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28
2014/8/4(월)
삼묘족의 혈통관계 고찰  

 

한민족사-제1장 삼묘족의 시원

2009-06-14 17:09:32, Hit : 403

작성자 : 한덕희

제 1절 삼묘족의 발생

2. 삼묘족의 혈통관계 고찰

삼묘족의 혈통은 상고 문헌상 九夷로 갈라져 나감을 볼수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59)에 따르면 황이는 현이, 백이는 낙랑, 현이는 고려, 적이는 만식, 풍이는 부유, 양이는 색가, 우이는 동도, 방이는 왜인, 견이는 천비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만주, 조선, 일본은 모두 구이라고 했다. 북이중에는 적융, 북적?, 산융, 흉노, 엄윤?, 선비가 있다.
황이, 현이, 풍이가 있다. 그리고 남이는 려융, 남융, 남만, 육혼융, 백이, 우이, 방이라 했다. 서이는 서융, 견융, 백적, 의량융? 이라는 별종도 있다.
북이는 주로 몽고, 만주, 중국 서북부 지방을 근거지로 했으며, 서이는 중국 곤륜산, 천산산맥과 타림분지 또는 신강성과 돈황 주위인 청해성을 주로 생활터전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남이는 낙양아래 쪽으로 이주해 살았다. 
서이는 중국의 곤륜산 북쪽과 주로 남쪽에 많은 나라가 있었고 돈황을 무대로 하여 청해성을 기점으로 번성했다. 또 일부에서는 캐라코람산맥과 파미르고원 쪽으로 서융과 어적 또는 견이, 견융들이 번창해 나갔다.
삼묘족인 이들은 따지고 보면 형제간이다. 맨처음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더라도 하늘에서 그리고 땅에서 함께 맺어진 인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부부가 남남이라고 하여 남이라 할수 없는 걱과 같다. 헤어지면 남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부부일 것이다. 부부는 자식을 낳음으로써 혈족의 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것과 같다.
삼묘의 혈통은 서이일 경우 중국 곤륜산 남산60)을 배경한 우전국 주위에서 형성되었다고 볼수 있다. 이곳은 전술한 바와 같이 천제울국이 있었던 곳이며, 상상고시대에 많은 국가가 나타나고 있던 곳이다. 바로 이 지역이 삼묘의 고향이었으나 그후 돈황과 귀주성에도 삼묘족이 혈족을 연계하여삼묘국이 생기는 것을 볼수 있다. 특히 중국 호남지방과 귀주, 운남, 서강, 사천, 광서성 일대는 폭넓게 삼묘족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61) 33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주 61 참고)

주로 삼묘는 호남성지방인 신악이나 볕이 잘드는 언덕에 많이 살았다. 그리고 호북 또는 무창지방과 강서지방 구강일대62)(중국 서역에서 중국 남부일대와 만주, 몽고까지)에 걸쳐 넓은 ㅂ지역에 이르기까지 삼묘족은 뿌리를 내렸다. 특히 우니라 우왕때는 삼묘족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사기에는 오나라가 일어설 무렵 삼묘족은 마치 나무속에 좀벌레가 성해 먹어가는 것처럼 어디든지 안가는 곳이 없이 팽창되어 갔다. 지금의 강주, 악주, 악주 등은 모두 호북성 무창, 형주 등지라고 본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삼묘족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중원땅인 호북성 무산을 무대로 하여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1) 묘족의 혼란시기

묘족의 처음 시조는 과연 누구이며 언제 어떻게 삼묘족이 뿌리를 내리고  혈통관계를 맺고 내려오게 되었는가를 살펴 보고자 한다.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63)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먼저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인류의 조상이라고 할수 있는 나반과 아만이 처음으로 만난 곳은 아이시타였다고 되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이시타는 다름아닌 천제울국이었다. 삼성기전 상편 본문을 보면 환국은 천제울국시 환인씨를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안파견이었다고 적고 있다. 연대는 7세로 전해져 내려 갔으나 확실한 년수는 알수 없다고 되어 있다.
한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의 글에 보면 아이시타를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의 번역본을 인용한 글에서 일본인은 노아의 방주와 관련지어 아라앗다 산이라고 했는데, 임승국은 일본인의 말을 들을 것 없고 한국인의 본고향이 어디인가? 라고 하면서 바이칼호 부근으로 간주 한다는 주석을 달았다.
삼성기전 하편에 보이는 천제울국때의 전체환인씨가 안파견이며, 안파견이 있었던 곳이 아이시타라고 서술되어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천제울국은 언제 어느때 어디에 있었던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서산경 제2 확씨전64)에 보면 하늘에서 다스리는 9부족이 있었다. 이름하여 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나라였다. 주로 9성이 있었는데, 아홉부족 사이를 경계로 하여 이루어져 있었다. 9부족을 다스리고 있던 그 시절에 천제울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아이시타는 곤륜산 남쪽 남산에 우전이 있었던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전국이 있던 곳이 바로 옛날 천제울국이 있었던 곳이다. 다음 서산경65)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천하에 큰 물을 바라본즉, 서북으로 삼백리로다. 장사산(중국 곤륜산맥 줄기에 있는 산이름)을 돌고 도는 은빛처럼 맑은 물은 마치 말이 뛸듯이 소리를 지르며 영롱한 광채가 나는도다. 북으로 흘러가는 검은 물줄기는 새 소리와 더불어 어둡고 짙은 색깔이로다. 풀은 없으나 수목은 울창하고 푸르고 누른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웅장하도다.
또는 서북 삼백칠십리에 산들이 없어 산세가 험하지 않았지만 구비구비 돌고 도는 곳은 무엇때문에 생긴 것인지 알수 없도다.
서북방에 큰 산은 없지만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산에서 내려 오더라. 북쪽 멀리 바라보이는 맑은 물 저곳은 장엄하고 숭고한 산들만이 다다르고 있었도다. 산동반도 쪽으로 바로 보이는 곳은 검고 맑은 못들이   하남성쪽으로 살짝 숨어 돌아 드는구나. 간간히 솟아오르는 물거품처럼 탁한 물 줄기는 하남성으로 점겨 들어가고 있구나. 그 물은 곤륜산 지하로 숨어 들어가 기운이 고개 너머로 나타나는도다. 여기에 우전국이 있는 곳 물줄기는 높이 솟아 갈라져 간다. 그리고 다시 합류하여 동으로 동으로 검고 맑은 물줄기는 스며들어 가는구나. 한편은 남쪽으로 흘러 내려 맑은 못을 이루고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돌 바위 큼새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흘러 가도다. 바로 그것이 중국에 있는 강들이로다. 그 명물이 못인즉 청포와 같은 물은 넓은 바다와 같도다. 삼사백리를 흘러간 물은 가만 그대로 있고 여름은 불어나지도 줄지도 않고 마치 옥문을 드리운 듯 하도다. 물줄기가 삼사백리이므로 이 어찌 하남성의 중요한 물의 원류이며 잠행이라 아니 하리오."

