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07
2013/3/22(금)
불함삼역(不咸三域)  

 

  불함삼역(不咸三域)

 

 불함삼역(不咸三域)이란 부도지에 나오는 말이다. 산해경에는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불함(不咸)의 뜻을 한자로 해석하기 곤란하다. 왜! 불함(不咸)이라고 하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불함산(不咸山)이 백두산(白頭山)이라 하면서도, 백두산(白頭山)이 왜! 불함(不咸)이라 하는지 그 뜻을 알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불함(不咸)이 싯담어이기 때문이다. 불함(不咸)을 처음으로 기록한 학자는 한자의 뜻보다 음(音)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불함(不咸)을 연구한 학자가 싯담어를 모르면 그 뜻을 해석할 수가 없다. 불함(不咸)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토속 사투리는 모두 싯담어로 되어있다. 특히,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는 모두 싯담어인 것을 강상원박사님께서 밝히셨다. 여기서 싯담어의 방대한 자료를 소개할 수는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역사, 언어를 연구하시는 분은 반드시 강상원 박사의 유투브 강의나 저서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싯담어로 불함(不咸)을 한번 살펴보겠다.

 

 우주를 창조하고 파괴하는 神 브라흐마(Brahma)


 브라흐마(Brahma)는 힌두 신화의 우주관이며, 싯담어이다. 1만 년 전 상고시대에 동이족이 쓰던 언어이며 동.서 언어의 뿌리이기 때문에 역사 연구를 하려면 싯담어를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

 브라흐(Brah)는 영어로 Breathe에 해당하며 숨을 불어 넣는 것을 의미한다. 살다. 숨쉬다. 존재하다. 등의 뜻이다. 그리고 마(Ma)는 모(母), 엄마를 뜻한다. 그러므로 브라흐마(Brahma)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숨을 불어넣는 일을 하는 神이다.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100년이고 하루의 길이는 24시간이지만 우주의 생멸을 관장하는 브라흐마(Brahma)는 인간의 시간으로 86억 4천 만 년을 지내야 하루를 산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브라흐마(Brahma)는 영생불사의 상징이기도하다.   

 현재의 범천은 1백 55조 5천 2백억 년 전에 브라흐마(Brahma)가 만든 것이며, 최초의 인류 마누스를 태어나게 한 것도 브라흐마(Brahma)에 의해서였다. 우주의 탄생이 약 150억 년 정도로 천문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1만년 전에 동이의 천문학자가 본 우주는 무한창생을 설명하고 있다. 우주의 시작과 끝은 무한하여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부경에 일시무시(一始無始) . 종무종일(終無終一)이라고 새긴 것과 무관하지 않다. 천부경은 천문학을 통해서 발생한 동이의 경전이다. 그러므로 동이는 천문학자이다. 우주의 탄생과 소멸도 천문으로 알아냈다. 부도지 14장에 하늘의 형상을 살펴서 마고의 계보(系譜)와 그 족속(族屬)을 밝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주와 인류의 탄생을 천문으로 알아냈다는 것과 현재의 범천이 1백 55조 5천 2백억 년 전에 브라흐마(Brahma)가 만들었다고 한 것은, 인류 역사의 여명기에 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브라흐마(Brahma)는 마고(麻姑), 삼신상제(三神上帝)와 같은 뜻이다. 앞장 '巫의 근원'에서 소개한 글을 이해를 돕기위해 다시 한번 소개한다.

 

 마누스(Manus)와 힌두(Hindu) 우주관

 최초의 인류 마누스(Manus)는 '옥스포드 잉글리쉬 산스크리트 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힌두교 경전 마누법전(Code of Manu)에도 같은 말로 기록되어 있다.

 힌두(Hindu)의 원래 발음은 산스크리트어로 신두(Sindu) 였다.

 양서(梁書)에 "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대월지국(大月支國)의 동남으로 수 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 지역은 3만리 이다. 일명 신독국(身毒國)이라고도 한다. "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두(Sindu)가 신독국(身毒國)이 된 것이 분명하며 신독(身毒)이 천독(天毒), 천축(天竺)으로 발전된 것이다.

 천축국(天竺國)은 한(漢)나라때 번성하였다가 불교의 전통을 중국으로 넘겨주고 후한(後漢) 이후에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의 네팔을 기점으로 남 북 서 동으로 광범위하게 그 언어의 자취가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산스크리트'이며 '싯담어' '범어'이다. 이른바 고대 꾸루(Kuru)의 강역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오늘날 인도에서 베트남까지 넓은 지역에 다섯개의 천축국이 있었다. 천축국의 전신은 신독국이며 신독국의 전신은 천독이다. 천독(天毒)은 하늘이 사람을 길러낸다는 뜻으로 산해경에 조선천독(朝鮮天毒)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고대 환인시대는 아시아 전역을 다스린 것이다.

 "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

 " 동쪽 나라 안과 북쪽의 모퉁이에 있는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이며 하늘이 보살핀다. 그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한다. "

 여기서 천독은 싯담어 이다.

 천독(天毒) : ti-yun duh 毒(독)은 育(육)의 음차표기,

 天[텬] I_t1.jpg -   ti-yun 하늘, 천상

 育[뜌]    duh, doh : 자손을 두다. 養育(양육), 기르다.


 천축국은 역사적으로 그 이름과 국력의 실체가 사라졌을 뿐 그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천축국의 후예이며 우리와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이다. 천축국은 옛 동이(東夷)의 발상지에서 번성하였던 것이다. 

 마누스(Manus)는 천축국의 싯담어였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옥스포드대사전' 에 실리게 되었다. 또 마누스(Manus)는 힌두교 경전 마누법전(Code of Manu)에 기록되어 있다. 마누법전(Code of Manu)이 처음 쓰여진 것은 산스크리트 문자가 발명된 이후인데 대략 BC 200∼AD 2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오늘날 인도가 아니라 중천축국(中天竺國)을 말한다.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다섯 천축국 가운데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졌으며 문자가 발명 되었고 불타가 이곳에서 나왔다고 곽박(郭璞)은 산해경 주석에서 말하였다.

 " 郭璞云: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王崇慶云: 「天毒疑別有意義, 郭以爲天竺國, 天竺在西域, 漢明帝遣使迎佛骨之地, 此未知是非也.」 珂案: 天竺卽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逈異, 故王氏乃有此疑. 或者中有脫文와字, 未可知也 "

 " 곽박이 이르기를 「천독은 곧 천축국이니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문자와 책, 금은 돈과 재물 등이 있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大興, 東晉,AD.318∼321년) 4년 천축(天竺)의 호왕(胡王)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왕숭경이 이르기를 「'천독'은 아마도 별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곽박은 '천축국'이라 여겼으나, 천축은 서역에 있으면서 한 명제 때 사신을 보내 부처의 뼈를 맞아들여 온 곳인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천축은 곧 지금의 인도로서 우리 나라의 서남쪽에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천독은 곧 동북쪽에 있으니 방위가 사뭇 다르기에 왕숭경이 그러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혹은 그 문귀 가운데 탈락된 문장이 있거나 잘못 전해진 글자가 있다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

 이 문장을 보는 우리는 이해할 수 있지만 곽박과 원가, 왕숭경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산해경(山海經) 그 제목 조차도 '조선의 경전'이란 것을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하여간 신독(身毒)이 오늘날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둔다.

 상고시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경전을 모두 외워서 구전으로 전했다. 지금도 그 전통이 인도에 남아 있다. 인도 관련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 터어번을 쓴 노인이 노래 처럼 뭔가를 부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구전으로 전하던 경전들을 산스크리트 문자로 기록하면서 동이족의 사상 철학 언어가 함께 힌두교 경전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철학은 근본적으로 환인의 사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환인시대때부터 전해져온 우리말 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누스는 인류의 조상, 지혜의 신, 마누라(Manura)는 여신(女神), 여자 제사장, 여자 추장, 브라흐마(Brahma)는 불함(不咸 . 三神)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마고성에서 불함산(不咸山)까지

 불함(不咸)의 뜻은 생명의 神 삼신상제를 뜻하는 것이고 불함산(不咸山)은 삼신상제께서 내려오신 곳이다.

