣縫· 비단 직조 공인)로 자리잡았다.

덧붙여 기록에는 265년 중국 진시황(또는 사마염)의 방계손 하나가 일본에 왔다고 한다. 그 궁월군이 처음에는 한국에 정착하여 120가구를 거느리고 살았다. 시국이 복잡해지자 그는 후손을 모두 거느리고 왜로 이주했다(‘일본서기’에는 처음 백제인 궁월군으로 기록됐다가 9세기에 나온 책 신찬성씨록에는 ‘진시황제 3세손 효무왕’으로 그 표현이 바뀌었다).

   

한국에서 뛰어난 비단 직조기술을 가지고 온 하타 우지는 부여 기마족의 통치 아래 번성했다. 이들은 광대한 토지를 하사받았다. 175년이 지난 후 하타 가문은 1만8670명으로 불어났다. 한국말을 하면서 살던 하타 사람들은 별도의 지역에 모여 살았으며 불교가 들어왔을 때 강력한 후원자가 됐다.

600년경 이 집안의 우두머리는 하타 가와가쓰(秦河勝)라는 사람이었다. 왜국과 한국의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던 성덕태자가 죽었을 때 하타 가와가쓰는 이를 진정으로 슬퍼한 주요 인물이다. 그리고 100년쯤 지나 하타의 후손은 이번에는 간무(桓武) 천황의 통치를 도왔다. 그는 하타 집안 소유의 땅 중에서 지금 교토시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대지를 간무 천황에게 내주어 795년 여기에 새 수도 교토를 건설하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교토는 비단 직조로 유명하다. 하타 우지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일에 종사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히데요시는 직조인들을 교토의 서북쪽 니시진(西陣)으로 이주시켰다. 그들의 혈통은 근본적으로 일본계가 아니지만 지금 그 일을 들춰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여 기마족 시절 일본과 중국 사이의 광활한 바다를 건너는 직항로를 개척하기는 불가능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중국과 일본 간의 소통은 한정적이었고 그나마 한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부여 기마족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해상수송업도 성장했다. 이를 입증하는 사실 하나는 가라노(枯野)라는 배가 26년이 되어 더 쓸 수 없게 되자 태워버리면서 소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배에 불이 났을 때 신라 사신들이 신라에서 배 만드는 장인을 불러다 수리해주었다. 이것이 저명부(猪名部)의 시초다.

또한 가라노베에서 나온 나뭇조각으로 고토라는 악기를 만들었다. 고토의 원조격인 가야금은 1세기에 가야에서 처음 만들어 썼으며 신공왕후가 일본에 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오진왕이 가라노베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기마족이 온 뒤로 일본은 큰 변화를 겪었다. 일본의 관념론자들은 부여족의 원정에서 힌트를 얻어 이를 진무천황의 동정(東征)으로, 신공왕후 이야기로 꾸미고 이즈모 사람들이 진무에게 항복했다는 기이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8세기의 일본 사관들은 부여족의 정복을 은폐하고 만세일계의 일왕가를 만들어 정복 사실을 반대로 뒤집고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잠자던 씨가 후일 ‘현인신 천황’을 핵심으로 한 군국주의로 발아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그 일파가 일본을 세계강국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그들은 불교나 기독교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종교임을 알았다. 고대 신도 신앙은 초군국적, 초애국적 이념을 고취하는 데 이용하기 꼭 좋은 비조직적 신앙이었다.

한국인의 도움으로 탄생한 불상

한국에서는 불교 유입 이후, 왕이 신과 소통하는 제관을 겸하던 무속적 개념이 좀더 현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일본에서는 불교로 완전한 몰입이 이루어졌다. 맹렬한 불심을 가진 쇼무(聖務)왕은 딸(효겸(孝謙) 천황)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출가해 중이 되었다. 일본 불교는 도경(道鏡) 선사(효겸의 사랑을 받아 권력을 전횡한 승려)처럼 파행적인 경우도 있지만 기적과 천황 숭배를 중심으로 하여 국가안보를 주도한 무속 가문 나가토미(中臣)와 모노노베 우지에 의해 보존돼 왔다.

한국에서 불교가 들어오고 200년이 채 안 되어 불교는 이 섬나라를 완전 점령했다. 불심이 깊은 쇼무는 지방마다 절을 짓고 7층탑을 세웠다. 더 나아가 온 나라의 자원을 긁어모아 구리 100만근을 녹여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그런데 불상 제조가 여섯 번이나 실패로 돌아가자, 나중에는 그 일을 한국인 후손인 불교예술가에게 일임했다. 마침내 한국인의 손에 의해 불상이 만들어졌고, 그는 궁중의 4급관인 벼슬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일본은 한국인의 도움 없이는 잘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다.   

 

 글: 존 카터 코벨 


 편역: 김유경

 

발행일: 2005 년 05 월 01 일 (통권 548 호)

쪽수: 340 ~ 35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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