앞의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우전국의 소재가 곤륜산이 있는 서장성이라는 점이다.
서산경 제2 곽씨전66)을 다시한번 더 살펴 보기로 한다.

서남 사백리 곤륜산 언덕에 실제로 제왕이 살수 있는 도읍지를 정해 두었다. 목천자 말에 의하면 "길일로 닭날을 택일하여 천자는 곤륜산으로 오르도다. 황제의 장사를 풍융하게 지낸 것이 후세 사람들의 입으로 말로 전해졌다. 지금도 곤륜산 위에 있다는 사실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도다" 라고 한다.

이처럼 곤륜산 주위에 많은 나라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다음은 목천자전67)을 살펴 보기로 한다. 아래 본문을 해설해 보기로 한다.

조상의 은덕으로 지내왔지만 소년시절은 극히 가난했다. 그러나 그 효성만은 스스로 지극하였다. 하지만 가난한 가운데도 곡식을 구하여 어머님에게만은 밥을 지어 올렸다.
왕은진의 말에 의하면 환인의 조상은 풀벌레처럼 굳세고 단단한 의지를 가진 선비였다.
조상은 구세동안 청렴결백한 효자 집안이었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먹는 일은 일체 없었다. 어머니 형제가 삼형제였으며 예절이 바르고 행실이 좋았다. 정절이 강하고 언행이 바르며 아름다웠다. 그리고 고귀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제후국의 태자들 중 서자였던 연위경(연위경이란 대원군이나 안평군처럼 왕족의 친척들의 군호를 의미함)이 피란지에서도 어머니 삼형제들과 제후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당시 있는 자들은 사람들을 무조건 농락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벼슬을 미끼로 계집종을 마음대로 부렸다. 때로는 계집종들을 백리 밖으로 끌고 가 검은 양피를 받고 팔았다. 
초국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백초국인(백이의 선조나라 사람을 뜻함) 들은 양피와 계집종을 서로 맞바꾸었다. 건강하고 젊은 계집종들만 골라 백리 밖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오게 하는 중노동을 시켰다. 하지만 계집종들은 말을 듣지 아니하고 도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원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을 물건처럼 가득 가득 싣고 제후국을 돌아 다녔다. 때로는 수십리 때로는 수백리를 돌면서 주로 오양피를 주고 계집종을 사기도 했다. 더더욱 괴이한 것은 계집종을 사고 팔 때는 말처럼 살찌고 보기 좋으면 말을 물어보고 화답도 시킨다.
계집종을 사서 데리고 오면 음식을 먹이고 심부름도 시킨다. 그리고 일을 적당하게 하게 하고 몸매를 다듬게 한다. 그중 몸매가 좋고 예쁘고 영리하면 관청일을 시킨다. 좋은 옷일 입히고 목욕도 시키며 몸 단장을 하게 한다. 특별히 예쁘고 몸매가 좋고 총명하면 벼슬아치에게 뇌물로 바친다. 계집종은 그때부터 검은 양피로 팔려왔다고 하여 오고대부라고 이름 붙였다. 이런 일들은 백이족에 속해 있었던 虎族인이었던 회남 사람들의 아버지벌 되는 사람들의 소행이었다. 
계집종을 팔고 돌아올 때는 비단을 사서 가득 싣고 위세 당당하게 돌아와 뇌물로 바치면 벼슬을 받았다. 
이와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는 동안 서로 돕고 서로 경영하는 가운데 점차로 생활이 나아졌다. 한편 젊은 사람들은 의문을 품고 그 사실을 캐기 시작했다. 특히 부자가 짜고 뇌물을 주고 벼슬을 한 사실을 알고 말고 하였다.
세인들은 조상때부터 뇌물을 주고 받았다는 여론이 빗발치게 일자 부자는 평생을 탄식하며 통곡했다.
그때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신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자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벼슬을 사기위해 사악한 짓을 하였다. 당장 먼 곳으로 귀양보내노라"고 하였다.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이 알지 못하는 먼 곳으로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떠나게 되었다. 어려운 길을 피해 길을 가는 도중 아들, 딸, 제자까지도 버리고 떠났다.

그리고 성품은 대범하고 담력이 좋았으며 청렴하고 신중했으며 분별이 뚜렸했다. 바르고 곧은 기상과 의리가 강한 성정으로 자라났다.
아무곳이나 앉아서 밥을 먹었다.
호인(오랑캐)들의 불장난으로 소란이 일어났다. 늙은 어미의 실화로 인하여 죽으로 연명하였다. 도둑떼는 득실거렸고 죄 짓는 자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약탈자는 날로 늘어났다. 그렇게 되자 말이나 소 달구지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자들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방황했다. 아냐자들과 어린애들은 우마자츨 타고 가다 도적떼들에게 습격당해 재물을 빼앗기거나 아니면 우마차를 몽땅 뺴앗기는 수난을 당하고 통곡했다. 사회가 혼란해지자 일시에 떠돌이 유민으로 전락했다. 어떤 자들으 ㄴ탈진하여 걷다가 죽는 자들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극도으 혼란 속에서 포대기에 싼 아이를 버리고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먼 길을 걷지 못해 따라 가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중홍서에 의하면 나무를 묶어 뗏목처럼 만들어 급히 강을 건너 도망가기도 했다.
강을 건너 수년이 지나자 어떤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듬뿍받는 순간 그 여인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 여인에게 사유를 물은즉 북인의 장난으로 부모를 잃고 자매들과 함께 살아났으나 이름도 성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덕을 겸비하고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검소하고 어진성품과 예쁜얼굴에 나무랄 데 없는 행동을 했다.