 불함(不咸)을 기록한 가장 오래된 문헌이 산해경인데 그것은 漢나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천 년 전이니, 무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의 기록이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단군께서 불함(不咸)의 강역을 다스리던 시대였다. 그 시대에 단국조선이나 하나라, 은나라, 기타 왕족, 귀족, 학자들이 싯담어를 구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들의 조상은 조선천독, 마고강역에서 온 사람들 이기 때문이다.

 그 이동루트는 바이칼호에서 시작된다. 하늘에서 神이 내려와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천신강림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본질적인 뜻은 북쪽 바이칼호에서 神과 같이 신통력 있는 사람들이 이동해 온 것을 가리킨다. 북쪽은 생명이 탄생하는 물의 원천이 있기 때문이다.


M_1035.jpg

 

 바이칼호에서 탄생한 인류는 약 1만 2천 년 전에 마고성이 종말을 맞이하였을 때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약 1만 1천 년 전에는 기온이 급강하하므로 더 이상 고지대에서 살 수 없어 중앙아시아 쪽으로 내려와 천산 탑리목분지에 모여 살게 되었고 일부는 히말라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그때 수메르인들이 서쪽으로 이동해 갔다. 신시환웅시대 제족들은 천산에서 동북쪽 험난한 산악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내몽골, 만주를 거쳐 한반도와 요서, 요동, 산동으로 들어왔다. 또 천산에서 흑수를 따라 동쪽으로 온 민족은 돈황을 거쳐 관중으로 들어와 지금의 서안 지역에서 국가를 건설하였다.

 인류 이동의 개략적 자취는 이렇지만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서로 교류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딱 잘라서 말하기는 곤란하다. 백소씨와 흑소씨의 경우는 비교적 명백하여 쉽게 설명이 가능한데 황궁씨 일족과 청궁씨 일족의 자취는 감숙성 돈황, 삼위산에서 일부 세력이 합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은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많은 왕족과 유민들이 사천성, 운남성, 광동성을 거쳐 동쪽으로 이주해온 유민들도 있었다.  

 마고성이 있었던 곳은 바이칼호 남쪽이다. 이곳은 1만 2천 년 전까지 온난한 지역이었으나 약 1천 년 간의 영거드라이아스 기간을 거치면서 기온이 급강하 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언어는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어디로 이동해 가던 모두 싯담어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부도지를 쓴 신라사람 '박제상'이 불함(不咸)이라는 한자어를 쓴 것은 본인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옛 조상으로 부터 유구히 전해 온 말을 한자로 옮겨 쓴 것이다.

 박(vak)씨(氏)는 왕족이었으며 제사장의 후손이다. 박(vak)의 어원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싯담어 풀이


 * 백이(伯夷)  R_ba.jpg- Vak-I : 제사장(祭司長) 박혁거세는 제사장. a ritual master of the kingdom on the metropolise in the mountain.

    R_ba.jpg . Vak(박, 백) '이른바, 했던바' '주인백' 하듯이 '말하다'의 뜻.

    . I(이, 夷) '그이, 저이' 하듯이 '동이, 사람'의 뜻.

 * 숙제(叔齊)   -   Sukha-jye : 제후(諸候),제사장(祭司長), a ritual master, deputy soverrign of the metropolise on the lofty Heights in the mountain.

    (조선 고어 실담어 주석사전 405쪽)

 

 불함삼역(不咸三域)


 조선 중종임금 때 '이 맥 (李 陌 1455~1528)' 선생이 쓴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봉래, 영주, 방장은 삼신산(三神山)을 말하는 것이며 사해의 제족들이 삼신산(三神山)에 제(祭)를 올리고 숭배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신산(三神山)은 각각 세개의 섬에 있는 산인데, 봉래는 연꽃이 무성히 피어 있는 상제님께서 내려오신 곳(蓬萊蓮勃萊徑之處卽天王所降)이라 하였고, 방장은 일장사방(一丈四方 : 사방 3미터)의 루각(閣, 설주문)으로 소도(蘇塗)가 있는 곳(方丈四方一丈之閣郎蘇塗所在), 영주는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천지(天池)의 물이 샘솟는 곳(瀛洲瀛環洲島之貌卽天池所出)이다. 그리고 삼신은 곧 상제이니 상제가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다.


 신시본기(神市本紀) 중에서 (원문생략)

 " 대저 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의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가며 점점 깊어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크다란 근본은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그 신풍과 성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를 흠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삼신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명사(神眀舍)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차츰 허랑방탕한 일에 빠져들더니 더 나아가서는 차츰차츰 더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연나라 제나라의 바다위에 괴상한 도사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대저 저들의 땅이 구한의 신시와 서로 접해있어 문물의 교류도 왕성했던 터라 저절로 풍문에 접할 수 있어 괴기하다는데 놀랐던 게 아닐까? 더불어 상상으로 늘리고 부연하는 자도 있어 가로대

 "삼신산은 봉래 방장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 함으로써 세상을 미혹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은 동쪽으로 바다에 가보아도 아득하기만 할 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고,'삼신산도 역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했으나, 실은 바로 삼신산이 아니고 각각 세개의 섬에 있는 산이니 봉래는 연꽃이 무성히 피어 있는 상제님께서 내려오신 곳이요, 방장은 사방일장의 루각(閣)으로 소도(蘇塗)가 있는 곳이요, 영주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천지(天池)의 물이 샘솟는 곳이다. 모두 합쳐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인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그 황탄한 자는 삼신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고, 한라를 영주산이라 함이 모두 그런 따위이다.

 <사기> 봉선서에서,'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찌기 그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 및 죽지 않는 약은 그곳에 있다 하며, 그곳은 사물들과 짐승들까지 빠짐없이 흰색이요,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 라고 하였으며 또 <선가서>엔 가로대 '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이라 한다.'라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옛부터 흰사슴, 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 <괄지지>가 말하는 바 '새 짐승 나무가 있으나 모두 희다'고 한 대목은 이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선 많은 산삼이 나오는 바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불로초라고 생각한다. 산사람들이 채취하려 할 때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신에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감히 채취하러 입산한다. 아마도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한다는 말도 역시 생각컨대 여기에 근원한 것이라 여겨진다. <세기>에 가로대, '단군 오사구의 원년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다'라고 함은 곧 이것이라 여겨진다. "

 신시본기 인용 끝

 

 

 봉래(蓬萊)

 봉래는 연꽃이 무성히 피어 있는 상제님께서 내려오신 곳이라 하였다. 연꽃은 '제임스 처치워드'가 주장한 무(MU.巫.母)제국의 상징이며, 환인씨께서 창도한 불교의 꽃이다. 고구려 벽화에는 연꽃이 그려져 있다. 연꽃은 생명의 상징이고 연꽃이 그려진 곳은 마고의 강역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마고의 숨결이 닿는 곳에는 모두 연꽃이 그려져 있다.

 봉래(蓬萊)는 지금 요녕성 대련(大蓮)지구 앞바다에 현재 섬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발해(渤海)가 수몰되기 전 이곳은 큰 호수였으며 수천리 밖으로 뻘밭이 이어져 연꽃이 무성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지명이 대련(大蓮)인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필자가 대련(大蓮)지역을 찾아 봤더니 난데 없이 만주어라고 나와 있었다. 이곳이 현재 만주족 자치구가 있기 때문이다. '타린(塔淋)'은 원래 '해변' '강기슭'의 뜻인데, 1897년 러시아가 이곳 여순구(旅順口)를 점령한 후 부두를 세우기로 하고 '타린'을 '다리니(達里泥·러시아어로 모스크바에서 먼 곳이란 뜻)로 고쳐 불렀다고 하였다. 그 후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다리니'를 오늘날 '대련(大連)' 음역하였다고했다.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 대련은 원래부터 대련(大蓮)인 것이 맞다. 대련(大蓮)은 옛날에 연꽃이 많았다는 뜻이다. 대련은 위진(魏晉) 시기에 삼산(三山), 당나라 때 삼산포(三山浦), 명청(明淸)은 삼산해구(三山海口)라 불렀다. 이건 조선말로 삼신산(三神山)인 것을 삼산(三山)으로 부른 것이다. 봉래(蓬萊)가 물이 잠긴 것은 앞에서 소개한 신선전(神仙傳)에서 상전벽해(桑田碧海)로 인한 것이라고 되어있다.

