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02
2011/12/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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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 戰亂史 /黃龍國王의 분노(忿怒)  

 

 

高句麗 戰亂史 /黃龍國王의 분노(忿怒)  


  27년 봄 1월이었다. 王太子 해명(解明)은 고도(古都:옛 도읍지)에 있었다. 호남아로서 용맹하고 힘이 있었다. 黃龍國王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시켜 강궁(强弓:강한 활)을 王太子에게 보냈다. 王太子 해명(解明)은 사신과 대면한 앞에서 활을 당겨 꺾어 부러뜨리면서 하는 말이, 내가 힘이 있는 게 아니라 활이 굳세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黃龍國王은 부끄럽고 황당했다.

유리왕은 소문을 듣고 노발했다. 그리하여 黃龍國王에게 말하기를, 解明太子가 不孝해서 그러하므로 과인의 청에 의해 죽여달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두 달이 지난 3월이었다. 黃龍王은 사신을 시켜 解明太子를 만나자고 했다. 太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간하기를, 이웃나라에서 이유없이 만나자고 하는 것은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太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니 黃龍王이 나를 어찌하겠느냐고 하면서 드디어 길을 떠났다. 黃龍國王이 처음에는 죽이려 하였으나 太子를 보자 감히 해를 입히고 싶지 않아 정중히 보내 드렸다.


  28년 봄 3월이 되었다. 유리왕은 사람을 보내 解明太子에게 이르기를, 내가 도읍지를 옮겨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하자는 데 있거늘 太子는 날 따라오지 않고 너의 힘만 믿고 결속한 이웃나라에게 원한만 생기게 하였으니 太子된 도리로 이럴 수 있느냐, 하면서 사신에게 칼을 보내 자결을 하게 했다.

  太子가 즉시 자결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말하였다. 大王이 죽는다면 太子가 당연히 후계자가 될 것이다. 지금 사신의 한번 걸음으로 자결했다가 바르지 못하고 중간의 조작이라면 어찌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그때 太子가 말하기를, 黃龍王이 강한 활을 가지고 왔을 때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를 가벼이 볼 것을 두려워 활을 고의적으로 꺾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왕(父王)의 책망을 듣고 부왕께서 나를 不孝子로 몰아 칼을 보내 자결케 하는 것이다. 고로 父王의 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여진(礪津:숫돌 나루)이 있는 동쪽 들에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창끝에 찔려 죽으니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太子를 東原의 들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웠다. 이름하여 그 땅을 창원(槍原:창에 찔려 죽은 들)이라 하였다.

  사신의 말에 의하면 孝子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좌우를 떠나지 않는 것이로구나 하였다. 그 옛날 周나라 文王의 世子처럼 太子 解明이 옛 都邑地에 따로 있으면서 용맹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죄를 짓게 한 것은 당연한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전해 들으니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옳은 방향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나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하는데 지금에 와서 왕은 처음부터 가르치지 못하고 나쁘게 성장했으니 미워함이 심하여 죽이고 말았으니 어쩌랴. 이를 설명하자면 아버지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노릇을 못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본문에서 보는 것과 같이 太子가 지나치게 자기의 힘을 믿고 만용을 부린 것이 不幸을 자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黃龍王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太子는 이웃나라인 黃龍王이 句驪國과 어버이 유리왕을 가벼이 볼 것을 두려워 한 짓인데 黃龍王의 노여움으로 유리왕은 太子 解明을 죽이려고 한 것은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太子가 아버지인 유리왕이 都邑地를 옮길 때 따라가지 않고 옛 都邑地에 그대로 있었던 것으로 父王의 노여움을 사고 있었던 차에 黃龍國王이 보낸 강한 활까지 무례하게 꺾어 부러뜨린 것이 화근을 부르게 되었다.

  아버지 父王은 아들인 太子가 새 都邑地로 따라오지 않고 옛 고도(古都)에서 용맹을 믿고 힘을 기르자 장차 우환이 두려워 太子를 죽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黃龍國王이 보낸 강궁(强弓)까지 사신 앞에서 꺾은 것을 들은 父王은 더 이상 두었다가는 黃龍國王의 노여움으로 장차 큰 화근의 씨앗이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太子 解明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黃龍國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781쪽에 보면 북위(北魏.AD.386~534년) 때 모용황(慕容皝)에 이어 모용보(慕容寶) 때 연(燕)나라가 도읍(都邑)했던 河北省 永年縣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中國古今地名大辭典 990쪽에는 黃龍國이 있던 곳은 燕나라 都邑地라고 적혀있다. 즉 黃龍國이 있던 곳은 和龍이라 했고, 宋나라 때 북연(北燕)이라 했으며 풍씨(馮氏)가 黃龍國으로 되어있다. 걸안(契丹)이 있을 때는 황하(黃河)의 남쪽이었으며 黃龍國은 북쪽이라고 되어있다.


 어쨌든 유리왕의 太子인 解明이 사소한 일로 父王의 노여움과 黃龍國王의 분노에 21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희생된 것은 모두가 어리석은 자들의 비극이었다. 太子 解明은 黃龍國王의 오만함을 꺾고 父王인 유리왕에게는 충성스러움을 보이려던 것이 오히려 오해와 시기 그리고 반목으로 인해 黃龍國王의 분노로 인해 희생된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인 것 같다. 고로 人間이 어리석고 야욕에 차 있다면 남는 것은 不幸을 자초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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