인은 왕족의 후예이며 생질 즉 조카였다. 왕업을 이어받을 덕과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대업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말없이 견문을 익혀야 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종신때까지 따를지라도 첩을 볼 생각은 없었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근신하여 만물에 정통하고 매사에 순리를 다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 어떤 사람과도 친함을 익히고 배우고 수양함이 있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군의 장군이 되었을 때는 다재다능했으며 재지도 뛰어나고 성품도 착했다. 승상이 먼 길로 달맞이 갈 때도 함께 다녔다. 그리고 승상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엄밀히 호위한 셈이었다. 어느 가을날 제를 지내고 돌아오면서 조부인을 아무도 모르게 대나무 상자속에 가두어 버렸다.조부인을 가두고 돌아온 승상은 차가 대문에 이르자 조부인은 통곡을 했다. 조부인이 대나무 상자속에 갇히게 된 것은 의심을 품고 승상을 미행하다 미움을 사게 되었기 떄문이다. 상자속에 갇힌 조부인은 울면서 통곡했으나 밖으로 나올 생각은 아니했다.
여남의 선현들이 전하는 말로는 대장부로 태어났다면 당연힌 천하에 뜻을 두고 나라를 세울 기개를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2) 반고환인의 건국시대

남아로 태어난 대장부였던 인(환인천황을 뜻함)은 어릴때부터 고독과 외로움과 고통속에서 지성으로 열심히 향학에 정성을 다했다. 먹을 것, 입을 것, 덮을 것 없으면서도 백이(백이란 삼묘족중에 어른 즉 큰아버지 또는 형님을 뜻함. 묘족이 3000여이종죽에 최고의 우두머리 자리인 어른 격을 뜻하는 말, 그 대표적인 부족의 대명사가 바로 동이족임. 동이족이란 백이를 뜻하는 것이다.) 후손으로서 비굴하지 않기 위해서 비록 움막 집에서 살지언정 백이족의 선비로서 내가 처해 있는 그 길을 떳떳하게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갈 것을 다짐했다.
훗날 대장군이란 자가 반역을 하여 군신을 모조리 죽였다. 남자는 고자를 만들고 부녀자를 욕보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먼저 떠나 버렸다. 사승후한서말에 의하면 산수가 아름답고 경치가 수려하고 인심좋고 탁한 세상을 떠나 살고 싶었다. 그리고 많은 손긴들과 제후들과 함께 이상세계를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와 꿈을 품고 죽음을 무릅쓰고 만리길을 떠났다.
주67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후의 제공이라 함은 환인천황이 삼천중도와 함께 내려온 천부인 삼개와 ㅍ충백 우사 운사68)를 뜻한다.  
그리고 만리를 죽을 각오로 떠났다고 한 것은 곤륜산 아래 남산끝에서 돈황까지를 말한다.
이곳은 본시 천제울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없어진 뒤에 우전국이 세워졌다. 우전국에서 일어났던 난을 피해 험준한 산길을 타고 가다보니 만리라고 표현된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직선 거리가 한반도의 두배정도 밖에 되지 않으나 걸어서 험한 산악을 넘고 넘어 가므로 인항 거리를 만리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요)직선거리는 약 6,000리 정도임)
죽을 힘을 다하여 가는 도중 어머니는 병환이 더욱 악화되었다. 추운 날 찬바람과 얼음이 깔린 곳에서 어머니는 꽁꽁 얼어버렸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 치료를 하였다. 때로는 불을 지피고 몸을 녹이려 했으나 정성을 쏟은 보람도 없이 어머니는 황천길로 떠나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새들도 함께 따라 죽으려 했겠는가.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고 따라 죽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의 막사 주위로 무수한 시떼가 울부짖으며 날아 들었다. 모든 가족 천척들은 따라 죽으려 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어머니를 따라 나무에 목을 매달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디선가 때아닌 바람이 홀연히 불어오더니 모든 나무들을 감싸고 슬피 눈물 지었다.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환인천황이 자라나던 곤륜산 밑 우전국에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삶이 처참하게 난무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서역에서 동북쪽 방향에 있었던 돈황으로 오게 되면서부터 삼묘족은 동이족으로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제왕운기69)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반고의 아들인 천황은 1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다 곤륜산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70)에 보면 옛날 부자나라였으며 서자 국이었던 환인은 우전국이 있는 천산에서 득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규원사화 본문71)에 보면 태백일산은 곤륜산의 이름이며 분명히 그곳에 있다. 그로 삼신자는 즉 태백산에 있다. 삼신은 곧 삼성인 바 지금의 구월산이며 이곳이 하늘을 공경하고 삼신을 공경하는 삼성제당이다. 환인, 환웅, 환검의 세 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규원사화 107페이지에 보면 환인주신은 한토지인(중국중원인 곤륜산을 무대로 한 땅을 말함)이며 상제인 동시에 서역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불타의 나라 서역인 진나라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천주이며 모든 만물을 통괄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지닌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되어 있다.
사마천 사기 본문 권이 49페이지79)에 보면 서경인환시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서역 쪽에서 환인이 왔다는 글귀이다.
규원사화 본문에서도 전술한 바와 같이 옛 진나라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 당시 진나라 사람이 아니고 옛날 아주 옛날 진나라의 고토인이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글귀이다. 그러기에 천주라고 했으며, 천주는 환인으로서 우주만물을 창조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한편 태밷독경 후서73)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반고씨와 공공씨를 비롯하여 안파견이 부(천부인 삼개를 뜻함)를 받아 나라를 신시로 정한 뒤, 유소, 복희, 신농, 요순, 탕 모두의 선현들은 동으로 왔다. 본래 서융사람으로 서역에서 왔으며 제하(제하란 그 당시 모든 하우와 제후 그리고 다른 ㅡ나라를 뜻함) 들도 서로 섞여서 다스리게 되었다.  바로 하난의 신시를 세운 것이 국경의 맨처음 분계선이 된 동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대신선통감 권1 제1절 본문74) 3페이지 첫머리에 보면 서역이 있었던 많은 백성들과 옛 반고씨는 강의 원류를 타고 점차 동으로 나왔다고 되어 있다. 본문에서 강 원류를 타고 흘러왔다고 되어 있는 것은 동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지도를 보면 대부분의 강은 황해쪽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서역인 곤륜산에서 보면 동으로 강물이 흐른다.