 

M_06565.jpg


 

 방장(方丈)

 영주(瀛州)와 방장(方丈)은 육지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장(方丈)은 예로부터 칠색보옥이 나는 곳인데 자료에서 보듯이 '칠색보옥'을 캐려면 지금도 수암지역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압록강 수암(岫岩) 지역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玉)이 많이 산출되는 곳이다.


M_565655655.JPG

수암산(岫岩産) 칠색 옥돌원석


 
 
[칠색 보옥 자료]

 단동시 중연 호텔에 소장중인 크기 6.5톤의 칠색 옥돌

  <요하문명 중 흥륭와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거가 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8천년 전에 만들어진 옥귀걸이가 요하 적봉 일대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옥귀걸이가 바로 수암(岫岩) 이라는 곳의 옥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수암은 안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인데, 옥으로 유명합니다. 그 수암과 옥귀걸이가 발견된 곳은 무려 450km가 떨어진 곳이지요. 고대 요하 일대가 하나의 문명권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근거입니다.

 사진은 단동시 중연호텔 로비에 있는 1958년에 수암에서 발견된 7색 옥돌입니다.

 유명한 중국 안산옥부처(鞍山玉佛)와 일치하는 찬란한 옥돌입니다.

 길이 2.5m 넒이 1.5m 높이 2.1m 무게 6.5톤이나 나갑니다.

 현재까지 중국 단동시에서 가장 큰 옥돌입니다.

 중국인들이 옥을 매우 좋아합디다만 옥의 본 고장은 바로 요하일대였습니다.


 출처 : 구산의 품석재(品石齋) 홈페이지 
http://v.daum.net/link/2010733


 칠색보옥(七色寶玉)의 오행상 분류

 木 (목) : 청색(靑)과 녹색(綠) 
 火 (화) : 적색(赤)과 홍색(紅)
 土 (토) : 황토색(黃)
 金 (금) : 백색(白)
 水 (수) : 흑색(黑)

 부도지에 기록한 바에 의하면 방장산(方丈山) 방호굴(方壺之堀)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를 새겨 칠난(七難)을 없앴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 옥(玉)을 채굴하여 내몽골 흥륭와 . 사해 . 홍산(적봉)까지 무려 450Km를 운반하였다.

 홍산문명 이전에 흑피옥은 1만 년이 넘었고 홍산문명이 7천 년 ~ 8천 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상고시대에 요서에서 요동까지 옥(玉)을 채굴하고 이를 싣고 나르는 루트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흑피옥과 홍산문명의 옥조각을 새기기 위해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다면, 내몽골지역에는 옥(玉)이 생산 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지금 고비사막에서 몽골고원, 대흥안령까지 옛날에 옥(玉) 광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흑피옥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그들은 옥(玉)을 너무 사랑했던 것이다. 현재 발견된 유물만해도 무려 2만여 점이 넘는데 가공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흑피옥시대의 사람들은 일생을 옥(玉) 가공하는 일에 매달렸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많은 옥(玉)이 필요했는지 알 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막대한 량의 옥(玉)을 소비하여, 옥(玉)이 고갈되었으므로 이곳까지 옥(玉)을 구하러 온 것이다.

 고비사막 일대는 화산 분출이 있었던 지역이고 지금도 구글 위성지도 검색으로 내몽골 일대의 지형을 관찰하면 그 옛날 화산의 흔적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내몽골에서 옥(玉)을 채굴할 수 있는 광산은 모두 화산재에 덮여 지하 수십 미터 속으로 파뭍였을 가능성도 있다.

 신시본기(神市本紀)에 "천하 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를 흠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삼신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명사(神眀舍)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그것은 발해가 수몰되기전, 대평원이었을 때 배달(倍達)의 땅에서 매 10년마다 신시(神市)를 크게 열었으므로 사해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던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 기록은 부도지 제 14장에 기록되어 있다.  

 

 부도지 제 14장 (第十四章)


 於是에 移黃穹氏之裔六萬이 守之하고 乃割木作桴八萬하여 刻信符流放於天池之水하여 招四海諸族하니 諸族이 得見信桴하고 次第來潗하여 大開神市於朴達之林하고 修禊淨心察干天象하여 修麻姑之譜하여 明其族屬하고 準天符之音하여 整其語文이러라.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이 부도에 이주하여 지키고, 곧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흘려 보내, 사해의 제족을 초청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信符)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배달(倍達)의 땅에 신시를 크게 열고, 계불로 마음을 깨끗이 하여, 천상을 살핀대로 마고의 계보(系譜)를 살펴 그 족속(族屬)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 하였다.

 又奠定北辰七耀之位하여 燔贖於盤石之上하고 會歌而奉天雄之樂이러라.

 諸族이 棌七寶之玉於方丈方壺之堀하여 刻天符而謂之方丈海印하여 辟除七難而歸라.

 또 북극성과 일월(日月)과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위치를 정하고, 속죄의 희생물을 구워 반석 위에서 제사를 지내고, 모여서 노래하며 천웅(天雄)의 악(樂)을 연주하였다.

 제족이 방장산(方丈山) 방호의 굴(方壺之堀)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여 천부를 새기고 그것을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여 칠난(七難)을 없애고 돌아갔다.

 自此로 每十歲必開神市하니 於是에 語文同軌하여 一準天下하니 人世太和러라.

 仍而(仍以)築城於海隅하여 奉奠天符하고 使駐留諸族으로 舘(館)而居之하니 爾來千年之間에 城隍이 遍滿於全域이라.

 이로부터 매 10년마다 반드시 신시를 여니, 이에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가 하나로 되어 사람들이 크게 화합하였다.

 인하여 바닷가에 성황(城隍)을 지어 천부에 제사를 올리고, 제족으로 하여금 머물러, 집을 지어 살게 하니, 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인용끝]

 

 부도지는 신시의 일을 임검씨께서 행한 것으로 적고 있다. 워낙 긴 세월을 줄여서 핵심만 이야기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마지막 代에 그 행하신 일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시환웅배달국부터 단군조선 개국까지 발해가 중심이 되어 세계사를 이끌어 왔다는 점이다.  

 황궁씨의 후예 6만이 부도에 이주한 것은 발해에 동이족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살게되었던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홍산문명으로부터 전파된 것이며 시기로는 약 8천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달(倍達)의 땅에 신시를 크게 연 것은, 당시 발해는 대평원에 오곡백과가 넘치는 마치 천국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해의 제족들이 무수히 많이 몰려왔어도 이를 다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큰 시장을 열었던 것이다. 

 천문을 살펴서 마고의 계보(系譜)를 밝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전해온 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고 한다.

 신시가 열리는 곳에는 귀한 옥이 많이 발견 되었으므로 제족이 방장산(方丈山) 방호굴(方壺堀)에서 칠보의 옥을 채굴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생산된 옥을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하는데 칠난(七難)을 없앨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귀한 보석은 몸에 지니고 있으면 화가 미치기 쉬운데 옥은 일곱가지 고난을 물리친다고 한다.

