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41
2006/6/11(일)
백제 류민의 노래 산유화가(山有花歌)  




의자왕 20년(660 BC.) 백제가 망하자 많은 백성들이 한반도로 흘러들어오게 되는데 그 때 생긴 노래가 산유화가(山有花歌)이다. 하지만 정식 문헌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없고 단지, 서해안 일대에 촌로들의 구전이나 농요로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고한다.

그 중에서 대륙백제의 숨결이 남아있는 가사 하나를 소개해 본다.
 

"  궁야평 너른 들에/ 논두 많구 밭두 많다/ 씨뿌리고 모 욍겨서/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 보세//

산유화야 산유화야/ 오초(吳楚) 동남(東南) 가는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북얼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저어가지/  원포귀범(遠浦歸帆)이 이 아니냐//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런 말이 웬말이냐/  용머리를 생각허면/ 구룡포(九龍浦)에 버렸으니/ 슬프구나 어와 벗님/ 구국충성 다 못했네//

산유화야 산유화야/ 입포에 남당산은/ 어이그리 유정턴고/ 매년 팔월 십륙일은/ 왼 아낙네 다 모인다/ 무슨 모의 있다던고//

산유화야 산유화야/ 사비강 맑은 물에 / 고기 잡는 어옹덜아/ 온갖 고기 다 잡어두/  경치 일랑은 낚지 마소/ 강산 풍경 좋을시고//

에-헤-에헤야-헤헤/에-헤-에여루 사-사-뒤-요-  "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학자 누가 고증을 했는지 " 이 노랫말에는 패망한 백제유민의 슬픈 삶이 두장면 들어있다. " 라고 하였다.

하나는 '오초(吳楚) 동남(東南) 가는배' 인데, 이배는 백제가 망하던 해 8월에 백제의 왕족과 관리, 백성들 1만 2,000명이 당군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하였고, 또 하나는  "용머리를 생각허면/ 구룡포에 버렸으니/ 슬스구나 어와 벗님/ 구국충성 다 못 했네"하는 부분이 '조룡대 전설'을 가리키는 것이라하였다.

조룡대란 룡의 머리를 낚았다는 것인데 소정방이 백마의 대가리를 미끼로 엮어 밤마다 룡(龍)으로 변하여 안개를 피우는 의자왕을 낚아 죽였다는 전설이다.


어떤 미친작자가 자기나라가 망한것을 보고 원포귀범(遠浦歸帆)이라 감상에 젖고, 그것도 모자라서 나랏님의 죽음을 슬퍼하지는 못할 망정 일개 적국의 장수인 소정방의 공적을 영웅담으로 포장하려 하였던 것일까?

한참 한심하고 통탄할 일이다.


원포귀범(遠浦歸帆)이란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나오는 여덟가지 풍경중의 하나로 소상팔경(瀟湘八景)이란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 영릉(零陵)부근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곳의 여덟 가지 경치를 말하는 것이고 이 그림은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安堅)이 그린 것이다.

---화첩형태의  여덟 폭 산수화인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감도는 산간 마을
(山市晴嵐 산시청람)-1첩,

연무에 싸인 산사의 종소리가 들리는 늦저녁 풍경
(煙寺(遠寺)晩種 연사모종)-2첩,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瀟湘夜雨 소상야우)-3첩,

먼 포구로 돌아오는 배
(遠浦歸帆 원포귀범)-4첩,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平沙落雁 평사낙안)-5첩,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
(洞庭秋月 동정추월)-6첩,

저녁 노을 물든 어촌
(漁村落照(夕照) 어촌낙조)-7첩,

저녁 때 산야에 내린 눈
(江天暮雪 강천모설)-8첩.

 

그래서

"  궁야평 너른 들에/ 논두 많구 밭두 많다/ 씨뿌리고 모 욍겨서/ 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 보세//

산유화야 산유화야/ 오초(吳楚) 동남(東南) 가는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북얼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저어가지/  원포귀범(遠浦歸帆)이 이 아니냐//  "

라고 한 것은 백제인 들이 농사지을 때 부르던 노래였다는 것은 분명하며 <산유화가>의 어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여러가지이다.  검색해 본 결과 ....

"  첫째, <산유화가>는 ‘메나리’라는 설이다. 즉 ‘山’은 뫼이고 ‘나리’는 ‘遊’로 ‘뫼놀이’가 변하여 ‘메나리’로 또 ‘산유화’로 불려졌다는 설이다.