(3) 흑수삼위태백산의 개요

고조선의 저자인 소련사학자 유.엠.부찐75)에 의하면 삼위산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고 있다. 본문에 실린 글을 다음과 같이 일부 옮겨 보기로 한다.

한국어사전에서 삼위와 태백을 풀이해 놓은 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와 태백은 삼위산과 태백산이다.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의 돈황현 남쪽에 있으며, 태백산은 장백산의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삼위산은 상서의 우공편에도 언급되어 있다. 삼위산이 그 모습을 갖추었을 때 삼묘족의 체제는 완전히 정비되었다. 흑수는 삼위산에 다다른 다음 방향을 바꾸어 남해로 흘러들어 간다. (주76. 참조)

진의 학자 배인은 흑수와 남해를 청해호와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과 함께 묶어 보고 있다. 청해호가 동명을 가진 지방에 소재해 있기 때문에 북쪽에서부터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흑수는 호수 북쪽인 감숙성에 위치해야만 된다.
중국의 사학자인 고힐강과 중국고대지명사전 역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공 9년 두정이 좌전에 붙인 주석을 보면 삼위산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삼위산은 과주 즉 현재의 돈황에 소재해 있다. 돈황현 남쪽의 강 당하 근처에 삼위산이 있다. 이 산이 곧 고대 사서 및 우공편에 실려 있는 삼위산이다. 수경주에도 역시 이 산의 소재가 삼위산은 돈황현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기 역시 삼위산은 감숙성의 우산산맥과 섬서성의 진영산맥 사이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몇가지 세부사항만을 제외한다면 중국의 모든 사료들은 삼위산의 위치를 감숙성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문장에서 중요한 사실은 삼위태백이란 글귀이다. 태백산은 분명히 삼위산이며 중국의 장백산은 삼위산인 동시에 장백산이 태백산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현재로 보면 장백산이 백두산과 연해 있고 태백산이 길림성에 있으며 태백산이 장백산으로 되어 있음을 본다. 하지만 지명의 변동과 옮김으로 인하여 역사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41페이지76)에 보면 다음과 같이 태백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은 길림성에 있으며 방백산이라고 했다. 위서 물길국전을 인용하여 태백산을 길림성에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위서 물길국 원문편에 보면 (원문 2219-2220페이지 참조) 물길국은 고구려 북쪽에 있던 옛 숙신국의 고토이다. 그 당시 동이족은 최강국이었으며 언어도 독립되어 다르게 쓰고 있었다. 이때의 강역은 오천리가 넘었고 태산 즉 태백산까지 세력이 미치고 있었다. (숙신국은 북이지국 36국의 제후국을 거느림)

물길국은 본시 당요의 후손이며 은주의 후국이다. 그러므로 당시는 식신이었으며 은주가 바로 숙신이며 직신이다. 한나라 이후는 읍누였으며 원위가 바로 물길이다.
이상과 같이 본다면 숙신국은 만주지방 즉 길림성 근처만이 아니다. 요, 하, 은, 주 시대는 중국 중원이 모두 강역이었으므로 태산이나 태백은 원래 중국 돈황의 삼위산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위서권1 백인열전 88 본문 2219-2220페이지에 보면 숙신국은 고구려 북쪽과 중국 낙양과 서역국들과 인접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단실기의 저자인 김교식78)은 공자말을 인용하여 당우는 식신이며 은주도 숙신인 동시에 직신이라고 했다. 후한때는 읍누라고 되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태백산은 분명히 감숙성 돈황에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태백산에는 분명히 삼성당이 있고 구월산이 있음을 뜻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8페이지 태일산79)편을 보면 태을, 태일산을 종남산이라고 했다. 한서지리지를 인용하여 무공태일산이었으며 옛날 고문에는 종남산이라고 했다. 지금 중국의 섬서성 미현에는 태일산이 있다. 그곳을 태백산이라고 한다. 종남산을 총칭할 때 남산이라고 하며 태일 또는 태백산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산이라면 중국 곤륜산 남쪽에 있음을 말한다. 즉 신강성과 청해성 경계지역 일대를 남산이라고 한다.
태백산은 중국 남산에도 있으며 섬서성에도 있고 만주 길림성에도 있다. 그러나 본래 태백산은 곤륜산을 배경한 곳에 있었으며 사서에서 말한 태백산과 구월산은 중국 돈황에 신시를 정할 때 있었다.
다음 신시 개천경을 보기로 하자.
본문에 의하면 환인 안파견은 서자 웅을 데리고 어디서 백성의 뜻을 알아 다스려야 하나를 살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천명에 맡기기로 했다.
환웅을 데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삼위태백산이 가장 좋았다. 즉 삼위태백의 봉우리는 금세에 없는 곳이며 도읍을 정하면 흥할 것 같았다. 또 금세에도 없는 문화창달에 기여할 수 있는 구월산이기도 했다. 지금의 중국 감숙성 경계에 있는 삼위산이다. 그리고 최초 삼묘족의 조상은 반고이며 처음 이곳에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

사기에 보면 본분 35페이지80)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남만이 점차 옮겨온 곳은 중국 남반부였으며, 삼묘족은 삼위산에 있다. 본시 서이의 후예였다. 괄지지에 의하면 삼위산은 봉우리가 셋이 있었으므로 삼위였다. 속명은 비우산이었다. 이곳은 사주인 돈황현 동남 삼천리이다.