 신시본기에 "대저 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의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가며 점점 깊어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크다란 근본은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그 신풍과 성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를 흠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삼신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명사(神眀舍)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 고 기록한 것은 발해의 위엄이 이토록 신성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신명사(神眀舍)란 것은 제후들이 神께 제사지내기 위해 동북쪽 즉, 방장산에 와서 한달이든 두달이든 자기 차례가 올 때 까지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다리는 여곽을 말한다. 이를테면 절 같은 신성한 곳이다.

 또 "방장은 일장사방(一丈四方 : 사방 3미터)의 루각(閣, 설주문)으로 소도(蘇塗)가 있는 곳(方丈四方一丈之閣郎蘇塗所在)"이라고 하였다.

 소도(蘇塗)는 '삼신오제본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소도는 제천을 하는 신성한 곳으로 " 소도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효 신용인의 오상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에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가지 기예를 말한다. " 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신명사(神眀舍)가 곧 소도(蘇塗)인 것이 분명해진다.

 옥(玉)은 아무 곳에서나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동북지역에서 수암(岫岩)이 유일한 것과 신명사(神眀舍)라고 하는 일장사방(一丈四方) 소도(蘇塗)가 있는 곳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방장(方丈)은 요녕성(遼寧省) 수암현(岫岩縣)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옛 기록에 발해중에 삼신산이 있다고 하고, 그곳에는 불사의 신선들이 산다고 한 것은 모두 이를 보고 기록한 것이다.

 

 영주(瀛州)


 영주(瀛州)는 신시본기에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천지(天池)의 물이 샘솟는 곳(瀛洲瀛環洲島之貌卽天池所出)"이라 하였다. 영주(瀛州)를 섬에 있는 산이라 한 것은 후대에 발해가 수몰되었기 때문에 학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다. 실제는 방장산 보다 더 높고, 동북쪽으로 먼 곳에 위치한 산이다. 또한 천지(天池)의 물이 샘 솟는 신성한 곳을 찾아야 한다. 삼신은 곧 상제이니 상제는 가장 높고 신성한 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봉래에서 방장을 거쳐 영주에 이르는 지형이 점점 높아지므로 하나의 큰 산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 이를 삼신산(三神山)이라 하는 것이다. 삼신산(三神山)에 상제가 있다면 그것은 임금이나 황제가 아닌 환인천제의 불상(佛像)을 새기고 그것을 모신 사원이 있었을 것이다.

 사마 천(司馬 遷)은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서 삼신산(三神山)이 발해(渤海)에 있다고 했으며 중국 문헌에도 발해(渤海) 가운데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면 사마천으로 부터 최소 2천 년 전 혹은 최대 3천 년 전에 바닷물에 잠겨버린 발해(渤海)대평원에 삼신산(三神山)이 분명히 있었다는 말이다.

 발해(渤海)대평원이 수몰되고, 오랜 세월이 흘러 漢나라 때는 이미 전설이 되었고, 그후 발해(渤海)나 삼신산(三神山)을 언급하는 것은 황당무계한 것으로 보았다. 이미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망망대해만 있을 뿐인데 그 바닷 속에 삼신산(三神山)있다고 하니 이상하게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부도지에는 영주(瀛州), 봉래(蓬萊), 방장(方丈)을 언급하고 있으니, 사마 천(司馬 遷)보다 부도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라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보아야하므로 삼신산(三神山)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상 밝혀진 사실들로 영주(瀛州)를 찾아보면 영주(瀛州)는, 지금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이다. 우선 지명이 환인(桓仁)인 것은 이곳이 조선의 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곳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기도 하니, 풍수지리도 상고시대부터 단국조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곳의 오녀산(五女山)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 있다.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구려 성(城)으로 알려져 있다. 해발 800M(미터) 높이의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성(城)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요녕성 지역은 오녀산성(五女山城) 뿐만이 아니라 고구려 산성이 여러개 발견된 곳으로, 금주구 대흑산에는 비사성(卑沙城), 보란점시에는 외패산성(巍覇山城), 와방점시에는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 그리고 장하시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 고구려 당시에 축조되어 현재까지 그 일부가 남아 있다고 한다.

 

 



비사성(卑沙城), 외패산성(巍覇山城),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 성산산성(城山山城)

 

 산성(山城)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성(山城)을 쌓는데 기본 요건 중 하나가 우물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어야 최고의 산성(山城)이 될 요건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명수가 솟아 오르는 곳이어야 한다. 

 오녀산성(五女山城)에는 2천년 동안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천지(天池)이다. 천지(天池)는 돌을 인공적으로 깍아서 만든 사각형의 샘인데 깊이가 5m(미터) 길이가 10m(미터)이다. 왠만한 수영장 크기와 같다. 그 옛날 고구려 이전, 이곳에 사원을 짓고 삼신상제를 모셔 천제를 올렸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M_1011.JPG

 

 아래 지도에서 보면 동그라미 쳐진 부분이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그 아래에 환인현(桓仁縣) 앞을 흐르는 큰 강을 막아 지금은 호수가 생겼다. 그 호수의 모습이 흑룡이 춤추는 듯하다.



M_1011j.jpg



아래에 보이는 흑룡 모양은 환인댐의 모습이다.

M_090227095710150.jpg

 

M_10.jpg

환인댐

M_102.jpg

오녀산성(五女山城)

 

M_101.jpg

천지(天池)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아사달(阿斯達)이다 

 왜, 난데없이 고구려 성(城)을 들먹거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아사달(阿斯達)이란 이름 때문이다.

 아사달(阿斯達 , Asaddhar)이란 싯담어로 '난공불락의 성 . a holy city, invincible castle, strong hold' 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에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2천 년 전 단군왕검께서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웠다.(魏書云 乃往二千載有檀君王儉 立都阿斯達) "고 하였다. 바로 그 아사달이 오녀산성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시본기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천지가 소출되는 것도 빼놓을 순 없다. 환인현(桓仁縣)에 아사달(阿斯達)이 있고, 오녀산 아사달(阿斯達)에는 천지(天池)가 소출한다. 이것은 지명을 짜맞춘 것 처럼 역사 기록과 일치한다.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아사달(阿斯達 , Asaddhar)에 관한 역사기록을 살펴 보겠다.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단군기(檀君紀)에 기록하기를

" 甲辰, 移都于唐莊京 命肅愼氏 任征伐 鳳凰止于庭 갑진년에 도읍을 당장경으로 옮겼다. 숙신씨에게 명하여 정벌의 일을 일임하였다. 봉황이 뜰에 머물렀다. 今文化縣.莊莊坪也. 時洪水汎濫, 沈沒平壤, 使王子登阿斯達山而定之. 지금의 문화현 장장평을 말한다. 이 때 홍수가 범람하여 평양이 침몰되었기에, 왕자를 시켜 아사달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새로운 거처를 정하게 한 것이다. "

라고 한 것을 보면 아사달은 개국 이후 도읍지인 평양이 침수될 무렵까지 단군께서 거처했던 곳이며, 그곳에 있었던 아사달(阿斯達 , Asaddhar)에 올라 지세를 살폈고, 갑진년에 당장경(唐莊京)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영주(瀛州)가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조건에 딱 맞는 오녀산은 환인 천제의 불상을 모신 사원이 있었고, 그 아래로 흐르는 '혼강' 기슭에 단군께서 다스리는 궁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사달(阿斯達)은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여러 곳일 수 있다.

 아사달(阿斯達)은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다. 평양이 여러 군데이듯 아사달(阿斯達)도 여러 군데일 수 있다. 예를들어 이스라엘에 '마사다'라는 고대 왕궁,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다. '히브리어'로 '난공불락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마사다'(מצדה)의 어원은 싯담어 아사달(Asaddhar)이 분명하다.

