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54
2009/2/11(수)
조회: 3066
금인(金人)의 나라 흉노(匈奴)  


금인(金人)의 나라 흉노(匈奴)


금인(金人)...

금인(金人)은 '옷에 금칠을 한 사람' 이나 '금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 또는 '온몸이 금빛인 사람'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설가 김용길님이 쓴 동명의 소설에는 '황금인형'으로 묘사 되는데 여기서 금인(金人)은 하늘이 내려주었다고하여 천부금인(天符金人)이며 전설의 천부금인을 얻으면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진(秦)의 천하통일과 신라의 천년사직, 그리고 대금(大金), 대청(大淸)이 나라를 세운 것은 모두 천부금인(天符金人)을 얻은 결과였다고 역설한다. 물론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금인(金人)의 신비감을 느끼게해주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역사상의 기록중 최초로 금인(金人)을 언급한 것은 고려대장경 속에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서문에 의한 것으로 후한의 효명제(58∼75년 재위) 때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서역에 있었던 대월지국(大月支國)에서 가져 온 불경을 낙양의 백마사에서 번역하였다고 하는데 그 내용에의하면, 後漢의 효명제(58∼75년 재위)가 어느날 꿈을 꾸었더니 몸에 금옷을 입은 금인(金人)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궁정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하고, 이 때에 왕이 사자를 대월지국(大月支國)에 보내어서 부처님의 경전을 베껴 오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이미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장건이 월지국에 사신으로 갔다는 것과 설정이 비슷하여 그 진위를 의심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漢) 무제(武帝)는 장군 곽거병(藿去病)을 파견하여 흉노를 정벌하였는데 곽거병(藿去病)은 흉노로 부터 금인(金人)을 빼앗아 부수어버렸다고 한다. 특히, 금인은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천신을 형상화한 것이었다고 한다.(漢書)

그외에 기록보다는 전승되어진 것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6국(國)을 통일한 다음 병장기를 모아들여 이를 녹여서 12금인을 만들었다는 說이 있고, 진(秦)나라 때 서역의 사문(沙門)인 실리방(室利防)이 다른 승려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지니고 진(秦)나라에 왔을 때 시황제는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승려들을 투옥시켜 버렸는데 그 날 밤에 키가 6장(丈)이나 되는 금인(金人)이 나타나 감옥을 부수어 버린 일에 시황제가 깜짝 놀라 불도를 받아들였다는 說 등이있다. 

... 이 說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인정하였다.
... 실리방은 아쇼카 왕이 파견한 전도자들 중의 한 사람.
...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금인(金人)은 서역(아쇼카) . 월지국 . 흉노에 있었음을 당시
    대륙사람들은 인식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금인(金人)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가 탄생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 석가 (釋迦 BC. 968 계축년)의 출생년도로 보면 금인(金人)은 최소한 BC. 968계축년 4월 8일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금인(金人)의 형상중 대표적인 것은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금색을 입힌 불상(佛像)을 생각하면 된다. 드물지만 철불(鐵佛)도 금인(金人)이라고 볼 수 있다.  철불(鐵佛)의 철(鐵)은 쇠철을 말하는 것이고 金의 훈은 '쇠'로 '철'과 같기 때문이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진시황은 6국(國)을 통일한 다음 병장기를 모아들여 이를 녹여서 12금인을 만들었다는 說이 이에 해당한다.

사기(史記) 색은(索隱)이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쇠를 뜻하는 철(鐵)의 고자(古字)는  철(銕)이라고 하였다.  

쇠金 + 동이夷  ===> 철「銕」  ,  철「銕」===>   鐵  의 古字


史記卷二

 夏本紀第二. 夏禹,〔一〕名曰文命。〔二〕禹之父曰鯀,鯀之父曰帝顓頊,〔三〕顓頊之父曰昌意,昌意之父曰黃帝。 .....

索隱孔安國云:「東表之地稱嵎夷。」按:今文尚書及帝命驗並作「禺鐵」,在遼西。「鐵」,古「夷」字也。 ...

 색은이나 공안국의 말에 의하면 동쪽바깥의 땅을 우이(嵎夷)라한다. 지금의 글자는 상서에 이르러 임금의 명에 의해 우텰(禺鐵)이라 정해졌다.  요서에 있었으며  텰(鐵)은 옛날에  夷 자 이다.


[鐵古夷字也 (철(鐵)은 옛날에는 夷자였다.)] -『사기(史記)』권2-5

[鐵夷通借作 ( 鐵(철)자 夷(이)자가 변한 것이다.)] -『한서(漢書)』권28

[銕 古文鐵 ( 銕 자는 鐵(철)자의 옛글자다. 鐵(철)은 원래 銕 자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 』


철(銕)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상(尚)나라 임금이 이족(夷族), 특히 요서(遼西)에 있는 우이(嵎夷)들을 우텰(禺鐵)이라 부를 정도였다고하니 과연 글자의 모양에서 처럼 알 수 있듯이 夷가 金의 주체라는 것을 밝히고있다.

본 홈페이지에 올린 " 東夷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글 " 에서 밝힌 것 처럼 夷字의 핵심은 활과 화살을 표현 한 것이지만 그것의 내면에는 화살촉을 쇠붙이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東夷의 우수한 제철기술이 있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진태하 박사님 강의중

 

 

 

그럼 東夷의 夷字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겠습니다.

 

夷 字의 자형을 갑골문 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殷代의 갑골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것을 예전에는 사람人字로 풀었었는데 최근에 새롭게 밝혀낸 것이  이게 활(弓) 이라는 것입니다. 즉, 활(弓) 은 평상시에 활줄을 풀어 놓아야지 계속 걸어놓으면 탄력이 떨어져서 못 쓰기 때문에  이게 활은 활인데 활 줄을 풀어 놓은 것입니다.

 

 

 

 

 

사람人字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비슷하죠? 

하지만 이 두글자는 서로 다른 글자 입니다.

 

 

 

그 다음에 맨글어 진 것이  이겁니다. 활을 그리고 그 위에 화살을 엊져서 그렸습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활과 화살이 맞죠?  이게 夷 입니다. 그래서 東夷는 동방에 활을 잘 쓰는 민족이다란 뜻이예요. 갑골문에 사람人字 와 비슷해서 혼돈이 생기므로 나중에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활위에 화살까지 얻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분명해졌습나다.

