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23
2014/8/4(월)
한민족의 이동설  
한민족사-제1장 삼묘족의 시원

2008-09-25 17:15:42, Hit : 462

작성자 : 한덕희

(4) 한민족의 이동설

사기 본문에서, 서경환인시래(西傾桓因是來)라고 해야 할 것을 환인천황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문장을 바꿔버린 것을 볼수 있다. 왜냐하면 마융의 말을 빌면 치서경산인환수시래(治西傾山因桓水是來) 언무여도야(言無餘道也, 말없이 도를 깨우침) 라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환인천황은 분명히 저녁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규원사화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환인천황은 주신이므로 한토지인(漢土之人이란 중국中原의 사람이란 뜻)이다. 상제라 하였으며 西域에서 온 사람이다. 따라서 불타의 대진국 사람이며 하늘의 모든 주인이자 우주와 만상을 통솔하고 말과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전지전능한 성품을 갖고 있다.'

인류의 시조는 중국 곤륜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인류 시조 이전의 삼묘족은 곤륜산, 차이탄 분지, 천산산맥, 토노번 분지, 타림 분지, 파미르 고원, 캐라코람 산맥, 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낮은 사막지대는 아주 먼 옛날 바다였다는 사실이 요즘 고고학자들의 답사에서 밝혀졌다. 지금도 사막 가운데에는 바다에서 서식한 어패류가 많이 보였다는 보도를 들을 수 있다. 중국 신강성 일부와 타림 분지 그리고 토노번 분지는 아득한 옛날 바다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신강성(新疆省)의 이름은 중상고사대때 삼묘족의 건장한 장정들이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겨루던 궁터라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신강이란 새로운 활터 즉 장병들이 새로운 활터에서 승부를 겨루는 곳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기원은 대체로 350만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고생물학자들간에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확실하게 연대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수십만년전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나 인류의 문화생활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는 일이다. 다만, 상상고대국가 사회가 형성된 시기부터 인류역사의 시원으로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상상고시대에는 인간의 집단생활이 요구되었던 시대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의 출현과 무자비한 살살 등으로 숱한 참화를 겪는 때였으므로 불가분 집단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치우천황(어릴 때는 치회라 불렀다고 함)의 서모가 8명이었는데 거기서 낳은 형제가 73명이었다. 일설에는 81명이란 말도 있으나 역대신선통감에는 73명으로 되어 있다. 치우천황의 아들이 81명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라 우왕때 한 집에 300명의 식구가 살았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역대신선통감 제 4권 4절에 있음을 본다.

고대국가는 존망의 갈림길이 심할 때였으므로 인간의 생활터전을 높은 산인 고원지대가 아니면 물가, 강변 지대나 그리고 초원이 있는 사막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같은 생활을 바탕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자체가 자연의 조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강변주위에 살던 인간은 전란의 참화가 심했으므로 멀리 동으로 또는 북으로 아니면 서로 이주해 갔던 것이다.

상상고시대라 해서 사람의 수가 결코 적었다고 할수 없다는 것은 고문에서 쉽사리 찾을 수 있다. 윤내현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환인시대는 무리사회였으므로 한 부락 또는 집단생활을 하는 사람의 수가 39명에서 많게는 100명 미만이라고 했으며, 환인시대는 부족사회이므로 추장제도 하에 있는 사람 수는 100명에서 300명 안쪽으로 보았다.

단군시대는 국가단계 사회였으므로 인구가 많아졌다는 추정을 하였다. 이것은 학문적 평가위에서 문헌의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상상고시대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수 없었고, 인간의 생활이 짐승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동굴을 배경으로 하여 생활하거나 아니면 초근목피로 삶을 살던 시대일 것이라는 가상적인 추정아래 환인시대는 무리사회니까 불과 30명에서 100명 정도로 집단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단단기 삼성기전 상편에 보면 처녀와 총각 800여명이 말없는 가운데 흣구백산의 땅에 내려 왔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성기전 하편에서도 무리 삼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신시를 정한 사람이 환웅천황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고조선편에 환인천황은 서자 웅을 데리고 삼위태백산에 삼천명을 데리고 내려 왔다고 하였다.

역대신선통람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시 성모(복희씨의 어머니 화서씨를 뜻함)는 일백오십이세 때 병없이 죽었다. 그때 복희씨와 여와(복희의 여동생)도 크게 눈물흘리며 통곡했다. 슬픔에 잠겨 음식맛을 잃었고 잠자고 옷 입는 것조차 정신이 없었다. 새끼양처럼 지새워야만 했다. 칠일장을 치루었다.
화서씨가 장지로 떠날때 모든 신하와 백성이 통곡했다. 그 수는 무려 수천만인이었다. 성모 화서씨는 삼년상을 지냈다. 그후 얼마동안 백성들의 놀이를 금했으며 북소리도 울리지 못하게 했다. 성모는 퉁소와 거문고를 만든 선각자였다. 큰 거문고와 퉁소의 말고 가득찬 소리는 까마귀를 물러가게 하였다. 어찌 그 은혜서린 회포를 갚지 않을 수 있을까 하여 삼년상을 지냈다는 것이다.
복희씨 어머니가 죽은 뒤 수천만명이나 길거리에 나와 장지로 가는 길목에서 곡성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보아도 중상고시대때 얼마나 인구가 많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화서씨가 처음으로 소리를 내게 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퉁소와 큰 거문고를 처음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해내경 제 18 에 보면 이부하국때 복희씨는 가야금을, 신농씨는 큰거문고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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