사기 권26 49881)페이지에는 공안국의 말을 인용하여 삼묘는 진운씨의 제후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구려군이 있을 때 소호씨의 작란으로 세상이 시끄럽게 되자 삼묘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두 동강나고 역서와 사서마저 잃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사신제도도 폐지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고 부언하고 있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백산은 돈황에 잇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흑수82) 삼위산이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삼위태백밖에 없다.
그 증거로는 뒷편의 지도를 참고해 주길 바란다.
우공구주도에 보면 흑수삼위산이 중국 곤륜산 끝머리에 있는 돈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흑수란 청수로서 흑룡강도 흑수임에는 분명하다. 흑수가 있는 곳은 백두산을 위시해서 동남아 특히 한국과 중국대륙에 많다. 그러나 흑수삼위태백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태백산을 흑수태백이나 흑수 장백산이라고 하지 않는다. 만주에 있는 흑룡강을 흑수라고는 표현해도 그곳을 흑수삼위산 또는 흑수태백산이라고 하지 않는다.

삼국유사 고조선83)편에 보면 하시삼위태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환인천황은 우진국(?)에서 고산준령을 타고 오면서 삼위태백을 내려다 보고 신시를 정하게 된 것이다.  
삼국유사 본문인 기이권 제일 서문에서 '고하출도 학출서 이성인작' 이라 한 것은 옛날 물구비를 보고 그림과 글을 성인이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지홍요신모이탄회' 라고 한 것은 붉은 무지개가 얽힘을 보고 신모였던 복회씨 어머니가 복회씨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문장을 살펴 보려 한다. 

(4) 아사달과 요단군왕검

'용감녀등이생염' 이라고 한 것은 용의 감응을 받아 염제신농씨를 낳았다고 했다. 그 다음 글을 살펴 보려 한다.
'유신동자칭백제자 교통이생소호 간적탄난이생계' 라고 한 것은 소호 금천씨는 자칭 신동이며 하늘의 아들이라 했다. 그는 간적의 몸에서 태어났다.
'강원이적이생기 태잉십사월생요'라고 한 것은 희성인 강씨 집안 후비에서 열넉달 만에 태어난 아이가 요임금이라고 햇다.

복희씨 자손은 염제 신농씨가 후손임을 입증하는 글귀이다.
뛰어서 다음 구절을 살펴 본다.
'자차이강 기가탄기 연즉삼국지시조' 라고 한 것은 점차로 아래 쪽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아래 쪽이란 서역쪽에서 동으로 동으로 내려 온 것을 말한다. 있는 힘을 다하여 옛 조상들의 기록을 따라했다. 다시말해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내려온 것이다. 바로 그분들이 삼국의 시조라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고조선편84)에서 위서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위서에서 말하기를 단군왕검은 삼천년 전 도읍을 아사달에 정했다. 경서에 의하면 그곳은 무엽산이라고 했다. 무엽산은 백악아라고도 했으며 백주의 땅이다. 어떤 문헌에 의하면 개성 동쪽에 있는 지금의 백악궁을 뜻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무엽산을 지명사전에 찾아 보았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백주85)를 찾았다.
백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때 남주였는데 백주라고 이름을 고쳤다. 그후 다시 남창군이라 했다. 얼마 후 백주라는 이름을 찾아 불렸다. 송나라 때는 백주와 남창군을 동시에 부르다 둘다 폐지시키고 박백현이라 불렀다.
중국의 남창은 지금도 강서성 동북쪽에 있다.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개성을 중국지명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개성현이라는 지명이 있었다. 개성현은 지명사전 954페이지에 남제치라고 했고 광서성의 경계에 있다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아사달은 황해도 개성이 아니다. 단군은 사천성에 있는 만현에 왕검성을 정한 뒤 차차 남으로 옮겨와 백주 즉 남창에 도읍을 정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본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서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단군은 이천년 전에 왕검성을 아사달로 정했다고 하는 문제이다.
위서는 기원전 386년에 쓰여졌으므로 지금으로부터 2376년이 된다. 그렇다면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할 때가 이천년 전이었으므로 1990년을 기점으로 보았을 때는 단군왕검이 도읍한 첫해가 지금으로부터 4376년이 된다. 그렇다면 단군 1세는 과연 누구일까가 문제이다. ( 요임금 도읍시는 BC 2357년 + 1990년 = 4347년)

단군고기에서는 단군 1세가 왕검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도평양성 금서경 시칭조선 우이도어 백악산아사달 이라고 씌여 있다.
이 말은 평양에 도읍할 때의 성은 지금의 서경이라 했다. 처음 조선이라 부르고 차츰 차츰 도읍을 강서성에 있는 백주 즉 남창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단군왕검의 첫 도읍지는 서경 즉 중국의 서안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곳은 장안성이 있고 평양성이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 첫번째 본문인 기이권87) 제일편을 풀어 보기로 한다.
글을 짓는다고 말할 것 같으면 옛부터 큰 성인들이 이어오고 있다. 곳곳마다 예의를 숭상하고 예약으로서 방방곡곡에 평화가 넘쳤다.
큰 성인들은 어짐과 옳음을 가르치며 전파했다. 그런데 괴력같은 난신들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렵혔다. 제왕과 장군들은 괴력같은 난신들을 다스리고 흥하게 했다. 주로 부의 명령으로 다스린 것은 책에 있는 그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드시 다른 사람이 나타나 큰 무기를 쥐고 시대의 변화를 일으켜 대업을 이룩하기도 했다. 그 한가지 예로는 물구비를 보고 그림을 만들기도 하고 물의 흐름을 보고 글을 짓기도 했다.
그것을 바로 하도낙서라고 한다. 이것은 모두 성인들이 만든 것이다.

옛날 신모가 있었는데 얽히고 설킨 묘한 무지개 같은 햇빛을 받아 복회씨를 탄생시켰다.
복희는 용의 감응을 받아 즉 왕의 사랑으로 염제를 낳았다. 염제는 마치 달속의 선녀가 들에 있는 뽕나무 밭을 거니는 것 같았다. 염제는 자칭 신동이라 했으며 천자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후 소호가 태어났다. 간적과 인연을 맺어 알을 낳고 보니 걸(걸이란 계라고 하나 사기에는 걸이라 하여 글안을 뜻함)이었다.

이들 모두는 신모였던 화서씨의 후손이었다. 말하자면 후비가 낳아 버린 자식과 같았다. 하지만 화서씨, 복희씨로 이어온 후손임에는 틀림없다.