 

계속해서 ....

 

한자는 도안화 되지요?

 

 

 

 -->  

 

 

 

 이것이 나중에  이렇게 되고 그 다음에  이것이 소전체에 와서는  이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漢代에 완성 된 夷字는 큰대(大)에 활궁(弓) 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글자 처럼 보이게 되었는데 원래의 형성 과정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東夷의 조상은 치우천황(蚩尤天皇)이며 치우는 황제에 맞서기위해 갈석산에서 철(鐵)을 캐어 병장기를 만들었다. 치우는 머리에 동(銅)으로 된 투구를 쓰고 얼굴에는 철로 만든 가면을 쓰고 전쟁을 했다고한다. 그리고 길다란 창과 칼, 큰활을 가진 천하무적의 위력을 지닌 군병이 되었다. 그러기에 치우는 불굴의 전쟁신(戰爭神)이라고 불리운다. 요즘 말로하면 미국이 최첨단과학무기로 무장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아마도 동이(東夷) 중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이 치우가 아니었겠는가 !

중원의 황제 입장에서 보면 치우 처럼 철(鐵)을 캐어 병장기를 만든다는 과학적인 발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황제는 사나운 맹수들을 앞장세우고 밀어부치기식으로 대항하여 많은 인명 손상을 초래하였고 치우의 과학적인 최첨단 무기에 비하여 훨씬 낙후된 무기로 싸워야했다. 따라서 황제측의 전사들은 치우가 불화살로 공격을 해오면 그것을 끄기에만 바빴지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결국 황제는 신선들의 비법으로 이겼다고하는데 비바람을 불러오고 벽력을 치게하는 등 전형적인 원조무협소설을 보는 듯하다.

결과는 황제가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 승리의 원인이 황제의 용병술에 있었다기 보다는 역사가의 붓 끝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치우의 패배가 기정사실이라해도 치우가 만들어낸 철(鐵)로 만든 최첨단무기들이 황제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며 후일 역사가들은 치우의 과학적인 용병술에 더 큰 점수를 주고있다.     

황제가 승리한 이유를 구태여 한번 생각해보면 황제는 끝까지 버티기를 잘했으며 워낙 인구가 많았고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기때문에 비록 많은 인명의 손실은 격었지만 끝까지 민심을 잃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며 치우는 전쟁을 일으켜서 수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리적 영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또한 민심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주제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므로 생략하기로한다.

이상으로 철기시대의 전래는 바로 동이족(동철족)이 열었던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황제 . 치우시대를 거쳐 주(周)나라 이후 석가모니(釋迦牟尼) .노자 (老子) . 공자(孔子) 등 3대 성인이 출현하였다. 이른바 周시대를 전후하여 동 . 서양을 막론하고 수 많은 성인들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것은 지구의 기운이 주기적으로 융성하던 때 였기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에대해 율곤선생님의 글을 인용하고자한다. 제목은 " 壇君朝鮮 의 歷史 " 이글은 요약문 이다.

 

 

상략....

 上上古時代(壇君朝鮮 제1기) 에는 특수 계층, 즉 대부(大夫:요즘 같으면 理事官 이상) 벼슬 이상만 文民을 하게 했다. 다시말해 상층 계급만이 자연사상의 道를 열 수 있도록 했다. 개중에는 몇 사람만 지목하여 자연사상의 본체인 五行의 道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요순(堯舜) 시대에는 그 누구든 자연사상의 五行인 道를 열기만 하면 등용의 기회를 주었다. 어린아이든 목동이든 농부든 부인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여 禪을 통해 五行 즉 자연사상의 道를 열기만 하면 능력에 따라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너도나도 공부에 몰두하게 되고 불평불만하는 자가 없고 능력과 자질에 따라 등용되었다. 그런던 것이 夏나라 때 와서 禪을 통하지 못하면 스스로 외곽지대로 물러나는 일이 빈번해 졌다. 따라서 글공부는 하지 않고 무도(武道)에 힘쓰며 사냥과 활쏘기 말타기로서 힘을 길러갔다. 이때부터 흉노(匈奴)가 생기게 되고 문무(文武)의 대립이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워낙 문(文)에 의한 天道에 가까운 치세로 말미암아 큰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殷나라 때 들어와 文武의 대립 양상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桓仁시대에 온세계가 한 나라였던 것이 36개 나라로 分國化 현상이 시작되었다.
 
 은상(殷商) 때는 문무의 대립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한民族은 차츰 분열로 치닫게 되었다. 文武의 중용이 조화를 이루었다면 周나라 때 와서 약 200개의 小國이 난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말해 春秋時代가 다가온 것이다. 이것은 周나라가 망한 뒤(BC.284년. 일부 史書에는 BC.314∼256년 난왕 때까지로 되어있으나 BC.284년이 끝나고 秦 魏 韓 趙 燕 楚 齊 등 난립의 싹이 돋아나 있었다) 秦나라의 득세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가 열리게 된 것은 모권사회의 뿌리가 부권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된 동기라고 봄이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단군조선 第三期는 요(堯 BC.2357년), 순(舜 BC.2284년), 하(夏 BC.2224년), 은(殷BC.1766년), 주(周 BC.1122년)까지 그런대로 평화가 지속되어 왔다. 부분적으로는 부족간의 알력이나 사소한 세력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BC.2357년에서 BC.284년 周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2,073년간 표면적으로 태평세월을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전란이 극심했던 시대는 단군조선 第二期때 와 단군조선 第四期때 일어났다. 치우(蚩尤 BC.2707년)와 황제(黃帝 BC.2679년)간의 싸움. 친형제와 다름없는 사촌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단군조선 第四期인 진(秦 BC.255년), 한(韓 BC.255년), 조(趙 BC.255년), 위(魏 BC.255년), 초(楚 BC.255년), 연(燕 BC.255년), 제(齊 BC.255년) 때 고구려(高句麗 BC.231년), 백제(百濟 BC.213년), 신라(新羅 BC.57년)와 같이 춘추전국 시대를 맞아 전란이 끊이질 아니했다.
 
 이상하게도 壇君朝鮮 第二, 四期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극심했다. 그러나 壇君朝鮮 第一, 三期는 평화를 구가하던 시대였다. 1, 3기는 대성인들이 출현하여 선정을 했으며, 禪과 道의 정치를 자연법칙에 따라 시정(施定)했기 때문이다.
 
