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96
2011/9/1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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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戰亂史 / 유리왕(琉璃王)의 女難  

 

 

高句麗 戰亂史 / 유리왕(琉璃王)의 女難

 

㉰ 유리왕(琉璃王)의 女難


   朱蒙이 고리국의 王子였다고 한 記錄은 여러 史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扶餘와 別種이라고 하는 것은 고리국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史書에서는 先出扶餘라고 한 것을 보면 扶餘에서 出生한 것으로 되어있다. 어쨌든 扶餘國은 고리국(櫜離國)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朱蒙이 도망올 당시 몇 살인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걸승골성에서 都邑을 定할 때가 22세라고 했으므로 도망칠 무렵의 나이는 20세 전이 아닌가 짐작된다. 도망칠 무렵 장가든 부인이 예씨(禮氏)라고 적혀 있다. 남쪽으로 달아날 무렵에 예씨 부인은 홀몸이 아니었다. 그때 朱蒙은 예씨 부인에게,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내가 일곱으로 된 모난 돌 위 소나무 아래 유물을 감추어 두었으니 이것을 찾아오는 자가 내 아들이다, 라고 말한 뒤 朱蒙은 떠났다고 되어있다. 

  유리왕이 어린 시절 밭도랑 위에서 놀다가 새를 맞추기 위해 쏜 것이 잘못하여 물긷는 여인의 물동이를 맞혀 깨뜨렸다. 여인은 화가 나 꾸짖으며, 아비 없는 아이인 까닭에 버릇없는 행동을 한다고 하였다. 유리왕은 몹시 부끄러워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떤 분이며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었다. 그때 어머니 예씨가 말하기를,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다. 그리고 너를 낳기 전 아버지가 떠나면서 남긴 말을 유리에게 일러주었다. 그러자 유리는 온 산천을 다 찾아다녔으나 헛걸음만 하고 기진하여 집에 돌아왔다. 하루아침에 마루 위에 있노라니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자세히 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퉁이로 되어있고, 그 기둥 아래에서 부러진 칼 하나를 찾았다.

  어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어떤 사정으로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고 하므로 친구인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렀다. 그때 아버지인 朱蒙에게 토막 난 칼을 바치자, 朱蒙이 갖고 있던 동강난 칼과 맞추어 보자 하나가 되었다. 朱蒙王은 기뻐하며 유리를 太子로 삼고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유리왕 2년이면 기원전 18년경이다. 그해 가을 多勿의 제후(諸侯)인 송양(松讓)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왕비인 송씨가 돌아가자 두 女子를 계실(繼室:후처)로 삼았다. 한 女子는 골천(鶻川) 사람으로 화희(禾姬)이며, 다른 女子는 漢族 사람으로 치희(雉姬)였다. 유리왕은 두 여인을 위해 양곡(凉谷)에 東西로 宮을 지어 각각 따로 두게 한 후 기산(箕山)으로 사냥간 후 7일 동안 돌아오지 아니했다.

 

  여기서 箕山을 살펴보기로 한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116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山東省 쪽이 4군데이고, 다음이 河南省, 山西省, 그리고 四川省으로 되어있어 어느 方向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두 大陸이란 점이다. 그 당시 句驪國이 걸승골성에 都邑하고 있었으므로 멀리 가지는 않았다고 보아, 山西省 아니면 四川省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百濟가 河南省에 都邑해 있을 때이므로 山東省을 가려면 河南省을 경유해야 하고 너무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西安 및 長安城 주위에 걸승골성이 있었기 때문에 山西省 쪽이나 四川省 方面으로 사냥을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리왕이 사냥을 나간 지 7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을 때 후궁인 화희(禾姬)와 치희(雉姬)는 말싸움이 벌어졌다. 다시말해 질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없어야 독차지할 수 있다는 시기심이라 할 수 있다.

  골천 출신인 禾姬는 漢族인 치희(雉姬)를 꾸짖으며 하는 말이, 너는 漢家의 천한 여자로 어찌 그토록 무례하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치희는 부끄럽고 분한 마음에 도망을 가 돌아오지 아니했다.

  유리왕이 돌아와 연유를 듣고 그 길로 말을 달려 찾아갔으나 치희(雉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아니했다. 유리왕은 상심한 나머지 지쳐 나무 밑에 쉬게 되었다. 이때 누른 꾀꼬리 새들이 모여 든 것을 보고 유리왕은 느낀 나머지 노래를 불렀다. 꾀꼬리 새 오락가락 암수 서로 즐기는데 외로운 이내 생각 누가 돌아와 달랠 것인가 라고 한탄했다고 적고 있다.

  三國史記 유리왕 편 本文에서 보는 것과 같이 한 나라의 王일지라도 애틋한 情이 서린 한 女人의 그리움을 잊지못해 정신적으로 괴로움을 겪는 것을 엿볼 수 있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女子란 약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집념 때문에 歷史의 수레를 뒤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유리왕도 漢族의 후처 치희(雉姬)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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