북이였던 고신씨는 고성에서 추(요임금의 어머니)라는 여인에게서 14개월만에 요임금을 낳았다. 그후 왕이 바뀌면서 강을 타고 옮겨오는 도중 패공을 낳았다. 점차로 서역에서 내려왔음을 어찌 모두 기록할 수 있으랴. 이 모두의 뿌리가 바로 삼국의 시조이다.
엄청난 사실들이 마치 신화와 같다고 다들 말하지 않는가.
니산하고 괴이하다고 할만하다. 이러한 기록들이 점차로 여러편으로 다르게 전해져 본래의 뜻과는 많이 어긋남을 말해주고 있다라고 삼국유사에서 분명히 밝힌 것으로 보아서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선조는 요임금 고신씨, 전욱, 소호, 황제, 염제, 복희씨 등으로 조상의 뿌리가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5) 요단군왕검과 성씨

이상과 같이 환인의 도읍이 맨 처음에 돈황이었고 환웅은 태백산이 있는 서안 즉 섬서성에 도읍을 옮겼다. 그후 단군때는 서경이었던 평양(지금의 서안, 장안성에 있음)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다시 단군왕검은 백주인 아사달에 25년뒤 도읍을 옮긴 것이 제 2차이다.
삼국유사 서론편에 요임금의 혈통계보가 바로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선조라고 한다면 요임금의 연대와 단군조선의 연대와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요임금이 삼국의 선조이므로 단군왕검은 요단군왕검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단군조선이 처음 도읍을 정하고 창업하던 곳이 바로 지명이 같은 곳이며 연대도 같기 때문이다. 다음 중국고금지명대사전88)을 살펴보기도 한다.
요산(요임금이 있던 산이름. 대사전을 보면 요임금의 요자를 없애 버렸다. 왜냐하면 백이이며 순 동이이고 따라서 고조선의 왕조였기 때문에 묘족이었던 요, 순, 황제 등은 모조리 사전에서 빼버렸다. 그러나 뿌리를 캐고 보니 몽땅 없앨수는 없었던지 요산, 요산현이란 곳이 있어 여기 공개한다) 은 중국에 있는 직례인 당산현 서북 80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수경주에서 전하는 바로는 당용 때 처음으로 도읍을 봉한 곳이다. 현의 이름은 당산 또는 요산이라고 한다. 지금의 하남성인 이양현 서남에 있다.
요산현은 본시 백인현이며 동쪽에 있던 위나라때 이름을 백인이라 했다. 그후 당나라가 다시 이름을 고쳐 요산이라 했으며 김세종의 아버지 이름이 종요였다. 그러기에 그곳의 이름을 당산이라 했다. 지금의 직례당산현을 말한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되는 점은 전장에 밝힌 것처럼 요임금의 아버지는 고신씨였다. 그렇다면 요임금의 성이 고씨여야 하는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세종의 아버지 이름이 종요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요임금의 성이 금씨가 아닌가. 제후였던 고신씨도 사실은 금씨였다. 그러나 제후국의 왕이 되면서 고신씨라고 했기 때문에 고씨 성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고신씨 자신의 성은 분명히 소호 금천씨의 손자이다. 그러니까 요임금은 증손자이면서 후비였던 추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금씨도 고씨도 성을 쓰지 못한 채 요임금으로 행세했다.
요임금의 성은 이(본성은 희이며 아버지도 희성, 할아버지인 (?)도 희성, 증조할아버지인 소호도 희성이었다)이며 요임금의 이름은 방훈, 호는 도당씨이다.
요임금이 도읍한 곳이 직례이며 당산현이다. 이곳은 중국의 옛 고도였던 서경을 말한다. 여기에 장안성이 있으며 우리가 논란의 대상으로 한 평양성이 있는 곳이다. 요임금은 바로 이곳 서경에서 첫 도읍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요임금과 한 시대 아니 한 곳에서 단군조선의 도읍이 꼭 같은 곳에서 시작되는데 다음 장을 소개하여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04 89) 페이지에 조선현을 찾아 소개한다.
한나라 때 있던 곳, 그리고 후한 및 진나라때 있던 곳이다. 괄지지에 보면 고구려왕검성이다. 즉 지금의 평양을 말한다. 후위때 조선민들이 살던 곳이다. 그곳이 조선현이다. 이곳 북제성의 옛 성이었으며 지금의 직례노룡현 동쪽이다.

이처럼 기록한 것으로 보아 단군조선이 세웠다는 왕검성의 도읍과 요임금이 처음 세운 도읍지가 꼭 같는 직례임을 알 수 있다. (현 중국서안시위 평양자리)