 특히 춘추전국시대(壇君朝鮮 第四期) 에는 큰 나라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 속에서 三國이었던 위(魏 AD.220∼265년), 촉(蜀 AD. 221∼263년), 오(吳 AD.222∼280년) 나라는 지역간의 전란이 약 40년 동안 끊일사이 없었다.


인용문 끝

 

흉노(匈奴)의 조상은 하후씨(夏后氏)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순유(淳維) 산융(山戎) 험윤( 允)  훈육( 粥) 등으로 불렀으며 하(夏)나라 이후 등장하기 시작하여 주로 중원의 북쪽지역인 감숙성 내몽골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흉노(匈奴)이전에는 단지 귀방(鬼方) . 강방(羌方)으로 불렀으며 기원전3세기 이후에 흉노(匈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하(夏 BC.2224년)나라 이후 사람들이 선통(禪通)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모든 정신적인 가치 기준을 평가하는데는 오로지 학문을 열심히 닦아 道를 여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서역을 비롯한 대륙전체에서 道를 얻기위해 사람들이 천산(天山) . 곤륜산(崑崙山) . 돈황(敦煌) 등지로 모여들었다.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중국민족기원어탑리목분지(中國民族起源於塔里木盆地)'편의 기록에 의하면

上帝之下都, 太帝之居, 天皇被跡的聖地, 我們業已知道, 所謂 開天闢地, 首出御世的盤古氏, 乃套取苗 等族的人類起源設.

천제의 도읍지 아래 太帝가 살고 있었다. 이곳은 天皇이 자리한 聖地이다. 아문(我們) 즉 君臣들의 가문에서는 道를 알기 위함을 주업(主業)으로 했다. 이런 일은 天地를 개벽(開闢)하게 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世上에 나타난 으뜸가는 사람이 반고씨(盤古氏)이다.

이렇게 기록한 것 처럼 고대인들의 학문을 통하여 道를 얻는 것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약 3천여 년전에 석가(釋迦)도 天山에서 공부하여 득도하였다. 불교의 발상지는 인도가 아니라 天山이며 天山은 환인천제(桓因天帝)께서 득도(得道)한 곳이기도하다. 기록에의하면 황제(黃帝) . 요임검(堯壬儉)도 天山에서 道를 닦았다고한다.

득도(得道)하는 것은 상고시대에 군주가 되려는 사람에게 반드시 거쳐야하는 통과의례(通過儀禮)인 셈이다.

환인천제(桓因天帝) 이후 요 . 순 시대 까지는 군주들이 道를 닦았지만, 요 . 순 시대가 지나면서 학문이(學文)이 대중적으로 내려오면서 제후들이나 일반인들에게도 道를 닦는 길이 열였다.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道를 닦는 일이 주업(主業) 인것 처럼 성행하던 시기였으므로 석가(釋迦) 실달다(悉達多)도 약 3천여 년전에 道를 얻기위해서 출가하였던 것이다.

... 주(周)나라  5대 목왕(穆王BC.1001∼BC.947년)이 등극하기 7년전에 태어났으니 이때는 기원전 968년 계축년 4월 8일이다.   ...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서역(西域) 축건사위국(竺乾舍衛國)에서 태어났으며 축건사위국(竺乾舍衛國)은 주(周)나라의 변방에 있던 제후국(諸侯國)이었다. 그러므로 천축국(天竺國)은 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일 뿐이지 인도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釋迦牟尼)가 태어난 곳도 아니다.

15세기경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 보관)에 인도에 다섯 천축국(天竺國)이 있는 것 처럼 표시하였고 史書에 천축국(天竺國)이 불교나라 처럼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된 것이다.

불교란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태어난 지역에서 중천축국(中天竺國)이 있었던 것이고 중천축국(中天竺國)에서 불교가 성행했던 것이다.

이곳은 곤륜산(崑崙山) 자락을 끼고 도는 신강성(新疆省) 남부, 옛 이전원(伊甸園) 일대와 서장성(西藏省) . 인도(印度)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쪽 이었다. 인도(印度)의 북부이기는 하지만 인도(印度)는 아니다. 다시말하지만 천축국(天竺國)은 불교가 융성했던 지역일 뿐이고 그 옛날 그 지역에서 석가모니(釋迦牟尼)가 깨달음을 얻어서 가르침을 펼쳤다는 것이다.

 

글 소개


석가의 생일은 4월 8일이 아니다  

 

율곤 이중재 저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127쪽 부터 소개함...


  서역(西域) 축건사위국(竺乾舍衛國)의 국왕의 비였던 마야부인(摩耶夫人)은 22년 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22년 후 계축년(癸丑年)에 마야부인은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도솔천(兜率天)이라는 하늘에서 신(神)이 내려와 마야부인의 입안으로 해의 정기(精氣)가 타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때 마야부인은 꿈속에서도 흰 코끼리 이빨 16개가 입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어 기쁨을 느끼는 순간, 흰 코끼리 이빨은 입 속에서 확 퍼지더니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마야부인이 계축년(癸丑年) 초에 꿈속에서 흰 코끼리 이빨 16개가 입속으로 들어가 확 퍼진 후 그 기운인 정기(精氣)가 뱃속으로 들어간 것을 느낀 후, 우측 옆구리 갈비뼈에서 어린아이가 나온 날짜가 음력 4월 8일이라고 했다.

마야부인은 이때부터 잉태의 기운이 있었다. 그러니까 계축년 초에 태몽을 꾸었고, 실달다를 낳은 것은 계축년 음력 12월 8일인 것으로 보인다.

실달다(悉達多)는 주(周)나라가 건국된 후 121년 후 5대 목왕(穆王B.C.1001∼947년) 때 태어났다.

목왕은 사서(史書)에는 기원전 1001년에 등극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필자가 역사서를 고증해 본 결과 목왕(穆王) 21년에 실달다가 27세였는데, 실달다가 7세 때 목왕(穆王)이 등극한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목왕은 등극은 기원전 962년이 된다.

목왕 때는 인도(印度)에 나라가 없었으며, 천축국(天竺國)은 한(漢,BC.206∼AD.8년) 말기에 서역(西域)을 무대로 생겨났으므로, 석가(釋迦)가 태어난 지 약 9백여 년 후에 생겼다. 그러므로 천축국과 석가는 하등 관련이 없다.