 

M_300px-Israel-2013-Aerial_21-Masada.jpg

그림출처 : 위키백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지인 '마사다'

 또 남미 아스텍카인은 서기 820년 경 캄차카반도에서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를 연구한 배재대학교 스페인어과 언어학자 손성태교수는 아스텍카인들이 떠나온 고향을 멕시코 '나와들어'로 아스땅(az-zan)이라 한다고 했다. 아스땅(az-zan)아사달(Asaddhar)일 것이라고 손성태박사는 그의 연구 논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 아스텍카인들, 즉 맥이족이 요동의 아스땅(=아사달, 하얀 땅)을 출발한 때가 820년경이었다. 그들은 북쪽의 옛 고리족이 살던 땅을 지나서, 어느 곳에 가서 배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그 ‘어느 곳’이 필자의 판단으로는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배를 탈 때의 주변 자연 환경을 기록한 부분이 멕이코 문헌에 남아 있다. 스페인인과 원주민 여인의 혼혈아로 태어난 크리스토발 델 카스티요(Cristobal del Castillo)가 16세기 말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Historia de la Venida de los Mexicanos y Otros Pueblos e Historia de la Conquista』에는 ‘이스 산(iz zan)’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온다. 이 말의 뜻은 ‘하얀 산’이다. 멕이코 나와들어에서 ‘하얀’을 뜻하는 어휘는 ‘이스(iz), 이츠(itz), 이츠(ich), 아스(az)’ 등으로 나온다. ‘산(zan)’ 은 중국 한자어 ‘山’으로 보인다. 이것은 캄차카 반도의 눈 덮흰 하얀 산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고, 또 언어적으로는 9세기 초에, 그들이 원래 살던 요동의 아사달 지역에서는 이미 우리말 ‘태백’보다 중국 한자어 ‘산(山)’ 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손성태 배재대학교 교수 2010년 논문 "아스텍의 지명과 일상생활 속의 우리말 연구" 발췌)

 오늘날 캄차카반도는 러시아영토가 되었지만 불과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이곳 원주민의 말은 우리말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한다. 아직 필자의 연구가 부족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고, 다만 강상원박사께서 강의하실 때 이곳의 말을 포함해서 함경도 평안도 등 산스크리트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음을 확인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민족이 이동하면 그 언어와 습속과 지명이 동시에 이동한다. 그러므로 아사달(阿斯達)이란 지명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이 기회에 손성태박사의 주장을 본태로 서기 820년경 망국의 발해민족이 아메리카로 건너간 사연을 추적해 본다.

 

 잃어버린 영토 발해(渤海)


 19세기 말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일어나던 때 국내 정세는 너무 어지러워 변경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 때에 미국인 학자들은 아무르강을 유유히 탐험하고 다녔다,

 1860년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패전하여 영국 . 프랑스 . 러시아와 강제로 북경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청나라는 영국에 홍콩을 내주고, 러시아에는 연해주를 넘겨주었다. 조선은 러시아와 청이 북경조약을 체결한 사실을 몰랐는지, 이듬해 1861년 경흥부사 이석영이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군이 국경비를 세우는 것을 보고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원래 조선의 영토는 간도, 연해주, 그리고 연해주 북쪽에서 해안을 따라가며 아무르주, 예벤키자치주, 춥지반도, 캄차카반도, 베링해협, 알류산열도까지 였는데, 조선 정부의 무능한 대책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옛 발해의 영토를 러시아에 넘겨주고 말았다.

 혹자는 조선의 동북쪽 영토가 간도, 연해주까지는 그럴듯 하나, 아무르주, 예벤키자치주, 춥지반도, 캄차카반도, 베링해협, 알류산열도까지는 좀 심하지않는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도 그곳에는 우리와 똑 같은 동양인이 살고 있으며 그 종족의 이름은 발해족(渤海族)과 고리악족(高麗岳族 : 고려의 언덕)이다. 발해와 고려는 싯담어라는 사실을 앞장에서 밝힌바 있으니 우리민족이 천산에서 어떻게 이동하였는지 그 경로가 대략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막낙섬의 온돌

 또 한가지 알류산열도의 동쪽 끝, 북아메리카의 알래스카 바로 앞에 있는 아막낙 섬에는 3,000년 전에 사용한 고래잡이 선조들의 온돌 흔적과 고래뼈로 만든 탈, 기타 한民族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 여러 가지가 발견되었다.(손성태 배재대학교 스페인어과 교수 . 릭 크넥 페어뱅크스대 교수)

 또, 철기가 발견 되었는데 탄소연대측정을 하니 기원후 257 ~ 955년경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17세기에 방문한 학자들이 보기에는 그곳의 주민들이 돌을 갈아서 사용하고 있었다고하는데 어째서 철기유물이 신석기시대에 발견되는가 하면서 의아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이 아막낙섬의 주민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철기는 오래 전에 이곳을 지나가던 이방인들이 주고간 물건이라는 것이다.(손성태) 

 또한 아막낙 섬에서 3,000년 이나 된 온돌이 발견되었다.(릭 크넥 페어뱅크스대 교수) 이것은 '쪽구들'이라고 하며 불고래를 파고 방의 한쪽 구석만 따뜻하게하는 구조인데 비슷한 구조의 온돌이 만주와 연해주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 지금까지 최고 오래된 온돌은 아막낙 섬의 것이지만 약 2500년 정도 된 온돌이 연해주에서 발견 된 것을 보면 고래잡이를 하던 선원들이 사용하였던 것일 것이다. 오늘날의 연도(燃道)를 '고래'라고 부른 것도 고래잡이 선원이 아니면 지어질 수 없는 이름이다.    

 

 ▲ 온돌의 기원에 대한 통론을 뒤흔든, 미국 알래스카주 어날래스카시 아막낙섬에서 발굴된 온돌. 릭 크넥 페어뱅크스대 교수가 연대 측정한 결과 3000년 전 것으로 밝혀졌다. /릭 크넥 교수 제공

 그림의 출처 :  http://newsplus.chosun.com

 

 손성태 교수는 1647년 최초로 러시아의 코사크인 사냥꾼들이 춥지반도에 최초로 나타났으며 그들이 발해족(渤海族)과 고리악족(高麗岳族)의 기록을 남겼다고 했다. 그리고 1670년대 그리스 출신 러시아 외교관인 스빠파리가 중국을 여행하고 쓴 책인 '시베리아와 중국’이란 책이 1960년 러시아에서 출간하였으며, 시베리아 출신 지도 제작자인 레메조프는 17세기 후반 지도와 기록을 남겼다.

▲   러시아가 인식한 조선의 영토는 아무르강 (흑룡강)


 위 기사를 종합하여 보면 17세기까지만 하여도 러시아인들은 연해주 이북 . 극동지역이 자기들의 영토가 아니라는 분명한 인식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통쾌하다고만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우리땅이라고 주장해도 오히려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李秉華 박사는 러시아 연해주에 한국의 투자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1989년이래 무려 170여회나 극동러시아를 왕래하였는데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크州의 하바로브스키, 아무르州의 볼라고베챤스키, 캄챠카州의 페트로파블로브스키, 코략자치區의 팔라나 등을 방문하면서 잃어버린 한民族의 역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곳에 있는 고고학박물관과 민속박물관 등을 꼼꼼히 둘러보고 확신을 얻었으며 그 동안 러시아를 오가며 가까워진 인사들(푸틴의 측근과 극동러시아 권력층)에게 코략자치區는 한민족의 잃어버린 영토라고 했더니 이들은 남북통일도 못하는 주제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핀잔만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연해주만 투자하지 말고 코략자치區에 한국측에서 인구만 늘려주면 자치구역 부활은 가능하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길은 열려있는 셈이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그 땅의 주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위 기사의 몇 구절을 기록해 두고 그 의미를 되새겨두겠다.

 

 발해 사람들의 신대륙 이주

 아메리카 신대륙에 본격적으로 인구의 증가가 있었다. 옥수수를 재배했던 흔적이 8,000년 전이고, 그 밖에 한民族과 관련된 유물들이 1만 년을 전후하여 발견 되는 것으로 보아 영거 드라이아스(Younger Dryas)가 끝난 직후,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몇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 많은 무리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찾아 갔다. 고래잡이 선원들의 항해가 있었고, 황제와 치우의 전쟁으로 살기가 어려워진 사람들의 피난, 삼신산에 불로초를 찾아서 부상국을 찾아간 사람들, 흉노와 고구려인들이 말을 타고 건너갔고, 후기에 말갈인과 발해인들의 대거 이주가 있었다.