둘째는 ‘구시대의 노래’라는 설로 즉 ‘메’는 메나리의 앞에 쓰여 ‘멀다’로 ‘옛’의 뜻이며 ‘나리’는 ‘향유’의 뜻이 있다는 설, 그리고

셋째는 ‘산백합’의 이름으로 단순한 식물명이라는 설이다. 또 옛 민요 ‘미나리꽃은 한철이라’하는 데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명칭으로는 뫼놀꽃, 미나리 등이 있다. "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백제의 멸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밝혀졌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제의 유민들이 배에 실려 황해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백제의 터전이었던 양자강에서 고기잡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그린 노랫말 인 것이다.


오나라 초나라의 동남쪽에 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吳나라면 吳나라고 楚나라면 楚나라지 오초동남(吳楚東南)이란 말은 특정 지역으로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자강의 지류를 따라 吳나라, 楚나라를 지나 계속 동남쪽으로 배가 진행하는 장면을 노래로 읇은 것이다.

그 곳이 백제의 땅 이었다.

핵심사항만 언급한 관계로 좋은 글이 못 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차츰 올리 겠습니다. 가령 '백제의 강역' '오초(吳楚)의 위치' '나머지 가사해설' 등... ^^


우리나라의 부여나 고란사, 낙화암, 조룡대 같은 전설은 어쩌면 대륙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건너온 백제인들이 지어낸 전설에 불과 할 것이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역사는 새롭게 만들어 지고 또한 이식 되어 진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입에서 입으로 혹, 문서 등으로 전해지며 허접하게 또는 정교하게 왜곡되어 진 것이며 대부분이 가짜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냥 역사책에 쓰여진대로 꿰어 맞춘 것일 뿐이다.







백강(白江) 과 백마강(白馬江)

  백강(白江)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고려시대 이전의 기록에 실려있는 백제의 강이름 입니다.

삼국사기에는 白江 或云伎伐浦(백강 혹운기벌포) 라고 기록하여 백강의 다른이름이 '기벌포' 라고 하였습니다.

伎伐浦는 지벌포(只伐浦)라고도 했다는데 좁고 험애(險隘)하여 적을 방어하기 용이한 지역이므로 붙인이름 같습니다. 다시말해 육지전이나 해전에서 좁고 험한 지형을 이용해서 적은 군사력으로도 쉽게 적을 방어 할 수 있는 곳으로 적의 수(數)가 아무리 많아도 '병의 목(bottleneck)' 형상을 한 곳에서는 공격이 어렵고 반대로 방어는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伎伐浦에 해당하는 지형은 많이 있었을것 같은데 이런 경우에 伎伐浦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습니다.
포(浦)라는 것은 포구를 말하는 것으로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들락하는 곳 입니다. 조수(潮水)는 바닷물이 해와 달의 인력으로 주기적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양자강은 바다로 흘러가기 때문에 조수가 생기지만 워낙 넓어서 양자강 그 자체도 조수현상이 생깁니다.

삼국유사에는 기벌포(伎伐浦)의 또 다른 명칭을 무려 여섯가지나 더 기록하고 있습니다.
'伎伐浦 卽長岩又孫梁一作只伐浦又白江(기벌포는 장암 또는 손량 한편 지벌포 또는 백강)'

또, 사비하(泗물가 비河) 사자하(泗차河) 등으로도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지역 이거나 인근지역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명칭을 가졌다면 아마 장강(陽子江)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구당서에는 웅진강구(熊津江口), 신당서에는 웅진구(熊津口), 일본서기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그런데 백마강(白馬江)은 아무래도 조선시대에 생긴이름 같습니다.

즉, 고려말 삼국유사 이전의 문헌에는 백마강(白馬江)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고 단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와 북부여편에 "사자하(泗차河) 가에는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을 낚았다 하여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취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용암(龍巖)이라고 한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구절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소정방(蘇定方)의 조룡대(釣龍臺) 전설로 발전하였던것 같습니다.  

 조룡대(釣龍臺) 란? 아래내용 참조

   ▒ 백마의 전설 조룡대(釣龍臺) 