석가가 태어난 서역(西域)인 축건사위국(竺乾舍衛國)은 주(周)나라의 변방에 있던 제후국(諸侯國)에 지나지 않았다.

석가가 태어난 서역 지역인 신강성(新疆省) 일대와 감숙성(甘肅省) 일부 지역, 서장성(西藏省) 남부인 지금의 인도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부 지역과 청해성(靑海省), 그리고 사천성(四川省)과 광서성(廣西省) 광동성(廣東省) 일부 지역까지 다섯의 천축국(天竺國)의 강역이었음을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특히 남천축국(南天竺國)은 광서성 지역과 광동성, 그리고 운남성(雲南省) 일부 지역에 속해 있었고, 실달다(悉達多)인 석가가 태어난 곳은 곤륜산(崑崙山) 자락을 끼고 도는 신강성(新疆省) 남부인 옛 이전원(伊甸園:지금의 和田) 일대와, 서장성(西藏省)과 인도(印度)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쪽이 중천축국(中天竺國) 지역이었음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는 기록되어 있다.

석가(釋迦)는 마야부인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 과정에서 꿈속에 있었던 음력 4월 초 8일의 그 해가 계축년(癸丑年)이라 했으므로, 석가는 분명 기원전 968년인 계축년에 태어났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21년이 기묘년(己卯年)이라 했는데, 이때 석가의 나이는 27세였다. 왜냐하면 을유년(乙酉年) 2월 8일 묘시(卯時:아침 5시에서 7시 사이)에 득도(得道)를 한 그때의 나이가 33세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석가는 계축생(癸丑生)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마야부인이 꿈을 꾼 해가 계축년(癸丑年)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석가는 기원전 968년에 태어났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또한 기원전 968년 초에 마야부인이 태몽을 꾸고 아이를 잉태한 것으로 보아서, 음력 2월 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마야부인이 계축년 2월 초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 그 순간에 우측 옆구리에서 아이가 나온 날짜가 음력 4월 초 8일이다. 그렇다면 실달다를 잉태한 시각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계축년(癸丑年) 음력 2월 초 8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실달다가 태어난 것은 계축년 그 해 음력 12월 8일임을 알 수 있다. 마야부인이 꿈을 꾸면서 우측 옆구리에서 아이가 태어난 꿈속의 날짜가 음력 4월 초 8일이지, 실제로 태어난 날짜는 음력 12월 초 8일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꿈을 꿀 때의 날짜가 음력 4월 초 8일이고, 잉태한 날짜는 음력 2월 초 8일이며, 태어난 날짜는 음력 12월 8일이었다. 그리고 석가가 득도(得道)한 날짜 또한 을유년(乙酉年) 음력 2월 8일 새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 초 8일과는 매우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음력 8일과 23일은 만조(滿潮) 때다. 만조란 바다물이 꽉 차게 들어와 있을 때의 밀물이다. 이때의 달은 반달로 지구와는 약간 반대쪽에 있다. 다시말해 태양과 지구에 가려있는 상태를 뜻한다.

경상도에서는 밀물, 즉 만조 시기를 조금 때라 말한다. 바다물이 꽉 차 있는 때이다. 그렇다면 초 8일과 23일은 천체의 태양과 지구, 그리고 인간과의 기력(氣力)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특히 성인(聖人)이 태어난 날짜는 대개 조금날인 음력 8일과 23일의 밀물 때임을 알 수 있다.

석가가 태어나기 전 마야부인의 꿈에서도 음력 4월 8일이고, 잉태한 시기 또한 음력 2월 8일이며, 태어난 실제 생일은 음력 12월 8일이며, 도(道)를 통한 날짜도 33세 을유년(乙酉年) 음력 2월 8일이라면, 우연 아닌 필연적인 인과(因果)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기에 석가는 득도를 통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法則)을 설파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석가의 생년월일이 계축년(癸丑年) 음력 12월 초 8일이라면, 간지법(干支法)으로 따지면 계축년(癸丑年) 을축월(乙丑月)이 된다.

계축년(癸丑年)은 간지법으로 보면 시대적인 전환기인데, 석가는 시대적인 전환기를 타고 났다고 보아야한다. 그리고 을축월(乙丑月) 즉 음력 12월은 인생의 고난(苦難)을 뜻한다. 계축년이 상자목(桑 木)에 해당하므로, 석가는 굳건한 정신적 의지와 강인한 사상관으로 뭉쳐진 체력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대적 전환기에서 굳은 의지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질을 가졌다고 보아야한다.

그리고 음력 12월인 을축월(乙丑月)은 인생의 기복을 뜻하는 전환기를 말하며, 특히 을축월(乙丑月)은 인간의 고해(苦海)를 상징한다. 그러기에 석가는 연등(燃燈)이 행한 안정도(安定道), 즉 안전하게 도(道)를 통하게 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물리치고 굳이 고행의 득도길로 나서게 돈 것은,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대로 계축년 을축월인 음력 12월이었기 때문이며, 자연에 순응한 운명적인 삶의 과정임을 입증하고 있다.

다음은 당(唐)나라 태상(太常)이었던 하성식( 成式)이 저술한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 정이교론(正二敎論)에 있는 원문을 싣고 풀어보기로 한다.

論稱道經云老子入關之于天竺維衛國國王夫人名曰淸妙老子困其晝寢乘日之精入淸妙口中後年四月八日夜半時剖右腋而生墮地卽行七步擧手指天曰天上天下唯我爲尊三界皆若何可樂者於是佛道興焉.

노자(老子)가 산해관을 지나 천축유위국으로 갔을 때, 천축유위국(天竺維衛國) 국왕부인의 이름은 청묘(淸妙)였다. 노자가 곤해 낮잠을 자고 있을 때, 해의 정기가 청묘의 입속으로 들어간 후 4월 8일 밤에 청묘의 우측 겨드랑이가 갈라지더니 아이가 태어나 땅에 떨어지는 즉시 일곱 발자국을 걸어면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천상천하유아위존(天上天下唯我爲尊)이라 했다.…

본문에서 노자(老子)는 기원전 661년 전 사람이다. 그러니까 공자(孔子)보다 60년이 앞서 있다. 천축국(天竺國)인 다섯 천축국이 생긴 것은 전술한바와 같이 한(漢,BC.206년)나라 때 생겼으므로 노자(老子)보다 약 4백 년 후가 된다.

