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51
2009/1/1(목)
조회: 3874
세계최초의 문명 아시아에서 시작 4  

 

고대문명의 주인들은 어디서 왔을까?

 제3 빙하기가 끝이 나면서 인도와 아시아 전체를 감싸고 있던 산맥들에서 빙하들이 녹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구 전체에 해수면도 상승하였고 유럽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시베리아 대평원을 가득 덮었던 수 십 km의 얼음층도 차차 녹으면서 약 5 천 년 간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지구 전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기후가 따뜻해 지고 사계절의 구분도 뚜렸해졌으며 대형 초식 동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초목들이 우거지고 초원에서는 포유동물들이 뛰어 놀았다. 사자, 호랑이, 원숭이, 곰, 악어 등 현대에 밀림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의 세상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인류의 활동력도 대단히 왕성해졌으며 인구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일만 이천 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대륙 지판 보상 작용으로 천년 동안 지속 되었던 화산 활동이 멈추고 시베리아에서 매머드가 멸종 된 후 인간은 먹이 사슬의 맨 위에 서게 되었고 풍부한 대자연의 환경을 바탕으로 문명 또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아시아의 인류는 약 200만 년의 긴 세월 속에서 멸종의 위기를 이겨내고 살아 남은 것이다. 

만 년 빙하로 덮인 높은 산맥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인하여 동양과 서양을 철처하게 갈라 놓았고, 비교적 따뜻한 기후의 영향으로 아시아 지역내에서는 빙하기였지만 서로 이동과 왕래가 가능하여 동아시아 인류는 점차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키며 진화해왔다.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약 2만 년 전에 아시아의 문명은 최고 수준까지 도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오늘날 처럼 국가들이 생겨났고 국가 간의 교류를 비롯하여 과학의 발전, 문자의 사용, 천문학의 발달 등 오늘날 인류의 상식으로는 밝혀내기 어려운 수준까지 도달하였을 것이다.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자료는 고대인도의 사원에서 발굴 된 1만 2천 년 전의 나칼토판, 마야의 점성술을 기록한 8천 년 전의 트로아노고사본 그외 수메르토판, 라사의 옛 기록들이 있고, 일만 일천 년 전에 전 세계적으로 번성했을 문명국들은 대략 다섯 내지 여섯개 정도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인도 대륙의 고대문명, 서 아시아의 수메르 문명, 시베리아 초원지대의 환국, 중국 양자강유역과 발해만 등지의 문명 그외에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소위 물속에 가라 앉은 문명들이다.

최근 고고학의 발달로 인하여 발해호(渤海湖) 주변으로 고대문명들이 속속 발굴 되었다. 이들 문명들은 BC.8937년 환인천제 개벽 이후 약 5천 여 년에 걸쳐서 생겨났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름하여 요하문명(BC7,000년경), 소하서문화(BC7,000년), 흥룡와문화(BC6,200년), 사해문화(BC5,600년), 부하문화(BC5,200년), 조보구문화(BC5,000년), 홍산문화(BC4,500년), 소하연문화(BC3,000년), 하가점하층문화(BC2,000년), 황하문명(BC5,000~4,000년) 등이 있다.  

이들 고대문명의 주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말 그들은 빙하기 이전의 시조로 부터 피를 이어 받았던 것일까?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 날 수 있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먹거리가 풍성해야하 할 것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전쟁이 없어야하고 그외에 자연환경이 좋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 할 수 있는 장소는 인도대륙과 중국대륙이 적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주대륙은 위도가 너무 남쪽으로 치우쳐져있어서 기후가 좋지 않다. 그나마 인도와 중국대륙과 같은 위도상에 위치한 북아프리카지역, 중동지역, 북아메리카의 동부지역이 괜찮은 정도이지만 인구가 너무 적고 오랫동안 고립으로 인하여 문명이 축적되지 않아 이들 지역은 나중에 아시아의 인류가 이동해가서 살게 되면서 문명의 발달을 이루게 된다. 

 

 

흑피옥조각상 과 한民族의 연관성

최근 고고학계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흑피옥조각상은 환인천제께서 개국하신 환국의 자리에서 발견된 문화재이다. 시기도 1만 1천 년 전으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어떻게든 환국과의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관련 기사들을 실어 보기로 한다.

흑피옥조각상이란?