나당(羅唐)연합군의 물밀듯이 침공에 7백년 백제사직이 무너지고, 망국의 치욕에 떨던 의자왕도 포로의 몸이 되어 멀리 불귀의 땅 당경에 끌려가자 백마강은 그 쓰라린 기억을 어서 잊으려는듯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사 영고성쇠(榮故盛衰)의 무심함이여! 바로 어제만 하여도 의자왕이 용선(龍船)에 아름다운 궁녀를 싣고, 태평세월을 구가하던 그 강상에는 위풍 당당한 소정방(蘇定方)의 깃발이 나부끼는 군선들이 오락가락 하였다.
 더욱 야속하기로는 그 많은 배들이 한 때는 15만호에 사탑심다(寺塔甚多)하던 사비성을 외면하고 이제는 당의 도독부(都督府)가 설치된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소부리(所夫里)는 7주야 밤낮 없는 약탈 방화로 완전 초토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백마강의 주인인 용신은 이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백제의 유민들이 광복운동을 위해 일제히 궐기함을 안 용신은 때를 같이 하여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나리 군선들이 부소산 근처에 접근하기만 하면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돌풍을 몰아오고 호수와 같던 강물은 마치 바다의 노도와 같이 거세게 소용돌이 치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의 군선과 군병들은 물속에 삼켜졌다. 이런 당병들의 아비규환의 참변이 오는 날고 또 오는날도 계속되기를 거의 한달에 이르렀다.
사비성을 초토화 시켜버렸으니 공주의 웅진성에 머물고 있던 소정방은 이 계속되는 참변의 소식을 듣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일관을 불러 그 원인을 알아보게 하였다.
일관은 소정방에게 [아무래도 백마강의 용신이 된 무왕의 혼이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하고 알리었다. [뭣이 무왕의 혼이라니?]
[네,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은 원래 소부리의 궁남지에 살던 용이 그 곳 궁녀와 상통하여 낳은 자임으로 죽어서 용으로 다시 환생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음, 그 말이 틀림이 없으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괴변이 강에서 일어날리 만무하옵니다.]
[그렇다면 무슨 묘책이 없겠는가?]
[그 용을 낚아채는 방법이 있사옵니다만]
[아니 용을 어떻게 낚는단 말인가?]
소정방의 귀가 번쩍 들리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용은 백마의 고기를 가장 즐긴다 하오니, 그를 미끼로 하면 틀림없이 용이 걸릴 것입니다.]
소정방은 곧바로 소부리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일관이 일러준대로 부소산 북쪽 강물속에 솟아난 바위에 올라 타고 부하를 시켜서 만들게 한 철사 낚시줄에다 백마의 고기를 끼워 강물속에 던졌다.
한편 용은 백제 사적의 원수 당에 대한 앙갚음으로 매일 백마강 위의 하늘에 구름과 비바람을 몰고오랴, 소용돌이를 발생시키느라 몸이 닳도록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보니 피곤도 하고 몹시 시장기고 돌았다.
이 때 마침 눈앞에 그렇게도 좋아하는 백마의 날고기가 물 속에 떠내려 왔으니 [이게 웬 떡이냐]하고 용은 얼른 그 백마고기를 꿀꺽 삼켰다.
바위 위에서 낚시줄을 잡고 있던 소정방은 [옳지 걸렸구나!]하고 낚시줄을 당겼다. 놀란 것은 용이었다. 용은 아픔과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이통에 소정방은 하마트면 물속에 이끌려 빠질 뻔 했으나, 발에 있는 힘을 다 주고 버티었다.
이렇게 기를 쓰며 당기는 소정방과 이끌리지 않으려는 용 사이에 옥신 각신 필사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소정방이 올라 타고 있던 수중 바위에는 발자국과 낚시줄이 마찰되어 흠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낚시에 걸린 용의 기력은 시간이 갈수록 떨어져 가기만 하는데 소정방에게는 힘이 센 부하 장병 수명이 달려들어 가세하는지라 대세는 일변했다.
용은 물 아래 위로 출몰하며 발버둥을 쳤다. 마지막 기력을 다해 저항하는 소리를 높이며 낚시줄을 낚아 채었다.
그러나 끝내, 황금 비늘을 공중에 번쩍 빛내며 백마강 동쪽 마을 지금의 용전(龍田)의 논두렁에 뚝 떨어져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도망가고 용의 시체는 때마침 여름의 폭양에 썩기 시작하더니 그 지독한 썩은 내는 멀리 80리 떨어진 공주의 한 마을까지 진동하였으니 이 때부터 그 마을 이름이 [구린내]가 되었고, 소정방이 올라 탔던 수중 바위도 조룡대(釣龍臺)라 이름 지어졌으며, 또한 용이 낚인 부근의 강 이름도 이때부터 백마강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전설도 바르게 전하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무책임한 태도로 너무나 황당무계하고 즉흥적으로 꾸며져 전하는 전설은 때로 우리 조상의 일에 침뱉는 격이 되고 향토를 욕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옳은 전설속에는 반드시 옛 조상의 뭔가 의도적인 뜻이, 아니면 암시나 비유가 상징적으로 내표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오늘날 듣고 알고 있는 조룡대 전설의 근원은 백제시대도 아닌 고려시대 삼국유사와 그리고 그로부터 내려오는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등에 의하여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윤색되어버린 것이다.
여하간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번 우리 고장의 조룡대 전설을 분석하고 재고해 보자.