본문에서 노자(老子)가 말한 천축유위국(天竺維衛國)은 후에 생긴 천축국의 뿌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섯 천축국이 있을 때가 아니다. 노자(老子)가 말하는 천축유위국은 노자보다 302년이나 앞선 석가(釋迦)가 태어날 때 있었던 일을 노자가 말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천축유위국을 한(漢)나라 말기에 생긴 오대천축국(五大天竺國)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므로, 필자는 정확한 역사적인 고증에 의해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기록하므로 독자들은 착오없길 바란다.

본문에서 주의깊게 보아야할 것은 역시 음력 4월 초 8일은 꿈속에 있었던 날짜다. 그러기에 우측 옆구리가 갈라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어면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르키며 말하기를, 천상천하유아위존이라 했다.

요즘 불교계에서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천상천하유아위존이란 하늘 위 땅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는 뜻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꿈속에 있었던 이야기다. 본문에 있는 위존(爲尊)이란 오직 내가 존귀하다는 뜻이다. 독존(獨尊)의 홀로 존귀하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의미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천상천하유아위존의 근본적인 뜻은 전생(前生)과 현세(現世), 그리고 내세(來世)의 삼계(三界)를 거쳐 깨달음의 도에 이르렀을 때 도(道)가 흥하게 되어 즐거운 세상을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그것은 곧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주창한 환인천황(桓因天皇,BC.8937년)의 깊은 도력(道力)의 설법(說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석가(釋迦)가 어디서 태어나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꿈속에 있었던 얘기를 듣고 음력 4월 초 8일을 석가의 탄생일로 하고 있는 것은 정말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석가의 생일은 4월 8일이 아니다 


글 소개 끝

 


 

이렇게 보면 흉노(匈奴)의 거점지역과 월지국(月支國)의 거점지역은 천축국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래서 금인(金人)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 흉노(匈奴)였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당(唐)나라의 요사겸(姚思廉)이 지은 양서(梁書) 중천축국(中天竺國)편을 일부 소개해 보기로 한다.

  中天竺國在大月支東南數千里 地方三萬里 一名身毒 漢世張騫使大夏見  竹杖蜀布 國人云市之身毒 身毒天竺 蓋音字不同 其實一也 從月支高附以西南至西海 東至槃越 列國數十每國置王 其名雖異皆身毒也.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대월지국(大月支國)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 지역은 3만리(三萬里)이다. 일명 신독국(身毒國)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때의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의 사신으로 갔을 때, 그는 그곳에서 공( )의 죽장(竹杖)과 촉(蜀)의 포목을 보았다. 나라사람들은 신독(身毒)의 시장에서 샀다고 했다.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다. 비록 소리와 글자는 다르지만, 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월지(月支)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西南)으로 가면 서해(西海)가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는 반월국(槃越國)에 이른다. 수십 나라(數十國)가 있고 모두 왕을 두었는데, 그 나라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신독국(身毒國)이다.

곽박(郭璞)은 산해경에 주(註)하면서 천독은 곧 천축국이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산해경(山海經) 주(註) 발췌

海經卷十三

山海經第十八

〔海內經〕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동쪽 나라 안과 북쪽의 모퉁이에 있는 나라 이름은 조선(朝鮮)이며 조선은 천독(天毒)이며, 그 사람은 물이 있는 곳에서 살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까이 한다.


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珂案: 朝鮮已見海內北經

곽박이 이르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라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조선은 이미 <해내북경>에 보인다.


郭璞云: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王崇慶云: 「天毒疑別有意義, 郭以爲天竺國, 天竺在西域, 漢明帝遣使迎佛骨之地, 此未知是非也.」 珂案: 天竺卽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逈異, 故王氏乃有此疑. 或者中有脫文와字, 未可知也

곽박이 이르기를 「천독은 곧 천축국이니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문서와 금은 돈과 재물 등이 있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大興, 東晉,AD.318∼321년) 4년 천축(天竺)의 호왕(胡王)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라고 하였다. 왕숭경이 이르기를 「'천독'은 아마도 별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곽박은 '천축국'이라 여겼으나, 천축은 서역에 있으면서 한 명제 때 사신을 보내 부처의 뼈를 맞아들여 온 곳인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천축은 곧 지금의 인도로서 우리 나라의 서남쪽에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천독은 곧 동북쪽에 있으니 방위가 사뭇 다르기에 왕숭경이 그러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혹은 그 문귀 가운데 탈락된 문장이 있거나 잘못 전해진 글자가 있다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郭璞云: 「偎亦愛也, 音隱외反.」 王念孫云: 「宗炳明佛論<弘明集卷二―珂>引作『偎人而愛人』, 又引注文: 『古謂天毒卽天竺, 浮屠所興.』」 郝懿行云: 「愛之, 藏經本作愛人, 是也.《列子》<黃帝篇>云: 『列姑射山, 有神人, 不偎不愛, 仙聖爲之臣.』 義正與此合. 袁宏漢紀云: 『浮屠, 佛也; 天竺國有佛道, 其敎以修善慈心爲主, 不殺生.』 亦此義也, 玉篇云: 『偎, 愛也.』 本此. 又云: 『北海之偎, 有國曰偎人.』 以『偎人』爲國名, 義與此異.」 珂案: 宋本·吳寬抄本正作偎人愛人

곽박이 이르기를 「'偎' 역시 '愛'의 의미이다. 음은 隱偎反이다」라고 하였다. 왕념손이 이르기를 「종병의 명불론(홍명집 권2 ― 원가 주석)에 『偎人而愛人』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또 주석의 문장을 인용하여 『예전에 말하던 천독은 곧 천축으로 불타가 일어난 곳이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학의행이 이르기를 「'愛之'는《장경》에 본디 '愛人(남을 사랑한다)'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이 옳다.《열자·황제편》에 이르기를 『열고사산(列姑射山)에 신인이 있어 가까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선인과 성인들이 그에게 신하 노릇을 한다』 하였는데 그 의미가 바로 여기와 부합한다. 원굉의《한기》에 이르기를 『부도는 부처이다. 천축국에 불도가 있으니 그 가르침은 착하고 자비심 있는 마음을 닦는 것을 위주로 하며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역시 여기서의 뜻과 같다.《옥편》에 『偎는 愛를 말한다』고 한 것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북해의 모퉁이에 외인(偎人)이라는 나라가 있다』라 하여 『偎人』을 나라의 이름으로 여겼으니 그 의미가 여기와 다르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송본과 오관의 필사본에는 '偎人愛人'으로 바로 되어 있다.