한국인출신 고대 유물 수집가 김희용(59세)氏가 내몽골의 오란찰포(烏蘭察布)지역에 수 천 점의 조각상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인근 지역에서 채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옥 과 황옥에 흑색의 염료를 입힌 조각상이다.

통상적으로 玉은 탄소c1을 함유하고 있지 않아 이것의 제작년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서울대학에서 이 옥조각상에 칠해진 염료의 성분을 분석함으로써 그 년대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1만4천년전까지 추정되는 것으로 밝혀져 관련학계에 대단한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일부 학계의 반응은 세계인류문명사를 완전히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를 일이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발견된 흑피옥조각상의 특징은 반 직립인의 형태의 형상이 많고 그외에 반인반수 남녀의 성관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 등이있다.

이미 인터넷 뉴스를 통해 알려진 내용들이 많은 관계로 중복된 내용을 피하기 위해서 자세한 내용은 흑피옥으로 검색해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 장에서는 흑피옥조각상 과 한民族 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고자 한다.

중국학자를 포함하여 국내에 내로라하는 고고학전문가들도 모두 현장 발굴을 해보지 않고서는 자신있게 말 할 수 없다면서 논평을 유보하고 있는 실정이라 나 자신도 말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지만 흑피옥에 막혀서 근1년을 글을 쓰지 않고 기다려온 상태라 이제는 더 미룰 수 없기에 여기에 짧게나마 나의 소신을 밝히고 上古代 한民族史의 원류를 찾아 떠나기로 하겠다.

한民族은 上古代에서 부터 玉을 귀하게 여겨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사해지역이나 홍산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매장 유물들은 모두 석실 고분에서 출토 된 것으로 유일하게 북방민족의 특징만을 담고 있어 우리측 학자들은 물론이고 중국의 유명한 학자들도 동이족(東夷族)의 유물임을 인정하였다.

사해문명유적지와 홍산문명유적지를 대표하는 것들로는 玉 유장품을 빼 놓을 수 없는데 이는 동이민족(東夷民族)이 상고대에서 부터 玉을 귀하게여기어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후 玉 문화는 홍산문명을 거쳐 앙소문화 대문구문화로 번져갔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현재 인터넷검색으로 많은 지식을 확보 할수 있는 상태이고 새삼 본인이 거론한다고해서 특별할게 없기 때문에 몇개의 사례만 소개하기로 한다.


 

한민족의 뿌리문화 홍산문화  


Bracelet with Cicada Motif (A)                               Bracelet with Cicada Motif (B)


  eagle-on-human                    lingam_on_double-headed_human       hongshan-alien-eyes


hongshan-alien-roswell                      hongshan-astro-bird                  ornament_statue


Hongshan Culture,Bird on God          Hongshan Culture, Jade Figure         Motif of Eagle on Man


hongshan-astro-bird .앞                                                                  뒤                                         옆


Cicada on God Head                 Swallow                                      Hongshan Jade Eagle


bird man.옆                                                                                                                           뒤


Hongshan Jade Swan                                                                                       Hongshan Jade Fish


Hongshan Culture, C-shape Dragon .(A)                                                                                    (B)


Ax with Dargon Head.                                                        Jade Axe w/ vulture motif


Ax Shape Tri-bi-disk Dragon Motif.                       Hongshan Culture, Ax


C-shape Dragon.(A)                                                                          (B)


C-shape Dragon Plaque.(A)                                                              (B)


Hongshan Culture, Horse Head                                                      Hongshan Culture, Jade Hoop


Hongshan Culture,Bi-Disk                                                           Collared Bi-disk


Hongshan Culture, Jade Cicada                                                        Hongshan Culture, Jade Condor


Knife with Motifs of Dragon and Pheonix.  Knife with Motif of Horse Head.         Knife-Bird's Head Handle


Bracelet with Cicada Motif.  Pheonix & Dragon Plaque.      Fish                 three holes instr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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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g Dynasty, Kingdom Emblem. (A)                                      Shang Dynasty, Kingdom Emblem.(B)

출처:Coo2 net  향고도

 
홍산문화와 한국역사의 뿌리
 
오정윤(한국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명지대 사회교육원 문화콘텐츠과 교수)