 특히, 발해(渤海 698 ~ 926)는 백두산이 폭발하면서 국토의 대부분이 초토화 되었고, 수 십 만명이 피난길에 올라 아메리카로 건너가게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백운봉기 화산활동 때 분출한 고온의 부석과 화산회의 퇴적층 사이에서 발견되는 탄화목의 탄소동위원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지금으로 부터 1천 4백 10년 전 ~ 1천 50년 전에 6차례의 폭발을 하였다고 하니 이 기간 중에 발해국은 요나라의 공격을 받고 나라가 망하였던 것이다. 부흥운동을 하였던 시기까지 합치면 1116년 까지 인데 그 동안 발해의 인구 대부분이 사라져버렸다. 일부는 고려에 귀순하였지만 발해 사람이 중국에 귀순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 당시 중원은 사실상 고려국(高麗國)만 있었기 때문이다.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기이지만 사실상 고려국(高麗國)을 빼고나면 오대십국(五代十國)은 고려의 제후국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발해인의 대거 망명을 받아 줄수 있는 나라는 고려국(高麗國) 뿐이었다. 그런데 발해의 왕자 대광현(大光顯)이 수 만명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순하자 고려에 귀순하는 인구가 자꾸 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추가로 수 만 명이 고려에 귀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10만 명을 흡수했어도 발해의 인구는 300만 명 수준이었다. 물론 요나라가 된 땅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꾸준히 발해부흥 운동을 한 것이나 백두산이 자주 폭발한 것을 보면 발해 유민 중 최소한 몇 만 명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무리를 이끄는 사람은 제사장급의 높은 신분이나 샤먼(무당)이었을 수도 있다. AD. 499년과 AD. 520년경 이미 부상국을 다녀온 양(梁)나라, 제(齊)나라 도인들도 있었던 터라 발해의 지도자는 급박한 시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동해의 연안을 따라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종족 구성원은 발해와 말갈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북극에서 캄차카반도 쪽으로 내려오는 냉기류로 인한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순록을 키우며 사냥을 하고 여름에는 바다로 나가서 물개와 고래를 잡으며 살았다.

 몽골 민족은 12세기에 나타나 말을 타고 서쪽으로 정복 사업을 펼치고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방대한 영토를 넓히며 위세를 떨친 민족이다. 그들은 원래 유목 생활을 하였으므로 다시 유목민으로 돌아가기가 쉬웠지만 나라를 잃은 발해인들은 몽골과는 다르게 농경과 정착 생활을 하여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몽골민족 처럼 유목민이 되기는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백두산이 폭발하고 말갈족이 난을 일으키자 속수무책으로 발해는 무너졌다.

 발해가 멸망하자 난민들은 어디론가 떠나야했으므로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려에 귀순했으며 일부는 그곳에 남아 말갈족과 동화 되었다.

 발해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수 십만 명의 난민들은 이상향의 세계을 찾아 동북쪽으로 이동하여 캄차카반도까지 흘러갔다. 수 백년 전 부터 전설로만 전해오던 부상국을 찾아서 떠난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발해의 고래잡이 어선들과 콩을 싣고 일본까지 실어나르던 선원들이 동해 끝에 부상국이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수 천 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신세계를 찾아 떠나가는 우두머리가 있었다면 그의 마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아래는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李秉華 박사의 2012년 1월 16일 새마을 운동 중앙회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인용문]


  보하이족(渤海族)은 누구이고, 코략족(高麗岳族)은 누구인가?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 李 秉 華  (2012. 1. 16.)

 

 필자는 고고학이나 인류학 또는 민속학 전공자가 아닌 농학자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1989년이래 지금까지 극동러시아를 170여 회를 왕래하면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 하바로브스크州의 하바로브스키, 아무르州의 볼라고베챤스키, 캄챠카州의 페트로파블로브스키, 코략자치區의 팔라나 등에 있는 고고학박물관과 민속박물관 등에서 보고, 읽고, 듣고, 느끼고, 또 이 지역들에서 발굴된 발해인과 후손들의 유적과 흔적의 실체를 보면서 언젠가 이것을 글로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 중국 중앙cctv에서 발해국을 그들의 지방정권으로 격하시키고 종속화하는 것을 보면서 우선 정리가 미약한 것이지만 이것이라도 발해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용기를 내어 쓰게 되었다.

● 渤海國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기민층은 흑ㆍ백수 말갈족과 거란족 및 기타 소수종족이었다.

 극동러시아의 박물관 지도를 보면 보하이族 즉, 발해인들이 세운 발해국 국토넓이는 지금의 남북한 면적(약22만㎢)의 2.7배로, 이는 일본과 한반도를 합한 것과 같은 면적이다. 인구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약 300~500만명 정도일 것이라는 기록이 다수의 문헌에서 나온다.

 지배층인 고구려 후예들은 같은 자리에 뿌리내리는 정주(定住)권 생활인 유축(有畜)ㆍ경종 겸업 농업을 하였고, 기민층은 몽골族 등과 유사한 반(半)유목생활을 하였는데, 이것은 다시 3갈래로 나뉘어 진다. 소, 말, 양 등 가축을 키우면서 이동하는 종족인 거란族과 백수말갈族이 비중 높은 첫째 갈래이고, 두 번째 갈래는 첫 번째의 일부와 기타 소수종족들이 수렵을 하면서 모피를 팔아 생활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 갈래는 흑수말갈族과 나나이族이 흑수(흑룡江과 아무르江을 지칭)江과 바닷가에서 물고기와 물개, 물범, 고래 등을 잡아 생활하였다.

 이들의 대략적인 또 다른 구분은 입은 옷으로 구별하는데, 길쌈으로 옷감을 짜서 입으면 지배층이고, 피지배층은 소ㆍ양 등의 가축으로 털옷을 입은 백수말갈族과 거란族들이고, 호랑이ㆍ곰ㆍ사슴 등 야생동물들의 털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종족은 대부분 소수 기타 종족이거나 극히 일부의 말갈族과 거란族이고, 물고기 껍질과 물개ㆍ수달피 등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면 대체로 흑수말갈族과 나나이族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30여년 후인 서기 698년에 건국된 발해국은 926년 요(遼, 거란의 후예)나라에 멸망하기까지 228년 동안 이들이 사용한 문자는 한자였으나 언어는 고구려語ㆍ말갈語ㆍ거란語ㆍ나나이語 등 4종류로 각기 사용되었다는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이로 인하여 「5京 16府62州」의 행정조직을 나누어 통치하는데,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중앙정부와 광역단체, 지방 및 기초단체로 나누어 자치권한을 부여했고, 그 지역의 수장은 한자와 고구려語를 사용할 수 있는 관리가 중앙에서 파견되어 업무를 관장했다.

 그런데 발해가 몰락하기까지 228년 동안 지배층의 고구려인들은 이종(異種)인 말갈族, 거란族, 기타 소수종족과 나나이族 등과 교잡(혼인)이 빈번하였다는 것도 다수의 문헌에 나온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후에 그들의 후예들이 발해를 건국했듯이 발해가 멸망하고 반백년인 50여년만에 오츠크해(海)와 베링海 사이의 캄챠카 반도에 이들의 후예들이 모여 ‘고려의 언덕(高麗岳)’이라는 코략마을이 만들어졌다.(코략은 러시아식 이름이다.)

 필자는 이것을 살피며 다녔고, 그 동안 조사한 것을 오늘 글로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 코략族의 지배층은 고려쪽을 향하여 제사를 모셨다.