일설에서는 단군왕검의 도읍지인 아사달을 현재 중국의 만현으로 보고 있다. 만현은 사천성에 있으며 무산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무산이라면 황제대 유명했던 무녀왕의 무덤이 있는 산이다. 여하간 단군천황의 동향은 실로 한민족의 이동을 최초로 시작하게 해 준 동이족임을 입증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개인이나 집단이 옮긴다고 해서 사적인 기록을 남길 수 없다. 동이라고 명명한데는 환인천황이 새로운 도읍을 정하기 위해 거국적인 이동으로 신시를 창건함으로써 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 무리가 국가를 세우기 위해 모든 군신이 함께 도읍을 옮겨 왔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 동이이다.
이때부터 단군들은 계속적으로 동으로 혹은 남으로 이동함을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삼묘족은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 동으로 남으로 서로 북으로 흩어져 나갔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44 90) 페이지를 참고해 보기로 한다. 귀주성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방대한 자료가 나왔다.
재경(서경을 뜻한다. 서경은 현재 중국의 낙양임)에서 서남으로 7640리 동쪽 경계는 호남까지며 북쪽 경계는 사천까지이다. 그리고 서쪽은 운남, 남쪽은 광서까지, 동서의 상호거리는 약 990리, 남북의 상호거리는 약 790리이다. 우나라때 공물을 바치던 서역으로는 형주와 양주 두 주의 지경외 상주(은나라때와 주나라때)시 귀방시(북방까지)와 전국시 초나라 땅 까지이다.
한나라 초에는 남이의 땅이었다. 원정 6년에 귀주성을 넓히고 장가군과 무능군 땅을 함해 형주와 익주의 두주까지 포함시켰다. 후한때는 오나라에 나뉘어 속해 있었다. 촉한시에는 진과 나누어져 형주ㅡ 익주, 영주의 삼주는 진나라에 속해 있었다. 나중에는 형주, 영주 이주가 영주, 영주 이주와 함께 송나라에 속해 있었다. 제 양 두나라 때는 같이 속해 있었다. 진나라 시는 주나라 때 도읍했던 비주 땅에 만료(밤에만 사냥하는 동이의 후예들을 뜻함)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후 비주, 장주, 용주는 수나라에 속해 있었으며 얼마후 다시 이름을 고쳐 군이라 불렀다. 양주가 바로 여기 속한다.
이곳에는 키가 큰 장대같은 남이들이 많이 출입하고 있었다. 당나라 때는 다시 모든 주를 옮기고 검주에 속해 있는 것을 장주에 고쳐 옮겼다. 그후 검주를 파주라 고쳐 불렀으나 다시 찾아 검주를 검중도라 고쳐 불렀다. 오대시(양,당,진,한,주나라를 뜻한다)는 다시 남이지로 돌아 왔다.
송나라 초에는 기미지였으며희영후에 옮긴 주는 기주로에 속했다. 원나라 때는 사주 또는 파주, 팔번이었으며 귀주라고 한 것은 제후와 선위(군관들의 도장같은 곳을 말함) 그리고 권원들의 직급등이 없어진 뒤였다. 순원때 와서 남이들의 도읍을 다시 정하고 새로 이름을 붙였다. 말하자면 보안 또는 보안로 등이다. 그 곳에 속하는 땅은 호남북, 운남, 사천성 등이다.
명나라 때는 호남북성, 광서성, 사천성, 운남성 등에 속해 있었다. 그후 포고령으로 귀주성이라 했다. 청나라 중화민국시까지 귀주성이라 부른다.
지금은 폐지 되었지만 옜날에는 영도(영도란 고을 수령의 우두머리가 귀주 땅에 셋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제후국의 왕이 셋인 셈인데 세 분이 귀주 땅을 다스렸다는 뜻임)자가 셋이었으며 고을이 팔십한군데이다. 지세는 험난하여 묘령지맥(산세가 험하여 묘족이외는 아무도 다닐 수 없는 산들을 가리켜 모령지맥이라 했다. 그러나까 곤륜산, 천산산맥, 남산, 삼위탱\백산, 즉 숭산 등을 가리켜 모렬지맥이라 불렀다)이라 했다.
산세가 너무 험난해 바위와 수풀과 작은 잡목 잡초들이 얽히고 쌓여 봉우리마다 울창하여 거듭됐다. 평지는 거의 끊어져 적었다. 흘러가는 강들도 사납게 흘렀다. 그 강 물은 분류를 이루고 갈라져 나갔다. 마치 도랑처럼 갈라져 험한 급류와 탁류를 이루며 흘러갔다. 그러나 묘족들은 서로 엉켜서 강물을 잘 이용하여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고을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홍범연의 권십삼91) 본문을 보면 고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91 본문 참고)
천자가 고을을 정할 때 다음과 같이 정했음을 본다. 사방 천리를 현으로 정한다. 그리고 사방 백리마다 고을 수령을 두는 것을 법으로 정했다. 그러므로 사방 백리마다 아홉군데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아홉군데의 단위를 다시 91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사방 칠십리마다 이십일명이 다스렸다. 또 사방 박리마다 방위를 십리 단위로 십방을 정했다. 그리고 이십구명이 넘는 사람이 관리하도록 했다. 사방 백리마나 십리를 기준하여 관리 팔십명을 두었다. 때로는 칠십일명을 두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사방 오십리에 관리를 봉하고 그 밑에 육십삼명의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했다. 떄로는 사방 백리마다 십리를 기준하여 십오명의 관리가 관장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칠십오명의 관리가 책임 맡도록 했다. 한때는 사방 백리마다 십리를 단위로 하여 육십사명을 두었으며 어떤 때는 구십육명을 둔 것도 있었으나 제후를 한 사람도 두지 않은 곳도 있었다.
이 모두를 세자가 다스리는 세국이었다. 이와같은 제도는 모두 성현들이나 현자의 구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자국은 사방천리, 대국은 사방백리, 소국은 사방 오십리로 잡아 제후국으로 삼아 다스렸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의 단위를 사방 천리로 잡은 것으로 되어 있다. 행정구역의 단위를 이처럼 자연법에 적용시켜 정확하게 만들었다는 데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현내에서는 열국과 제후국도 생길 수 있었으며 천자의 명에 따라 대부나 높은 벼슬아치와 그리고 현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
천자는 군으로 봉하여 열국을 세우고 다시 현을 만든 다음 현속에 나라(소제국)를 세우기도 했다.  
옛날 중국 중원땅에서는 융이(융이란 벼슬을 하지 못한 동이족을 뜻함. 천민을 취급한 보통사람들을 뜻함)92)가 사방아닌 오방으로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모두 백성들이었으며 유순하고 소박하고 성실한 백성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지기에 따라 이동했으며 옮겨 살았다.
특히 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길게 했으며 몸에는 문신을 하고 있었다. 주로 화식을 했으나 화식을 하지 않는 자들도 많았다.
남쪽에 있는 남이 즉 남만들은 독수리와 같은 사람들이어서 화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방에 잇는 서이 즉 서융들은 머리를 길게 하고 옷도 입고 다녔다. 하지만 쌀밥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오곡은 계절에 따라 추위가 적으므로 땅의 기운에 따라 심고 가꾸기도 했다.
옛 중국 중원땅에 살던 이만융적들은 비교적 모두 편안하고 화목하고 편리한 의복과 의식주 생활을 갖추면서 안락하게 살았다. 그러나 북이 즉 북적만은 털옷을 입고 굴 속에서 화식을 하지 않고 쌀이나 곡식은 주로 날것이나 생식을 하였다.
이 모두의 오방민(동이, 북이, 남이, 서이 그리고 중원민을 뜻함)들은 언어가 서로 불통하여 잘 통하지 못했다. 그러나 즐기는 것을 좋아해도 욕심은 없었다. 주로 뜻이 잘 통하는 것은 동이와 남이는 서로 근접되었으며 얼굴 모습과 행동이 닮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이돠 북이는 서로서로 주고 받으면 뜻이 잘 통했다. 특히 희사나 언어의 소통이 잘 되었으며 융적들은 가죽신을 만들어 신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92)
삼묘족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윤리와 도덕이 결여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추악하거나 무질서 하거나 더러운 하층 인간들이 아니었다.
묘족은 철저한 자연법칙에 따라 도법을 통해 생활애 왔다. 뿐만 아니라 절대로 부질서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행동에 규범이 있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신단실기 본문에93)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어 적어 본다.
옛날 제후국에 속해 있던 오래된 소국들과 고구려 그리고 동옥저는 모두 단군과 같은 묘족의 후예였다. 단군을 뒤이은 제곡(고신씨) 당우(요임금과 순임금을 뜻함)는 물론 위만 함산으로 내려가자 싸움이 생겼다.