  1. 홍산문화의 역사적 지위
 

만주지역과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통로는 육로와 해로가 있다. 이중에서 홍산문화(紅山文化)는 육로와 해로를 모두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유적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우하량유적, 동산취유적, 능원 삼관전자묘지,  요녕 부신 호두구유적이 있다.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근래에 이 홍산문화의 주체를 3황5제의 하나인 전욱고양씨로 보고, 고구려가 고양씨의 후예라는 역사기록에 근거하여 고구려족의 근원을 중국이라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홍산문화가 주목받는 것은 서기전 3,000-3,500년전 동북아의 고대문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문화를 가졌기 때문이다. 중국학계에서는 80년대까지 황하 중류에서 번영하였던 채도(彩陶)를 특징으로 하는 앙소문화가 황하문명의 원류이지 주류라는 황하문명 일원론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앙소문화의 최대 약점은 국가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의 지표유적인 신전, 제사, 도시유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홍산문화를 이룩한 주체는 고도로 발달한 종교문화와 돌문화, 옥문화, 청동문화를 지닌 종족이다. 공간적 위치와 시기적으로 이 문화를 남길 수 있는 세력은 서기전 28세기에 청구(靑邱)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치우천왕(서기전 2706-2598)의 직계조상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동이문화사에서 홍산문화가 갖는 의미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겠다. 
 

  2. 우하량 홍산문화의 중요성
 

홍산문화는 1935년에 내몽골 적봉시 홍산후(紅山後)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동북아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문화이다. 출토의 범위는 북쪽으로 내몽골자치구 소오달맹의 오이길목륜하에서 남쪽으로 요녕성 조양지구에 이르며 중국 하북성 북부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치었다. 
 
1954년도에 홍산문화로 명명이 되었고 시기는 서기전 3,000년 전후이다. 1983년도에 능원현과 건평현의 경계지점인 우하량(牛河梁)에서 대표적 유적이 발견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출토유물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가장 대표적인 문화의 내용은 다음의 4가지를 들 수 있다. 1) 산상제단, 2) 적석총, 3) 여신묘, 4) 옥(玉)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이런 유형은 황하문명의 문화원류에 해당하는 대문구, 하모도와는 닮은 형이고, 또다른 황하문명의 원류인 황하중류 앙소문화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동북아지역 신석기문화의 주류에 해당된다. 
 
1) 산상제단 : 인간의 생명과 죽음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사상체계에서 산상(山上)은 우주목의 원형이며, 환웅천왕이 하강한 태백산의 후신(後身)이며, 북방민족의 대표적인 생명수(生命樹), 신단수(神檀樹), 건목(建木), 약목(若木)이라는 신수숭배의 원초적 모습이다.
 
또한 원형제단과 방단제단은 생명의 근원인 하늘과 땅의 상징을 표현하는 구조물이며 산(山)은 생명이 태어나고 돌아가는 근원으로 이때에 고유한 신교(神敎)의 3원적 세계관과 함께 원방각 이론이 체계화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종교문화는 한민족의 개국신화인 천손강림신화로 이어진다.  

2) 적석총 : 고대 동북아 돌무덤의 원형으로 이는 3만 5천년전부터 동북아의 주인으로 군림한 초원의 수렵족들이 남긴 바위새김무늬(암각화)의 후계문화로, 바위가 갖는 불변성(不變性), 부동성(不動性), 융기성(隆起性)의 상징이고, 나아가 산상제단의 변형이며 우주목의 또다른 모습이다.
 
적석총 문화는 돌문화의 시원적 형태로 뒷날 고조선, 부여의 고인돌, 석관묘(돌관무덤), 석곽묘(돌곽무덤), 고구려의 계단식적석총, 석실묘(돌방무덤) 등으로 전승되는 북방민족 고유의 무덤형태이다. 
 
3) 여신묘(女神廟) : 여성신은 신석기시대 모계사회의 기본특징인 생산과 풍요의 숭배대상으로 여성이 신격화된 당대의 사회징표를 말한다. 홍산문화의 사람들은 원형제단에서 하늘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방단제단에서 여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이미 신격(神格)의 계통화와 함께 남성 조상신이 천제(天帝)의 위치로 격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여신묘의 얼굴이 위압적이고 근엄한 것은 군림하는 신격의 표시로 볼 수 있다.   