산해경(山海經) 주(註) 발췌 끝

 

곽박(郭璞)은 천독(天毒)이란 명칭이 천축(天竺)으로 발전 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이(東夷)의 일부 세력이 천축(天竺)으로 되었고  동이(東夷)는 구이(九夷)로 나누어져 대륙전체로 퍼져나갔다고 보아야한다.

수경주소(水經注疏)의 하수(河水)편에서는 천축제국(天竺諸國)은 은(殷)나라 백성들이 남쪽 또는 서역쪽으로 가서 천축국(天竺國)을 이루었다고 적고있다. 본래 천축국(天竺國)은 인도(印度)에 없었다는 사실을 정사(正史)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들은 은(殷)나라 백성들 이라고 적고있다. 그렇다면 석가(釋迦)의 선조(先祖)는 은(殷)나라 였음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외에 보충자료로서 천축국에 대해서 조금만 더 언급해 보기로 한다.

 

 

 

천축국(天竺國)의 발생

출전 :  律坤 著  " 불교의 뿌리역사 . 佛敎는 인도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


중략....

천축국(天竺國)을 살펴보기로 한다.

송(宋)나라 때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通志)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天竺後漢通焉卽漢時捐毒國也 從月氏高附以西南至西海東至磐越國 皆天竺之地 天竺有別城數百城置長 有別國數十國置王 雖各小異而俱名天竺 都臨恒河 名迦毗梨河 本名新淘源出崑崙 分爲五派總爲恒河其水. 中略

천축국(天竺國)은 후한(後漢) 때 있었던 나라다. 한(漢)나라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다. 월씨(月氏)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西南)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고, 동쪽으로 가면 반월국(磐越國)에 이른다. 모두가 천축국 땅이다. 천축에는 독자적인 성(城)이 수백이 있는데, 각 성에는 장(長)을 두었다. 독자적인 나라도 수십이 되었는데, 왕(王)을 두었다. 비록 그 이름들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천축(天竺)의 나라였다. 도읍지에는 항하(恒河)흐르고 있는데, 강 이름은 가비리하(迦毗梨河)였다. 본래 그 이름은 신도(新淘)로서, 원 물줄기가 나오는 곳은 곤륜산(崑崙山)이다. 이곳에서 다섯 물줄기가 내려오다가 합쳐져 항하(恒河)의 물이 된다.


통지(通志)의 본문을 보면 한(漢)나라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라고 했다. 연독국은 본래 신독국(身毒國)이다. 신독국의 원 뿌리는 동이국(東夷國)이 조상으로 되어있다.


당(唐)나라 때 두우(杜佑)가 지은 통전(通典)에서 천축국(天竺國)을 살펴보기로 한다.

天竺後漢通焉 卽前漢時身毒國 從月氏 高附國以西南至西海 東至盤起 皆身毒之地 身毒有別城數百 城置長 有別國數十 國置王 雖名小異 而俱名身毒 都臨恒河 一名迦毗梨河 靈鷲山 胡語曰耆  山  山有靑石 頭似鷲鳥 其時皆屬月氏 月氏殺其王而置將 令統其人…

천축은 후한(後漢) 때 일컬어졌고, 즉 전한(前漢) 시에는 신독국(身毒國)이다. 월씨(月氏)의 고부국(高附國)에서 서남으로 가면 서해(西海)에 이르고, 동으로는 반기(盤起) 즉 반월국(盤越國)이 있는데, 모두 신독국(身毒國)의 땅이다.

신독국(身毒國)은 독자적인 성(城)을 수백 개 가지고 있으며, 성(城)에는 장(長)을 두었다. 그리고 독자적인 나라 역시 수십 국(數十國)으로, 나라에는 왕을 두었다. 비록 그 이름들은 다르지만 모두 신독(身毒)에 속해 있었다. 도읍지에는 항하(恒河)에 흐르고 있는데, 일명 가비리하(迦毗梨河)라고도 한다. 영취산(靈鷲山)이 있는데, 몽고말로는 기도굴산(耆  山)이라 한다. 산에는 푸른 돌이 있는데, 산 정상이 흡사 독수리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당시에는 모두 월씨(月氏)에 속해 있었다. 월씨는 천축의 왕을 죽이고, 그곳에 우두머리를 두고 그들을 다스렸다.


이를 통해 보자면 전한(前漢 B.C.206∼AD.8년) 때는 연독국(捐毒國)이나 신독국(身毒國)으로 불리었고,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와서 천축국(天竺國)으로 불렸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월씨국(月氏國) 동남(東南)에 있다고 했는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 월씨국을 찾아보았다.

月氏.
古國名. 先居甘肅西境. 漢時爲匈奴所破. 西走阿母河. 臣服大夏. 都河北. 曰大月氏. 留居故地者爲小月氏. 大月氏强盛時. 奄有印度恒河流域. 克什米爾. 阿富汗及蔥嶺東西地…

월씨(月氏)는 옛 나라 이름이다. 처음에는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경계에 거주했다.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에게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도망을 간 곳이 아모하(阿母河) 강 주변이었다. 월씨(月氏)는 그곳에서 대하(大夏)라는 나라의 신하(臣下)로 복종했다. 도읍지는 아모하(阿母河)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들을 대월씨라고 한다. 그러나 옛 땅(감숙성의 서쪽 경계)에 계속 머물러 살고있는 이들은 소월씨라고 불렀다. 대월씨가 강성했을 때에는 인도 항하 유역, 극십미리, 아부한과 총령 동서 지역까지 점령을 했다…


大夏. 중국고금지명대사전 69쪽

晉時十六國之一. 匈奴赫連勃勃背秦稱大夏天王. 據朔方通萬城. 有今陝西西部寧夏東南部及內蒙古鄂爾多斯之地…爲吐谷渾所滅

진(晉)나라 때의 19국 중의 한 나라이다. 흉노의 혁연발이 있었는데, 그가 진(秦)나라로부터 등을 돌리고 나라를 세워 대하(大夏)의 천왕으로 칭하고, 북방 지역의 1만 성(城)을 차지했다. 지금의 섬서성 서부, 영하 동남부와 내몽고 곽이다사의 땅이다.…토곡혼에 의해 멸망되었다.

