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01
이름: 律坤
2011/12/4(일)
조회: 1357
高句麗 戰亂史 / 扶餘王 帶素의 侵攻과 事件들  

 

 

㉲ 扶餘王 帶素의 侵攻과 事件들


  유리왕 14년 봄 1월이었다. 扶餘王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예방하러 왔다. 使臣을 보낸 이유는 서로 王子를 인질 삼아 불모로 하자는 것이었다. 유리왕은 扶餘의 강대함에 두려워했다. 太子인 도절(都切)은 인질로 잡혀가는 것이 두려워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扶餘王 대소(帶素)는 몹시 화가 났다.

  여기서 扶餘王 帶素가 누구이며 어떤 관계인지 알아보기로 한다.

  朱蒙편에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扶餘王 帶素의 할아버지는 해부루(解夫婁) 王이며 아버지는 東扶餘王 금와(金蛙)이다.

따지고보면 금와(金蛙) 王도 서자출신인 셈이다. 해부루(解夫婁) 王이 죽은 후 금와는 都邑地를 옮긴 후 東扶餘王이 되었다. 금와왕의 부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결혼 후 7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제일 큰아들인 長子가 대소(帶素)이다.

  東扶餘王인 금와(金蛙)가 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 자매간에 놀러 나왔던 柳花를 유인하여 낳은 아들이 朱蒙이다. 朱蒙이 성장하는 동안 뛰어난 재능(才能)을 두려워한 나머지 朱蒙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 대소(帶素)이다. 그러니까 朱蒙의 兄任 뻘이 대소이다. 대소(帶素)와 朱蒙은 배다른 친형제간이다.

 

  朱蒙이 남으로 내려가 句驪國을 세우고 强大한 勢力을 쌓아 가는 것을 본 대소(帶素)인 扶餘王은 조카인 유리왕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 王子를 서로 교환하여 인질로 삼겠다는 야심이었다.

  대소(帶素)는 동생인 朱蒙을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두려운 나머지 朱蒙의 아들인 유리왕을 죽이지 않고는 장차 東扶餘의 위협이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유리왕 14년 겨울 11월 東扶餘王 帶素는 5만의 군사를 이끌고 句驪國을 침략해 왔다. 그때 마침 대설(大雪:큰 눈)이 내려 많은 兵士가 얼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東扶餘王 帶素는 물러갔다.

  19년 가을 8월이었다. 문밖에 있던 돼지가 달아나자 유리왕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인 신하를 시켜 뒤쫓게 하였다. 장옥(長屋)이란 연못 가운데 이르러 잡은 후 칼로 근육이 있는 다리를 잘랐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하늘에 제사지낼 짐승을 함부로 상처 내느냐 하면서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넣어 죽였다.

그해 9월 유리왕은 병에 걸렸다.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託利)와 사비(斯卑)의 귀신 때문이라고 했다. 王이 사신을 시켜 그들에게 사죄하고 위로하자 왕의 병이 씻은 듯 나았다고 되어있다.

  자고로 죄없는 사람을 죽이거나 남에게 해로움을 끼치면 자기에게 반드시 액운이 닥친다는 것을 유리왕은 몰랐던 것 같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요, 적악지가 필유여액(積惡之家必有餘厄)이라 하였다. 人間은 내가 잘 되고 이롭기 위해 남을 욕되게 하거나 악을 쌓으면 반드시 自己에게 고액(苦厄:고통스러운 액운)이 오는 것은 自然의 法則이자 因果應報임을 유리왕은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착한 신하인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죄없이 죽인 대가로, 다음 해인 20년 봄 1월에 太子인 도절(都切)이 이유없이 죽었던 것이다. 

  21년 봄 3월이었다. 문밖에 있던 돼지가 달아났다. 왕은 명을 내려 장생(掌牲)과 설지(薛支)에게 쫓도록 하였다. 나라 안 위나암(尉那巖)에서 잡아 국내 어느 집에서 기르도록 한 뒤 돌아와 王에게 고하였다.

신들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니 산수가 수려하고 깊었으며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되었고, 또한 고라니와 사슴 그리고 고기와 자라가 많이 나고 있었습니다. 고로 왕께서 만약 도읍지를 그곳으로 옮기신다면 백성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이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우환도 없을 것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21년 여름 4월이었다. 왕은 위중림(尉中林)이란 숲에서 사냥하였다. 그후 8월에는 지진이 일어나 어수선하였다. 9월에는 왕이 국내의 지세를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사물택(沙勿澤)이란 곳에 이르렀다.

사물택(沙勿澤)이란 곳은 사주(沙州)에 있는 연못이다. 이곳은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소화현(昭化縣) 서북에 있다고 中國古今地名大辭典 402쪽에 記錄하고 있다.

 

유리왕이 사물택에 이르자 한 장부가 연못에 있는 돌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왕은 왜 그곳에 앉아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원하옵건대 王의 신하가 되고 싶다고 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기뻐 쾌히 승낙하고 이름을 사물(沙勿)이라 하고 위씨(位氏) 성(姓)을 하사하였다고 되어있다.


  22년 겨울 10월이 되었다. 왕은 국내에 있는 都邑을 옮기기로 하고 위나암(尉那巖)에 城을 쌓았다. 12월 왕은 질산(質山)의 깊은 곳으로 사냥을 떠나 5일이 지나도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아니했다.

그때 대보(大輔)인 협부(陜父)가 간하기를, 王이 새로 도읍지를 옮긴 후 백성들은 안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정사를 살펴 백성들을 구제해야 할 것임에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냥만 오래 하시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왕께서 스스로 과오를 고치지 않으시면 정사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흩어질까 신은 몹시 두렵습니다. 그리고 선왕(先王)의 업이 땅에 떨어질까 염려되옵니다, 라고 하였다.

그때 유리왕은 그 소리를 듣고 크게 진노하여 협부(陜父:朱蒙과 함께 도망온 친구)를 파직시키고 대신 관원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므로, 협부는 남한(南韓:남쪽의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本文에서 유리왕이 질산(質山)의 깊은 곳으로 사냥을 갔다고 했다. 질산은 지금의 질주(質州)이다. 이곳은 명림답부(明臨答夫)가 漢나라와 싸워 이긴 곳으로 質山에 묻혔던 곳은 四川省 무현(茂縣) 지방에 있다.

  자고(自古)로 바르고 옳은 말하는 臣下를 물리치는 것은 성군의 자질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든 자기에게 쓴 소리를 하는 자가 충신임을 아는 자만이 大人의 자질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우리나라의 현실과 같다는 느낌이 들어 필자는 답답하기만 하다.

  23년 봄 2월이 되자 王子인 해명(解明)을 太子로 삼으면서 국내에 대사령을 내렸다. 24년 가을 9월에 왕은 다시 질산(質山)의 들에 사냥을 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이상한 사람을 보았는데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는 것을 보고 조정에 등용하고 우씨(羽氏)의 성(姓)을 하사한 뒤 王女에게 장가들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에는 人才가 많지만 보이지않는 법이다. 그리고 정실에 치우쳐 정사를 그릇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유리왕은 단순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어 사람을 즉시 보고 등용하는 품성 때문에 강대한 국가로 이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나라처럼 코드가 맞는 사람만 등용한다면 무엇이 잘 되겠는가. 유리왕의 안목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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