 대략 고려 성종 제위시기(981~996년). 잎사귀큰풀(풋콩), 보리, 메밀 등의 농사를 짓는 코략族이 캄챠카에 나타났다. 이들은 발해인과 흑수말갈族과의 혼혈종으로 문자는 한자로, 숫자의 계산은 원주민과 달리 십진법을 사용하고 있었다.(에스키모와 유사한 원주민은 5진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내용은 1953년 6.25전쟁이 끝나고 북으로 끌려간 국군포로중 일부가 돈벌이를 위해 캄챠카에 정착한 사람과 이에 앞서 1948년 북한의 신의주ㆍ함흥 등지의 ‘제2 학생사건(친소신탁통치반대운동)’때 체포되어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캄챠카로 추방당한 사람(18세 전후의 학생)들이 구술한 것인데, 이들은 누구의 지시나 부탁 없이 코략족에 대한 연구를 꽤나 오래한 것 같았다.

 필자는 1997년 이후 캄챠카 반도를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이들을 만났고, 그 중 국군포로 몇 명은 한국으로 모셔오려고 했으나 dj정부때 국방부가 거부했다.

 이들, 즉 캄챠카로 건너간 사람들(국군포로와 학생사건 연루자들)의 구술을 정리하면 발해가 멸망할 때 살았던 일부가 바닷가를 따라 북으로 가다보니 캄챠카 반도에서 가장 따뜻한 팔라나(이 지역은 오츠크海 동쪽으로 위도는 높지만 난류로 인한 기온이 높아 밀과 보리가 잘 된다)로 거꾸로 내려와서 정착한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었다. 또 코략族의 지배층은 발해유민들과 흑수말갈族들의 혼혈인들이고, 기민층인 피지배자들은 원래 캄챠카에 몽골반점이 형성되는 원주민이라는 사실도 알았다고 했다. 이렇게 사연 많은 코략族의 샤먼들은 지금도 고려가 있던 방향으로 제사를 모시고 있다.

 舊소련 스탈린 시절(1930~40년) 코략族은 자치區(州보다 한 단계 아래조직인 郡에 해당)로 승인받았고, 당시 자치區내 인구는 사냥꾼인 러시아인들을 포함하여 약58,000여명이었고, 팔라나 행정도시에는 15,000여명이 살고 있었다.

 코략자치區의 면적은 한반도와 유사(22만㎢)하고, 지금도 경종농업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렵과 연어잡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푸틴 정권은 코략族이 3만명이하로 줄어들었다고 자치구역을 해체하여 캄챠카州에 예속시켜 버렸다.

 ● 코략族의 생활형태는 우리와 너무 닮았다.
 지금부터는 사실에 입각한 기록들과 필자가 본 것을 정리해본다.
 一. 개고기를 神에게 바치고 의식 후에 같이 나눠먹는데 우리의 육개장과 동일함.
 一. 순록과 사슴의 창자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어 먹음.
 一. 샤머니즘이 매우 강하고 명절과 추석 때 무당이 제사를 집행함.
 一. 온돌을 사용하는데 바닥은 돌로 만들고, 벽은 나무로 수직온돌을 만들었음.
 一. 결혼 전후 2~3년간 처갓집에서 생활하고 손자는 외할머니가 키움.
 一. 서당 같은 곳이 있어 어린이들을 무당(샤먼)이 키우고 공부를 가르침(주로 셈본교육)
 一. 결혼식 날 처녀도둑이라고 신랑을 매달아 놓고 발바닥과 궁둥이를 몽둥이로 때림.
 一. 순록과 사슴의 뿔을 보약으로 달여먹음.
 一. 도둑은 최고의 범죄로 간주하고, 어른들 앞에서는 술과 담배를 돌아서서 마시고 피움.
 一. 생선국을 아주 잘 끓이고 잘 먹음.
 一. 동물의 젖과 보리를 혼합하여 먹걸리 같은 술을 만들어 먹고, 안주는 생선젓갈을 먹음.
 一. 병든 자나 고령자를 격리시켜 죽이는 고려장(高麗葬)과 같은 풍습이 있음.
 一. 아기를 등뒤에 업는 것은 우리와 같음.
 一. 제사 후 술과 음식을 동서남북으로 뿌리며 고수레를 외침.
 一. 어린아이와 여인들은 색동옷을 귀한 것으로 여겨 설 명절 때 입음.
 一. 노랫소리가 불경과 같으며 아리, 아이고 등 이리랑 발음이 많음.
 一. 나무젓가락을 사용함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연구한 러시아 사학자 일부는 보하이族과 코략族을 혼돈한 사례가 있고, 같은 혈통으로 규정한 학자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들을 푸틴의 측근과 극동러시아 권력층들에게 알려주면서 코략자치區는 한민족의 잃어버린 영토라고 했더니 이들은 남북통일도 못하는 주제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핀잔만 맞았다. 그들은 연해주만 투자하지 말고 코략자치區에 한국측에서 인구만 늘려주면 지금도 자치구역 부활은 가능하다고 했다. 실제로 자치법령도 그렇게 되어 있다.
大洋제국 대한민국을 위해 잃어버린 역사를 찾으러 캄챠카로 가자! (끝)


 

 러시아 연해주 식량기지에 관한 보고서

 

 존경하옵는 분들에게
 
 除禮하옵고 . . .

 본 자료에는 한ㆍ소 및 한ㆍ러 수교 18년이 되는 지금까지 극동러시아 연해주에 남ㆍ북한을 아우르는 식량기지 구축에 대한 남ㆍ북 및 러시아 등 이해 당사자들의 공개ㆍ비공개 추진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애당초 러시아측은 한국에 갚아야 할 차관상환금 14억7천만 불과 연해주 토지(달레네골스크 광산지역)의 교환을 원했으나, 보고자의 판단 잘못으로 무산된 후 러시아 측은 중고 헬기와 탱크 등 군사무기로 차관금을 상환하여 왔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남ㆍ북 정상회담을 주선하는 대가로 6억6천만 불(당시 한화 7천8백억 원)을 탕감해주고 지금은 12억 불(이자포함)만 남았습니다.
 
 다가오는 9월 28일부터 10월 1일 사이에 한ㆍ러 정상회담 및 수뇌부 회담 때 러시아는 MB정부에 북한을 달래주는 조건으로 또 탕감을 요구하자는 전략을 “상트페테르부르크派”들에 의해 추진되는 반면에, 극동러시아 “하바로프스크派”들은 12억불로 “고ㆍ러 연해주 농업경제자유지구”를 추진하여 러시아와 남ㆍ북한이 공생하는, 즉 남ㆍ북한 정부에 제3의 식량영토를 할애해주어 극동러시아 주민들의 일자리를 찾고, 남ㆍ북한을 이용한 일본과 중국의 간접 침략을 막자는 논리를 주장합니다.
 
 향후 2012년 APEC 정상회담이 블라디보스톡에서, 2014년 동계올림픽이 소치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러시아는 미국, 중국과 더불어 세계를 주도하는 강대국으로서 지위가 더욱 강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최근 그루지야 침공에서 본 것과 같이 자국과 이권이 상충될 경우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것이 현재 러시아의 국력이며, 미국도 이를 제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2012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되는 APEC 정상회담 이후의 연해주 가치는 지금보다 100배 이상이 뛸 것이 자명합니다. 흙 속의 진주를 캐는 마음으로 연해주를 선점하는 것이 지금 우리들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한민족에게는 건국 이후 처음으로 제3국에 식량영토를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평소에 상기 내용에 관심이 많으신 여러분들께서는 「한ㆍ러 극동수뇌부 회담」에서 이 문제가 도출 되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남ㆍ북한 식량문제 해결로 한민족의 새로운 르네상스가 꽃필 수 있을 것이고, 아울러 참여하시는 여러분들께서는 광개토대왕보다 더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깊이 이름을 남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08년 8월 15일
 
  국제농업개발원장 이병화 올림    [인용끝]

 

 이병화(李秉華) 연구소장의 증언을 다시한번 보고 설명한다.