 

천축국(天竺國)의 발생은 전한(前漢)시 신독국(身毒國)의 후예(後裔)로서 후한(後漢) 때 천축국(天竺國)이 생겼음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보는 것처럼 천축국(天竺國)은 인도(印度)가 아님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만 천축국이 후한(後漢) 때 와서 발생한 것으로 보아 불교는 고대로부터 곤륜산(崑崙山) 일대에서 발생하여 후한(後漢) 때의 천축국으로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천축국(天竺國)의 성(城)은 수백 군데로 되어있고 따라서 나라들도 수십 국이라고 적고있다. 이제까지 중천축국(中天竺國), 남천축국(南天竺國), 동천축국(東天竺國), 그리고 서천축국(西天竺國)과 북천축국(北天竺國) 이와같이 오천축국(五天竺國)만 있는 게 아니라 수백 곳의 성(城)과 수십 개의 나라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지금의 인도(印度) 동북부에 있는 항하(恒河) 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천축국(天竺國)은 다섯 나라가 아닌 수십 국이 있었음을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기에 후한(後漢) 초기에 천축국은 중국 대륙의 서북부와 서부, 그리고 곤륜산(崑崙山) 남부와 서장성(西藏省), 청해성(靑海省), 사천성(四川省) 서부, 운남성(雲南省) 동남까지 광범위한 지역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다섯 천축국 중 가장 불교가 성한 나라는 중천축국이다.


후한(後漢 A.D.25∼220년) 때부터 진(晉 A.D.265∼420년)나라 때까지 천축국은 번성했다. 그후 위진(魏晉)시대에 다섯 천축국은 일시 쇠퇴하였으나, 양(梁)나라 무제(武帝 A.D.502∼519년) 천감(天監) 초에 천축국에서는 비단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후위(後魏) 선무제(宣武帝 A.D.500∼503년) 때에는 남천축국에서 준마를 바쳤다고 되어 있다.

천축국에서는 담비(貂) 표범(豹)등의 가죽이 많이 생산되었고 물소 코끼리 등이 많았다는 기록이다.

천축국은 고원지대이므로 금 동 철 아연 주석과 바위틈에서 채취된 꿀벌 생강 옥 산초 향 산호 과일 감귤 같은 과일 종류가 많이 생산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서역의 대진(大秦)과 남쪽에 있던 안식(安息:월남지방)과 부남(扶南)국간에 무역을 활발히 했다는 기록이다.

특히 천축국에서는 문자가 발달되어 천문(天文)과 역서(曆書:달력과 역술서적), 그리고 산술(算術) 서적 등이 매우 발달되었다. 또 전투용의 활, 창, 갑옷과 병법과 지리가 발달되어 고도의 문명국임을 알 수 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 A.D.605∼617년) 때는 서역의 토번국(吐蕃國) 외 여러 서역국들과의 교역이 활발했지만 유독 천축국과는 교역이 불통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다섯 천축국은 당(唐)나라가 들어서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나라 초기부터 서역 평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현장(玄裝) 법사가 답사할 때만 하더라도 중천축국 속에 건타라국(建馱羅國)이 있었다. 건타라국 주위에는 가엽미라국(迦葉彌羅國)이 서북으로 있었고 돌궐(突厥)도 있었다. 돌궐 주위에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어 계빈( 賓) 왕과 돌궐 왕들은 강한 군사를 가지고 있었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위서서역전(魏書西域傳)》《고승전(高僧傳)》《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의하면 서북부 주위로는 파사(波斯), 반반(盤盤), 계빈( 賓), 언기(焉耆), 구자(龜慈), 소륵(疏勒), 고묵(姑墨), 우전(于 ), 구반(句盤) 등의 강대국이 있었다. 이들 나라 남동쪽에는《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제5권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허황옥(許黃玉)의 조국인 아유타국(阿踰 國)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니까 아유타국은 중천축국의 제후국인 셈으로 건타라국의 옛 도읍지에 인접해 있었던 나라이다. 이들 나라는 모두 중천축국의 속국이었으며 불교의 본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유타국은 대승불교(大乘佛敎)를 숭앙하고 있었음을《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서 밝히고 있다.

오천축국(五天竺國)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통전(通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天竺後漢通焉. 卽前漢時身毒 國初張騫使大夏 見 竹杖蜀布 問曰安得此 大夏國人曰 吾賈人往身毒國市之 卽天竺也 或云摩伽  或云婆羅門 在 嶺之南 去月氏東南數千里 地方三萬餘里 其中分爲五天竺 一曰中天竺 二曰東天竺 三曰南天竺 四曰西天竺 五曰北天竺 地各數千里 城邑數百 南天竺際大海 北天竺距雪山 四周有山爲壁 南面一谷 通爲國門 東天竺東際大海與扶南 林邑 接 但隔小海而已 西天竺與 賓 波斯相接 中天竺據四天竺之閒 國 有王 漢時又有捐毒國 去長安九千八百里 去都護理所二千八百里 南與 嶺相連 北與烏孫接 衣服類烏孫 隨水草 故塞種也 顔師古云 捐毒卽身毒 身毒則天竺也 塞種卽釋種也.

천축은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있었다. 전한(前漢 B.C.206∼AD.220년) 때는 신독국(身毒國)이다. 전한 초에 장건(張騫)이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공( )의 죽장(竹杖)과 촉(蜀)의 포목을 보았다. 어떻게 이것을 얻었으냐고 대하국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신독국의 시장에 가서 사왔다고 했다. 신독국이 곧 천축국(天竺國)이다. 천축을 혹 마가타(摩伽 )라고도, 바라문(婆羅門)이라고도 했는데, 총령( 嶺)의 남쪽에 있었다.

즉 총령은 곤륜산맥(崑崙山脈)을 뜻한다. 이곳은 신강성(新疆省) 남부이며 서장성(西藏省) 북부지역을 말한다. 월씨국(月氏國)에서 동남으로 수천리(數千里) 떨어진 곳인데, 지역은 3만여리(三萬餘里)였다. 여기서 월씨국(月氏國)에서 동남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고 그 강역이 3만여 리라고 한다면, 인도(印度) 항하(恒河) 북쪽으로 천축국이 걸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서장성(西藏省)에서 운남성(雲南省), 감숙성(甘肅省) 북부, 청해성(靑海省) 등지에 걸쳐 있는 거리라고 보아야한다. 한반도 전체가 3천리(三千里)임을 비교해 보면 10배가 되는 강역이라고 보아야한다.