1985년 홍문관 출판사에서 간행한 중국사탐연94) 본문 31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풀어 보기로 한다. 문장이 너무 길어 뛰엄뛰엄 풀기로 한다. 독자는 본문을 참고하여 주길 바란다.
주나라의 민족 발상지는 위수에서 시작되었다. 위수란 서역의 높은 산 언덕에서 흘러오는 물줄기를 말한다. 그러므로 주나라 민족은 물줄기를 타고 시작된 민족이라는 뜻이다. (중략) 모전에서 전하는 말로는 강원지국(복희씨 때부터 강물을 타고 세운 나라라는 뜻)이라 했다.
요임금을 보더라도 하늘의 인연으로 태어났다. 복회씨는 묘족의 후비로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태나라의 고국은 모두가 묘족 즉 희성인 강씨의 후예들이다. (중략) 안화보시의 말에 의하면 반고이래 태나라던 한대땅이던 모두가 한 뿌리였다. (중략)  그러므로 주나라 민족도 원래 뿌리는 같다. 본시 물에서 탄생했다는 두가지 신화적인 인물도 따지고 보면 묘족의 후예였다. 그러기에 강원 즉 물의 근원에서 시작도니 한 뿌리이다. (중략) 아래로 내로\ㅕ오는 모든 제후들, 그리고 현인 장부 이 모두는 희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역시 많은 강씨성 또한 그러하다. (중략)  주나라 때 다른 성을 가진 제후를 봉했으나 알고 보면 신, 여, 제, 서씨들 모드는 강씨성이 근본이다. 왕의 칭호를 가진 자나 제후 그리고 처가집장인 시아버지와 연계된 다른 타성들도 역시 강씨가 제후로부터 일어난 연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씨는 두성이다. 즉 희성과 강성이다. (준략) 서역 오랑캐의 근본이 삼묘에서 나왔으며 강씨 성도 별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姜씨와 강(羌)씨는 같은 종족이고 서로 밀접란 관계가 있는 서이들이다. 姜씨와 강(羌)씨는 음이 같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상 보는 바와 같이 중국 사람이 쓴 학술지에도 삼묘족의 계보를 발표하고 있다. 그렇다면 삼묘족의 혈연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
신시개천경 본문상경95) 4페이지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을 전하고 있다.
삼위태백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산 이름을 삼위라 부름이 마땅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는 준령이 편안해 보여 밖으로 밖으로 나라가 흥할 것 같았다. 또 지금은 아지미난 문화 구월산이기도 했다. 지금의 지나 서역편에 있는 감숙성 경계이다. 이 곳은 돈황현에 잇는 바로 삼위산이다. 본시 영명한 묘족의 조상은 바로 반고였다. 이 곳에 처음 신시를 정하기 위해 내려왔다.
다음은 태백속경 교정편96)을 살펴보기로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반고씨는 더불어 신시를 정했다. 환인 안파견은 천부인을 받아 유업을 계승했다. 그후 복회, 신농, 요, 순, 탕을 이어 서융이었던 서이는 서역에서 동으로 옮겼다. 모든 제후국은 물론 하나라 또한 혼란속에서도 서로서로 연방제로 다스리며 그때 그때를 이용하여 살아왔다. 영시 맨 처음 신시를 정한 것이 분계선이 되었다. 그후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고 고주몽 성제는 시조가 되었다. 고주몽은 스스로 북쪽에서 부여의 조상이 되었다. 이 모두는 그 옛날 환웅과 치우왕검이 도를 통한 도맥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백속경에 보면 최초에 신시를 정한 사람은 묘조(삼묘족의 조상을 뜻함)였던 반고성인이라는 검을 강조하고 있다. 신시개천경에서도 분명히 묘족의 시조인 반고가 처음으로 신시를 정하기 위해 삼위산에 내려 왔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전술한 목천자 예전편에서와 같이 환인천황이 서역에서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사기도 또한 서역에서 왔다고 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뿐만 아니라 모든 사기들은 태백속경 신시개천경과 함께 문맥을 같이 하고 있다.
반고가 최초에 신시를 정한 사람으로 환인 안파견이라고 한다면 단군고기도 정사이다. 다만 한단고기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사라는 삼국사기보다는 월등하게 상고사 부분이 잘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 제3 신시본기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 천문지의 말을 인용할 것 같으면 치우천황의 깃발은 여러 종류였다. 똑똑하고 밝고 지혜있고 민첩한 깃발에서 부터 어리석고 둔하고 잘못된 것도 그후 생겨났다. 이 모드는 군병들의 규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깃발의 상징은 치우천환에 있어 크게 지키는 방패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치우씨는 통지씨의 후예이다. ㅗㄱ 창힐과 더불어 고신씨 역시 모두가 묘족인 치우씨의 후예였다.  대극성을 함락시키자 산동성은 물론 회소 북쪽까지 진출했다.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용맹성이 먼지역까지 전파되었고 심지어는 깊은 곳 그 어디든지 모르는 곳이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묘족의 후예들이라는 점이다. 창힐이나 고신씨는 모두가 치우천황의 후손들임을 나타낸 좋은 실례이다. 그럼 묘족의 혈족은 과연 어떻게 되엇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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