4) 옥문화 : 옥(玉)은 바위숭배를 계승한 영원성과 신비감, 종교적 권위, 정치적 권력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옥(玉)으로 만든 도끼는 왕(王)이란 의미로 발전하여 최고의 통치자로 상징되었고, 뒷날 불변성의 상징으로 금(金)과 함께 보석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바위에서  빛이 나는 옥(玉)을 뽑아내기 위해 바위를 불에 달구는 과정에서 청동(靑銅)이라는 인류최초의 금속을 발견하였으며, 이것은 훗날 청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화발전의 시금석이었다. 홍산문화는 황하문명의 특징인 옥문화의 탄생지였다.
 
  3. 동산취 유적의 중요성과 의미
 

동산취유적은 요녕성 객좌현 대성자진 동남쪽에 있는 대능하 서안의 산언덕에 위치해 있으며, 유적은 동남향으로 강 건너에 마가자산과 대산산맥이 있다.

사방이 평지로 5천 평방미터의 넓이에 방형기단의 건축부지와 원형의 석축제단이 발견되었다. 산상과 석축제단의 발견은 우하량의 돌문화와 천손숭배사상이 우연의 소산이 아닌 이 지역의 대표적 문화징표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아울러 제단의 부근에서 진흙으로 빚어만든 임산부의 여신과 나녀좌상(裸女坐像)이 발견되었는데, 이것 또한 이것은 우하량에서 발견된 나녀소상(裸女小像)과 문화적 친연성이 뚜렷한 지표유물로 천신의 후손이 지상의 생산신(生産神)과 결합하여 하늘+땅+인간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로 군림한다는 한국형 개국신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옥으로 만든 쌍룡황(雙龍璜), 녹송석으로 만든 올빼미상(鴞像)도 출토되어 홍산문화가 동아시아 옥문화의 원류임을 밝혀주고 있다. 여기에서 녹송석(綠松石)은 푸른 소나무 잎의 색깔이 나는 암석으로 다량의 구리를 함유하고 있으며, 낮은 온도에서 녹기 때문에 청동(靑銅)을 생산하는 기본 광석이다. 따라서 서기전 3,500년경에 녹송석을 다룬 이곳의 석공들이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청동을 제련할 수 있는 물질적, 기술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
 
  4. 홍산문화의 여러 유물의 내용
 

홍산문화는 동북아의 흥륭와유적, 조부구문화를 계승한 사람들이 남긴 문화로 다양한 형태의 유물과 유적이 드러났다. 산상제단과 산상무덤, 적석총과 여신묘, 여신숭배와 나녀상, 그리고 숱한 옥(玉)의 출현이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동물상이 옥저룡과 새, 거북이다. 옥저룡은 옥과 돼지의 결합으로 돼지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우세한 세력을 가졌다는 의미와 함께 돼지의 중요성이 강조된 사회를 말한다. 
 
옥저룡 가운데 특이한 유물로 요녕성 건평현 출토의 백옥으로 만든 저룡(猪龍;요녕 건평현)으로 높이는 15 Cm이며, 몸체 너비는 10Cm이다. 형태는 머리와 몸체로 2등분되고, 큰 머리와 두 개의 눈이 특징적이다. 몸에 걸 수 있는 구멍이 뚫려있다. 같은 유형이 적봉시 파림우기 나사태 유적에서 나왔다.  
 
적봉시 옹우특기 삼성타랍 유적의 벽옥룡은 동아시아에서 년대가 가장 오래된 벽옥룡으로 높이는 26 Cm이고, 줄을 꿰는 구멍이 있으며 저룡과 새의 결합이 아주 특이하게 표현되었다. 주변의 옹우특기 광덕공 황곡돈에서 모양이 비슷한 홍옥룡이 출토되었다.

대표적 그릇으로는 적봉시 옹우특기 대남구 무덤에서 출토된 연형도호(燕形陶壺)가 있다. 묘지에서 출토된 그릇으로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며, 목의 둘레에 검은 띠를 하여 제비를 표시하였다.

귀가 달려있어 도기의 제작수준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유적지에서 나온 두 귀에 두 아가리를 지닌 홍도호(紅陶壺)는 물이나 술을 담아 따르기 쉽게 두 개의 주둥이를 만들었지 않나 여겨지며 제사에 사용하였다면 술그릇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5. 주변문화, 주변민족과의 관계
 

홍산문화를 남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동아시아 초기역사의 주체를 결정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집단은 치우집단을 들 수 있다. 동이족의 주요한 종족이었던 청구, 주두, 고죽 등의 위치도 이곳이고, 서기전 28세기경에 천손사상을 가진 세력은 치우계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중국학계가 이곳의 유적을 굳이 전욱고양씨(서기전 2514-2437)와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황제의 아들인 창의((昌意)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산문화는 황제헌원씨의 선조들이 남긴 문화로 연결된다.