먼저 용이란, 우리가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 그리고 임금이 앉으시는 옥좌를 용상(龍床)이라 하듯 임금을 말함 이다. 또 백마(白馬)란 임금이 즐겨 타시던 애마를 상징함이라 왕과 백마의 상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전에 무엇보다도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제6, 의자왕조 또는 신라본기 제6, 문무왕조의 양쪽 기록을 보고 고찰하건데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된 후 백제의 유민들은 광복을 위하여 얼마나 격렬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봉기하였음인지 당에서는 이를 수습 하는데 수년간 무척 골치를 앓았다.
그래서 당은 궁리 끝에 당경에 포로로 끌려 갔었던 왕자융(隆)을 불러들여 웅진 도독으로 삼은 뒤 강변에 제단을 쌓고 백마를 희생시켜 그 피를 마시면서 사태를 수습할 것을 왕자에게 맹세 시켰다 하는 기록이 보인다.
말하자면 이 때 당은 왕을 유인, 낚으기 위하여 백마를 이용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역사 기록을 비유하며 전설화 시킨 것이 오늘의 조룡대 전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치욕적인 기록이나 전설로 인해서 우리 고장의 핏줄이라 할 수 있는 강의 이름마저 백마강이 되었다 함은 이것이 사고의 비약이요, 경박한 사대주의자가 아니고서야 발설 못할 일이라 하겠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런 주장은 비학문적인 인류의 날조로써 납득이 안갈 뿐만 아니라 자가 모독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강의 이름도 이보다 앞서 160여년 전 웅진의 무령왕 시대의 기록에 이미 보이고 있었으니,
[(前略) 백加出降 王 백가가 나와 항복하므로 왕(武寧王)은 이를 참형하여 백강(白馬江)에 던져 버렸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四) 혹자는 이 백강(白江)과 백마강(白馬江)이 다르다고 할지 모르나, 백마강이란 뜻은 결코 [흰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증언은 우리 고장의 청마산성(靑馬山城)이 상징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다고 본다.
청마선성의 청마(靑馬)는 푸른말으리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靑)은 청룡(靑龍) 즉 동쪽의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고, 마(馬)는 크다는 뜻이다.
즉 마치(馬峙=큰고개), 마총(馬塚=큰무덤), 마한(馬韓=삼한중 제일 큰나라), 마천지(馬川地=냇가에 있는 큰못), 마산(馬山=큰산) 등등을 보더라도 크다(동물 가운데 말은 크므로)라는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청마산성이란 동쪽에 있는 가장 큰 산성이란 뜻이 되는데, 기실 청마산성은 서울의 동쪽에 위치한 가장 큰 산성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실로 미루어봐서 백강(白江) 또는 백마강(白馬江)의 이름은 흰색이강이란 색깔에서 나오거나 흰말이란 동물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흰백은 나라 이름의 글자 즉 백제의 백(百) 아니면 백(伯濟라고도 기록됨)으로 보는 것이요, 따라서 백강은 [백제의 강]이고 백마강은 백(佰=나라이름)과 말(馬=크다)에서 [백제나라의 제일 큰강]으로 인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금번의 [내고장 전통 가꾸기]는 우리 향토의 주체성과 그 자존심을 가꾸는 의도도 있는 바 썩은 뿌리가 발견되면 어서 이를 척결해서 건전하고 무성하게 자라나도록 해야만 할 것이니 좀 길어지기는 하였으나 필자의 말미를 첨가해 두는 것이다.
<註 1.>
[ [또 사자강변에는 하나의 바위가 있는 바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여기에 앉아서 어룡을 낚아낸 까닭에 바위위에 용이 꿇어 앉은 자취가 있다하여 용암(龍암)이라 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남부여조)]
<註 2.>
釣 龍 臺
[조룡대는 호암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부소산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것이 있고, 돌 위에는 용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밀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나꾸어 얻으니 잠깐 사이에 날은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 한다(신중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 고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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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산동성에는 백마강(白馬江)이 없고 백마하(白馬河)가 있습니다. 그 유래는 잘 모르겠습니다.

백강의 위치에 대해서는 在산동성說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노성매씨가 최근에 당나라시기 역사지도집을 연구하여 사천성일대에 수 많은 양자강지류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참고로 구당서 '소정방전'에 의하면 소정방군이 웅진강구에 이르자 백제병의 방어선을 피하여 "동안(東岸)으로 올랐다" 고 합니다. 동안(東岸)은 강이 남북으로 흐를때 동쪽언덕기슭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백강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 틀림없습니다.



조선일보사社機 제비호(기장金眠壽)에서 촬영한 백제의 마지막 王都 부여

여기는 동쪽언덕이 없고 모두 평야지대 이다. 방향도 거의 서남이다. 그리고 적을 방어하기에 용이하지도 않다.
이런 곳에서 唐軍 13만과 일본군선 1000여척이 집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래는 2003년 사단법인상고사학회(율곤 이중재 선생님 주관) 대륙답사 때 찍은 장강 하류의 풍경











상해에서 장강을 거슬러올라 남통시로 오가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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