" 고려 성종 제위시기(981~996년). 잎사귀큰풀(풋콩), 보리, 메밀 등의 농사를 짓는 고리악족(高麗岳族)이 캄챠카에 나타났다. 이들은 발해인과 흑수말갈族과의 혼혈종으로 문자는 한자로, 숫자의 계산은 원주민과 달리 십진법을 사용하고 있었다.(에스키모와 유사한 원주민은 5진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내용은 1953년 6.25전쟁이 끝나고 북으로 끌려간 국군포로중 일부가 돈벌이를 위해 캄챠카에 정착한 사람과 이에 앞서 1948년 북한의 신의주ㆍ함흥 등지의 ‘제2 학생사건(친소신탁통치반대운동)’때 체포되어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캄챠카로 추방당한 사람(18세 전후의 학생)들이 구술한 것인데, 이들은 누구의 지시나 부탁 없이 고리악족(高麗岳族)에 대한 연구를 꽤나 오래한 것 같았다.

필자는 1997년 이후 캄챠카 반도를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이들을 만났고, 그 중 국군포로 몇 명은 한국으로 모셔오려고 했으나 김대중 정부때 국방부가 거부했다.

이들, 즉 캄챠카로 건너간 사람들(국군포로와 학생사건 연루자들)의 구술을 정리하면 발해가 멸망할 때 살았던 일부가 바닷가를 따라 북으로 가다보니 캄챠카 반도에서 가장 따뜻한 팔라나(이 지역은 오츠크海 동쪽으로 위도는 높지만 난류로 인한 기온이 높아 밀과 보리가 잘 된다)로 거꾸로 내려와서 정착한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었다. 또 고리악족(高麗岳族 = 코략族)의 지배층은 발해유민들과 흑수말갈族들의 혼혈인들이고, 기민층인 피지배자들은 원래 캄챠카에 몽골반점이 형성되는 원주민이라는 사실도 알았다고 했다. 이렇게 사연 많은 코략族의 샤먼들은 지금도 고려가 있던 방향으로 제사를 모시고 있다. "

 그렇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 처럼 아무르강에서 동해안으로, 동해안에서 북상하면 지금도 그곳에 남아 있는 발해와 말갈의 후손들이 길약족, 예벤키족, 코리약족, 춥지족이다. 그들의 선조는 발해와 말갈이며 부상국을 찾아 아메리카로 피난을 가던 발해의 무리 중 그 자리에 남아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축치족은 우리말의 춥지에서 나온 말이다. 러시아의 코사크인 사냥꾼들이 1647년 처음으로 축치 지역에 들어갔는데 그때까지만 하여도 러시아인들은 이곳이 자기네 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동양인 모습을 한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17세기 코사크 사냥꾼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방송중이라 별도로 출처를 기록하지 못 했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춥지'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후 러시아가 국경선을 그린 새 지도를 만들면서 이곳의 이름을 러시아어로 '축치'라고 하였던 것이다. 누구든지 먼저 줄을 그으면 그 땅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안타까운 고릿적 이야기다. 


 축치인들은 위 그림의 설명에서 보듯이 이방인을 '딴이'라 하고 인근 지역의 아이텔맨인을 '아이'라 부르고 있으며 루카기르(lukaghir)족을 '에들'이라고한다. 그리고 차가운 것은 '차버' 추운 것은 '추버' 하는 것이 과거에 우리말을 사용했던 흔적이 분명한 것이다.

 이상으로 축치인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다음은 이병화(李秉華) 소장의 증언 중에 고리악족(코략族)의 생활 형태를 논한 것을 살펴 보겠다.

"    

 ● 코략族의 생활 형태는 우리와 너무 닮았다.

지금부터는 사실에 입각한 기록들과 필자가 본 것을 정리해본다.

一. 개고기를 神에게 바치고 의식 후에 같이 나눠먹는데 우리의 육개장과 동일함.

一. 순록과 사슴의 창자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어 먹음.

一. 샤머니즘이 매우 강하고 명절과 추석 때 무당이 제사를 집행함.

一. 온돌을 사용하는데 바닥은 돌로 만들고, 벽은 나무로 수직온돌을 만들었음.

一. 결혼 전후 2~3년간 처갓집에서 생활하고 손자는 외할머니가 키움.

一. 서당 같은 곳이 있어 어린이들을 무당(샤먼)이 키우고 공부를 가르침(주로 셈본 교육)

一. 결혼식 날 처녀도둑이라고 신랑을 매달아 놓고 발바닥과 궁둥이를 몽둥이로 때림.

一. 순록과 사슴의 뿔을 보약으로 달여먹음.

一. 도둑은 최고의 범죄로 간주하고, 어른들 앞에서는 술과 담배를 돌아서서 마시고 피움.

一. 생선국을 아주 잘 끓이고 잘 먹음.

一. 동물의 젖과 보리를 혼합하여 먹걸리 같은 술을 만들어 먹고, 안주는 생선젓갈을 먹음.

一. 병든 자나 고령자를 격리시켜 죽이는 고려장(高麗葬)과 같은 풍습이 있음.

一. 아기를 등뒤에 업는 것은 우리와 같음.

一. 제사 후 술과 음식을 동서남북으로 뿌리며 고수레를 외침.

一. 어린아이와 여인들은 색동옷을 귀한 것으로 여겨 설 명절 때 입음.

一. 노랫소리가 불경과 같으며 아리, 아이고 등 이리랑 발음이 많음.

一. 나무젓가락을 사용함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연구한 러시아 사학자 일부는 보하이族(발해족)과 코략族(고리악족)을 혼돈한 사례가 있고, 같은 혈통으로 규정한 학자도 있다.  "


 춥지족과 고리악족은 알류산열도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 갔다. 어쩌면 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고래잡이를 하던 축치인 들에게는 그런 일이 늘 일상적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리악(高麗岳)은 고려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어찌 이런 용어들이 우리민족과 아무런 연관 없이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이설이 너무 길었다. 아래는 불함삼역의 결론이다.


 발해가 망한 것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 옛날 신시환웅시대가 발해였으며 사해에 그 존엄함을 떨쳐, 神의 시대를 이끌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영화의 대발해는 조선이 개국한 지 37년 만인 갑진년에 완전히 수몰되어 사라졌다. 역사는 그 황금시기를 배달국이라고 하였다.

 신시배달국시대는 삼근영초(三根靈草)와 오엽서실(五葉瑞實)과, 칠색보옥(七色寶玉)이 원산지인 불함삼역(不咸三域)의 강역에 있었다. 그곳은 천산에서 동북 방향이라고 했으니 섬서성, 산서성,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과 내몽골자치주, 한반도가 된다. 명산려수(明山麗水) 연환만리(連亘萬里) 그 곳은 흑룡강(아무르강)이 흐르는 남쪽 지역이다. 


M_5565555.jpg


 천산의 동북 방향에서 밝은 산 맑은 물이 만리에 연이어 펼쳐져 있는 곳은 흑룡강과 만주 벌판을 가리킨다. 동쪽과 북쪽에 대흥안령산맥과 소흥안령산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곧장 한반도까지 氣가 뻗어내린다.

 이곳에 뿌리가 세가닥으로 자라 사람의 인체를 닮게 되는 인삼과 잎이 다섯개로 자라는 잣나무, 일곱가지 빛이나는 옥(玉)이 있다고 하였다. 삼 오 칠 자삭(磁朔)의 정(精)이 사방에 모여 생명이 만들어지는 복된 땅이다.

  

M_0255555.jpg

삼근영초(三根靈草) 설명이 필요없다.

M_5엽잣나무.jpg

오엽서실(五葉瑞實)

전나무 - 1잎
소나무 - 2잎
잣나무 - 5잎

출처 : http://www.unryeong.com


 

 

 

M_11222.bmp

 

 

 

 

 

동이(東夷)는 천문학자(天文學字) 책 구입 안내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