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230
2014/8/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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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의 변천  

 

한민족사-제1장 삼묘족의 시원3.삼묘족은 한민족의 조상이자 인류의 조상이다.

2012-03-19 16:08:43, Hit : 399

작성자 : 한덕희

3. 삼묘족은 한민족의 조상이자 인류의 조상이다.

(1) 지명의 변천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104)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기록에 의하면 파나유지산 아래 환인씨의 나라가 있었다. 동녁에 땅이 있었으니 하늘의 바다라고 했다. 그 이름이 파나유지국이다. 땅의 넓이는 남과 북이 오만여리(한반도 길이가 3천리라면 17배의 길이)이며 동과 서의 길이는 이만여리(일본 동경에서 파키스탄까지의 거리)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상고 문헌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역사의 그늘에서 역사는 무수히 짓밟히고 왜곡 당해 왔다. 지명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익주만을 살펴 보더라도 한나라 무제도 서남인이었다. 진시황만 하더라도 마한사람으로 이름은 치(稚)요, 성은 한(韓)이었다. 그러니까 한치였다. 영주땅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성을 영씨라고 고쳤다. 이와같이 지명과 성을 마음대로 고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한나라가 도읍을 뒤에 옮긴 것은 낙양이었다. 낙양이란 산새의 낙원이란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던 것이 후일 낙양이라 이름 지어진다.
낙양은 중국의 고도였으며 서경이다. 이곳에 장안성이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으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평양도 이 곳에 있다.(평양에 대해서는 뒷장에 밝힘. 토번도 서경이며 평양이다. 길림성에도 먼 훗날 서경이라고 했으며 평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익주는 사천성의 고도였으나 나중 한무제때 도읍지를 북쪽으로 옮긴 것을 볼 수 있다. 그 곳이 지금 중국의 낙양이다. 이곳은 목화와 대나무의 공업이 성하던 도읍지로서 기후가 따뜻하고 물 또한 맑고 깨끗했기 때문이다.
촉, 한, 진나라의 처음 도읍지이다. 영안때는 치파군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곳이 사천성의 파현 서쪽이다. 그리고 읍현의 동쪽에도 있으며 따라서 사천성 봉절현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기 136년에는 이곳을 성도시키고 다스렸다고 전한다. 송나라때는 이곳을 폐지시켰다. 당나라 떄 다시 부활시켜 익주라고 했다.
일명 촉군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그러나 얼만 가지 않아 다시 익주로 고쳤다. 조나라가 서자 성도부라고 불리우던 익주를 구지라고 하여 다스렸다. 지금의 감숙성으로 옮긴 것은 서진이 도읍지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 곳은 강물이 세차고 넘쳐 흐르는 곳이어서 천연의 요새지로서 알맞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감숙성 임담현 남쪽으로 잇는 강천이 있는 곳이다.
먼 훗날 위나라가 도읍을 정하는 자리이며 태와가 집정한 때 양주와 동일한 지역인 구지이다.
진나라 때는 다시 이름을 고쳐 지금의 사천성에 있는 광원현으로 옮겼다. 바로 동쪽에는 익주가 있었으며 무제때에는 산서성에 있는 악양으로 정했다. 그후 요나라 때는 지금의 만주땅인 봉천 요양현 서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지명을 이리 저리 옮기는가 하면 있던 지명을 모조리 다른 이름으로 바꾸는 예가 많다. 예를 들면 경남 남해의 본 지명은 중국 홍콩 옆 광동에 있던 지명을 옮긴 것이다. 한국에 있는 부산은 옛날(4668년전 황제때) 직예성이 있었던 탁록(중국의 북경서남태원 근방과 섬서성 주위를 뜻함) 현 서북에 황제의 합부에 부산이 있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동경의 이름은 한나라 때 장안성이 있던 낙양을 서경이라 했는데 진나라 천복 삼년에 동경으로 이름지었다.
그후 당나라 때는 발해에 이름을 옮겼으며 그 다음은 길림 영안현 서남에 동경이란 이름으로 옮겼다.
요나라 때는 이름을 남경이라 하다가 후에 이름을 고쳐 동경이라 했다.  그후 청나라 태조 천명칠년에 건국당시 이름을 동경이라 했는데 십년 후 도읍을 옮길 때 심양으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경남 하동만 하더라도 춘추전국시대 양나라 소유지 동쪽에 있었다. 이곳은 진한시 도읍했던 곳이며 황하 중류에 있는 산서성 서쪽 경계에 있었다. 옛 이름은 산매였다. 그리고 강릉은 춘추시 초나라 도읍지였다. 이곳은 한나라가 도읍할 때 강릉현이라 불렀다. 강릉지역은 서쪽의 성이 있엇던 관계로 漢人들이 많이 살았으며, 장씨성을 가진 장거정이라는 사람이 현을 다스렸다 하여 일명 장강릉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지명은 수시로 국가의 변동이 있을 때마다 바뀌었으나 삼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패망이 임박한 무렵 신라 35대 경덕왕때105) 한민족의 고토였던 중국 땅에 있는 이름을 모두 한반도로 옮겼던 것이다.
신라본기에는 지명을 옮겨 온 것처럼 해놓지 않았으나 1230년전 중국에 있었던 지명을 몽땅 옮겨 온 것을 중국지명대사전에서 볼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지명의 변동으로 인하여 상고사 연구에 애로가 많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사서 자체를 왜곡시켰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동이족의 종족수가 삼천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고작 명십개에 지나지 못한다.
사학을 공부하는 학자도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삼묘의 후손들이 나온다. 한마디로 경탄하다 못해 기막힌 현실이다. 얼마나 근시안적인 사학에만 몰두 했기에 자기의 종족인 삼묘의 뿌리를 모르고 있단 말인가?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묘중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종족이 있다. 중국지명대사전 본문1408페이지에 의하면 여융이라는 묘족이 있었다. 이들은 주나라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성은 희(姬)씨였다.
남자들은 모두 벼슬을 했으며 진나라때 여읍이라 했다. 한나라때 와서 이름을 고쳐 신풍이라 했으며 고성이 있었는데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 동쪽에 있었다. 춘추좌전 장공 28년의 일이다.
여융은 진나라에 의해 토벌되었으나 여전히 여융의 남녀는 희성을 지닌 채 검고 빛나는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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