전욱고양씨는 산동 용산문화를 일으킨 소호금천씨의 보좌관으로 있다가 20세에 독립하여 공공씨를 누르고 천하의 주인이 된 후 동이족 계열을 핍박하고 동이족 문화를 부정한 인물이다. [사기]에는 고양씨의 고손(高孫)이 우순이다. 
  

한편으로 서기전 28세기경에 동북아에서 홍산문화와 같이 우월하고 뛰어난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북방민족은 오로지 고조선의 선주민인 배달족(동이족)만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우리겨레와 관계된 문화이고, 배달국의 치우천왕이 청구로 천도한 까닭도 이곳의 문화적 수준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하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대문구문화를 계승한 산동 용산문화의 창조자를 소호금천씨로 보는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소호금천씨는 동이족으로 성씨는기(己=활을 만든 종족, 궁=弓)이고 이름은 지(摯)이다.

[좌전]에 따르면 산동성 곡부에 도읍을 정하고 관직명을 봉조씨, 현조씨, 청조씨 등 24개의 새의 이름으로 정한 것에서 신조숭배를 하였다. 이로볼때 홍산문화, 대문구문화, 산동 용산문화는 새숭배를 공통으로 하는 동이족 계통의 사람들이 남긴 문화임을 알 수 있다.

 

 


 
 
[서울신문 2006-12-26 10:09]    

[서울신문]중국이 고구려를 자기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이 한창이지만 동북공정은 요서·요동에서 발굴되고 있는 놀랄 만한 문명을 자기 역사로 끌어들이려는 노림수도 작용하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을 자랑해온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최소한 1000년 이상 빠른 요하유역 고대문명의 등장에 놀라워했다. 중국 고대 민족인 화하족이 아닌 동이족 문화가 우월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중국 사학계는 ‘황화문명 일원론’에서 벗어나 ‘다원화 구역발전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중국내에 다양한 고대문명이 있었고, 또 다양한 교류를 통해 지금의 중국문명을 이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학계는 다른 시각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을 바라보고 있다. 특히 요령성 우하량(牛河梁) 지역에서 발굴된 ‘여왕국’에 주목한다. 기원전 25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이 지역 유물들은 고조선 등 우리 유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적석총 고분군이 수십개 산재해 있는데다 여신묘에서는 곰의 턱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적석총은 요동반도와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리 민족의 장묘 형식이라는 점에서 우하량의 여신은 혹시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가 아닐까.

기이하게도 발굴된 유물들의 연대가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과 비슷한 시기다.

이같은 의문을 풀어나가는 학술회의가 27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다. 국학운동시민연합이 주최하고, 국학학술원 등이 주관하는 ‘동북아 평화정착을 위한 한·중 국제학술회의’에서 ‘동이족의 국가기원’이 집중 논의된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중국 내몽고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곽치중 연구원이 ‘우하량 유적에 나타난 여왕국의 실체’를, 중국 대련대학교 한국학연구원 부원장인 유병호 교수가 ‘요하 유역에서 생장 발전한 문명의 현재적 의의’를 발표한다.
 
유 교수는 “고조선의 정확한 위치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우하량 등 요하문명을 보면 한민족의 선조가 적어도 이들과 같은 문화권이었던 것이 틀림없다.”면서 “계속되는 발굴과 문헌고찰, 유전자분석 등과 같은 종합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또 “요하 고대문명에 대한 발굴은 한국사학계에 한민족의 기원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곧 한민족의 기원과 요하 고대문명의 관계가 밝혀질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김호일 국학학술원 원장은 “비파형동검, 다뉴세문경 등 요하 유역의 홍산문화권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우리의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면서 “우리 민족이 요하 상류에서 동남쪽으로 이동했거나 비슷한 시기에 같은 문화공동체를 이룬 증거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서울신문사
 
 
 
 
 
자료실



 

이러한 동이족의 玉문화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근세 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져왔다.

조선시대에 王妃는 玉으로 태교했으며 王이 사용하는 도장은 옥새(玉璽)이며 왕이 앉는 의자는 옥좌(玉座), 왕의 옷인 곤룡포에는 옥대(玉帶),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곳에는 玉을 장식하여 만들었다고 내시내훈(內侍內訓)에 전한다.