천축(天竺)은 다섯 천축으로 나누어졌다. 첫째 중천축(中天竺), 둘째는 동천축(東天竺), 세째는 남천축(南天竺), 네째는 서천축(西天竺), 다섯째는 북천축(北天竺)인데 각각 그 지역이 수천리(數千里)였다. 그리고 성(城)과 읍(邑)은 수백(數百) 곳이었다. 남천축국은 대해(大海)와 접해 있었다. 북천축국은 설산(雪山) 가까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막혀 있는데, 남쪽으로 계곡이 있어 나라의 문으로 통하고 있다. 동으로는 동천축국(東天竺國)이 있었는데 대해(大海)의 경계라고 했다.  

여기서 동쪽 지경에 있는 큰 바다라면 지금의 광동성(廣東省)이나 복건성(福建省) 가까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한다. 특히 동천축국은 부남(扶南)과 임읍(林邑)과 인접해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부남(扶南)은 베트남의 접경지대까지를 말하며, 임읍(林邑)은 태국(泰國) 북부지역을 뜻한다. 그리고 부남(扶南)과 임읍(林邑)은 소해(小海)로 막혀 있다고 했다.


서천축국(西天竺國)은 계빈( 賓)과 파사(波斯)와 서로 접해있다고 했다. 계빈( 賓)은 신강성(新疆省) 접경 지대이며, 파사(波斯)는 신강성과 파미르 고원과의 접경지대에 있다. 중천축국(中天竺國)은 네 천축국 사이에 있었다. 오천축(五天竺)에는 모두 왕(王)이 있었다.


한(漢)나라 때는 또한 연독국(捐毒國)이 있었는데, 장안(長安)으로부터 9,800리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9,800리라고 한다면 신강성(新疆省) 남부에 있는 지금의 화전(和田)인 옛 이전원(伊甸園) 일대를 말한다.

 도호부가 있는 곳으로부터는 2,800리 떨어진 곳이다. 남쪽으로는 총령( 嶺)인 곤륜산맥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오손(烏孫)과 접하고 있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天山)과 알타이 산록 일대에 있었다.

연독국 사람들의 의복은 오손 사람들과 비슷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이동했다. 옛날의 색종(塞種)이다. 안사고(顔師古)의 말에 의하면 연독(捐毒)은 즉 신독(身毒)이며,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라 했다.

색종(塞種)은 즉 석종(釋種)을 말한다. 말하자면 깨달은 사람들의 가문, 석씨(釋氏) 가문의 혈족이라는 말이다.


천축국(天竺國)에 대한 고증본은 다음과 같다.

태평어람(太平御覽)·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통지(通志)·후한서(後漢書)·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위서(魏書)·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구당서(舊唐書)·당서(新唐書)·양서(梁書)·책부원구(冊府元龜)·송서(宋書)·법화경(法華經:일명 妙法蓮華經)·금강경(金剛經)·아함경(阿含經)·반니원경(般泥洹經)·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중본기경(中本起經)·소품반야파라밀경(小品般若波羅密經)·통전(通典)  등

 


천축국(天竺國) 보충자료 끝

 


본문 시작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의 서문에 서역에 있었던 대월지국(大月支國)에서 불경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하고있는데 그 이전의 기록에는 사신만 왕래했지 불경(佛經)이나 금인(金人)을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흉노(匈奴)가 제천금인(祭天金人)하였다는 기록이 한서(漢書)에 있고 한(漢) 무제(武帝)때 장군 곽거병(藿去病)은 흉노로 부터 금인(金人)을 빼앗아 부수어버렸다고하였으니 금인은 흉노(匈奴)의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천신을 형상화한 것이 분명하였을 것이다.

천신(天神)은 유목민족의 신(神)이다. 바로 단군(壇君)을 뜻한다. 단군(壇君)은 제터단자를 써야한다. 담국이 단국이고 단국(口國= 에운담 + 나라국)이며 한국(桓國)이다.

태고시대(太古時代)에 天山일대의 탑리목사하(塔里木斯河)의 유역(流域)에 한국(桓國)이었다.

단군(壇君)의 본 뜻은 봉선(封禪)을 주관하는 최고의 통치자 즉 천자(天子), 천산(天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땅위의 최고통치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역대 단군들은 모두가 도통(道通)을 하였기 때문에 道를 통한민족이라고해서 배달(倍達)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요즘은 단군(壇君)하면 바로 무당이라고하는 사람도 적지않다. 틀린말은 아니라고 본다.그것은 유목민사회에서 단군의 역활이 샤머니즘화 되고 무당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런 유습으로 인하여 월지국(月支國)에 금인(金人)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월지국(月支國)은 흉노(匈奴)에 의해서 서역으로 쫒겨나게 되지만 그 흥망사는 결코 흉노(匈奴)의 세력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필자는 이 모두를 흉노(匈奴)로 보고있다.

이장에서 대월지, 소월지, 대하, 흉노, 천축국 등을 세분화해서 구별하면 금인(金人)의 정확한 출현을 밝히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흉노라는 유목민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면 필자는 단연코 금인(金人)의 고향은 흉노(匈奴)라고 말할 것이다.

흉노(匈奴)는 공부 못하고 머리가 나쁘다고해서 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유배를 당했거나  전쟁으로인한 난리를 피해서 달아난 사람들이 중원의 북쪽 미개척지로 쫒겨나서 형성된 종족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몽골의 선조가 되기도하고 돌궐 . 부여 . 고구려 등으로 그 뿌리가 이어진다.

흉노(匈奴)가 생기기에 앞서 치우시대부터 이곳은 제철기술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치우황제가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 황제(黃帝)를 제압했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중원의 북쪽은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무려 1만 2천년전에 발생한 흑피옥문화에서 밝혀진것 처럼 석재를 가공하는 기술과 돌을 다루는 기술 등 막말로 공부빼고는 못하는게 없을 정도로 과학기술에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흉노(匈奴)제국은 머리대신 무력으로 일어선 나라이고 단군의 전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제천(祭天)하였으며 그 숭배의 대상으로 금인(金人)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 기술의 바탕은 바로 치우황제의 동두철액(銅頭鐵額)까지이어져있다.

 

 

 

천산일대 東夷地 그림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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