민간에서도 귀한 아들이 태어나면 옥동자(玉童子)라고 부르고, 딸을 낳아도 이름자에 玉자를 빼놓을 수 없었다. 사전에는 玉자와 관련된 글자가 무려 451字이며 이들은 모두가 玉이름이라고 되어있다. 옥이 그만큼 귀하다는 것의 상징이기도한다.

물론 지나족들도 玉을 사랑하여 시신을 매장할 때 몸에 玉을 지니게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건 있다. 포박자(抱朴子)에는 옥을 시신의 아홉 개 구멍(九竅)에 막으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不朽) 고하였다. 마왕퇴 유골에서도 많은 양의 玉이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으며 연구결과 옥이 시신의 부패를 막아주는 역활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있었다.

이처럼 수 천 년 동안 한民族의 사랑을 받아 왔던 玉이 과연 어디에서 생산되었으며 어떻게 가공을 하게되었을까 하는 또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현재 玉의 주요 생산지는 중국의 남부(미얀마) 와 곤륜(崑崙)지역 그리고 일본 정도로 알려지고있지만 최근 학설에의하면 북미대륙이 베링해에서 아시아대륙과 연결되었을 당시(약 5,000년~12,000년) 이주민들에 의해서 귀한 玉이 교역되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주장도 제기되었다.

또한 학자들이 지금까지 발굴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인 중앙아시아에 추정컨데 상당량의 경질옥이 매장되어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직 발견이 되지 않아서 뭐라고 말 할 수 없다.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의 남쪽 과 곤륜(崑崙)의 북쪽에는 주로 석유 · 석탄 · 구리 · 금 등이 채굴되고 신강(新疆) . 내몽골 지역은 아직 조사가 충분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는 학계의 말이다.

곤륜(崑崙)의 玉은 중국최고의 玉으로 각광을 받아왔으며 모두가 연옥(경도 6 이하)이라는 보고가 있었지만 최근 곤륜의 서쪽지역에서 네프라이트 · 경옥(硬玉)도 산출되고있다는 보고도있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곤륜산맥 일대의 상류하천에서는 玉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든다고한다. 수 년전 상고사학회 회원들도 화전(和田)지역에 방문했을 때 곤륜산에서 옥돌이 씻겨져내려 온통 물빛이 우유빛 처럼 하앟게 빛났다고 하였다. 마침 화전(和田)은 옛날 이전(伊甸)이라하였던 곳이고 이전(伊甸)은 전설에 의하면 에덴으로 최초의 인류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물은 부도지에서 말하는 지유(地乳)일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였다고한다.

 
 

에덴동산의 위치

 

지명의 변천.

이전(伊甸) → 우전(于窴) → 우전(于闐) → 화전(和田).

이전(伊甸)은 우전(于窴)이란 이름으로 바뀌었고, 그후 다시 글자를 바꾸어 우전(于闐)이 되었으며, 지금은 중국의 신강성(新疆省) 화전(和田)으로 되어있다.

1994년 8월 필자(李重宰)는 상고사학회 회원들과 함께 이전원(伊甸園)을 답사한 일이 있는데, 과연 강으로 흐르는 물이 우유와 똑같은 색이었다.

이전원(伊甸園)은 고대의 낙원이라고 할 만큼 사막과 산들로 둘러 쌓인 가운데 초원이 있었다. 그리고 뽕나무와 백양나무가 울창했다. 수십 억 년 전인지는 모르나 바다나 강변처럼 돌과 자갈이 있었으며, 간혹 모래 위로는 바다에서 서식하는 조개껍질도 보였다.

본래 이전원(伊甸園)은 비단을 많이 짜고 있었으며, 누에를 쳐서 비단실로 옷을 짜는 베틀과 실을 감는 물레도 있었다. 양을 쳐서 양털로 카페트를 만들기도 했으며, 아이들은 가루 흙으로 된 푹신푹신한 길을 맨발로 다니고 있었다.

인류의 기원설을 보면 구약성서의 조자기지상조인(照自己之像造人)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神)의 설에 따르면 나에게 햇살이 비추어 사람이 만들어졌고, 바다에서는 고기가, 공중에서는 새가, 땅위에서는 각가지의 동물이 생겨났으며, 따라서 곤충들이 생겨났다고 되어있다.

사람이 만들어질 때 형상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되어 그후 많은 무리가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구약성서 창세기 1장 26절 참고) .

 


 

부도지(符都誌)에 의하면 지유(地乳)는 선천(先天)시대에 천인(天人)들을 먹이고 자라게하던 신비의 젖으로 마고대성(麻姑大城)에서 처음으로 나와 궁희와 소희가, 또 네 천인(天人)과 네 천녀(天女)를 낳아, 지유를 먹여, 그들을 길렀다고한다.

후천(後天)에 와서 백소씨족(白巢氏族)의 지소(支巢)씨가 오미(五味)의 변을 일으키므로 천인(天人)들이 분거(分居)하기로 뜻을 정하고 마고성을 완전히 떠나기로 하였는데 청궁(靑穹)씨는 동쪽으로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白巢)씨는 서쪽으로나가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黑巢)씨는 남쪽으로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른이었으므로 백모(白茅)를 묶어 마고(麻姑)의 앞에 사죄하여,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복본할 것을 서약하고 이르러 가장춥고 위험한 땅인 북쪽 천산주(天山洲)로 게게되었다고한다.

북쪽의 천산주(天山洲)라고 한 것으로 보아 마고시대는 지금의 인도북부에 있었던 것 같다. 

황궁씨가 맏 어른으로써 오미(五味)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천산주(天山洲)로 떠나온 것이 한民族의 첫 출발이라고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 성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전날의 잘못을 뉘우친 사람들이, 성 밖에 이르러, 직접 복본(復本)을 하려고 하니, 이는 복본에 때가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었다. 곧 젖샘을 얻고자 하여, 성곽의 밑을 파해치니, 성터(城址)가 파손되어 샘의 근원이 사방으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곧 단단한 흙으로 변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  <부도지에서...>

라고한 부분에서는 마치 생명의 상징과도 같은 지유(地乳)가 玉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듯하여 씁쓸하기까지하다.

그러면 玉의 소중함은 마고성을 복본하려던 황궁氏(黃穹氏)의 유속이 전해내려오는 것이란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던 차에 흑피옥사진들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 모양들이 괴상하게만 느껴지는데 의문투성이다. 귀가 쫑긋 솟아 오르고 눈이 길게 치솟아 올라 간 외계인 닮은 모습과 전체적으로 살이 통통하게 찐 풍만한 여인의 나신, 남녀의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다산(多産)을 의미 한다고한다. 그러면 저 외계인처럼 생긴 반인반수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모두 다리가 굽었을까?

오랜 세월 동안 화산재에 파뭍히다시피 살아와서 일까? 아니면 기나긴 동굴 생활의 영향 때문 일까?

나는 흑피옥이 발견된 내몽골의 오란찰포(烏蘭察布)에서 가깝지만 바로 그 후대에 만들어 졌다고 생각되는 홍산문명을 살펴보고 그들 문명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흑피옥은 홍산에서 발견 된 것보다 정교하지못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현대 기술에야 비교 할 바가 아니지마는 신석기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선 옥을 자르는 과정 부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돌을 자를 수 있는 경도가 강한 철 같은 것이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마도 있었다면 옥보다 더 단단한 철광석이나 아니면 아주 귀하게나마 철을 발명한 소수 그룹들있었을 것으로 생각이된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이 장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처음 부터 조각난 옥돌을 물과 연마석을 이용하여 수 십 일간 갈아서 만든게 대부분인것 같고 구멍을 뚫은 것은 그 당시 기술로는 상당히 발달 된 수준이었다고 보인다.

玉을 가공하는 기술의 발달은 은허의 부호묘(婦好墓)에서 미완성 옥기들이 출토되었으므로 하(夏) . 상(商) . 주(周) 시대에는 이미 옥을 다듬는 공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어서 秦 . 漢代에 옥공방이 있었다는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옥빛을 감추기 위해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검은색 염료를 입혀서 흑피옥이라고 한다. 옥에 흑피를 입히게된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도 검은색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가 그 이유인 듯 하다. 화산재가 쌓여서 온 천지가 검은색 이었다면 여러모로 검은색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환 태평양 아시아를 놓고 볼 때 환인천제께서 맨처음 자리했던 곳이 북방을 뜻하는 壬의 자리이며 壬은 王권을 상징하기도 한다. 검은색이며 물의 시대이며 흑수를 의미한다. 후천수 1과 6을 의미함 으로 반드시 시작이 있을 수 이다. 흑수삼위태백(黑水三危太白)이란 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이 두가지 사실은 흑피옥이 玉문화의 초기단계 즉, 시작 단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반인반수상이나 다리가 굽은 것은 당대에 실존하였던 것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흑피옥의 염료성분이 최고 상한 년대 14,000년 전 이라는 것이 거짓이 아니며 공룡이 멸종한지 오래되었지만 그 시기까지 어떤 형태로던 공룡이 살아있었던 흔적이 아닐까 싶다. 마치 아기공룡둘리 처럼 소형화된 동물이 이 지역에서 인간과 공존했으나 어느 시기에 한꺼 번에 동반 멸종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보게된다.

아니면 또 다른 가설로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 것으로도 보인다.

마테오리치의 구약성서 조자기지상조인(照自己之像造人)편에 인류의 기원설 처럼

" 신(神)의 설에 따르면 나에게 햇살이 비추어 사람이 만들어졌고, 바다에서는 고기가, 공중에서는 새가, 땅위에서는 각가지의 동물이 생겨났으며, 따라서 곤충들이 생겨났다고 되어있다. 사람이 만들어질 때 형상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되어 그후 많은 무리가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구약성서 창세기 1장 26절 참고) "

이 내용만 따른다면 반인반수 같은 에일리언 조각상도 사실은 곤충에 비교 할 수 있으며 매미의 조각상이나 독수리, 물고기 등 다양한 天 . 人 . 地 사상의 요소들을 집약한 생명체를 무덤속에 넣어두었다는 것과 남녀의 교합상을 넣어두었다는 것은 글자가 없었던 시대에 인간의 사상적 체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있다.

예컨데 陰陽이라는 것은 남녀가 부둥켜 않고 즐거운 인상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외설적이고 음탕한 것이 아니라 글자가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神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思想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의 의미를 넘어서는 화합과 상생과 조화와 평화의 의미가 담겨져있다고 본다.

그리고 여러가지 동물이나 곤충의 형상들은 天 . 人 . 地 사상을 표현한 것이며 그 자체가 평화롭다는 뜻으로도 보인다.

上上古時代 때 환인씨(8937 B.C)께서 천간지지역법(天干地支易法)을 만들때 天·人·地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한民族의 사상체계는 天·人·地를 기본으로한다.

그런 사상의 기조로 탄생한 것이 경천애인지(敬天愛人地)이다.

 


     <율곤선생님친필 敬天愛人地 >

경천애인지(敬天愛人地)의 문자적 구조는 天 . 人 . 地와 대자연의 본체사상을 도입한 음양오행(陰陽五行)을 기조로 만들어져 있다. 그 글자 속에 하늘과 인간 자연이 있고 陰 .陽 그리고 다섯 글자인 五行이 있으므로해서  경천애인지(敬天愛人地) 이글은 한民族 삼원일체(三源一體) 사상을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흑피옥문화를 해석해 봄으로서 한民族의 사상과 사유체계가 1만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과 그 유대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은 반직립상태의 인류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들의 실존여부는 미스테리로 남는다.

어쩌면 공룡의 발짓을 흉내 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또 예로부터 아이를 업어서 키우다보니 안짱다리가 된 것인지도 모를 일 이다. 화산재가 너무 쌓여 동굴 생활을 오래한 결과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흔적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으며 진원지로 부터 멀어 질 수록 좀 더 세련된 문명을 접하게되었으므로 그들은 어느 시기에 인가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홍산문명과 사해문명이 그 뒤를 이어 받았으며 흑피옥을 만든 사람들은 사라졌다.

주역에 약 6천년을 주기로 우주가 대격변을 한다는데 그들이 사라진 시기가 바로 그것 이던가?

1만 2천 년 전 남태평양상에 무우 대륙이 존재했었다는 고대인도 사원의 기록 중에서 홍수에 대한 기록은 마고시대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 그리고 1만 2천 년 전을 先天이라고 보았을 때 伏羲氏가 태어나게 되는 6천 년 전은 後天이 되는 것이다. 후천 시대에 伏羲氏가 龍의 화신으로 한民族史에 등장하면서 비로소 龍의 시대가 문을 열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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